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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우금티 전적지, 천도교 중앙대교당
1. 왜 하필 여기?
2014년에 전역하고 내가 이렇게 살 수 있게 된 건 막대한 희생 덕분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군대에서 많이 더럽혀진 나의 정치적 신념을 뚜렷이 해보고자 전국 각지를 돌며 이곳저곳에 절을 하러 다녔다. 국립서울현충원, 마석의 모란공원, 국립 5.18 민주묘지, 당연히 그 여정에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을 기리는 일정도 끼워 넣었어야 했지만, 그러기엔 갈 곳이 너무 많았다. 보고 싶은데 사는 곳이 멀어서 보기 힘든 사람이랑 보는 것도 한꺼번에 하려다 보니 그랬다. 답사라는 명분도 생겼겠다, 한 번 찾아가봐야겠다. 물론 이번에도 공주에 사는 온화한 친구를 보러 가고 싶기도 했다.
또한 어떻게 보면 천도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죽창’은 요즘 인터넷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다. 혹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자됐다. 시쳇말로 ‘금수저’에 관한 글이 올라오면 네티즌들은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올리며 자조한다.
동학이나 천도교는 자세히 몰라도 죽창이라는 이미지만큼은 여전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소비되고 있다. 그것도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소극적으로 터뜨릴 때 빈번하게 등장하는 오묘한 이미지다.
원불교 사전 조사를 하다 보니 새로 알았는데 천주교, 개신교, 불교와 함께 원불교가 한국의 4대 종교로 인정되기도 하나 보다.1 나는 어쩐지 억울했다. 시류를 심하게 타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원불교가 시작부터 굉장히 상(商)스러운 종교인데, 처음부터 저항의 종교이자 민중의 종교였던 천도교는 어쩌다 저토록 초라한 종교가 된 걸까? 단순히 조직력의 차이일까? 예배가 재미없으려나?
2. 사전조사
➀ 공주 우금티 전적
나는 깊게는 아니지만 ‘시민 종교’라는 개념을 배운 적이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대통령이 뽑혔을 때, 당선 연설 같은 걸 하면서 성경에 손을 올리는 것을 두고 벨라는 ‘시민 종교’라고 말한 것 같았다. 뒤르껭이 말한 것처럼 세속이 마냥 세속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세속도 나름의 종교성을 창안해낸다는 의미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문승숙은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 대한민국’을 고찰하면서 시민성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단순히 세금 내고 군대 가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저항하고 투쟁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2 유럽의 중세부터 등장하는 시민은 ‘부르주아’로서, 자본가이기 이전에 성 안에 사는 사람이었다. 성 안에 사는 건 그 자체로 중세에서 특별한 생활방식일 수밖에 없었다. 교권과 왕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겨난 ‘도시민’들은 독립된 성을 차지하고서 ‘자치’라는 가치를 좇아 그들 스스로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 시절, 자치는 지키기 어려운 가치였다. 교권과 속권은 강했고, 부르주아는 지난한 투쟁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부르주아는 다른 세력과 연합, 프랑스 혁명을 통해 자신들의 시민성을 관철시킨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동학을 ‘시민’의 종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농민들에게 시민성을 부여해주고 시민답게 싸우게 한 종교가 바로 동학이 아닐까?
문화재청에서는 우금티 전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우금치 고개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견준산 기슭의 고개로 우금고개, 우금재 또는 비우금 고개라고 부른다.
분명히 동학은 이름부터 ‘자치’, 혹은 ‘자립’, 혹은 ‘독립’을 뜻한다.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기포한 이들은 부패한 조선에게도 죽창을 겨누었지만, 일본군에게도 총구를 들이댔고, 중요한 건 서학이 아니라 동학인 것이다. 꽤나 공격적으로 선교하는 천주교에 맞서 자주적으로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움직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때문에 한대련 같은 단체는 동학의 이런 문제의식이 3.1운동, 4.19혁명, 광주항쟁 등의 운동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하며, 이번 답사에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나의 개인적인 감사를 담아 기리려고 한다.
