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명료한 사관과 체계적인 히스토리오그라피의 방법론을 가지고 서술한 사가로서 인류사에 가장 앞선 인물로 꼽히는 사마천(司馬遷)은 그가 가장 뛰어난 필치로 공을 들인 열전(列傳) 가운데 「자객열전」(刺客列傳)을 26번째로 삽입시켰다. 그 「자객열전」은 공자보다 2세기를 앞선 관중(管仲)의 시대, 약소국이었던 노(魯)나라의 장수 조말(曹沫)의 이야기로부터 그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다. 조말은 그 한 많은 여인, 애강(哀姜)의 남편인 노나라 장공(莊公)을 섬겼는데, 당대의 대국 제(齊)나라와 3번이나 싸워 모두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장공은 하는 수 없이 수읍(遂色)의 땅을 제나라에 바치고 화친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패장(敗將)인 조말은 계속 장수로 거느렸다.
패웅(覇雄)인 제(齊) 환공(桓公)은 노 장공과 가(柯)의 땅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을 것을 허락하였다. 환공과 장공이 단상에서 맹약을 맺으려 하고 있을 때였다. 요새 말로 한다면 항복문서에 조인을 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조말은 날쌔게 단상에 올라가 비수를 제 환공의 목에 대고 협박한다. 환공은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子將何欲?)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합니다. 그런데 대국인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범하는 정도가 지나칩니다. 지금 제나라의 국경은 노나라 깊숙이 파고 들어와서 이미 국도(國都)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임금께서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齊强魯弱, 而大國侵魯亦甚矣。今魯城壞卽壓齊境, 君其圖之。)
그러면서 조말은 정복당한 노나라의 영토를 즉각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하는 수 없이 제 환공은 노나라에게서 빼앗은 모든 땅을 돌려줄 것을 수락한다. 이러한 수락이 제 환공의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조말은 환공의 목에 대었던 비수를 던져버리고 단에서 내려와 북향을 하고 평화롭게 신하의 예를 다하였다.
자아! 이런 재미있는 상황을 한번 현실적으로 점검해보자! 제 환공은 천하무적의 패자이다. 그런데 그에게 패배당한 소국의 장수가 감히 그에게 칼을 들이대었고, 정복당한 땅의 반환을, 그 칼이라는 폭력의 순간적 위력을 빌어 잠정적으로 구두약속을 얻어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자, 조말은 칼을 던지고 무기력한 평민으로 돌아가 신하의 예를 다한다. 도무지 어불성설이다. 제 환공은 과연 칼이라는 폭력에 순간적으로 제압 당해 하는 수 없이 내뱉은 약속을 지킬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천하의 무적인 그가 맹약의 법도를 어기고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댄 약소국의 적장을 그냥 둘 리가 있겠는가? 조말은 무슨 심보에서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을 벌리고, 또 칼을 버리고 태연하게 신하의 예를 다하고 앉아 있는 것일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당장 그의 목에 내려칠 길로틴의 칼날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고 앉아있는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제 환공은 약속을 거기고 조말의 목을 치려한다. 이때였다. 제 환공을 보좌하던 명재상 관중이 이를 제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됩니다.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대국의 체통을 잃고 한번 뱉은 말을 제멋대로 저버린다면, 제후들에게 신망이 떨어지게 될 것은 뻔한 일이고, 천하 각국의 지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약속대로 그 땅을 돌려주시는 것이 상책입니다."(不可。夫貪小利而自快, 棄信於諸侯, 失天下之援, 不如與之。)
그래서 환공은 마침내 노나라에서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었을 뿐 아니라, 적장인 조말에게도 어떠한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조말은 세 번 싸움에서 잃었던 땅을 모두 되찾았고 그의 명예도 회복하였다. 조말이 패장의 참패를 회복할 수 있었던 그 비결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 비결은 바로 이 "자"(刺)라는 한 글자에 숨어있다. 자(刺)란 무엇인가? 이 자(刺)를 오늘 말로 환원하면 바로 테러리즘(terrorism)이라는 뜻이 된다.
