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히피들의 대부'로 얘기한 작가 빌 에이트킨이 지난달 16일(현지시간) 인도 북부 우타르 프라데시주 데라둔에서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미국 일간 보스턴 글로브가 최근에 보도한 것을 통해서였다. 찾아 보니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같은 달 27일 전한 부음이 있었다.
인도에 대해 위트 넘치고 열정적인 책들을 써서 진짜 인도를 세상에 알렸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The Nanda Devi Affair'(1994), 'Seven Sacred Rivers'(1992)가 꼽힌다. 히말라야 걷기 가이드로도 활동했으며 인도 철도 여행을 권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스스로를 "실패한 스코틀랜드인, 잔인한 영국인, 아니면 다시 태어난 인도인”으로 묘사하곤 했다. 그가 인도로 건너간 것은 1959년이었다. 50파운드를 들고 영국을 떠나 히치하이크를 계속해 캘커타에 도착했을 때 그의 주머니에는 달랑 2루피만 남아 있었다.
6주 동안 유고슬라비아, 터키(지금은 튀르키예), 이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 그는 늘 스코틀랜드인의 전통 복장 킬트를 입고 있었다. 저항 의지 가득한 스코틀랜드인들의 상징이었다. 이스탄불에 이르렀을 때 킬트를 입으면 엄청 덥다는 점을 깨달아 우편으로 집에 부쳤다.
비교종교학 학도답게 그는 수도승 면모를 갖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부친은 아들을 "이상주의자 헛똑똑이"(idealistic prig)이라고 얘기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어린 시절, 그는 마을에 유일한 채식주의자였다. 크리스마스에는 삶은 달걀을 먹었다. 그는 교회에 들어가 놀곤 했지만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느끼지는 못했다. 그는 1980년 말콤 틸리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인도에서 영적 충만을 추구하는 서구인으로 자신의 인생사를 구술하며 "난 엉뚱한 방향으로 헤엄치는 멍청한 고객 중 한 명이었다”고 돌아봤다.
에이트켄은 1960년대 두 히말라야 암자들에서 보냈다. 첫 암자는 간디의 두 영국인 딸 중 한 명인 영국 여성 캐서린 헤일먼(나중에 사를라 데비로 알려졌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는 4년 동안 그곳에서 수선공 겸 정원사로 일했다. 검댕으로 이를 닦고 비누 대신 과일을 썼다.
장티푸스에 걸린 그는 40일 동안 금식하며 그 산, 난다 데비를 응시하며 주현절을 보냈다. 그는 죽음을 예감했던 모양이다. “난 막 죽을 참이었다. 난 침낭을 유산으로 남겼는데, 내가 소유한 유일한 물건이었다. 독보적인 경험을 했을 때 중세 믿음 '모두는 하나이고 하나는 모두'에 대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다시 먹기 시작하자마자 그는 이 감질나게 하는 신의 모습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방황하는 사두'(Sadhu, 금욕 치료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화가 잔뜩 난 사를라 데비는 그를 구루 크리슈나 프렘에게 그를 보냈다. 크리슈나 프렘은 힌두의 성스러운 삶에 뼈져든 또 한 명의 영국인이었다. 그는 첼튼엄에서 로널드 닉슨으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인물이다. 에이트켄은 그를 돌아보길 “헝클어진 긴 머리를 한 덥수룩한 요가 수행자와는 거리가 멀었고 머리를 빡빡 밀고 환한 미소를 짓는 영국인 큐레이터에 가까웠다”고 했다.
크리슈나 프렘은 다음 끼니 생각에 정신을 흐트리지 말고 자신의 암자에서 더 성스러운 삶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에이트켄을 설복했다. 에이트켄은 7년을 더 크리슈나 프렘의 암자 주방에서 일하며 보냈다.
에이트켄은 “온갖 종류의 짜증과 폭발, 감정적인 속쓰림이 있었고,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며 구루를 찌르고 도망치고 싶어 했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그는 크리슈나 프렘을 존경하게 됐는데 그가 머물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 버렸다. “내가 만난 어떤 교파 가운데 유일하게 거룩한 사람, 모든 주제를 공평하게 대했으며 금기는 없었다."
결국 에이트켄을 암자 밖으로 내몬 것은 동료 수련자 프리트위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그녀는 시크 왕국 진드(Jind) 왕후였던 마하라니 귀부인이었다. 그는 1972년 떠났는데 크리슈나 프렘의 후계자는 그에게 사랑이 그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을 것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얘기했다.
에이트켄은 성스러운 생활도 그를 외부 세계에 잘 대처하게 만든다는 점을 알고 깜짝 놀랐다. “고통스러운 암자 짤순이를 써봤기 때문에 난 어디에서도 살 수 있었다. 우리 구루는 내게 내면의 길은 당신이 항상 마주하기 두려워했던 것들을 마주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삶으로 돌아가라, 은행 계좌도 열고, 세금도 내라’고.”