우금티 전투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우금티 전투 자체에 대해서 아는 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신영우의 “北接農民軍의 公州 牛禁峙·連山·院坪·泰仁戰鬪”(『한국사연구』154호, 2011)를 읽어봤다. 제목으로 미루어보아 한문 많을 거 같아서 좀 겁먹었는데, 인용문 빼고는 딱히 한문이 많지 않아 읽을 만했다. 우금티 전투 당시에는 우금티 전투가 아니라 여러 곁가지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손병희가 3.1운동 전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읊을 때부터 등장하는 줄 알았는데, 동학운동할 때부터 이미 높은 서열의 동학 간부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상징하면 ‘죽창’이고 아직도 젊은이들의 기억에는 ‘죽창’의 이미지가 깊게 박혀 있는 거 같은데, 농민군이나 진압군 모두 총과 대포가 주 무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가전이 아닐 뿐이지, 분위기는 프랑스혁명과 비슷했겠지 싶다. 그리고 전봉준이 초반에 망설이지 않았다면 농민군이 승기를 잡았을 수도 있다는 신선한 비판도 알게 됐고. 무엇보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농민만 참여한 게 아니라, 경상도와 강원도의 농민군까지 참여한 싸움이었고, 게다가 전개 양상도 굉장히 복잡했다. 동학농민‘운동’이라고 이름붙이는 게 어색하고, 동학농민‘전쟁’이라고 보는 게 차라리 어울린다. 근데 그래서 가서 뭘 또 알아봐야 할지는 모르겠다. 일단 가서 볼 것이다.
➁ 천도교 중앙대교당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천도교의 중앙교당으로 종교의식과 일반행사를 하는 곳이다.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의 주관으로 1918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21년에 완공되었다. 교인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공사비로 충당하였는데, 공사비에서 남은 돈을 3·1운동자금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집인데, 철근 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하였다. 또한 앞면에 2층 사무실을 탑 모양의 바로크 풍으로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에는 서울시내 3대 건물의 하나로 꼽혔으며, 교회당의 구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어쩌다 아는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인사동 주변을 돈 적이 있었다. 도심이라 주차공간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돌다 보니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눈에 띄었고, 종교 시설이니 공짜로 주차하게 해주지 않을까 하며 들어가 봤다. 알고 보니 유료주차공간이었나, 아니면 차 댈 곳이 없었든가 해서 바로 나왔다. 그때 얼핏 본 교당은 딱히 민족종교의 교당스럽지는 않았다. 정말 옛날 교회 같았다. 명동성당의 느낌도 있었다. 알아보니 서울시내 3대 건물이 대교당과 명동성당, 총독부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다 비슷비슷한 거 같다.
그런데 그 안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여전히 천도교의 종교의식이 행해지고 있는 곳이라고 하니, 이제야 꽤 생기 있는 답사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천도교 홈페이지를 뒤져 보니 중앙대교당에서 열시 반에 “제153주년 지일기념식”을 한단다. 밤새 알바하고 가야겠지만 뭔가 큰 행사인 거 같으니 봐야겠다.
지일 기념식이 뭔지도 찾아봤다. 홈페이지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포덕 4(1863)년 8월 14일에 해월신사(海月 崔時亨)께서 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의 제2세 교조가 되신 뜻 깊은 날이다. 이날을 ‘지일기념일’로 정하고 기념식을 봉행한다.” 여기서 포덕이라는 말은 포교랑 비슷한 말이고, 수운 최제우가 포덕한지 3년 만에 죽자, 이후에 최시형이 제2대 교주가 됐다. 즉, 지일 기념식은 최시형이 교주가 된 걸 기념하는 행사다. 방학 때 과제 앞당겨서 하는 게 참 잘한 일이다 싶다.
3. 사전계획
웬만하면 공주부터 후딱 갔다 오려고 했는데 그동안 잡아 놓은 일정을 보니, 그렇게 일찍 갔다 올 수가 없었다. 일단 천도교 중앙대교당부터 가야겠다. 8월 14일, 열 시 반까지 인사동 가면 되니까, 적당히 한 아홉 시 반에서 낙성대에 있는 우리 집에서 출발할 것이다. 당일치기하면 되니까 딱히 식비 같은 건 신경 안 써도 될 거고, 힙색에 물만 대충 챙겨서 자전거 타고 갈 것이다. 끝나면 전에 갔던 들깨수제비 집이나 가볼까?
