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결국은 유급으로 결정나나 보다. 잘못된거 하나 고쳐보겠다고 수업을 뒤로한채 나온지 80여일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얻은거 없이 들어갈수가 없어서 유급불사로 투표를 했고 결국엔 유급으로 결정이 되었지만 아쉽기는 그지 없다... 내 6 년 대학생활이 1년을 더해서 7년째로 접어 들어가나부다.. 그것참...
모두들 의료계 파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전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을거라 판단해서 이글을 올린다. 좀 길지만 한번 잘 읽어보면 우리가 왜 유급을 당하면서까지 이 싸움을 지속하려 하는지 알게 될것 같다.. 월간중앙에서 퍼온글이다.
왕따된 의사들의 분노 ...
서울 용산구 이촌1동 302―75. 한강변에 자리잡은 대한의사협회 정문 앞에 기자는 서 있다. 대한민국 7만명 의사들의 결집체요, 의약분업으로 촉발된 의료계 대정부투쟁의 상징적 본부다. 교수협의회·개원의협의회·봉직의협의회·전임의협의회·전공의협의회가 이곳에서 교차하고, 세차례 의사파업을 이끌었던 의권쟁취투쟁위원회(의쟁투)와 그 지도부인 의쟁투 중앙위원회도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현관 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문 한가운데 기자의 눈높이로 ‘기자 출입금지’라고 쓴 종이 표지판이 딱 붙었다. 그것도 그냥 출입금지가 아니라 ‘절대 출입금지’다. 언론에 대한 의사들의 적대감이 차갑게 감지된다. 무릅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총무실, 회의실, 임원실, 회장실… 어느 방문이든 ‘기자 절대 출입금지’다. 의사들이 언론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가를 그 여덟글자는 웅변하고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가니 젊은 의사 둘이 뭔가 쓰다 말고 고개를 든다. 인사를 하자 쳐다보는 눈빛들이 덤덤하다. “언론에 대한 경계가 삼엄한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한 사람이 탁 되받는다.
“기자신가 보죠? 앞에 써놨을 텐데요.”
“(빙긋) ….”
“미안한 말씀이지만, 언론이라면 폭탄으로 날려버리고 싶네요.”
송현철(35).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과 의사. 정부와 협상을 벌이고 있는 의사대표, 정확하게는 비상공동대표 소위원회의 젊은 위원이다. 그의 얘기를 듣다 보면, 그가 날려버리고 싶은 것은 언론만이 아니다. 자신들의 진의(眞意)를 외면하고 세상천지의 ‘왕따’로 만들어버린 정부와 국회, 시민단체가 죄다 그 리스트에 올라 있다. 무엇이 의사들로 하여금 그렇게 과격한 말을 서슴없이 입에 담게 한 것일까? 무엇이 의사들을 분노케 했을까? 의약분업을 둘러싼 갈등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1년반 전으로 돌아가 보자.
진료실에서, 응급실에서, 연구실에서 환자와 책만 쳐다보던 의사들을 의약분업투쟁이라는 대전선(大前線)으로 끌어낸 계기는 지난해 5월10일의 ‘의약분업 합의’였다. 시민단체가 만들어 내놓은 이른바 ‘절충안’에 대한의사협회와 약사회가 합의 도장을 찍은 것이었다. 그것은 정권을 달리 하며 계속되던 의약분업의 지루한 줄다리기가 일단락됐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6년 당겨진 의약분업
당초 의약분업 문제는 1994년 한약분쟁이 끝난뒤 개정된 약사법에 쓰인 부칙(附則) 조항에서 시작됐다. 그것은 ‘개정된 약사법 시행후 3∼5년의 범위(그러니까 1997년 7월에서 99년 7월 사이) 내에 대통령령이 정한 날로부터 의약분업을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이 부칙에 따라 1997년 정부 의료개혁위원회는 장차 우리나라가 취해 나갈 의약분업의 모형안(模型案)을 제시했다. ‘의약분업은 2005년까지 9년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실시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3년씩 3단계로 나눠 필요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하고, 단계별로 의약분업 대상이 되는 의약품(전문의약품)과 그렇지 않은 의약품(일반의약품 등)을 분류해 나간다는 그림이었다. YS 문민정부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이듬해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싹 지워졌다. 1998년 5월 보건복지부 주도로 결성된 의약분업추진협의회(분추협)에 의해서다. 분추협을 이끌던 사람은 당시 최선정 보건복지부 차관(현 장관)이었고 의사와 약사, 관련학계, 정부당국, 시민단체 등 모두 26명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분추협이 결성되고 석달쯤 지난 그해 8월24일 보건복지부에서 제4차 분추협 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 내용은 ‘의약분업을 1999년 7월1일부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의사협회 대표로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유성희 전 의협회장으로부터 회의 분위기를 전해 들은 K씨의 기억.
“유회장이 회의에 갔다 오더니 이제 의약분업을 빨리 시작하게 됐다고 해요. 무슨 얘기냐고 하니까 회의를 주재하는 최차관이 ‘국민들의 약물 오용과 남용이 심하고 의약분업은 빨리 하면 좋은 제도이니 빨리 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쪽으로 회의를 몰아가더라는 거였죠. ‘의약분업을 빨리 하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 2005년이 아니라 내년(1999년 7월)부터 당장 하자’고 그러더랍니다. 거기 의사라고는 유회장과 병원협회에서 나간 사람 하나 해서 2명이었는데 무슨 발언권이 있었겠어요. 다른 의사 2명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재야(在野)운동 하는 의사들이었으니 정부쪽 입장에 서 있었고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고 딱 6개월 지났을 때죠. 의약분업이라는 것이 새 정부가 대선공약(공약 제82번)으로 내걸었던 것이고 그걸 당장 추진하자는 것인데 그 시점에서 누가 감히 반대의견을 내겠어요. 일방적인 통보에 가깝게 결론났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의약분업은 당초 2005년 시행에서 1999년으로 6년이 쑥 당겨졌다. 의약분업 준비작업은 연말 이후 가속화됐다. 김대통령이 1998년말 “당(국민회의)이 주도해 의약분업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그해 연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3개월 동안 국민회의가 주도한 의사―약사간 의약분업 협상이 진행됐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것을 주도한 것은 ‘보건의료 선진화를 위한 정책기획단’이었고 보건복지부는 실무 차원의 조연(助演)이었다.
이 정책기획단에서 의약분업안이 마련되고 국민회의측이 1999년 2월12일 이를 의협과 약사회의 협상안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의협이 이 협상안을 거부했다. 국민회의측은 이를 강행하려 했으나 이내 태도를 바꿔, 의협과 약사회로부터 ‘의약분업 실시를 1년 연기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이에 따라 2000년 7월1일 의약분업을 시행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1년 연기하는 대신 조건이 있었다. 의협과 약사회가 시민단체와 함께 2개월내, 그러니까 1999년 5월9일 이전에 의약분업에 대한 합의를 도출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의협측과 약사회측의 의견을 절충했다는 시민단체안이 5월9일 만들어졌고, 시한을 하루 넘긴 5월10일 마침내 의약분업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5·10합의’였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바로 이 ‘극적인 합의’(당시 언론들의 표현)가 이후 일대 사회적 혼란을 몰고온 의약분업사태의 시발점이 됐다. 합의 사실이 발표된 바로 다음날, 그러니까 1999년 5월11일 서울 강남 가톨릭의대에 전국 병원장 300여명이 모여 긴급회의를 가졌다. 회의 직후 이들은 “의협은 전체 의사를 대표하는 단체가 아니다”라고 전제하고 “5월10일 의협과 약사회가 합의한 의약분업안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의사, ‘노’ 라고 말하다
이 선언은 의약분업과 관련, 의사쪽에서 처음으로 나온 자기 목소리였다. 의사들은 이전까지 의약분업과 관련해 단 한번도 ‘노’(no)라고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병원장들의 ‘무효 선언’은 그때까지도 의약분업에 대해 무관심하던 의사들을 자극했다. 의사들의 반발이 이어졌고 결국 5·10 합의는 깨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두고두고 “약속을 어겼다”는 비난을 들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의사들은 왜 그때 합의를 깼을까? 의사들의 의견을 모아 보면 그에 대한 변명(?)은 두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당시 의협의 대표성이 없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민들의 절충안이 제대로 된 의약분업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의협의 대표성과 관련해 현재 의협의 한 중간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의사는 크게 7개 직역(職域)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대교수협의회·전임의협의회·병원의협의회·전공의협의회·개원의협의회 그리고 의권쟁취투쟁위원회(의쟁투)와 의협 이사 등입니다. 거기에 지금은 학생들까지 가세했죠. 의사집단이 이렇게 다양한, 그렇지만 각자 입장이 조금씩 다른 구성원들로 이뤄져 있는데 지난해 의약분업 합의가 이뤄질 때는 이들 각자가 모두 분리된 상황이었습니다. 시민단체와의 합의에 참여한 것은 굳이 따지자면 의협 1명, 병원협 1명이었는데 그들만으로는 대표성이 있다고 볼 수 없었고, 또 실제로 대표성을 부여받지도 않았습니다. 원로급에 속하는 의사 2명을 덜렁 들러리로 세워놓고 의약분업이 합의됐다고 한 것이죠.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의사들은 또 당시 합의된 ‘절충안’의 내용에 대해서도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계속되는 앞서 관계자의 얘기.
