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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 세 가지 연기법
법무아 추천 0 조회 105 25.09.15 20:28 댓글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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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5.09.15 22:00

    첫댓글
    예전 젊었을때 불교에 관심있던 친구들과...
    특히 스님 이었던 친구와 법담을 할때 대부분 다루었던 문제들 이네요
    인간의 사고 유형,경향성이라 할까?...하는 부분들이...
    치밀하게 사고하고 밀어부치다 보면 결국 비슷하게 겹쳐지면서 만나지는 경우가 많지요

    가립의 연기 3가지와 명언으로 존재하는 3가지 기준은...
    앞 2가지 부분에서는 겹치는거 같네요
    첫번째 명언의 대상으로서 원인/조건이 모여있는 명언의 의지처
    두번째 합리적으로 통용될수 있는 이름을 붙히는 것

    아이고 집사람이 간식(?) 먹으라고 빨리 오라고 재촉 하네요
    집 사람이 귀가하면서 맛난 족발과 막걸리 사왔다고...ㅎㅎ
    조금 더 적을게 있었는데...ㅠㅠ

  • 작성자 25.09.16 09:45

    명언으로 존재가 가립의 연기 안에 포함된 구조라고 보시면 됩니다.

  • 25.09.16 02:33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논점에 맞춰 적지 않는 경우, 그냥 소개하는 것에 그쳐야 하고 주장을 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요. 자신의 주장을 하거나 비판을 하려면, 논점에 맞춰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정리해 적어야 하는 겁니다.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다.

    ===

    자기가 적은 내용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면, 다음의 지적과 관련해 분명한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연기의 모습을요. 일단 인과와 상호의존으로 구별했는데요. 원인과 결과는 상호의존이 아닙니까? 또한 의타기는 상호의존에 위치해야 할텐데, 인과는 의타기가 아닙니까?

    ===

    아래에서는 위 본글을 읽는 이들을 위한 참조 사항을 적습니다.

    열반과 연기의 논점은요. 딱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열반이 연기에 따르는가 아닌가? 원성실성은 의타기성과 다른 것인가? 이거는 섣불리 단정해 말할 수 없습니다. 워낙 베리에이션이 많고 많을 수 있어서요. 뭐...개론서에서야, 일단 개념의 숙지와 이해의 편의를 위해 단정이 아닌 다르다는 취지 정도로 구별해줄 수는 있겠습니다.

    3.번의 논점과 그런 형식은요. 불교 역사에서 그냥 말쟁이로 변신해서 말싸움할 때 곧잘 등장했습니다.

  • 작성자 25.09.16 09:05

    방문객님처럼 1번과 3번의 중관학적 차이점을 모르는 분에게 소개하는 글입니다.

    1번은 시간적 선후관계가 있기 때문에 2번과 차이가 있습니다. 유식 의타기성은 맥락에 따라 1번과 2번 모두 해당할 수 있어서 딱 잘라서 이것이다 할 순 없습니다. 유식 삼성설과 일대일 매칭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3번이 보리도차제론의 무자성 논증에서 중요한 파트인데 그냥 말쟁이의 말싸움으로 느껴지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귀류논증 중관과는 안 맞는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 25.09.16 08:56

    인도와 티벳에서, 논쟁에서 패배한 계파는 몰락의 길을 간다는 썰을 고려할 때..

    (인도는 자료를 못 봐서 잘 모르겠지만)
    티벳에서 유독 '논쟁을 위한 논리(형식논리, 수사적 언어의 향연)'가 굉장히 발달한 것 같습니다.

    일반인인 제가 보기에도, '이런 논리전개가..논리학, 기호논리학 전문가들이 보기에 합당할까? 걍 우기기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거든여.

    굉장히 지적인 호기심이 발달한 분들에게는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저는 좀 감당이 안 되는 측면이..ㅠ ㅠ

  • 작성자 25.09.16 09:24

    본글의 청변이나 청변을 비판한 월칭 둘 다 인도 나란다 대논사 분들입니다. 인명학 같은 불교 논리학이 본토에선 발달했었는데, 한자 문화권인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로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세세한 논리를 다루기 어려운 문자의 한계로 잘 전해지지 않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첨언하자면 본글에 소개된 자성, 무자성 관련된 논리 전개는 논쟁의 성격도 있지만 보리도차제론 상의 근본적인 목적은 공성에 대한 사마타와 위빠사나 현교 수행을 위한 것입니다.

