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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작성하면서 나름대로 쉽게 쓴다고 노력했습니다만 설명에 미흡한 부분이 있을 줄 압니다.
이 글을 통해 역사를 대하는 새로운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시고, 님들에게 도전이 된다면 보람으로 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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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으로 천하의 서를 비롯한 자료를 모으는 40년간의 노력 끝에 초벌이 완성된 대작입니다. 이 사고전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두산대백과’의 설명을 인용합니다.
【四庫全書】
중국 청나라 때 편집된 총서로서 중국에서는 유서(類書)의 편집이 성행하였는데, 청나라 때에도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 있으나, 유서는 원문을 모두 싣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미흡한 느낌을 가졌던 건륭제(乾隆帝)가 1741년에 천하의 서(書)를 수집한다는 소(詔)를 내려 1772년에 편찬소(編纂所)인 사고전서관이 개설되었고, 1781년에는 《사고전서》의 첫 한 벌이 완성되었다. 그 후 궁정에 4벌(熱河의 文津閣, 北京圓明園에 文源閣, 紫禁城 안에 文淵閣, 奉天의 文溯閣), 민간에 열람시키는 3벌 등 7벌이 만들어졌다.
수록된 책은 3,458종, 7만 9582권(각 벌의 서적 수는 동일하지 않음)에 이르렀으며,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4부로 분류 편집되었으며 44류로 나뉘었다. 경부는 역(易)·서(書)·시(詩)·예(禮)·춘추(春秋)·효경(孝經)·5경총의(五經總義)·사서(四書)·악(樂)·소학(小學)의 10류로 나누었다. 사부는 정사(正史)·편년(編年)·기사본말(紀事本末)·별사(別史)·잡사(雜史)·조령주의(詔令奏議)·전기(傳記)·사초(史)·재기(載記)·시령(時令)·지리(地理)·직관(職官)·정서(政書)·목록(目錄)·사평(史評)의 15류로 나누었다. 자부는 유가(儒家)·병가(兵家)·법가(法家)·농가(農家)·의가(醫家)·천문산법(天文算法)·술수(術數)·예술(藝術)·보록(譜錄)·잡가(雜家)·유서(類書)·소설가(小說家)·석가(釋家)·도가(道家)의 14류로 나누었다. 집부는 초사(楚辭)·별집(別集)·총류(總類)·시문평(詩文評)·사곡(詞曲)의 5류로 나누었다.
수집된 서적 중에는 청왕조(淸王朝)로서 못마땅하여 소각하거나 판목(版木)을 부수는 등, 이른바 금서(禁書)가 된 것도 많았으며, 수록된 책 중에서도 부분적으로 고쳐진 것도 있다. 수록된 서적은 모두 8행 22자로 고쳐 썼으며, 분류와 제요(提要)를 붙였다. 편집의 중심인물은 총찬관(總纂官)인 기윤(紀臍)을 비롯하여 대진(戴震) ·소진함(邵晉涵) ·주영년(周永年) 등이다. <두산대백과 사전>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사고전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사고전서에 실린 것들은 창작물이 아니라, 당대까지 전해진 실제자료를 망라했다는 것
둘째, 사고전서는 원문을 모두 싣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
셋째, 다른 왕조도 그랬지만 자신들과 맞지 않는 것은 멸실하거나 금서가 있었다는 것.
그러나 당시까지 존재했던 자료를 그 어느 시기의 왕조보다도 망라하려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Ⅱ
이제 고대제왕의 한 분인 ‘신농씨’에 대한 문헌기록을 봅니다.
『신농(神農)은 준령에서 구리를 캐내어 그릇을 만들었다.』
神農取銅于峻嶺之銅以爲器 《拾遺記》
『古史考에 따르면, 신농은 시장을 개설했으며...』
古史考曰, 神農作市, 高陽氏衰, 市官不脩, 祝融脩市.《太平御覽 卷827》
神農耕而作陶 《太平御覽》
『옛사람들은 모두 짐승의 고기를 먹었으나 신농 때에 이르러 백성들이 많아져서 짐승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이에 보습과 쟁기를 만들고 백성들을 계도하여 농사를 지었다』《백호통․삼황오제편》
古之人 皆食禽獸肉 至於神農 人民衆多 禽獸不足 於是 製耒耜敎民 農作
『염제는 태양이다』
炎帝者 太陽也 《白虎通》
『염제는 불을 관직명으로 하였으며, 강(姜)이란 성은 그 뒤의 일이다.』
炎帝爲火師, 姜姓其後也. 《左傳․哀公 9年》
『염제는 불을 표지로 삼았으므로 불로 관직명을 만들고 불로 이름을 지었다.』
炎帝氏以火紀, 故爲火師而火名 《左傳․昭公17년》
문헌상으로는 보는 바와 같이 ‘신농 임금’의 업적은 당시로서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던 세익스피어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구리그릇을 만들었으며, 불을 관장하는 시기였으므로 자신의 상징을 '태양‘을 하였고, 불과 관련하여 관직명을 삼았습니다. 또 시장을 만들어서 물물교환을 넘어선 화폐경제를 실현하기도 한 것이죠. 이런 일들이 ’불‘로 인하여 가능했기에 그를 ’염제(炎帝)‘, 즉 ’불임금‘이라 부른 것입니다.
