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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6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세계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 프랑스 50년만에 공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이 50년 만에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이트에 따르면 도서관은 올해 4월 12일(현지시각)부터 7월 16일까지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을 주제로 한 전시에서 '직지'를 공개한다.
박물관 측은 전시 소개 글에서 "인쇄술의 발전 역사와 성공의 열쇠를 추적할 것"이라며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인 직지(한국, 1377년)'를 전시한다고 밝혔다. 1973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열린 '동양의 보물' 전시 이후 최근까지 직지 실물이 일반에 공개된 바는 없다.
직지의 정확한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과 청주고인쇄박물관 등에 따르면 직지는 충북 청주 흥덕사에서 고려 우왕 3년(1377)에 금속활자로 간행됐다.
상·하 2권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2023년 영국 북동부 요크서 햐안에서 1억6600만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공룡발자국 발견
2022년 호주 시드니에서 몸길이 4m 백상어에 물려 사망사고 발생
2022년 일제 강점기 당시 미쓰비시중공업에서 강제노역을 한 박해옥 할머니가 향년 93세로별세
박 할머니는 1930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순천남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일본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 제작소로 동원됐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강제 노역을 했으며, 해방 후 귀국했습니다.
지난 1999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하며 법정 투쟁을 이어갔지만, 2008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습니다.
이후에도 고인은 포기하지 않고 2012년 광주지법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내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본과 미쓰비시중공업 측은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죄의 뜻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박 할머니가 숨을 거두면서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5명의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는 2명으로 줄었습니다.
2020년 박인비 LPGA 투어 호주 여자오픈 우승(14언더파 278타), 박세리에 이어 한국선수 두 번째 통산 20승 달성
2010년 모태범,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첫 금메달
2010년 2월 16일 모태범(21.한국체대)이 캐나다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에서 벌어진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1, 2차 시기 합계 69초82를 기록, 일본의 나가시마 게이치로(69초98)를 0.16초 차로 제치고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종목에서 한국의 사상 첫 금메달이었다.
이로써 모태범은 한국이 처음 참가했던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이후 무려 62년 만에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처음 목에 건 주인공이 됐다. 또한 일본 식민지였던 1936년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처음 올림픽 무대를 밟았던 김정연 이후 무려 74년 만에 수확한 값진 금메달이다. 더구나 이날은 모태범의 생일날이기도 했다.
1,000m와 1,500m가 주력 종목인 모태범은 2009-2010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시리즈 500m 세계랭킹에서 14위에 올라있었다.
모태범은 1차 시기에서 총 20조 가운데 13조에서 34초92의 기록으로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이어진 2차시기에서 34초90로 결승선을 통과, 1, 2차 시기 합계 69초82로 중간 순위 1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기대를 모았던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이강석(의정부시청)은 1, 2차 시기 합계 70초04를 기록, 3위를 차지한 가토에게 0.03초 차로 아쉽게 동메달을 내주고 말았다. 또 맏형 이규혁(서울시청)은 70초48로 15위, 문준(성남시청)은 71초19로 19위에 만족해야 했다.
2009년 고(故) 안익태 선생 부인 롤리타 안(安) 별세
'애국가'를 작곡한 고(故) 안익태(安益泰·1906~1965·94) 선생의 부인 마리아 롤리타 안(본명:마리아 돌로레스 탈라베라) 여사가 2009년 2월 16일 오전(현지시각)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스페인 출신인 고인은 1946년 마요르카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부임한 안 선생과 결혼했고, 1965년 선생이 59세를 일기로 작고한 뒤에도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2005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한국은 남편이 물려준 조국"이라면서 '애국가'의 저작권을 한국 정부에 무상으로 기증했고, 2006년엔 안 선생이 사용하던 피아노·지휘봉 등 150점의 유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고인은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전인 한국·스페인전을 앞두고 "나는 한국사람이고 한국팀 승리를 바라는 게 당연하다"고 말해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었다.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나는 그동안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면서 사세요.”