  • 25.09.16 09:50

    중관에서 1과 2로 나눈다고 할 때, 1번 분별의 초점은요. 단순한 시간의 문제가 아니구요, 생멸입니다. 연기에서 원인이 멸하고 결과가 생한다. 이게 전반적인 북부 소승 부파들의 기본 스탠스거든요. 연기의 모습 중 멸해서 없어진 것과 발생한 것의 연결하는 모습인 겁니다.

    2번은요. 단순히 개념상 상호 의존 관계까지 포섭해서 교학이 세워진 편인데요. 실참에서는 그거는 지양해야 할 일이구요. 어쨌든 실참과 관련시킨다면 보통 동시성, 그래서 '(상호) 조건'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상좌부쪽 사람들 그런 글 좀 적는데, "조건(빠까야)과 연기(빠띠까쌈우빠다)는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사고도 그쪽입니다.

    통상 우리가 연기의 전형적 모습인 12연기를 고찰할 때, 인과라고 할 것과 동시성이라고 할 것이 함께 있어요. 그래서 대승쪽도 그렇고, 일반 강학상 '조건 성립과 해체'와 같은 표현은 연기의 동의어로 쓰입니다.

    즉 1과 2를 나누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왜? 연기는 기본적으로 (판단)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법칙이라서 예외가 없으므로, 사실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연기가 사실이란 점을 알기 위해서는, 판단법칙으로서의 적용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 25.09.16 10:02

    그래서 기본적으로 판단법칙이라는 표현을 쓴 겁니다.

    이상의 단계를 거쳐, 판단법칙인 연기를 사실로 치환하여 표현한 것 중 하나가 "사실 즉 법이란 조건성립과 해체이다"라고 말하게 되는데요. 중론 즉 반야부들의 주장은 뭐냐? 그 사실이 무자성이고 실제로는 없는 거라는 겁니다. 있는게 아니란 겁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그 사실이 무자성이 실제로는 없는 거라면, 즉 가 곧 가립이라면, 연기도 가립이라는 논리가 나올 수 있는데요. 이거는 뭐 공공 논리로 나가는 거요. 공이라고 탐착만 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즉 위 본글과 같이 1, 2, 3으로 분별할 때... 1과 2가 3이라는 것을 주장해서 세가지가 된 것이지, 그 세가지 각각이 따로 국밥으로 고찰해 나가야만 하고 그런 거는 아닙니다.

    논점으로 돌아가서, 청품명월님의 표현에 대한 님의 지적에 제가 인용한 중론 표현요.
    [ 연기, 그것이 공이고, 가이며, 중도이다... ] 등등

    결국 청풍명월님의 표현, "조건성립과 해체되기 때문에 가립이다"는 "연기로 성립하기에 가립이다"... 중론에 나오는 표현 그대로입니다. 그냥 단순한 패러프레이징, 그것도 널리 쓰이는 표현일 뿐입니다.

  • 25.09.16 10:10

    ===

    우리가요. 교학을 공부할 때, 이해를 한다는 것이요.

    교학 공부를 해보면요. 체계적으로요. 솔직하게 말해서, 개소리 정말 많아요.

    그래서 배울 때, 다음의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개소리를 왜 이렇게 많이 하냐... 진짜 개소리고 쓸데도 엄는데...

    자기 스쿨의 우월성 증명? 그래... 그런 측면을 무시못할 거 같아. 그럼 오늘날에도 왜 이 지랄이냐...

    왜 스님들이 구사론 7년이라고 하냐... 왜 7년 동안 그 개소리를 배우고 있냐? 더군다나 선불교는 구사론 내용 태반을 까잖아... 왜 그러지?

    왜 그럴 거 같아요?

    불교적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 배우는 거라... 구사론 7년해서 외워 가지고 그거에 끼워맞추려는게 아니라... 사고력을 기르는 거라고...

    이해를 하라고... 이해가 성립되는 과정 속에 사고력이 길러진다고...