또한 염제는 '뇌사'(耒耜: 쟁기의 일종)라고 하는 농기구를 발명하고, 농토를 개간케 하여 오곡을 심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요. 이에 따라 나온 이름이 ‘신농(神農)'이니 말 그대로 '농업의 신'이라는 뜻이죠.
‘동몽선습’에서도 ‘神農氏作耒耜 製醫藥....’(신농은 농기구를 만들고 의약품을 만들었다)고 하고,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라는 책이 존재할 정도지요.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농사의 신농(神農)을 모시는 제사로서 선농제, 중농제, 후농제를 지냈으나 조선조 말에는 선농제만 남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역대 임금들이 오늘날의 서울 동대문 밖 종암동에 선농단(先農壇)이란 곳에서 매년 경칩 후 첫 번째 해(亥)일 축(丑)시(오전 1시에서 3시 사이)에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신농에 제사를 지내거나 친히 논밭을 갈아 농사의 대본을 보이는 행사인 적전지례(炒田之禮)를 행하였습니다.
신농 임금이 세상에 등장함으로 인해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진 시대의 변화는 앞의 철기문명, 농업기술과 도구의 발명, 의약품, 화폐의 발명과 시장개설, 혼인제도의 정착 ...등등 한두가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신농임금의 업적을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여서 이 모든 것을 합하여 신농 임금으로 인해 가능했던 일들을 일러 ‘신화(神話)’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신(神)은 농업의 신이었던 신농, 불의 신이기도 했던 염제, 약의 신이기도 했던 의신(醫神)의 개인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했던 이름은 ‘신농’임금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헌의 기록들이 과연 실존인물에 관한 기록인가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런 위대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확인하고 존재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Ⅲ
이 신농이란 인물이 과연 실존한 인물이었을까요?
아니면 허구의 인물이었을까요?
이 인물에 대한 것을 판단해 줄 수 있는 단서가 《사고전서》안에 고대화폐를 모아놓은 「錢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사고전서》에 실린 내용들은 청나라 건륭제의 명에 의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18세기까지 실존했던 자료라는 뜻이 됩니다.
좌측은 《四庫全書》「錢錄 844-12-1」에 수록된 모사본입니다.
(당시는 사진기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탁본 아니면 모사를 할 수 밖에 없었겠죠.)
이는 모사하는 시점인 18세기까지 이 화폐가 존재했었다는 것이 됩니다.
모사로 기록을 남긴 것은 淸나라 건륭제 당시까지 보관되었던 청동기나 화폐 등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이중에서 고대의 돈만을 모은「錢錄」의 52개 古貨幣 중에서 18번째의 화폐를 모사한 것이 예를 든 |자가 들어있는 화폐죠.
|을 비롯한 고대 화폐에는 만든 이의 이름자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 신농을 입증할 화폐도 마찬가지로 |자가 인칭인 것입니다.
이 화폐를 평가한 기록을 한번 보겠습니다.
右二品面背無文字姚元澤譜云三代以上布也
오른쪽 두 가지 화폐의 앞뒤에는 문자가 없으며, ‘요원택’의 분류에 따르면 ‘삼대이전의 화폐’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순수하게 화폐의 특징만으로 분류한 상태에서 ‘삼대이전의 화폐’로 보았다.
② 청나라 시기에 |는 문자로 보지 않았다.
