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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1. 13 식민지의 불만 | 2.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식민지 억압 |
3. 미합중국의 탄생 | 4. 연이은 전투 |
5. 유럽의 지원과 남부의 격전 | 6. 요크타운의 승리 |
7. 전쟁의 여파 |
1992년 영국이 EU 가입문제를 놓고 투표를 할 때 반대자들의 구호는 ‘An Island we must stay (영원히 섬으로 남아야 한다)’였다. 비록 EU의 회원국이 되기는 했지만 영국은 유럽 대륙(Continent)과는 다른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다. 오히려 대서양 바다건너 미국과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이 때문에 ‘영미권(英美圈)’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영국과 미국의 언어적 문화적 유사성을 들어 두 나라를 통칭할 때 쓰는 단어이다. 2차대전 때 같이 싸웠던 데다 서로를 배신할 수 없는 진정한 우방이라는 인식은 영국과 미국을 단단히 묶어주고 있다. 현재 미국의 공용어는 영어이고 정치제도와 법률, 문화적 관습에서도 영국의 문화를 이어받은 것이 많아 우리식의 표현으로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독립한 나라이다. 그것도 평화로운 방법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통치를 방해하고 결국 영국 왕이 보낸 영국 군대와 3년을 치열하게 싸워 이들을 몰아내고 국제적으로 조약을 승인 받았다. 물론 영국의 통치를 유지하자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나 영국의 식민통치는 식민지에서 독립강경파의 입지를 높여주었고 결국 현재 미국은 영국에서 떨어져나갔다. 한때는 부조(父祖)의 나라였으나 미대륙에 살던 사람들은 결국 ‘못 살겠다’ 면서 총칼을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땅의 존재가 알려진 후 유럽인들은 끝없이 이 새로운 땅으로 몰려들었다. 먼저 새로운 땅에 대한 야망과 황금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힌 에스파냐인들은 아즈텍과 잉카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누에바-에스파냐(新 에스파냐)라는 거대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잉글랜드인들이 에스파냐인들의 뒤를 이어 바다로 나왔을 때는 이미 에스파냐인들이 지금의 멕시코에서 칠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선점하고 있었고 하는 수 없이 잉글랜드인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대륙에서 잉글랜드인들이 처음으로 닻을 내린 곳은 지금의 미국 동부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이었다. 1584년, 월터 롤리(Walter Raleigh, 1552?~1618)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1533~1603)으로부터 ‘버지니아’라고 불리는 땅에 식민지를 세우는 조건으로 개발허가를 얻어낸 것이다. 1584년 4월에 롤리는 함대를 보내 지금의 미국 동부를 탐험하게 했고, 1585년에는 로어노크(Roanoke)에 107명의 잉글랜드인들이 상륙하면서 북아메리카 최초의 잉글랜드(영국) 식민지가 세워졌다. 그러나 곧이어 잉글랜드-에스파냐 전쟁이 발발하면서 식민지에 대한 보급이 끊기고 존 화이트(John White)가 1590년에 로아노크를 다시 찾았을 때 마을은 버려진 후였고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버지니아’ 지역에 식민지를 세우려는 런던 버지니아 회사(The Virginia Company of London)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1607년에는 영국 최초의 영구적 식민지라 할 수 있는 제임스타운(현재 미국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 시 인근)이 세워진다. 버지니아에는 잉글랜드인들의 유입이 계속되어 인구가 늘어났고 제임스타운은 1616년부터 1699년까지 버지니아의 ‘수도’가 된다.
한편, 1620년에 지금의 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에도 플리머스 식민지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제임스타운 식민지와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제임스타운이 잉글랜드의 귀족과 기업가, 왕가의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받아 생긴 계획된 식민지였다면, 플리머츠는 당시 혼란스런 잉글랜드의 정세 속에 청교도에 대한 종교 탄압이 자행되자 이를 피해 새로운 땅에 온 ‘난민’의 성격에 가까웠다. 이들은 모두 청교도들이었는데 1607년에 성공회 요크 대주교가 교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자신들의 고향인 노팅엄셔 지방의 스크루비(Scrooby)를 떠나 네덜란드의 레이덴(Leiden)을 거쳐, ‘메이플라워’라는 선박을 고용해 북미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이때 현재 뉴욕 인근에는 네덜란드인들의 마을이 생긴 이후였고 만약 네덜란드인들과 같이 살게 된다면 새로운 땅에서의 정착이 보다 쉬웠겠지만, 자식 세대의 네덜란드화(化)를 피해 더 북쪽으로 올라가 결국 매사추세츠에 정착했다.
첫 겨울에 도착한 정착민의 반이 죽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새로운 삶을 찾는 사람들은 계속해 대서양을 건넜고 1620년에 약 2500명에 불과하였던 식민지 인구는 1770년대에 이르러 184만으로 늘어난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영국정부는 미국동부해안을 13개의 지역으로 나누었는데 후일 이들이 독립하여 13개주가 된다.
미국은 초기부터 의회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공화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17세기 영국의 식민지가 세워지고 있을 때 건너온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개념은 생소했다. 따라서 후일 세워질 민주정을 만들겠다는 의지는 아직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영국 본국보다 경제 사정이 열악하고 소상인이나 자영농이 많은 식민지의 환경이 미국식 민주주의 발현과 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식민지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재산을 가지고 있는 자’들만이 투표를 할 수 있는 영국식의 제도에 기반하고 있었다. 비록 영국의 제도에 기반한 것이기는 하지만 투표에 의한 의원선출제도는 후일 독립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서게 되는 민주공화정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북미 식민지의 주요 경제적 기반은 농업이었지만 농업과 어업 등에서 얻어지는 산물이 매우 다양하였기에 식민지 각 지역간 교역이 활발하였고 영국 본국과의 교역량도 상당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 운영은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북미 식민지의 주민들은 영국 본국 및 기타 영국 식민지와 자유로운 교역을 할 수 있었으나 다른 나라 또는 그 식민지와의 교역에는 상당히 제약을 받았다. 본국과 식민지간 무역을 독점하면서 영국 본국에는 천문학적인 부(富)가 축적되었고 교역품에 대한 많은 관세와 세금을 매기면서 국가재정도 획기적으로 늘었다. 영국은 식민지 무역으로 확충된 재정으로 해군의 획기적인 증강에 나섰고 증강된 영국 해군은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타국의 공격으로부터 자국 식민지를 지켰다. 영국 중상주의 정책의 기조는 런던의 국고를 금은(金銀)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와의 교역에서 손해가 발생하면 ‘나랏돈이 세는’ 것으로 간주했고 이 때문에 수출은 장려했지만 수입은 억제하려 하였다.
하지만, 13개 주의 입장에서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영국이나 영국의 기타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수입품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더구나 가까이 있는 프랑스나 에스파냐의 식민지를 두고 멀고 먼 영국 식민지로부터, 그것도 높은 수송비용을 지불하면서 물건을 들여와야 하는 데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다른 나라와의 무역에 대한 제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국 본국이 식민지와 타국 간 무역의 중간 상인 역할을 하면서 추가적인 이득을 챙겼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사추세츠의 상인이 네덜란드나 프랑스에서 물건을 수입하려고 하면 반드시 영국을 거쳐서 수입해야 했다. 이로써 영국 본국은 관세나 수입세 등을 챙김과 동시에, 외국 물건의 가격을 높였는데, 수입품이 영국 본국의 물품보다 싼 경우 영국 물품이 가격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가격을 높인 것이다. 13개 주 식민지 상인들이 가진 또 다른 불만은 본국의 항해조례(Navigation Act)에 따라 무슨 물건을 사고 팔 건 간에 영국 배에 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다 저렴한 운송료를 낼 수 있는 배를 찾아 물건을 실어 보낼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자유롭게 장사할 자유를 원하는 13 식민지 상인들과 무역으로 인한 이익은 국부(國富)로 전환해야 한다는 영국 본국의 이해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 아직 전쟁은커녕 독립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던 1721년에 13개 식민지는 본국의 중상주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매사추세츠 대표로 영국에 가 있던 제레미아 더머(Jeremiah Dummer)는 영국 본국의 정책을 ‘억압’이라고 까지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Dummer에 의하면
1731년에 ‘Amicus Reipublicae’란 필명을 쓴 저자가 저술한 팸플릿에는 마치 45년 뒤 출판되는 [국부론]이나 후대의 경제학자인 리카르도를 베낀 것 같은 말들이 담겨있다. 이 저자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는 필수조건으로서의 교역과 상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타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하여 어느 정도 중상주의가 불가피한 면도 있었지만 13개 식민지 사람들은 자기들이 애써 벌어놓은 돈을 영국이 다 런던으로 가져간다며 불평하였고 본국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영국이 중상주의 정책을 유지한 까닭은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북미대륙에서 영국의 주요 경쟁국은 프랑스였다. 1700년대 중반까지 영국의 북미 식민지는 지금의 미국 동부와 카리브해의 자메이카, 플로리다 인근의 바하마 정도였다. 이에 비해 프랑스는 퀘벡 지역을 위시한 캐나다 동부와 현재 오대호 지역, 그리고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을 따라 현재 미국 오하이오에서 루이지애나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본국만을 놓고 봐도, 농업생산과 인구에서 프랑스는 영국을 압도했다. 1700년대 중반 프랑스의 인구는 2천만을 넘었지만 영국은 580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대규모 무역선단은 농업 생산에서의 불리함을 상쇄했다. 아울러 영국 함대는 프랑스, 에스파냐 등의 식민지를 자주 공격했다.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끝나고 프로이센에게 망신을 당한 오스트리아가 복수를 위하여 군대를 키워 프랑스와 손을 잡고 프로이센을 치고자 했다. 이에 프로이센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러시아와 에스파냐 등이 오스트리아 쪽에 가담하면서 결국 유럽은 물론 당시 유럽국가들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 지역까지 휘말리는 대전쟁이 발생한다. 일명 ‘7년전쟁(1756-1763)’이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영국세력과 프랑스+인디언 동맹세력이 서로 싸웠기 때문에 흔히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1763)라고 불린다.
7년 전쟁이 시작되기 전 북미에서는 이미 프랑스와 영국 세력간 소규모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의 식민지는 영국의 북미 식민지보다 훨씬 넓었지만 북아메리카에 있던 프랑스인들의 수는 불과 7만에 불과했다. 그나마 5만 1000명이 캐나다에 몰려 살고 있었기에 나머지 식민지에 있던 프랑스인들의 숫자는 2만이 체 되지 않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에 비해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백인만 106만이었고 흑인 노예와 자유민이 24만 2천명이었다. 130만대 7만, 무려 18대 1의 인구비율이었다. 적어도 북아메리카에서는 영국의 세력이 프랑스를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영국의 13개 식민지에는 잉글랜드를 포함하여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네덜란드, 독일지역, 스웨덴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었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며 인구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결국 13개 식민지만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고 서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들이 인구 면에서 열세라 한들 프랑스는 영국인들의 움직임을 좌시하지는 않았다.
영국인들은 1750년대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현재의 오하이오 지역으로 슬금슬금 넘어오기 시작했고, 그 곳에 살고 있던 일부 원주민과 손을 잡고 몇몇 기지를 건설했다. 오하이오강 유역에서 영국 기지 건설을 총괄하고 있던 인물은 버지니아 출신의 지주이자 버지니아 민병대 대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었다. 워싱턴은 1년 전 버지니아 지사(知事)인 로버트 딘위들(Robert Dinwiddie)의 명령으로 현재 오하이오주에 있는 르뵈프 요새에 가서 그 지휘관인 생-피에르(Saint-Pierre)에게 지사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오하이오 지역의 권리는 영국에 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생-피에르는 자신은 친서에 답할 권한이 없다며 워싱턴 더러 캐나다로 직접 갈 것을 요구하였고 자신은 명령에 따라 오하이오에 있는 것이며 물러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워싱턴이 버지니아로 돌아가서 이를 보고하자 딘위들은 버지니아 민병대를 소집할 것을 명하였고 워싱턴으로 하여금 오하이오로 진격하게 하였다. 사실 이는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의 승인도 묻지 않은 지사의 독단적 결정이었다.
워싱턴은 알레게니강(Allegheny)과 모논가힐라(Monongahela)강이 합류하는 지점(Forks of Ohio)에 요새를 짓기 시작하였고 프랑스는 이에 즉각 반응하였다. 프랑스 캐나다 식민정부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과 원주민으로 구성된 500명을 보내 워싱턴의 민병대를 공격하여 몰아낸 다음 그 자리에 자신들의 요새를 짓고 이를 뒤켄느(Duquesne) 요새라 명명했다. 이에 영국인들은 오하이오에 대한 대대적인 작전을 준비했고 에드워드 브래덕(Edward Braddock) 장군 밑에 정규병과 민병대를 합쳐 2100명의 병력을 보내어 뒈켄느 요새를 빼앗으려 하였다. 워싱턴은 이전의 경험 때문에 브래덕 장군의 부대에 종군하였고 버지니아 부대를 다시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펜실베니아 주 서부에서 벌어진 모논가힐라 전투에서 프랑스와 원주민 연합부대의 공격을 받아 전사자만 5백이 넘는 대패를 당하고 버지니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758년에 제임스 그랜트(James Grant)가 이끄는 750명의 영국 병력이 다시 오하이오를 공격하였으나 사상자 300명을 내면서 크게 패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전쟁의 여파가 크게 번져 캐나다 지역까지 전쟁에 휘말려 있었고 영국군이 캐나다와 프랑스 전진기지들 간의 보급로를 끊으면서 뒤켄느같은 전방 요새들은 버티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프랑스군은 뒤켄느 요새를 포기하였고 영국군이 이를 점령한다. 영국이 점령한 뒤켄느 요새는 피트 요새(Fort Pitt)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피츠버그(Pittsburg)가 된다. 영국은 마침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오하이오 지역으로 본격적인 팽창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오하이오를 둘러 싼 영-불간의 싸움은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영-불 관계를 악화시켰고 결국 더 큰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1759년 영-불 양국은 본격적으로 7년 전쟁에 돌입한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영-불전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1759년 9월에 제임스 울프(James Wolfe)가 이끄는 영국군이 프랑스령 캐나다의 수도인 퀘벡을 함락시키면서 캐나다 전체가 영국으로 편입되고 북미에서의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식민지 경제에 대한 영국의 착취는 계속되었다. 1759년, 영국의 추밀원(Privy Council)은 버지니아 지사에게 버지니아 식민의회에 상정되는 모든 안건에 ‘추밀원 승인시까지 발효되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삽입하게 하였다. 아울러 이 조항이 없는 법안은 이유를 막론하고 서명할 수 없다는 명령을 버지니아 지사에게 전달한다. 1761년에는 당시 식민지에서 성행하고 있던 밀수단속을 이유로 매사추세츠 관세청 관리들에게 무시로 가택과 물품창고를 수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같은 해에 역시 추밀원이 식민주 지사들이 임명한 사법관과 기타 관리들을 왕의 권한으로 즉시 파면할 수 있게 하여 지사들의 자치권을 크게 제한하였다.
