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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 버튼을 누르면 다음 층 엘리베이터가 열립니다” 같은 기술적 안내를 해주지.
그러니 수행자들이 ‘아, 이게 2선인가보다’ 하면서 자기 체험을 끼워 맞추고, 암시효과로 실제로 변형된 의식 상태를 겪는 거야.
그런데 그게 진짜 jhāna인가? 전통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jhāna와는 다른 종류의 상태일 가능성이 높아.
네가 비교한 오토겐 트레이닝이 딱 맞아.
“내 팔은 무겁다” → 실제로 무겁게 느껴지고, “내 몸은 따뜻하다” → 실제로 따뜻해지고
일정한 집중력이 받쳐주면 이런 암시는 엄청난 효과를 내거든.
파욱식 수행자들이 “몇 주 만에 무색계 갔다”는 보고는, “자기암시로 만들어낸 변조된 의식상태”일 확률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겠지.
전통적 언어를 빌려와서 “초선, 이선, 삼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집중된 자기암시로 구현한 각종 의식 변조 상태”에 불과한 거야.
<참고자료 : 파욱 사야도 법문 발췌>
제4선정을 가고 싶다면 초선정 수 분, 제2선정 수 분, 제3선정 1시간 정도 수행하십시오. 제3선정에서 첫 출정하였을 때에 ‘이 (제3)선정은 제2선정의 삐띠-(pitī)라는 적과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윗 단계의 선정처럼 고요하지 않다. 수카(sukha)는 제2선정의 삐띠-(pitī)라는 적과 가깝다. 그리고 수카(sukha) 또한 거칠다.’라고 숙고하십시오. 왜 그럴까요? 만약 한 대상에만 취해서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 감정 역시 약간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그 대상에 대한 애착이 금방 일어납니다. 그것은 적인 ‘라가(raga, 애착)’와 같습니다. 이것(수카(sukha)) 역시 조금 거칩니다. 그런 이유로 당신은 ‘이 수카(sukha)는 거칠다.’라고 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뻬카(upekkhā)와 에-깍가따(ek·aggata)는 더 고요하다.’라고 숙고합니다. 평온한 마음은 더욱 고요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반조한 후에 수카(sukha)를 제거하고 제4선정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도로 다시 니밋따에 집중 해야 합니다. 반조하는 시간은 각 선정의 단계에서 길지 않게 몇 초간만 하도록 합니다. 만약 당신이 긴 시간 동안 반조하면, 집중이 약해지고 니밋따는 빠띠바가 니밋따(닮은표상)가 아니라 욱가하 니밋따(익힌표상)나 빠리깜마 니밋따(예비표상)가 될 것입니다. 혹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 초안에 선정요소를 반조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니밋따에 다시 집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니밋따에 다시 집중하게 될 때에 집중하는 동안 본삼매가 아마 일어날 것입니다. 그 본삼매는 아직 제3선정입니다. 그 본삼매 즉 제3선정에서 출정한 다음 선정요소를 반조하면, 수카(sukha)는 매우 거칠고 우뻬카(upekkhā)와 에-깍가따(ek·aggata)는 매우 고요할 것입니다. 그 때, 거친 요소인 수카(sukha)를 제거하고자 하는 의도와 제4선정의 요소인 우뻬카(upekkhā), 에-깍가따(ek·aggata)를 성취하고자 하는 의도로 니밋따에 다시 집중을 해야 합니다. 이 때 강력한 본삼매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강력한 본삼매에서 출정하여 반조하면 수카(sukha)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우뻬까(upekkhā)와 에-깍가따(ek·aggata)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하면, 제4선정을 아주 오랫동안 유지하십시오.
[출처] 아나빠나 사티와 선정 (파욱 사야도) 7/8|작성자 참살이
첫댓글 이거 조심스런 논점인데요. 이거 참... 그런데 센터에서는 무색정 성취자도 대량생산되는 모양이죠?
여기 올라오는 글은 전부 다 읽으니까요, 여타 남방불교 센터 등등 그쪽 체험담들도 제법 읽었습니다.