조말은 사마천이라는 사가의 손을 빌어 인류사에 등장한 최초의 테러리스트(terrorist)였다. 그 뒤에 나오는, 조양자(趙襄子)를 죽이려한 진(晋)나라 예양(豫讓)의 이야기나, 진시황을 시해하려한 위(衛)나라 사람 형가(荊軻)의 이야기가 모두 이 조말의 이야기를 성립시키고 있는 논리적 구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테러리즘은 인류사에서 근절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분명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정언명령이다. 그러나 여기 우리는 또 하나의 매우 어려운 명제를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테러리즘은 도덕성이 있는가?
이 어려운 질문에 희대의 사가 사마천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테러리즘에도 도덕성이 있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인류의 예언자며 시대를 앞선 희대의 사가 사마천의 명언이다.
테러리즘은 근절되어야 마땅하다.
(Terrorism must be eradicated.)
미국은 보복해서는 아니 된다.
(America should not retaliate.)
이 두 명제는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 두 명제는 상호보완적으로 동시에 실현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세의 정칙이다. 이것이 사마천이 말하는 역사다.
지금 부쉬에게는 관중(管仲)이 없다. 아니, 부쉬에게는 관중의 말을 알아들을 줄 아는 제 환공의 도량이 없다. 아니, 이것은 분명 부쉬의 개인의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20세기 인류사를 리드해온 방식에 대한 업보의 필요적 구조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인류사에서 테러리즘이 없어 본 적은 없다. 테러는 오늘 내일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테러리즘을 선과 악의 이원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는다. 사마천이 말하는 테러리즘에는 약자의 명분과 강자의 아량이 동시에 요구되고 있다. 사마천이 말하는 테러리스트의 삶의 원칙은 다음 한 마디로 축약되고 있다.
士爲知己者死, 女爲說己者容。
사내는 자기를 진정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죽을 줄 알고,
여자는 자기를 진정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헌신할 줄 안다.
이것은 자객 예양이 자기를 인정해준 진(晋)나라의 자백(智伯)의 죽음을 당해, 피신하여 산 속으로 도망가면서 외치는 절규의 한 대목이다.
Being killed for Allah's cause is a great honor achieved by only those who are the lite of the nation.
We love this kind of death for Allah's cause as much as you like to live. We have nothing to fear for. It is something we wish for.
알라의 명분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은 나라의 의식있는 엘리트만이 획득할 수 있는 위대한 영예다.
우리는 삶을 원하는 것만큼 알라의 명분을 위하여 죽는 것을 사랑한다. 우리에게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1997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과연 테러리즘에 도덕성이 전무하다고 단언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김구(金九)와 같은 테러리스트를 애국자로 존경할 수 있으며, 어떻게 메이지유신의 기업(基業)을 완성하고 동경대학(東京大學)이라는 위대한 교육기관을 탄생시킨 이토오 히로부미와 같은 일본근대사의 거목을 쏘아죽인 안중근이나, 홍구(虹口)공원에 폭탄을 던지고 장렬하게 순국한 윤봉길을 의사(義士)로 추앙할 수 있겠는가?
조양자(趙養子)는 자기에게 항거한 지백(智伯)을 쳤다. 그리고 끝까지 자기를 괴롭혔던 지백이 미워,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사용하였다.(漆其頭以爲飮器。) 그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지백에게 충성을 약속했던 예양은 복수의 칼날을 계속 간다. 그리고 성명을 바꾸고 죄수로 변장하여 조양자의 궁에 들어가 뒷간의 벽을 발랐는데, 조양자가 똥누러간 사이에 그를 찔러 죽이려다 사전에 발각되고 만다. 그러나 조양자는 지백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예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사람은 의로운 자다. 단지 내가 조심하여 피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지백이 망하고 후사조차 없는데도 그의 신하된 자로서 원수를 갚겠다고 저렇게 자기희생을 서슴치 아니하니 이 자야말로 천하의 현인이로다."(彼義人也, 吾謹避之耳。且智伯亡無後, 而其臣欲爲報仇, 此天下之賢人也。)
그리고 예양을 풀어주는 관용을 베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양은 제2차의 암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조양자는 그가 지나가는 길 다리밑에 숨어있는 예양을 타고 있던 말이 섬칫하는 바람에 발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아! 예자여! 그대가 지백을 위해 충절을 다하였다는 명예는 이미 이루어졌고, 과인이 그대를 용서함도 이미 충분하다. 이제 그대는 각오하라!"(嗟乎豫子! 子之爲智伯, 名旣成矣, 而寡人赦子, 亦已足矣。子其自爲計, 寡人不復釋子!)