1763년에 7년전쟁이 종식되고 파리에서 영-불간에 강화조약이 맺어졌을 때 식민지민들은 변경에서 프랑스인들과 원주민들의 위협이 사라지게 되었다며 본국의 승리를 반겼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영국 본국은 새로이 획득한 식민지 운영을 위하여 추가 재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다시 식민지민들에게 각종 명목의 세금을 반강제로 걷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1763년에는 1733년 제정되었으나 한 번도 시행하지 않고 있던 설탕조례(Sugar Act)를 매우 강력하게 집행하였다.
영국정부가 결정적으로 식민지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된 원인은 바로 1764년에 영국 의회에 상정하여 통과된 일명 ‘아메리카법(American Act)’이었다. 새로이 획득한 식민지를 지키기 위하여 북아메리카 주둔 영국군의 규모를 늘리기 위하여 식민주들의 교역에 제재를 가하고 추가로 세금을 물리는 법안이었다. 문제는 병력의 증강규모와 주둔과 관련하여 식민주 정부의 동의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너희들을 지켜줄 터이니 비용은 너희들이 대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을 위해 싸운 식민지 출신 군인들은 새로이 증강되는 병력의 지휘관으로 임명될 수가 없었다. 본국을 위하여 열심히 싸우고 그 영광을 위하여 봉사했음에도 보상을 받지 못하고 게다가 새로이 군대를 늘리는데 돈만 대라니... 아무리 본국정부라도 지나친 처사라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식민지민들은 새로운 세금이 재정되었으니 이에 대한 보상으로 교역에 대한 제재조치들이 풀리기를 기대하였으나 영국정부는 기존의 제재완화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본국정부가 이러한 강제적 조치들을 남발하기 시작하자 식민지민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이 그나마 누려왔던 자치(自治)의 권리마저 언젠가 박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만약 영국 정부의 이러한 조치가 20-30년정도의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면 그 파장이 최소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759년부터 1764년까지 5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식민지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그것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법안과 조치들이 연쇄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결정타는 1765년의 Stamp Act, 즉 인지세였다. 이 인지세 역시 북아메리카에 주둔하는 영국군의 주둔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제정된 세금이었다. 이 법안에 의하면 13식민지의 모든 출판물은 영국정부가 발행된 인지가 붙어있는 종이로 만들어야 했으며 이 종이는 런던에서 제조되었다. 인지세는 공문서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식민지 정부관료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다. 일부 물품에 붙는 관세와는 달리 인지세는 모든 출판물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13식민지 전체가 크게 반발하였다. 비록 영국 의회에 의원을 보낼 수는 없었지만 13식민지 모두 앞다투어 대표들을 런던에 파견하여 의회에 인지세의 부당함을 알렸다. 그리고 1765년 10월에는 뉴욕에서 소위 ‘인지세 대회의(Stamp Act Congress)’를 열어 왕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였는데 여기서 ‘대의(代議) 없는 과세는 부당하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유명한 말이 등장하였다. 아울러 13식민주들은 일치단결하여 본국의 물품을 사지 않기로 하였다. 즉 식민지 전체가 불매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이 문서가 웨스트민스터에 도착하자 일부 의원들은 군대를 움직여 인지세를 강제로라도 시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의원들은 대변자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에 대한 세금이 부과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식민지민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인지세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선언법(Declaratory Act)이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안에 의하면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대한 법을 동의 없이 임의로 제정할 수 있었다. 결국 식민지 관점에서는 혹은 떼었지만 더 큰 혹을 붙이게 된 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765년에는 군대 숙영법(Quartering Act)도 제정되었는데 이는 지휘관들이 민간주택을 ‘징발’하여 휘하 병사들을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었다. 당시 13식민지 주둔군의 본부는 뉴욕에 있었는데, 뉴욕주 의회는 이에 반발하였으며 폭력사태가 일어나 식민지민 한 명이 중상을 입는 일이 벌어졌다. 본국 의회는 뉴욕주 의회의 권한정지를 선언하였으나 뉴욕주 의회가 병사 숙영을 위한 비용을 부담하기로 결정하면서 사태는 잠시 일단락되었다.
영국이 자신들의 권리를 완전히 빼앗으려 한다는 인식은 널리 확산되었고 일부 식민지민들은 영국의 부당한 간섭을 막기 위한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이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소위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다. 이 명칭은 영국의회에서 13식민지에 대한 강제적 조세를 반대하던 아일랜드 출신의 의원 아이작 베러(Isaac Barre)가 식민지민들을 Sons of Liberty라고 통칭한 데서 기원한다. 건국의 주체들을 영웅시하는 대중 역사서에서 자유의 아들들은 영국의 부당한 통치에 맞서는 거대한 지하조직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사실은 각 도시에 생긴 조그마한 반영(反英) 분자들이 다른 도시의 조직들을 ‘동지’로 부르면서 모두가 자유의 아들들이라고 한 것 때문에 생긴 이름일 뿐 체계가 있는 조직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은 각 도시에서 큰 나무를 골라 이를 자유나무(Liberty Tree)라 부르면서 유사시의 집회장소로 삼거나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건물을 골라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이라는 구호를 채택하고 다른 도시의 소조직들과 연락을 하면서 다른 지역과 같이 본국의 부당한 법안과 조처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도하였다.
비록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하였지만 ‘자유의 아들들’은 식민지 전체의 유력인사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이후 자유의 아들들 구성원들이 모여 독립전쟁을 주도한 대륙의회를 형성한다. 후일 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즈, 앞서 말한 새뮤얼 애덤즈, 사라토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베네딕트 아놀드(그러나 후일 미국을 배신한다), 대륙의회 의장을 역임하게 되는 존 핸콕(John Hancock), 변호사이며 버지니아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대륙의회 사무총장인 찰스 톰슨(Charles Thomson), 그리고 보스턴 지역에서 반영운동을 주도하는 폴 리비어(Paul Revere) 등 독립운동의 쟁쟁한 인사들이 모두 자유의 아들들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외에도 1767년에는 재무장관 찰스 타운센드(Charles Townshend)의 국세 징수법(Revenue Act)으로 식민지로 들어가는 모든 수입품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인지세는 식민지내에서 통용되는 물건에 대한 직접세이기 때문에 반발하였지만 수입품의 간접세에 대한 저항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울러 기타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수입되는 차에 대한 세금은 없애면서 미국으로 수입되는 네덜란드 차의 경쟁력을 깎아버리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식민지민들의 불만은 자신들의 의견이 영국 의회에 반영되지 않는 상태에서 세금을 때리는 것에 대한 것이었지, 그것이 직접세이건 간접세이건 상관없었고, 식민지민들의 불만은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수입업자들은 영국 차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고 차 밀수가 극성을 부렸다. 매사추세츠에서는 주지사 토머스 허친슨(Thomas Hutchinson)의 관할 하에 영국차 수입이 계속되었으나 반대파들의 압력에 주지사가 굴복하면서 영국차 수입이 중단되었다. 매사추세츠 주의회는 조지 3세에게 청원서를 넣으면서 다른 식민지들도 청원을 할 것을 종용하였다. 버지니아와 펜실베니아는 영국의회에도 청원서를 보냈지만 영국의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불매운동의 진원지인 보스턴에서는 민심이 흉흉하게 변하였고 1768년에 식민정부 관세청이 치안을 위하여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군함 롬니(Romney)를 보스턴으로 보낸다. 롬니의 선장은 도착하자마자 보스턴 청년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승선원으로 만들면서 원성을 샀다. 그리고 1768년 6월에 존 핸콕 소유의 화물선인 리버티(Liberty)호를 밀수혐의로 나포하면서 보스턴은 거의 폭동분위기였다. 물론 존 핸콕은 재판에서 무혐의로 풀러났지만 이 법안에 대한 반대는 계속되었고 영국군인들과 보스턴 시민들간에는 소소한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마침내 이는 1770년 3월 5일의 보스턴 학살사건으로 이어진다. 흑인 청년 애턱스(Crispus Attucks)를 포함한 5명의 시민이 영국군의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참고로 이들은 모두 자유의 아들들 행동대원들이었다. 이후 타운센드의 예산법은 폐지되었다.
이후 3년뒤 1773년에는 영국의 창고에 차가 많이 쌓였지만 이를 팔길에 없어지자 유럽에 싼 값에 파는 대신 이를 식민지에서 처분하기로 하고 ‘차 법안(Tea Act)’를 통과시켰다. 문제는 이를 처분하면서도 식민정부 관료들의 급료를 만들기 위하여 세금을 그대로 유지시켰다는 점이다. 이미 차를 많이 수입하는데도 강제로 산더미같은 차를 사야하고 게다가 세금까지 물어야 하자 보스턴 시민들은 기다리고 있다가 보스턴 차 사건(티-파티)을 일으킨다. 주 의원이자 보스턴 유지인 새뮤얼 애덤즈는 대책회의를 열어서 차 세금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자 하였으나 이 회의중 흥분한 대중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모두 뛰어나간 것이다. 애덤즈는 과격한 행동을 하지 말라며 이들을 막아보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결국 성난 군중은 보스턴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무역선 다트머스(Dartmouth), 일리노어(Eleanor), 비버(Beaver)에 강제로 올라타 이들이 싣고 잇던 324개의 차 상자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다.
영국정부는 보스턴 차사건을 일으킨 매사추세츠에 대한 징벌적인 법안인 소위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을 통과시킨다. 차사건으로 인하여 동인도회사가 입은 손해배상을 강제한 보스턴 항구법(Boston Port Act), 매사추세츠의 관리들을 본국 정부가 직접적으로 임명할 수 있게 하는 매사추세츠 정부법(Massachusetts Government Act), 매사추세츠에서 식민정부 관리들이 여론이나 각종 이유로 인하여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 지역을 옮길 수 있게 하는 재판운영법(Administration of Justice Act), 영국군을 주지사권한으로 어느 건물에나 묵을 수 있게 하는 더욱 강화된 숙영법(Quartering Act), 그리고 퀘벡 식민지의 영역을 넓혀 13식민지 일부를 퀘벡에 넘겨주는 퀘벡법(Quebec Act)이었다. 영국군이 13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법안은 강제성을 띨 수 밖에 없었고 이 법안으로 매사추세츠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계산은 빗나갔다. 영국군대가 자신들의 동의도 없이 통과된 법안을 강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열성독립분자뿐만이 아니라 중간계층까지도 영국정부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결국 이에 반대하여 1774년 9월 5일에 첫 대륙의회(Continental Congress)가 열리게 된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각 주들은 민병대를 소집하기 시작하였고 영국은 민병대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결국 1775년 4월, 식민지민들과 영국군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고 이는 미국 독립의 신호탄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패배했다. 전쟁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베트남전의 결과를 보고 역사상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베트남의 게릴라들에게 패한 미국도 사실은 게릴라전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영국으로 독립하려는 미국 사람들은 독립전쟁 시기에 영국의 정규군을 상대로 종종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며 치고 빠지는 전술로 적의 주력을 묶어두거나, 가랑비에 옷젖는다는 식으로 출혈을 강요하였다. 영국은 이 당시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을 위하여 해군에 비하여 부족한 육군을 증강하던 중이었다. 그런 군대가 제식훈련도 못 받고 남는 시간에 총질을 연습하던 식민지의 촌놈들하고 싸워서 결국은 지고 미국에서 물러난 것이다. 미국이 게릴라전으로 독립을 쟁취했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1775년 4월, 보스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사령관 토머스 게이지(Thomas Gage)는 보스턴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콩코드에 새뮤얼 애덤스와 존 핸콕을 따르는 반군이 무기고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게이지 장군은 자신의 심복인 프란시스 스미스 중령에게 700명의 정규군을 주어 무기고를 파괴하고 반영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애덤스와 핸콕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스미스의 부대가 보스턴 밖의 찰스 강을 건너자 이를 발견한 폴 리비어는 말을 타고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빨간 코트들이 온다(The Redcoats are coming)’라고 외쳤다. 영국군의 유니폼인 붉은 외투를 지칭한 말이다. 대부분의 인식과는 달리 폴 리비어는 홀로 밤을 달리며 영국군의 침공을 알렸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매사추세츠에서 유사시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던 수십명의 라이더(rider)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라이더들의 급박한 목소리와는 달리 영국군의 진격은 지루하였다. 라이더들의 외침에 총을 들고 나와 잠을 설치고 있던 렉싱턴 지역의 민병대원들은 영국군이 오지 않자 근처의 술집으로 들어가 맥주를 마시고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들이 서서히 기다림에 지쳐갈 새벽 4시경, 영국군이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는 외침이 들려왔고 민병대원들은 서둘러 총을 들고 나갔다. 영국군이 렉싱턴에 다다랐을 때, 영국군 앞에서는 70명의 총든 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오와 열을 갖추어 선 것도 아니고 그냥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그러나 스미스의 부대는 이들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발포했고 민병대원들도 반격을 하였지만 널리 트린 평지에서 정규군을 마주보고 하는 정식 전투에서 영국군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많은 민병대원들이 쓰러지고 18명의 사상자가 났다. 민병대는 흩어졌고 영국군은 렉싱턴을 지나 콩코드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민병대는 사실 무작정 도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친구들이 영국군에게 총를 맞고 죽었다고 하며 싸우자고 하였고 이에 날이 밝자 주변에 살고 있던 4천명의 민병이 총을 들고 나온 상태였다.