“처음에 병원협회쪽에서 반대하고, 나중에 시간이 가면서 점점 의사 전체가 반대하는 형국으로 흘러가지 않았습니까? 병원쪽에서는 의약분업이라고 해서 말 그대로 직능분리(의사와 약사의 역할 구분)인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직능분리와 함께 기관분리(병원과 약국을 같은 건물 내에 둘 수 없다는 것)였기 때문이죠. 대형병원들은 약국이 병원 안에 있을 뿐 그동안 줄곧 실질적인 의약분업을 해왔거든요. 그런데 약국을 내보내라고 하니 반발할 수밖에요. 또 대부분의 의사들은 좀 안이하게 생각하고 의약분업 문제에 지금처럼 관심을 갖고 달려들지 않았어요. 그럭저럭 의약분업이 시행되는구나, 그 정도로 생각했죠. 그러다 나중에 내용을 들춰보니, 이게 아니다라고 판단해 반대한 겁니다.”
의약분업은 약의 조제권을 어디에 놓느냐, 또 그 조제권의 범위는 어디까지며 판매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약에 관한 사항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제도다. 그래서 의료법이 아닌 약사법이 문제가 된다. 의사들이 의약분업에 무관심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것이 의료가 아닌 약에 관한 사항들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어쨌든 의사쪽에서 합의를 깼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분명히 의사쪽의 잘못이고 실수였다. 의사들은 이에 대해서만큼은 국민들에게 양해와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 실수는 의사들에게 처음으로 전체를 대변할 ‘대표’가 필요하다는 것과 의약분업에 결코 무관심해서는 안된다는 자각을 갖게 했다.
당시 정부는 의약분업의 이해당사자와 각계 명망가들로 구성된 의약분업실행위원회를 통해 의약분업 준비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의사들도 이 위원회에 참석했지만 전체 26명의 위원 중 의사는 2명뿐으로 거의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약사법을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의(醫)쪽보다 약(藥)쪽 관계자들이 대다수였다. 5·10합의 때 그랬던 것처럼 의사들은 또 소수였고 대세(大勢)를 주도할 수 없었다. 결국 나중에 가봐야 의약분업의 들러리 역할밖에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의사들은 이 위원회를 사실상 탈퇴해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의약분업을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나갔다.
언제나 少數
의사들이 따로 노는 동안 의약분업 시행준비작업을 맡았던 실행위원회는 활동을 계속 해나갔다. 그 결과 의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9년 12월7일 ‘5·10 합의’에 바탕한 새로운 약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의사들이 빠진 상태에서 개정된 약사법이었고, 그것은 곧 앞으로 시행될 의약분업에서 그만큼 의사들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국회는 법을 통과시키면서 권고사항을 붙였다. ‘의약분업 실시 시기 이전까지 적절한 지역을 택해 의약분업의 시범사업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의사들은 이 권고사항에 기대를 걸었다. 정부는 이미 1985년 목포와 보성 지역에서 의약분업 시범사업을 해보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의사들은 정부가 시범사업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그 결과가 실패로 나오면 국회를 통과한 약사법 개정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국회의 권고사항은 법적 구속력도 없고 의약분업 시행까지 시간적 여유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의사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의사들이 빠진 상태에서 개정된 약사법에 따른 의약분업 제도가 2000년 7월1일부터 실시되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편으로는 온건하고 한편으로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의사들이 서서히 한 목소리를 내면서 뭉치기 시작했다.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에 단결이 극히 어렵다는 의사들이 의사협회 산하 의쟁투(의권쟁취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직화되어 갔다. 그러면서 의사들은 급속히 ‘자발적 의식화’(意識化)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단결, 개정된 약사법을 재개정해야 한다는 의식화였다. 의사들은 이미 자존심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서울대 의대 T교수의 의견.
“의약분업이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정부가 주도하고 언론과 시민단체의 밀어붙이기로 진행됐습니다. 정작 당사자인 의사와 약사는 뒷전으로 밀렸고요. 그것만 해도 부아가 나는데, 정부가 추진하는 의약분업안이라는 것이 의사들의 조제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의약분업의 취지는 좋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겉만 보고 속은 보지 못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좀 알아야 될 것이 있는데, 세계적으로 의사의 조제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세계에서 엄격하게 의약분업을 시행하는 나라들도 의사의 조제권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가령 서구식 의약분업이 가장 잘 돼 있는 미국의 경우도 그렇다.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을 조제해 줄 수 있고, 가령 제약회사 같은 데서 샘플로 들어온 약을 가까운 친구나 특정 환자에게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조제해 주는 약에 대해서는 의료보험에서 비용을 대주지 않고 의사가 약값을 부담한다. 만약 나중에 그 약으로 인해 사고가 나도 의사가 책임진다.
약을 조제해도 이익은 없고 책임만 지는 구조다. 말하자면 의사가 약을 지을 동기를 없애버린 것이지 조제권 자체를 빼앗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만큼 전문가로 대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내놓은 의약분업안에서는 아예 의사의 조제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의약분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의사들은 홀대당했고 의료인으로서의 전문성마저 무시당했다는 피해의식이 의사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의쟁투는 3월30일부터 3일간 전국 의사들의 휴진을 결의했다. 실력행사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3월29일 의쟁투 위원장과 의사협회장, 병원협회장이 대통령을 면담하고 돌아온 뒤 휴진 계획은 취소됐다. ‘거사’를 준비하던 의사들은 휴진 결의를 철회한 의쟁투의 우유부단함을 거세게 비판했다. 비판에 직면한 의쟁투 중앙위원들은 3월31일 전격 사퇴했다. 그것은 의사들의 ‘반발’이 ‘투쟁’으로 성격이 확 바뀌는 분수령이었다.
서울 용산구 이촌1동 302―75. 한강변에 자리잡은 대한의사협회 정문 앞에 기자는 서 있다. 대한민국 7만명 의사들의 결집체요, 의약분업으로 촉발된 의료계 대정부투쟁의 상징적 본부다. 교수협의회·개원의협의회·봉직의협의회·전임의협의회·전공의협의회가 이곳에서 교차하고, 세차례 의사파업을 이끌었던 의권쟁취투쟁위원회(의쟁투)와 그 지도부인 의쟁투 중앙위원회도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현관 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문 한가운데 기자의 눈높이로 ‘기자 출입금지’라고 쓴 종이 표지판이 딱 붙었다. 그것도 그냥 출입금지가 아니라 ‘절대 출입금지’다. 언론에 대한 의사들의 적대감이 차갑게 감지된다. 무릅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총무실, 회의실, 임원실, 회장실… 어느 방문이든 ‘기자 절대 출입금지’다. 의사들이 언론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가를 그 여덟글자는 웅변하고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가니 젊은 의사 둘이 뭔가 쓰다 말고 고개를 든다. 인사를 하자 쳐다보는 눈빛들이 덤덤하다. “언론에 대한 경계가 삼엄한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한 사람이 탁 되받는다.
“기자신가 보죠? 앞에 써놨을 텐데요.”
“(빙긋) ….”
“미안한 말씀이지만, 언론이라면 폭탄으로 날려버리고 싶네요.”
송현철(35).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과 의사. 정부와 협상을 벌이고 있는 의사대표, 정확하게는 비상공동대표 소위원회의 젊은 위원이다. 그의 얘기를 듣다 보면, 그가 날려버리고 싶은 것은 언론만이 아니다. 자신들의 진의(眞意)를 외면하고 세상천지의 ‘왕따’로 만들어버린 정부와 국회, 시민단체가 죄다 그 리스트에 올라 있다. 무엇이 의사들로 하여금 그렇게 과격한 말을 서슴없이 입에 담게 한 것일까? 무엇이 의사들을 분노케 했을까? 의약분업을 둘러싼 갈등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1년반 전으로 돌아가 보자.
