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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아마 4회로 완결입니다.
전 편을 수정했습니다. 링크는 여기입니다. https://cafe.daum.net/Europa/1AT/30930
춘분을 지나 부쩍 길어진 태양이 서편에서 오렌지처럼 붉게 물들어갈 즈음에서야 재무부에서 마지막으로 장관 길패트릭을 비롯한 일부 관원들이 업무에서 풀려났다. 이미 오후 8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가롱 강의 나루를 돌며 수도로 들어올 짐의 하역을 살피고 국혼과 대관식에 맞춰 가도를 따라가는 점포 구역의 지정, 하역 장소의 확장 예정 등으로 다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퇴근이 다가오면 마법처럼 눈에 총기가 돌고 얼굴은 점점 피어나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관원들의 분위기는 제법 밝았다. 저승사자를 만나기 전까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그들의 지쳐 흐릿한 시야보다 더 빨리 귀에 꽂혔다.
“이제 돌아오십니까?”
흰 수염이 성성한 얼굴로 웃음 지으며 퍽 다정히 묻는 그는 대장군 페리고르 백작 엔초 경이었다. 대장군에게 지은 죄가 있는 재무부 관원들은 높은 사람을 처음 만난 신병처럼 바짝 얼어붙었다. 그러나 길패트릭의 눈에는 엔초의 곁에 있는 검은 머리의 여남은 살 남짓한 어린 소년이 먼저 들어왔다. 그는 일부러 표정을 밝게 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영식은 어쩐 일로 데려오셨습니까?”
“이 녀석이 국왕 폐하를 뵙고 싶어 해서 말입니다. 태후께서도 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실 테니 어서 가셔야 할 겁니다. 체사레, 인사드려야지.”
“부마님, 안녕하세요.”
소년은 방긋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길패트릭은 약간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소년은 기골이 장대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를 닮아 몸집이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인 엔초 경은 물론이고 길패트릭도 그 점에 대해선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굵어진 후에야 쑥쑥 자라는 경우도 꽤 많으므로.
“안녕, 자작. 우리 오랜만이지?”
그리고 길패트릭은 자신이 없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아챘다. 일벌백계라는 평소 안 하던 짓을 한데다 매일 사람들 하소연을 듣고 있으니 가뜩이나 흐린 하늘에 비바람이 몰아칠 만한 짓을 또 누군가가 저질렀을 것이다. 원래 관리자란 기쁨을 나눌 순간에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려도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찾는 법이니까. 그렇게 국왕이 모종의 이유로 죽상을 쓰게 되면 왕태후는 소중한 아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소소한 저녁 연회를 열곤 했다. 속상하면 일찌감치 방에 틀어박혀 자기를 우선으로 삼는 길패트릭으로서는 외향적인 새 가족들을 공감하기 어려웠다. 국정도 버거운데 행사 진행까지 맡아야 하는 추가 업무일 뿐이잖는가.
“솔직히 말해봐, 오늘 누구 보려고 왔어?”
길패트릭은 싱글싱글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체사레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국왕 폐하요. 언제든 놀러 오라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별밤의 백작’이요!”
부르고뉴의 디종을 거쳐 몇 달 전 보르도로 옮겼다는 마술사의 이름을 들으며 길패트릭은 자기도 모르게 체사레의 어깨를 툭툭 쓰다듬었다. 이성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할 나이이니 아리따운 여가수나 무용수 이름이 먼저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 어린 소백작은 각종 묘기를 보여주는 화려한 마술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 마술 극단만 불렀을 수도 있고.
아, 그렇지.
길패트릭은 아이를 놓고 일어섰다. 그의 얼굴빛은 다소 어두워져 있었다.
“엔초 경, 오늘은 죄송했습니다. 공연히 저 때문에 험한 일을 맡으셔서…….”
“그게 무슨 말씀이십….”
엔초는 하려던 말을 급히 멈추고 길패트릭을 제쳤다. 갑자기 대장군이 성큼 다가오자 다른 재무부 관원들은 저절로 눈이 둥그레지며 몸이 뻣뻣해졌다.
“이분은 내가 모셔갈 테니 자네들은 알아서 가게. 집에 갈 사람은 가도 좋고 할 일이 있으면 마저 하고. 폐하께서 정원에 식사를 마련해 기다리고 계시니 시장한 사람은 그리 가도록. 그리고 자네, 자네도 마찬가지로 굳이 남을 필요는 없네.”
병기의 재보급을 맡은 관원은 보는 사람이 그의 목을 걱정할 만큼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예에, 감사합니다, 대장군,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되풀이했다. 그들이 모두 떠나가고 어린 아들과 길패트릭 둘만 남자 엔초는 한껏 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는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째서 공의 잘못입니까?”
길패트릭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만일 해를 당한 사람이 우리 부부가 아니었다면 국왕께서도 그렇게 단호한 처벌을 내리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그 때문에 장군께도 그런…….”
“그만하십시오. 공, 그만하셔야 합니다.”
노인의 단호하면서도 간절한 눈이 정면으로 쳐다보자 길패트릭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엔초는 억센 두 손으로 길패트릭의 두 어깨를 움켜잡았다.
“국왕 폐하께서 일부러 공의 위신을 세워 주신 자리입니다. 공께서 지나치셨다고 여기신다면 다른 이들은 폐하의 처분에 반발하는 것으로 보게 될 겁니다. 공께 해악을 끼친 놈들을 위해 연민하시는 성품은 존경할 만합니다만 행여라도 특히 국왕 폐하 앞에서는 그런 기색조차도 내보이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공을 친형제처럼 여기시니 무척 서운해하실 겁니다. 그릇된 판결을 내리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노장군의 기세에 눌려 길패트릭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아버지가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지만 무슨 내용인지 따라갈 수 없는 체사레는 동그란 눈을 끔뻑거리며 어른들의 대화를 지루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엔초는 말을 덧붙였다.
