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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김일성 북한 주석 사망
▲1994년 7월 9일 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망소식을 알리는
호외를 지나가던 시민들이 읽고 있다.
북한 주석 김일성이1994년7월 8일 사망
했다.북한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9일 낮
12시 특별방송을 통해 “위대한 수령 김일
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오전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
다” 고 발표했다. 북한방송들은 김일성의
사망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를 발표“
심장혈관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
오다 겹쌓이는 과로로 7월 7일 심한 심근
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어
사망했다” 고 보도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을 금수산의
사당(주석궁)에 안치하며 장례식은 17일
평양시에서 거행한다고 발표했다 8일부
터 17일까지는 애도기간으로 정했다.
1912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45년 소련군과 함께 진주해 49년
동안 북한을 통치해 온 김일성은 사회
주의 건설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건설한 나라는 현대
문명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
인 우상국가였다. 그가 민족에 저지른
최고의 죄악은 6·25였다.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의 가슴에 총격을 가한
6·25는 민족분단을 불치의 것으로 만들
었다.
김일성은 폭력에 의해 내부권력을 유지
하는 한편 남한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테
러를 자행해 아웅산 폭파사건이나 KAL
기 폭파사건 등을 저질렀다.
▶2015년 화성산업 이윤석
명예회장 별세
▶2011년 포드 미국 전(前) 대통령 부인
베티 여사 별세
제럴드 포드(재임 1974~1977)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베티 포드(93) 여사가 8일(현지시각) 별세했다.
1918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베티 여사는 버몬트주 베닝턴 칼리지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첫 남편과 이혼하고 이듬해인 1948년 해군 장교 출신으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포드 대통령과 재혼했다. 2006년 포드 전 대통령과 사별한 뒤 캘리포니아에서 지내왔다.
베티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유방암 투병 사실을 공개해 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했다. 그러나 암 투병 사실 공개가 이후 남편의 대선 패배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일자 충격을 받아 백악관에서 나온 뒤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이후 자신은 알코올 중독자이며 치료를 받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뒤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기 위해 1982년 캘리포니아의 랜초 미라지에 알코올·약물 중독자 재활 치료를 위한 ‘베티 포드 센터’를 세웠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2003년 판소리 명창 박동진옹 별세
2003년 7월 8일, 판소리의 거목이 갔다. 이날 별세한 박동진 명창은 걸쭉한 해학과 입담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은 국악계의 별이었다. 박동진 명창은 현대 국악공연 사상 최초로 완창(完唱) 판소리를 선보여 꺼져가던 판소리를 다시 불지핀 선구자였다.
1968년 5시간에 걸쳐 완창한 ‘흥보가’를 시작으로 이듬해 ‘춘향가’(8시간), 1970년 ‘심청가’(6시간) ‘변강쇠타령’(5시간), 1971년 ‘적벽가’(7시간), 1972년 ‘수궁가’(5시간)를 차례로 완창했다. 과거 선대 명창들은 소수 ‘귀명창’ 앞에서 완창소리를 하곤 했지만, 1930년대 이후 대중적 공연무대에선 20~30분짜리 토막소리가 많았다. 박 명창의 완창이 얼마나 획기적인 일이었던지 ‘미국의 소리’ 방송이 공연을 중계하고 ‘한국전통음악계의 특이한 사건’으로 보도했다.
박 명창은 1916년 7월 12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대전중학교에 다니던 16세 때 이화중선·이동백·장판개 명창이 협률사에서 공연하는 것을 보고 소리꾼이 되기로 작정했다. 박 명창은 판소리의 사설을 자유자재로 비틀고 바꾸면서 청중을 울리고 웃겼다. 그는 전통소리에만 그치지 않고 창작 판소리에도 힘을 쏟아 ‘예수전’ ‘이순신전’ ‘팔려간 요셉’ 등이 그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한번 읽거나 들으면 쉽게 잊지 않는 기억력, 타고난 소리감각 덕분이었다.
박 명창의 구수한 목소리로 방송광고를 탄 ‘제비몰러 나간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는 아이들조차 입에 달고다닐 정도로 전통의 소중함을 일깨운 ‘국민 멘트’였다. 또한 소리판의 음담패설은 삶 속에 그대로 진을 박아 거침없는 육담(肉談)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1967년 국립창극단에 몸담았고, 1973년에는 ‘적벽가’로 인간문화재가 됐다.