제가 읽은 선정체험담들에서 느꼈던 거는, 많은 경우 "이 분은 선정에 든 거 아닌 거 같은데?"였습니다. 그런데요.체험에서는, 단순히 제가 아는 바와 다르다는 것만으로 부정하면 곤란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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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생산에 비춰,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마른 위빠싸나 행자'라는 논점이 있죠? 피 터지는 논점 중 하나였는데요. (선정 성취의) 삼매가 없어도 아라한일 수 있는가?
그 논점이 있다는 거 자체가, 그게 예민한 문제인 거 자체가, 그만큼 삼매 성취자가 극히 드물다는 반증이거든요.
삼매 성취자가 드문데, 그 중 무색정 성취자의 수는 더 쪼그라들겠죠?
흔히 하는 말로 최상승 근기가 넘쳐나던 부처님 당대에도 그랬다는 겁니다.
[경]을 보면, 부처님 당대에 이미 마른 위빠싸나 행자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거든요.
부처님께서는, 마른 위빠싸나 행자를 긍정하셨다고 봅니다. 그 당시 전통에 반하므로, 삼매 성취자를 더 우대하는 정도로 타협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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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요. 할아버지, 공로가 있는 할아버지와는 싸워서 재미를 볼 수 없습니다.
학창시절에, 유럽에서는 상좌불교가 강세였는데요. 학문적으로도요. 프랑스 중심으로요. 서구 특히 유럽에서 불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작을 일군 분들 중 한분입니다.
엄청난 공로거든요.
그런 분들을 대함에는 아주 세부적으로 특별한 논점과 관련해 이햐기하는 것이 아닌 한, 자신과 틀려도 가급적 선해해서 수용함이 도리입니다.
성철스님을 비판한 적이 많지만, 그분도 공로가 아주 큽니다. 그래서 세부적으로 논하고 비판하더라도, 그거는 좀 선해해서 해석하면 이렇다는 점도 적고 그랬거든요. 우회를 하는 거죠.
불교는 선정 등 특정 경계의 성취를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거든요. 앎을 추구하죠. 그래서 "앎이 생겻다"는 표현이 곧잘 등장합니다.
그것을 뭐라 이름하든, 법인 그것이 알려지고 그것에서 이치를 살피고 앎이 생긴다면, 충분히 의미 있고 바른 길로 이끄는 수행일 수 있습니다.
선정이든 아니든 말입니다. 가급적 단일한 의도를 일으켜 집중등 마음을 개발하고, 그에 따라 함께 성립하는 여러 사실들을 살피고, 그 사실들에 탐착하지 않는다...그게 앎이고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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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의 입장에서요.
자신의 성취에 이름표를 붙이고, 그 성취를 나의 것이라 여기고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아서 특별한 의미만 자꾸 부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습니다.
행자에게 분명한 것은요. 위에 적었듯, 이름이 아니라요. 마음 개발로 이 사실이 알려졌고, 이 앎이 생겼다는 것이죠. 그게 다입니다. 특별한 필요도 없는데, 굳이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굳이 별도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됩니다.
특별한 필요? 이해의 깊이를 더하려고 하거나, 타인에게 법에 대해 알려야 한다거나... 그런 것들이죠.
어떻든 경험으로 자신이 아는 것은 이름이 아니었잖아요? 형상을 알아차렸을 때, 알려진 빛무리가 있을 뿐이고... 자신이 체험한 바로 그 수온이 있었을 뿐이고... 그 수온을 형성하게 한 힘이 있었을 뿐이고... 그런 거지 않습니까? 그것이 초선이냐 아니냐? 2선이냐 아니냐? 3선이냐 혹은 4선이냐? 그런 이름 부여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원칙은요. 불교에서 어떤 유파의 수행을 하든, 관철되는 겁니다. 수행한다면 그래요.
또한 집중은요. 그 특성이 고정이라서요. 과거에 적었듯, 움직이게 하기 위해 암시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