이에 예양은 울며 말한다.
"현명한 군주는 남의 아름다운 이름을 덮어 가리지 아니하고, 충신은 의로운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죽을 의무가 있습니다. 지난번 군왕께서 이미 신을 관대히 용서하시어, 천하에 그 어짐을 칭송치 아니하는 자가 없습니다. 오늘의 일로 말하자면, 신은 죽음을 당해야 마땅하오나, 원컨대 신이 군왕의 옷을 얻어 그것을 칼로 쳐서, 그로써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게 해주신다면,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臣聞明主不掩人之美, 而忠臣有死名之義。前君已寬赦臣, 天下莫不稱君之賢。今日之事, 臣固伏誅, 然願請君之依而擊之, 焉以致報之意, 則雖死不恨。)
이에 조양자는 옷을 벗어 주었다. 예양은 칼을 뽑아들고 세 번을 펄쩍 뛰면서 그 옷을 베었다. 그리고 "내 비로소 지하에 잠든 지백에게 보답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이내 칼에 엎어져 자결하였다. 그가 죽던 날, 조나라의 지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우리는 뉴욕의 시민들에게 트윈빌딩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는 두 조종사, 모하메드 앗타(Mohamed Atta)와 마르완 알 쉐히(Marwan Al-Shehhi)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량을 보여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너무도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과 그 충격의 폭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대국이 조양자의 아량을 배우지 못한다면, 결국 앗타와 알쉐히의 테러리즘을 더욱더 조장시키고 영웅시하게 받드는 아이러니칼한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한 것이요, 역사의 정칙이다. 결국 어떠한 존재가 테러리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 존재가 강대(强大)하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유래되는 것이다. 약소한 존재는 근본적으로 테러리즘의 대상이 되질 않는다. 그러므로 강대한 자는 강대한 자의 道를 터득치 않으면 안된다. 老子는 말한다.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61장)
대국은 아랫물이다. 그래서 천하의 모든 윗물이 흘러들어 오는 곳이며,
천하의 모든 숫컷이 꼬여드는 암컷이다.
上流에는 강대한 것이 있을 수 없다. 가늘고 약한 것만이 있을 수 있다. 모든 강대한 것은 반드시 下流에 위치한다. 下流의 특징은 모든 上流들 아래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下流요, 下流이기에 비로소 大國이 될 수 있는 것이다.
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61장)
대국은 반드시 소국앞에 자기를 낮추어야만 그 소국을 취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自然)의 법칙이요, 역사의 철칙이요, 도덕의 준칙이다. 이것을 어기면 대국은 대국됨의 도를 저버리는 것이다. 미국이 강대하다는 사실만으로 영원히 그 강대함이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큰나라는 중국도 있고 브라질도 있고 카나다도 있고, 오스트랄리아도 있다. 광막한 시베리아의 러시아도 있다. 미국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은 오로지 약소국들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즉 실체론적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국제관계론의 역학에 보다 본질적인 통찰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미국은 단순한 강대국이 아니다. 미국이 오늘날까지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 강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가 구현하고자 하는 모든 이상적 가치를 앞서 구현하여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같은 천안 잿배기의 코흘리개도 어려서부터 미국을 동경하였고 그 유학의 꿈을 달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어김없이 나의 이상과 꿈을 교육시켜 주었던 것이다. 트윈빌딩을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칼하다. 자유의 여신상이 구현하고자 하는 자유는 미국만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며, 영원한 미래적 가치의 표상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트윈빌딩이 폭파되었다는 사실은 결국 20세기를 리드해온 미국의 자만감이 지나치게 패권주의에 흐르고, 지나치게 일방주의적 편협한 이권주의에 경도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의 입증이라는 가혹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는 없다.