①의 경우 화폐를 분류한 ‘요원택’이란 인물은 ‘고금의 화폐의 변화를 보면 세상의 변화를 알 수 있다’는 지인의 말을 가슴에 담고, 평생에 걸쳐 고화폐를 수집했으며 그 결과를 ‘古泉譜’ 등의 이름으로 책을 내기도 한 당대의 고화폐 전문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요원택에 의해 사고전서에 수록된 화폐는 문자와 관계없이 ‘삼대 이전의 화폐’로 평가되었던 것입니다. (그 화폐를 평가한 기준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삼대란, ‘하, 은, 주’시기를 말하는 것인데 그 이전이라고 평한 것을 보면 분명 오래된 화폐임은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을 문자로 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당연히 이 고화폐가 등장하기 전에는 |을 대할 수 없었으니까 이를 두고 해석할 기회도 없었던 겁니다. 따라서 |을 문자로 볼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지요. 더구나 요원택이란 인물은 문자에 해박한 사람도 아니었으니, 문자적으로 화폐를 평가한 것이 아니라 화폐 그 자체로 ‘삼대 이전’으로 시기를 결론 내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자로 인식하지 못했던 丨을 왜 문자로 보아야 하는 걸까요?
그건 놀랍게도 허신의 설문해자에 丨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丨】「丨, 下上通也. 引而上行 讀若囟 引而下行 讀若退
丨은 아래서 위로 통하는 것이다. 끌어올리면 정수리 신(囟)이라고 읽고,
끌어내리면 물러갈 퇴(退)라고 읽는다.」
오늘날의 옥편에는 ‘신’이 아니라, ‘곤’으로 발음되는 것으로 설명하니 허신의 설문과는 발음에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래에서 통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허신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다만, 후의 설명, 즉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을 ‘물러간다는 退’로 읽는다는 점에서 '引而上行‘은 ’등장‘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또한 허신은 발음을 설명하지만 선택하는 용어는 설명하려는 문자의 의미와도 상당한 관련성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최정상의 인물, 숨을 쉬게 하는 인물」이라는 의미의 ’정수리 囟‘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고대화폐에 들어있는 글자이기에 사람의 씨칭임을 알 수 있고, 이 허신의 丨의 설명과 대조하여 판단할 때 ‘생전에 최정상의 자리(王)에 있다가 낙향하여 물러나신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발전한 글자인 ‘申’을 ‘身’이라고 설명한 《釋名》,《廣韻》,《玉篇》등으로 볼 때 사람을 나타낸 것이라는 심증을 더욱 굳게 합니다.
하. 은. 주 삼대이전에 고대화폐에 이름이 들어 있었고, 만백성의 정상에서 기운을 주었던 ‘신(囟)’이라 불렸던 사람, 이 분은 누구신가?
Ⅳ
|이란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의 글자가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입니다. |이라는 글자의 변천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서 神이라는 글자로 발전하기까지 여러 세대가 흘러야 했습니다.
문자의 변천은 ① → ② → ③순의 과정을 밟았는데, 이중에서 ②번 금문은 상나라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이른 시기의 기록입니다.
지금 설명하려는 것은 ②번 금문에 있는 申자에 관한 것입니다.
|에서 발전된 글자가 금문 ②에서 보이는데 이 금문은 ‘王申(=鑄)父珠’가 됩니다.
이는 고양씨가 「당대의 법에 따라서 왕이 되어 |를 받드는 자가 되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금문에 나타난 申자는 ‘|(신)+臼(양 손) +)((법)’의 세 요소를 합한 글자로서 ‘왕이 당시의 법에 따라( )( ) 두 손으로 |을 보호하는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었음’을 천하에 공포하는 내용입니다. 즉, 고대화폐에 들어있는 신(|)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의미죠.
(고양씨라는 표시는 ‘父〇‘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즉 고양씨가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기록인 것이고, ‘父〇‘는 오늘날 ’낙관‘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설명에 申자에 있는 윗부분 )(이 八이 아니냐, ‘父〇‘가 왜 고양씨냐고 반론이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이는 논외의 문제이기에 설명을 생략합니다.)
이 申자에 대해 허신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申] 神也... 从臼自持也.
[申] 神이다. 두 손(臼)과 자지(自持)의 모습을 본 뜬 것이다.
놀랍지 않습니까?
申이란 글자는 ‘臼+自持(|)’로 이루어진 글자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대로 하면 ‘|=자지(自持)’라는 것이고, 이는 고대화폐에 들어있는 글자였던 것이죠.
혹자는 말합니다.