    난삽하고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 거를 사람들에게 주장하려고 7년 동안 그거 하는게 아니야... 사고력을 기르는 거, 그게 배우는 거라고... 불교적 사고력... 훈련 연습이라고... 그 난삽한 말장난 교학에서 소위 진리를 안다고? 그거는 말도 안되는 거여.

    사고력 기르는 과정에서, 막히고 부족하면 물어봐요.

  • 작성자 25.09.16 11:05

    생멸은 1번과 2번 둘 다 적용됩니다. 그래서 1번의 초점을 묻는 게 아니라 1번과 2번의 차이점을 물으면 시간적 선후관계냐 상호의존적 동시성이냐가 맞습니다.

    대승철학에 익숙한 분들은 상의상관적 연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소승에서 열반을 연기법으로 보지 않는 예시처럼 중요시하지 않는 학파도 있기 때문에 1번과 2번을 구분짓지 않았나 짐작해봅니다.

    조건 성립과 해체되기 때문에 가립이다는 중관 교학 용어로서의 가립의 연기와는 (3번 설명에 나와있듯이) 동의어가 될 수 없습니다.

  • 25.09.16 10:51

    그렇게 보면.. 불교 공부라는 게.. 함정이 도처에 널린듯요.. 각자의 꿈? 상상?에 따라 산으로 물로 막 가기 십상..ㄷㄷ

  • 25.09.16 11:13

    우기는 거야, 애들 특권이기도 하니까 그렇다 치고...

    "상좌부는 열반을 연기법으로 보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아함이나 니까야에서 열반이란 불의 꺼짐이다. 우다나 01-01에서 01-03까지를 봐도, 연기법으로다가 결국 "이와 같이 괴로움의 덩어리 일체가 소멸한다"고 말합니다.

    학파 논쟁, 말장난 싸움... 우리가 너거보다 우월함... 폼나게 포장해줘서 학파 논쟁, 스쿨 논쟁이라고 해주는 건데...

    덤태기 씌우는 경우 많아요. 비판하기 위해서...

    잘 이해하면 되요. 문제는 없어.

    황벽님 말마따나, 불교는 참... 뭐냐... 희랍신화에서 영웅은 미궁에 한번 들어가줘야 한다구요. 그렇죠? 그래야 영웅이 되는 거라...

  • 작성자 25.09.16 11:33

    방문객님은 반박이 달리면 우긴다며 피해버리는 습관은 한결같으시네요.

    학파마다 각기 다른 견해는 경전을 해석한 데서 차이가 나는 거니까, 논서면 몰라도 경전 구절로 견해를 단정짓기도 어렵습니다. 일단 확실한 건 티벳불교 교학 상으론 무위법을 연기법으로 보지 않는 학파들을 설명합니다.

  • 25.09.16 11:50

    님이 뭘 반박을 했다는 거요. 중론에 나오는 언명 그대로를 교학에서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게 님 아니요?

  • 작성자 25.09.16 11:58

    11시5분 댓글 읽으세요.

    내가 언제 중론의 문장을 중관학에서 부정한다고 말했는데요; 여태까지 뭘 읽은 건지 기가 차네요.

  • 25.09.16 11:58

    아...혹시 론등의 이름을 나열하며 니 그거 모른다고 말만하면 반박이 된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럼 너무 황당한데요.

  • 25.09.16 12:02

    동시성인데 생멸이다?

    그거 말도 안되는 소리요.

    왜냐?

    그럼 왜 나누는데?

    연기가 성립함에 소멸해 없는 것과 발생해 있는 것의 연결인가?

    동시에 연기로 성립하는 것의 연결인가?

    그러한 차이를 만들지 않으면,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는데 굳이 나눈 것을 정당화할 부분도 잃어버려요.

    생각을 해보시라고.

    동시에 성립한 것도 결국 소멸하니까 동시 성립도 생멸의 관점을 포함한다?

    그런 사고는 논리 자체의 이해 부족이라.

    무엇이든 발생한 것은 까닭이 있어. 말장난이라도 되는 대로 만든게 아니라구요.

  • 25.09.16 12:05

    조건의 성립과 해체는 연기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것도 널리 쓰이는 거...

    우리 입장에서 일일이 지적하면요. 시간을 너무 잡아먹어요.

