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래떡
류 기 학
우리 집 김치 광 지붕 이엉 속에는 어머니가 넣어 두신 흰 가래떡이 긴 엄동설한 매서운 추위를 견디다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한 겨울에도 얼었다 녹다를 반복한 탓으로 매끈하던 가래떡 모습은 온데 간 데가 없다. 온 몸은 찢기고 갈라 저 버렸고 마른 나무 작대기 같이 바싹 말라 비틀어 저 버렸다. 마치 재 너머 쇠쪽 밭에 메조씨모를 세우기 위해서 하루 종일 밭을 매고 난 어머니 손처럼 그렇게 험하게 되어버려서 보기 민망 할 정도다. 작은 아들 휴가 나오면 먹이려고 어머니가 넣어두신 가래떡이다. 내가 군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설 때 만든 가래떡을 뒤울안 김치 광 지붕 이엉 속에 서너 개 넣어 두시었다가 내가 휴가를 나가면 떡국을 끓여 주시곤 하셨다.
마지막 휴가를 나오며 자식을 기다리고 계실 어머니 모습을 그려보면서 부대정문을 나온다. 내가 근무하던 곳은 서울 도봉동에 있던 후송병원이다. 집에 가는 길은 시내버스로 서울역까지 가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조치원역에서 내려서 다시 충북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내릴 곳은 주덕역이다. 주덕역서 가정리 우리 집 까지는 먼 십리길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충주시에 속하지만 전에는 중원군 이류면이다. 면 소재지 대소원에서 우리 집 가정리를 가려면 요도천 내를 건너가야 한다. 지금은 큰 다리가 놓여 있어 볼 수 없지만 옛날에는 겨울철에 임시로 사용하는 나무로 만들어 놓은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나무다리는 소나무 가지를 얼기설기 얹어 놓고 그 위에 는 잔디를 떼어다가 덮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다 보면 다리 중간 중간에 간혹 잔디가 내려 앉아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을 지날 때 딴전을 보다가 잘못 디디는 날이면 발이 갑자기 다리 밑으로 쭉 빠져서 나도 모르게 “아!” 하고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요도 천 나무다리를 건너면 고개 기리가 길어서 이름 부쳐진“장고개”란 긴 고개 길을 넘어가야 하는데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집에서 자식을 기다릴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나는 잰 걸음걸이로 부지런히 장고개 마루를 향해 걷는다. 고개 마루를 넘어서면 헐떡거리던 숨소리도 진정되고 멀리 큰 느티나무가 있는 당저마을 모퉁이가 눈에 들어 오며는 벌써 집에 다 온 것 같은 들뜬 기분이다. 저기서 우리 집은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고개 내리막길이라 발걸음이 한 결 가벼워진다. 내 걸음 걸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빠른 편이다. 나는 걸음을 걸을 때 양쪽 옆을 보느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걸어가는 버릇이 있어 걸음이 빠른 것 같다. 석양이 서산마루에 걸치는 저녘 때라 그런지 삼월 달 초봄인데도 아직도 매서운 찬바람이 씽- 하고 스쳐 지나갈 때 마다 내 볼때기가 떨어 저 나가는 듯 몹시도 시럽다. 집에 가면 반갑게 맞아주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더 부지런히 옮기다 보니 다시금 숨소리가 하늘에 닿을 듯 헐레벌떡 거린다. 숨이 차서 내뿜는 입김은 싸늘한 기운이 무서워서 인지 뿌연 안개로 변해서 안경너머로 사라지며 내 시야를 가린다. 내가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거리시며 반겨주시고는 또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가신다. 아마도 또 내게 무엇을 먹이려고 준비하러 들어가시는 모양이다. 내가 집에 가는 날이면 어머니는 김치 광 지붕 이엉 속에 넣어두셨던 마른나무 작대기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흰 가래떡을 꺼내어 미지근한 물에 밤새도록 불리신다. 그리고 그 이튼 날이면 꼭 떡국을 끓여서 주시곤 하셨다. 소고기도 넣지 않고 맹물에 끓인 떡국이라 지금과 같은 떡국 맛에 비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가 끓여주신 그때 그 떡국은 참으로 맛난 별미였다. 군대가 있는 동안 세 번 휴가를 나왔는데 그때마다 이렇듯 지극 정성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인자한 모습을 내게 보여주신 분이 내 어머니다. 그러셨던 분이 지금은 몹쓸 노인성치매에 걸려 식사하시는 것 이외는 자식도 몰라보시고 세상사 아무것도 모르는 생활을 하시고 계신다. 하루 종일 하시는 일은 옷 보따리를 쌓아 가지고는 집에 가신다고 방문을 열고 나오기도 하시고, 옆에서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신다.
또 어느 때는 방안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는“얘 밥 먹어라, 아이 착하다”하시면서 대화를 하시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거울속 자신을 다른 노인으로 착각하시고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화를 내시기도 하신다.
인정이 너무 많으신 분이라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늘 베풀며 사는 삶을 살아오신 탓으로 많은 분들로 부터 칭송을 받아오셨던 분이다. 이렇듯 마음씨 고운 어머니에게 자식도 몰라보는 고통을 안겨주시다니 정말로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올해 94세. 연세가 많으시지만 이제는 기력도 너무 쇠약해 지신데다 가 젊었을 때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허리는 구부시고 시력도 좋지 않으시다. 어머니 혼자서는 문밖을 출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 지난해 봄부터 노인정도 못 나가시고 항상 집에서만 계시자니 오죽이나 답답하실까? 늘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어야 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지금 내 처지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할 수 없는 형편이라 그저 가슴만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이다. 그저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남들은 말하기 좋아서 요양원에 모시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하지만 나를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를 그곳으로 보내는 것은 손발이 멀쩡한 자식으로서는 도저히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내가 조금은 힘이 들더라도 어머니 치매증세가 지금보다 더 심해지지 않는 한 내 집에서 계속 모시고 싶은 심정이다.
오늘 마침 날이 따듯하여 어머니를 목욕시켜 드리면서 깡마른 팔다리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 옛날 어머니가 내게 떡국을 끓여주시려고 뒤울안 김치 광 지붕 이엉속에서 꺼내시던 바싹말라 비틀어진 흰 가래떡이 생각나서 잠시 눈시울을 적셨다.
2007. 12
첫댓글 군대가 있는 동안 세 번 휴가를 나왔는데 그때마다 이렇듯 지극 정성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인자한 모습을 내게 보여주신 분이 내 어머니다. 그러셨던 분이 지금은 몹쓸 노인성치매에 걸려 식사하시는 것 이외는 자식도 몰라보시고 세상사 아무것도 모르는 생활을 하시고 계신다. 하루 종일 하시는 일은 옷 보따리를 쌓아 가지고는 집에 가신다고 방문을 열고 나오기도 하시고, 옆에서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신다.
오늘 마침 날이 따듯하여 어머니를 목욕시켜 드리면서 깡마른 팔다리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 옛날 어머니가 내게 떡국을 끓여주시려고 뒤울안 김치 광 지붕 이엉속에서 꺼내시던 바싹말라 비틀어진 흰 가래떡이 생각나서 잠시 눈시울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