천주교 김수환(金壽煥·87) 추기경이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지난해 7월 노환으로 입원한 김 추기경은 10월 초 한때 호흡곤란으로 위독했다가 의식을 회복했지만 가슴에 꽂은 링거주사로 영양을 공급받아 왔다. 의료진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으니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지 말라” 고 당부했던 김 추기경은 전날 갑자기 폐렴 증세를 보였고 이날 오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은 그가 엄혹했던 유신정권 말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은 자작시 그대로였다. 종교인 김수환은 남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추기경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만남과 합일(合一)을 갈구한 소박한 신앙인이었다.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집무를 중단하고 피정(避靜·성당이나 수도원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을 떠났는데 하느님을 잘 만날 수 없어서 얼굴이 까맣게 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이 단순한 종교지도자를 넘어 온 국민이 존경하는 인물이 된 것은 천주교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형제’ 로 삼아 그들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데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격동이 몰아쳤던 지난 40년간 그는 우리 사회가 중심을 잡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70~1980년대 민주주의와 인권이 억압받던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대변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우리 사회에 반미친북(反美親北) 경향이 강해지는 점을 우려하고 북한의 인권 개선과 체제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해 6월, 86회 생일을 맞아 “빨리 사라져야 하는데 아직도 사라지지 못하고 하느님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 고 말하며 차분하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입원 후에는 문병 온 사람들과 매일 병실에서 미사를 올리며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장기기증을 약속했으며, 선종 직후인 이날 오후 7시20분 강남성모병원에서 안구 적출 수술을 마쳤다. 김 추기경이 남긴 눈은 두 사람에게 시술됐고, 유해는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 묻혔다.
2007년 국내 탈북자 1만명 돌파
남한으로 들어온 탈북자 숫자가 2007년 2월 16일 1만 명이 넘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10명의 탈북자가 오늘 입국해 지금까지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 숫자는 모두 1만6명이 됐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매년 수십 명씩 들어오던 탈북자의 숫자는 2002년(1139명) 처음으로 1000명을 넘어선 뒤 2003년 1291명, 2004년 1894명, 2005년 1383명으로 늘어났고 지난해에는 2019명으로 연간 2000명을 넘어섰다. 정부 관계자는 “1990년대 중반 북한의 대량 아사사태 이후 탈북자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고, 현재 약간 줄어들고 있지만 전체 숫자는 꾸준히 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통일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탈북 입국자 가운데 76.4%(1543명)는 여성이었고 남성은 23.6%(476명)로 나타났다. 절반 이상인 57.9%가 생활고를 탈북 이유로 들었다.
2007년 대학생 17만명에 학비 무이자 대출
2007년 2월 16일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올 하반기부터 저소득층 가정의 대학생 35만명에 대해 무(無) 이자나 싼 이자로 학자금을 대출해 주기로 했다.
열린우리당 정봉주(鄭鳳株) 제6정조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당정협의를 가진 뒤 “올 2학기부터 대학생 학자금 대출 신청자 가운데 빈곤층인 국민기초생활대상자(3인 가족 기준 연소득 1127만원 이하)와 준(準)빈곤층인 차상위계층(연소득 1353만원 이하)의 대학생 17만명에 대해 금융기관이 무이자로 학자금을 대출해 주고 정부가 이자 분을 보전해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기타 저소득층(연 소득 3200만원 이하) 대학생 18만명에 대해선 대출이자(연 6.59%)를 2%포인트 낮춰 연 4.59%에 대출해 주기로 했다. 당정은 또 내년부터는 아예 모든 대학생에 대해 학자금 대출이자를 2%포인트 내릴 방침이다.
이에 따른 학자금 지원에 추가로 들어가는 예산은 올 2학기 72억원, 2008년 396억원, 2009년 432억원 등 2012년까지 2196억원에 이른다. 올해 학자금 지원 예산은 2188억원이다
2001년 이창호 9단 응창기배 바둑대회 제패
이창호 9단이 ‘바둑 올림픽’으로 불리는 제4회 잉창치(응창기)배를 제패했다. 이 9단은 2001년 2월 16일 중국 상하이 하이룬(해륜)호텔서 벌어진 중국 창하오 9단과의 결승 5번기 제4국서 304수 만에 흑으로 3점을 이겨 3승1패의 전적으로 정상에 올라 우승상금 40만달러(약 5억원)를 거머쥐었다.