진료실에서, 응급실에서, 연구실에서 환자와 책만 쳐다보던 의사들을 의약분업투쟁이라는 대전선(大前線)으로 끌어낸 계기는 지난해 5월10일의 ‘의약분업 합의’였다. 시민단체가 만들어 내놓은 이른바 ‘절충안’에 대한의사협회와 약사회가 합의 도장을 찍은 것이었다. 그것은 정권을 달리 하며 계속되던 의약분업의 지루한 줄다리기가 일단락됐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6년 당겨진 의약분업
당초 의약분업 문제는 1994년 한약분쟁이 끝난뒤 개정된 약사법에 쓰인 부칙(附則) 조항에서 시작됐다. 그것은 ‘개정된 약사법 시행후 3∼5년의 범위(그러니까 1997년 7월에서 99년 7월 사이) 내에 대통령령이 정한 날로부터 의약분업을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이 부칙에 따라 1997년 정부 의료개혁위원회는 장차 우리나라가 취해 나갈 의약분업의 모형안(模型案)을 제시했다. ‘의약분업은 2005년까지 9년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실시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3년씩 3단계로 나눠 필요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하고, 단계별로 의약분업 대상이 되는 의약품(전문의약품)과 그렇지 않은 의약품(일반의약품 등)을 분류해 나간다는 그림이었다. YS 문민정부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이듬해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싹 지워졌다. 1998년 5월 보건복지부 주도로 결성된 의약분업추진협의회(분추협)에 의해서다. 분추협을 이끌던 사람은 당시 최선정 보건복지부 차관(현 장관)이었고 의사와 약사, 관련학계, 정부당국, 시민단체 등 모두 26명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분추협이 결성되고 석달쯤 지난 그해 8월24일 보건복지부에서 제4차 분추협 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 내용은 ‘의약분업을 1999년 7월1일부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의사협회 대표로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유성희 전 의협회장으로부터 회의 분위기를 전해 들은 K씨의 기억.
“유회장이 회의에 갔다 오더니 이제 의약분업을 빨리 시작하게 됐다고 해요. 무슨 얘기냐고 하니까 회의를 주재하는 최차관이 ‘국민들의 약물 오용과 남용이 심하고 의약분업은 빨리 하면 좋은 제도이니 빨리 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쪽으로 회의를 몰아가더라는 거였죠. ‘의약분업을 빨리 하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 2005년이 아니라 내년(1999년 7월)부터 당장 하자’고 그러더랍니다. 거기 의사라고는 유회장과 병원협회에서 나간 사람 하나 해서 2명이었는데 무슨 발언권이 있었겠어요. 다른 의사 2명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재야(在野)운동 하는 의사들이었으니 정부쪽 입장에 서 있었고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고 딱 6개월 지났을 때죠. 의약분업이라는 것이 새 정부가 대선공약(공약 제82번)으로 내걸었던 것이고 그걸 당장 추진하자는 것인데 그 시점에서 누가 감히 반대의견을 내겠어요. 일방적인 통보에 가깝게 결론났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의약분업은 당초 2005년 시행에서 1999년으로 6년이 쑥 당겨졌다. 의약분업 준비작업은 연말 이후 가속화됐다. 김대통령이 1998년말 “당(국민회의)이 주도해 의약분업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그해 연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3개월 동안 국민회의가 주도한 의사―약사간 의약분업 협상이 진행됐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것을 주도한 것은 ‘보건의료 선진화를 위한 정책기획단’이었고 보건복지부는 실무 차원의 조연(助演)이었다.
이 정책기획단에서 의약분업안이 마련되고 국민회의측이 1999년 2월12일 이를 의협과 약사회의 협상안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의협이 이 협상안을 거부했다. 국민회의측은 이를 강행하려 했으나 이내 태도를 바꿔, 의협과 약사회로부터 ‘의약분업 실시를 1년 연기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이에 따라 2000년 7월1일 의약분업을 시행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1년 연기하는 대신 조건이 있었다. 의협과 약사회가 시민단체와 함께 2개월내, 그러니까 1999년 5월9일 이전에 의약분업에 대한 합의를 도출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의협측과 약사회측의 의견을 절충했다는 시민단체안이 5월9일 만들어졌고, 시한을 하루 넘긴 5월10일 마침내 의약분업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5·10합의’였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바로 이 ‘극적인 합의’(당시 언론들의 표현)가 이후 일대 사회적 혼란을 몰고온 의약분업사태의 시발점이 됐다. 합의 사실이 발표된 바로 다음날, 그러니까 1999년 5월11일 서울 강남 가톨릭의대에 전국 병원장 300여명이 모여 긴급회의를 가졌다. 회의 직후 이들은 “의협은 전체 의사를 대표하는 단체가 아니다”라고 전제하고 “5월10일 의협과 약사회가 합의한 의약분업안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의사, ‘노’ 라고 말하다
이 선언은 의약분업과 관련, 의사쪽에서 처음으로 나온 자기 목소리였다. 의사들은 이전까지 의약분업과 관련해 단 한번도 ‘노’(no)라고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병원장들의 ‘무효 선언’은 그때까지도 의약분업에 대해 무관심하던 의사들을 자극했다. 의사들의 반발이 이어졌고 결국 5·10 합의는 깨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두고두고 “약속을 어겼다”는 비난을 들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의사들은 왜 그때 합의를 깼을까? 의사들의 의견을 모아 보면 그에 대한 변명(?)은 두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당시 의협의 대표성이 없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민들의 절충안이 제대로 된 의약분업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의협의 대표성과 관련해 현재 의협의 한 중간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의사는 크게 7개 직역(職域)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대교수협의회·전임의협의회·병원의협의회·전공의협의회·개원의협의회 그리고 의권쟁취투쟁위원회(의쟁투)와 의협 이사 등입니다. 거기에 지금은 학생들까지 가세했죠. 의사집단이 이렇게 다양한, 그렇지만 각자 입장이 조금씩 다른 구성원들로 이뤄져 있는데 지난해 의약분업 합의가 이뤄질 때는 이들 각자가 모두 분리된 상황이었습니다. 시민단체와의 합의에 참여한 것은 굳이 따지자면 의협 1명, 병원협 1명이었는데 그들만으로는 대표성이 있다고 볼 수 없었고, 또 실제로 대표성을 부여받지도 않았습니다. 원로급에 속하는 의사 2명을 덜렁 들러리로 세워놓고 의약분업이 합의됐다고 한 것이죠.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의사들은 또 당시 합의된 ‘절충안’의 내용에 대해서도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계속되는 앞서 관계자의 얘기.
“처음에 병원협회쪽에서 반대하고, 나중에 시간이 가면서 점점 의사 전체가 반대하는 형국으로 흘러가지 않았습니까? 병원쪽에서는 의약분업이라고 해서 말 그대로 직능분리(의사와 약사의 역할 구분)인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직능분리와 함께 기관분리(병원과 약국을 같은 건물 내에 둘 수 없다는 것)였기 때문이죠. 대형병원들은 약국이 병원 안에 있을 뿐 그동안 줄곧 실질적인 의약분업을 해왔거든요. 그런데 약국을 내보내라고 하니 반발할 수밖에요. 또 대부분의 의사들은 좀 안이하게 생각하고 의약분업 문제에 지금처럼 관심을 갖고 달려들지 않았어요. 그럭저럭 의약분업이 시행되는구나, 그 정도로 생각했죠. 그러다 나중에 내용을 들춰보니, 이게 아니다라고 판단해 반대한 겁니다.”
의약분업은 약의 조제권을 어디에 놓느냐, 또 그 조제권의 범위는 어디까지며 판매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약에 관한 사항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제도다. 그래서 의료법이 아닌 약사법이 문제가 된다. 의사들이 의약분업에 무관심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것이 의료가 아닌 약에 관한 사항들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어쨌든 의사쪽에서 합의를 깼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분명히 의사쪽의 잘못이고 실수였다. 의사들은 이에 대해서만큼은 국민들에게 양해와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 실수는 의사들에게 처음으로 전체를 대변할 ‘대표’가 필요하다는 것과 의약분업에 결코 무관심해서는 안된다는 자각을 갖게 했다.
당시 정부는 의약분업의 이해당사자와 각계 명망가들로 구성된 의약분업실행위원회를 통해 의약분업 준비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의사들도 이 위원회에 참석했지만 전체 26명의 위원 중 의사는 2명뿐으로 거의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약사법을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의(醫)쪽보다 약(藥)쪽 관계자들이 대다수였다. 5·10합의 때 그랬던 것처럼 의사들은 또 소수였고 대세(大勢)를 주도할 수 없었다. 결국 나중에 가봐야 의약분업의 들러리 역할밖에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의사들은 이 위원회를 사실상 탈퇴해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의약분업을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나갔다.
언제나 少數
의사들이 따로 노는 동안 의약분업 시행준비작업을 맡았던 실행위원회는 활동을 계속 해나갔다. 그 결과 의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9년 12월7일 ‘5·10 합의’에 바탕한 새로운 약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의사들이 빠진 상태에서 개정된 약사법이었고, 그것은 곧 앞으로 시행될 의약분업에서 그만큼 의사들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국회는 법을 통과시키면서 권고사항을 붙였다. ‘의약분업 실시 시기 이전까지 적절한 지역을 택해 의약분업의 시범사업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의사들은 이 권고사항에 기대를 걸었다. 정부는 이미 1985년 목포와 보성 지역에서 의약분업 시범사업을 해보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의사들은 정부가 시범사업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그 결과가 실패로 나오면 국회를 통과한 약사법 개정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국회의 권고사항은 법적 구속력도 없고 의약분업 시행까지 시간적 여유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의사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의사들이 빠진 상태에서 개정된 약사법에 따른 의약분업 제도가 2000년 7월1일부터 실시되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편으로는 온건하고 한편으로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의사들이 서서히 한 목소리를 내면서 뭉치기 시작했다.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에 단결이 극히 어렵다는 의사들이 의사협회 산하 의쟁투(의권쟁취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직화되어 갔다. 그러면서 의사들은 급속히 ‘자발적 의식화’(意識化)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단결, 개정된 약사법을 재개정해야 한다는 의식화였다. 의사들은 이미 자존심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서울대 의대 T교수의 의견.