영국군은 콩코드에 있는 여관에서 3문의 포와 소총 탄환 500파운드(약 220kg)을 발견하였다. 포대를 불태워 버리고 탄환은 강에 버렸다. 임무를 무사히 마친 영국군은 보스턴으로 회군을 시작하였지만 이들은 보스턴으로의 회군길이 그야말로 지옥도가 되리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영국군은 돌아가던 중 콩코드 근처의 노스브릿지(North Bridge)에서 400명 민병의 습격을 받아 14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후 대열을 바로 세우려는 장교들의 노력은 허사였고 영국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수천명의 민병들이 삼삼오오 돌담 뒤에서, 나무 뒤에서, 바위 뒤에서 숨어 있다가 영국군을 공격하였고 그때마다 피해는 늘어갔다. 엉망이 된 영국군 대열이 보스턴에 돌아왔을 때 영국군 73명이 전사하고, 174명이 중상을 입었다. 아울러 29명이 행방불명이었다. 매사추세츠의 민병들은 렉싱턴을 제외하고는 전면전으로 싸우지 않고 철저히 게릴라가 되어 영국군을 격퇴한 것이다. 호되게 당한 영국군은 보스턴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민병대는 조지 워싱턴의 지휘하에 보스턴을 포위했다. 마침내 대륙의회는 1775년 6월 14일에 각주의 민병대를 통합하여 일명 대륙군(Continental Army)의 창설을 선언하였고 조지 워싱턴을 총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매사추세츠에서의 활약으로 민병들이 보스턴을 포위하고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모셨지만 민병들은 자신들의 소총에 필요한 화약을 휴대한 것 외에는 화약과 기타 물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포위전에 필요한 대포 등의 대형화기도 없었다. 결국 민병들은 단순히 병력의 우세를 내세워 지리한 포위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은 이를 알고 인근의 벙커-힐에 주둔한 민병대를 공격하여 포위망을 뚫으려고 하였다. 민병대는 낮은 방벽 뒤에서 사격하면서 영국군에게 1000명의 사상자를 입히기는 하였지만 두 번의 일제사격 후 탄약이 소모되었고 영국군이 방벽을 넘어오면서 총검을 동원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결국 민병대는 벙커힐을 내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벙커-힐 뒤에 2차의 방어선을 만들어 두었기에 포위망은 건재하였고 영국군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보스턴을 포위한 민병대에게 가장 큰 위협은 영국함선들의 함포 사격이었다. 중화기가 없던 민병대는 이에 맞서서 반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벙커힐 전투 후에도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이때 보스턴 근처 코네티컷 주의 민병대장 에단․알렌이 허드슨 강(지금의 뉴욕시 앞을 흐르는 강) 상류에 있던 영국군 요새인 티콘데로가(Ticonderoga, 미국의 초기 이지스함 티콘데로가급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를 민병대원 83명으로 급습한다. 참플레인 호숫가 매우 구석진 곳에 위치하여 있어 누가 습격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요새 지휘관은 나룻배를 타고 조용히 건너온 민병대원들에게 새벽에 기습을 받아 무장해제 당하였다. 이 민병대원들은 여세를 몰아 근처에 있던 작은 요새들인 크라운 포인트와 앤 요새(Fort Ann)도 점령하였다. 이 기습으로 민병대는 수십문에 달하는 대포와 역시 수십톤의 화약을 얻었다. 티콘데로가 요새에서 노획한 무기들은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던 민병대에게 전해졌다. 워싱턴으로서는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고 워싱턴은 포대를 만들고 영국함선들을 사격할 준비를 하였다. 만약 함선들이 격파당한다면 영국군은 유사시 꼼짝도 못하고 보스턴에 갇히게 될 것이다. 사태를 눈치 챈 토머스 게이지 장군은 워싱턴에게 협상을 제의한다. 만약 함선들을 포격하지 않으면 보스턴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물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워싱턴은 민병대로서 보스턴 탈환을 위한 본격적인 시가전을 하기는 어렵다는 판단 하에 이를 수락한다. 1776년 3월 17일, 영국 함대는 병력을 태우고 캐나다로 후퇴하였고 식민지 민병대는 보스턴을 점령한다.
이후 뉴잉글랜드 (지금의 미국 메인, 버몬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등의 6개 주를 아우르는 지역)는 온전히 민병대에 의하여 접수가 되었다. 이 당시까지만 하여도 미국의 주들 중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이고 반영(反英)감정도 심했다. 한 마디로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는 지역이었다. 뉴잉글랜드 지역을 장악하게 됨으로서 미국의 독립운동은 확실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독립전쟁중에는 중요한 전투들이 많았지만 뉴잉글랜드 민병의 게릴라전이 아니었으면 독립전쟁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워싱턴이 보스턴에서 영국군을 쫓아낸 것은 아메리카로서는 상당한 성과였지만 민병대를 이끈 워싱턴은 오히려 상황이 어려워 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일단 영국군을 단순히 몰아낸 것이지, 궤멸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워싱턴 휘하의 병력은 유럽군대와 비교하면 군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영국군이 물러간 이유는 사실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보스턴은 지금의 넓은 도시가 아니라 바다로 튀어나온 조그마한 반도를 꽉 채우고 있는 도시였다. 1775년 콩코드 전투 이후 압도적인 병력의 뉴잉글랜드 민병대는 보스턴에서 육지로 나오는 입구를 틀어막았고 영국군의 훈련이라던가 무기의 우위가 발휘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게이지는 무리하게 싸우기 보다는 일단 후퇴하였다가 증원군을 얻어서 다시 오려고 하였던 것이다.
워싱턴은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병사들과 대륙의회의 민간인들은 객관적으로 약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승리가 따놓은 당상인 듯 생각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식민지민들의 생각으로는 영국 본국은 멀리 떨어진 식민지를 지키기 위하여 싸울 마음이 없고 만약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다면 화의를 청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기나긴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 보스턴에서의 승리가 그 약점을 가리고 있을 뿐 당시의 워싱턴 휘하에 형성된 ‘대륙군(Continental Army)’은 정규군으로서 결점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대륙군은 여러 지역의 병력이 모인 ‘잡군’이었다. 민병대가 주축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각주가 주지사 휘하에 두고 있던 주군(州軍)인 자원병(volunteers)이 혼합된 형태였다. 워싱턴도 엄밀히 말하자면 버지니아주의 자원병 출신이었다. 아울러 대륙의회가 형성되면서 워싱턴 휘하에 모인 민병대를 ‘대륙군’으로 편성하였지만 이들은 한 번 입대하면 1년 싸우고 고향에 돌아가는 병력이었다. 아울러 이들은 병영(兵營)을 세운다던가 일렬로 서서 일제 사격하는 방법도 몰랐고 군진에 모여서도 변변한 화장실 하나 마련해놓지 않아 주변의 숲속이나 덤불속에 들어가서 용변을 보았기 때문에 군진 주변에는 언제나 똥냄새가 감돌았다. 워싱턴이 이들을 다그쳐 그나마 종대(縱隊)진군과 병영 설치가 가능해졌지만 전투지휘에다 군진을 유지하고 대륙의회와 주민들과 협상하여 보급품을 받는 것까지 워싱턴은 지휘관-행정장교-보급장교의 1인 3역을 해야했다.
워싱턴이 새로이 창설된 대륙군의 사령관이 된 이유는 그가 전투와 지휘경험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남부인 버지니아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사실 당시 독립운동은 뉴잉글랜드와 뉴욕, 펜실베이니아 등지의 전문직업인들과 상인, 도시민들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고 남부의 인사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아울러 남부에는 북부에 비하여 아직 영국 국왕에게 충성하는 왕당파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이 때문에 ‘남부’인 버지니아 출신인데다 대지주인 워싱턴에게 군권을 주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1775년 7월에는 ‘무장의 원인과 필요성에 대한 선언(Declaration of the Causes and Necessity of Taking Up Arms)’을 발표함으로 자신들이 단순히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이유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무장하였음을 밝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의회는 완전한 독립보다는 자치를 목표로 왕인 조지 3세에게 식민지와 본국 의회간 중재를 요청하였고 7월 8일에 영국에 청원서를 보내면서 독립은 ‘최후의 수단’임을 분명히 하여 아직 타협의 여지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른바 완전독립에는 아직까지도 회의적이었던 보수적 인사들을 대표하는 존 디킨슨(John Dickinson)의 ‘올리브 가지 청원서(Olive Branch Petition)’였다. 그렇지만 왕은 식민지의 청원서를 무시하였다.
한술 더 떠 영국국왕 조지 3세는 1775년 8월 23일에 식민지가 ‘반란’상태에서 돌입하였음을 알리고 자신의 관리들과 군인들, 그리고 ‘충성스러운 백성’들이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보태줄 것을 명령하였다. 일부 영국 군인들은 왕의 명령을 너무 충실하게 이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1775년 10월 18일에 영국 군함 HMS Canceau의 함장은 현재 메인(Maine) 주의 팰머스(Falmouth)라는 작은 도시가 ‘용서할 수 없는 반란’을 일으켰다며 이 도시에 하루 종일 무차별 포격을 가하였고 포격이 끝났을 때 팰머스에는 서있는 건물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영국의 행동은 그나마 아메리카에 남아있는 온건파들의 입지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고 더 많은 주민들을 적으로 돌리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다.
정치적인 정당성도 확보하였고 보스턴을 포위하고 영국군을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에 고무된 대륙의회는 베네딕트 아널드(Benedict Arnold)와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의 지휘 하에 캐나다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캐나다에도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는(주로 프랑스인들) 자들이 많아 ‘자유’의 구호를 내세워 캐나다를 침공한다면 캐나다에서도 반영 봉기를 일으킬 수 있고 이들을 영국과의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대륙군은 한때 퀘벡의 관문인 생-쟝(Saint-Jean) 요새와 몬트리올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퀘벡에서의 주 전투에서 총독 가이 칼턴(Guy Carleton)이 지휘하는 수비군의 완강한 방어에 막히고 존 버고인(John Burgoyne)이 정규 지원병력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하면서 대륙군의 완패로 끝났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물적 인적으로 불리는 대륙군의 한정된 전력자산을 소모시키고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워싱턴은 원래 캐나다 공격에 회의적이었으며 캐나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특히 대륙군은 이렇다 할만한 해상전력이 전혀 없었던데 비하여 영국군은 배를 타고 어디에든 상륙하여 공격할 수 있었고 영국군은 이후 뉴욕을 기지로 하여 해군력을 최대한 활용하게 된다.
영국군이 절치부심하여 병력을 모으고 있는 동안 필라델피아에 있던 대륙의회는 영국왕이 13주의 청원을 끝내 거부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청원을 보내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아직 선뜻 독립에 찬성하지 못하는 의원들이 많았다. 이들은 결국 독립을 주장하는 독립파와 여러 날을 두고 설전을 벌이게 된다. 이들의 논리는 본격적인 독립을 선언하게 되면 영국군에게서 지금까지는 비교할 수 없는 전면적인 공격을 받게 되고 신생국으로서 영국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설사 어찌어찌 영국군을 물리친다 하여도 국력의 소모가 심하여 프랑스나 에스파냐같은 다른 유럽국가의 침공을 받아 금방 멸망하고 말 것이라며 독립을 반대하였다. 아울러 비록 악법 때문에 사이가 벌어지기는 하였지만 1776년 초기에도 식민지민 사이에서 완전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13주와 영국은 단지 정치경제뿐만이 아니라 언어 문화적인 관계도 밀접하였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친족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 영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도 독립에 대한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자치와 독립사이에서 갈피를 못잡던 여론에 불을 지른 것은 1776년 1월 10일에 필라델피에서 출판된 [상식(Common Sense)]라는 조그마한 책자였다. 당시에는 익명으로 출간되었지만 그 저자는 놀랍게도 기존의 독립분자들이 아닌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이라는 영국 이민자였다. 1774년 말에 영국에서 필라델피아로 온 전직 세무관리이자 코르셋 제조업자인 페인은 필라델피아로 이민한 직후 필레델피아의 공인(工人)들 사이에 만연한 독립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곧 미국 독립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배운 독립사상을 정리하여 [상식]이라는 책자로 정리한 것이다. 대륙의회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은 학자나 법률가, 기업가 등의 엘리트들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이들은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으로 독립사상을 논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저술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생활하던 토머스 페인은 고전의 문구와 시적인 단어, 그리고 화려한 문장으로 수놓아진 ‘배운 자’들의 저술방식을 버리고 약 70장 정도의 짧은 책에 사회와 정부간의 관계, 왕권의 부당함, 13주의 현재 상황과 현안을 일반 대중도 읽을 수 있는 일상용어로 정리하였다. 성경에서 빌어온 비유와 직접적 어법으로 쓰여진 토머스 페인의 ‘상식’은 일반 대중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미국의 독립전쟁을 통틀어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다. 사람들은 이를 통하여 ‘왕’이라는 존재가 그 통치를 원치않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역설하였고 심지어 “왕정이란 우상숭배의 확산을 위하여 악마가 세상에 펼쳐놓은 것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이라는 극언까지 하면서 왕권 통치의 정당성을 총체적으로 부정하였다. 아울러 로크의 사상에서 빌어온 사회계약론을 들어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권력은 곧 독재라고 주장하였다. 페인의 ‘상식’은 왕권에 대한 식민지 대중의 막연한 충성심, 그리고 영국에 대한 무의식적 향수를 그 근본에서부터 철저히 파괴하였다.