잉창치배는 현존하는 국제 기전 가운데 이 9단이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바둑계를 평정하며 승승장구하던 1993년 제2회 대회때는 중국의 여류기사 루이나이웨이에게 덜미를 잡혀 초반 탈락했고, 절치부심 끝에 재도전한 3회 대회(1997년) 때는 8강전에서 라이벌 유창혁에게 패배 분루를 삼켰다.
이날 대국에서 이 9단은 초반 좌하귀에서 창 9단의 공세에 휘말려 완착을 두는 바람에 대마가 2집을 내고 간신히 사는 불리한 국면을 맞았다. 하지만 중반 중앙에서 창 9단이 실착을 해 우중앙 흑세가 두터워지면서 우상귀에서 실리를 확보, 역전에 성공했다. 이후 이 9단은 종반 특유의 끝내기 솜씨를 발휘하며 창 9단의 추격을 따돌렸다. 이로써 이 9단은 역대 전적에서 창 9단에게 14승 2패로 압도적 우위를 지키게 됐다.
이 9단의 우승으로 한국 바둑은 원년 대회 때의 조훈현 9단과 1992년 서봉수 9단, 1996년 유창혁 9단의 우승에 이어 4회 연속 이 대회를 석권하는 전통을 지키게 됐다. 대만 재벌 고 잉창치씨가 1988년 40만달러(약 4억 8000만원)의 최고 우승 상금을 걸고 창설한 잉창치배는 4년 주기로 열리는 가장 권위있는 국제 타이틀전이다.
1998년 대만 중화항공공사(CAL) 소속 에어버스 A300 여객기 676편 착륙도중 사고. 203명 사망
1996년 헌법재판소, 12.12 및 5.18특별법 합헌 판결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중 12.12와 5.18 관련자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조항은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졌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1996년 2월 16일 헌재 대심판정에서 서울지법이 제청한 5.18특별법 위헌심판과 유학성씨 등 6명이 낸 2건의 헌법소원 등 관련 사건 결정선고를 갖고 "특별법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 라고 결정내렸다.
헌재는 이날 `공소시효가 끝난 범죄에 대해 다시 공소시효를 정지시킬 수 있는가`라는 핵심 쟁점에 대해 재판관 9명중 5명의 다수는 위헌의견, 4명은 합헌의견을 냈으나 위헌결정 정족수인 6명을 채우지 못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합헌의견을 낸 김진우, 이재화, 조승형, 정경식 재판관은 "법규범의 장애로 처벌하지 못한 헌정질서 파괴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공소시효를 정지시키는 것은 헌법상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도 아니고 공소시효가 끝난 뒤 형사소추를 받지 않을 권리를 중대한 공익상의 이유로 제한하는 것이므로 적법절차 원리, 죄형법정주의, 평등원칙 등에 위배되지 않으며 정의와 공평의 이념에 맞는다"고 밝혔다.
반면 김용준, 고중석, 김문희, 황도연, 신창언 재판관 등 5명은 "헌정질서 파괴범에 대한 처벌도 헌법의 테두리 내에서 법치주의 내지 적법절차의 원칙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며 위헌의견을 냈다.
1995년 영문학자 조용만 교수 별세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당시 `비판`에 단편 `사랑과 행랑`, `동광`에 희곡 `가보세`를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이후 세브란스 의전 영어강사를 하며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로 활동 중이었다. 해방 후 코리아타임스 주필 등을 거쳐 1953년 고려대 영문과 교수로 강단에 선 이래 후진양성에 힘써오다 1975년 정년퇴직했다.
