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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5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중국에서 2400년전 수세식 화장실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유물 발굴
2022년 대통령선거 유세 버스 일산화탄소 추정 2명사망 1명 의식불명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 유세 버스에서 당원 등 2명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지고 1명이 병원으로 이송됐다. 15일 오후 5시 20분쯤 충남 천안시 신부동에 정차해 있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 유세 버스에서 50대 운전기사 A 씨와 60대 당원 B 씨가 숨졌다 A 씨 등은 유세용 LED 전광판을 켜기 위해 차량 내에 자가발전 장치를 돌렸고, 이 과정에서 일산화탄소가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강원도 원주 유세 버스에서도 운전기사 C 씨가 똑같은 사고로 병원으로 이송돼 의식이 없는 상태다.
2021년 재야운동가 백기완 사망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 ~ 2021년 2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시문학가 겸 소설가이고 시민사회운동가, 통일운동가로, 정치인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한 이래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장산곶매 이야기", "우리 겨레 위대한 이야기" 등을 써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7년의 제13대와 1992년의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중도사퇴하거나 낙선하기도 했다.
2017년 인도 로켓 1발로 인공위성 104개 쏘아올림
2014년 부산 앞바다에서 유류공급선과 화물선 충돌 기름(벙커c유 237㎘) 유출
2013년 러시아에 운석우 쏟아져 1천여 명 부상
2013년 혜민 스님 지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비소설 단행본 최단기간 200만부 판매 돌파
2012년 충남 서산 엽총 난사 사건
2012년 2월 15일 오전 충남 서산시 수석동 농공단지 내 한 공장에서 30대 남성이 엽총을 난사해 1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다. 공장 화장실 출입문에 총알 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충남 서산의 공장 주차장에서 30대 남자가 옛 상사에게 수렵용 엽총을 난사해 숨지게 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범인 성모(31·무직)씨는 경찰에서 “공장에 다니던 시절 나를 괴롭힌 직원들에게 보복하려고 총을 쐈다”고 말했다.
성씨는 15일 오전 9시 40분쯤 서산시 수석동 농공단지 내 자동차 시트 제조공장인 D산업에서 무쏘 승용차에 탄 채 엽총 10발(산탄 100발)을 난사해 공장 직원 최모(38)씨가 가슴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총을 맞아 숨진 최씨는 3년 전 범인 성씨가 수습사원으로 3개월 정도 일하던 이 공장에서 같은 파트에서 근무한 상급자로 알려졌고, 나머지 부상자 2명은 성씨와 모르는 사이로 조사됐다.
성씨가 범행에 사용한 엽총은 멧돼지·고라니 사냥용인 길이 1m의 이탈리아제 엽총(베넬리 노바 산탄식 12구경)으로 본인 소유로 등록돼 있었다. 성씨는 이날 오전 8시 50분쯤 엽총을 보관한 당진경찰서 중앙지구대를 찾아 “수렵하러 간다”며 총을 인수받았다. 경찰에 붙잡힐 당시 성씨는 허리에 직경 1㎝가량인 탄환 111발을 두르고 있었으며 배낭에도 담아 놓는 등 총 258발의 탄환을 소지했다.
아버지 소유의 차를 몰고 D공장 주차장에 차량을 세운 성씨는 오전 9시 40분쯤 작업 준비를 하던 3명의 직원을 향해 10발을 난사했다. 오른팔에 관통상을 입은 트럭기사 문씨는 “짐을 실으려고 나오다 탄환에 맞았다”면서 “총격 5분 전쯤 범인이 공장 앞에 서 있는 것을 봤지만 총을 쏠 줄은 몰랐다”고 했다.
범인은 공장 인근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를 거쳐 서울 방향 상행선을 타고 달아났다.
당진IC 부근에서 범행 차량을 따라잡은 경찰과 고속도로순찰대는 5대의 차량으로 20㎞에 걸쳐 추격전을 벌였다. 성씨는 추격 과정에서도 3차례 엽총을 발사했다. 그 중 1발은 경찰 스타렉스 차량에 맞아 앞좌석 유리창이 깨졌다. 추격전을 눈치 챈 일부 대형 트레일러가 범행 차량의 진로를 막아 추격전을 도왔다.