  • 작성자 25.09.16 12:06

    님이 지난 글 댓글에서 교학용어를 몰라서 따졌었잖아요; 교학용어를 교학적으로 설명하지 그럼 뭘로 설명합니까.

    생멸도 존재론적으로 시간적 선후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고, 인식론적으로 상호의존 동시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인식론적으론 멸 없는 생 없고, 생 없는 멸 없습니다.

  • 25.09.16 12:17

    아니... 애초에 교학의 언명 그대로를 그런 교학 엄다고 하신 거라니까... 여러 차례 지적했는데요.

    중론은 교학이 아니예요? 애초에 님이 눈 타령한게 이미 중론 내용인데? 그러면서 상대가 중론의 말을 적으니까 부정한건데?

    그러니까 굳이 동시 성립도 결국 소멸하니까 생멸 다룬다...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죠. 말이야 뭐, 이현령 비현령, 너만 옳냐 나도 옳다... 뭐든 가능하죠. 그런게 그런 거를 우기기라고 한다니까요.

  • 25.09.16 12:23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적죠.

    생각을 하자구요.

    1과 2를 굳이 분별할, 12연기는 함께 설해진 건데, 부처님께서 그러셨는데, 1.과 2를 굳이 분별했어.

    저는 그처럼 구별하는 말을 만들 뚜렷한 차이점을 나름 제시했잖아요? 그렇죠? 북방 부파 불교 운운하며 역사적 근거도 나름 제시했어.

    님은 님 나름만의 분별할 차이점을 제시하면서 내가 제시한 차이점은 틀렸다고 논증해야, 그거를 반박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반박입니다. 물론 '님은 님 나름만의 분별할 차이점을 제시'는 보너스 점수죠. 그런데 반드시 상대가 물어볼거라. 너는 그 왜 구별했다고 생각하는데? 부처님은 뭉텅그려 시설하셨는데... 왜 하필 나눈다고 생각해? 안그러겠어요?

  • 작성자 25.11.05 03:39

    중론에 나온다는 논리면 부처님도 교학 용어고, 가립도 교학 용어고, 가립의 연기도 교학 용어고 세상만사 다 교학 용어겠어요? 님은 논서 읽고 본인이 해석한 단어를 교학 용어라고 칭해요? 매번 남보고 우긴다고 하더니 본인이 제일 앞장서서 우기고 있네요.

    '결국 소멸하니까'가 아니라, 일체법이 명언으로 존재함을 받아들인다면, 인식론적으로 동시적인 상호의존 관계라구요. 그건 존재론적 설명방식이에요.

    반박의 요지는 1번과 2번의 차이점이 시간적 선후관계란 거고, 생멸은 1번과 2번 해석이 둘 다 가능하기 때문에 차이점으로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님이 질문을 '원인과 결과는 상호의존이 아닙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 25.09.16 17:27

    거의 40년전에 스님 친구와 나눈 법담이 현재 또 다시 재현되는 느낌 입니다^^
    황벽님 게시글 불가사의 법계의 작동방식과 유사 하지요
    단지 이시의 시간적 길이가 길다는 차이가 있을뿐...

    그때 그 친구 별명을 떼쟁이라고 했었지요.그래서 그 친구가 논쟁 중 열을 내면...
    흥분 가라 앉히고,목욕탕 가서 떼(때) 좀 시원하게 밀고 오라고 조크 식 농담을 했었지요
    뭐 그러면...지금 이 마당에 장난하냐며 더 열불을 내고 온갖 개념을 동반한 소리들을 폭격하듯 쏟아내며 저를 몰아 부쳤습니다

    아 그때가 엊그제 같고 그립네요.손을 뻗으면 잡힐것 같은데...
    창문으로 휘몰아 치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풍경을 보다보니...
    불가사의 법계의 장난질에 놀아날수 밖에 없는 처연한 중생의 처지가 더욱 실감 납니다

    암튼 그거시는 그렇고...게시글로 뿅 하고 리턴해 살펴보니...