“의약분업이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정부가 주도하고 언론과 시민단체의 밀어붙이기로 진행됐습니다. 정작 당사자인 의사와 약사는 뒷전으로 밀렸고요. 그것만 해도 부아가 나는데, 정부가 추진하는 의약분업안이라는 것이 의사들의 조제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의약분업의 취지는 좋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겉만 보고 속은 보지 못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좀 알아야 될 것이 있는데, 세계적으로 의사의 조제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세계에서 엄격하게 의약분업을 시행하는 나라들도 의사의 조제권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가령 서구식 의약분업이 가장 잘 돼 있는 미국의 경우도 그렇다.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을 조제해 줄 수 있고, 가령 제약회사 같은 데서 샘플로 들어온 약을 가까운 친구나 특정 환자에게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조제해 주는 약에 대해서는 의료보험에서 비용을 대주지 않고 의사가 약값을 부담한다. 만약 나중에 그 약으로 인해 사고가 나도 의사가 책임진다.
약을 조제해도 이익은 없고 책임만 지는 구조다. 말하자면 의사가 약을 지을 동기를 없애버린 것이지 조제권 자체를 빼앗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만큼 전문가로 대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내놓은 의약분업안에서는 아예 의사의 조제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의약분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의사들은 홀대당했고 의료인으로서의 전문성마저 무시당했다는 피해의식이 의사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의쟁투는 3월30일부터 3일간 전국 의사들의 휴진을 결의했다. 실력행사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3월29일 의쟁투 위원장과 의사협회장, 병원협회장이 대통령을 면담하고 돌아온 뒤 휴진 계획은 취소됐다. ‘거사’를 준비하던 의사들은 휴진 결의를 철회한 의쟁투의 우유부단함을 거세게 비판했다. 비판에 직면한 의쟁투 중앙위원들은 3월31일 전격 사퇴했다. 그것은 의사들의 ‘반발’이 ‘투쟁’으로 성격이 확 바뀌는 분수령이었다.
액션’ 돌입
4월1일 새로 교체된 의쟁투 중앙위원회는 정부에 약사법 재개정을 요구하면서 전국 개원의들의 휴진을 결의했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4월4일부터 행동에 돌입했다. 건국 이래 초유의 의료대란이 벌어진 것이었다. 당초 의약분업, 곧 약사법 재개정을 둘러싸고 시작된 의사들의 반발은 이 시기 이후 의료여건 개혁을 주장하는 대정부투쟁으로 점차 확전(擴戰)되기 시작했다. 의사들의 요구는 크게 두가지. 하나는 제대로 된 의약분업의 준비 및 시행, 즉 약사법 재개정에 관한 부분이었다. 다른 하나는 형편없이 열악한 의료환경 개선이었다. 이 두가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으로 의사들은 모두 10개항에 걸친 요구사항을 정부에 내밀었다.
▷의료수가 및 처방료 현실화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 재분류 ▷처방전 없는 임의조제 근절 대책 마련 ▷대체조제시 의사의 사전 동의 원칙▷약화사고 책임소재의 법적, 제도적 명확화 ▷의료전달체계의 확립 ▷전공의들의 처우개선과 관련한 제도의 개선 ▷의료보험 재정확보, 지역의료보험 재정의 50% 국가부담 ▷보건의료발전특별위원회 설치 등이었다.
의사들은 이같은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6월20일부터 전면폐업에 들어간다고 예고했다. 폐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6월17일 실시된 전국 의사투표를 통해 의사들은 자신들의 전의(戰意)를 과시할 수 없었다. 투표 결과 정부의 의약분업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무려 98.1%나 됐고, 의사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무기한 휴진이나 폐업이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83.1%에 달했다.
같은 시기 의협 지도부는 청와대에 서한을 보내 ‘개정된 약사법을 재개정할 수 있도록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0개항의 요구에 대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부는 의사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오히려 의사들에게 전면적인 압박을 가했고 사태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정부는 의사들이 파업에 들어갈 경우 각종 행정조치와 사법처리로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보건복지부는 의사면허 취소와 전공의 징집조치, 검찰은 파업 주동자 구속, 국세청은 병원에 대한 세무조사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 ‘원칙대로 처리하겠다’며 강력한 ‘채찍’을 내보였다. 정부는 그러면서 ‘당근’도 내놨다. 의약분업 시행으로 의사와 병원이 입게 될 손실을 보전해 준다며 의료보험수가를 일부 인상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언론에서는 의료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자 관행인 ‘의약품 납품비리 내역’이 크게 보도됐다. 어디에서 흘러나왔는지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구체적인 내용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러니 의사들은 죄다 도둑놈’이라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의사들은 그것을 모두 정부가 뒤에서 사주한 것이라고 믿었다. 의약품 납품비리가 생기는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정부의 의료보험 저수가(低酬價)정책 때문인데, 오히려 정부가 의료계를 매도하고 도둑으로 몰아 눌러버리려 한다는 배신감과 분노가 의사들에게 급속히 확산됐다. 한 산부인과 여의사의 얘기다.
“심정 같아서는 같은 의사인 남편과 함께 의사직을 때려치우고, 정부고 언론이고 시민단체고 다 불질러 버리고 싶더라고요. 정부는 ‘너 이거 이거는 잘못했어’라는 식으로 우리를 대한 게 아니라 ‘너희는 근본적으로 글러먹었으니 맞아야 해’라는 식으로 나왔어요. 의사들을 그렇게 나쁜 사람들로 매도해 놓고 공무원이나 기자들은 어떻게 아플 때 병원에 가서 의사 얼굴을 대할 것인지 묻고 싶더군요. 상대방을 몰아세울 때도 다 매너가 있는 법인데, 우리 정부는 그런 상식마저 무시한 거죠.”
내과전문의인 그의 남편 역시 몇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정이 격앙돼 있다.
“정부가 이렇게도 의사들의 속마음을 모를까, 너무 한심해 안타까울 정도였습니다. 의약분업은 밀어붙여 시행하면 된다, 의사들이고 뭐고 반발하면 집단이기주의다, 도둑놈들이다 하면서 눌러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그게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니거든요. 공권력을 동원해 의사들을 겁주고 비리집단으로 매도할수록 의사들이 더 반발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 같아요.”
정부, 誤判하다
정부의 강경대응 방침에 분노한 의사들은 예정했던 6월20일보다 하루 전인 6월19일부터 전면폐업에 돌입했다. 그동안 사태를 관망하던 의대 교수들도 동참해 가운을 벗고 폐업에 동참했다. 폐업은 1주일이나 계속 됐다. 의약분업 시행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것은 정부로서는 예상치 못한 의사들의 반격이었다. 당시 상황과 관련해 한 전공의는 컴퓨터 통신망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의사들의 폐업에 대해 정부는 ‘밀어붙이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의약분업 시행으로 인해 국민들이 겪는 불편도 몇달만 지나면 슬쩍 넘어갈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런 초기의 고비를 넘기면 싫든 좋든 제도가 정착된다는 과거의 경험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공권력을 총동원해 마치 일반 노조의 파업에 대처하듯 협박하고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의사들이 겁을 내고 파업을 철회할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커다란 판단미스였다.”
그의 말처럼 결과는 뜻밖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신이 지시를 내려 추진한 정책에 대해 “내가 좀 안이한 판단을 했던 것 같다”며 한걸음 물러서는 발언을 했다. 장관도 의약분업을 너무 서두른 감이 있다고 사과했다. 그것으로 사태가 진정된 것은 아니다.
정부는, 한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보수적이고 단결이 잘 안되는 백면서생(白面書生)같은 의사들을 자신의 최대의 적으로 만들어 놓는 우(愚)를 범했다. 의약분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지 못할 경우 정부는 최대의 실정(失政)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을 만큼 일을 키워버렸다. 의사들은 의약분업이니 약사법 개정이니 하는 차원을 넘어, 자신들의 행동을 의료민주화운동·의료정의세우기운동 등으로 격상시켜 부르면서 전면적인 대정부투쟁을 벌이게 됐다. 정부와 의사 서로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다.