그는 정년퇴임 이후 영문학 연구보다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여 퇴임하던 해에 `고향에 돌아와도`를 발표하고, 1930년대 문인들의 이야기를 실명인물을 등장시켜가며 구수하게 정리한 `구인회만들 무렵`(1984), 구한말에서 광복, 6.25에 이르는 기간동안 서울의 풍습과 외관의 변모를 그린`경성야화`(1989)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2년 미국 팝그룹 ‘뉴키즈 온 더 블록’ 공연사고로 여고생 사망
미국의 팝그룹 ‘뉴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이 1992년 2월 16일 공연을 위해 내한했다. 이들은 지난 1986년 명프로듀서인 모리스 스타가 18세이하의 소년 5백여명 중 노래와 춤, 용모가 뛰어난 5명을 선발해 결성했다. 랩과 펑크, 리듬 앤드 블루스 등 다양한 음악적 색채를 구사하는 뉴키즈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2월 17일 오후7시30분쯤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은 시작 25분 만에 광란에 가까운 1만5천여 여학생 등 극성팬들의 소동으로 아수라장을 이루면서 사고가 발생, 공연이 중단되는 최악의 사태를 빚었다. 10대 소녀 2백여명이 넘어져 1백여명이 부상당하고 그중 1명이 관중들에게 깔려 뇌사상태로 치료를 받다가 사건 발생 30시간 만에 사망했다. 뉴키즈 내한공연을 주최한 서라벌레코드사 대표이사 홍현표씨는 업무상과실치사상 및 공연법위반혐의로 구속됐다.
1988년 경주에서 흙으로 빚은 12지신상 매장한 신라 때 고분 발견
1981년 요한바오로2세, 아시아순방 등정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1981년 2월 16일 즉위후 9번째의 해외여행인 극동방문길에 올랐다. 교황은 아시아순방에 나서기 전날인 15일 성베드로광장에 모인 5만명의 군중들에게 행한 일요미사 강론을 통해 자신의 이번 아시아방문 목적은 "세계평화의 대의를 진착시키고 가톨릭 신도들의 신앙심을 돈독하게 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12일간 총 3만3천km를 여행한 이번 극동방문에서는 파키스탄 카라치에 첫 기착해 필리핀, 괌을 거쳐 일본 등 아시아 등지를 방문했다. 이번 극동여행은 요한 바오로2세와 아시아의 첫 접촉이 됐다. 일본을 마지막으로 방문을 끝낸 교황은 알레스카 앵커러지에 기착, 27일 귀국길에 올랐다.
1976년 통일주체국민회의, 제2기 유정회의원을 대통령 추천제로 확정
1974년 독립운동가 거평 채원개 사망
1971년 이공계 대학원 한국과학원(KAIS) 설립
1971년 경기중학 마지막 졸업식 거행하고 폐교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지방순시 중 유성서 연내에 향군 100만을 무장, 자동소총 100만점을 구입한다고 언명
1968년 소련, 대륙붕자원 주권 선언
1967년 경기 연천 한미합동사격장서 직격탄에 맞아 탄피주이 8명 폭사
1965년 F-5전투기 처음으로 한국에 배치
1964년 빌리 브란트, 서독 사회민주당 당수에 취임
1959년 재일교포 북송반대전국위 결성
1959년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에 취임
1958년 KNA여객기 `창랑호` 피랍 탑승객 34명 중 26명은 3월 6일 귀환
1958년 2월 16일 오전 11시 30분 부산수영비행장을 이륙한 대한민항공사(KNA) DC3형 경여객기가 여의도 공항에 도착할 무렵 승객을 가장한 납치범들에 의해 납북됐다. 여자 2명을 포함 총 6명인 납치범들은 KNA기를 평양 순안비행장에 강제 착륙시켰다.
납치범들은 비행기가 경기도 평택 상공에 이르렀을 때 탑승객 중 군인 2명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쳐 실신시킨 다음 칼빈총과 엽총을 기내 앞뒤에서 발사하면서 조종사를 협박, 기수를 평양으로 돌리게 했다.
피랍기의 조종사는 미국인 윌리스 P홉스, 부조종사는 미공군의 맥클레렌 중령이었다. 피랍후 송환된 탑승자 가운데에는 국회의원 유봉순과 공군정훈감 김기완 공군대령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 정부는 2월 20일 북한 공작원 김택선 등 3명을 납치범으로 발표했고, 25일에는 사건 배후로 기덕영 등 3명을 체포했다. 북한은 "KNA기가 '의거 월북'했다"고 선전했지만, 유엔 군사정전위원회는 2월 24일 북측에 승객·승무원과 기체를 즉시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우리 국회는 2월 22일 북한 만행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16개 6·25 참전국에 보냈다.
당시 북한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의 방북을 앞두고 '남한 비행기가 자진 월북했다'는 체제 선전을 위해 납치극을 꾸몄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북한은 승무원 4명과 승객 28명, 납치범 6명 등 모두 38명 중 탑승자 26명만을 3월 6일 판문점을 거쳐 송환했고 기체는 억류했다. 그리고 나머지 6명은 북한으로 귀순했다고 주장했다.