“공주께도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푸아티에로 태어나셨으니 아직은 아우님과 더 가까우실 겁니다.”
그러자 길패트릭은 겨우 한 마디를 달았다.
“……파티는 저를 사랑합니다.”
“누가 아니랍디까?”
그의 오기는 꿈틀하자마자 막히고 말았다. 그 짧은 순간 그의, 열여섯부터 낯선 땅에서 살아오며 밴 정돈된 표정을 짓던 단정한 얼굴이 스물둘 나이에 맞는 풋풋한 볼멘 표정으로 달라졌다.
“…진심 어린 충고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상투적인 정중한 답이 잠시 비집어져 나온 어린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쓸모없는 실랑이를 피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노장군의 예의가 더 위태로워지기 전에 화제를 멈추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으므로. 이어 노인과 아이, 그리고 그 아이의 큰형이라 하면 연배가 어울릴 안 닮은 3인조는 들뜬 아이를 앞세우고 호박빛으로 물들어가는 회랑에 발을 디뎠다. 그들이 정원에 들어서기도 전에 수런거리는 말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기꺼이 왕실의 사교 활동에 참석하기 위해 걸음을 한 관원들과 인근의 소귀족, 성직자, 그리고 그 가족들과 수행원이었다. 즉흥이나 다름없는 자리임에도 제법 많은 참석자로 보아 국왕이 언짢을 만한 일이 꽤 일찍 벌어졌으리라고 짐작하며 길패트릭은 무수히 쏟아지는 언어의 파편을 뚫고 점점 말소리가 줄어드는, 대신 경쾌한 현악기 선율이 높이 울려 퍼지는 중앙으로 향했다.
원래는 갈색이었을 허옇게 센 머리카락 일부를 둘레에 남기고 벗어진 머리를 한 늙은 악사가 척 보기에도 고가로 보이는 롬바르디아산 만돌린을 쥐고 연주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치렁치렁한 옷차림의 똑같이 생긴 금발의 무희 셋이 선율에 맞춰 지느러미가 긴 붉은 물고기처럼 뱅글뱅글 돌며 흰 팔을 나붓하게 흔들었다. 류트를 뜯는 청년 악사, 피리로 보조를 맞추는 소년과 소녀. 길패트릭은 타고난 눈썰미로 그들을 고개 움직임 없이 슥 둘러보며 국왕을 향했다. 국왕은 그의 모후와 나란히 앉아 서글서글한 푸른 눈에 웃음기를 담으며 좋은 관객으로 있다가, 그를 보고 입술에 검지를 슬쩍 대며 반대편 손으로 모후를 가리켰다.
‘방해하지 마. 얌전히 앉아.’
향락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는다면야 왕실이 예술에 관심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다. 평소 같으면 “어서 오렴, 큰아이야.” 하며 다정히 반겼을 장모와 손아래처남에게 길패트릭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언제나 그를 위해 마련된 자리, 파트리샤 공주의 곁으로 다가가 착석했다. 그 뒤 이번 만찬에서 잔을 올리는 자로 지정되었는지 국왕 곁에 있던 핀 기스킹 경이 백조 목처럼 주둥이가 가느다란 은주전자를 주름진 큼직한 손으로 쥐고 와 그들 부부의 잔을 붉은 포도주로 채우고, 시종장에게 눈짓을 받은 젊은 궁내관이 다가와 페리고르 백작 부자를 인도했다. 길패트릭은 손을 내밀어 파트리샤의 하얀 손을 겹쳐 잡았다. 그때에서야 그는 이제야 정말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수고 많았습니다.”
손끝이 까슬까슬했다. 아침만 하더라도 영예를 받느라 제법 화사하게 꾸몄던 파트리샤는 메말라 축 처지기 직전인 하얀 꽃처럼 피로에 잠겨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구역과 가닥을 여럿으로 나눠 공들여 땋아 올려 진주 핀으로 장식했던 우아한 올림머리도 지금은 죄다 풀어 간단히 두 가닥으로만 감아 금빛 망사에 말아 넣었고 차림새는 검박하게 느껴질 만큼 간소했다. 그의 어깨에 파트리샤가 머리를 콕 기대왔다.
“길, 나 피곤해요. 이제 옷감은 쳐다보기도 싫어요.”
파트리샤는 어전 회의가 끝난 후 오늘 내내 하던, 국혼과 새신부를 위해 쓰일 포목의 견본 검수를 떠올리며 각질이 하얗게 일어난 손끝을 길패트릭의 손가락에 살살 문질렀다. 부왕 시절부터 어쩌다 보니 도맡게 된 업무였다. 아키텐에서 파트리샤 공주의 눈썰미를 따를 자는 없다는 극찬은 뿌듯하나, 기대와 명성을 유지하는 쪽 또한 여간 고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사랑하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갑자기 오늘 밤 소연회에 올 수 있는 예인들까지 부랴부랴 섭외하고 나니 몸은 여기 있어도 정신은 어디 먼 데 야생 벌판과 수평선 저 끝 너머를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뭐든지 시키면 잘 해내니까요. 그리고 좋아하는 일 아닙니까.”
