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가장 훌륭한 베이시스트로 꼽히는 사람이죠..
하지만 대부분의 천재뮤지션들이 그러했듯이..
통제가 잘안된다고나할까요-_ -
밑에 글 쭉읽어보시면 대충 아실겁니다..
또, 자코의 아들과 딸도 베이시스트라고 알고있습니다..
아들은 베이스데이 행사에서 빅터우튼등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하더군요..
Jaco Pastorius - bass
Born Dec 1, 1951 in Norristown, PA
Died Sep 21, 1987 in Fort Lauderdale, FL
자코 파스토리우스는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 사상 가장 위대한 연주자다. 제임스 제이머슨을 위시한 몇몇 베이스 선구자들이 연주상의 큰 틀을 제시했다면 자코 파스토리우스는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의 가능성을 다각도로 실험하고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의 지미 헨드릭스라고 할 만하다. 연주자로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가파르고 거친 역경의 드라마였다. 음악과 연주로 최정상에 올랐지만 그것이 결코 삶과는 비례하지 않았고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나친 천재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기인적인 행태와 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 때문에 자코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자코는 평소 틈만 나면 "난 세계 최고의 일렉트릭 베이시스트야" 또는 "나와 지미 헨드릭스가 음악계의 세계 무역센터 타워를 설계했지"라는 등의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는 결코 자기보다 베이스를 더 잘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고 여겼으며 이러한 지나친 자만심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자주 소외되곤 했다. 술에 취하면 술집이 떠나갈 정도의 큰 목소리로 "여러분! 난 자코라는 사람입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지구상에서 제일 뛰어난 베이스 플레이어지요."라고 외치곤 했다.
자코 파스토리우스는 1951년 12월 1일 게르만과 아이리쉬 혈통의 아버지 잭 파스토리우스(Jack Pastorius)와 스웨덴계인 어머니 스테파니 하팔라(Stephanie Haapala)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코의 할아버지인 존 프랜시스 파스토리우스는 육군 하사관으로 군대에서 드럼을 쳤고, 이후 로컬밴드에서도 연주를 했다. 그의 아들인 존 프랜시스 파스토리우스 주니어(잭)는 아버지의 이런 것을 어깨너머로 살피며 드럼을 익혔다. 이후 잭은 재즈 색소폰 연주자인 테오 마세로(Teo Macero)와 친하게 지냈고 서로 뜻이 맞아 캘리포니아 등지를 오가며 콰르텟을 조직해 연주활동을 했다. 얼마후 잭은 필라델피아로 가 캐주얼스(Casuals)라는 보컬 앙상블을 조직해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이즈음에 어린 자코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지며 성장하고 있었다.
자코가 2살 경인 1953년 잭의 둘째 아들 그레고리가 태어났고, 1955년에는 세번째 아들인 로리가 태어났다. 집에 있는 시간에 잭은 토니 베네트나 프랭크 시나트라, 냇 킹 콜 등의 음반을 틀어놓고 드럼을 치며 잼을 하곤 했다. 세 아들은 이런 광경을 보며 성장했다. 또 잭은 공연 때마다 아들들을 데리고 무대에 섰다. 그러던 어느날 필라델피아 공연시 잭은 아들들을 무대에 세워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다. 그러나 그레고리와 로리는 매우 수즙음을 타며 무대에 서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자코는 달랐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필라델피아 공연에서도 자코는 점프를 하거나 갖가지 액션을 취하며 쇼맨쉽적인 기질을 보여 아버지인 잭을 즐겁게 했다. 자코는 아버지의 밴드와 함께 프랭크 시나트라의 'Come Fly with Me'를 부르며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아직은 어린 꼬마였음에도 이미 자코는 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쇼맨쉽을 가진 재능있는 인물이었다.
1959년 여름에 자코는 마이애미의 포트 로더데일(Fort Lauderdale)로 이사해 새로운 환경을 즐기며 음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자코가 기타를 치기 시작한 때는 12살 경이었는데 이미 이 당시의 자코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드럼을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성이 남달랐다. 13살때 자코는 첫 밴드를 조직해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는 드럼을 맡았다. 그러나 드러머로서의 그의 경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64년 늦가을의 어느날 자코는 고교 풋볼리그 경기중 손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드럼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베이스 기타로 전향한 그는 타고난 음악성으로 빠른 실력 향상을 보였다.