▶2003년 항일-여성운동가
조아라여사 별세
한국 여성·민주화운동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조아라(광주YWCA명예회장) 여사가 2003년 7월 8일 전북 전주시 예수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아 소녀·윤락여성 등 소외계층의 여성들과 5·18로 인해 구속되고 부상한 관련자와 가족 등 힘들고 어려운 광주의 아들·딸 모두의 ‘어머니’였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조 여사는 1931년 광주수피아여고를 졸업, 광복 전 항일·여성 계몽활동을 벌였다. 광복 후에는 일제에 의해 폐쇄된 광주YWCA를 재건, 1947년부터 35년 동안 총무와 회장으로 광주YWCA를 이끌며 사회봉사와 여성 권익 신장에 헌신했다. 특히 1947년부터 1954년까지는 전남도청 부녀계장을 겸임하면서 여성단체협의회를 비롯, 불우 여성청소년을 위한 3년제 야간중학 ‘호남여숙’, 전쟁고아 소녀들을 위한 ‘성빈여사’, 윤락여성 등 소외층 여성을 위한 ‘계명여사’ 등을 설립해 어두운 그늘 속에 버려진 ‘딸’들을 감싸안았다.
또, 5·18 때는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 서슬이 시퍼렇던 5공화국 때 5·18 구속자와 부상자 등을 헌신적으로 보살피고, 지역 사회단체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을 감당, ‘광주의 어머니’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게 됐다. 평생을 봉사에 몸바쳐온 여사는 ‘용신봉사상’(1965)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여사는 ‘광주의 어머니’로서 소임을 다한 뒤, 이제 스스로 더 큰 ‘아버지’의 품으로 날아갔다.
▶2000년 미국 국가미사일방위(NMD)
체제 미사일 요격실험 실패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위(NMD)체제 미사일 요격실험이 실패했다. 이 실패로 최첨단 군사력을 자랑하던 미국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또 NMD 체제의 장래에도 짙은 암운이 드리워졌다. 미사일 요격실험은 1999년 10월의 1차 실험만 성공했을 뿐, 2000년 1월에 이어 이번에도 실패함으로써 실행력에 큰 의문부호가 던져진 셈이다.
미국은 이날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모조탄두와 레이더 교란용 풍선을 실은 대륙간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어 태평양의 마셜제도 콰잘레인 기지에서 요격미사일을 발사했으나 요격 미사일이 추진로켓에서 분리되지 않아 명중시키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번 실패의 내용이 미국으로선 낯 뜨거운 상황이다.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의 대륙간 탄도탄 발사가 전자감응장치의 배터리 이상으로 2기간 지연됐으며, 레이더 교란용 풍선은 펼쳐지지 않았다. 태평양에서 발사된 요격 미사일은 전자신호를 수신하지 못함으로써 로켓에서 분리조차 되지 않아, 목표물과는 전혀 엉뚱하게 빗나가 버렸다. 미국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반대론을 굽히지 않았던 세계 각국은 쾌재를 불렀다.
NMD는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구상한 `스타워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타워즈의 아들`로 불리는 이 계획은 미국 영토 내로 날아오는 적 미사일을 대기권 밖에서 미사일로 요격하는 것. 지상과 공중에 방어무기를 배치하는 스타워즈와는 달리 NMD는 한정된 지상 기지에만 방어무기를 배치한다. 미국방부는 1998년 16억달러에 보잉사와 NMD 관련 계약을 맺었으며 2008년까지 10년간 50억달러의 개발비를 투자할 계획이다.
▶1997년 주체연호(원년 1912년)및
태양절(4.15) 제정
▶1996년 교보생명 창업자 신용호 명예
회장, `세계보험전당 월계관상` 수상
▶1995년 김일성 사망 1주년, 시신공개
▶1991년 정원식
제23대 국무총리 취임
▶1989년 국내최초의 산림욕장
광릉수목원에 설치
광릉수목원 전경.
본격적인 삼림욕장이 국내 최초로 1989년 7월 8일 경기도 포천군 광릉수목원에서 문을 열었다. 2천2백21ha의 넓은 숲속에 8km의 산책로와 각종 휴식시설이 들어선 이 삼림욕장은 그동안 통행이 금지됐던 학술연구림을 일반에게 개방한 것이다.
천연활엽수림, 잣나무, 낙엽송 등 39개의 숲속과 만남의 숲, 조각의 숲 등으로 명명된 휴식공간에 158개의 벤치가 곳곳에 설치돼 있다. 또 통나무징검다리, 평행봉 등 9종의 체력단련시설도 있다.