길패트릭은 생글생글 웃으며 자기 머리도 아내 쪽으로 기울였다. 들어오기 전 손에 발라줄 향유를 미리 챙길 걸 그랬다는 아쉬움을 담으며 자신의 손가락을 문지르던 아내의 하얀 손도 두 손으로 잡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 힘쓰는 건 못 하니까 시키지 말아요. 줄리가 크면 일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다 망했어요. 당신은 어떻게 됐어요?”
네 살 어린 부르봉 공작의 약혼녀가 된 막냇동생을 향한 작은 푸념과 업무 보고 요청이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길패트릭은 잠시 말을 골랐다. 남들은 향연을 즐기고 있는데 이쪽은 잔업이다.
“오늘은 도로포장 비용을 좀 더 달라고 하더군요. 잦은 하역을 거쳐 그런지 나루 쪽이 무척 상했는데, 들이닥칠 행렬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 테니까요. 감리와 감독 의무가 각기 다른 곳에 있으니 성난 황소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려다가 서로 들이받으려는 걸 뜯어말리고 왔습니다.”
성령 강림 축일이 코앞에 닥치자 으레 그렇듯 행사를 준비하는 교단과 정기 대목을 놓치지 않으려는 상인, 수도에 용무가 있는 참에 축일 구경까지 하고 가려는 방문객과 인근의 여러 사람까지 몰려 보르도 왕성 일대는 지금 유난히 북적였다. 그중에는 국혼과 대관식을 앞두고 미리 수도의 분위기와 왕실 및 유력자들의 기호를 파악하려는 선발대도 여럿 들어와 있거나 들어오려는 차였다. 준비를 맡은 쪽에서는 자연히 날이 설 수밖에 없다.
“당신이 보고 있는데 언성을 높이려 들던가요?”
“무서운 공주님보다는 아무래도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자주 보기도 하고요.”
길패트릭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국왕의 맏딸 혹은 국왕의 큰누나보다 자신이 더 쉬운 상대로 느껴지는 것은 파트리샤의 성격과 아무 관계 없는 일이므로. 더구나 이제 푸아티에의 성을 쓰는 남자는 플랑드르의 어린 막내 가르시아를 제외하면 모두 스물 전후다.
“그리고 가스코뉴의 말을 매매하는 마시장의 위치를 바꿔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우시장도 포목 상가도 피해가 막심해진다며 조정을 부탁하다가 서로 드잡이를 하려 들더군요. 절충안으로 지난 거리 정비로 생긴 빈 땅을 쓰게 해 달라던데, 그것은 국왕 폐하의 재가가 필요한 일이니 우선 보류했습니다. 시몬 경이 그중 일부에 경비소를 두고 싶어하기도 하고요.”
“마시장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이니 어렵지 않을까요?”
“오늘 노르망디가 그 자리를 집어서 요구했습니다.”
현 잉글랜드 왕가의 고향이면서 지금은 세상을 떠났으나 작은고모 베아트리츠의 시가인 사돈, 게다가 월경지 플랑드르를 육로로 잇기 위해 꼭 필요한 가문의 이름이 나오자 파트리샤는 무심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사람들 바쁘네요. 알고 있겠지만 오늘 나도 만났거든요. 어머니랑 줄리랑 같이요. 좀 더 흥정을 붙여보려고 했는데 우리 딸이 그 사람들 가져온 새빨간 천을 너무 좋아해서 괜히 돈이 더 나갈 것 같아요. 당신도 나도 붉은색 취향은 아닌데 누굴 닮았나 몰라. 당신은 초록색 좋아하잖아요. 주는 대로 입긴 하지만.”
투덜이가 된 파트리샤가 입술을 삐죽이자 길패트릭은 아내의 손목을 더 꾹꾹 주물렀다. 하늘색을 비롯해 푸른색 계통을 좋아하는 파트리샤와 달리 그는 색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검댕을 씻으려 차디찬 얼음물에 손을 담그던 어린 시절이 겨울의 시린 색채를 뒤덮는 따스한 초록빛에 더 마음이 가도록 만들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파트리샤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풀에 물을 줬으니 빨간 꽃이 폈겠죠.”
아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길패트릭은 소리 없이 웃었다. 파트리샤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리다가 겨우 화제를 돌렸다.
“맞아. 당신이 심하게 다쳤다는 걸 설마 동생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난 왜 몰랐지?”
“그거야 당신은 밝으면 싫어하…….”
찰싹. 자유롭던 다른 손이 냅다 허벅지를 내리쳤다. 길패트릭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파트리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은 사람처럼 구슬 같은 초록빛 눈동자를 둥그렇게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낮인데 벌써 취했어요?!”
파트리샤는 최대한 소리를 낮추면서 새되게 물었다. ‘시간은 이미 밤 9시인데.’ 길패트릭은 아직 저물지 않은 태양을 야속하게 여기면서 순순히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계속 상황 보고가 오고 갔기에 그만 문답에 익숙해진 혀가 너무 솔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해가 지기 전에는 몸에 손도 못 대게 하면서.’
닿지 않을 푸념이 목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귀가 밝은 국왕이 눈만 움직여 흘끗 내려다보았으나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시선을 돌렸다. 끼어들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양.
“…미안해요. 당신은 아직 한 입도 못 먹었는데. 이제 그만 주물러도 괜찮아요. 나는 오른손잡이니까요. 아팠어요?”
파트리샤는 고개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해사한 얼굴이 다가오자 길패트릭은 일부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쳇. 그러자 이번에는 파트리샤가 길패트릭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았다.
“화내지 말아요, 선물 줄게요. 아주버님이 곧 여기 도착하실 거예요. 당신을 보러요.”
그 말에 길패트릭은 연기를 풀고 순수하게 놀란 눈을 떴다.
