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초겨울 한화 전신인 빙그레와 공주고 졸업 반이던 박찬호는 계약금을 놓고 한창 줄다리기를 했었다. 3천만원을 주겠다는 빙그레에 1-2천만원을 더달라는 박찬호 측이 었는데 이 와중에 한양대가 가세했고 결국 박찬호는 대학을 선택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많지 않은 액수 였지만 이것이 한 사람의 인생과 한국야구의 한 획을 긋는 역사 적인 일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빙그레 감독이던 김영덕씨가 대전 야구장에 불러 같이 한번 해보자고 제의 했! 었고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간판타자 장종훈도 꼭 같이 선수 생활을 하자며 박찬호 스카우트에 가세 했었다.
그러나 박찬호가 속해 있던 공주고의 당시 에이스는 손혁(전 두산 4월21일자로 은퇴)이었다. 빙그레는 컨트롤이 뛰어났던 손혁을 즉시 전력감으로 생각 했으나 손혁은 이미 고려대로 진학이 결정된 상태였고, 반면 박찬호는 볼 스피드는 좋아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 했으나 컨트롤이 불안정 하다고 판단한 상태였다. 팀에서는 포스트시즌에 매년 올라가던 빙그레의 멤버도 좋아 박찬호의 가세는 그리 큰 힘이 된다고 생각지 않았기에 적극적으로 박찬호를 잡지 않은 것도 또 다른 이유중에 하나였다. 아무튼 이때 박찬호가 과연 빙그레에 입단 했다면 하는 가정을 두고 가끔 야구인 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설전을 벌인다.
먼저 성공 했다고 보는 측은 투수 조련에 일가견이 있는 김영덕 감독이 체계적으로 연습 시키고 1-2군에서 실전을 통해 경험을 쌓았으면 31살의 박찬호가 현재 한화의 기둥투수가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같은 동기인 대전고 출신 정민철이 92년 입단 첫해에 14승 7세이브에 방어율 2.48을 기록하며 멋지게 데뵈 했기에 박찬호도 분명 뒤지지 않는 성적을 냈을 거라고 판단 하는 것이다. 부정 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먼저 아직 까지도 완벽하지 못한 컨트롤 때문에 선수 생활을 그리 오래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아마추어 포함 해서, 프로출범 23년째인 올 해까지도 150km넘게 던지는 투수들이 많이 나타 났지만 빠른 볼 대신 안되는 제구력을 잡지못해 소리 소문없이 사라진 선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구속150km를 던지는 박찬호가 빙그레에 입단해 컨트롤을 잡지 못하며 1-2년내에 1군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으면 당시 프로야구 판에서 어느팀이 마냥 연봉을 주며 기다 렸겠느냐는 얘기다. (참고로 빠른 볼만 던지는 선수가 입단 하면 투수로 만들어 내기 까지는 능력있는 지도자와 인내심을 갖고 연봉을 지급하며 꾸준하게 기다려주는 구단 프런트가 있어야 작품이 나온다. 사실 그때는 당장의 성적과 구단 살림에 여유가 없어 기다려 주지 않는 분위기와 풍토 였다. 이런 면에서 볼 때 SK는 광속구 투수 엄정욱을 만들어 내기 까지 지난 4년을 기다리며 공을 들였고 이제 5년차에 와서 선발 로테이션에 넣어 활약을 기대하고 있다. 이제는 지도 능력과 프런트의 마인드가 바뀌어 재목이다 싶으면 투자하고 기다려 준다.
그럼 이제부터 과연 박찬호는 재기에 성공 할 수 있느냐에 대해 분석해 보기로 하자.