삼림욕장이 건강에 좋은 것은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유물질 때문인데 이 정유물질은 나무가 병균, 해충, 곰팡이 등의 외부침입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내뿜는 물질로 병원균독소 저해물질, 식물성 살균물질, 생장촉진 물질 등이 함유돼 있다. 정유물질의 주성분은 휘발성이 높은 테르펜이란 물질이다. 숲속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는 바로 테르펜이 공기중에 휘발하면서 나는 것이다. 정유물질의 방출량은 계절, 기후 시간대에 따라 다르다. 초여름부터 8월까지 가장 왕성하며 밤보다는 낮에 두배가량 더 방출된다. 깊은 숲일수록 효과가 좋은 것은 방출된 테르펜이 숲속공기에 풍부하게 있는 오존 등 반응성이 강한 물질과 급속히 결합, 확산되지 않고 머무르기 때문이다.
▶1988년 정부,
중공을 중국으로 공식 호칭
▶1987년 김정일 중국 방문(~10일)
▶1986년 삼성반도체 1MD램 개발
▶1985년 한국-바하마, 국교 수립
▶1983년 미국 사만타양 소련방문
(안드로포프 서기장에 왜 소련은 미국을
공격하느냐고 편지)
▶1980년 80년 미스유니버스선발대회
서울 세종문화회관서 개최
신군부세력 ‘문화정치’에 이용
1980년 7월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미스 유니버스 본선대회가 열렸다. 미스코리아 김은정씨가 12명을 뽑는 예선을 통과했다. 미스USA 션 웨덜리가 1위로 뽑히면서 대회는 막을 내렸다.
본선은 이날 하루였지만, 사전 행사와 예선은 6월 말부터 시작돼 3주에 걸쳐 열렸다. 광주항쟁이 끝난 지 한 달도 안된 시점이었다. 신군부 세력에게 5월 광주학살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오히려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광주학살 은폐와 반공주의 고양에 적극 활용했다.
69개국에서 온 ‘미의 사절’은 신군부 세력의 ‘문화정치’ ‘스펙터클 정치’에 소도구로 동원됐다. 이들은 6월28일 최규하 대통령 접견과 청와대 만찬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일정에 들어갔다. 29일 대회 참가자들은 서울시청 앞과 광화문 일대에서 꽃차 퍼레이드를 벌였다. 육·해·공 3군 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했다. 망우국민학교 농악대가 농악을 울렸다. 오색 종이꽃이 일대를 뒤덮었다. 앞서 서울시는 카퍼레이드 행사를 위해 16개 주요 도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25일에는 비가 오는 가운데서도 지금의 서울시의회 앞길 아스팔트 확장 공사를 할 정도였다.
미녀들은 말 그대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경복궁, 불국사 같은 관광지를 찾고, 앙드레김 패션쇼 무대에 올랐으며, 대형 공연장에서 한국 전통무용을 관람했다. 하지만 주로 방문한 곳은 신군부 세력의 집권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이들은 서울 여의도광장에 마련된 ‘6·25 동란’ 기념관을 찾았다. 판문점을 방문한 자리에선 장교로부터 도끼만행사건 브리핑을 들었다.
육군사관학교도 찾았다. 육사 생도들은 제식 훈련과 분열 시범을 보였다. 당시 언론은 “미녀들이 ‘원더풀’을 연호했다”고 보도했다. 이 자리에선 즉석 댄스파티도 벌어졌는데 “생도와 미녀들은 한데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육사 생도들은 8일 열린 본선에 직접 나가 참가자들을 에스코트했다. 본선은 미 CBS방송을 통해 위성중계됐다.
‘서울의 봄’의 좌절과 5월 광주학살의 참상을 각국 미녀들의 각선미로 은폐한 그해 여름은 미친 계절이었다. ‘미스 유니버스 대회 폭파 미수사건’도 벌어졌다. 통일사회당의 권운상·황인오씨 등은 “이런 시국에 무슨 미인대회냐. 폭탄이라도 있으면 던져넣을 텐데”라는 말 한마디가 화근이 돼 옥살이를 했다.
▶1977년 한국, 아태전기통신협의회
(APT) 가입
▶1972년 팔레스타인 소설가
가산 카나파니 사망
▶1972년 미국-소련,
곡물수출협정에 조인
▶1971년 백제 무령왕릉 발굴
백제 무령왕릉(사적 제13호)이 1971년 7월 8일 발굴됐다. 웅진시대 백제 고분들로 이루어진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제5-6호 고분의 습기와 지하수의 침투를 막기 위해 고분 뒷면의 배수시설을 고치던 중 우연히 발견됐다.(7월 6일 발견)
공주박물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문화재관리국은 김원용 당시 국립박물관장을 지도위원으로 하는 발굴조사단을 7일 오후 현지에 파견해 9일 아침 7시30분까지 발굴작업을 계속했다.