“형님이요?”
“며칠 전에 스코틀랜드가 그렇게 전했어요. 조슬랭에게는 뭐라고 하지 말아요, 당신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내가 당분간 숨기자고 했어요. 당신도 아주버님에게 드리고 싶은 게 많을 테니 오늘쯤에는 알려줄 생각으로요.”
파트리샤는 웃음을 지으며 길패트릭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정작 길패트릭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여러 생각과 감정으로 머리와 가슴이 둘 다 어지러웠다. 몇 년 만에 형을 만나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자신이 아키텐 왕국의 부마가 되었으니 스코틀랜드 국왕 길크리스트가 형을 활용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니 사돈임을 내세울 수도 있고, 만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더라도 아키텐 국왕이 누나와 사돈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파국으로 몰고 가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러나 모레이 공 길크리스트는 형을 아직 어린 맏딸과 약혼시켜 사실상 국왕의 근신이 될 길을 막고 모레이 공작령에 매어두었다. 형이 아키텐을 살피러 온 것이 당숙인 국왕을 위함인지 사촌 형이자 예비 장인인 주군을 위함인지는 직접 말을 듣지 않고는 모를 일이다.
“길? 기쁘지 않아요?”
파트리샤가 초록빛 눈을 깜빡이며 묻자 길패트릭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엄청난 선물을 받아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 사랑.”
그리고 어느 쪽이든 나는 형을 사석에서 만나도 괜찮은 것일까. 단순한 질문이 닻보다 묵직한 추가 되어 그의 가슴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을 어두운 바닷속으로 가라앉혔다. 좋든 싫든 인정하든 부인하든 이제는 단순히 부마였던 때와는 달리 국왕의 중신이며 장관이다. 아키텐을 배신하고 스코틀랜드를 돕는다거나 왕실의 재산을 몰래 빼돌렸다는 의혹이 씌워지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존재로 왕가가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더 많다는 판단이 서면 국왕은 서슴없이 체포 영장을 쓰고 사형 집행인을 부를 것이다.
그가 설렘을 덮을 만큼 섬뜩한 상상에 시달리던 그때 곡이 빠른 춤곡으로 변했다. 태양이 저물어가면서 졸음에 겨워하던 사람도 저절로 눈을 번쩍 뜰 만큼 경쾌한 곡이었다. 길패트릭은 좋은 연주에 집중해주지 못한 것을 내심 미안해하며 시선을 돌렸다가 표정을 굳히며 눈을 크게 떴다. 금발의 세 무희 중 하나가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국왕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손등 위를 톡톡 두드렸다. 못 본 사이 이미 국왕에게 지시를 받았는지 친위대는 물론이고 국왕의 곁으로 돌아간 핀 기스킹 경도 움직이지 않았다. 길패트릭은 다가온 무희와 그 일행을, 이미 몇 번 봐 익숙한 얼굴이 있긴 하지만 수상한 기척이나 흉기를 감출 만한 곳이 있는지 재빠르게 살펴보았다.
“저 애 용감하네요.”
파트리샤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 목소리는 국왕이 씨익 웃으며 일어서자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에 묻혀 곁에 있는 사람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였다.
“폐하께서는 어질고 매력적인 분이시니까요.”
길패트릭은 고개를 끄덕여 동조를 표했다. 높은 사람의 칭찬과 인정은 장래를 위해 큰 도움이 되므로 공연자는 일부러라도 호응을 끌어내려 한다는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반론을 배제해도 국왕은 용무가 있어 길 가던 사람도 무심코 돌아볼 만큼 퍽 잘생긴 청년이었다. 고귀함을 드러내는 하얀 피부와 물결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어깨를 감싸는 갈색 머리카락, 어머니를 닮아 부드러운 인상을 담은 단정한 얼굴에서 빛나는 서글서글한 푸른 눈동자가 왕관이 아니라도 그를 우아한 귀공자로 보이게 했으며, 여럿이 있을 때 더 두드러지는 큰 키와 야생의 수노루처럼 근육이 탄탄히 오른 균형 잡힌 몸 등은 얼굴에서 보이는 유약함을 보완하며 강인한 인상을 덧씌웠다. 귀족이라도 치아가 고르지 못하거나 나쁜 병을 앓은 흔적이 용모에 남은 이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으니 더욱 돋보였다. 게다가 사람이라면 흔히 갖는 변덕스러움조차 없으니 웃던 낯으로 대뜸 고함을 치며 칼을 들이대는 불상사도 없을 터, 같이 놀자고 손을 맞잡기에는 좋은 상대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혹시 언짢으실 만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길패트릭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아, 치정 싸움이 하나 있었기는 해요. 아녜스 일이었어요. 어머니 모시는 아이요.”
“네?”
파트리샤의 대답에 길패트릭은 놀란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국왕이 미남자라는 사실은 10대 중반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그도 긍정하는 바이나, 그가 알기로 지금까지 국왕이 특별한 관심을 두는 여자는 없었다.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나 혼외로 정부를 두는 일도 빈번하고 그 나이에 벌써 아버지 소리를 듣는 이들도 적지 않은 숫자이건만 침소까지 드는 이는 언제나 곁을 지키는 시종장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치정 싸움이라니? 길패트릭은 파트리샤가 말한 이를 바로 떠올렸다. 아녜스는 곱슬기 없이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키가 작고 동그란 얼굴에는 주근깨가 내려앉아 눈에 띄는 시녀가 아니었다. 다만 천성이 명랑한지 웃음이 많고 모두에게 친절한 성품이라 호감을 느끼는 이가 여럿 있을 법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폐하께서는 비밀을 만들지 않으시는 분이니 만일 그럴 일이 있었다면 우리가 바로 알았겠죠.”