당시 아메리카 13주 전체를 대표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륙의회밖에 없었다. 대륙의회가 독립을 선언하려면 보다 광범위한 여론의 지지가 있어야 했는데 마침 ‘상식’의 출간이 독립에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준 것이다. 당시 대륙의회 외에도 각 주 의회가 있었고 도시와 마을마다 사람들이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1776년 봄에 각 지방에서 독립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약 90개의 자치 위원회들이 서로 앞다투어 그들만의 ‘독립선언’을 하고는 하였다. 주 의회들은 보다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노스캐롤라이나가 대륙의회에 의원들을 파견하면서 1776년 4월 12일에 13주중에서 최초로 그 주를 대표하여 독립을 승인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에 매사추세츠 의회가 주민(州民)들이 모두 독립을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버지니아 의회도 5월 15일에 독립지지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6월 7일에 버지니아 의회의 결의안이 대륙의회에 도착하자 대륙의회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여전히 남아있는 온건파들은 소위 중간주(Middle States: 메릴랜드, 델라웨어, 펜실베이니아, 저지, 뉴욕)들의 여론이 지지해줄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였으나 중간주들도 재빨리 독립의 대열에 동참하였다. 6월 14일에 코네티컷주 의회가 독립지지를 천명하고 의원들을 파견하였다. 다음 날에는 뉴헴프셔와 델라웨어가 그 뒤를 따랐다. 뉴저지의 주지사이자 왕당파인 윌리엄 프랭클린(벤자민 프랭클린의 아들이다)은 반대하였으나 뉴저지 의회의 과격파들에 의하여 쫓겨나고 새로이 형성된 뉴저지 주정부는 6월 22일에 독립지지 표결을 위하여 의원들을 파견하였다. 메릴랜드 역시 6월 28일에 독립지지를 선언하고 의원들을 보낸다. 6월말에 이르러 독립을 늦추자는 소위 온건파들은 완전히 힘을 잃고 조용해졌다.
마침내 필라델피아의 대륙의회에 모인 주대표들은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벤자민 프랭클린 등에 의하여 작성된 독립선언문을 1776년 7월 4일 공식적으로 채택하면서 ‘아메리카의 13주’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합중국’을 만들기로 하였음을 선포한다.
영국군은 3만 2천의 대군을 모아 뉴욕을 향하여 다가왔다. 워싱턴은 이를 막기 위해 롱아일랜드에 병력을 배치하여 영국군이 뉴욕에 상륙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병력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하였던 워싱턴은 결국 길 하나를 무방비로 열어두었고 이 길을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William Howe)의 본대가 무저항으로 통과하여 워싱턴군의 후방에 있던 베드포드 마을을 점령하고 워싱턴군을 포위하였다. 이와 함께 워싱턴군 앞에 있던 영국군도 총공격을 하였고 워싱턴군은 이내 브루클린 해안까지 밀렸다. 이때 하우는 참모들의 공격 진언을 무시하고 미군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포위를 위한 방벽을 짓기 시작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벙커힐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던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우는 대륙군에게 배편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독안에 든 쥐라고 다소 안일하게 생각하였으나, 워싱턴은 주변에서 모을 수 있는 배를 모아 수천의 병력을 맨해튼으로 철수시켰고 하우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롱아일랜드의 패배로 인하여 뉴욕은 영국군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게 된다.
대륙군의 패배는 계속되었다. 맨해튼으로 후퇴한 대륙군은 1776년 9월 15일에 킵스베이(Kip’s Bay, 맨해튼 23가와 34가 사이의 작은 만)에서 영국해군의 포격을 버티지 못하고 영국군의 상륙을 허용한다. 비록 9월 16일 할렘의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지만 10월 18일에 펠럼에서, 그리고 10월 28일에 뉴욕 동부의 화이트플레인에서, 그리고 11월 16일에 맨해튼 북단인 워싱턴 하이츠에서 패하면서 뉴욕과 주변지역이 완전히 영국군에 넘어간다. 설상가상으로 허드슨 강을 통제하기 위하여 맨해튼 섬과 그 대안(對岸)인 뉴저지에 각각 세워진 요새인 포트 워싱턴(Fort Washington)과 포트 리(Fort Lee)를 영국군에게 빼앗겼는데 여기서 물자의 손실이 엄청났다. 포트 리에서 영국군이 노획한 대륙군 장비의 목록을 보자면 대포 146문, 포탄 12000발, 머스킷 소총 2800정, 머스킷 탄환 40만발의 무기류와 더불어 텐트와 각종 야영장비, 참호를 만드는 도구 다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뉴욕지역은 완전히 영국군에게 넘어갔고 전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기세 좋던 보스턴 전역 때와는 달리 대륙군이 불리하게 된 것이다. 영국군은 다시 보스턴을 공략할 수도 있고 새로이 대륙의회의 소재지가 된 필라델피아로 갈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연이은 패배로 워싱턴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고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상당부분이 민병이라서 대개는 1년을 기한으로 복무하고 있다. 만약 이들의 복무기한이 끝나는 1777년 1월까지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병사들은 다 집에 가고 대륙군은 거의 해체나 다름없는 상황에 몰리게 될 것이다.
롱아일랜드에서 1만을 헤아렸던 대륙군은 그동안의 패배에 따른 전사와 부상, 질병, 그리고 탈영 등으로 인하여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 1776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상황에서 워싱턴의 ‘본군’은 불과 2400명이었다. 군의 병력이 줄어드는 것 이외에도 대륙군은 사실 총체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사실 이때 대륙의회는 1775년부터 새 화폐인 ‘대륙달러(Continental Dollar)’를 발행하였고 이를 13개주 지역 전체에서 쓰도록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통용되지 않았으며 각 주마다 다른 화폐, 또는 신용장(Letter of credit)을 발행해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주로 가면 대륙 달러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대륙달러는 실제 자산(예를 들어 황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은 글자 그대로의 ‘종잇장’이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심했고 찍는 곳도 여러 곳인데다가 도안도 통일되지 않아 위조가 쉬웠다. 예를 들어 전쟁이 끝난 직후 1 대륙달러지폐의 실제 가치는 1센트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 가치가 1백분의 1로 하락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군대가 보급품을 구할 길이 없어 병사들은 몇 주일간 옷을 갈아입지 못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대개의 병사들은 엉덩이를 가리는 코트 밑에 무명으로 된 셔츠 하나 입고 담요 뒤집어쓰고 겨울을 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워싱턴은 뉴저지주의 주도인 트렌턴에 영국군에 고용된 독일 헤센(Hesse)용병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사실 전쟁으로 먹고 사는 용병들은 역사적으로 그 평판이 좋지 않다. 돈을 많이 주면 갑자기 편을 바꾸는 일도 많았고 많은 경우 열심히 싸우지도 않았다. 아울러 돈이 주어지지 않으면 갑자기 강도떼로 바뀌어 고용주의 땅과 백성을 약탈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헤센 용병들은 특히나 악명이 높았다.
워싱턴은 야간에 강을 건너 급습하기 하기로 하고 존․설리반과 너대니얼 그린 휘하에 부대를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강을 건너가려고 하였지만, 문제는 헤센 용병들의 동태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만약 상륙했는데 혹시라도 정찰병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도강 중 가장 취약한 순간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고, 기다리고 있다는 우리는 꼼짝 못하고 몰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워싱턴이 얼마 전 트렌턴으로 보낸 첩자인 존 허니맨(John Honeyman)이 강을 건너와서, ‘양키’들이 작전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더니 용병들의 대장인 요한 롤이 이를 그대로 믿고 집으로 들어가 잔다는 보고를 하였고, 대륙군에게는 천운으로 날씨가 좋지 않아 마을 밖으로 수시로 나오던 순찰대도 나오지 않았다. 이로써 대륙군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대륙군은 델라웨어(Delaware)강을 건너기는 하였지만 강의 흐름에 밀려 트렌턴에서 상당히 먼 곳에 상륙하였다. 결국 트렌턴까지 한 5마일(8km)은 걸어가야 했다. 존 설리번의 부대는 남쪽으로 가고 나머지는 너대니얼 그린 장군 지휘 하에 북쪽으로 갔다. 북쪽으로 간 부대는 마침 돌아다니던 일단의 용병들에게 발각되었지만 그 용병들은 수십 명 밖에 없어 싸우지 않고 트렌턴으로 내뺐다. 용병들이 그린 부대를 맞아 트렌턴 바로 북쪽에서 싸울 준비를 하는 통에 트렌턴은 비었고 설리번 부대는 남쪽으로 열심히 행군하여 아침 8시쯤에 트렌턴에 빈 집을 털듯이 들어갔다. 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용병들은 트렌턴 밖으로 열심히 달아났다. 트렌턴에 도착한 대륙군은 집과 거리에 장애물을 열심히 설치했다. 용병들은 사실 도망한 것이 아니라 재정비를 위하여 철수한 것이고 이윽고 용병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용병 대장 롤은 부대를 나누어 대륙군을 상대하려 하였다. 존 설리반 군을 맞아 대포를 끌고 나왔으나 용병 포병대는 이미 포대를 배치하고 기다리고 있던 대륙군 포병에 제압당했다. 용병대 보병 역시 시내를 가로질러 대륙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대륙군에 저지 당했다. 롤은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대륙군의 후방을 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세 방향에서 쏟아지는 대륙군의 사격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륙군이 승세를 점하자 일부 시민들도 나와서 용병들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총체적인 반격에 맞닥뜨린 용병들은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근처의 과수원으로 후퇴하였고 사방에서 포위한 대륙군의 총격을 받자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헤센 용병대의 피해는 사상 약 100여명에 1500명중 1천이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대륙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는 효과가 있었으며 워싱턴은 어느 정도 유능한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로서 대륙군은 대규모 소집해제로 인한 해체를 막을 수 있었고 다음 해에는 승리에 고무된 많은 인원들이 추가로 대륙군에 입대하면서 다시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트렌턴에서 승리한 대륙군은 여세를 몰아 다음 전투인 프린스턴 전투에서 영국군 부대와 격돌한다. 트렌턴의 승리는 크리스마스에 대륙군의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이루어낸 것이라 많은 역사적인 관심을 받았고 이 때문에 다음 전투이자 트렌턴보다 보다 큰 승리였던 프린스턴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게 되었다.
트렌턴이 대륙군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군 대장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는 9천명을 이끌고 뉴저지에서 대륙군을 몰아내려 출동하였다. 콘월리스는 델라웨어강의 지류인 애선핑크 크릭(Assunpink Creek)에 있던 다리를 건너 트렌턴의 대륙군을 직접 공격하려 하였으나 소총병과 포대를 설치하여 이 다리를 지키고 있던 대륙군에게 3 차례 격퇴당하고 직접 공격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워싱턴은 콘월리스의 본군을 상대하는 것이 무리라 생각하고 근처의 프린스턴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콘월리스는 그의 부장인 마후드(Mawhood)를 프린스턴쪽으로 보내 프린스턴 수비대와 힘을 합쳐 대륙군을 막도록 하였다. 프린스턴으로 진격하던 머서(Mercer)와 세인트 클레어(St. Clair)의 대륙군은 영국군의 반격에 몰려 한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하였으나 워싱턴이 직접 진두에 나서서 전투를 독려하였고 마침 다니엘 힛치콕이 뉴잉글랜드의 지원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면서 전투는 반전되었다. 포위를 우려한 영국군은 프린스턴의 한 건물로 후퇴하였으나 알렉산더 해밀턴의 포사격이 이루어지며 위기에 몰리자 백기를 올리고 항복한다. 이로서 대륙군은 뉴저지 대부분을 지킬 수 있었고 1777년 전반부에 영국군은 뉴저지 북부만 일부 점거하였을 뿐 왕당파들이 있는 남부로 진격할 수 없었다. 아울러 약 1만의 영국군이 뉴저지 북부에 머무르는 동안 민병대원들의 습격대상이 되었고 일명 '보급전쟁(Forage War)'이라 명명된 1월에서 3월까지의 게릴라전 와중에 1만의 영국 병력중 거의 10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자가 되었다.
비록 트렌턴과 프린스턴에서 승리하고 영국군을 뉴저지 북부에서 저지하여 필라델피아로의 진격을 막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대륙군은 게릴라전으로만 영국군의 발을 묶었을 뿐 정규전에서 영국군과의 정면충돌은 여전히 무리였다. 벙커힐 전투나 애선핑크 같이 방어벽을 쌓고 다가오는 영국군에 맞서는 전투에서는 잘 싸웠지만 야전에서의 정규전투에서는 훈련된 영국군의 사격술, 그리고 뒤이은 총검돌격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기 일수였다. 비록 프린스턴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워싱턴의 독전과 뉴잉글랜드 지원병의 도착이전에는 영국군 지휘관 마후드 부대의 총검돌격에 몰려 정신없는 후퇴를 하고 있었다. 1777년 3월이 지나고 추위가 풀리면서 잠시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4월 13일에 바운드 브룩(Bound Brook)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대륙군 지휘관 벤자민 링컨이 영국군의 기습을 받아 황급히 도주하기는 하였으나 전투는 소규모였고 사상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승리를 한 영국군도 바운드 브룩이 지키기 어려움을 알고 군을 속히 철수시켰다.