서울경부터미널에서 공주터미널까지 우등버스가 9000원, 학생할인 받으면 7200원이므로 교통비는 왕복 14400원이다. 음료수 같은 거 사먹을 돈 5000원이랑 점심 값 만 원 정도 잡으면, 총 경비는 29400원. 물론 당일치기로. 8월 19일 아침에 고속터미널에서 출발, 공주터미널에서 내려 간단히 점심을 먹고, 약 30분 정도 자전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우금티 전적이 나온다.
4. 갔다 와서
➀ 공주 우금티 전적
8월 5일에 약속을 두 개나 잡았는데, 두 개 다 당일 오전에 취소됐다. 외로움과 좌절감에 빠졌던 것도 잠시, 나에겐 할 일이 있다는 게 기억났다. 어렵게 생긴 기회를 틈타 8월 19일에 계획한 공주행을 앞당기기로 했다. 공주로 내려가기 전, 이태원의 스리 라다 샤마슌더른 힌두교 사원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전답사도 해봤다.
터미널에서 우금티로 향하다가 가장 먼저 만난 유적은 ‘공산성’이었다. 백제 유적지라고 하는데 금강과 산세가 어우러져 꽤나 멋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들어가 볼까 싶었지만 앞에 매표소가 있기에 포기했다. 야속하기도 해라.
아마 익산터미널에서 원불교 익산성지까지 페달을 밟은 시간만큼 걸렸던 것 같다. 우리 할머니 댁이 있는 보령도 그렇지만, 공주 시내에는 자전거도로가 무지 잘 깔려 있다. 근데 약간 벗어나면 한없이 어려운 길이다. 뙤약볕과 험난한 도로에 맞서며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물론 시간은 짧았지만.
나는 우금‘치’라고 알고 갔는데 여기에서는 우금‘티’라고 표기한다. 표지판 하나만 그러면 오타인가보다 하겠는데,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터널의 이름도 우금티 터널이었다. 와서 찾아보니 ‘치(峙)’라는 한자 자체가 일제의 잔재라서 우금티로 명칭 변경을 추진했다고 한다.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가 바라는 대로 성공했나 보다.3 이걸 알고 난 후, 이 보고서 앞에 써놓은 모든 표기도 바꿨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이런 지명보다 교과서일 거 같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바뀌었을까 모르겠다. 아직 문화재청에도 우금‘치’ 전적지로 표기돼 있다.
수풀이 우거져 가려진 안내판에는 우금‘치’ 전적지로 표기돼 있었다. 이 안내판이 가려지도록 수풀을 관리하지 않은 거 보면 이건 아마 정비 사업하면서 뽑힐 거 같다.
우금티터널 바로 옆에 있는 게 우금티 전적지다. 돌아와서 보니 우금티 전적지 전체를 찍은 사진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다. 진짜 텅텅 비었다. 명색이 유적지인데, 주차장과 위령탑, 돌탑이 있는 걸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다. 사람도 없고. 물론 어떤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긴 한 거 같았다. 다른 블로그를 보니 2011년부터 우금티 전적지를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있긴 한가 보다.4 근데 아직 진척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정부는 혁명 따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 위령탑 양쪽으로 수풀이 꽤 우거져서 잘 보기는 힘들었지만 여러 구조물들이 있었다.
위령탑 현판 밑에 말벌집이 있었다. 관리 참 안 하나 보다. 현충원 위령탑에 이런 거 있었으면 당장 난리나지 않았을까?
각종 돌탑의 이름은 그곳에서도 확인하기 힘들었다. 문화재청에서도 그냥 ‘기념 구조물’이라고만 나와 있다. 설마 이름 없는 민중이 세대를 거쳐 쌓아 올린 탑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보기엔 꽤나 정교했다. 위령탑만 덩그러니 있었으면 가뜩이나 초라한 전적지를 보며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이런 돌탑들은 전적지에 왠지 모를 웅장한 느낌을 부여했다.
위령탑 왼편에 이런 감사문이 붙어 있었다. 반대편에는 이런 글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위령탑 아래 석판에 써진 글과 같았다.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전적지를 각종 벌레들과 씨름하며 거닐다가 이런 글귀들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가뜩이나 더워서 짜증난 것도 있었겠지만, 어쩐지 이곳은 박정희가 낄 곳이 아니라고 생각됐다. 역시나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이 다녀갔는지, 5.16 ‘혁명’이라고 표기한 것 같은 글자를 훼손시켜놓았다. 석판에서도 마찬가지로 박정희 대통령 이름을 돌로 찍어놓고, 역시 5.16 ‘혁명’이라고 표기된 곳을 훼손시켜놓았다. 박정희가 아주 곳곳에 자기 흔적을 뿌려 놓았다는 것에 새삼 분노했다.