‘从臼自持也’는, 글자의 모양은 臼자를 따랐으며, ’스스로 유지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즉 臼는 형상이며, ‘自持’는 이에 대한 설명부분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이는 고대문자의 전반을 이해 못한 상태에서 나온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고대기록을 보면 수없이 선대의 상징(주로 씨칭이나 족칭)을 두 손으로 받드는 기록이 많이 보이니 이들 문자도 |자처럼 ‘自持’로 해석되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이 ‘自持’로 해석될 수 있는 유일한 글자라는 뜻이 되며, 따라서 ‘|= 自持’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은 ‘自持 囟’이었던 것입니다.
自持는 ‘스스로 가진다(보존한다, 유지한다)’는 뜻인데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 이름하여 ‘自持(|)’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은 말하기도, 듣기에도 민망한 우리의 토속어로 알았었는데 이렇게 한자로 표현되는 글자인 것을 이제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양씨가 할아버지인 신씨(|)를 제사지내는 적손임을 알리는 글자가 申이라는 글자인 것입니다. 즉. 申자는 두 손으로 선조의 자지(|)를 보호하고 지키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며, 앞의 금문에서 ‘왕은 시조인 신(|)의 계승자’임을 알리는 것이며, |은 왕권을 있게 한 존재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렇게 시조인 신(|)을 제사지내는 전통은 고양씨로부터 시작되어 고구려 시대에 신좌에 모시는 남근숭배사상과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법주사에 남근을 모시는 사례가 있었듯이 남근, 즉 自持(|, 木隧)를 모신 것은 시조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
나라 동쪽에 큰 수혈(隧穴, 襚穴)이 있어, 10월에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고 수신(隧神, 襚神)을 제사지내며, 목수(木隧, 木襚)를 신좌(神座)에 모신다. ”
-《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조
이 |을 모시는 일이 신라, 백제, 가야 등 한민족의 나라에서는 쉽게 발견되는 풍속이었으며, 이 기원이 |을 받드는 첫 인물인 고양씨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고, 고구려가 고양씨의 후예라는 기록이 사실무근이 아니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삼대 이전의 화폐에 나타나는 신(|)을 제사지낸 첫 사람은 申으로 기록했던 ‘고양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후세대에 나타나는 글자, 神은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가!
‘神, 天神, 引出萬物者也.’ 《說文》
神은 하늘신이며, 만물을 이끌어내신 분이다.
한민족에게 하늘신이란 ‘하날님 곧, 하나님’으로 부르는 존재이며,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은 추상적인 우주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물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神은 고대의 남성을 가리키는 글자이며, 상제(上帝)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결국, ‘삼대 이전의 화폐’에 들어있던 신(|)은 상제로 불리는 하나님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학자들은 사실 神이란 글자는 본디 申이며, 神은 불필요한 글자라고 지적합니다.
‘神(신)‘이라고 하면 뜻이 통하지 않는다. 본래 ’申‘자로 쓰였음이 분명하다. 마치 ’巳는 巳이다‘라고 풀이한 예와 같다. 여기서의 ’申‘자와 ’酉‘자의 전문(篆文)은 지금은 인신된 의미로 쓰이는데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 예를 모르고 함부로 ’神‘자로 고쳐놓았다. 고설(古說)을 살펴보아도 합치되는 곳이 없다. -《설문해자주》「서울대학교 출판부」’申部‘
즉, 神이란 글자는 쓸 데 없이 본의를 잃어버린 채 만들어놓은 글자이며, 申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神農’이란 기록은 ‘申農’으로 기록하는 것이 더 본자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실제로 본글자는 ‘|農’이 되어야 정확한 기록인 셈이죠.)
이 신농임금의 당시 이름이 |이며, 토템은 태양이었기에 해를 나타내는 〇로 나타냈습니다. 우리말로는 ‘알‘이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본의가 ’태양‘입니다. 고대금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이 〇은 신농씨의 자손들이 계승하여 소속감을 나타내며, 우리 문헌에서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을 신농씨로 단정 짓는 이유는 삼대 이전에 ‘神’으로 이름한 임금은 ‘신농(神農)’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申으로 부르든, 神이라 하든 그 핵심이 되는 요소는 ‘囟, 즉|’이죠.
‘하늘(天)’이라 불린 사나이는 神農씨였고, 그러기에 神은 곧 天의 동의어로 인식되었으며, ‘天神’의 약자였던 것입니다.
‘神, 天神, 引出萬物者也.’ 《說文》
神은 하늘신이며, 만물을 이끌어내신 분이다.