대화나 협상은 중단됐다. 정부와 언론과 시민단체에 의해 왕따되고 또 그들로 인해 국민으로부터도 차단됐다고 분노하는 의사들은 더이상 아무도 믿지 않게 됐다. 사실 그들의 분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분노에서 파생한 불신감이다. 의사들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정부의 말은 믿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 나가기 위해서는 당사자간에 서로의 주장을 충분히 듣고 같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데, 정부가 의약분업 사태 내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성실한 대화는커녕 정부가 자신들을 의료개혁의 파트너가 아니라 오히려 집단이기주의자로, 파렴치범으로, 개혁 대상으로 몰아붙였다는 차디찬 감정을 의사들은 지금도 가슴 속에 담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권쟁취투쟁위원회에 소속된 한 의사의 직설.
“같이 힘을 모아도 의약분업은 시간이 걸리고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의약분업의 중요한 주체인 의사를 도둑이나 범법자로 몰아붙여 놓고 구속하겠다, 군대 보내겠다는 협박도 일삼았어요. 세상에 누가 자기를 매도하고 협박하는 상대방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며 협상을 할 수 있겠어요? 의사들을 난도질 해 놓고 대화하러 나오라고 하면 누가 그곳에 나가 앉겠으며, 또 정부와 얘기하려고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의사들의 반감과 분노는 비단 정부만을 향해 끓어오르는 것이 아니다. 언론도 시민단체도 그들에게는 분노의 표적이다. 무엇보다 의사들은 ‘언론이 정부를 잔뜩 거들었다’고 믿고 있다. 의사들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의사들이 왜 그렇게 집단행동을 하는가를 전달하지 않고 정부를 거들어 의사들에게 뭇매를 가했다고 생각한다. ‘생명을 책임진 의사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라는 식의 기사로 일관하면서 의사들에 대한 국민의 반감(反感)만 키웠다며 언론을 적대시한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격으로, 의사들은 지금 언론에 대해 불신보다 훨씬 더 공격적인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다. 의사협회 R이사는 언론에 대한 의사들의 감정을 이렇게 전한다.
언론, 뭐했나
“언론이 의사나 정부를 뛰어넘는 시각(視角)으로 의약분업 문제를 잘 이끌어 달라고 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또 우리 의사들 편만 들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요. 벌어지고 있는 일의 진실과 본질을 그대로 전달해 달라 이거예요. 의약분업에 대한 의사들의 의견이나 그에 대한 정부의 태도 같은 것을 그대로 보도해 주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기사나 방송 보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겁니다. ‘의사들이 자기들 밥그릇 때문에 환자들의 생명을 볼모로 의사의 도리를 저버리고 파업한다’는 앵무새같은 패턴에서 벗어나지를 않아요. 정작 왜 의사들이 저렇게 극한행동까지 하게 됐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어요. 그러니 정부나 언론이나 의사들 눈에는 똑같은 적(敵)이고, 한 통속으로 보이는 것이죠.”
연세대 의대의 O교수처럼 원색적으로 언론을 욕하는 의사도 있다.
“환자가 막 죽어나간다는 신문 기사들을 보면서 정말 가당찮더군요. 우리 의사들이 휴진하든 폐업하든 항상 최소한의 인력이 남아 긴급환자들은 봤거든요. 사망한 사람들은 의사가 파업을 안했어도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의 환자들이었어요. 그런데 마치 의사들이 파업했기 때문에 환자들이 죽은 것처럼 덮어씌우는 겁니다. 왜 기자들을 ×떼라고 하는지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잘 알겠더라고요. 이쪽으로 써라 그러면 우 몰려가서 주루룩 기사를 쓰고, 또 저쪽으로 써라 그러면 또 무작정 우 몰려가서 기사를 쓰고 하는 꼴이 딱 그짝이에요. 그런 어처구니없는 기사를 써 놓고 기자 자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낯을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대단해요 대단해.”
시민단체도 의사들에게는 정부나 언론과 똑같은 한 통속으로 비친다. 고려대 H교수는 “시민단체가 왜 의약분업에 나서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시민단체가 예나(5·10합의 때를 의미) 지금이나 착각하는 것이 한가지 있어요. 의약분업이라고 하는 것은 한약분쟁처럼 어느 한쪽이 더 양보하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밥그릇싸움이라면 분쟁 당사자들을 설득해서 서로 조금씩 덜 먹겠다는 양보를 끌어내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의약분업은 그렇게 양보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의사와 약사라는 전문가들이 서로 앉아 진실된 의약분업 제도를 만들어 가는 작업이에요. 의약분업 자체가 이쪽에서 이만큼 떼어내고 저쪽에서 저만큼 떼어내고 해서 적당히 얼기설기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실제로 정부가 이해집단의 요구를 그렇게 다 수용해 의약분업안을 만들어 놓으니 세계에 유례가 없는 기형적인 의약분업안이 됐잖아요? 지금처럼 이렇게 혼란스러운 사태가 벌어졌고요. 의약분업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이 마련돼야 하는 것이고 무슨 ‘절충안’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서로 양보하면 되는 밥그릇싸움이 아니라 진실과 비진실을 가리는 일입니다. 진실과 비진실을 절충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런 것을 좀 따져서 나서야 할 텐데, 무조건 의사들이 파업하는 것을 비난하고 나섰잖아요.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죠.”
“구겨진 전문가의 자존심, 정부와 언론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슴 속에 불이 나는데도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한 성의있는 태도는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니들이 이래도 우리 말 안 들을래’하면서 의사들을 닦아세웠다”고 앞의 H교수는 정리한다. 정부와 언론, 시민단체가 가세해 의사들을 ‘왕따’시켰지만, 그 반작용으로 의사들은 더더욱 반발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안으로 안으로 단단하게 뭉치게 됐다.
보라매공원의 열기
의사들의 두번째 폐업으로 인해 의약분업은 당초 정부가 계획했던 7월1일보다 한달 늦춰졌다. 그러면서 7월20일 약사들의 임의조제 금지를 강화한 내용의 개정 약사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의사들은 이 법안에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국회를 통과한 이 법률도 다시 의사들의 반발에 부닥쳤다. 7월29일 전공의들이 먼저 들고일어났다. 이유는 개정 약사법이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것이었다. 약사의 임의조제 관련조항을 삭제해 임의조제를 원천봉쇄한다고 해놓고는, 엉뚱한 다른 조항에 그것을 살짝 갖다 붙이는 등 눈속임과 편법을 썼다는 것이었다. 전공의들은 개정 약사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파업을 시작했다.
전공의들의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8월1일이 됐고 의사와 정부간에 대화가 끊긴 채 어정쩡한 상황에서 의약분업이 시행됐다. 전공의들이 파업을 진행하는 것을 지켜보던 의사들은 다시 정부와의 협상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의사들은 기존에 정부에 제시했던 10개 요구사항을 대폭 확대한 새로운 대정부 요구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8개 직역단체의 대표들로 비상공동대표 소위원회를 구성해 정부와의 협상대표로 나서게 했다.
이윽고 8월30일, 의사들은 그동안 준비해온 대정부 요구안을 발표했다. 그동안 의료계 전반에서 제기돼온 모든 문제점을 12개 항목으로 나눠 정리하고, 정부에 대해 이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한 것이었다. 의사들로서는 정부에 던질 공을 모두 던져놓고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겠다는 ‘최후통첩’같은 것이었다. 대정부 요구안의 발표와 함께 의대교수협의회는 정부측의 성의있는 답변이 없을 경우 9월5일 외래진료 철수 및 9월15일 파업을 단행할 것이라고 밝혀 힘을 몰아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31일 의료계는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2만여명의 전국 의사들이 모인 가운데 대집회를 가졌다. 이날 집회는 의사들이 품고 있는 분노가 상황에 따라 잠시 들끓다가 수그러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보여준 계기가 됐다. 이날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불어온 태풍 가운데 가장 강력하다는 프라피룬이 한반도 중부지방을 강타한 날이었다. 프라피룬은 굵은 빗줄기와 강풍을 몰아 왔다. 댓줄기처럼 퍼붓는 빗속에서 보라매공원 집회는 무려 4시간이나 강행됐다. 놀라운 것은, 집회에 참석한 의사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입으나마나인 비닐우비 차림이어서 온몸이 비에 젖었지만 이들은 한 목소리로 정부를 성토하며 단합을 과시했다.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나와 이날 단상에 오른 김재정 의쟁투 위원장과 참석한 모든 의사들은 국민이 결국 의사 편에 서게 될 것이라고, 왕따는 바로 자신들을 몰아세우는 정부가 될 것이라고 서로에게 몇번씩이나 강조하고 다짐했다. 보라매공원 집회는 의사들의 집단적 일체감과 소속감을 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의사들 간에 지금까지도 계속 얘기가 되고 있다.