그러자 파트리샤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조슬랭이 싸움을 일으켰다는 게 아니에요. 아녜스 그 아이, 외동딸이라서 지참금이 꽤 크잖아요? 그래서 오늘 구혼자 둘이 결투를 허락해달라고 씩씩거리며 순서도 안 받고 대뜸 알현실로 들이닥쳤대요. 한 사람은 시청에서 시장 보좌로 일하는 루이 경의 삼남 아메데이고 다른 하나는, 아마 당신도 몇 번 봤을 거예요, 카스틸리옹 남작 주앙 경의 차남 앙리예요. 우리 집 서쪽 대로변에서 방직 공방을 운영하고 있잖아요.”
길패트릭은 여전히 석연찮은 눈을 하며 답했다.
“싸움이 붙었다기에는 둘의 나이 차이가 제법 있는 것 같은데요. 전자라면 모를까, 후자는 나이가 마흔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혈기로 목숨을 걸 만큼 어리석은 짓을 할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지위도 다르고요.”
“다른 사람 속을 어떻게 알겠어요, 내가 그 사람도 아닌데. 듣기로는 앙리 경이 먼저 아메데 경이 진 빚을 거론하면서 결혼으로 팔자 펴려 한다고 비난했다나 봐요. 그러자 아메데 경은 앙리 경이 이미 처 둘을 앞서 보내 유산을 다 꿀꺽하고도 모자라서 자식과 별로 차이도 나지 않는 어린 여자를 노리는 탐욕스러운 늙다리라고 맞섰고요. 서로 돈에 몸을 파는 매춘부 같은 놈이라다가, 남창이라다가 핏대 세우다가 결국 조슬랭을 찾아간 거죠. 어쨌든 둘 다 국왕의 신하이니까요.”
파트리샤는 마치 보고서를 읽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말을 옮길 뿐이었지만 파트리샤의 점잖은 입에서 원색적인 단어가 쏟아져 나오자 길패트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 그런 문제라면 국왕 폐하가 아니라 아녜스를 돌보는 이를 먼저 찾아야 할 일 아닙니까? 자식의 혼사는 아버지나 후견인이 결정하는 일이잖습니까.”
“이미 했대요. 둘 다 확답을 못 받은 거죠.”
“……폐하께서는 어떻게 처결하셨습니까?”
“결투는 금지했어요. 아녜스가 전리품도 아닌데 자기들끼리 싸운 결과를 보고 승자가 청혼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않냐면서요. 대신 아녜스를 불러서 두 사람이 네게 청혼하고자 하는데 누가 더 마음에 드는지 물었어요. 누구를 고르든 축복해줄 거라면서요. 그런데 아녜스는 아직 태후를 모시며 배워야 할 것이 많으니 당장은 결혼 생각이 없다며 거절했고, 결국 그 둘이 아녜스의 선택을 도와주겠다며 알아서 결투한 거죠. 그래서 둘 다 지금 감옥에 갇혀있어요. 조슬랭이 이미 금지한데다가 왕성 권역 내에서 칼을 빼 들었으니 순찰하던 경비대의 사바리 경이 ‘경들은 지금 반역을 저지르고 있소!’ 하면서 체포했거든요. 한 며칠 지내다 보면 머리도 식겠죠. 큰 처벌은 없겠지만 바로 풀어주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내일이면 루이 경도 주앙 경도 못난 아들을 용서해 달라며 보석금을 들고 오지 않을까요?”
파트리샤의 목소리는 새싹이 파릇파릇한 풀밭처럼 생기가 넘쳤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했던가. 부유하고 고귀한 아내를 만나 팔자를 고친 입장에 속하는 길패트릭으로서는 온전히 즐길 수 없었으나 사랑하는 아내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얼굴 쪽으로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파트리샤는 쑥스러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서 먹기나 해요. 배고프잖아요.”
“네, 공주님.”
길패트릭은 싱글거리며 뒤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한참이나 음식을 들지 않고 소곤거리는 공주 부부를 보며 누군가는 혹여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내간 건 아닌지 속을 까맣게 졸였는데, 그의 아내와는 달리 그는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곡의 박자에 맞춰 손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아는 곡이 나와서 얼근한 목소리로 가사를 부르는 소리, 목소리를 낮췄으나 여기저기서 수런거리듯이 들리는 대화 소리, 달그락거리며 쩝쩝대는 소리 등으로 국왕의 정원은 소리의 홍수나 다름없었다. 그 사이 하늘은 금빛을 담은 주홍빛에서 따스함이 사라져가는 장밋빛으로 고요히 바뀌며 밝은 별을 하나둘씩 올려보냈다.
다시 박수 소리가 파도처럼 장내를 휩쓸었다. 춤곡이 끝난 것이었다. 국왕은 숙녀를 보내는 예의로 정중하게 무희의 손을 놓았고 무희는 꽃처럼 붉은 입술로 환하게 웃으며 나붓하게 허리를 굽혔다. 이어 국왕은 시종장에게 무어라 귀엣말을 했는데, 그것이 소정의 출연료 외의 포상을 지시하는 것임을 국왕의 근신들은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청년 국왕은 돈을 바닥에 흩뿌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늘 궁내관이 제대로 셈을 마치곤 했는데, 기분이 좋다며 거금을 내키는 대로 집어 던지는 이도 여럿임을 생각해보면 받는 이는 정중함과 무례함 중 어느 쪽을 선호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점잖은 국왕을 좋아했다. 적어도 국왕이 베푸는 향연에서는 심기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중벌을 받거나 실수를 저지른 이가 매타작을 당하며 지르는 비명 따위는 아예 없었으므로 모두 마음 편히 참여 목적에 충실하며 시간을 보내다 돌아갈 수 있었다. 비록 짧게 인사만 나눌지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는 흔치 않았기에.