그는 인도 시민권을 얻었다. 그 뒤 38년 동안 그와 마하라니는 히말라야 자락 언덕 위 무수리 근처 그녀의 집을 공유해 인도에서의 문학적 명성을 쌓았다.
윌리엄 맥케이 에이트켄은 1934년 5월 31일 클랙맨넌셔주 툴리보디에서 구리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같은 날, 세계의 다른 쪽에서 에릭 쉽튼이 6400m 연봉들이 둘러싸고 갠지스 강의 초입에 자리한 성스러운 난다 데비(해발 고도 7816m)를 사상 처음으로 꿰뚫었다.
그 산은 나중에 에이트켄을 사로잡았다. 그가 직접 눈으로 봤을 때, 자욱한 구름들 사이로 마치 "영적 스트립쇼”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한때 신성한 보호구역이었던 그 산에 1980년 들어갔는데 쓰레기들로 뒤덮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명성에 대한 탐욕과 기록적인 책에 뒤지지 않으려는 무심한 충동에 휘둘리는 여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는 또 1965년 중국을 염탐하기 위해 인도 정보기관들과 미 중앙정보국(CIA)이 실패한 합작을 했고 갠지스 강의 상류로 수백만명이 삶을 의지하고 있는 난다 데비의 정상에 플루토늄 발전기를 잘못 놓은 사실을 알고 소름이 끼쳤다. 플루토늄 재고는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어린 시절을 보낼 때, 에이트켄은 근처 산에 올라 "우주로부터 날아온 드론"에 귀 기울이곤 했다. 그의 형은 스코틀랜드 육상 대표를 지냈다.
부친의 직장 때문에 가족이 잉글랜드로 이주했는데, 빌은 버밍검 그래머 스쿨에 입학했으며 리즈 대학에서 비교 종교학을 전공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경로를 선택했다. "난 퀘이커, 모르몬과 성스러운 결속을 했다. 그 뒤 성공회 교도로 몰입했다가 나중에 등을 돌렸다. 하지만 반쯤 빈 교회들에서 끝맺었는데 ' 전능하신 분은 일요일 무단결석자들의 대열에 합류해 천국의 푸른 돔을 즐기기 위해 달아났다'고 표현했다."
그는 사실 천국보다 'heathen'이란 말을 더 좋아했는데 진달래과에 속하는 키 작은 상록관목 히더(heather)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히말라야인들이 이른바 '홀리 랜드'보다 수백 배 더 신성한 존재라고 확신하게 됐다.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듯한 홀리 랜드는 “혐오가 너무도 분명해 칼로 자를 수 있을 정도"란 점을 알게 됐다.
그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동포 스코틀랜드인들은 “캘커타의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넥타이를 매고 재킷을 걸침으로써 마조히즘을 배양했다. 반바지와 민소매 옷을 입는 것을 선호함으로써 난 대낮부터 실패한 스코틀랜드인으로 비쳤다. 캘커타의 추방자 모임은 수영 클럽이었는데, 그는 " 알비온의 문화를 보존하는 것은 피시 앤 칩스의 눈에 띄는 소비에 크게 의존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 돌아봤다.
히말라야에서 그는 불교도를 포함한 다양한 친구들을 모았는데, 정육 회사의 주식을 가진 불교도, 사하라 깊숙이 위치해 프랑스 명령에 따라 해체된 요크셔 수도사도 있었다. 침묵으로 말을 거는 강아지를 갖고 있는 거룩한 남성, "다음 차례는 더 나은 매너가 만연하기를 바라며 그의 정원을 습격하는 원숭이들에게 무를 제공할" 요가 수련자였다.
1999년, BBC의 마크 툴리와 더불어 , 그는 인도 증기 철도 재단의 창립 멤버였다. 그는 뉴델리의 국립철도박물관 친구들 회장이었다. 히말라얀 클럽의 명예 사서이기도 했다.
그는 저작들이 "총리가 되길 바라는 것보다 더 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인도 최초의 바이킹 가이드북 'the Ranges and Divining the Deccan"을 비롯해 'Footloose in the Himalaya', 'Literary Trails', 인도 협궤 철로에 대한 'Sri Sathya Sai Baba: A Life, Exploring Indian Railways and Travels by a Lesser Line' 등을 발간했다.
무수리 이웃들은 그를 재담꾼,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영예로운 집주인, 차 감정가로 알고 있었다. 그는 엔필드 바이크를 70대까지 몰았다.
“인도는 놀랍게 자유롭다. 여러분이 유럽에서 ‘출입 금지’ 표지판을 봤다면,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음, 어쩌면 그래, 어쩌면 아니, 한번 해보자는 뜻이다.”
진드의 마하라니 귀부인은 2010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