    /가립의 연기
    ①원인/조건이 모여 있고 ②이름이 붙어져야 하고 ③생각으로 인식

    (가립의 연기에 포섭 되는 명언의 세가지 기준)
    ➊명언의 대상 ➋합리적 명언 부여 ➌명언의 자성 유무 추론을 통한 무자성 결론/

  • 25.09.16 17:44

    제가 일반과 특수,특별 얘기를 했었지요
    불교로 적용해 일반이라 하면 불교 전반에 걸쳐 널리 통용되는 근본적 진리라고 할수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연기라고 할수 있지요.거기에 따라 붙는 조건생/조건멸,가립 등을 포함 해서요
    또한 특수,특별은 "가립의 연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제 게시글에서...
    "특수가 일반을 훼손하지 않고,일반에서 세부적으로 좀 더 나아가 개별성을 특별하게 부각 하고자 할때,
    개별성의 특별한 부각은 일반과 상치되지 않고 일반에 포섭 됩니다" 라는 말들을 했었습니다
    만약에 어떤 특별한 논제를 세웠는데 그것이 일반을 훼손해 완전 딴 판이라면 이미 종을 달리 한다고도 했구요

    가립의 연기 세가지 조건이라는 말에는...
    이미 가립의 연기가 조건 성립이고,불교 일반의 연기라는 법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원인/조건이 모여 있는 조건이 있어야 이름이 붙여지고,붙혀진 이름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생각으로 인식할수 있잖아요
    그럼 당연히 "가립의 연기"라는 논제도 불교 일반의 연기,조건성립,가립 이라는 구조에 속 할수 밖에 없습니다
    "가립의 연기"가 곧 이름 붙혀짐과 그 인식에 대한 순차적 조건발생을 말 하는거 아닙니까

  • 25.09.16 17:59

    /법무아
    가립의 연기는 연기법을 세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놓은 것 중 하나로,
    제 경험상 중관같은 대승학파에서 정의한 것 말곤 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종파나 학파에서 가립의 연기를 다르게 정의한다면 그걸 주제로 법담이 가능하겠지만,
    문자 자체만 보고 피상적 이해로 '난 그거 아는데?'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청풍명월님 의견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가립의 연기를 다르게 해석하는 종파나 학파를 말하셔야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법무아님 댓글 내용 인데요
    법무아님이 제가 올린 글이 의도하는 요지를 다르게 받아 들이신것 같습니다
    제 글의 요지는 "가립의 연기"를 다른 대승 학파에서 정의 했건,안 했건의 문제도 아니였구요
    당연히 대승 중관의 어느 학파에서 얘기한거겠죠
    위에 붙힌 설명에도 제 의도의 요지를 파악 못하신다면,뭐 어쩔수 없는거구요^^

    아 그리고 이시인과니 동시인과니 동시적 상호의존이니 등등 하는 문제 가지고도 그 친구와 혀(칼?)부림 많이 했었지요
    이시적 원인/결과의 인과연기에서 상호의존이라 할때...
    결과가 원인에 의존 하는건 이해가 되는데...원인이 결과에 의존 한다는 것은...
    아직 애도 낳지 않은 처녀가 엄마 행세 하는것과 같다는 둥...

  • 25.09.16 18:10

    이건 뭐 넌쎈스 퀴즈도 아니고...^^
    옆에서 듣고 있던 불교에 무관심,문외한 친구는 헛소리들 작작하라고 하고...

    찰라생멸을 말하는 불교의 시간적 관점에서는,세워지는 두가지 법과 관련해
    사실상 동시성은 발 붙히기 힘들지요.한 찰라 내에 두가지 법은 존재할수 없으니...
    친구와 같이 있을때,서로 다른 일 하다가 동시에 야 하면서 서로 쳐다보는 그런 동시성 말구요
    뭐 개념상 상호의존이야 개념의 특징상 동시적이라고 언명할수는 있겠습니다만

    연기라는게 우리네 마음을 떠나 쩌 어드메의 외딴 별천지에서 작동 하는게 아니란걸 잘 유념해야 하겠지요

  • 작성자 25.09.16 19:22

    @청풍명월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청풍명월님이 하는 얘기가 불교적으로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전 '교학 용어' 기준으로 먼저 얘기했는데, 청풍명월님은 자꾸 다른 기준으로 얘기를 하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파나 학파의 예시도 요구한 것이구요.