「자객열전」에는 韓나라의 嚴仲子의 원수를 갚는 섭정(攝政)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 때가 무르익어 섭정이 원수를 갚으러 갈 때 엄중자가 도움이 될 만한 수레와 말, 그리고 장사들을 보태주려고 한다. 그러니까 섭정은 이 모든 보좌수단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결행한다. 그리고 원수갚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죽이고 난 후 자기 얼굴가죽을 자기가 벗겨내고 죽는다. 이 섭정의 이야기는 테러리즘의 매우 중요한 속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성공하는 모든 테러는 조직을 최소화시키며, 동원되는 수단을 최소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얼굴을 반드시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이번의 끔찍한 테러의 놀라운 적중률의 결과는 바로 이렇게 최소한의 조직과 수단으로 결행되었다는 속성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이번 테러리즘이 방대한 조직의 일사불란한 명령체계에 의하여 감행된 사태라고는 판단키가 어렵다. 실패와 누설의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 자체적으로 완결되는 모종의 X그룹의 독립세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면, 과연 이 X그룹을 누가 어떻게 움직인 것인가 하는 시나리오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복잡한 관계망의 소산일 수도 있다. 미국은 자체내의 복잡한 관계에 의하여 자신들이 선택했고, 누구보다도 열렬한 민중의 지지를 얻은 위대한 지도자 죤 에프 케네디를 가차없이 암살해버리는 음모를 감행했다. 죤 에프 케네디가 미국 자체 내의 파우어 구도 음모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미의회 보고서가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 해온 미국이 전 인류에게 테러리즘에 대한 순결한 도덕적 대가를 호소해본들, 그 호소가 과연 얼마나 많은 이 지구상의 인구의 심금을 울릴 것인가?
여기 우리는 테러리즘의 발생원인에 대한 시비를 논할 여유가 없다. 우리의 급선무는 앞으로 다가올 테러리즘을 막는 일이다. 앞으로 더 이상 이러한 테러리즘의 비극이 인류사에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일차적 판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미국은 보복해서는 아니 된다."(America should not retaliate.)
"탈레반 정권에게 퍼붓는 포탄값으로 경제지원을"이라고 외치는 영국 BBC 방송의 지적은 과격하게 정직하다(『한겨레신문』 2001년 9월 18일자 제6면). 탈레반 정권은 결코 국제관계에 개입하여 영향을 과시하려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국제관계로부터 이탈하여 자기들만의 종교적 소꼽장난을 벌리며 오손도손 살고 싶어하는 소박한 과격주의자들 집단일 뿐이다. 탈레반을 정치적 힘의 역학 속에서 바라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것은 단지 문화적 이해의 대상일 뿐이다.
요번 테러의 가장 근원적 성격은 아주 소규모의 독립된 몇 사람의 집단이 단순한 몇 개의 소도(小刀)로써 3차 대전에 버금가는 대전쟁을 수행했다는 상상키 어려운 사실에 있다. 이것은 21세기의 관계양상의 상징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 그 자체의 파괴력에 의하여 얼마든지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끔찍한 현실의 고발인 것이다. 즉 요번 사태의 전개는 단순한 아이디어의 전개일 뿐이며, 물리적 수단이나 조직의 동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21세기 인터넷 시대는 바로 이러한 시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도 이제는 군대조직 간의 지역적 대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월남전에서 미국이 참패의 고배를 마셨다면 이미 이러한 전쟁의 성격에 대해 깊은 각성이 있어야 한다. 이제 전쟁 그 자체가 무형화되고 개별화되며 산발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력의 과시로써 전쟁과 테러를 종식시킬 수는 없다.