1957년 인도 수카르노대통령 교도민주주의 제창
1956년 영국 하원에서 사형폐지법안 가결
1954년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 내한
1950년 이승만, 맥아더 초청으로 도일
1946년 기관차 건국 1호 시운전
1945년 시인 윤동주 일본서 옥사
1917.12.30 만주의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1943년 동지사대 재학중 사상범으로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4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페론대령 집권
1942년 북한 김정일 출생
1937년 꿈의 인조섬유 나일론 특허 획득
미국 듀폰사가 1937년 2월 16일 ‘나일론’이라는 새로운 인조섬유로 특허를 획득했다. 이 인조섬유는 값이 싼 석탄, 공기, 물이 주원료여서 섬유시장에 가격혁명을 불러왔다. 미국에 비단을 수출해 오던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이를 대체할 인공섬유 개발에 박차를 가한 끝에 이같은 개가를 올렸다.
나일론 개발에는 듀폰연구소의 월리스 캐로더스(41) 박사가 결정적 공헌을 했다. 조수 줄리언 힐이 쓸모없어진 화합물질을 실험용 컵에 넣어 가열하다가 유리막대를 타고 거미줄처럼 가는 섬유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하버드대 화학과 교수였던 캐로더스 박사는 1928년 문을 연 듀폰연구소에 합류, 인공고무인 네오프렌을 개발하는 등 그간 실용화학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였다.
나일론은 종합-응축 반응을 통해 만들어진 고분자 물질로 아주 질기고 탄력성이 있으며 마모에도 강한 특성이 있다. 듀폰사는 1938년 9월 나일론의 상품화를 발표하고 이어 1940년 5월에는 나일론으로 만든 스타킹을 발매했다.
1927년 경성방송국, 국내 첫 라디오방송 송출
"여기는 경성방송국입니다. JODK."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방송이 첫 전파를 발사했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현재의 덕수초등학교 자리였다. 호출부호는 JODK, 주파수는 690kHz, 방송기기는 영국 마르코니사 제품이었다.
방송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총 17시간이었지만 장비부족과 인력문제로 방송은 늘 불규칙했다. 개국초기의 방송언어는 한일 양국어 편성비율이 3 대 7이었다가 1933년 조선어 방송인 연희방송소가 개소된 뒤로 일본어 방송을 제1방송, 한국어 방송을 제2방송으로 하는 이중방송으로 진행했다.
1926년 11월 30일에 개국한 경성방송국은 한국인 직원이 3명 포함돼 있었는데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이 '프로듀서 1호'였고, 그의 부인 마현경이 '아나운서 1호'였다. 정규 라디오 방송은 미국, 영구, 프랑스, 독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였지만 국권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의미없는 기록으로 남았다.
당시 라디오의 청취료는 월 2원으로 쌀 한 가마니 가격이 5원이었음을 생각하면 꽤 고가의 청취료였다. 수신기, 즉 라디오 역시 고가품으로 1~2명이 청취 가능한 수신이 약한 수신기는 10~15원, 가족용 수신기는 100원, 고급수신기는 4,000원을 호가했다.
청취를 위한 계약도 까다로워서 대문 밖에는 청취 허가장을 붙여야 했고 도청시에는 1,000원 이하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이 가해졌다. 때문에 라디오 청취 계약자는 개국 일주일 후에 1,440명(한국인 275명 포함)으로 점차 증가하긴 했지만 5년 뒤 1만 4,000여명일 정도로 계약자가 적었다.
1921년 양근환, 동경서 친일파 민원식 척살
1919년 재미 대한인국민회 대표 이승만등 윌슨에게 한국의 위임통치청원서 전달
1907년 프랑스 시인 카르두치 사망
1906년 영국 노동당 결성
1884년 미국 영화제작자 로버트 플라어티 출생
1831년 러시아 소설가 레스코프 출생
1822년 영국 인류학자 골턴 출생
1620년 독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출생
1365년(고려 공민왕 14) 왕비 노국공주 세상 떠남
1360년(고려 공민왕 9) 홍건적 격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