경찰은 서해대교를 막 지난 지점에서 차량을 5차례 들이받아 멈추게 한 뒤 전기총(테이저 건)을 발사해 범인을 잡았다. 성씨는 도주 중 경찰차를 향해 처음 총을 발사한 뒤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2011년 리비아 벵가지시에서 반정부 시위 발생
2011년 브라질 축구선수 호나우두 은퇴
호나우두가 2011년 2월 11일 은퇴를 선언했다. 1993년 데뷔 이후 18년 동안 국가 대표팀에서 97경기 62골을 터뜨렸고 프로선수로서 466경기 326골을 기록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외곽 빈민가에서 태어난 호나우두는 17세 때 크루제이루에 발탁돼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첫해에 14경기 12골을 기록하며, 1994년 월드컵 대표팀에 18세 최연소 선수로 발탁되었다. 이후 에인트호번(네덜란드), FC바르셀로나(스페인)에 입단했으며, 1996~1997시즌에는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49경기 47골을 기록했다. 1996년 20세 나이로 최연소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 첫 출전한 이래, 1998 프랑스월드컵, 2002 한일월드컵, 2006 독일월드컵에 출전하여 월드컵 통산 15골을 기록하며, 게르트 뮐러(14골·독일)에 앞선 통산 득점 1위를 기록했다. 그 중 2002 한일월드컵에서 8골을 넣으며 브라질에 월드컵 우승을 안겼다.
2011년 아랍의 봄의 일부인 리비아 내전이 일어났다.
2010년 벨기에 통근열차 충돌 사고
2010년 2월 15일 오전(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인근에서 통근열차 2대가 러시아워 때 정면으로 충돌, 최소 18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했으며 부상자 중 3~4명은 위중한 상태이다.
이 사고로 브뤼셀과 파리, 암스테르담을 오가는 고속철도 운행이 중단되는 등 서유럽 일대의 철도 교통이 대혼선을 빚었다.
현지 언론과 외신 등에 따르면 벨기에 남서부 키브랭을 출발해 동부 리에주로 향하던 열차와 브뤼셀 동부 뢰벤을 출발해 남부 브레느-르-콩트로 운행하던 열차가 오전 8시30분(한국시간 오후 4시30분)께 브뤼셀 남서쪽 할레 시(市)의 바위징엔지역에서 눈이 내리는 가운데 정면 충돌했으며 이는 당시 열차 한 대가 정지신호를 무시했지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열차의 앞 차량은 정면으로 부딪혀 공중에서 찌부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열차 위의 전선이 심하게 파손됐다.
발칸반도 방문 일정을 단축한 이프 러테르머 벨기에 총리는 불과 3주 전 주택가에서 가스폭발로 14명이 사망한 이후 발생한 이번 사고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밝혔다.
이번 사고는 1974년 18명이 사망한 열차사고 이후 최악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앞서 벨기에에서는 지난 2001년 브뤼셀 동부에서 여객열차 2대가 정면 충돌해 8명이 사망했고, 지난 2008년에는 브뤼셀 교외에서 여객열차가 화물열차와 충돌해 40여명이 다쳤다.
한편 이번 사고로 프랑스와 벨기에 간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됐다.
2007년 미의회 첫 위안부 청문회
2007년 2월 15일 오후 2차 세계대전 종군위안부의 증언을 듣는 청문회가 미 의회 사상 처음으로 하원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원회에서 열렸다.
아·태 소위의 에니 팔리오마배가(Faleomavaega) 위원장은 “일본군 성노예는 일본 정부가 저지른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 사건이며, 집단강간·강제낙태·정신적 모욕·성적 학대 등으로 인한 신체 장애와 학살 등을 수반한 전례 없이 잔인하고 중대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이날 청문회에는 한국인 김군자(80)·이용수(79), 네덜란드인 얀 러프 오헤른(O’Herne.84) 할머니 등 3명과 이번 결의안을 제출한 민주당의 마이클 혼다(Honda) 하원의원, 서옥자 워싱턴 종군위안부대책협의회장, 민디 코틀러(Kotler) 아시아정책포인트소장 등이 증인으로 나섰다.
오헤른 할머니는 “우리에겐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면서 “일본 정부가 공식 사과할 때까지 전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청문회가 열린 레이번빌딩 2172호에는 한국과 일본의 취재진과 인권단체 관계자 등 400여명이 몰렸다.
2004년 개성공단에서 첫 제품 생산
2001년 32년 만의 기습 폭설로 서울-중부지역 마비
서울지역에서 32년 만에 최고 적설량을 기록하는 등 2월15일 새벽부터 서울·경기·강원·충청 등 중부지역에 폭설이 내려 일부 도시 기능이 마비됐다.