    제가 교학 용어가 아닌 것처럼 글을 써서 착각하게 만들었다면 오해의 책임이 저한테 있겠지만, 작성했던 본글도 중관학 교학 얘기였고 댓글도 인과의 연기와 가립의 연기가 다르다고 썼기 때문에 교학 용어 얘기인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했으리라고 봅니다.

    대승의 상의상관적 연기는 개념상 상호의존을 말하는 게 맞습니다.

  • 25.09.16 17:50

    [경]을 보면요.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다 적어놨는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면 되는데...

    님이 올린 본글의 분별을 이해하고 있다면, 저의 지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들이 나와야 했습니다.

    <<
    1은 상호의존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가? 원인은 멸해서 없는 것이고 결과는 발생해 있는 것인데, 어떻게 없는 것에 있는 것이 의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측면에서 1과 2를 분별한 겁니다.
    >>

    있는 것이 어떻게 없는 것에 의존할 수 있는가? 이 의문은 말이죠. 중론에서 이미 등장합니다. 중론을 알면, 그런 생각도 했을 거예요. 반야 논리는 더 나아갑니다. 원인이라는 것은 이름이고 결과라는 것도 이름이다. 연기의 언명에서 원인에 결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과에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없는 것이 있는 것의 원인일 수 있는가? 어떻게 있는 것이 없는 것의 결과일 수 있는가? 이런 논리들을 쭉쭉 제시하겠죠.

    원인과 결과라는 것은 판단입니다. 귀속시키는 평가라고...

    반야부 교학이든 뭐든 교학을 공부하면, 두뇌 훈련이거든...그게 핵심이라... 왜 그거하냐? 그래야 속제, 자신이 경험하는 사실에 적용할 수 있어요.

  • 25.09.16 17:53

    속제에 의지하지 않으면 진제를 알 수 없다고... 속제에 의지해야 진제를 알아... 중론이 그렇게 적어놨잖아요.

    제가 법무아님에 대해 지적한게 말입니다. 정말 다 사실이거든... 위에 내용을 보세요. 다 논증이 되잖아요.

    초심자들... 애칭으로 애들... 우리가 탐구심이 기본이예요. 생각을 해야 해요. 왜 교학을 공부하는지... 위에 예로 들었잖아. 선불교는 구사론 내용 태반을 다 부정하는데, 구사론 7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니까... 그 내용이 틀리디고 평가하더라도, 일단 불교적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 공부하는 거라...

    위에 또 적어놨잖아요.

    말장난이라고 되는 대로 말을 만드는게 아니라구요. 그런 수준이라면, 구사론에 실리지도 않아, 교학이랍시고 공부하게 제시되지도 않는다고...

    이것도 적어야 되나? 동시에 있는 거면, 서로 의존함을 논할 수 있지. 둘 다 있는 거니까... 일단 그렇단 말입니다. 존재론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고... 위에 님이 적은 본글 내용이라고...

    이제 이거는 정말 그만 합시다.

  • 작성자 25.09.16 18:55

    아이고.. 방문객님 그 설명은 2번을 이해하지 못한 말이에요. '어떻게 없는 것에 있는 것이 의존할 수 있겠습니까?' 의존할 수 있습니다.

    2번은 인식론적 상대성이기 때문에 없는 것과 있는 것이 서로 의존합니다. 있음과 없음, 윤회와 열반, 나와 너, 큰 것과 작은 것, 발생과 소멸, 중생과 부처 이러한 예시들이 다 2번의 예시에요.

    자꾸 본인 주장만 되풀이하지 말고 상대방이 뭘 말하는지부터 이해를 해보세요.

  • 25.09.16 20:09

    아야... 위에 내가 이미 [ 2번은요. 단순히 개념상 상호 의존 관계까지 포섭해서 교학이 세워진 편인데요. 실참에서는 그거는 지양해야 할 일이구요. ]라고 적어놨어요.

    개념상 있음과 없음이, 1번이 분설한 인과의 원인과 결과가 칭하는 것들이 아니야... 1번의 그거는 상좌부의 빠라마타 즉 사실에 이름 붙인 거라고...

    님은 단어 뜻도 모르고 스스로 무슨 말하는지 모르면서 말하는 거 맞으니까, 일단 붓다의 가르침을 최소 다섯번 읽으시라고... 글자 모양만 가지고 말을 만들고 그러지 말고...