Ⅴ
이렇게 神(|)은 삼대 이전의 화폐에 나타났고, 상형문자에서 보듯이 神은 오늘날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창공과 같은 추상적이 개념이 아니라 수천 년 전에 이 땅에서 일생을 살다 가신 실존적 인물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혼돈하는 하나님의 어원을 살펴봅니다.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서》(백문식 저/삼광출판사)에서 일부분만 옮겨봅니다.
[하느님] 개신교에서는 유일신(唯一神)이라는 뜻에서 하나님이라고 한다. 15세기 표기라면 ‘*하(,)나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는 ‘하날(,)님[天帝]’이다. ‘하날(,)[天]+님(접미사)’에서 /ㄹ/이 탈락하여 ‘하느님’이 되었다. (同書 398p)
[하늘] 15세기 어형은 ‘하낧(,), 하날(,)’이다. 하늘은 ‘하+ㄴ+알(,)’로 분석된다. ‘한’은 ‘하다[大: 크다]’의 관형사형이고 ‘알(,)[日]’은 태양(太陽)이다. 하늘을 ‘한+발(,)(밝(,); 光明, 國土)→*한발(,)>한알(,)>하늘’의 형성과정을 거쳤다는 설과 ‘한+알ㅎ(核.精 원형 상징어)’ 곧 큰 원[大圓]으로 보기도 한다. (同書 399p)
이번에는 ‘하늘’에 대한 서정범 교수의 견해를 보자.
[하날(,)(天)] 「하날(,)」의 語根은 「한」이고 「알(,)」과 합쳤다. 「한」은 근원적으로 태양의 뜻을 지닌다. 「해(,)(陽)」는 「하(,)이」가 줄어든 말로서 「이」는 接尾辭가 된다.(...) 「사알(,)(3日), 나알(,)(4일)」의 「알(,)」이 日의 뜻을 지니는데 본디는 太陽의 뜻을 지녔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하날(,)(天)」은 하와 날(,)의 異音同義語의 합성어일 개연성도 있다. 《우리말의 뿌리/고려원》214p
역시 우리말에서도 天이라는 글자는 ‘사람’의 모습을 본 딴 것이고, 의미는 태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라 불린 사나이’, 즉 ‘神 = 天神’, 즉 하늘신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삼대 이전의 화폐속의 인물, |이 天神인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국어의 <하나(,)님>은 <하날(,)님> 즉, 天神이지 [一神]이 아니라’ 하고, ‘夫餘에서 百濟에 이르기까지 王族들이 [解氏]인 것은 해(.)[날]의 後裔임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판단한 것이죠. 《한국어의 어원》308p /최승열 저)
이상으로 문자외 적인 기준으로 평가된 삼대 이전의 화폐, 「전록」의 화폐는 삼대 이전이라는 평가는 매우 정확할 뿐 아니라, 문자적으로도 보다 구체적으로 ‘신농’임금 시대의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구성하는 ‘하늘’은 ‘해/태양’을 어원으로 하고 있으며, 神이라는 제왕을 가리키는 토템이기도 합니다. ‘=해’가 됨에 따라 우리 역사문헌에서 건국시조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이 하나님의 후손이라는 뜻이 될 것이며, 본래의 (日)이 고대문자에서는 〇로 기록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알(卵)로 인신되어 쓰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해/ 알/ 하늘‘은 고대에는 동일한 개념이었으며, 경우마다 다른 말로 표현하여 오늘날 우리가 혼란스러워 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은 역사에 등장하는 한민족 최초의 시조이며, 朝鮮이라는 글자의 첫 구성요소임에도 중국의 역사가 황제를 시조로 하는 까닭에 신농임금은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거나,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그들에게는 비주류로 인식되어 생략되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수민족의 이탈을 막을 수 밖에 없는 한족중심의 중국에서는 신농 임금도 자신들의 조상으로 분류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직계조상은 황제입니다.
한민족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신농임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국의 선조라는 오해를 받아 자기 자손에게도 외면당하는 씁쓸한 처지에 놓여있는 지경입니다.
이미 중국은 동북공정보다도 2천 년 전에 ‘공자와 사마천’을 필두로 고조선 공정을 성공리에 끝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자기 시조마저도 부인하고 그 자리에 단군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올리는 환부역조마저도 서슴지 않는 파탄지경에 이른 것은 통탄해 마지않을 일입니다.
그러니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결과일 뿐, 놀랄 일도 아니지요.