시간당 적설량 5cm에 육박하는 기록적인 폭설로 도시 지역에서는 하루 종일 교통 지옥이었다 . 철도의 경우 전 상행선과 하행선에서 운행이 이날 밤 최대 4시간까지 지연되는 극히 이례적인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 이날 오후 4시45분 출발 예정이었던 부산행 무궁화 243호 열차는 8시45분에야 가까스로 떠났다 . 김포공항은 국내선 운항이 전면 중단되는 등 교통 대란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서울시교육청은 시내 초·중·고교의 등교 시간을 1시간 늦췄으며, 경기도교육청은 관내 22개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중앙재해대책본부는 제설작업이 늦어지자 서울·경기·인천·강원 지역 공무원의 출근시간을 오전 8시로 1시간 앞당겨 제설작업에 돌입하도록 했다.
2000년 한국 첫 뇌사자 판정
뇌사를 공식 인정하는 ‘장기 이식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이후 첫 뇌사판정자가 나왔다.
인천 가천의대 부속 길병원은 2000년 2월 15일 “지난 10일 뇌출혈 증세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박모(38·회사원)씨가 14일 1차 뇌사 판정에 이어 오늘 오전 최종 뇌사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병원측은 이날 신경과 전문의를 포함한 의사 6명과 목사 1명 등 7명으로 구성된 ‘뇌사판정위원회’를 열어 박씨의 상태를 점검한 뒤 참석자 전원일치로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오전 11시, 첫 공식 뇌사판정위원회가 열린 인천 길병원 회의실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이의가 없느냐”는 위원장 윤정철 부원장의 질문에 나머지 6명의 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들은 곧바로 박모씨에 대한 ‘뇌사판정서’에 서명했다. 국내 처음으로 뇌사가 공식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뇌사판정은 1998년 6월 국회에서 ‘장기이식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면서 뇌사인정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이후 2000년 2월 9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친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시행안’이 발효돼 이날 첫 뇌사자가 나오게 됐다.
1971년 핀란드가 처음 뇌사를 공식 인정한 이래 2000년 2월 현재까지 뇌사를 공식 인정하는 국가는 미국-영국-일본 등 16개국이다.
1997년 북한에서 귀순한 이한영 피살
1996년 2월 모스크바를 빠져나와 서방으로 탈출하려고 시도했던 북한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씨가 1997년 2월 15일 밤 분당의 대학선배 아파트로 들어가다가 정체불명의 괴한으로부터 벨기에제 권총 2발을 머리와 가슴에 맞고 살해됐다.
이씨는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로 지난 1982년 스위스에서 한국대사관을 통해 귀순해왔다. 이씨는 그뒤 한국에 정착해 생활해오다 1995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살던 자신의 어머니 성혜랑씨와 전화로 통화를 시작한 후 성혜림-혜랑 자매의 한국으로의 탈출과정을 도왔었다.
1960년 평양에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이씨는 북한에서 가장 성분이 좋은 집안 출신들이 다니는 만경대 혁명학원에 진학했다. 만경대학원을 중퇴한 이씨는 1976년 모스크바 종합대로 유학가 1981년까지 노어노문학을 전공했다. 잠시 귀국했다가 1982년 9월 불어 연수를 위해 스위스로 나온 그는 평소 꿈꾸던 미국생활이 북한여권으로 불가능해지자 스위스 주재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한 것이 계기가 돼 결국 한국으로 귀순했다.
이씨는 귀순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공부하고, 이후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바탕으로 KBS 국제방송국 PD, 무역업 등을 하면서 한때 큰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귀순 초기 남한사회에 대한 부적응을 고민하다 수면제 자살을 기도하고, 이후 사업 실패의 좌절을 겪으면서 방황하는 등 전반적으로는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안기부는 1997년 11월 20일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 사건을 발표하면서 “남파간첩 최정남을 조사한 결과, 이한영씨 피격 사망사건은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테러 전문요원인 최순호 등 2명의 특수공작조가 사건발생 한달 전에 남파돼 일으킨 사건으로 나타났다” 고 밝혀 충격을 던져주었다
1995년 연합TV, 첫 시험방송
1995년 한국-러시아-일본 잇는 국제 해저 광케이블 개통
한국-러시아-일본을 연결하는 해저광케이블이 1995년 2월 15일 오전 개통돼 본격적인 운용에 들어갔다. 정보통신부는 이날 서울 광화문 청사에서 홍재형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 경상현 정보통신부장관, 장경우 국회체신과학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러-일과 동시에 개통식을 가졌다.