8·30 대정부 요구안이 정부측에 제시된 가운데 9월6일에는 파업중이던 전공의들이 추가로 ‘국민과 함께 하는 의료개혁안’을 발표했다. 그것은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의료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가령 현재 감기에 대해서는 보험 혜택이 상대적으로 큰 데 비해 중병(重病)의 경우에는 보험 혜택이 적거나 혜택이 아예 없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돈이 적게 드는 가벼운 질병에 대한 보험 혜택을 대폭 줄이고, 대신 개인이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중병의 경우에는 보험 혜택을 대폭 늘리자는 얘기였다. 또 현재 2.9% 수준에 머무르는 의료보호대상자의 범위를 확대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민도 충분히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런 가운데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파업이 한차례 있었다. 9월15일 개원의들의 파업이었다. 앞서 8월30일 대정부 요구안을 발표한 뒤 교수협의회가 9월15일에 파업하겠다고 하자 개원의들이 그 시기에 맞춰 독자적으로 파업을 준비했고 이날 파업에 돌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직역의 의사들과 개원의 자체 참여율도 낮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다시 총파업으로
그러나 이때 파업이 유야무야된 것은 오히려 세번째 파업을 촉발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의료계 내부에서는 9월15일의 파업 실패가 정부와 협상을 벌이는 데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단합된 의사들의 힘을 보여주지 못하면 정부측에서 협상 과정에 성의를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일단 의료계는 9월26일 정부와 협상을 재개했다.
이미 8월1일부터 시행된 의약분업의 세부방안들을 정부와 협상해 빨리 마련해야 했고, 7월29일 이후 파업을 계속하고 있는 전공의들의 유급 시한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공의들은 “완전 의약분업을 위한 약사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는 한 파업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자신들의 유급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의지였다. 그래서 비상소위는 일단 정부와의 협상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것은 물론 8·30 대정부 요구안에 대한 정부측의 답변을 듣겠다는 것이었다.
정부와의 협상에 들어가기에 앞서 의사들은 정부에 단결된 의지를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 정부가 성의있게 협상에 임할 것이고 또 실제 협상과정에서도 의사쪽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의료계 지도부는 ‘말뿐이 아닌 진짜 의사들의 뜻을 보여줘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파업을 강행한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비로소 정부가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정부에 대한 의료계의 불신은 컸다. 그래서 의료계는 정부에 “오는 9월30일까지 8·30 대정부 요구안에 대한 정부측의 대답을 달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10월6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가겠노라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협상 준비에, 다른 한편으로는 파업 준비에 착수했다.
정부와의 협상을 재개하면서도 의료계는 정부측에 3가지 전제조건의 이행을 먼저 요구했다. 첫째, 구속된 의사들을 석방할 것과 수배자들에 대한 수배를 해제할 것, 둘째 8월12일 의료계의 중앙대 집회때 의사들이 경찰로부터 폭행당한 것에 대해 경찰청장이 사과할 것, 셋째 준비되지 않은 의약분업을 강행한 잘못 그리고 의사들의 정당한 반발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한 잘못에 대해 보건복지부 장관이 사과할 것 등이었다. 그러면서 협상장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정부와의 협상이 재개됐다. 또 파업도 시작됐다. 10월6일부터 시작된 세번째 파업은 의사들이 여전히 의약분업과 의료개혁 문제와 관련해 분노에 차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이미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약분업을 너무 서둘렀노라고 어정쩡하나마 사과한 뒤였다. 대통령도 “내가 안이한 판단을 했던 것 같다”며 “원칙대로 엄정하게 추진하라”던 종래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다. 의료발전특별위원회도 총리 관할에서 대통령 관할로 격상(格上)시키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의료계와 정부가 다시 테이블에 앉아 막 대화를 시작한 참이었다. 그런데 잔칫상을 발로 차듯 의사들은 거듭, 그것도 가장 대대적인 규모의 파업에 돌입했다. 닷새 동안에 걸친 또 한차례의 의료대란이 지나간 뒤 의사들은 스스로 파업을 거뒀다. 시간이 지나면서 파업의 열기가 조금씩 식어갔고 정부와 이제는 협상테이블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라고 판단했다.
의료계와 정부는 지난 8월30일 의사들이 제시한 총 12항목의 대정부 요구안을 놓고 장기간 협상을 벌이는 중이다. 여기서 잠깐 도대체 무엇이 쟁점인지 핵심적인 사항을 추려 살펴보자. 현재 의료계와 정부 간에 협상을 벌이는 주제는 크게 ▷의약분업(약사법 개정)▷의료환경 개선 두가지로 나뉜다.
먼저 의약분업 부분에서는 무엇이 쟁점인가. 한마디로 약사가 진단 처방하는 행위를 어떻게 막을 것이냐가 쟁점이다. 완전 의약분업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가지, 임의조제와 대체조제다.
머리가 아프다고 찾아온 환자에게 약사가 “다른 증상은 없느냐” “어디 다른 곳은 아프지 않느냐”하면서 물어보고 “이 약이 좋다”고 임의로 골라주는 행위는 임의조제다. 또 환자가 이러이러한 증세가 있는데 어떤 약이 좋은가라고 했을 때, 약사가 이 약이 좋다고 건네주면 임의조제다. 어떤 형식이든 약사가 환자의 증상을 물어보거나, 환자와 상의해 약을 조제, 판매하는 것은 임의조제 행위에 속한다.
약품 중에서도 환자가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의약품과 반드시 의사의 처방전을 가지고 가야 살 수 있는 의약품이 있다. 그냥 살 수 있는 의약품을 일반의약품,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의약품을 전문의약품이라고 한다. 거꾸로 약사는 처방전이 없는 환자에게 전문의약품을 판매할 수 없다. 일반의약품만 판매할 수 있다. 또 일반의약품을 섞어 환자에게 “같이 드시라”해도 임의조제에 속한다.
의사들의 주장은 이러한 약사의 임의조제를 현재의 법적·제도적 상황에서는 도저히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약사의 임의조제를 막지 못하면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의약분업의 근본 취지가 흔들리게 되고, 결국 의약분업을 시행할 수 없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약사의 임의조제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놓고 정부측과 지금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의료계는 약국에서 판매하는 일반의약품의 경우 ‘7일치 처방 이상’을 포장 단위로 팔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반면 정부는 약의 포장 단위는 약국이 아닌 제약회사에 맡길 사안이며 법으로 정할 사안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현재 6:4 비율로 나눠져 있는 전문 의약품 대 일반의약품의 비율조정 문제도 현안이다. 의사들은 양쪽에 겹치는 의약품들을 추려내고 재분류작업을 통해 전문의약품의 비율을 늘려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체조제는 어떤가. 대체조제는 의사가 처방한 약이 약국에 없을 때 약사가 그것과 같은 성분의 약을 환자에게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분이 같다고 해서 약효(藥效)가 똑같을 수 없고, 사람에 따라서는 안전성이 보장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같은 성분의 약이라고 해도 소위 ‘생물학적 약효 동등성(생동성)’ 실험을 거쳐 약효가 같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라야 대체조제가 가능하다. 가령 이 시스템이 잘 돼 있는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매년 “오렌지북”이라는 책을 펴낸다. 서로 대체 가능한 약, 대체해서는 안될 약을 죽 기록한 책이다. A코드에 모여 있는 약들 간에는 생동성이 확보돼 있어 서로 얼마든지 대체조제할 수 있는 약들이다. AB코드에 속한 약들은 생동성 실험을 거쳤지만 사람에 따라 약효가 달리 나타날 수 있다고 평가된 약들이다. B코드는 미국이 가진 현재의 기술로는 생동성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는 약들이다. 가령 아스피린 페이지를 찾아보면, A코드에 있는 약들은 아스피린과 바꿔 써도 무방한 약들이 모여 있다. AB코드의 것들은 아스피린 대신 쓸 수 있지만 약효가 사람에 따라 좀 달라질 수 있는 약들이다. B코드에 있는 약은 아스피린과 약효가 같은지 어떤지 확인할 수 없는 약들이다. 약사는 환자의 처방전에 쓰인 약이 없을 때 이 오렌지북을 펼쳐 대체조제가 가능한 약을 쉽게 찾아낸다.
우리나라에는 “오렌지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의료계와 정부는 최근 대체조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생물학적 약효 동등성이 인정된 의약품’으로 인정되는 경우는 제외하기로 했다. 또 의사가 ‘처방불가’라고 기록한 의약품은 대체조제를 금지하는 것으로 서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의사와 정부간 협상에서의 두번째 쟁점, 즉 의료환경 개선과 관련해서는 쉽게 정리하기 어려운 다양한 문제점들이 거론되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의료보험수가 문제다. ‘수가’라는 말은 병원의 수입을 가리키는데, 환자가 내는 돈과 보험공단에서 병원에 건네 주는 돈을 합친 것이다. 감기로 병원에 갔을 때 환자가 5,000원을 병원에 내고, 병원이 또 보험공단에서 5,000원을 받으면 이 병원이 받은 수가는 1만원이 된다.
