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용어를 설명하려면 또 다른 교학 용어를 쓸 수 밖에 없지만 더 난해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풀어서 써보겠습니다.
중관학적으로 연기법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인과의 연기, 상호의존의 상대적 연기, 가립의 연기 입니다.
1. 인과의 연기
모든 불교 학파에서 인정하는 인과의 연기입니다. 따로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인과의 연기 때문에 타종교의 절대신인 창조주는 불교에서 인정되지 않습니다. 창조주는 세상만물의 제1원인으로, 그 자체의 원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 상호의존의 상대적 연기
서로 의지하는 연기법으로, 나와 너, 큰 것과 작은 것 등이 예시입니다. 나의 손과 나처럼 부분과 전체의 예시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윤회와 열반, 승의제(공성)와 세속제의 이러한 관계 때문에 중관에선 열반과 공성도 연기법입니다. 소승에서 열반이 연기법이 아니고, 유식에서 원성실성(공성)이 연기법이 아닙니다.
3. 가립의 연기
가립의 연기를 성립시키는 세 가지 조건이 있는데, ① 원인/조건이 모여 있고 ② 이름이 붙어져야 하고 ③ 생각으로 인식돼야 합니다. 조건성립과 해체를 말하는 인과의 연기 이해만으론 교학 용어인 가립의 연기를 이해하는데 불충분하다는 건 2번과 3번 때문입니다. 2번과 3번을 좀 더 설명해보겠습니다.
2번과 3번의 이름과 생각에 의해 존재하는 것을 명언(名言)으로 존재한다고 하는데, 명언으로 있다는 것의 기준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➊ 이름과 생각의 대상, 즉 명언의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 조건은 일반적으로 다 갖춥니다. ➋ 세속적으로 올바른 생각에 의해 부정되면 안 됩니다. 소는 뿔이 있으니까 소뿔은 부정할 수 없고, 토끼는 뿔이 없으니까 토끼뿔은 부정할 수 있습니다. ➌ 명언으로 존재한다면 자성이 있고ㆍ없고를 따져보는 추론에 의해 자성이 있다는 결론이 나오면 안 됩니다.
➌이 중요한데, 이것에 위배되는 예시가 '범부의 세속적 비착란식의 대상'입니다. 보리도차제론 위빠사나 파트에서 자성, 무자성 얘기나오면 많은 부분이 자립논증 중관을 비판하는 것과 관련 있는데요, 청변 논사의 자립 중관에선 승의적으론 모든 게 무자성이지만 세속적으론 자성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청변 논사가 명시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고, 귀류 중관 입장에서 자립 중관의 주장과 논거를 따져보니 결과론적으로 너네는 세속적으론 자성이 있다고 말하는 셈이야!라고 비판하는 겁니다.
청변은 전도되지도 않고, 착란되지도 않은 범부의 근식이 세속적 사물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일시적인 오류(=전도됨, 안근의 예로 들면 황달이나 비문증 등)의 영향을 받지 않는 어떤 근식(根識)은 거기에 현현하는 대상에 대해 세속적으로는 착란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여기에는 실유(實有)로 나타나는 모습도 포함됩니다.
귀류 중관은 그건 틀렸고 범부는 전도되진 않았지만(=일시적인 오류는 없지만) 착란된 근식으로 대상을 대한다는 주장입니다. 무자성은 승의와 세속 관계 없이 자성 없다면 없는 거지, 승의적으론 없고 세속적으론 있고 이런 구분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청변의 주장이 왜 세속적으론 자성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셈이냐면요, 공성을 체득하지 못한 범부에게 현현하는 대상들이 자성이 있는 것처럼(=실유實有인 것처럼) 나타나는데, 만약 인식하는 주체 쪽인 근식에 아무런 오류나 착란이 없다면 객체 쪽인 세속적 대상에 자성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귀류 중관처럼 착란식을 주장한다면, 세속적 대상에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쪽인 범부의 마음이 대상에 자성이 있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이제 청변의 세속적으론 자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왜 틀린 건지 밝혀야 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저번에 썼던 중론의 눈이 눈을 볼 수 없다 얘기입니다.
자성은 조건이 필요 없는 독립적인 것, 그러한 성질이나 성품을 말합니다. 만약 눈이 자성의 대상을 볼 수 있거나 눈이 자성적 측면에서 성립한다면, 원인이나 조건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눈이 자기 자신인 눈도 볼 수 있고 대상도 볼 수 있거나, 혹은 눈이 눈도 못 보고 대상도 볼 수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눈이 눈은 못 보고 대상은 볼 수 있다는 건 어떠한 원인이나 조건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자성적 측면은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가립의 연기 설명입니다.
첫댓글
예전 젊었을때 불교에 관심있던 친구들과...
특히 스님 이었던 친구와 법담을 할때 대부분 다루었던 문제들 이네요
인간의 사고 유형,경향성이라 할까?...하는 부분들이...
치밀하게 사고하고 밀어부치다 보면 결국 비슷하게 겹쳐지면서 만나지는 경우가 많지요
가립의 연기 3가지와 명언으로 존재하는 3가지 기준은...
앞 2가지 부분에서는 겹치는거 같네요
첫번째 명언의 대상으로서 원인/조건이 모여있는 명언의 의지처
두번째 합리적으로 통용될수 있는 이름을 붙히는 것
아이고 집사람이 간식(?) 먹으라고 빨리 오라고 재촉 하네요
집 사람이 귀가하면서 맛난 족발과 막걸리 사왔다고...ㅎㅎ
조금 더 적을게 있었는데...ㅠ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논점에 맞춰 적지 않는 경우, 그냥 소개하는 것에 그쳐야 하고 주장을 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요. 자신의 주장을 하거나 비판을 하려면, 논점에 맞춰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정리해 적어야 하는 겁니다.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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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적은 내용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면, 다음의 지적과 관련해 분명한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연기의 모습을요. 일단 인과와 상호의존으로 구별했는데요. 원인과 결과는 상호의존이 아닙니까? 또한 의타기는 상호의존에 위치해야 할텐데, 인과는 의타기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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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는 위 본글을 읽는 이들을 위한 참조 사항을 적습니다.
열반과 연기의 논점은요. 딱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열반이 연기에 따르는가 아닌가? 원성실성은 의타기성과 다른 것인가? 이거는 섣불리 단정해 말할 수 없습니다. 워낙 베리에이션이 많고 많을 수 있어서요. 뭐...개론서에서야, 일단 개념의 숙지와 이해의 편의를 위해 단정이 아닌 다르다는 취지 정도로 구별해줄 수는 있겠습니다.
3.번의 논점과 그런 형식은요. 불교 역사에서 그냥 말쟁이로 변신해서 말싸움할 때 곧잘 등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