20세기 미국의 강성은 힛틀러의 테러리즘이 조장시켜준 것일 수도 있다는 나의 발언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힛틀러의 나치테러가 유럽의 위대한 지성들을 미국이라는 자유의 땅으로 결집시켜 주었던 것이다. 만약 앞으로의 테러가 군사시설이나 경제시설 아닌 문화시설 쪽으로 눈을 돌린다면, 미국의 문화는 곧 황폐해질 가능성이 있다. 링컨터넬에서 검색을 시행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베레모가 지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정말 아닌 것이다. 미국은 대국이기에 겸손해야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정 인류의 양심들이 미국이라는 역사의 횃불에 바라는 것이다.
나는 트윈빌딩이 폭파되기 전까지 트윈빌딩 밑에서 살았다. 프랑크 게리의 건축을 구겐하임에서 보고 감명을 받고, 그날 밤 나는 트윈빌딩 사이에 누워 그 게리가 저주했던 미니말리즘의 극상의 작품을 흠상했다. 트윈빌딩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단순함의 위대함을 나는 만끽하고 또 만끽했다.
시골길에 짓궂은 아이들이 풀을 묶어 놓았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서서히 걸어가고 있었다면 별 저항없이 결초는 풀려버리고 만다. 그런데 누군가 막 급히 뛰어가고 있었다면 그 힘없는 결초에 여지없이 나둥그러지고 만다.
비행기는 747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약 400t의 무게가 된다. 그런데 그중 승객과 짐의 무게는 10분의 1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400t의 무게의 반은 그 동체 자체의 무게요, 반은 연료의 무게다. 한번 비행하는 데 연료가 큰 드럼통으로 약 2000개가 들어간다. 그리고 비행기연료는 옥탄가는 높지만 휘발유보다는 휘발성이 약한 경유에 가까운 성질의 것이다. 그 연료는 날개와 날개에 연접된 동체 하단에 엄청나게 저장되어 있다. 이 거대한 연료통이 시속 800Km로 어떤 물체에 부닥쳤을 때 그 에너지는 가공할 만한 것이다.
트윈빌딩은 1962년 3월 공식적으로 포트 오토리티(Port Authority)의 프로젝트로 등장했다. 그리고 그것의 설계를 맡은 사람은 미쉬간 베이스의 일본계 건축가 야마사기 미노루(Yamasaki Minoru)였다. 야마사기는 일본의 전통적 내진 건축법이 그러하듯이 중간에 거대한 철골을 주축으로 하고 제일 가장자리 사각의 철골 자체를 강하게 엮어 나갔다. 이 건물은 기다란 네모 튜브 같이 속이 텅 빈 구조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중간에 잔 기둥들을 없앨 수 있었고, 공간의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강철격자의 화엄적 결구였던 것이다. 이 결구 속에 거대한 폭발과 함께 공동이 생겼고, 그 공동 속으로 호리존탈 빔들이 함몰되면서 그와 결속된 버티칼 빔들이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그 공동은 철골 화엄구조 속의 블랙홀이었다.
나는 테러리즘이 근절되어야 한다는 명제와 함께 미국은 보복해서는 아니 된다는 제 2의 명제를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제 3의 명제는 이것이다. "인생이란 참으로 허무한 것이다."(Life is ultimately meaningless.)
내가 그 며칠 전 트윈빌딩 사이에 드러누워 그 미니말리즘 예술의 직선을 흠상하고 있었을 때 폭발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세계무역센타 제 1빌딩의 107층에는 윈도우스 온 더 월드(Windows on the World)라는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다. 그곳에서 쉐프 미카엘 로모나코가 정교하게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바라보는 허드슨 강 어구의 장관은 정말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외경스러운 것이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뉴져지의 해안선을 따라가면서 한가롭게 나부끼는 요트들의 흰 돛을 바라보는 느낌은 너무도 한가로운 것이다. 그날 내가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면? 더 이상의 불경스러운 묘사는 삼가고 싶다. 노암 춈스키의 말대로 테러리즘의 일차적 희생자는 열심히 일하는 무고한 사람들이다: 수위들, 비서들, 소방관들……(The primary victims, as usual, were working people: janitors, secretaries, fireman, etc.) 나는 이 순간 우리 모두 그 희생자들이 우리자신일 수 있다는 생각 속에 모든 것을 묵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영혼들에게 우리 인류의 참혹한 죄업의 무릎을 꿇고 비는 수밖에 없다.