1968년 여름 자코는 또다른 전환점이 되는 획기적인 사건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어느날 밤 그는 포트 로더데일에 있는 한 나이트클럽에서 네모 스플리프(Nemo Spliff)라는 밴드의 공연을 보게 되는데 그 팀의 베이시스트인 카를로스 가르시아(Carlos Garcia)의 연주에 반해버리고 만 것이다. 공연이 끝난 후 자코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네모 스플리프의 테입을 사서 열심히 카를로스 가르시아의 주법을 연습했다. 이렇게 익힌 카를로스 가르시아의 주법들은 이후 자코의 'Come On, Come Over'와 'Opus Pocus', 그리고 웨더 리포트의 'Barbary Coast'-[Black Market]에 수록 - 등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1969년경 자코는 남플로리다주 음악계에 이미 그 존재를 드러내는 베이스 플레이어가 되고 있었다. 해먼드 오르간의 빌리 버크(Billy Burke), 드럼의 밥 허족(Bob Herzog), 그리고 베이스의 자코 등 트리오로 구성된 이들은 우드척(Woodchuck)이라는 팀명으로 활동하며 클럽가를 누볐다. 1970년말엽 자코는 타미 스트랜드 앤 어퍼 핸드(Tommy Strand & the Upper Hand)라 불리는 밴드와 리허설을 했는데 당시 드러머였던 스콧 커크패트릭(Scott Kirkpatrick)은 자코에 대해 '위대한 그루브 플레이어'라고 극찬을 했다.
1970년 12월 9일 자코의 딸 매리 파스토리우스가 태어났다. 이날은 자코가 19번째 생일을 맞은지 불과 8일째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된 자코는 무언가 돈이 되는 것을 해야만 했다. 1972년 여름에 자코는 주당 250달러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C.C. Rider라는 밴드에 가입했다. 이것은 이전 밴드인 Tommy Strand & the Upper Hand에서보다 좋은 대우였다. 이 밴드에 있으면서 자코는 더욱 음악에 정진하는데 이즈음 그가 가장 열심히 연구하던 연주자는 찰즈 셰릴(Charles Sherrell)과 버나드 오덤(Bernard Odum)이었다.
그는 R&B 소울 계열의 음악들을 닥치는 대로 들으며 연구하고 카피해 자신의 주법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은 이후 그의 첫 솔로 데뷔앨범에서 잘 나타나게 된다. 자코가 C.C. 라이더스에서 즐겨 연주했던 곡으로는 베티 라이트(Betty Wright)의 'Cleanup Woman'과 데이빗 로즈(David Rose)의 'Holiday for Strings', 그리고 'I Love Lucy' 등이다. 'Cleanup Up'은 그루브감 때문에 좋아했고, 'I Love Lucy'는 도미넌트 증11도 코드와 13도의 쓰임이 기가 막히기 때문에 자코가 특히 사랑했다. 그가 좋아하던 류의 코드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73년 이후 자코는 피아니스트 빈스 메죠(Vince Maggio)가 결성한 베이커스 더즌(Bakers Dozen)이라는 대규모의 밴드와 활동을 했고, 트롬본 주자 피터 그레이브스(Peter Graves)의 눈에 띄어 그와 활동하기에 이른다. 피터 그레이브스는 당시 플로리다에서 꽤 유명해 자코는 그 유명세로 말미암아 포 탑스(Four Tops), 슈프림스(Supremes), 템테이션스(Temptations) 등의 유명 그룹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이럴 즈음 1973년 10월 20일에 아들 존이 태어났다. 이미 딸과 아들, 그리고 부인 등 부양가족이 3명이나 있게 된 자코로서는 생계를 해결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자코는 베이시스트로서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사는 촌동네의 극히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자코의 이런 생계를 알고 있던 그레이브스는 이것저것 큰 공연거리가 있으면 자코에게 일거리를 주어 그가 돈을 벌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당시 자코는 드러머 대니 고트립(Danny Gottlieb), 기타리스트 팻 메쓰니(Pat Metheny), 트럼펫 주자 론 툴리(Ron Tooley), 베이시스트 마크 이건(Mark Egan) 등을 알게 된다. 또한 마이애미 대학의 재즈학과-당시 학과장은 빌 리(Bill Lee)로 그는 베이시스트 윌 리(Will Lee)의 아버지-에 시간강사로 출강하는 기회도 잡게 되었다.