앞서 투수의 가장큰 무기는 빠른 볼이라 했다. 타자들 머리속에상대 투수가 빠른 볼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되면 변화구를 선택해 끝까지 노리지 않는 한 간혹 섞여 들어오는 변화구에 타이밍을 맞추기 어렵다. 그만큼 빠른 볼을 가지고 있으면 변화구의 위력도 배가되며, 타자들이 갖는 공포심은 대단하다. 박찬호가 96년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면서 컨트롤이 완벽하지 못했기에 덕을 본적도 많았다.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메이저타자들의 습성상 가운데 몰리는 스트라이크 보다 볼을 많이 건드려 줘서 유리한 볼카운트를 많이 확보하고 타자들을 잡아 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박찬호가 무너질 때 보면 상대 타자들이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을 경우가 많았다. 타자들의 심리도 컨트롤이 불안정한 투수 보다는 항상 당하면서도 컨트롤이 좋은 투수를 상대 할때가 마음이 편하다. 빠른 볼을 던지며 컨트롤이 안좋은 투수는 언제 머리로 공이 날아 올지 모르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타석에 서기 때문인데 이러면 좋은 타격이 되지를 않는다. 아무튼 굴곡은 심했지만 빠른볼을 주무기로 메이저리그를 점령해 가던 박찬호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향 곡선을 보인 것은 정확히 98년부터 1마일(1.6km)씩 줄어든 스피드 때문이다.
필자가 99년 메츠의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서 운좋게 만나 많은 조언을 들은 전설적 투수 톰시버가 한 얘기를 빌리자면 “투수는 변화구에 중독되면 자신의 볼스피드가 줄어 드는 것을 감수 해야 한다” 라고 했다. 당시 30대 초중반 나이에 불 같은 강속구를 유지하며 마운드를 호령하던, 로저 클레멘스 랜디존슨 커트실링 케빈브라운등을 예로 들었다. 이들은 직구와 변화구의 혼합 비율이 8대2내지는 7대3으로 직구를 많이 던졌으며, 변화구도 가능하면 빠르게 던질수 있는 것들을 선택해 던졌다. 슬라이더 싱커 스플리터 컷터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최근에야 힘이 떨어져 여러 단계의 스피드를 완급 조절을 통해 타자를 상대 하지만 그래도 직구 비율은 6대4이상을 넘지 않는다. 계속해서 빠른 볼을 던져야 그스피드가 유지된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삼진 왕이며, 46세 까지 직구 위주로 강속를 던져대던 놀란 라이언을 보더라도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메이저타자들이 박찬호 하면 빠른볼이 주무기이고, 커브보다는 각이 작지만 빠르고, 슬라이더 보다는 각이크고 스피드가 느린 소위 슬러브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 승승장구하던 박찬호를 각팀의 전력분석팀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98년부터 스피드가 줄고 변화구 구사비율이 늘면서 2001년 부터는 오히려 6대4로 변화구를 더많이 던지는 기교파가 되어버렸다. 기교파는 다양한 변화구와 송곳 같은 컨트롤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박찬호는 이두가지를 갖추지 못해 잔부상과 함께 부진의 늪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박찬호가 LA다저스 당시 한참 좋을 때 전담 포수였던 채드 크루터의 변화구위주 볼 배합이 스피드 감소의 한 원인이 된것도 이유가 된다.
좀더 기술적으로 들어가면 포심 패스트볼 던질 때 쓰는 힘이 100이라면 변화구 구사시는 80정도의 힘만 쓰기에, 체력 안배 차원에서도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손목과 손가락놀림을 통해 타자의 타이밍을 뺏어 간단히 범타로 잡아내거나 헛 스윙을 유도 했을때의 “맛”이란 투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렇기에 이유혹을 물리치고 빠른볼 위주의 투수가 되기란 쉽지 않다. 이랬던 박찬호가 허리부상에서 회복되며 2004년 시즌에서 가장 눈에 뛰게 달라진 점은! 볼 스피드 회복에 공을 들였고 경기시 투구 패턴도 빠른볼 위주로 가져 갔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야구 팬들이 봐서 알겠지만 투스트라이후 삼진 잡으려고 변화하는 유인구대신, 역으로 빠른볼을 몸쪽에 바짝붙여 스탠딩 삼진을 잡아내는 패턴으로 바뀌었다. 올해 들어 가장 좋았던 4월17일 시애틀전의 투구내용을 보더라도 6대4비율로 직구가 많았고, 유인구대신 스트라이크를 던지려는 의도가 강했는데 그것이 통했다.