전투는 6월에 재개되었다. 영국군 지휘관 윌리엄 하우가 약 1만 8천의 대군을 이끌고 주둔지였던 뉴 브런스윅(New Brunswick, 뉴저지에 있는 소도시)에서 나와 바운드브룩을 거쳐 소머셋으로 군을 이동시켰다. 이는 워싱턴의 본군을 유인하기 위한 기동이었으나 워싱턴은 속지 않았다. 하우는 6월 19일에 다시 급속 기동을 시작하였고 하우의 영국군을 놓치지 않으려는 워싱턴은 일부 부대를 보내어 추격하게 하고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뒤를 따랐다. 하우는 이 추격대를 잡기 위하여 군을 매복시키고 이를 격파한 다음 우회기동하여 워싱턴의 본대를 잡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영국군은 윌리엄 알렉산더의 대륙군 선봉대를 기습하여 피해를 입혔으나 워싱턴의 본대는 말려들지 않았고 결국 소규모 승리로 만족하는데 그쳤다. 그리하여 당시 대륙의회의 근거지이자 신생 ‘미합중국’의 수도였던 필라델피아를 함락하려던 하우의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우는 사실 1776년 말에 본국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면서 1만명을 북쪽으로 보내 뉴욕주 북부의 알바니를 점령하고 자신은 필라델피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작전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본국이 이런저런 이유로 증원을 차일피일 미루고 아울러 워싱턴군이 계속 뉴저지에서 후퇴하면서 필라델피아에 가까워지자 미국 수도인 필라델피아를 쉽게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선(先) 필라델피아 공격, 후(後) 북방을 토대로 한 수정안을 본국에 보냈다. 이 수정안에 대해서 알게된 존 버고인은 남쪽에서 공격을 하는 것보다 북쪽 캐나다에서 허드슨강을 따라 알바니를 공략하는 것이 좋다는 건의안을 본국정부에 제출하였고 이를 1777년 2월에 식민지청 장관 조지 저메인(George Germain)이 받아들이면서 버고인의 건의안은 승인되었다. 왕당파가 많은 지역인 남부에 상륙하려는 영국군이 1776년 여름에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서 격퇴당하면서 영국이 남부 공략을 잠정적으로 포기한 것도 이 작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군이 알바니를 점령하려는 이유는 이를 통하여 알바니에서 뉴욕까지 허드슨강 유역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버고인이 이끄는 본대는 참플레인 호수를 통하여 알바니를 공략한다. 부관인 세인트 레저(Barry St Leger)가 이끄는 부대는 세인트-로렌스강을 내려가 모하크강을 거슬러 올라 다른 방향에서 알바니를 공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뉴욕에서 북상하는 영국군이 남쪽에서 알바니를 공격한다. 이로서 허드슨강을 장악하게 되면 영국은 소위 뉴잉글랜드 지역을 다른 지역과 분리시킬 수 있었다. 현재 메인 메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를 포함하는 지역인 뉴잉글랜드는 당시 미국에서 상공업이 가장 발달된 지역이어서 물자와 자본이 가장 많았고 아울러 독립운동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보스턴이 있어 독립파들중에서도 골수독립분자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영국군이 허드슨강을 장악하게 되면 뉴잉글랜드의 물자를 대륙군이 활용할 수 없게 되고 아울러 이념적인 지원도 끊기게 되면서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은 사그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되면 영국은 고립된 뉴잉글랜드를 공략하여 ‘반란’을 조기에 종식시킬 수 있다.
본국에서는 총사령관 하우에게 버고인의 작전을 위하여 북상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하우는 필라델피아 공략을 이유로 완곡히 거절하였다. 사실 이때 워싱턴의 본대가 상당히 약해보였기에 필라델피아가 머지않아 떨어지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버고인의 본대는 약 8000명이었는데 이중 4천이 독일용병들이었다. 아울러 버고인의 본대에는 인디언들도 종군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식민지민들과 싸우면서 그들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도 지형지물에 익숙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독립파나 왕당파를 가리지 않고 식민지민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뉴욕주 북부에 살고 있는 왕당파들 조차 인디언들이 대거 포함된 버고인의 부대에 종군하는 것을 꺼렸고 버고인으로서는 전술적인 효과가 확실치 않은 병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보다 확실하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병원(兵員)들을 버린 셈이 된 것이다. 버고인은 1777년 6월말에 공격을 개시하였고 인디언 동맹들과 참플레인 호수에 만나 1775년에 에단 알렌에게 점령되었던 크라운포인트를 탈환하였다. 이어 티콘데로가 요새도 다시 영국군의 손에 떨어진다.
이때까지는 대부분 강으로 움직여 진격이 쉬웠으나 티콘데로가로부터 알바니까지는 육로로 이동해야 했고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영국군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대륙군은 그렇지않아도 열악한 도로에 일부러 나무를 쓰러뜨려 놓아 영국군의 진격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대륙군은 영국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였고 9월초에 이르러 버고인의 본대는 목표인 알바니로부터 불과 20km 밖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버고인에게는 매우 실망스런 소식이 전해진다. 하우가 필라델피아 공격을 결정하면서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버고인은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지만 클라우제비츠가 말하였듯이 모든 전쟁에는 ‘안개’가 드리워져 있어 그 어떤 것도 원래 의도했던 데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실 앨버니까지 오는 길도 쉽지많은 않았다. 저지부대 역할을 하고 있던 대륙군의 쉴러 장군은 영국군이 도착하기 전에 마을마다 먹을 것과 물자를 치워버렸고 영국군은 맨몸으로 진군하기도 힘든 울창한 숲속은 길을 만들어가며 수레로 이동하여야 했다. 한 편 양동부대 역할을 맡겨 온타리오 호수 방면으로 보냈던 세인트레저의 부대는 대륙군 선봉대를 만나 승리를 하였으나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휘하의 대부대가 몰려오자 먼저 동맹군으로 참전하고 있던 원주민 전사들이 부대를 이탈하였고 이로서 싸울 수 없게 된 세인트레저는 아예 전투를 포기하고 물자도 그대로 버려둔 체 캐나다로 도주하였다.
사라토가에서 대륙군을 이끈 것은 게이츠(Horatio Gates)였지만 실제로 병사들을 이끌고 승리를 일구어낸 것은 베네딕트 아놀드였다. 코네티컷 출신의 아놀드는 보스턴 포위전 당시 대륙군에 입대하였는데 그의 주 목적은 공을 세워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었다. 이기적이고 허영이 심하고 자기중심적인데다 변덕이 심하여 성격적인 측면에서 남과 어울리기는 힘든 인물이었다. 그는 사라토가에 앞서 작전을 놓고 사령관인 게이츠와 심하게 다투었으며 이 때문에 전투중에 게이츠에 의하여 직위해제 당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독립전쟁중 대륙군에서 아놀드만큼 병사를 잘 이끄는 사람도 없었고 전장에서 전술적인 판단력은 상당히 뛰어났다. 그는 에단 알렌이 티콘데로가 요새를 점령할 때 같이 있었고 1775년 대륙군의 캐나다 공격때 참전하였다. 대륙군이 패하고 후퇴할 때 그 후위를 지켜 본대의 안전한 철수를 가능케 하였다. 아울러 챔플레인 호수를 지키면서 1776년에 소형 함선 15척으로 영국의 전함 25척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한다. 그러나 그의 호수비로 1776년에 허드슨강으로 진출하려 했던 영국군의 진격은 1777년까지 지연된다. 아울러 사라토가 전투에 앞서 세인트-레저 휘하의 양동부대를 패퇴시킨다.
세인트-레저의 후퇴를 모르고 있던 버고인은 전장 근처 베닝턴에 대륙군의 물자창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독일 용병들을 보내 이를 탈취하게 하였다. 이에 놀란 버몬트주 의회는 즉시 민병대를 소집하고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베테랑인 존 스타크(John Stark)에게 지휘를 맡긴다. 1777년 8월 11에 베닝턴 인근에 도착한 바움(Baum)의 용병 650명, 그리고 인디언 전사와 영국 소총병으로 구성된 800병력은 그레그(Gregg)휘하의 민병대 선봉과 부딪혔고 이에 바움은 민병대와 전면전을 벌이려 하니 지원을 바란다는 서신을 전령에게 들려보낸다. 이에 버고인은 브레이만(Breyman) 휘하에 약 550명을 편성하여 보낸다. 본격적인 전투는 8월 16일에 벌어졌는데 바움은 근처 하천의 다리 근처에 방벽을 설치하고 인근의 고지에 진지를 만들어 민병대를 격퇴하려 하였다. 민병대의 수가 2천이 넘어 브레이만의 지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병대장 스타크가 용병들의 저항에 고전하고 있던 민병들을 독려하면서 진두지휘하였고 일부 부대를 나누어 고지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용병들은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싸웠으나 결국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때마침 브레이만의 용병 지원부대가 도착하여 민병대를 기습하는 바람에 상당한 혼란이 빚어졌으나 워너(Seth Warner)이 이끄는 또 다른 민병대가 전장에 도착하면서 베닝턴 전투는 대륙군의 승리가 되었다.
용병들이 베닝턴 공격에 실패하고 세인트-레저의 부대까지 전투에서 이탈하면서 버고인의 작전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조공(助攻)이 좌절된 데다가 민병대가 용병대를 통쾌하게 꺾는 것을 본 버몬트와 뉴욕 북부의 주민들이 총을 들고 나와 민병대의 수는 급격히 불어났다. 아울러 버고인 부대 소속의 원주민 전사가 제인 멕레이(Jane McRae)라는 젊은 여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인근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만약 이 전사를 처벌할 경우 원주민들이 편을 바꾸어 적이 될 것을 두려워한 버고인이 결국 처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멕레이는 버고인 휘하의 왕당파 병사와 약혼한 사이였기 때문에 인근의 왕당파들마저 버고인에게 등을 돌렸다. 결국 버고인은 아무런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고 자신에게 남은 6천의 병력으로 작전을 성공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더 이상 기다릴 이유를 찾지 못한 버고인은 앨버니 공략에 나서기로 하였다. 이미 대륙군은 게이츠의 지휘하에 앨버니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베미스 고지(Bemis Heights)에 진지를 구축하고 영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군의 공격은 8월 19일에 시작되었는데 버고인의 목표는 베미스 고지 옆에 있는, 보다 높은 야산을 점령하고 이를 이용하여 대륙군 진지를 포격하는 것이었다. 버고인 휘하의 여단장 사이먼 프레이저(Simon Fraser) 부대는 옆의 숲을 이용하여 조용히 움직였고 버고인의 부대는 대륙군 진지 정면으로 움직였다. 리데젤(Riedesel) 휘하에 남아있는 독일 용병들은 보급품을 호송하면서 허드슨강을 타고 움직였다. 때가 되면 세 부대가 모두 모여 대륙군을 일제히 공격하려 하였다.
게이츠는 이미 감제고지를 차지하고 유리한 위치에 있으니 굳이 영국군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아놀드는 대륙군이 숲속에서의 소규모 전투 경험이 많다는 점을 들어 진격하고 있는 영국군을 요격하려 하였다. 게이츠는 전군을 움직여 영국군을 쳐야 한다는 아놀드의 말을 들어주기를 주저했다. 결국 아놀드 휘하의 부대만으로 영국군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공격에 나선 대륙군 부대중 다니엘 모건의 총병들이 프레이저 부대를 발견하고 이에 총격을 가하였다. 아울러 아놀드의 뉴햄프셔 부대도 공격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프레이저 부대 선봉에 서있던 캐나다 병사들과 원주민 전사들은 흩어졌으나 대륙군은 이들을 섣불리 추격하다 영국군 후속부대의 반격에 격퇴되고 말았다.
프레이저의 강력한 반격에 대륙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프레이저의 부대는 너무 앞으로 나와있었고 뒤따르고 있던 본대와의 거리가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아놀드는 이를 알아채고 재빨리 그의 부대 일부를 이동시켜 프레이저 부대와 영국군 본대사이의 공간을 들이쳤다. 뒤이어 아놀드의 후속 부대들이 도착하면서 본대의 측면에 있던 영국군 21 보병대대가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였고 이 때문에 옆에 있던 영국군 제 62연대가 대륙군 사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때 영국군 20연대가 총검돌격으로 대륙군을 일시 물러나게 하면서 62연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본대의 상황은 여전히 매우 불리하였다. 아놀드는 사령관 게이츠에게 영국군 본대에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수세에 몰린 버고인 역시 뒤따르고 있던 리데젤에게 전령을 급파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게이츠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놀드의 요청을 무시했지만 리데젤은 버고인의 요청에 즉각 부대를 움직여 아놀드군의 측면을 들이쳤다. 이로서 본대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아놀드 부대 역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때 게이츠가 신속하게 지원군을 보내어 독일용병들이 도착하기 전 버고인의 부대를 쳤다면 영국군 본대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게이츠는 부하의 재능을 시기하였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신중했던 탓에 완승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대륙군의 완승으로 끝날 수 있던 프리먼즈-팜(Freeman‘s Farm)의 전투는 양쪽에 많은 사상자를 남긴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다음 날에 버고인의 참모들은 전날의 전투 때문에 대륙군의 배치가 엉망이 되었으니 대륙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버고인은 피해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는지 참모들의 제안을 묵살하였다. 버고인은 이때 대륙군이 후방에서 영국군 보급선단을 나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아예 전투를 포기할 뻔했으나 남쪽에서 헨리 클린턴이 이끄는 영국군이 북진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포기하려는 마음을 거두었다. 그러나 클린턴의 북진은 너무 느렸고 이 와중에 게이츠의 대륙군은 주변에서 병력이 계속 몰려들면서 10월에 이르러 1만 2000까지 늘어났다. 이에 비하여 버고인의 군은 독일 용병들까지 합쳐도 4000명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버고인은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베미스 하이츠에 포진한 대륙군을 공격하기로 한다. 버고인의 목표는 대륙군이 차지한 고지 서쪽의 다른 고지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영국군의 움직임은 대륙군 경계병들에게 포착되었고 다니엘 모건의 부대가 즉시 반격에 나섰다. 이어 아놀드의 부대도 가세하였고 수적인 열세에 처한 영국군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서 영국군 공격을 지휘하던 연대장 프레이저가 모건의 총병들에게 저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는다. 브레이만은 수비진지 한 곳을 점령하였으나 이 마저도 대륙군의 반격에 밀려난다. 버고인군은 다시 강가의 진지로 원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막심한 피해를 입은 버고인의 본군은 원래 진지보다 조금 더 위쪽 안전한 위치로 옮겼으나 대륙군은 틈을 주지 않고 추격해왔다. 영국군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지를 포기하고 공격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티콘데로가 요새로 전면적 후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버고인은 클린턴의 군이 가까이 왔으리라 기대하여 이를 기다리기로 하였고 기다리는 사이 대륙군은 버고인의 군을 겹겹이 에워쌌다. 클린턴의 군은 약 80km 남쪽까지 진출하여 있었으나 민병대의 거친 저항에 북진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회군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동안 클린턴과 버고인의 군은 전혀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군의 전령들이 모두 중간에 대륙군에게 잡혀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10월 17일, 탈출의 가능성도 없고 보급품이 모두 바닥난 버고인의 군은 게이츠에게 항복하고 만다.