이후 자코는 루 롤스(Lou Rawls) 밴드에 가입해 몇번의 공연을 함께 했다. 한편 1973년 겨울 자코는 재즈 피아니스트인 폴 블레이(Paul Bley)와 인연을 맺게 된다. 폴 블레이는 찰리 헤이든, 게리 피콕, 스티브 스왈로우 등과 활동한 바 있는 베테랑으로, 자코는 그와의 인연으로 새로운 음악적 경험을 하게 된다. 1974년 여름에 폴 블레이는 자코를 뉴욕으로 초대해 그리니치 빌리지의 심장부인 맥두걸 스트리트(McDougal Street)의 재즈클럽에서 연주하게 한다. 폴 블레이(피아노), 팻 메쓰니(기타), 자코(베이스), 그리고 브루스 디트마스(드럼) 등의 화려한 라인업으로 구성되어 연주를 하자 그리니치 빌리지 재즈클럽 일대는 이 팀을 주목하게 된다. 관객들의 반응이 너무 좋자 폴 블레이는 이 라인업으로 음반을 내기 위해 1974년 6월 16일 블루 록(Blue Rock) 스튜디오에 들어가 녹음을 하는데 이렇게 해서 나온 앨범이 바로 [Pastorius/Metheny/Ditmas/Bley]다. 같은 기간동안 자코는 마이애미 기타리스트인 윌리 리틀 비버 헤일(Willie "Little Beaver" Hale)의 앨범 [Party Down]에도 세션으로 참여해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1975년에 자코는 아이라 설리번(Ira Sullivan)의 셀프타이틀 앨범에도 참여해 커스텀메이드 어쿠스틱 베이스로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 또한 그해 여름엔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의 드러머 바비 콜롬비(Bobby Colomby)를 만나 'Bachelors Ⅲ'에서 함께 활동했다. 자코의 재능을 간파한 바비 콜롬비는 그가 앨범을 낼 수 있도록 에픽 레코드사 담당자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렇게 해서 자코는 1975년 9월 15일 에픽 레코드사와 계약을 하고 1년후 마이애미의 크리테리아(Criteria) 스튜디오에서 완성한 데모테입을 에픽 담당자에게 건네주었다. 이 데모는 베이스의 자코 이외에 드럼의 바비 에코노무(Bobby Economou), 피아노의 알렉스 다르키(Alex Darqui), 콩가의 돈 에리어스(Don Alias) 등이 참여했다. 데모를 들어본 에픽 담당자는 만족해했고 데모를 기반으로 자코는 뉴욕에 있는 바비 콜롬비의 홈 스튜디오에서 정식 녹음을 하게 된다. 자코가 만든 원래 악상에 콜롬비의 아이디어-R&B, 라틴, 재즈, 심포닉-가 가미되어 음악은 말 그대로 당시로선 매우 혁신적인 것이 창출될 수 있었다.
'Come On, Come Over', 'Donna Lee', '(Used To Be a Cha-Cha' 등의 명곡을 수록한 자코의 데뷔앨범은 당시의 베이스계를 발칵 뒤집을 만큼 혁명적인 핵폭탄으로 떠올랐다. 자코는 이 앨범에서 뮤트주법에서 하모닉스 등에 이르기까지 수준높은 기술들을 종횡무진 구사하며 당대의 베이시스트로 떠올랐다. 자코만의 하모닉스 주법이 빛을 발하고 있는 'Continuum'의 경우 B, F#, C# 등의 하모닉스가 탁월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펜타토닉 스케일에 기반한 이곡에서 그는 더블스톱에서 옥타브, 16분음 구사 등 다양한 기교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실로 아름다운 프레이즈를 연출했다. 당시 이곡은 그 어떤 베이시스트들에게서도 들어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연주였고, 유명 베이시스트들 조차 혀를 찰 정도였다. 팻 메쓰니는 자코와 함께 트리오를 조직해 보스톤 일대에서 연주활동을 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75년 12월 자코는 팻 메쓰니의 데뷔앨범 [Bright Size Life] 녹음을 위해 독일의 'Ludwigsburg'로 가 맹활약을 했다. 당시 팻 메쓰니의 스승이자 재즈계의 거물이었던 게리 버튼은 자코의 연주를 보곤 "믿을 수 없을만큼 뛰어난 혁신적인 일렉트릭 베이스 플레이어"라고 극찬을 했다. 그는 이 말을 팻 메쓰니의 데뷔앨범 해설에 그대로 삽입시켰다.