천도교 교령 최덕신이라는 사람은 누구기에 박정희에게 이런 식의 감사문을 써 바쳤을까? 문득 궁금해져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봤다. 한 기사5를 보고 나니 이 조선 땅의 근대사가 반전에 반전이 넘친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최덕신의 아버지, 최동오는 충칭 임시정부의 법무부장을 지냈던 사람으로, 만주에서 김일성을 가르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한국 전쟁 때 그는 월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덕신 본인은 육사생도 시절 박정희의 스승이었다. 미국 군사고문단장 로버트의 눈에 띈 그는 육사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에 11사단장이 되어 빨치산 소탕을 명받았다. 그리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주범이 되었다. 유격대를 소탕한 이후 그는 사단장 직에서는 물러나지만, 연줄 덕인지 1961년에 박정희 정권의 외무부 장관이 되어 5.16 쿠데타의 정당성을 홍보했다. 이런저런 요직을 맡으면서도 그는 67년부터 천도교 교령을 맡아 천도교의 중흥을 이끌었다. 나아가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천도교 표를 주려고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유신헌법으로 인해 박정희는 종교계의 지원 따위가 필요 없었고, 최덕신은 팽 당했다. 76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이듬해인 77년, 도쿄에서 박정희 정권을 파쇼라고 간주하며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그리고 결국 86년, 월북해서 북에서도 요직을 맡다가 89년에 생을 마감했다. 남조선에 남겨진 그의 자식들은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으며 고된 삶을 살았다.
나는 최덕신을 ‘민족종교’라는 이름을 뻔뻔하게 내걸고 반민족·반민주적 정권과 야합한 천도교 교령쯤으로 생각할 뻔했다. 그렇다고 쿠데타를 옹호한 것까지 내가 옹호할 수 없겠지만, 쉽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왜곡된 이데올로기들, 그 틈에 치이며 갈피를 못 잡는 사람쯤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시절 하층 계급의 사람들보다야 편하게 갈피를 못 잡는 사람이었겠다. 아니, 별로 잡을 생각을 안 해도 되거나 하지 않으려 했을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저 난국의 흔한 기회주의자였을지도.
그러나 분명한 건 민중에 대한 천도교의 배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게 표를 던지도록 했고,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아 천도교를 부흥시켰다. 민중의 잠재된 의식은 이런 천도교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현재 그토록 인기가 없는 것 아닐까?
➁ 천도교 중앙대교당
교당 앞에서 우리를 처음 맞은 건 이 기념물이다. 뒤에는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 사람이 삼십 사십 년 앞 사람을 잡아 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 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1930년 7월 어린이인권운동가 방정환”이라고 적혀 있다. 무려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라고 하니 궁금한 게 생겼다. 어린이 운동이라는 걸 방정환 선생이 처음 시작했을까? 맞는 거 같다. 미국이랑 호주 사는 사람한테 물어보니 거기는 어린이날에 안 쉰단다. 호주 사는 친구는 방정환 선생이 만든 건데 그게 호주에 왜 있겠냐며 날 무식하다고 나무랐다. 천도교는 한국의 독창적인 기념일을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꽤 깊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교당 자리에 개벽사라는 것도 있었나 보다. 입구에 이런 소개가 붙어 있었다. 이렇게 많은 활동을 했는데 지금은 왜 이 모양일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어머니도 같이 따라가고 싶어 해서 같이 갔다. 물론 끝나고 미술관 가고 싶다는 얘기도 했지만.