반대로 그 다음 등판때인 4월23일의 에너하임 전에는 원하던 스피드가 나지않아 140km전후의 볼을 던지며 난타 당했다. 스피드가 나지 않으니 얻어 맞는 다는 두려움에 투심을 포함해 변화구 위주로 가다 맞은 야구에서 평균 150km대를 팡팡 던져대던 투수가 한번 하향 곡선을 그렸다가 다시 전성기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에는 정말 쉽지 않다. 그리고 160km의 스피드가 나오면서 컨트롤이 없으며 스트라이크는 한가운데 밖에 던지지 못하는 투수 보다는 135km가 나오더라도 완벽한 제구력을 갖춘 투수를 더 선호하고 경기에 내보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어쩌다 한번씩 150km가 나온다면 140km전후의 스피드 가지고 16년 연속 15승이상을 하는 시카고C의 그렉 매덕스 같이 컨트롤을 재무장 하는 것이 앞으로 박찬호가 살길이라고 본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135-140km대의 직구는 변화구를 기다리다가도 벼락같이 때려 낼수 있을 정도로 몸이 나가지 않으며 테이크백이 짧다. 그렇기에 변화구 구사비율이 높고 컨트롤이 안돼 가운데로 몰리는 90마일 대의 직구는 통타 당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박찬호는 2002년부터 지명타자 제도가 있는 아메리칸리그에 소속된 텍사스로 옮긴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타고투저가 한창일때는 투수가 타격을 하는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의 팀방어율이 1점가까이 차이가 날 정도로 투수들이 고! 전하는 리그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98년부터 IMF로 인해 국민모두가 한참 어려울 때 힘을 줬던 선수고, 한국야구의 우수성을 갖은 고생을 해가며 알린 박찬호를 같은 야구인 으로서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 하기에 더 이상의 부진 없이 선전 했으면 한다.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위에글처럼 느꼈을건데,,, 그동안은 사람들이 침묵한거죠,,, 나처럼 생각나는대로 지껄이는 몇놈이야 예전부터 보이는데로 말해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지만,,, 일찍 지적했음,, 지금쯤 다른찬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생각나는데로 지껄이는 놈이 감히 말해봅니다..
케빈브라운의 영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98년가지 박찬호는 전형적으로 포심으로 먹고 사는 투수였습니다. 팔도 오버헤드였고, 하지만 케빈이 오고 난 뒤 케빈의 투구폼중 스리쿼터 비스무리하게 팔 각도를 내리면서 변화구 구사가 높아졌죠. 크루터도 그렇고, 저는 갠적으로 찰스존즌때가 젤루 좋았어요.
첫댓글 동'감'이 부적절,,느낌이 같다는 것이니. 박노준님이 있는 사실 그대로를 지적한 것^^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위에글처럼 느꼈을건데,,, 그동안은 사람들이 침묵한거죠,,, 나처럼 생각나는대로 지껄이는 몇놈이야 예전부터 보이는데로 말해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지만,,, 일찍 지적했음,, 지금쯤 다른찬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생각나는데로 지껄이는 놈이 감히 말해봅니다..
케빈브라운의 영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98년가지 박찬호는 전형적으로 포심으로 먹고 사는 투수였습니다. 팔도 오버헤드였고, 하지만 케빈이 오고 난 뒤 케빈의 투구폼중 스리쿼터 비스무리하게 팔 각도를 내리면서 변화구 구사가 높아졌죠. 크루터도 그렇고, 저는 갠적으로 찰스존즌때가 젤루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