자코와 조 자비눌의 만남은 정말로 특별하게 이루어졌다. 1975년초의 어느날 조 자비눌이 이끄는 웨더 리포트는 거즈만(Guzman) 극장에서 연주를 하기 위해 사운드를 체크하고 있었다. 이때 자코가 조에게 다가가 그와 연주하고 싶다고 끈질기게 자신을 PR했다. 자코의 집념어린 태도에 마음이 끌린 조는 자코에게 데모테입을 만들어 보내달라고 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자코는 호텔로 가 밤새도록 데모를 찍어 조에게 갖다 주었다. 자코의 연주를 들어본 조 자비눌은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1976년 1월 웨더 리포트의 베이시스트 알퐁소 존슨이 드럼의 빌리 코뱀(Billy Cobham), 건반의 조지 듀크(George Duke) 등과 함께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기 위해 웨더 리포트를 탈퇴하겠다고 공표하자 조 자비눌은 자코를 불렀다. 자코가 웨더 리포트에 공식적으로 가입한 날짜는 1976년 4월 1일이다.
웨더 리포트의 1977년 앨범 [Heavy Weather]에서 자코의 역할은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이 앨범은 판매고 면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어 재즈록 그룹으로서는 이례적인 골드 레코드를 따낼 수 있었다. 이 앨범은 현재까지도 재발매되고 있는데 여전히 잘 팔리는 스테디셀링 앨범으로 자리하고 있다.
웨더 리포트에서의 활동 이외에도 자코는 팻 메쓰니, 라일 메이스, 조니 미첼, 마이클 브레커 등과 연주를 하며 개인적인 캐리어를 탄탄하게 쌓아갔다. 특히 조니 미첼과의 공연에서 자코는 '어쿠스틱 360' 앰프로 퍼즈톤을 잘 살리며 폭발적인 피드백 사운드를 구사했고, 원시적이며 격정적인 베이스 솔로잉을 펼쳐 마치 몬터레이 페스티벌에서의 지미 헨드릭스를 연상케 했다.
1980년대 초반에 웨더 리포트는 [Night Passage]라는 앨범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구조적으로 잘 다듬어진 'Three Views Of a Secret' 이외에도 자코의 성난 사자와도 같은 워킹 베이스 라인이 업템포를 타고 흐르는 'Fast City', 바비 토마스의 퍼커션이 돋보이는 'Port Of Entry' 등 다수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어 시선을 끌게 한다.
그러나 음악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자코는 술과 마약에 탐닉하며 점점 심각한 지경으로 자신을 몰고간다. 음주문제를 둘러싸고 툭하면 아내와 싸움을 벌였고 길거리에서 부인을 폭행하는 것도 예사였다. 웨더 리포트의 일본 투어중에 아내와 싸우다 공연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하는 등 상태가 심각해지자 조 자비눌은 자코의 해고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한편 1980년 8월부터 자코는 플로리다와 LA, 뉴욕 등을 오가며 두번째 솔로앨범 [Word Of Mouth]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 앨범은 1981년 여름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한마디로 말해 자코의 천재성이 여실히 나타나 있는 걸작이었다. 이 앨범은 공개되기가 무섭게 일본에서는 골드를 기록했고 미국 및 유럽 등지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워드 오브 마우스'는 처음엔 단순히 자코의 두번째 솔로앨범 타이틀로 사용될 것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것은 자코를 리더로 하는 밴드명으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1982년 1월 15일 워드 오브 마우스 밴드는 뉴욕의 샤보이에서 데뷔공연을 가졌다. 약 20여명이나 되는 이 빅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자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너무 큰 규모의 편성에 일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샤보이 극장에서의 성공적인 데뷔공연 이후 워드 오브 마우스는 시카고, LA, 마이애미 등지를 돌며 공연을 펼쳤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재즈공연의 명소 버드랜드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소호의 클럽에서는 마이크 스턴, 하일럼 블럭, 제임스 블러드 얼머, 데이빗 샌본, 델마 브라운, 밥 모시스, 필립 윌슨 등과도 잼을 펼쳤는데 'So What', 'All Blues' 등의 마일즈 데이비스의 명곡들이 연주되었다.