그런데 이 의료보험수가가 그동안 너무 낮게 책정돼 온 것이 큰 문제였다. 1978년 3공 시절 낮게 책정된 수가가 23년 동안 거의 그대로 적용돼 온 것이다. 의료계에서는 그것이 50%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정부는 64% 수준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곧 정부 수준으로 잡더라도 병원이 환자를 보고 받는 돈이 원가의 64%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마진은 고사하고 원가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두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하나는 왜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낮은 수가를 적용해 왔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면 의사와 병원은 어떻게 먹고살았느냐는 것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정부가 국민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분으로 병원측의 수가 인상 요구를 묵살해 왔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하여 의사와 병원이 참아라’하고 정부가 눌러온 것이다.
그러면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그것은 의사와 병원이 여러 가지 다른 수입이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약값에서 이익을 남겼다. 또 그 약을 들여올 때 제약회사로부터 리베이트·랜딩비 등 각종 뒷돈을 받았다. 또 의사가 하루 10명 보면 되는 환자를 20명, 30명씩 후다닥 봐가는 방법도 있다. 산부인과에서는 몇만원밖에 안되는 자연분만보다 보험과 아무 관계가 없이 현금이 고스란히 들어오는 제왕절개를 선호할 수밖에 없게 됐다.
생색은 정부, 부담은 병원
의약분업이 시행되면서 당장 병원은 약값에서 생기던 마진이 떨어져 나갔다. 당연히 그만큼의 공백을 환자와 보험공단이 채워줘야 한다. 의료계는 당장 보험수가가 원가의 110% 이상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자를 진료했을 때 원가와 마진이 모두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정부는 현재의 80% 수가에다 오는 2001년에 10%를 인상하고, 2002년에 10%를 인상해 모두 100%를 채우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파탄상태에 이른 지역의료보험 재정을 살려야 한다는 문제도 의료계와 정부가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한 채 서로 주장만 대립하는 부분이다. 의료계는 재정이 바닥나다시피 한 지역의료보험에 대한 국고 50%의 지원 약속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지만, 재정이 없는 정부로서는 “노력하겠다”는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다.
의료보험 대상이 되는 질병이나 질환을 늘리거나 합리화하는 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가령, 미국과 유럽에서는 보험 혜택을 받는 질병·질환의 종류가 1만종이 넘는다. 물론 거기에는 암이나 백혈병 등 일개 가정이나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중병들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전공의들의 주장처럼 우리는 잔병에는 후한 보험 혜택을 받으면서도 정작 돈을 감당하기 어려운 중병이 걸렸을 때는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우리 의료보험은 그런 점에서 보험이라기보다 의료비 할인쯤으로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예 보험 대상이 되는 질병의 범위가 우리는 작다. 현재 3,000종 가량이다. 이것을 늘린다는 것은 곧 의료보험공단의 지출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당국에서는 이 부분을 늘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병원도 그런 정부 방침에 자의반타의반 따라왔다. 병원의 입장에서 보면 보험 대상 질병은 수입이 적고, 보험 대상이 아닌 질병은 병원 수입을 늘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약분업이 실시되면서 이 문제는 의료계에서 개선을 촉구하는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의료보호제도의 확대도 중요한 현안이다. 의료보호카드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정부에서 어려운 서민들을 위해 무상으로 공급한 의료‘상품권’이다. 이 카드를 가지고 병원이나 약국에 가면 무료로 진료 처방과 약을 받을 수 있다.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정부가 국민에게 베푸는 훌륭한 복지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병원이나 약국에서는 이 카드를 아주 기피한다. 왜냐하면 이 카드로 진료받은 환자의 진료비를 정부가 잘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병원에 돈을 내주더라도 2∼3년 이상 걸리기 일쑤다. 앓느니 죽는다고 병원은 그냥 잡손실로 처리해 버린다. 생색은 정부가 내고, 속앓이는 병원이 해온 셈이다. 의사와 병원은 의료재정을 확보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사들의 분노는 그치지 않고 있다. 비상소위에 소속된 대표의 한 사람으로, 지난 9월26일 이후 줄곧 정부와의 협상 자리에 참석해온 한 의사는 “그 정도의 협상 성과를 얻는 데만 해도 얼마나 많이 참아야 했는지 모른다”면서 정부의 무성의한 협상 태도가 협상에 임하는 의사들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의사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고 전한다. 정부의 그 어떤 태도가 의사들을 다시 분노케 하고 있는지 협상에 참가중인 이들의 얘기를 모아 보자.
― 지난 9월26일 정부와의 협상이 재개될 때 우리는 세가지 전제조건을 달았다. 첫째, 구속된 의사들을 석방하고 수배자들에 대한 수배를 해제할 것 둘째, 8월12일 중앙대 집회때 의사들이 경찰로부터 당한 폭행에 대해 경찰청장이 사과할 것 셋째, 준비되지 않은 의약분업을 강행한 잘못 그리고 의사들의 정당한 반발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한 잘못에 대해 보건복지부 장관이 사과할 것 등이었다. 이 세가지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정부측은 이행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도 예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협상장에서 “보건복지부 관계자들을 문책하면 그것으로 양해하겠다”고 보다 현실적인 요구를 했다. 그것도 관계자들에게 어떤 인사상 불이익을 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의약분업 문제와 관련이 없는 다른 보직으로 수평이동시키면 문책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협상에 임하는 정부가 의사들에게 최소한의 성의 표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그것마저 들어주지 않고 있다.
― 우리가 대정부 요구안을 제시한 것이 8월30일이었고 정부와의 협상이 재개된 날짜가 9월26일이었다. 얼추 한달이다. 그 한달 동안이면 의사측이 제시한 요구안에 대한 검토가 끝나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협상이 재개된 첫날 테이블에 마주앉아 보니 정부측은 우리의 요구안을 거의 들여다보지도 않고 온 듯한 인상을 받았다. 정부측은 우리의 요구안 내용을 거의 알지 못하는 상태였고 그 바람에 처음 4일 가량을 의사측 요구안을 ‘브리핑’하는 데 허비해야 했다. 그런 그들과 정말 협상해야 하는 것인지, 또 얼마나 진솔한 협상이 될 것인지 자신이 없다.
― 의사측에서는 어떻게든 여러 가지 대안을 만들어 협상 테이블에 임한다. 가령 약사의 임의조제를 방지하는 방법으로 어떤 것들이 효과적인가를 연구해 정부측에 제시한다. 그러면 정부측은 의당 그 대안들을 어떻게 하면 정책에 반영할 수 있을까 하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게 옳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히려 그런 대안들을 자꾸 막으려 하거나 회피하려 한다. 이것은 이래서 곤란하고 저것은 저래서 안되고 하는 식이다. 도대체 같이 의약분업을 잘해 보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모를 정도다.
협상테이블에서의 분노
― 사소한 것은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안된다고 하고 굵직굵직한 현안들은 나중에 구성될 의료발전특별위원회로 넘기자고 한다. 의료발전특위 문제도 그렇다. 거기에 참여하는 의사는, 지금 정부와의 협상 자리에 앉아 있는 비상소위 위원들처럼 의사들로부터 대표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런데 의료발전특위 위원을 어떻게 구성할 것이며, 의사들 몫은 또 어떻게 배정할 것인지도 말이 없는 상태다.
― 정부가 협상에 임할 때는 원칙에 따라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고를 따져야 한다. 그런데 원칙보다 자꾸 다른 이해집단에 신경을 쓴다. 가령 약사의 임의조제를 막는 방법으로 약국에서 약을 낱알판매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하면, 그것이 타당한지 아닌지를 따져 결정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정부측은 그런 경우까지도 “약사들 입장이 있는데”라는 식이다. 우리와 얘기해 옳은데 다른 이익집단에 영향이 가는 문제 같으면 정부가 그들에게 가서 이해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부는 약사회와 마찰이 예상되는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자꾸 “의·약·정 협의회를 구성해 거기에서 얘기하자”고 하는데 우리보고 밥그릇싸움을 하라는 말인가? 옳은 것을 기준으로 정부가 각 이해집단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정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사들의 3차 파업을 앞두고 정부가 약사회측과 비밀리에 이면합의를 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정부와 의료계의 불신의 골은 더더욱 깊어진 상태다. 대한약사회가 공개한 내용을 보면 “지난 10월5일 보건복지부와 ▷조제과정에서의 의약품 손실분을 약값에 반영하고 ▷대통령 직속으로 약업발전특별위원회를 구성하며 ▷동네약국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강구하고 ▷의료기관과 약국간 담합 금지를 법제화하기로 하는 등 9개항에 걸쳐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사실이 드러나자 의쟁투 중앙위는 즉각 정부와의 대화 중단을 선언했다. 비상공동대표 10인소위도 정부의 설명을 들은 뒤 입장을 결정하기로 했다. 정부로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자충수에 또 한번 발목을 잡힌 꼴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정부와 의사 간에 협상이 진전되는 속도는 지극히 더디다. 최근 비상소위는 그동안 정부와 벌여온 협상 내용을 의사들에게 공개했다. 대다수 의사들이 다음과 같은 반응이었다고 한다.