만약 트렌턴 전투가 꺼져가는 독립의 열기를 다시 살린 전투였다면 사라토가는 일대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사실 7년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이 전쟁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대륙의회의 수뇌부는 이러한 사정을 모르지 않았고 노련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1776년부터 대륙의회의 대사로서 프랑스 파리에 상주하면서 프랑스 왕실과 대신들에게 미합중국에 대한 지지를 ‘로비’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친 미국파들은 왕실과 정부에 미국의 편에 서서 전쟁에 개입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문하였는데 이는 혹시 미국에서의 전쟁을 통하여 국제정치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을 이용하여 영국에게 앙갚음을 하자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가 언제나 그렇듯이 프랑스 역시 지는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1777년까지 미국은 영국군을 상대로 몇몇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사실 승리도 소소한 승리였고 그나마도 승리보다 패배가 많은 편이었다. 아울러 뉴욕을 점령당하고 대륙의회가 있는 필라델피아도 상시적으로 위협을 받는 등 객관적으로 볼 때 군사적으로 미국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사라토가 전투는 이러한 상황을 일거에 역전시켰다.
우선 전쟁을 통틀어 영국이 세운 가장 거시적이고 획기적인 전략을 좌절시켰다는 것이다. 허드슨강을 장악해 독립전쟁의 ‘엔진’이라고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를 고립시키면 미국 독립운동은 그 동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아울러 캐나다 쪽 영국 병력을 본격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미국 내 영국군의 전력을 크게 증강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라토가에서 대륙군의 승리는 영국군의 전략을 무위로 돌림은 물론 캐나다 병력을 거의 궤멸시킴으로써 북미에서 영국이 활용할 수 있는 병력을 반으로 줄였다. 아울러 미국이 단지 소규모 기습전이나 게릴라전이 아니라 유럽식의 회전(會戰)에서 영국의 대규모 정규군을 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프랑스인들을 고무시킨 것은 대륙군이 존 버고인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유럽에서 프랑스군과 싸워 여러 차례 공을 세운 역전의 지휘관인 버고인을 꺾은 대륙군의 승전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결국 프랑스는 1778년 2월 신생 미합중국과 동맹조약을 맺고 다음 달인 3월에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프랑스는 곧이어 미국 정부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였고 프랑스의 군선과 상선들이 미국으로 많은 물자를 실어 나르게 된다. 프랑스로부터 돈과 물자가 들어오면서 1년 기한의 민병과 의용병에 의존하던 대륙의회는 병사들에게 급료와 함께 군복 등의 물자를 지급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미군에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대포 등의 중화기를 주문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와의 동맹은 프랑스의 해군력이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국군의 상륙 작전과 함포 작전을 그저 손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던 미 대륙군에게 이는 천군만마나 다름 없었다. 이제 영국군의 본거지인 뉴욕조차 완전히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었으며, 영국은 혹시라도 프랑스가 영국 본국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대규모 증원군을 파병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 간의 동맹이 성사되자 영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던 에스파냐 역시 1779년에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1780년에는 영국이 미국을 몰래 도와주고 있던 네덜란드를 상대로 선전포고하면서 네덜란드 역시 미국의 편을 들어 전쟁에 끼어들게 된다. 프랑스와 기타 유럽 국가들의 개입으로 미국독립전쟁의 성격 자체가 변하게 되었다. 단순히 식민지와 영국 본국간의 ‘내전’이 아닌 ‘국제전쟁’이 되었고 아울러 신생 미합중국이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으로부터 정식 국가 인증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프랑스의 물적인 도움도 중요했지만 대륙군을 단순히 민병과 자원병의 모임이 아닌 체계화된 정규군으로 만드는 데는 독일에서 건너온 한 군인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현재 독일 마그데부르크 출신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Friedrich Wilhelm von Steuben, 1730~1794)은 프로이센군 참모부에서 장교로 복무한 사람으로, 프로이센이 감군에 들어가면서 실직을 하게 된다. 이후 생활이 곤궁해 빚에 시달리던 그는 프랑스 국방장관 꽁뜨 드 생제르망의 소개로 전문 군인을 찾고 있던 미합중국 사절 벤자민 프랭클린을 통해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1777년 9월에 그가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직 미국의 대륙군이 사라토가에서 대승을 거두기 전이었고 전황은 미국에게 상당히 불리했다. 뉴저지의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서진(西進)하면서 대륙의회는 필라델피아에서 철수해 보다 서쪽인 요크(York, Pennsylvania)로 피한 상황이었다. 폰 슈토이벤은 대륙의회 의원들에게 당분간 무급으로 대륙군에 봉사하겠다고 했고 1778년 2월 23일에 밸리-포지(Valley Forge)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워싱턴을 찾아가 자신이 배치를 받았음을 ‘신고’하고 곧바로 병사들의 훈련에 착수했다. 사실 폰 슈토이벤은 영어를 할 줄 몰랐고 통역관을 옆에 달고 다니면서 그가 프랑스어로 병사들에게 말을 하면 이를 영어로 통역하게 했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당시 워싱턴 휘하에 있던 알렉산더 해밀턴 대령과 나다니엘 그린 장군의 도움을 받아 훈련교범을 만들었고, 이를 본 워싱턴이 폰 슈토이벤의 교범을 정식 교범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당시 대륙군에는 진을 치는 법, 심지어 구보하는 법도 모르는 병사들이 태반이었다. 슈토이벤은 워싱턴 부대에 들어오자마자 군영의 배치와 위생에 대대적인 수술을 가해, 계급에 따라 천막을 설치하는 원칙을 정하고 화장실이란 개념을 도입했으며 병사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과 화장실은 군영의 반대편에 각각 설치하게 했다. 또한, 폰 슈토이벤은 소위 120명의 ‘모범부대’를 만들어 각종 훈련 항목을 가르치고 이들로 하여금 병사들을 훈련시키게 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부사관들을 육성한 것이다. 유럽의 전문군인으로서 폰 슈토이벤의 가장 중요한 기여라 할 것 같으면, 대륙군에 당시 유럽 정규군의 기본 항목 중 하나인 총검술을 도입한 것이다. 민병 출신들은 사격은 생활을 통해 익히고 있었지만 총검술과 같은 정규 전술에는 취약한 경우가 많았는데 폰 슈토이벤은 전열(戰列)을 형성해 일제사격하는 정규사격방식과 함께 총검을 이용한 돌격과 격투술 역시 훈련시켰다.
이러한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1778년 6월에 벌어진 몬마우스(Monmouth)의 전투에서 영국 정규군과 격돌한 미군은 훈련 받은 대로 대오사격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였으며 무엇보다도 상황이 불리하다고 명령도 없이 후퇴하는 현상이 없어졌다. 아울러 영국군의 총검돌격을 맞아서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폰 슈토이벤이 오합지졸들을 강군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미국독립전쟁에 대한 폰 슈토이벤의 기여도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폰 슈토이벤이 당시 민병대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던 대륙군을 미합중국의 정규군으로 변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쪽에서 허드슨강을 장악하는 대전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영국군은 뉴욕에 있으면서 위싱턴군을 견제하는 데 주력할 뿐 별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은 뉴욕 근처 뉴저지와 버지니아에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뉴욕을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약간의 움직임으로 뉴욕의 영국군을 견제하여 영국군 사령관이 된 신중한 클린턴을 묶어두려 한 것이다.
한편, 북쪽에서의 성과가 지지부진하자 영국은 전쟁을 미국 남부로 옮겼다. 상대적으로 대륙의회와 대륙군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고 왕당파들이 많은 남부 공략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비록 왕당파들이 많았지만 이들이 영국군을 지지할 것인가의 여부는 확실치 않았다. 왕당파들이 본국을 지지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들은 전쟁 초기 독립파들에게 쫓겨 런던으로 피신한 왕당파들로, 이들은 남부로 돌아가 자신들의 재산을 되찾을 생각에서 남부 왕당파의 지지를 과장해 런던 정부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말을 믿은 영국은 군을 미국 남부로 돌려 대대적인 공략에 나섰고 아치볼드 캠벨이 1778년 12월에 조지아주의 사바나에 상륙해 함락하고, 오거스틴 프레보스트(Augustine Prevost)의 지휘 하에 조지아주 오거스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남부에 있던 대륙군의 사령관은 사라토가에서 싸웠던 벤자민 링컨이었다. 그는 일단 부대를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서 끌고 나와 캠벨의 움직임을 견제하고자 했다. 프레보스트는 캠벨에 대한 링컨의 견제를 풀어주기 위하여 1779년 2월에 소규모 부대를 보내 대륙군을 공격하게 했고 링컨도 이를 요격하기 위한 부대를 보내면서 보우포트(Beaufort)에서 격돌하게 된다. 보우포트의 전투는 무승부로 끝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링컨은 캠벨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고 캠벨의 군은 오거스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영국군의 성공이 이어지면서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던 왕당파들이 영국군 휘하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캠벨은 한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1천명의 왕당파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영국군의 오거스타 점령 이후 전황은 미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영국군은 전쟁을 수월하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링컨이 보낸 독립파 민병대 1천명이 존 애쉬의 지휘 하에 조지아주로 들어오면서 오거스타 인근의 다른 민병대와 합류하고자 했고 캠벨은 이를 막기 위해 오거스틴 프레보스트의 동생인 마크 프레보스트(Mark Prevost)에게 군의 지휘를 맡긴다. 마크 프레보스트는 1779년 3월에 브라이어 크릭의 전투에서 애쉬의 민병대에 갑작스런 반격을 가해 거의 전멸수준으로 대파한다. 링컨은 직접 오거스타를 공격하고자 군을 이끌고 찰스턴을 떠났지만 찰스턴을 지키라고 남긴 부하 모울트리(Moultree)가 갑자기 들이닥친 오거스틴 프레보스트의 군을 맞아 싸우지 못하고 황망히 찰스턴 시내로 후퇴하면서 급히 회군해야 했다.
1779년에는 미군과 프랑스군이 힘을 합쳐 사바나를 탈환하려는 작전이 전개되었다. 대륙군 남부 사령관 링컨의 부대와 프랑스 부대가 합류하고 바다에서 데스텡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보조를 맞추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투가 끝났을 때 영국군의 사상자가 60여명이었던데 비해 미/불 연합군은 9백명이 넘었다. 프랑스 함대가 영국군 요새를 포격해 약화시킨 뒤 육상병력이 공격하는 작전이었지만 영국군이 구축한 요새가 의외로 튼튼해 포격에 잘 버텼다. 데스텡은 포격이 실패하였음에도 육상병력의 공격을 종용했고 미/불 연합 부대의 공격은 격퇴당한다.
영국군이 사바나를 지키는 데 성공하자 영국군 사령관 클린턴은 그 여세를 몰아 찰스턴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게 된다. 링컨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찰스턴으로 돌아와 그 수비를 담당하게 된다. 3월 29일에 시작된 찰스턴 포위전은 두 달을 끌게 된다. 영국 함대가 찰스턴 항구를 봉쇄해 보급을 끊고 병력 1만이 찰스턴을 에워쌌다. 벤자민 링컨은 약 5000의 병력으로 찰스턴 시를 지키고 있었다. 포위된 미군을 구원하기 위한 시도도 있었지만 실패하고, 결국 버틸 수 없게 된 링컨은 1780년 5월 12일에 영국군에 항복했다. 찰스턴은 독립전쟁 중 미군이 겪은 최악의 패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항복한 병력도 매우 많았으며, 무엇보다 미국땅에 영국이 마음 놓고 병력을 들여놓을 수 있는 대규모 항구가 영국군에 장악된 것이다.
남부에서 영국의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룬 클린턴은 뉴욕으로 떠나고 찰스 콘월리스가 미국 남부 주둔 영국군의 사령관이 된다. 한편 남부에 있던 대륙군의 잔여병력은 찰스턴 함락후 사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북쪽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콘월리스 휘하의 바나스터 타를턴(Banastre Tarleton)은 이를 추격해 미군을 크게 무찌른다. 이때 타를턴이 미군과 민병 포로들을 학살하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때문에 미군은 그의 이름인 Banastre에 빚대어 그에게 ‘피투성이 반(Bloody Ban)’이란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타를턴은 혁명전쟁 중 미군이 가장 증오하는 인물이 되었고 이후 ‘이게 타를턴의 자비(Tarleton's Quarters)다’는 미군의 전투 구호가 되었다. 이후 몇몇 전투에서 대륙군이 영국군을 꺾었을 때 그들은 적이 항복을 청해도 ‘이게 타를턴의 자비다! 받아라!’라고 외치며 항복하려는 영국군을 무참히 살해했다고 한다.
1780년 8월 16일에 영국군의 북진을 막으려는 호라시오 게이츠의 미군과 콘월리스의 영국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캠든에서 충돌하게 된다. 왕당파들의 병력지원이 신통치 않아 영국군의 규모는 2100명에 불과했지만 게이츠는 가까운 노스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의 민병대에다 1500의 정규군을 합쳐 약 3700의 병력을 보유해 수적으로도 우위에 있었고 대포의 수도 영국군보다 많았다. 그러나 막상 전투에 돌입하고 보니 미군의 좌측에 있던 민병들이 영국 정규군의 정면에 위치하게 되었다. 물론 미군 정규군도 영국 정규군이 아닌 왕당파 지원병들과 맞서게 되었지만 왕당파는 정규 전투경험이 있어 미군 정규군의 공격을 버텨낸 반면 미군을 따라온 민병대가 영국 정규군의 공격에 그대로 허물어진 것이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전사자만 1천이 넘는 대패를 당한다. 이 전투로 영국군은 다시 기세가 크게 올랐고 미군을 지휘한 호라시오 게이츠는 사라토가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위명에도 아랑곳없이 사령관직에서 직위 해제되는 수모를 당한다.