총 연장 1천7백61㎞로 1억 달러를 들여 지난 1994년 5월 착공된 한-러-일 해저광케이블은동시에 1만5천1백20명이 통화할 수 있는 대용량이다. 이 광케이블이 개통됨으로써 우리나라와 러시아간 전화통화적체가 완전 해소되고 영상-컴퓨터 통신도 가능하게 됐다.
이날 개통기념식 후 홍부총리와 소스코비치 러시아 제1부총리, 고노 요헤이 일본 부총리 겸 외상이 각기 자기나라 기념식장에 직접 참석, 서울·하바로프스크·동경을 연결하는 3국간 영상회의를 통해 기념메시지를 교환하고, 이를 계기로 상호우호협력관계를 강화해나갈 것을 다짐했다.
1993년 서울오페라극장 개관
1993년 미칼 코바치, 슬로바키아 대통령에 당선
슬로바키아 의회는 15일 미칼 코바치 전 체코의회의장(62)을 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에 선출했다. 경제학자인 코바치 신임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메치아르 현 슬로바키아 총리와 절친한 사이로,집권 민주 슬로바키아 운동당 후보로 출마했었다.
1991년 옛 동독 주둔 소련군 550명, 독일에 망명 요청
1989년 소련, 아프가니스탄 철수 완료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1979년∼1989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소 냉전시대에 소비에트 연방이 치른 마지막 전쟁이었다. 소련군이 브레즈네프 시절에 침공했다가 결국 실패하고 고르바초프 때 철수한 전쟁이었다. 이 침공으로 소련은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과 대소 경제제재 조치 등 서방측의 강력한 반발을 자초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이 중동지역 및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이른바 남진정책의 통로로서 역사적으로 소련에게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중립을 지켜온 아프가니스탄은 자국과 사이가 안좋은 파키스탄이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자 소련에 기울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위기를 호기로 삼아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친소세력을 형성하고 영향력을 증대해 나갔다.
아프가니스탄은 1978년 4월 누르 모하메드 타라키가 쿠데타를 일으켜 친소정권을 수립했다. 타라키 정권은 국내정국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반대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1979년 8월 수상 하피줄라 아민이 일으킨 쿠데타로 살해됐다. 아민은 `아프가니스탄의 티토`를 자처하며 소련의 내정간섭을 비난하고 소련의 지원을 거절했다. 그러나 아민이 취약한 국내 지지기반과 불안한 경제상태로 흔들리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1979년 12월 소련군은 정예부대를 비밀리에 아프가니스탄에 보내 아민을 비밀리에 제거했다.
후임으로는 철저한 친소주의자인 카르말을 내세웠다. 소련군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게릴라들을 소탕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부군 가운데 반군 게릴라에 합류하는 군인들도 속출했고 이들의 무기가 반군 게릴라들의 주요 무기공급원이 됐다.
아프가니스탄 반정부 게릴라들은 역사적 명칭을 따서 자신들을 무자헤딘(이슬람의 자유전사)으로 불렀지만 이들은 통합되지 못했고 언제나 분열되어 있었다. 무자헤딘은 소련군을 축출할 역량도 비전도 없었지만 전투력만은 뛰어났다. 주로 험준한 산악에 의존하는 이들의 게릴라 전술에 소련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유럽지형에 맞게 훈련받은 소련군들은 아프가니스탄의 험악한 지형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체코사태처럼 금방 해결될 줄 알고 침공했으나 전투가 장기화되고 소련군 사기도 극도로 저하되자 소련군은 결국 전쟁 실패를 인정하고 철군의 길을 모색했다.
1988년 4월 15일 제네바에서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소련군은 그해 5월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1989년 2월 15일 소련군의 철군이 완료됨으로 9년간의 승산없는 소모전도 막을 내렸다. 소련군은 이 전투에서만 1만5천여 명이 전사했으며 3만7천여 명이 부상했다.