모든 언어가 무기력한 이 참혹한 현실 앞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전쟁 아닌 평화를 시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교육시켜 준 미국의 양식은 아직도 굳건히 살아 있다고 믿고 싶다.
<追 記>
요번 트윈·펜타곤 폭파사건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두 가지 점만을 여기 덧붙이고자 한다. 제1의 논제는 한국의 언론의 대응이다. 트윈폭파사건이후 이 세계를 실망시킨 것은 부쉬의 언변의 천박함이고, 또 무엇보다도 천편일률적인, 자기 반성이 전무한 미국언론의 유치무쌍한 강변과 광변이었다. 이것은 물론 사태의 심각성과 그 충격의 감정적 반향의 관성체계를 고려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본능적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론은 최소한 어느 경우에도, 어떠한 시급한 상황에도, 전체를 생각해야하며, 역사를 리드하는 지도적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전관(全觀)하며 조망하는 거리를 지녀야 한다. 언론은 본능일 수 없다.
이에 비한다면, 한국언론은 대체적으로 균형있는 거리감각을 가지고 사태를 정확히 조망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한겨례신문에 연속적으로 등재된 논설들은 모두 인류보편사적인 공평한 감각과 인류애와 평화의 염원을 일깨워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논리의 전개도 매우 정연했다. 나는 한국언론의 성숙한 모습과 희망있는 비젼을 한겨례신문과 경향신문, 두 신문사의 최근 동향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의 구구한 논설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계속 분투해주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사태가 자국에서 발생했다면 한국의 언론이 과연 그러한 즉각적인 거리감과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겠냐 하는 것이다. 물론 유지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인류애의 보편주의를 떠난 모든 애국주의는 저급한 테러리즘의 변형일 뿐이다. 나는 이러한 사태를 통해 한국언론이 보편주의에 대한 감각을 본질적으로 학습해가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나의 두 번째의 논제는 미국사회의 철학의 빈곤성이다. 제1의 논제가 미국이라는 자유사회에 실제로 언론의 자유가 부재하다는 현상의 고발이라고 한다면, 나의 제2의 논제는 더 근원적인 문제, 즉 사상 그 자체의 빈곤성에 관한 것이다. 미국에는 현재 철학이 없고 예술만 있다. 즉 맨하탄에서 활개를 치는 사람은 예술가들이요 사상가들이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들이란 근원적으로 인간의 현실적 삶을 엔터테인하는 사람들이요, 이벤트성의 유통구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며, 인류역사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감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다. 역사적 현상을 후속적으로 진단하거나 해석하거나 심미적으로 표현할 뿐, 그 역사에 대한 강력한 가치판단을 가지고 그 역사를 리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역사를 리드한다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망념이요 독단이다.
미국에는 물론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학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학자들이 미국의 삶이 편하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문화환경이 그들에게 학문을 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기 때문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미국이라는 역사에 대한 책임을 기피한다. 미국이라는 토양은 뿌리를 거부하는데 그 근원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사상은 있으되 사상가가 없다. 가(家)라는 구현체를 얻지 못한 추상적 논리체계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양철학은 어떤 추상적 논리의 감옥에 갇혀버린 시체와도 같은 것이다.
희랍철학은 근원적으로 전쟁철학이다. 희랍철학으로부터 출발한 서양철학이 근원적으로 오늘과 같은 사태에 대해 심도 있는 발언을 하지 못하는 현상은 결국 실체적 사유의 구극적 한계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평화의 전통을 근원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언론은 매우 편파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편파적 언론이 그 진가를 테스트받는 것은 오로지 역사의 실천력 속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다. 불교는 기나긴 인류의 역사를 통해 대규모 전쟁의 주체가 되어본 적이 없다. 불교는 종교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스람도 유대교전통의 한 변형이다. 그리고 기독교도 유대교의 지류적인 변형이다. 우리 인류는 이 헤브라이즘 전통의 실체주의·초월주의가 저지러온 죄악을 보다 깊게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