직위 해제된 게이츠를 대신하여 너대니얼 그린(Nathanael Greene)이 남부에서 미군의 지휘를 맞게 되었지만 그린 휘하에는 훈련된 병력이 적었고 전체 규모도 이전의 남부 주둔군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영국군과 정면대결하기 보다는 영국군을 따라다니면서 기습하거나 영국군을 도발해 유인한 뒤 잠깐 전투를 벌인 다음 빨리 후퇴하는 방법을 썼다. 병력의 소모를 막는 동시에 영국군을 지치게 하려는 히트 앤 런 전술이었다. 그는 북쪽에서의 증원군과 주변에서의 지원병들이 몰려들기를 기대하며 1780년 말에서 1781년 초에 이르는 수개월 동안 계속해 영국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그린의 군은 약 15차례 영국군과 싸우면서 한 번도 속시원히 이긴 전투가 없었지만 영국군도 속시원히 이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린의 지연 전술과 더불어 프랜시스 마리온(Francis Marion, 1732~1795)의 게릴라전은 영국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늪지대의 여우’라 불린 마리온은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이민 온 프랑스 위그노인들의 후손이었다. 그는 지형지물에 익숙한 점을 이용해 일부 흑인까지 포함된 수십 명의 민병으로 영국군에 대한 정찰을 하고 소규모 부대와 보급행렬에 기습을 가하는 등 영국군을 괴롭혔다. 화가 난 영국군이 그를 잡으려 하면 그는 늪지대 사이에 난 지름길을 통해 영국군을 따돌렸다. 그의 별명이 된 ‘늪지의 여우(Swamp Fox)'는 그를 소탕하라는 임무를 맡아 그를 잡으려다가 번번히 놓친 타를턴이 ‘저 놈의 늪 여우는 악마도 못 잡을 거다’라고 푸념한 데서 나왔다고 한다.
그린의 계산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린은 지속적으로 병력을 충원 받으면서 병력이 4천명까지 늘었지만 콘월리스는 이곳 저곳을 지키려고 병력을 분산시킨 까닭에 그의 본대는 약 2천으로 줄어있었다. 아울러 그의 본대는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고 철저히 지연전술로 일관하는 그린의 부대를 쫓아다니느라 매우 지쳐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100명 정도의 별동대를 이끌고 주변을 소탕하러 나갔던 타를턴의 부대가 1월 17일에 카우펜스(Cowpens)에서 미군 다니엘 모건(Daniel Morgan) 준장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3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한다. 타를턴의 대패는 그렇지 않아도 병력이 궁한 콘월리스 부대에 크나큰 부담을 안겼다.
이래저래 상황이 풀리지 않던 차에 콘월리스는 1781년 3월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남부의 딥 리버(Deep River) 근처에 포진해 있던 중 대륙군이 현재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보로(Greensboro)의 길포드 코트하우스(Guilford Courthouse)에 모여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동한다. 도망만 다니던 그린을 칠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린은 이미 콘월리스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고 수비진지를 견고히 구축하고 영국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는 일부러 진격을 멈추고 영국군과의 결전을 기다렸던 것이다.
전장에 도착한 영국군은 다음 날에 미군을 공격했지만 수비진지에서 빗발치는 총탄에 공격이 좌절되었다. 이에 영국군은 약간 방향을 틀어 우측에 있던 미군 제 2선을 공격하였다. 어느 정도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지만 숲 속에서 이루어지는 미군의 저격에 고전하며 공격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다. 이때 수비진지를 지키고 있던 미국 정규군과 민병대가 합동으로 돌격해 영국군을 몰아냈다. 영국군은 얼마 후 재차 공격을 시도했고 다시 미군과 난전이 벌어졌다. 이때 그린 휘하의 윌리엄 워싱턴(William Washington)이 자신의 부대를 거느리고 영국군을 우회하여 영국군의 뒤를 치면서 영국군은 위기에 몰렸다. 자신의 군이 자칫하면 패배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콘월리스는 후방에 남은 포병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명했다. 이 포격으로 영국군의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지만 미군의 공격도 주춤했고 이때 타를턴이 기병을 이끌고 미군의 우측을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린은 승리를 따내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되자 언제나 그렇듯이 지체 없이 후퇴했고 이 때문에 길포드 코트하우스의 전투는 대개 영국군의 승리로 기록된다. 그러나 영국군의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4천의 미군 병력중 사상자는 250명 정도였지만 영국군 사상자는 2천명중 550명이었다. 불과 90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병력의 4분의 1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남은 1500명의 병력으로 남부에서 영국군의 작전은 불가능하였다. 콘월리스의 영국군 본대는 그린의 정규군은 커녕 각 지역의 민병대를 상대하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병력이 줄어있었다. 이를 두고 한 영국의 전쟁반대론자들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피루스(Pyrrhus)왕이 “이런 승리를 두 번 다시 하면 나는 완전히 망한다”라고 한 말을 빗대어 “그런 승리를 다시 한다면 영국군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비꼬았다. 콘월리스에게 남은 선택은 결국 버지니아로 북상하여 필립스 장군과 미국을 배신한 베네딕트 아놀드의 군과 합류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콘월리스가 북상하면서 미군은 다시 남부를 장악하게 되고 영국의 남부군은 경각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길포드 코트하우스에서의 치열한 싸움은 독립전쟁을 사실상 종결 짓는 요크타운 전투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1781년 5월에 영국의 남부 방면 사령관 콘월리스가 캐롤라이나 지역을 떠나 버지니아에 도착했을때 그의 휘하 병력은 1400명에 불과하였다. 캐롤라이나와 조지아 지역은 다시 미군이 차지했다. 콘월리스는 일단 버지니아만이라도 독립파들로부터 확실히 떨어뜨려 놓자는 결정을 내리고 베네딕트 아놀드의 3600병력을 인수하고 뉴욕의 본부로부터 2천의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아 약 7천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버지니아에서 미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라파예트의 군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라파예트의 병력은 3천 정도였고 전투경험이 많지 않은 민병들이 다수 섞여있었다. 라파예트는 불리한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전투를 피했고 콘월리스는 병력의 우위를 십분 활용하여 다수의 별동대를 활용하여 버지니아 각지를 약탈하고 공략했다. 한달 쯤 지나 앤소니 웨인(Anthony Wayne) 준장이 정규군을 이끌고 도착했고 윌리엄 캠벨이 전투 경험이 많은 민병대를 이끌고 오면서 라파예트의 병력은 약 4000까지 불어났다.
뉴욕의 영국군 총사령관 클린턴으로부터 포츠머드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콘월리스는 6월 20일에 별동대를 불러들였다. 영국군은 7월 4일에 옛 제임스타운 인근의 제임스 강을 건너게 되었고 라파예트는 이를 노려 영국군을 공격했다. 양군은 7월 6일에 그린스프링에서 만났고 콘월리스는 이동하는 척하면서 뒤에 매복부대를 남겨둬 미군을 함정으로 끌어들였다. 앤서니 웨인이 500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갔다가 영국군의 일제공격을 받았다. 웨인의 무모함으로 인해 패전할 뻔한 것을 라파예트가 신속히 개입하면서 승부는 나지 않았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라파예트와 콘월리스는 이후 본격적인 결전을 하려 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요크타운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북쪽에 있던 워싱턴의 본군은 로샹보(Rochambeau)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뉴욕시 북쪽에서 만나 군을 합쳐 연합부대를 형성했다. 로샹보는 군 경력이 40년에 이르는 노련한 지휘관이었고 관록이 상당했지만 늘 워싱턴에게 지휘를 양보했다. 군 통수권의 분열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부대를 형성한 후 작전을 논하는 자리에서 워싱턴은 영국군의 본영이 있는 뉴욕을 치는 것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했다. 미/불 연합군이 뉴욕의 영국 본군의 세 배이니 지금까지는 단순히 ‘위협’에 지나지 않았던 뉴욕 공격을 감행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다. 로샹보는 점잖게 반대하면서 머지 않아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드 그라스(De Grasse) 제독이 지휘하는 함대가 올 것이니 힘을 합쳐 다른 곳에서 큰 전투를 감행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워싱턴은 고집을 피웠지만 참모들의 반대로 생각을 거두었다. 이어 8월에 드 그라스가 보낸 서신이 도착했는데 29척의 함선이 버지니아 해안으로 항해할 것이며 10월 중순까지 머무를 수 있다고 했다. 드 그라스는 워싱턴에게 버지니아로 내려와 합동작전을 펴자고 했고 워싱턴이 이에 동의하면서 미/불 연합군은 버지니아로 이동하게 된다.
버지니아에서는 콘월리스가 그린스프링 전투 이후 포츠머드에 도착해 포츠머드에서 승선을 기다리고 있다는 서신을 클린턴에게 보냈다. 그러나 3일후 클린턴은 이전의 명령을 취소하고 콘월리스에게 대기할 것을 명했다. 클린턴은 콘월리스가 있는 요크강과 제임스강 사이의 해안이 항구를 만들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들어 콘월리스로 하여금 인근의 요크타운으로 이동한 후 도착하자마자 항구를 만들라는 지시를 한다. 얼마 후 포츠머드에 영국 수송선들이 도착하였고 콘월리스와 4500 병력은 수송선들을 타고 8월 1일 버지니아 중부 해안의 요크타운에 도착한다. 한편 바나스터 타를턴은 자신의 기마대와 함께 육로로 출발해 8월 7일에 요크타운에 도착한다. 8월 22일에는 포츠머드에 남아있던 잔여병력이 모두 요크타운에 도착한다. 그러나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살 떨리는 전투의 공포 대신 6주간의 고되고 지겨운 노동이었다. 사령관 클린턴이 명령한 진지 구축과 항만 건설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군사시설을 짓기 위한 군대의 노동은 고대 이집트, 로마, 중국 등 시기와 지역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그 노동을 담당해야 하는 병사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8월 31일에 요크타운의 진지공사현장에 있던 한 병사는 쓰기를:
요크타운에서의 진지구축이 끝나기도 전에 워싱턴의 본대를 포함한 미/불 연합군은 8월 19일에 로드아일랜드주의 뉴포트(Newport)를 떠나 버지니아로 진군을 시작한다. 허드슨 강 유역을 지키기 위해 남겨둔 수비대를 제외한 7천의 병력이 길고 긴 진군을 하는 동안 워싱턴은 미/불 연합군의 목표가 뉴욕임을 암시하는 가짜 명령서를 여러 차례 발송한다. 이 명령문의 일부는 뉴욕에 있던 영국군 사령관 클린턴의 손에 들어갔다. 사실 이는 미/불 연합군의 진짜 목표가 요크타운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연막전술이었다. 이 연막전술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면서 클린턴은 혹시라도 뉴욕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뉴욕에 계속 웅크리게 된다. 앞서 언급한 콘월리스군의 이동은 사실 워싱턴의 연막전술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뉴욕에 대한 위협 때문에 콘월리스군을 북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하여 포츠머드에 오라했다가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콘월리스에게 버지니아에 그대로 있으라고 한 것이다.
워싱턴군의 진격은 9월 초 약간의 차질을 빚는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미군병사들이 즉시 그 달의 월급을 받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며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대륙의회가 재빠르게 병사들의 급료를 지급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고 마침내 9월 5일에 드 그라스의 함대가 버지니아 해안 인근에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드 그라스는 태워온 3200병력을 하선시켰고 이들 병사들은 근처에 있던 라파이예트의 군에 합류한다. 프랑스 병사들을 내려놓은 드 그라스는 북쪽으로 이동해 체서피크만(Chesapeake Bay) 북쪽 지역에서 워싱턴의 병사들을 실어 날랐다. 워싱턴은 본격적으로 전투를 치르기 이전에 그의 고향인 마운트 버논에 들른 다음 다시 버지니아로 향한다. 워싱턴은 9월 14일에 버지니아주 북쪽 윌리엄즈버그에 도착했고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미/불 연합군의 지휘권을 인수하였다.
프랑스 함대가 체서피크만에 들어왔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정보였다. 드 그라스가 8월에 카리브해를 떠나 버지니아로 향할 때 카리브해 지역 영국함대 사령관인 로드니(George Brydges Rodney)제독은 사무엘 후드 소장에게 14척의 함선을 주고 드 그라스를 추격하게 하였다. 어디로 가는지 알기 위함이었다. 8월 25일에 체서피크만의 입구에 도착한 후드는 프랑스 함선들이 보이지 않자 다른 곳으로 갔다고 생각하고 바로 뉴욕으로 향한다. 사실 후드는 프랑스 함대보다 오히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프랑스 함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뉴욕에는 유럽에서 지원물품을 수송하는 미국선단을 봉쇄하는 역할을 하고 있던 뉴욕방면 함대 사령관인 토머스 그레이브스(Thomas Graves) 소장이 머물고 있었다. 후드가 자신의 함대를 그레이브스 휘하 5척의 전열함(Ships of the Line)과 합치면서 영국군의 전력은 19척이 된다.
한편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에 있던 프랑스 함대 지휘관 드 바라 생 로랑(De Barras Saint-Laurent)은 체서피크만에 도착했다는 드 그라스의 연락을 받고 8척의 전열함, 4척의 프리기트함, 그리고 요크타운의 영국군 진지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공성장비를 실은 18척의 수송함과 함께 체서피크만을 향하여 항해를 시작하였다. 드 바라는 움직임을 숨기기 위하여 먼 바다로 나가 체서피크만까지 기존항로를 크게 우회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 바라의 함대가 출항한 것을 알게 된 영국군은 드 바라가 향한 곳이 체서피크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프랑스 함대, 특히 드 그라스 함대의 규모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었다. 후드가 연락을 위해 체서피크만에 남겨둔 영국의 소형함 2척이 드 그라스 함대의 도착으로 체서피크만 안에 갇혀버리면서 전혀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당시로서는 거함이었던 전열함이 19척이나 있었고 이전에 프랑스와 에스파냐 함대에 거둔 승리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함대가 막상 체서피크만에 도착하여 보니 프랑스 함대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대규모였다. 드 그라스의 함대에는 대함인 전열함만 28척에다 각종 소형함들까지 있어 영국군은 자칫 잘못하면 중과부적으로 패할 수도 있었다.