1988년 원혜준양 유괴범 함효식 자수
1988년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사망
1918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MIT공대를 졸업한 후 프린스턴대에서 이론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대에는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에도 참여했다. 1945년부터 코넬대와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고 1965년에는 양자전기역학의 초기 공식화에 대한 부정확성을 수정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88년 예술의전당 음악당과 서예관 개관
국내최초의 종합예술센터인 예술의전당이 1단계공사를 마치고 1988년 2월 15일 전두환 대통령 내외를 비롯, 각계 인사 1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서초구 서초동 우면산 기슭 현장에서 개관식을 갖고 문을 열었다.
개관식은 예술의 전당 이사장의 건립현황보고, 기념휘호비 제막, 서예관 개관기념 `한국서예 1백년전`, 음악당 콘서트홀 개관기념음악회, 음악당에서의 개관 축하리셉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날의 개관기념음악회는 올림픽 팡파르를 시작으로 베토벤의 `교황곡 제9번, 합창`의 4악장을 금난새씨가 지휘하는 KBS교향악단과 3백여 명의 연합합창단이 연주했다.
예술의전당은 이번에 1차로 음악당과 서예관을 개관했고, 1989년에는 미술관과 자료관을, 1992년에는 축제극장과 야외극장을 완공, 종합문화센터가 됐다.
1986년 전북 익산에서 백제시대 금동관 등 출토
1984년 `한국미술 5000년` 유럽순회전 개막
1980년 폴란드 통일노동자당대회, 경제부진 추궁. 야로셰비치 수상 해임
1980년 고려목기인 공민왕 15년 제작 목조장롱 발견
1977년 화가 허백련 사망
1975년 긴급조치 1,4호 위반자 석방
1974년 북한함, 백령도 서쪽 공해서 우리 어선에 포격, 1척 납북, 1척 침몰
1969년 도로공사, 지하수개발공사 발족
1966년 신한당 발기대회 창당준비위 수석대표에 윤보선씨
1963년 교육공무원 정년 65세로 재인상
1963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암살 음모 장교 6명 검거
1962년 핀란드 대통령에 케코넨 재선
1962년 한국-아르헨티나, 국교수립
1960년 조병옥 박사 별세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 조병옥 후보가 같은 해 2월 15일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56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급사한 신익희의 뒤를 이어 19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 이승만 독재타도의 선봉에 섰으나 그 역시 선거직전 사망해 국민들에게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유석 조병옥은 해방이후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에 취임하여 좌익세력 색출에 전력했고 6·25전쟁때는 내무장관으로 대구사수의 진두지휘를 맡아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공헌했다.
이 때부터 이승만과의 의견충돌로 사이가 멀어졌다. 그는 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자리를 동갑내기 신익희에게 양보하는 등 선이 굵은 정치를 펼쳤다
1958년 인도네시아 반정부 반란
1958.년 KNA 납북사건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KNA(창랑호)가 평택 상공에서 무장 북한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돼 평양순안 공항에 강제착륙했다.
우리국회는 북만행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6.5참전 16개국에 보내는등 강력 항의하자 탑승자 26명 전원을 돌려보냈다.
1955년 노농당 결성(대표 전진한)
1953년 제2차 통화개혁 실패
한국전쟁 직전에 5백60억원이던 은행권 발행액이 1952년 말에는 1조원을 돌파, 엄청난 인플레 압력이 가중되자, 정부는 1953년 2월 15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통령령 제13호 긴급조치령으로 제2차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통화개혁의 주요골자는 2월 17일부터 ‘원’ 표시 통화의 유통을 금지하고 ‘환’ 표시 통화를 유통시키되 교환비율은 100원에 대하여 1환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2월 17일부터 9일동안 국민이 가지고 있는 모든 통화는 금융기관에 예입해야 하고, 이 기간에 금융기관에 대한 채권 채무액도 신고해야 했다. 신고기간 9일동안의 생활자금으로 1인당 5백환 한도내에서 신권으로 교환해준다는 것이었다.
신권으로 사용된 지폐는 정부 수립 직전인 1947년 미군정청에서 미리 제조한 돈으로 당시 미군정청은 미국의 군사지원 자금으로 미국 재무부 인쇄국에 의뢰해 1환, 5환, 10환, 100환, 1000환 총 5종을 만들어 화폐개혁을 준비했으나 실행에는 옮기지 않았었다. 다행스럽게도 6·25개전 초기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한국은행 금고에 보관 중이던 이 신권들을 건드리지 않아 화폐개혁에 사용이 가능했다.