1982년 기타 플레이어지 애독자 투표에서 자코는 '최우수 재즈 베이시스트'로 선정되었고, 스윙저널지에서도 '올해의 최우수 재즈 아티스트'로 선정되었다.
1982년 6월 9일 자코의 부인 잉그리드가 쌍둥이를 낳았다. 쌍둥이 출산을 기념해 자코는 1982년의 워드 오브 마우스 더블 라이브앨범 타이틀을 [Twins]로 지었다.
이즈음 자코의 베이스는 스윙감이 날로 좋아지고 필링도 더욱 드라마틱해지고 있었지만 그의 건강은 지나친 음주로 인해 망가지고 있었다. 플로리다로 돌아온 그는 다시 술을 끼고 사는 생활을 반복했다. 자코는 1982년말경에 디어필드(Deerfield) 비치에 있는 집을 나와 뉴욕으로 향했다. 그리고 워드 오브 마우스의 보다 실용적인 활동을 위해 멤버를 축소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해서 워드 오브 마우스는 색소폰의 알렉스 포스터(Alex Foster), 트럼펫의 엘마 브라운(Elmar Brown), 퍼커션의 카롤 스틸(Carol Steele), 건반의 델마 브라운(Delmar Brown), 드럼의 켄우드 데나드(Kenwood Dennard)-팻 마티노, 브랜드 X 등과 연주했던 인물-등으로 축소 편성되었다. 이들은 몇몇 지역을 돌며 성공적으로 공연을 펼쳤고 1983년 여름 마이크 스턴이 합류해 밴드는 새로운 생기를 띠게 되었다. 마이크 스턴과 함께 워드 오브 마우스는 유럽 등지를 돌며 열정적인 공연을 펼쳤다.
1984년 1월 워드 오브 마우스 밴드는 뉴욕으로 돌아왔다. 한데 델마 브라운이 자신의 밴드를 위해 탈퇴하게 되어 워드 오브 마우스 밴드의 라인업에 변동이 생기게 되었다. 켄우드 데나드도 해리 벨라폰테와의 일정으로 빠졌고 오로지 알렉스 포스터만이 혼자 남게 되었던 것이다. 자코와 마이크 스턴, 그리고 알렉스 포스터 등은 뉴욕의 55바에서 끝까지 연주를 했다. 이즈음 마이크 스턴이 술과 약물, 과로 등에 의해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결국 워드 오브 마우스는 잠시 휴식기간을 가졌고 이 기간동안 자코는 일본 투어를 구상하게 되었다. 일본 투어를 위해 짠 라인업은 베이스의 자코 이외에 기타의 마이크 스턴, 드럼의 켄우드 데나드 등이었다.
1984년 12월 19일 워드 오브 마우스 밴드는 프랑스 라디오에 출연해 연주를 했는데 이 공연은 후일 부틀렉 CD로 공개되었다. 여기에서 자코는 지미 헨드릭스의 'Purple Haze', 태드 다메론의 'If You Could See Me Now', 폴 매카트니의 'Blackbird', 존 콜트레인의 'Naima' 등등 다수의 유명 곡들을 연주해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즈음 자코는 이혼의 아픔을 겪으나 브라이언 멜빈의 데뷔앨범 [Night Food] 제작에 참여하며 스튜디오에서 생기를 찾아 음악에 전념한다. 이 작업을 끝내고 뉴욕으로 돌아온 후에는 레드 제플린 출신의 기타리스트인 지미 페이지와 함께 '론 스타'에서 잼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경부터 자코는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술과 약물에 삶을 맡기는 사람으로 변해 갔다. 술집에서 만취한 상태로 심하게 싸우다가 감옥에 가는 일도 있었다. 그해 5월 1일에도 자코는 감옥에 있었다. 이번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집을 무단 침입한 죄였다. 어떤 때에는 술에 취해 도로 한복판에서 옷을 홀랑 벗고 잠을 자다가 경찰에 걸려 감옥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절친한 친구 두명이 비슷한 시기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고 심한 우울증과 자학증세를 보이시 시작한다.
