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경제수석 지낸 조선쟁이
나이 70에 탄소포집 시작
20년 공들여 기술을 찾았다
몸은 늙어도 새롭게 도전
1932년생이니 올해로 만 90세다. 신동식.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산으로 피란 와 미국 군함을 봤다. 스물이 채 안 된 청년의 가슴은 "나도 저런 멋진 배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으로 꿈틀댔다. 서울대 조선공학과에 진학했다. 졸업을 해도 한국에선 일자리가 없었다. 스웨덴 조선소를 뚫었다. 거기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은 뒤 배의 나라 영국으로 간다. 세계 최고의 선급협회인 로이드에서 국제검사관이란 자리를 얻었다. 초봉이 한 달 생활비의 8배나 되는 선망의 직장이었다. 한 발짝 더 전진한다. 안목을 넓히기 위해 미국으로 진출한 신동식.
린든 존슨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찾았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잖소. 조선공업을 해봅시다." 그 말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가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청와대 경제수석은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이공계 출신의 젊은 피 신동식을 임명한다. 양철 한 조각 만들지 못하는 척박한 대한민국은 그렇게 세계 어디에도 없는 최대 조선소를 지어보자는 담대한 도전을 시작했다.
조선에서 시작해 제철, 석유화학, 기계, 전자 산업의 기초적 발전계획을 마련한 그는 짧고 굵은 6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조선쟁이'의 길로 들어선다. 대기업 공공기관의 잇단 러브콜을 뿌리치고 다 망해가는 한국해사기술(KOMAC)을 인수한다. 이곳에서 그는 컨테이너선 같은 기본 선박부터 쇄빙선, 심해탐사선, 친환경선박 등 특수선까지 총 2024종의 선박을 설계했다. 대우 옥포조선소,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건설도 그의 손을 거쳤다.
세월은 흘러 충분히 멋진 인생을 살았다고 회고할 일흔 즈음에 그는 제2의 삶을 시작한다. 그게 탄소포집(CCUS)이었다. 교토의정서가 채택된 1997년께부터 세계는 온실가스 감축에 매달렸다. 경제를 넘어서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인식했다. 그 역시 선박을 하다 보니 배가 뿜어대는 이산화탄소가 골칫거리였다. 기술을 찾아 나섰다. 약 20년 전인 2003년께였다.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거야 어찌 보면 단순한 기술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기술이 그렇듯이 경제성, 실효성, 안전성이란 3박자를 갖춰야 한다. 많은 기업과 연구소들이 매달렸지만 대부분은 비용도 많이 들고 독소물질도 다량 배출됐다.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기술을 찾아보자고 세계 곳곳을 누빈 지 10년. 신동식 회장은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한 작은 회사를 발견한다. 그의 눈엔 보물이었다. 다시 10년을 공을 들였다. 이 회사와 협업을 진행하면서 기술을 발전시키고 설비를 만들고 시장을 개척했다. 기술특허야 노르웨이 것이지만 이를 기반으로 설비를 만드는 건 한국의 제조업이었다. 시장은 충분했다. 이산화탄소는 쉽게 말해 쓰레기다. 이 쓰레기를 처리해주면 고마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화력발전소가 대표적이다. 또 이 쓰레기를 돈 주고 사는 곳이 있다. 대표적인 게 석유시추 업체다. 이산화탄소를 집어넣으면 훨씬 많은 양의 석유가 나오기 때문이다.
나이 70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 이제 빛을 보려고 한다. 정치인, 학자, 시민운동가들이 탄소중립하자고 허공에 외쳐댈 때 신동식은 땅을 딛고 몸을 움직였다. '그린 코스프레' 같은 짓거리는 하지 않겠다며. 조국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며.
물론 그의 사업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수많은 경쟁자들이 시장에 진입하고 수많은 신기술이 탄생할 것이다. 그에게 닥칠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기에 그의 몸은 늙었고, 남아 있는 날들도 많아 보이진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신동식 옹(翁)이 나이 90에 펼치는 도전을 뜨겁게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