통화개혁의 배경에는 인플레로 인한 경기침체도 문제였지만 악화일로에 있는 전쟁인플레를 막아야 원조하겠다는 미국의 압력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신고금액이 정부예상의 60%선에 불과할 뿐 아니라 한동안 경제거래가 마비돼 오히려 물가를 폭등시키는 등 부작용을 낳아 실패한 통화개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52년 제1차 한일회담 개최
일본 침략에 의한 부당한 강점으로 인하여 과거 반세기동안 중단되었던 한일 양국간의 국교재개를 위한 제1차 한일회담이 1952년 2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이번 한일회담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의 중개로 1951년 10월 21일부터 열린 예비회담을 거쳐 이뤄졌다. 이날부터 한국의 이승만 정부와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내각 사이에 본회담이 시작됐으나 쌍방의 주장이 크게 엇갈려 4월 21일 중단됐다.
일본은 극히 고자세로 "우리가 요구하는 청구권을 일부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일본이 한국에 두고 간 재산에 대해서도 청구권을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즉 일본측은 헤이그협약 47개조의 `개인재산은 몰수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들어 한국에 남기고 간 일본인 재산의 반환을 요구한 것이다. 한국측은 이에 대해 미 군정법령 33호에 의해 몰수한 것이기 때문에 법률상 재산반환을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결국 회담이 결렬됐다.
1951년 영국 철강국유화 실시
1951년 구주군창설회의 파리에서 개최
1946년 세계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 탄생, 컴퓨터 시대의 개막을 초래
1946년 2월 15일 미국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 대학 특설 실험실엔 국방부 관계자와 보도진 등 200여 명이 모여있었다. 이 대학 존 모클리와 프레스터 에커트 교수 팀이 3년 동안 연구해온 세계 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eniac·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 완성식이 열리는 자리였다.
운영 요원 한 사람이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에니악 내부에 있던 1만 8800개의 진공관이 일제히 깜빡이며 연산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에니악은 `9만7367의 5천승`을 순식간에 계산, 참석자들 사이에선 탄성이 터졌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명인 컴퓨터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당시의 타임지는 "1백 명의 전문가가 1년 걸려 풀 문제를 2시간에 풀었다"며 현장의 흥분을 전했다.
20세기 후반의 정보화 혁명을 가능케 한 컴퓨터의 개발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전쟁 수행을 위한 군부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야포나 미사일을 발사할 때 대기온도,풍속 등에 따른 사거리를 포수들에 게 알려주는 탄도 하나를 계산하려면, 약200단계를 거쳐야 했고, 노련한 수학자가 가장 정교한 탁상계산기를 이용하더라도 7∼20시간이 소요됐다. 에니악은 동일한 작업을 30초에 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에니악의 영광은 너무 짧았다. 길이 30m 중량 30톤의 이 공룡 컴퓨터를 수용하기 위해선 42평 정도나 되는 큰 공간이 필요했다.
150kW의 전력을 사용하며 1.5kg 무게의 진공관 1만 8,800개가 너무 많은 열을 발생시켰기 때문에 방을 에어컨으로 냉각시켜야 했다. 수명이 짧은 진공관들을 자주 갈아끼워야 했기 때문에 항상 사람이 대기하며 주의를 기울여햐 했다. 비용도 비쌌다. 당시 미 육군이 에니악 인수의 대가로 펜실베니아 대학에 지불한 돈은 48만 684달러. 50년의 시차를 무시하더라도 지금 5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런 단점들을 보완한 에드삭(EDSAC), 에드박(EDVAC) 등의 새로운 컴퓨터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가운데 에니악은 1955년 10월 2일, 9년 10개월간의 임무를 마치고 폐기됐다.
1946년 좌익진영,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
1946년 2월 15일 좌익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됐다. 민전에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당, 독립동맹, 전평, 전농,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익계 29개 정당사회단체가 참여했다.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비롯한 全우익 정당사회단체와 중도파 정당들이 연합해 비상국민회의를 구성하자, 반탁세력에 대항하고 합법적 찬탁 지지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 민전 결성의 배경이었다.
좌익의 결집된 의사표명 집단으로 활동하던 민전의 위치가 불확실해진 것은 11월의 남로당 결성 후부터였다. 그럼에도 12월 29일 남산에서 15만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미소공위 속개를 위한 군중대회를 열었는가 하면 1947년 3·1절에는 남산에서 10만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따로 기념식을 갖고 공위 속개를 촉진했다. 하지만 수명을 다해가는 민전은 1948년 5·10총선거와 8월15일의 남한 단독정부수립과 더불어 소멸한다. 1948년 북민전과 합동, 조국전선으로 변모한다.