교당 가기 전에 먼저 보이는 건물은 수운회관이었다. 창시자의 호를 따서 지은 건물인 거 같은데, 규모가 무지막지하다. 아무래도 웬만한 지출은 이 건물 유지비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교당 들어가서 사회운동 많이 하는 친구랑 계속 연락했는데 내가 천도교 교당 들어왔다니까 수운회관 말하는 거냐고 했다. 그 친구는 수운회관이 자기 통일 운동할 때 공간 빌려줬다고 했다. 아마 교단 차원에서 시민단체랑 꽤 잘 연대하고 있는 거 같다. 뭔가 빌딩을 소유하고 시민단체랑 연대한다니 어느 정도 삐딱했던 시선이 바르게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천도교랑 천주교랑 중학생 때 많이 헷갈렸다. 역시 이 건물을 보니 나바위 성당이 생각났다. 입구 위에 첨탑이 있고, 길고 웅장한 건물.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뒤편에는 천도교 서울 교구의 학생회, 청년회, 여성회 등이 쓰는 건물이 마련돼 있었다.
교당의 입구는 이렇게 생겼다. 입구 들어갈 때부터 알 수 있는 건 정말 노인들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들 묵주인지 염주인지를 손에 쥐고 계셨다. 나는 맨 처음에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내 옆에 앉으셨던 할아버지가 자기는 97살이라고 알아서 말씀해주셨다. 따져 보니 3.1 운동 일어날 즈음 태어나셨다는 걸 알았다. 그간 대학 다니면서 내가 스스로를 ‘화석’이라고 칭했는데 정말 해서는 안 될 짓이라고 확 느껴졌다.
사람만 늙은 게 아니었다. 천장이 온통 하얗긴 했는데 중력이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내부를 보니 나바위 성당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은 싹 가셨다. 기둥도 없어서 더 웅장해 보였다. 무엇보다 큰 행사를 하는 날이니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분위기는 건물과 위화감이 꽤 있었다. 어느 잘 나가는 시골 마을의 체육관 같은 데서 하는 마을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의 느낌과 비슷했다. 거의 어르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이 앉는 것도 꽤 특이했는데 왼편에는 남성이, 오른편에는 여성이 주로 앉았다. 그러고 보니 원불교 익산성지의 대각전, 두동 교회에서 보이는 건축 형식도 입구에서 봤던 것 같다. 교당의 입구는 총 셋이었다. 중앙, 좌문, 우문 이렇게. 그렇지만 성별 구분 없이 아무렇게나 들어가는 거 같았다. 입구에서부터 유별해야 한다는 관념은 없어졌지만 역시 남녀칠세부동석 문화는 굳게 남아있는 거 같았다.
행사 시작 10분 전부터 넉넉하게 들어가서 앉아 있는데 어머니가 옆을 보시더니 날 쿡쿡 찌르며 정세균 왔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디스는 그 후로 쉴 틈이 없었다. 다 정치라느니, 합창단 공연 시작하는데 눈치 없이 사람들이랑 앞에서 악수하고 있다느니, 자기 지역구 아니냐느니. 정치 혐오란 참 무섭다. 나도 더민주를 싫어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다 들릴까봐 무서웠다. 우리는 뒤에 앉아 있다가 천도교 관계자가 앞자리 비었으니까 좀 채워달라기에 앞에 가서 앉았는데, 거리가 가까워졌는데도 그러셨다.
“어머니, (저 사람) 들어.”
라고 했는데
“들으라고 하는 거야.”
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쿨함에 다시 한 번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맨 뒤에 앉아 있을 때,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이런 게 놓여 있었다. 뭐 향 같은 거 피우려고 하나 했다. 알고 보니 두 번째 순서인 ‘청수봉전’에 쓸 물이었다. 식을 본격적으로 거행하기에 앞서 맑은 물을 바치는 순서가 있는데, 정성 들여 떠 놓은 맑은 물에 혹여나 먼지가 들어가면 안 되므로 하얀 수건으로 정성스레 덮어 놓았던 것이겠다. 정화수 떠놓고 조왕신을 섬기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다르다면 부뚜막에 있는 사람이 꽤 많다는 것 정도? 청수봉전이라는 순서는 아주 느릿하게 진행됐다. 어떤 여성 동덕6이 사발을 들고 교당 뒤편에서부터 청수를 느린 걸음으로 단상까지 간다. 교령에게 전해준 후 왔던 길을 간다. 교령은 단상 앞에 놓인 작은 상에 청수를 놓고 단상으로 돌아가 식을 계속 진행한다.