“정부가 협상 의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비상소위는 당장 협상을 집어치워라. 지금부터라도 의사들이 좀더 강력한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끌려갈 수는 없다. 이제 의사들이 의약분업 불참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의약분업을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의사들의 분노, 그것은 과연 언제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가?
기자의 視角
의약분업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의사들에 대한 우리 밥풀떼기(한자로 표현하면 民草쯤 될 것이다) 서민들의 커다란 한 줄기 정서를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환자들에게 고압적이고 불친절한 의사들의 딱딱한 표정과 말투를 미워하는 것이었다. 그 정서라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의약분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외적(外的) 사항일 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하찮은 정서라는 것이 이번 의약분업 사태에서 ‘의사의 도리’를 강조하는 정부·언론의 물대포를 국민이 좍좍 빨아들이게 한 심리적 스펀지로 작용했다.
모든 의사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기자 역시 의사의 권위와 불친절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의사들 전부가 아닌 단 한 사람이 불쾌감을 주었더라도 그러한 경험은 의사집단 전체를 향한 반격적 감정으로 남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령 은행이나 백화점 같은 곳에서 모든(한 사람도 어긋남 없도록) 직원에게 친절교육을 시키는 것일 게다.
그런 판에 수많은 사람이 그같은 ‘반격적 감정’을 갖고 있다고 증언하는 것은 권위적이고 불친절한 의사들이 적지않다는 현실을 분명히 반영한다. 그것이 권위의식, 그야말로 의학지식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우월함을 즐기기 위한 것이라면 의사들은 백번 반성해야 할 것이다.
반면 그런 고압적 자세와 불친절이 열악한 의료현실 때문에 빚어진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는 의사들의 주장도 무조건 버릴 수는 없다. 그만큼 열악한 현실과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기자 역시 부드럽고 친절하게만 사람들을 대할 자신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그런 의사들의 변명(?)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의사들이 처한 의료현실에 눈을 돌리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 그러니까 의료여건이 달라졌는데도 의사들이 계속 건방지게 굴고 환자 위에 군림하려 든다면 그때 가서 얼마든지 혼낼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여태껏 배불리 먹고 살아온 ‘부자’들이, 의약분업으로 좀 손해를 본다고 해서 저렇게 파업을 하고 난리를 칠 수 있느냐는 정서다. 옳다. 의사들은 그 수련 과정이야 어쨌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대개 부유하게, 따뜻하게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의사들대로 그동안 심리적, 정신적 고충이 많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의사도 사람인 이상 법률전문가인 변호사처럼 정당한 자기 기술료를 인정받고 합법적인 수입에 의존해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의사들이 기대온 것은 정당한 수입은 아니었다. 가령 의사(또는 병원)가 환자 한 사람을 치료하는 데 100원의 원가가 들었다고 해 보자. 정상적인 수입만 따질 경우 의사는 환자가 내는 돈 30원 가량과 보험공단에서 주는 돈 34원 등 64원을 받게 된다. 그게 지금까지 우리 의료보험 시스템이었다. 슈바이처라면 모를까, 평범한 가정을 가진 평범한 의사라면 그렇게는 결코 살지 못할 것이고, 죽었다 깨어나도 ‘의사질’은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의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별도의 다양한 수입에 의존해 원가도 채우고 이익도 남겨왔다. 대개는 정상적인 수입이 아니다. 거기에 의사의 딜레마가 있다. 남들보다 어렵고 힘든 공부를 오래 해서 비정상적인 혹은 덜 정상적인 수입에 기대어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자.
“환자들을 제대로 보고 참다운 의술(醫術)을 펼치면서, 그래서 존경받아 가면서 안정되게 살고 싶다. 그러러면 의사라는 전문성에 걸맞은 대가가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의약분업만 해도 그렇다. 의사와 병원이 약값에서 생기는 이익으로 손실을 보충해 왔는데 그것을 떼어내는 꼴이다. 의료보험수가는 여전히 원가에도 못미치는데 말이다. 그러면 누가 의사를 하고, 누가 병원을 하겠는가? 우리의 정부에 대한 투쟁과 요구도 우리의 정당한 대가, 정당한 삶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이 의사의 말처럼 의사도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정당한 여건이 만들어 지면 인술을 펼치면서 존경받아 가며 인간답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우리는 의사들이 처한 의료현실에 눈을 돌려 거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자가 만난 대다수 의사들은 돈
때문에 의약분업을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의약분업을 해서 명실공히 의사답게 살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의료환경이 개선됐는데도 계속 예전처럼 온갖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입을 올리려고 하면, 이 역시 얼마든지 혼낼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의사들이 밉다고 해서 국민의 건강과 생명이 달린 국가대사(大事)를 그르칠 수는 없다. 정서적으로 의사들이 밉다고 해서 무조건 그들의 말을 외면해서는 의료환경의 개선도, 의약분업 문제의 해결도 기대하지 못한다.
지금은 ‘정서’를 일시 뒤로 돌리고 의약분업의 진실과 본질을 바로 따져볼 때다. 진실과 본질이라는 것은 정서의 좋고 나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과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취재의 결론은 ‘이제 정부가 의약분업과 의료개혁을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의약분업은 정부의 뜻대로 8월1일부터 시행됐다. ‘선시행 후보완’ 중에서 선시행은 이뤄진 셈이다. 이제 후보완을 할 차례다. 정부가 의약분업과 의료개혁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다.
하나는 진정한 의약분업이 될 수 있도록 의사들과 진지하고 성의있게 의약분업의 원칙과 세부사항들을 논의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좀더 시간이 걸리는 일도 있다. 그것은 곧 정부가 국민의 합의를 얻어낼 시간이다. 정부가 나서서 국민에게 의료계의 현실을 알리고 앞으로 의료비(보험료) 부담을 대폭 늘릴 수밖에 없다는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정부가 맡아줄 큰 일이다. 의료재정을 확보해 그것을 통한 의사·병원의 현실적인 생활과 운영이 가능하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일은 정부의 몫이다. 현재 우리 국민이 부담하는 의료보험료는 자기 소득의 3% 미만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국민들의 평균 자기부담액에 비하면 4분의1 수준이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 우리 국민이 내는 의료보험료로는 의사와 병원이 생활을 꾸려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 돈으로 의사와 병원이 먼저 살겠다고 하면, 국민은 어쩔 수 없이 1970년대 수준의 질 낮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들에게 의료비 부담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이해를 구하고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시간이 걸릴 수도 단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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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분업사태 일지
1994 한약분쟁후 개정된 약사법에 의해 ‘동법 시행후 3~5년의 범위 (1997년 7월~1999년 7월)내에 대통령령이 정한 날로부터 의약분업을 시행하도록 부칙에 명시
1997 의료개혁위원회에서 의약분업 모형안 및 의약품 분류안 제시
1998.5.21 보건복지부에서 1999년 7월 의약분업 실시를 위한 의약분업추진협의(이하 분추협) 결성
1998.8.24 제4차 분추협 회의에서 의약분업을 1999년 7월1일부터 시행하기로 합의
1998.12.3 대통령, 집권여당 주도로 의약분업을 추진하도록 실시
1999.2.21 국민회의 주도로 의사회와 약사회 의약분업 1년 연기 합의
1999.2.24 1년 연기하되 ‘시민단체와 함께 2개월 이내에 합의를 도출’하기로 의사회와 약사회가 약속한다는 합의문 발표
1999.5.10 의사회와 약사회가 ‘시민대책위원회’방안에 합의 및 발표
1999.11.30 의료계 1차 전국집회(장충체육관)
2000.2.17 의료계 2차 전국집회(여의도)
2000.2.21 의쟁투 단식투쟁 시작
2000.4.1 새로 구성된 의쟁투 중앙위원회에서 4월3일부터 6일까지 휴진 결정. 추후 휴진 연장 여부를 결정하기로 함
2000.4.4~6 전국 개원의 총파업
2000.4.7 파행적 의약분업 반대 전공의 집회(서울대병원) 및 가두시위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2000.5.21 의협 의쟁투 상임이사 및 중앙위원 연석회의에서 완전분업을 위해 의협(의쟁투)에서 요구한 10개항의 분업안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단계별 투쟁을 거쳐 6월20일 전면폐업에 들어가기로 결정
2000.6.4의료계 3차 전국집회(과천 정부종합청사)
2000.6.19 의료계 총파업 돌입
2000.6.24여야 영수회담에서 7월 임시국회 회기내 약사법 개정 합의
2000.6.26투표 결과에 따라 폐업 철회
2000.7.20개정 약사법 국회 통과
2000.8.30의료계 대정부요구안 12개항 발표
2000.8.31 의료계 보라매공원 집회
2000.9.26 의료계와 정부, 협상 재개
2000.10.6 의료계 폐업 돌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