왕가의 자리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지금의 재상인 알바라신 백작 마리 경을 이은 신임 재상으로 누가 임명될지 넌지시 화제를 올렸다. 60이 넘은 마리 경은 개국의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위를 하사받은 평민 출신이었기에 이번에도 군주가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평민 출신이 임용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과, 국왕은 부왕의 중신들을 존중하니 파트리샤 공주 전의 재무장관이었던 베아른 백작 가스통 경이 특별한 우대를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엇갈렸다. 국왕의 종제인 플랑드르 공작과 현 재무장관인 부마 길패트릭도 신분이 높고 행정 경력이 있으나 재상을 맡기에는 경륜이 한참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 바로 제쳐졌다. 이어 왕실의 분가인 뤼지냥 백작 위그 경과, 이제 서른을 맞은 앙주 공작 풀크 공이 차례로 거론되었으나 프랑스와의 분계선 지역이 되어버린 앙주의 특성상 그 수호자를 수도로 불러올리는 것은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뒤따랐다. 이어 사람들은 베아른 백작과 닥스 백작 기랑드 경 사이의 큰딸 마르타 양의 혼사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미 결혼한 오빠가 있으니 백작령의 상속은 어렵겠으나 부모 둘 다 백작인 만큼 사위가 받을 몫이 꽤 클 것이라거나, 부모가 하나뿐인 딸을 지극히 아끼니 영주보다는 데릴사위나 자주 처가를 오갈 수 있는 차남 이하를 고를 것이라거나. 한편 중심에서 벗어난 자리에서는 누가 누구와 간통을 했고 그 때문에 보복으로 불을 질렀다는 둥, 결투재판이 벌어져 둘 다 죽었다는 둥, 성지에 다녀온 순례자가 이교도 악령에 씌여 미치광이가 되었다는 둥, 술기운에 난동을 부려 민간인에게 피해를 끼친 관리에게 국왕이 배상금만큼 일급으로 환산해 성의 돼지치기 보조를 시켰다는 둥 좀 더 적나라한 화제가 오고 갔다. 광장에 전시된 죄인들도 화제가 되어, 담소를 나누며 얌전히 식사하는 파트리샤 공주 내외를 보면서 ‘저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것처럼 생긴 고운 분들이 그런 무시무시한 형벌을 내려달라고 부탁했을까?’ 하며 궁금해하는 이도 여럿 있었다.
선왕이 아직 아키텐 대공이던 시절부터 푸아티에 가문에 봉사한 오랜 궁내관이 국왕에게 다가와 야외무대의 준비를 마쳤음을 알렸다. 밤이 내려왔으니 ‘별밤의 백작’의 차례였다. 국왕은 평소처럼 모후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키더니, 무언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모후 곁의 누이동생 줄리아나 공주에게 가서 등을 보이며 몸을 낮췄다. 줄리아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오빠의 등에 업혔다. 국왕은 일어나며 말했다.
“부르봉의 그 꼬마가 이런 것도 안 해주면 차버리고 바로 돌아와.”
줄리아나는 킥킥 웃으며 답했다.
“오빠랑 이름이 같은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을 거야.”
앞장서는 국왕의 뒤에서 위병들이 신속하게 무리를 통제했다. 국왕이 식사를 마치면 특별한 허가가 있지 않고서야 모두 식사를 마쳐야 했으니 장내는 국왕을 뒤따르려는 이들로 크게 어수선했다. 대주교와 같이 온 주교와 수사들,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같이 온 관원, 노쇠한 주인을 부축하는 하인, 우연을 빙자해 나누던 중요한 이야기를 바쁘게 정리하는 소귀족 등으로 위병들은 왕실과 멀리 떨어진 자리일수록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국왕이 발이 휜 누이동생을 업은 채로 모후의 곁을 지켰기 때문에 길패트릭은 파트리샤의 곁에 붙어 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불현듯 다리를 절룩거렸다며 오전에 국왕이 지적하던 게 떠올라 지친 다리에 일부러 힘을 주며 걸었다.
간이로 만든 야외무대는 의자에 앉지 못하고 서서 봐야 하는 이들까지 모두 볼 수 있게끔 단이 높았다. 국왕은 일부러 “체사레!”를 부르며 페리고르 백작 부자에게 손을 내밀어 아들을 무대가 잘 보이는 제1열에 앉혔다. 좀처럼 국왕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체사레는 활짝 웃으며 “폐하, 감사합니다!”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뒤에서는 위병들이 보호자가 안을 수 없을 만큼 몸집이 자란 아이들을 추려내 어른들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모의 손을 놓는 것을 불안해하는 아이도 있었으나, 이미 이런 일에 이력이 난 위병들이 “폐하께서도 소싯적에 재주 보는 걸 아주 좋아하셨다.”라며 달래자 순순히 따라가곤 했다.