식은 개식,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병송, 경전봉독, 천덕송합창, 기념사, 축사, 포상, 천덕송합창, 심고, 폐식의 순으로 진행됐다. 청수봉전을 한 후였나, 하기 전이었나, 아무튼 행사의 사회를 보는 사람이 휴대전화를 끄거나 진동으로 해놓으라고 당부를 했다. 나는 애초에 진동으로 해놓긴 했지만, 더 이상 사진을 찍으면 그들을 존중하지 않는 게 되므로 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심고는 아마 고민의 다른 말인 고심을 거꾸로 한 말이 아닐까 싶었다. 각자 기도하듯이 목을 구부리고 한 1분 정도 침묵한다. 천도교 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마음 심’에 ‘알릴 고’를 써서 한울님에게 마음으로 정성껏 고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청수봉전 때부터 마을 잔치 분위기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내가 이태원 모스크에서 받았던 엄숙한 느낌에 버금간다. 내가 어릴 적 가던 교회 분위기랑은 비교가 안 됐다.
그 다음 주문 3회를 병송하는 시간이 있었다. 불경 외는 거 같았다. 자연스레 군 법당에서 반야심경을 외던 때가 생각났다. 천도교 홈페이지 들어가서 정확히 뭐라 하는지 다시 보긴 했는데 해석이 없었다. 근데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짧아서 미리 알았으면 한 번 외워도 봤을 텐데 하며 약간 아쉬워했다. 그 다음에 해월신사 최시형이 했다는 법설을 어떤 여성 간부가 그대로 읽었다. 찬양 비슷한 거 하고, 교령이 기념사를 했다. 식전에 나눠준 기념식 안내 책자에 나온 그대로 읽었다. 사회학과 노중기 교수 수업에서 발제할 때 그랬다. 노중기 교수 팬이기도 하고 수업도 대체로 잘 들었지만 그때 별로 좋지 않았던 게 발표자와 발표 안 하는 학생들 간의 의사소통이 어렵다. 또한 수업에 생명력이 떨어진다고 느껴졌다. 기념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형식적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폐쇄적인 언어”를 쓴다고 비판했다. 어머니는 가뜩이나 지금 다니는 교회도 목사가 라틴어 쓰면서 유식한 척해서 꼴 보기 싫다고 했다. 라틴어가 한자로 바뀌었을 뿐, 기념식에서 운위하는 언어는 시체와 동떨어져 있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천도교가 왜 안 크는지 알 거 같았다.
그 다음 정세균이 나와서 축사를 했다. 그나마 숨통 트였다. 동덕들을 보면서 축사를 해줬다. 역시나 물질문명이 생활세계를 압도하는 와중이니 천도교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종엽 교수가 웬만한 정치인들은 개인적으로 만나 보면 금방 반할 정도로 매력이라는 걸 갖고 있다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듯했다. 더군다나 그 재미없는 교령의 기념사 다음이었으니 대비 효과가 엄청났다. 그리고 천도교에서 활동을 열심히 한 교인들에게 포상을 해주는 순서가 있었다. 손녀로 보이는 사람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탄 채로 상을 받는 노인도 있었고, 다리를 저는 노인도 있었는데 다 노인이었다. 휠체어에 탄 노인의 경우에는 교령이 직접 단상을 내려가서 시상을 하는 장면도 있었다. 특이한 게 기념식 안내 책자를 나눠주면서 동시에 포상자 공적 편람이라는 책자도 나눠줬다. 거기에 상장 내용도 다 적혀 있다. 교단에 뭘 봉헌했는지도 상세하게 적혀 있다. 굉장히 투명해 보였다. 그 다음 또 다 같이 찬송가 같은 거 부르고, 심고하고 식을 닫았다.
그 후, ‘모시는 사람들’이라는 극단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한 명의 피아노 연주자와 세 명의 가수가 나와서 한울님과 신사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나마 요새 행사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회자가 식은 끝났지만 자리를 지켜달라고 부탁했는데, 눈치가 없는지, 공사가 그렇게 다망하신지 정세균이 자리를 떴다. 뜨는 것도 그냥 뜰 순 없으니 천도교 인사들과 인사 몇 번 나누더니 나갔다. 이미 준비하고 있던 공연 팀이 꽤 민망했으리라는 생각에 눈살이 약간 찌푸려졌다.