Ⅵ 추기
고대에 神(|)으로 기록된 인물이 두 사람이 더 있으나 이들은 제왕이 된 적이 없었기에 ‘전록’상의 화폐의 神農임금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런 세 분의 神을 통칭하여 ‘삼신’이라고 불렀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한민족의 시조로서 삼신이라고 불리는 세분의 이름은 고조선의 朝자에 좌변에 배차순서대로 반영되어 있지요.
이 세분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그 天地人 세분입니다. 곧 세분의 神씨인 ‘天神, 地神, 人神’은 결코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고대 상형문자로 남아있는 실존인물의 표현들인 것이죠. 이렇게 스스로 미쳐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 역사의 뿌리는 고스란히 무의식 속에 남아서 전하게 되고 마침내 그 내용을 잃어버리면서 말 그대로 ‘신화’로 추상화되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화는 역사의 반영, 혹은 그림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행히도 신화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고대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역사로 인식하게 해줍니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의 뿌리가 심히 깊은 민족입니다.
사족 하나: 炎帝와 같이 帝자로 표현한 기록은 신농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칭호인 까닭에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후대의 기준으로 붙인 칭호에 불과합니다. 신농시대에는 王으로 표기함이 옳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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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증명은 없군요. 요원택의 평가에 따른 "삼대이전의 화폐"를 먼저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sorgai님의 설명은 기껏해야 "I에 해당하는 글자는 이렇게 해석하는 거다"는 "주장"일 뿐입니다. I의 해석에 대한 증명도 아닐뿐더러, 그 이전에 전록에 모사된 화폐가 삼대 이전의 것임을 먼저 증명해야 님의 설명이 통하는 것이죠. 게다가 주장을 통해서 "삼대이전화폐"임을 증명하는 순환논증의 오류까지 범하고 계시군요.
간단하게 정리하죠. 님의 저 설명들이 맞기 위해서는 첫째, 전록의 화폐가 삼대 이전의 화폐임을 증명해야 하고, 둘째, 님의 주장이 맞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님은 이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전록의 화폐가 삼대 이전의 화폐임을 무조건적으로 인정하고 나서 논리르 전개한 후 그 논리르 통해 전록의 화폐가 삼대 이전의 것임을 증명하는 완벽한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ps. 님이 인용한 두산백과사전이 밝히는 순환논법의 예.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성서에 씌어 있다. 성서는 신의 말이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어쩜 이렇게도 교과서적인 순환논증을 보여주시는지 참.
여전히 오리무중이시로군요. 좋습니다. │이 문자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님이 아시는 기록 중에 이처럼 화폐나 청동기물에 쓰인 가장 이른 시기의 글자를 보여주시죠, 적어도 삼대 이후에는 없으니까요. 그 자체가 첫째 증명이고, 두번째는 이후로 후손들이 │을 기원으로 하는 글자로 자신을 표현했다는 겁니다. 즉 │으로부터 문자가 파생되었다는 말입니다. 거듭 말합니다. 실존자료를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할 뿐 님의 잣대는 필요 없습니다.
님의 논리는 이제까지 100여년간 문자학자들이 이루어놓은 성과를 한마디로 무너뜨리는 셈입니다. 신농에 대한 해석을 지금껏 했는데 삼대이전의 화폐임을 논증하라시네. 대단하십니다. 또 저 화폐가 삼대 이전의 것임을 무조건 인정했다니...? 지금까지 뭘 읽으신건지...궁금 또 궁금. 학자들이 상나라 시기의 문자도 읽어낸 마당에 왜 이건 못읽었을까? 그건 더 궁금... 제 주장이 맞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이 님이 오류를 논증하시면 되는 일입니다. 아주 쉽죠? 다른 삼대 이전의 화폐가 여럿있는데 '전록'을 더 보시기 바랍니다.
sorgai//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소위 전록에 모사되어 있는 화폐가 "삼대 이전의 화폐"인 증거를 가져오란 말입니다. "화폐에 쓰인 글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이건 삼대 이전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화폐는 삼대 이전의 화폐다."라는 순환논증은 필요 없습니다. 전록 속의 화폐가 "삼대 이전의 화폐"임을 확실한 실증적 근거를 통해 증명하십시오. 탄소연대측정 결과를 가져오시던가, 함께 출토된 제반 유물들을 통해 증명하시던가 방법은 많습니다. 더불어, 전록에 실린 것 말고 실제 유물이라도 보여주신다면 많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무려 기원전20세기보다 훨씬 이전의 청동 화폐라. 고고학계가 놀라 쓰러질 실물을 어서 보고 싶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