    솔직히 님이 소개하는 수준 정도는 이미 다 알아. 티벳불교가 별 건지 알어? 하하 참

    정말 붓다의 가르침 다섯번 정도는 읽으시라고...

  • 25.09.16 20:27

    12연기의 지분을 하나 가져와 보자고... 위에서 12연기 언급했으니까...

    행 연 식 ... 행은 원인, 식은 과보... 과보식이라 그래.

    행에는 식이 없고, 식에는 행이 없어. 원인이라 이름해 줄 행은 멸하여 없고, 과보 즉 결과라 이름해 줄 식이 발생해 있어.

    이게 위 본글에서 말하는 1번의 인과야.

    [ 행에 식이 없고 식에 행이 없음에도, 없는 것이 어떻게 있는 것의 원인이 되겠는기? ]는 중론등에서 위 본글 3번 내용을 주장하면서 하는 말이고...

    여기에 무슨 개념상의 있고 없음이 나와?

    행과 식은 빠라마타야, 개념이 아니야.

    완전 다른 이야기잖어.

    있음과 없음... 있다와 없다... 같은 글자가 나왔다고 같은 뜻인게 아니여.

  • 25.09.16 20:45

    내가 중론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중론이 틀리다는 것도 아니고...

    님 혼자 글자 뜻도 모르면서 이해도 몬한 거를 닥치는 대로 나열하면서, 상대방은 틀리고 님은 안다고 주장하는 거 아니야.

    이게 우기기가 아니고 뭐야.

    초심자라도 말입니다. 초심자 이전에 말입니다. 사람은 말입니다. 수치를 알아야 하고, 염치가 있어야 하고... 기초 덕성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행동하면서 무슨 번뇌가 줄면 된다는 거요? 참... 자신이 그렇다고 말만 하면 실제 자기가 그런 거요?

    ===

    된장... 어떻게 없는 것이 있는 것의 원인이 될 수 있겠는가? 이 표현 자체도 중론에 그대로 나오는 거야. 내 말이 아니여. 그런데 무자성 3번을 이야기하면서 중론 내용을 부정해...

    도대체 뭐를 하자는 겁니까?

    님처럼 교학을 업어오면 혹시라도 혼동 발생하는 분이 있을 수 있어.

    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아시겠어요?

    내가 솔직히 말해서요. 이곳에 올라오는 글은 다 읽기는 해. 내 역할 수행할라고.

    붓다의 가르침 다섯번은 읽으세요. 정말로... 기초 개념 숙지 후에 말 뜻을 알고 글을 읽으세요. 그렇게 원하는 교학 공부도 글자 뜻이라도 알면서 시작하시라구요.

  • 작성자 25.09.16 21:03

    국어 공부 얘기는 별로 하기 싫은데 국어 공부 얘기를 안 할 수 없게 만드네요. 방문객님 질문이 1번과 2번의 '차이점'을 요구하는 질문이었어요. 근데 그 답으로 1번의 특징을 말하는 게 맞아요?

    1번과 2번의 차이점을 말하려면 선후관계 vs 동시성, 존재론 vs 인식론, 혹은 굳이 님 표현을 빌리자면 빠라마타 vs 개념이라고 말해야 돼요. 빠라마타는 존재론적이고 개념은 인식론적이니까요.

    3번을 말쟁이의 말싸움이라고 했으면서 티벳불교를 알긴 뭘 알아요.

    행과 식을 실유實有인 빠라마타로 보는 것도 소승불교 관점이에요. 중관학적으로 행과 식도 가유假有에요. 이런 것도 모르는데 티벳불교를 안다고요? 기가 찹니다.

    님은 평생을 자의적 해석으로만 불교 공부를 해왔으니, 본인이 얼마나 모르는지도 모르고 이것도 안다, 저것도 안다, 티벳불교도 안다, 내가 다 안다 병에 걸린 겁니다. 염치 묻는 건 본인 스스로에게 좀 해보세요.

    자의적 해석만 해도 다 옳게 하면 다행이겠지만, 옳은 것과 틀린 것이 죄다 뒤섞여버려 삼귀의를 안 한다느니, 수행의 척도가 번뇌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느니 하면서 지극히 당연한 상식도 부정하게 되는 겁니다.