여의도 성모 병원 가서 천주교 신문을 꽤 재밌게 읽은 적이 있었는데, 천도교도 신문을 내고 있었다. 게다가 1면의 칼럼에서 풍기는 기운이 엄청 강했다. 연원회라는 조직의 간사를 맡고 있는 김응조라는 분이 쓴 건데, 거의 종교학적인 관점에서 종단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구태의연한 포덕 방법을 꼬집으며, 포덕 전문 연구소라는 새로운 기구를 만들면 좋지 않겠냐고 제안하고 있었다. 신문을 찬찬히 살펴보니 교령이 선출된 지 얼마 안 됐다. 첫 종무회의를 열었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런데 종단이 작아서 그런지 가톨릭 신문이 어디 도민 신문 같은 느낌을 풍긴다면, 천도교 신문은 군민 신문 정도의 분위기다. 활동도 되게 소박하고, 그나마 거창하게 보도하는 기사는 동학혁명기념사업추진단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책자는 거의 뭐 근현대사 교과서 보는 것 같았다. 사실 동학의 기본 교리들은 고등학교에서 근현대사 배울 때, 밑줄 쳐 가면서 외웠다. 시천주라든지, 사인여천이라든지, 인내천이라든지. 그걸 포함해서 삼대 교주들의 위업도 밑줄 쳐 가면서 외우고. 개벽 잡지 같은 건 국어 교과서랑 근현대사 교과서 모두에서 다뤘던 것 같다. 읽다 보니 이런 걸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현대사를 배우던 옛날을 소환시켜서 지금의 청년들을 후리려는 생각은 아닐까? 그렇다면 엄청 기발하긴 하지만 썩 좋은 포덕 방법은 아니겠다.
5. 아쉬움
익산을 다녀오고 나서 절약하며 여행을 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는데 어려웠다. 공주로 가는 버스는 왠지 모르겠지만 학생 할인이 안 된다고 했다. 올라오는 버스도 마찬가지였다. 공주시는 스스로를 ‘흥미진진’ 공주라며 관광 사업에 꽤나 신경을 쓰려는 모양새 같던데, 이런 사소한 거는 신경 안 쓴다. 덕분에 교통비로 18000원 썼다. 워낙 날이 더워서 이태원을 답사하며 음료를 많이 마셨다. 땀도 많이 빼서 밥값도 냉면이랑 만두 먹고 만 천 원 썼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따로 절약할 일은 없으니까, 또 사전계획 단계에서 꽤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운 덕에 이만큼 쓴 거라고 만족했다.
지일 기념식에서는 뒤에 앉아 있다가 앞에 앉았다. 그런데 뒤에 앉아 있을 때, 옆에 앉은 어르신이 상의 지퍼를 내리기 힘들어 하시기에 내려드리기도 하고, 그러면서 말도 좀 주고받았다. 나한테 부탁하시면서 자기가 아흔 일곱이라고 얘기해주시기도 했고. 계속 거기 앉아 있으면 식 다 끝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면담해보는 거였다. 그런데 천도교 관계자가 앞으로 나오랄 때, 손님 주제에 괜히 비싸게 굴기 싫어서 앞으로 앉고 나니 그 할아버지의 옆을 떠난 게 못내 아쉬웠다. 더군다나 아흔 일곱 살 노인과 대화해보는 것도 흔치 않은 기회고. 무엇보다 내가 말 주변이 달려서 그 할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볼까 망설이다가 그냥 어머니와 함께 수제비 먹으러 갔다.
인터뷰를 안 따니 궁금증은 마구 생기는데 다 못 풀었다. 교령이든 정세균이든 앞에 나와서 “모시고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로 서두를 연다. 뭘 모신다는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는 교주라고 불렀는데 왜 지금 이정희 교령은 ‘교령’이라고 부르는지도 궁금했다. 또 그 할아버지를 면담하면 만약에 나중에 ‘천도교와 한국 근대’ 같은 보고서 쓸 때 괜찮은 정보들을 얻어낼 수 있을 거 같았다. 할아버지는 언제부터 천도교였고, 어떻게 천도교인이 되셨는지, 동학혁명 당시 진짜 투쟁하던 분은 만나봤는지 등등. 질문할 걸 정리해놓진 않았지만 진짜 값지면서도 숱한 질문들을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못해서 정말 아쉬웠다. 진짜 다음부터는 말 좀 걸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