1778년 9월 5일 체서피크만 입구에 있던 프랑스 함대는 오전 10시경에 수평선위에 영국함대가 나타나자 즉시 닻을 걷어올리고 전투에 대비하였다. 프랑스는 체서피크만의 입구를 사선(斜線)으로 막는 전열(戰列) 대형을 취하였다. 프랑스 함대의 끝에는 물위로 나온 무수한 모래톱이 있어 영국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우회해 체서피크만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국함대가 체서피크만으로 들어가려면 프랑스 함대를 돌파하여야만 했다. 오후 2시경에 양 함대가 대포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면서 함포전이 시작되었다. 지휘를 맡은 그레이브스는 전투에 들어가면서 전기(Battle flag)를 올리고 있었는데 이럴 경우 모든 함대는 일렬로 정렬하여야 했고 어떤 경우에도 대열이탈이 금지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수적으로 열세인 영국함대에 불리해져 갔다. 영국함선 Terrible號의 경우 직격탄을 여러발 얻어맞아 침몰직전까지 몰렸고 Intrepid號는 무려 65발의 포탄을 맞아 배가 그야말로 걸레짝이 되었다. 또 다른 전열함인 Shrewbury號는 함장이 전사하고 홀수선 아래쪽에 다섯 발의 직격탄을 맞아 역시 침몰위기에 몰렸다. 영국함대의 후위는 아직 포의 사정거리 밖이어서 그레이브스의 함선들을 도와주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전기가 내려지고 자유전투가 허락되면 얼마든지 대형을 풀고 전투에 뛰어들 수 있었지만 그레이브스는 전투시의 혼란 때문인지 배틀플래그를 내리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얼마 후 그레이브스는 깃발을 바꾸었는데 하나는 직렬(直列, Line ahead), 즉 적 함대에 천천히 다가가 모두 일제히 평행대형을 이루라는 신호였고 또 하나는 접전(接戰, Close Action) 즉 최대한 빨리 다가가 포사격거리에 진입하는 즉시 임의로 측면으로 돌아 발포하라는 신호였다. 상호 모순되는 두 신호 때문에 영국함대는 혼란에 빠져 함대가 유기적으로 싸우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오후 6시 30분경 해가 지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함대가 불리한 상황에 처한 것을 감지한 그레이브스는 뒤로 잠시 물러날 것을 명하였다. 두 함대는 해안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 일간 서로를 노려보면서 기회를 노렸다. 이 와중에 먼 바다를 돌아온 드 바라의 함대가 재빨리 체서피크만으로 진입해 물자와 대포등을 육군에게 전달하고 드 그라스의 함대와 합류했다. 이로써 드 그라스의 함대는 드 바라의 선단이 합류하며 전열함이 30척이 넘게 되었고 영국함대는 완전히 수적인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그레이브스는 열세를 인정하고 함수를 돌려 뉴욕으로 철수를 명하였다. 프랑스 함대가 참으로 오랜만에 영국해군을 꺾은 전투였고 바다에서 콘월리스의 군단을 지원할 수 있었던 함대가 철수함으로써 콘월리스군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9월 14일에 윌리엄즈버그에 도착한 워싱턴이 지휘하게 된 병력은 미국 대륙군 8800명과 프랑스군 7800명을 합쳐 16600명이었다. 여기에 각지에서 모여든 민병 3천명이 합류했다. 요크타운 내에 포위된 콘월리스의 병력은 영국군 6000여명과 독일용병 1000여명을 합쳐 약 7000이었다. 체서피크만 건너 델라웨어주 글로스터(Gloucester)에 포진한 타를턴이 1000명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체서피크만이 프랑스 해군에게 장악된 상황에서 타를턴의 병력은 콘월리스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비록 진지을 단단히 지어놨다고 하지만 외부의 지원이 끊겨 고립무원이 된 콘월리스의 군은 사실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였다.
부대편성을 마치고 서로 역할을 정한 미/불 연합군은 9월 26일에 추가로 공성무기와 물자를 전달받고 9월 28일에 윌리엄즈버그에서 출발하여 요크타운을 포위한다. 포위군은 넓은 반원의 형태로 요크타운을 포위하고 참호를 파면서 포위망을 좁혀간다. 영국군이 만약 이때 외곽에서 아직 채 집결하지 않은 연합군을 공격하였다면 각개격파 형식으로 많은 피해를 입혀 좀 더 오래 버틸 수도 있었으나 콘월리스는 병력의 집중을 이유로 9월 29일에 대부분의 병력을 시내로 불러들였으며 다만 미/불 연합군을 막기 위하여 일부 병력을 요크타운 밖의 고지에 포진시겼다. 9월 30일에 프랑스군이 요크타운 서쪽방면에 있는 영국군 고지진지를 공격하였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격퇴되었다. 콘월리스가 병력을 불러들인 이유는 요크타운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클린턴이 5천의 지원군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콘월리스는 병력을 최대한 아끼려고 하였고 전투 초기에 접전을 피한 것이다.
초전에서 소규모 전투이후 지리한 참호전이 재개되었고 워싱턴의 병사들은 마침내 10월 6일에 요크타운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평행참호(Parellel Line)를 구축하고, 보유하고 있는 62문의 대포를 이용하여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콘월리스의 군 역시 62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부에서의 작전중 이동이 잦았기 때문에 많은 수송수단이 요구되는 중포(重砲)가 거의 없었다. 영국군의 중포는 24파운드 1문이 유일하였고 나머지는 이곳저곳에서 잡다하게 끌어모은 중소화포였다. 프랑스는 비록 해군력에서 영국에 뒤질지 몰라도 화포 개발에 상당한 공을 들였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화포는 성능과 사거리면에서 영국군 포를 압도하였다. 미/불 연합군은 24 파운드 중포만도 30문이었고 추가로 20문의 18파운드 캐논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중포이외에도 54문의 박격포를 가지고 있어 영국군이 구축한 방벽을 넘겨 포탄세례를 안겨줄 수 있었다.
드디어 10월 9일에 영국군 진지들에 대한 연합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탄은 영국군이 구축한 각 진지는 물론 요크타운 시내 콘월리스의 사령부 근처에도 떨어지면서 영국군의 혼을 빼놓았다. 영국군 포병은 반격하려 하였지만 연합군의 포격은 쉬지않고 계속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영국군 포들이 파괴되어 영국군은 더욱 심한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10월 11일에 워싱턴은 제 1 평행참호에서 약 400미터 나간 지점에 다시 평행참호를 구축했는데 이 옆쪽에 영국군이 지키고 있는 고지 2개가 있었기에 이를 차지해야 요크타운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10월 14일에 워싱턴은 이들 진지에 대한 야습을 감행하였다. 한 곳은 400명의 미군이, 다른 고지는 400의 프랑스 병사들이 공격을 맡았다. 미군의 야습은 완전히 성공하였고 프랑스군 공격은 장애물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내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콘월리스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다음 날 미군이 지키는 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프랑스군이 신속하게 구원을 오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미군의 포격은 더욱 심해졌고 그렇다고 하여 프랑스 해군이 지키고 있는 바다로 탈출할 방법도 없었다. 식량도 떨어지고 있었고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면서 날씨는 추워지고 있엇다. 콘월리스의 영국군에게 구원의 손길은 없었다. 클린턴이 약속한 5천의 지원병은 끝내오지 않았다. 결국 콘월리스는 패배를 시인하고 10월 17일에 연합군에 항복의사를 전달한다.
콘월리스는 항복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조건을 달아 영국군의 병력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는 일단 무장해제하고 미국 땅에서는 싸우지 않는 조건으로 일종의 ‘사면’을 요청하였으나 워싱턴은 이에 단칼에 거절하고 영국군이 이제는 포로 신세이며 따라서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10월 19일에 영국군은 요크타운에서 행진대열로 나와 연합군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기를 모두 내려놓고 항복한다. 이 행렬을 이끈 영국군의 찰스 오하라(Charles Ohara) 준장은 워싱턴 대신 로샹보에게 군도(軍刀)를 내어주는 항복의례를 하고자 하였다. 패자로서 항복할 지언정 ‘반란군’인 미군의 장군보다는 그래도 유럽인에게 항복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로샹보는 오하라의 군도를 받기를 거절하였고 오하라는 할 수 없이 워싱턴에게 군도를 내밀었다. 워싱턴은 오하라의 오만함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군도를 받지 않았다. 결국 오하라는 워싱턴의 부장(副將)인 벤자민 링컨에게 군도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 뒤로도 카리브해와 플로리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서부 변경이었던 오하이오 지역에서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요크타운에서의 패배는 13주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끝났음을 의미하였다. 클린턴과 콘월리스는 패배에 대한 책임을 놓고 서로를 비난하며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이미 겁쟁이로 낙인찍혔고 미국과의 전쟁을 그르친 자로 인식되어 그 명예가 땅에 떨어진다. 이와 반대로 콘월리스는 계속하여 군에 남았고 이후 인도로 파견되어 군공을 세운다. 영국에서도 계속되는 전쟁에 사람들이 지쳐갔고 국가재정에 대한 부담도 늘어만 갔다. 사라토가에서 북부의 영국 병력이 꺾였다면 요크타운 전투는 13주 남부에서 영국의 세력이 소멸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뉴욕에 있는 클린턴의 병력은 온전한 편이었지만 이제 기타 병력이 모두 패한 상황에서 클린턴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아울러 요크타운의 대패 소식이 영국 본국에 전해지면서 전쟁을 주도하였던 노스(Lord North) 내각은 붕괴되었다. 결국 프랑스의 중재로 협상이 열리고 1783년에 파리협상에서 영국이 미국을 국가로 인정하면서 ‘미합중국’이란 나라가 탄생한다. 다음은 파리조약의 10항목 중 제 1항의 내용이다
제 1 항
영국의 국왕폐하께서는 다음의 연합된 주들 ―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베이, 로드아일랜드와 프로비던스 지역, 코네티컷,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리고 조지아 ―을 자유 주권 독립을 겸한 국가로 인정하고 국가로서 합당한 대우를 한다. 그리고 국왕폐하와 그 자(子)와 손(孫)들은 이 연합주들과 각 부분들에 대한 통치와 자산(資産)과 영토상의 권리 일체를 포기한다.
미국독립전쟁은 일반적으로 The War for American Independence라 불린다. 이 전쟁의 결과로 영국으로부터 신생국으로 독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독립전쟁은 또 다른 명칭이 있다.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이다. 즉 ‘미국혁명전쟁’이다.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13주에 대한 영국의 왕정(王政)을 종식시켰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체제를 건설한 혁명으로서의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전쟁은 독립전쟁인가, 아니면 혁명전쟁인가?
이 전쟁의 결과가 영국의 통치로부터 북미 동부의 13개주가 떨어져 나가는 결과로 나타났지만 필자의 의견으로 이 전쟁은 혁명전쟁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 당시 유행하고 있던 천부인권설을 기본으로 하여 치자(治者)와 국민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의 권리를 영국의 통치자들에게 요구를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의 시민과는 개념이 다르지만 미국을 건국자(Founding Fathers)집단이 요구한 것은 국가가 '개인의 자유로운 연계 (Association of Free Individuals)'를 바탕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각 개인은 그 자체로서 그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정부는 권리있는 사람들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은 존재일 뿐이었다. 즉 왕명으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자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하는 ‘백성(Subject)'이 아니라 시민(Citizen)들에 기반한 국가의 건립이었다.
이는 왕에 의한 통치를 당연시하고 있던 당시의 영국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국가와 공존할 수 없었고 ‘시민들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만약 영국 정부가 어느 정도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 많은 자치를 허용했어도 계몽주의 사상이 이미 퍼져가고 식민지민과 본국간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에서 결국은 갈등이 재발하여 폭발하였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천부인권사상과 계몽주의는 유럽에서 발현하였지만 왕정이 공고한 유럽보다는 왕정을 피해 새로운 곳에 정착한 사람들 사이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향후 유럽역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유럽에도 새로운 정치사상이 많이 퍼져 있었기는 하지만 미국의 독립전쟁은 새로운 사상이 실제로 구현될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를 제공해 주었다. 이는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병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이 전쟁에 참전한 많은 유럽인들에 의하여 ‘시민’의 권리에 대한 사상이 유럽에 급격히 퍼지게 된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부 논자는 미국의 혁명전쟁이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반 병사들만 아니라 라파예트같은 귀족도 일반 국민들의 권리의 중요함을 인식하고 이후 프랑스 인권선언(De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의 입안자가 된다.
프랑스는 영국을 약화시키고 신생국 미국과의 무역을 독점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목적에서 전쟁에 참전하였지만 미국의 경제적인 기반이 약하여 일정 수준이상의 교역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그렇지 않아도 국가경제가 취약한 상황에서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여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 결국 국가경제는 더욱 어려워졌고 중산층과 백성들의 불만이 급증하게 되며 이러한 불만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아울러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국가가 생겼다는 것은 아메리카가 영구히 유럽인들의 식민지로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였다. 대양을 사이에 두고 다른 환경에서 다른 생활방식을 영위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한 사람들이 유럽인과 같은 방식으로 언제까지나 살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미국을 시작으로 카리브해의 섬나라들, 그리고 중미와 남미 각국이 식민본국으로부터 독립한다. 그리고 아메리카는 유럽과는 다른 세력권을 형성하기 된다. 아메리카 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건국은 정치적인 혁명임과 동시에 아메리카가 유럽으로부터 분리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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