1944년 조선총독부재판소령 전시등례 공포
1942년 싱가포르 영국군인, 일본군에 항복
1936년 히틀러, ‘국민차(Volkswagen)’ 제조계획 발표
히틀러의 두 가지 꿈은 ‘세계정복’ 과 ‘국민차(Volkswagenㆍ폴크스바겐)’ 보급이었지만, 그는 생전에 후자만 달성했다. 1936년 2월 15일, 그는 1차대전 패전 후 도로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며, ‘폴크스바겐’ 제조계획을 발표, “전국민에게 차 한대씩 나눠 주겠다” 는 공약을 내걸었다.
1934년 5월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히틀러와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가 함께 차를 마셨다. 이른바 ‘천사와 악마의 만남’. 히틀러는 훗날 ‘딱정벌레’(Beetle)란 이름을 얻은 차량의 기본틀을 이때 제시한다. ‘보통사람’ 이 굴릴 수 있고, 가족 모두(5인) 탑승하며, 최고시속 100km를 내는 공냉식 엔진을 갖춰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불가능하리란 예상과 달리 포르셰는 독일자동차공업협회(RDA)와 함께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1938년 5월 팔레르스레벤(볼프스부르크)에 폭스바겐 생산공장이 생겼다. 이듬해 2차대전이 터지자 공장은 로켓 전투기 폭탄 등 군수품 제조에 참여해야 했고, 폴란드 러시아 헝가리 등 나치 점령지역에서 징발한 강제 노역이 이뤄졌다.‘히틀러 차’ 는 내수용에서 군수용으로 전환되면서 견고함을 입증했지만, 종업원 대부분을 차지한 강제 노역자들이 구타와 고된 노동으로 숨져갔다. 폭스바겐은 여전히 나치 협력의 멍에를 지고 있다.
1934년 조선어학연구회 기관지 정음 간행
1927년 임정의정원, 임시약헌 통과(수반제 폐지 집단지도제 채택)
1927년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창립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1927년 2월 15일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항, 정치-사회 사상의 이념을 초월한 독립운동단체 ‘신간회’를 창립했다. 안재홍 백관수 신채호 등 34인이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월남 이상재가 초대 회장에 추대됐다.
신간회는 창립 때부터 조선일보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대부분의 지회가 조선일보사 지국이었고 일제 탄압속에서도 조선일보는 `신간회 기사일속` `신간회 각지 소식`이란 고정난까지 두었을만큼 신간회 대변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국내외에 100여개가 넘는 지회를 조직했고 회원도 많을 때는 4만여명에 달했다. 1920년대 중반이후 신간회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은 민족독립이론을 발전시킨 점이다. 3.1운동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되면서 자유주의를 기저로 한 민족주의와 심한 갈등을 빚었다. 그러던 것이 신간회에 의해 민족독립을 상위개념으로 하여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결합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이를 지원하는 한편 대규모의 민중대회를 준비하다가 조병옥 이관용 등 간부 44명이 체포돼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창립 이래 해산된 1931년 5월까지 4년여 동안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해온 신간회가 해산한 것은 일제의 직접적 탄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좌우갈등을 극복하지 못해서였다.
1924년 `보리밭` 작사가 박화목 출생
1922년 헤이그 상설 국제사법재판소 개설
1922년 2월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상설 국제사법재판소가 설치됐다. 재판소는 종래의 상설 중재재판소를 보완, 국제연맹규약에 기초해 국제분쟁 조정을 담당했다. 이제까지 상설 중재재판소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창에 의해 민족간의 분쟁위기를 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막된 헤이그 국제평화회의 결과 1898년에 헤이그에 개설된 기관이었다. 상설 국제사법재판소는 1945년 국제연합의 주요기관으로서 헤이그에 설립된 국제사법재판소의 전신이다.
1907년 한국 작곡가 전수린 출생
1906년 한국 판소리 예능보유자 박녹주 출생
1894년 한국 정치가 조병옥 출생
1894년 동학혁명 발발
1882년 미국 연극배우 존 배리모어출생
1812년 미국 보석상 티퍼니 출생
1748년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 출생
1564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출생
1426년 한성, 이틀간 대화재
1393년 이성계,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결정
1383년 고려, 남경(南京)에서 개경(開京)으로 천도
1277년(고려 충렬왕 3) 왕륜사 장육소상 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