  • 작성자 25.09.16 21:07

    없는 것과 있는 것도 서로 의존한다고 했지, 한 쪽이 다른 쪽의 원인이 된다고 한 적 없습니다. 글 좀 읽으세요 글 좀

  • 25.09.16 21:18

    @법무아 님 딴에는 나의 지적에 반박한 거잖아. 내 지적에 반박한게 아니라는 거예요?

    님을 보면, 님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도 몰라요.

  • 25.09.16 21:17

    ===

    제가요, 고등학교 때 반에서 참 공부 몬하는 애가 수학을 물어보더라고. 거의 전교 꼴찌인 친구였는데, 사람은 좋았어요.

    어쨌든 그래서 알려줄라 하는데, 이거 하나도 모르는 거야... 중학교 수학부터 가르쳐야 하더라고.

    그래서 그 문제 푸는데 필요한 중학교 과정부터 좀 알려줬어.

    그런데 이게 시간이 무한정이야... 고등학교 과정까지 오기가 너무 어려워.

    그래서 그랬어요. 야... 너 일단 중학교 수학부터 공부하면 안되겠냐?

    중학 수학도 모르는데, 대학 수학을 가져오면요. 손을 댈 수 없는 거예요. 무저갱 블랙홀이야...

    그러니까 차근차근 쌓아 가야 하는 거라구요. 그래야 옆에서도 도울 수 있어. 그렇지 않겠어요?

    불교가 무슨 돈 되는 것도 아니고, 기왕 시간 쓰는 거면 차근차근 쌓아서 10년 뒤에는 다른 사람도 도울 수 있게 되면 참 좋은 거 아니예요?

    너무 빨리 갈라고 하다보면요. 망치기 쉽상입니다. 무슨 고지전 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부정하려면, 부정하려는 것이 뭔지 알아야 한다고... 그렇잖아요?

    공이라 말하려면 공이 아니게 느껴지는 것들을 잘 알아야 할 거 아니예요.

    부정하려는 것을 모르면서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 25.09.16 21:25

    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진제를 알 수 없다... 이거 중론 언명? 이거 그냥 당연한 말이야. 별 오묘한 말도 아니야. 아니예요?

    그게 무슨 뭐라도 되는 말이 아니라고. 그냥 상식이야...

    ===

    어떻든 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세요.

    삶은 고단한 거라... 참으로 고단한 거야...

    다음에 봅시다.

  • 작성자 25.09.16 21:31

    1번과 2번의 '차이점'을 물어놓고 혼자 1번의 특징을 말하고 앉았으니 그걸 지적하는 거에요.

    님은 항상 같은 레파토리인 게 논리에서 밀릴 때쯤 되면 '우기기다' '넌 모른다' '내가 맞다' 이런 수준으로 끝나요. 관찰해보니 늘 그렇더라구요. 맨날 도망가지만 말고 마지막 댓글에 썼던 밑에 세 가지에 답하시면 됩니다.

    1번과 2번의 차이점을 요구해놓고 1번의 특징을 말한다.

    행과 식이 가유假有인 것도 모르고 티벳불교를 안다고 한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이 서로 의존'과 '없는 것이 있는 것의 원인'은 다른 말이다.

  • 작성자 25.09.16 22:16

    저번부터 느낀 건데 방문객님은 대화 레파토리가 신기할 정도로 항상 아래와 같은 식입니다.

    1. 글을 읽고 질문 댓글을 단다. 물론 이 질문은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기 위한 사전작업에 불과함.

    2. 상대방이 질문에 답변을 하면 글의 맥락이나 처음 질문의 요지와는 별 상관없이 그저 본인이 하고싶은 말들만 매우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중간중간에 ... < > [ ] 같은 지나치게 불필요한 기호들은 덤.

    3. 반박이 달리면 처음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넌 우긴다' '내가 맞다' '내가 안다'로 일관한다.

    4. 논리에서 밀릴 때쯤 되면 불교가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쩌구.. 삶이 고단 어쩌구.. 매번 비슷한 대사의 타령을 시작한다.

    5. 마지막엔 반박에 대한 답변 없이 '다음에 봅시다'로 화룡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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