1987년 9월 11일 밤 자코는 포트 로더데일 교외의 클럽가를 방황하며 술을 퍼마셨다. 그러다가 미드나잇 나이트 보틀(Midnight Night Bottle)이라는 회원제 클럽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클럽 관계자는 자코가 너무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라는 것을 알고 클럽에 입장시키려 하지 않았다. 자코가 "왜 들어갈 수 없느냐"고 따지면서 실랑이가 벌어졌고 매니저는 자코에게 폭행을 가했으며 너무 술에 취했던 자코는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맞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다음날인 12일 새벽 4시경 경찰이 들이닥쳤고 자코는 피에 뒤범벅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져 있었고,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자코는 4시 20분경 '브라운 카운티 종합병원'에 실려 갔다. 자코는 장장 6일동안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누워 있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내 손가락을 짓누르고 있어.", "네 발가락을 움직여 봐." 등 두가지 말만을 신음소리와도 같이 외쳐댔다. 그가 왜 이런 잠꼬대와도 같은 신음소리를 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9월 19일 그는 뇌사상태에 빠졌고 9월 21일 9시 25분경 심장마저 영원히 멈추고 말았다.
그의 죽음 이후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자코를 추모하는 트리뷰트 앨범을 공개했고, 또 일부는 자코를 추모하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베이시스트인 스탠리 클락은 'Goodbye Pork Pie Hat'에서, 모 포스터(Mo Foster)는 자신의 솔로앨범 [Bel Assis]에서 'Jaco'라는 곡을 통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외에 팻 메쓰니 그룹의 'Jaco', 길 골드스타인의 'THree Views of a Secret'과 'Ballon Song', 요나스 헬보그의 'Jaco', 레니 스턴의 'Who Loves You', 레니 화이트의 'Dania', 옐로우자켓의 'Galileo' 등도 자코를 추모하는 곡들이다.
명인의 삶은 혼돈과 삶의 중간단계 의 아방가드로 의 세계가 아닐듯...... 명인의 삶은 짧을지라도 그의 혼과 정성이 들어간 앨범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빛을 발하구 있습니다.... 자코의 음악을 들으면 레드제플린 의 지미페이지나 젊었을 때의 에릭클립턴 등 의 멋진 기타리스트와의 협연과 그의 나름대로 일렉트릭 재즈
자코의 앨범은 그리 쉽게 발견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일본엔 무수히 많은 앨범들이 많지요... 찰리파커의 앨범도 미국엔 없어도 일본엔 있는게 무지 많지요...... 일본은 재즈의 천국입니다..... 저도 일본에서 사온 자코의 앨범이 세장 있는거 같은데.... 오늘밤에 함 들어봐야 겠군요...
첫댓글 오고가는 정겨운 정보망~ ^^
명인의 삶은 혼돈과 삶의 중간단계 의 아방가드로 의 세계가 아닐듯...... 명인의 삶은 짧을지라도 그의 혼과 정성이 들어간 앨범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빛을 발하구 있습니다.... 자코의 음악을 들으면 레드제플린 의 지미페이지나 젊었을 때의 에릭클립턴 등 의 멋진 기타리스트와의 협연과 그의 나름대로 일렉트릭 재즈
계에서 중요한 세계관을 개척하신 훌륭한 분입니다... 이런 분들을 위한 무료 술집을 우리 재즈속으로가 열면 어떨까여????????????? (돌 날라온다...... 피해라!!!)
자코의 앨범은 그리 쉽게 발견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일본엔 무수히 많은 앨범들이 많지요... 찰리파커의 앨범도 미국엔 없어도 일본엔 있는게 무지 많지요...... 일본은 재즈의 천국입니다..... 저도 일본에서 사온 자코의 앨범이 세장 있는거 같은데.... 오늘밤에 함 들어봐야 겠군요...
전 자코 추모앨범이 있어요,,, Who Loves You라고,,, 들어보니깐 그루브가 넘 좋아서,,, 어떤사람일까 하고 궁금했었지요,,, 답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