달의 투명한 빛이 밝은 은빛으로 환하게 빛날 때였다. 환히 밝힌 무대의 양쪽에서 두 사람이 풀쩍 솟구쳐 튀어 올라 통통 긴 포물선을 그리며 재주를 넘었다. 순식간에 아무도 없어진 무대에 똑같은 갈색 옷을 입고 초롱꽃을 뒤집어 눌러 쓴 것 같은 삐죽한 고깔모자를 쓴 다섯 사람이 나타나더니 두 사람 위에 두 사람이 어깨를 밟고 올라가고, 가장 왜소했던 나머지 사람은 길쭉한 시소 끝에 올랐다. 그러자 어릿광대가 총총 뛰어와 마치 실수한 것처럼 익살스럽게 몸을 기우뚱하며 시소를 밟았다. 왜소한 사람은 공중제비를 돌며 인간 탑의 꼭대기에 훌쩍 착지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인간 탑은 빠르게 해체하더니 어릿광대를 포함해 셋씩 2열로 나누어 섰다. 그 사이로 장막을 걷고 키가 큰 노인이 나타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중앙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숙였다.
“이 땅을 다스리시는 자비로운 주군께 늙은 신하가 처음 인사 올립니다!”
노인을 따라 뒤에 선 이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국왕은 웃으며 말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그런데 특이하게도 자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군. 내 궁정에 잘 왔네. 마음 편히 지내다 가게.”
고개를 숙인 젊은 얼굴 두엇이 순간 하얗게 질렸으나 관객들은 국왕이 우스갯소리를 한 것을 알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피식피식 웃었다. 백작이라는 예명을 쓰고 그 흉내를 내니 국왕도 맞춰준 것이다. 그때 둥둥둥둥 하며 그 웃음소리를 지워버리는 작은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열두 살 남짓한 갈래머리 소녀가 새빨간 장미꽃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중앙으로 걸어와 웃는 낯으로 두리번거렸다. 꽃을 줄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런데 뒤에서 슬쩍 나타난 조금 전의 어릿광대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소녀의 장미꽃을 손바닥으로 스쳤다. 장미꽃은 새빨간 불꽃에 잡아먹혀 순식간에 타 버렸다. 소녀는 울상이 되어 “할아버지!”를 불렀다. 소녀의 부름에 허둥지둥 달려온 키 큰 노인, 별밤의 백작은 글썽이는 소녀의 어깨를 토닥토닥하며 달래고 꽃이 타버린 막대 끝을 꾹 쥐었다. 하얀 장미꽃이 피어났다. 소녀는 이 색이 아니라며 도리질을 쳤다. 별밤의 백작은 다시 장미꽃에 손을 스쳐 새빨간 장미꽃이 엮인 작은 꽃다발로 바꿔주었다. 소녀는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관객석을 향해 힘껏 던졌다. 꽃다발은 왕태후 콩스탕스의 치마폭으로 떨어졌다.
“가장 아름다운 분께 드려요!”
좌중에 박수 소리가 일었다. 왕태후는 꽃다발을 집어 들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소녀는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한 손은 가슴에 대며 꾸벅 인사하고 장막 뒤로 사라졌다.
다음 순서로 두 사람이 길쭉한 상자를 받친 바퀴 달린 선반을 끌고 나타났다. 열 수 있는 상자였다. 별밤의 백작은 상자를 열고 왜소한 청년을 들어가게 한 다음 상자를 닫았다. 상자가 크지는 않았기에 청년의 머리와 다리가 상자 밖으로 빼꼼히 나왔다. 별밤의 백작은 상자 위로 커다란 식탁보를 잠시 덮어 마법을 건 뒤 “이얏!” 하고 기합을 지르며 무시무시하게 생긴 네모꼴의 커다란 칼날 둘을 상자에 연이어 냅다 꽂았다. 청년은 “으악!” 하며 생명이 끊어져 가는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삐져나온 다리를 파르르 떨더니 이내 몸을 쭉 뻗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놀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별밤의 백작은 청년의 하반신이 올려진 선반을 발로 밀어 상체와 하체를 떨어뜨리고, 상체의 위치와 하체의 위치를 바꾸어 발밑에 머리가 있는 기묘한 광경을 만들어 낸 뒤 잠을 깨우려는 것처럼 청년의 뺨을 살짝 쳤다. 청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게으른 녀석!”
별밤의 백작은 화가 난 것처럼 일부러 허리에 손을 얹더니 청년의 얼굴 대신 머리 위에 있는 발을 간지럽혔다. 그러자 잘린 하반신이 크게 파닥파닥 움직이면서 청년이 눈을 번쩍 뜨고 깔깔 웃었다. 탕탕탕! 청년은 상자 속에서 손바닥으로 바깥을 향해 두드리며 외쳤다.
“어서 몸을 붙여줘요!”
청년의 요구를 들은 노인은 허둥지둥하며 후다닥 하반신이 든 선반을 밀어 원래 자리에 꼭 맞게 붙인 뒤 다시 식탁보를 덮고 마법을 걸었다. 그 뒤 식탁보를 걷고 상자를 열자 청년이 멀쩡한 몸으로 내려왔다. 청년은 자랑이라도 하듯 무대를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풍차 돌리기를 선보였다. 모두가 박수를 보내며 무대에 집중하던 순간, 파트리샤는 살짝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길? 당신 괜찮아요? 손이 차가워요.”
길패트릭은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오늘은 조금 춥군요. 바람도 불고.”
완전히 빈말이었다. 그의 갸름한 얼굴은 안쓰러울 만큼 하얗게 질려 고양이 같은 연녹색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주던 눈에서도 이미 반짝이는 총기가 떠난 지 오래였다. 밤의 어둠과 덥수룩한 갈색 머리카락이 만들어낸 그늘이 아니었다면 누가 보아도 그가 지금 괜찮지 않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단 하나, 이 자리는 국왕이 주최한 연석이라는 사실이 그를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어 맸다. 국왕과 그는 파트리샤를 사이에 두고 불과 한 자리 떨어져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는 항아리에 갇혀 수없이 긴 칼에 꿰뚫린 마술사가 무사히 생환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 모자에서 번갈아 나타난 새하얀 토끼와 비둘기도, 그 사이사이 일곱 개 사과를 한꺼번에 돌리는 저글링과 맹렬히 솟구치던 불꽃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해 흩날리는 새빨간 꽃비도, 국왕의 앞이라 더욱 공들여 준비한 여러 묘기도 모두 건성으로 보았다. 모든 순서가 끝났을 때는 온몸에 힘이 빠져 자리에서 일어서기조차 비틀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대주교에게 국왕의 전갈을 전하는 시종장, 그리고 무대를 정리하다 말고 바쁘게 뛰어가는 갈래머리 소녀의 모습이 이제 침실로 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부풀어 있던 그를 잡아채고 말았다.
“당신이 가 봐요. 난 어머니랑 같이 돌아갈게요. 돌아오면 무슨 일인지 말해줘요.”
파트리샤는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모후 곁으로 가 막냇동생을 부축했다. 졸지에 혼자 남겨진 길패트릭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부탁받은 바를 떠올리고 무대 뒤로 간 국왕에게 따라붙었다. 국왕은 “어, 왔어?” 하며 길패트릭을 흘끗 봤을 뿐 어째서 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와 비슷하게 대주교가 들어섰다. 국왕의 부름을 받아 미리 와 있던 별밤의 백작은 교단과 엮여서 좋았던 일이 별로 없었는지 대주교의 등장에 눈빛을 조금 흐렸다. 국왕은 별밤의 백작에게 하얗고 큰 손바닥을 쑥 내밀며 무대에서 보였던 공을 달라고 지시했다. 백작의 당당한 가면이 풀린 늙은 마술사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윽고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새하얗게 칠한 작은 공들이 새알처럼 뭉쳐 담긴 채로 국왕에게 전해졌다. 국왕은 공을 쥐고 몇 번 돌려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이렇게 하는 거겠지?”
그다음 벌어진 광경은 머리끝까지 차오른 피로를 견디고 있던 길패트릭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국왕이 주먹을 쥐었다 펼 때마다 긴 손가락 사이에서 흰 공이 둘, 셋으로 늘어났다. 이어 국왕은 막대와 장미도 가져오게 하더니, 불이 붙은 막대가 붉은 장미로 변하는 마술을 재현했다.
“내가 할 수 있으니 요술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겠지. 이 일로 불미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일이 없도록 그대가 잘하리라 믿겠소. 그대를 믿소만 영 여의치 않겠거든 모두 이 자리로 데리고 오시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임을 직접 보여줄 테니.”
대주교는 눈을 끔뻑이더니 “예, 폐하.” 하며 고개를 숙였다. 국왕은 늙은 마술사에게 공과 막대를 돌려주며 말했다.
“이미 여기로 넘어올 때 디종에서 받은 허가증을 보였겠지만 한 장 더 받아 가도록 하게. 부르고뉴의 선대 외드 공과 자네가 교분이 어떤지는 모르네만, 지금의 부르고뉴 공은 어린 소년이니 조부의 기억을 떠올려주는 것보다는 왕실의 보증을 받는 게 자네에게 더 도움이 되겠지. 마침 여기 재무장관이 있으니 필요한 것은 맡아서 해줄 걸세. 오늘 수고했네.”
그 짧은 순간 기운을 되찾은 별밤의 백작이 깊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께서 선왕 폐하를 만나시기 전에 이 늙은이를 먼저 만나셨다면 기꺼이 제 모든 것을 전해 드렸을 것입니다.”
국왕은 싱긋 웃었다. 길패트릭은 그 분위기에 한 마디 덧붙였다.
“서류의 출납을 기록하는 담당관이 이미 돌아갔으니 날이 밝은 뒤에 하겠습니다.”
장관의 직권으로 당장 써줄 수는 있으나 서기관이 없는 사이 임의로 일을 처리해 버릇하면 쓸데없는 뒷말이 붙게 된다. 결코 아무도 없는 재무부로 홀로 돌아가 잔업을 하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다. 국왕은 그렇게 하라고 승인했다. 별밤의 백작은 허리가 굽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깊이 감사하며 돌아갔다. 그때에서야 국왕은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길패트릭은 곁을 따라가며 물었다.
“하온데 폐하, 조금 전 하신 마술은 언제 배우셨습니까?”
“지금. 간단하더라. 배우고 싶으면 가르쳐 줄게.”
그때 시종장과 길패트릭, 뒤를 따르던 이들은 완전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저물어가는 달을 등지며 그들을 기다리는 어수선한 세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장관 나리가 사고치는 걸 이어서 쓰려고 했는데, 연회 파트가 너무 길어졌다.
소중한 친구님(https://crepe.cm/@bogombokjibu)이 파티길 커플 현대 버전을 그려주셨습니다. 컨셉은 연말 베스트커플상 후보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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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 오랜만에 오셨군요 이번편은 잔잔하고 달달하니 좋네요 이제 다음편..ㅎ..
본편에서는 드디어 업무 분배를 할 재상과 대장군을 임명한 주인공이 딸내미 보고 유전의 신비를 느끼고 있는 걸 쓰다가(=해석. 나와 파티 딸이 --를 잘할 리가 없지… ) 이 이야기를 빨리 올리고 싶어서^^;; 돌아왔습니다.
슬럼프와 자괴감 투성이인 제 글을 여전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