무령왕릉은 5-6호 고분 바로 뒤에 있었으나 큰 언덕처럼 생기고 그 위에는 3~4m 크기의 리기다소나무들이 들어차 있어서 이 고분을 답사했던 전문가들도 단순히 6호 고분 등에 흘러드는 지하수를 막기 위해 만든 인조언덕으로만 생각했을 정도였다.
출토된 유물만 해도 모두 1백8종 2천9백6점에 달했다. 입구에 놓인 지석에 의해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숨져 525년 8월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해 529년 2월에 안치되었으며, 왕릉은 왕이 죽기 11년 전에 이미 축조준비가 끝났음이 밝혀졌다. 출토된 무령왕의 신발 밑바닥 길이가 30㎝에 이르러 무령왕이 거인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1969년.중국-소련의 국경 흑룡강
(아무르강)에 있는 팔분도(소련명 고르
진스키섬)에서 중소양군이 무력충돌
▶1968년 UN사령부,
한국군에 작전권 대폭 이양
▶1967년 중앙정보부,
동백림거점 북한 대남공작단사건 발표
1967년 7월 유럽, 특히 서독에 있던 한국인 교수·유학생들이 동베를린(동백림)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통해 평양을 방문하고 그 중 일부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한국에 들어와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구 동독의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한 대남적화공작단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관련자인 임석진 명지대 조교수가 귀국하여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
`북한대남적화공작단사건(동백림사건)`을 발표하고 있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손에 증거물을 들고 있다.
1967년 7월 8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발표에 따르면 대학교수를 비롯, 유학생 예술인 의사 공무원 등의 지식인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공작단에 포섭되어 1958년부터 1967년 사이에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해왔으며 일부는 평양을 방문해 밀봉교육을 받는 등의 행위를 하며 이적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건국이래 최대의 정보사범사건으로 구속 107명, 학계-문화계의 저명인사 등 관련자가 194명에 이르렀다. 1967년 12월 13일 열린 선거공판에서, 관련자들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 외국환관리법 등이 적용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조영수 정규명 2명에게는 사형이, 정하룡 강빈구 윤이상 어준 4명에게는 무기징역 등이 선고됐다.
▶1967년.비비안 리 사망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거의 동격이 돼버린 여배우 비비안 리가 런던에서 5년의 공백끝에 영화계 복귀를 준비하고 있던 중 폐결핵으로 53세에 사망했다.
인도 다르질링에서 영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연극무대를 전전하다 1937년 영화 `불타고 있는 영국`에서 두 번째 남편인 로렌스 올리비에를 만나게 된다.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캐스팅에 곤욕을 치르고 있던 데이비드 셀즈닉 감독 앞에 매혹적이면서 강렬한 눈매의 그녀가 나타난다. 셀즈닉 감독은 그녀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으로 전격 발탁한다. 이로써 그녀의 스칼렛 오하라 연기가 시작됐다. 그 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서 성공을 거둔 비비안 리는 1940년 8월 그동안 그녀를 짝사랑해오던 배우 올리비에와 결혼했다.
그 후 남편 올리비에의 화려한 경력에 자극받아 더욱더 분투한 끝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1940년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1951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1952년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강한 자아를 가진 여배우 비비안 리는 정열적 열애와 지나친 흡연, 과음 그리고 일에 대한 욕심으로 결국 1960년 올리비에와 이혼하고 1967년 7월 8일 새벽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바람과함께 사라지다' 의 한장면
Vivien Leigh 출연작 Ship of Fools(1965), The Roman Spring of Mrs. Stone(1961), The Deep Blue Sea(1955), A Streetcar Named Desire(1951), Anna Karenina(1948), Caesar and Cleopatra(1945), That Hamilton Woman(1941), Waterloo Bridge(1940), 21 Days(1940), Gone with the Wind(1939), Sidewalks of London(1938), A Yank at Oxford(1938), Storm in a Teacup(1937), Dark Journey(1937), Fire Over England(1937), The Village Squire(1935)
▶1957년 제1회 퍼그워시 회의 개막
1957년 7월 8일 롯 블라트 박사 등 세계의 저명한 핵물리학자 22명이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퍼그워시라는 인구 600명의 작은 어촌에 모였다. 이른바 지구촌 반핵평화운동의 중심축인 ‘퍼그워시 회의’의 첫 출발이었다. 정식 명칭은 ‘과학과 국제문제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다.
과학자들이 1955년 7월 9일 런던 캑스
턴 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러셀-아인
슈타인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1955년 버틀런트 러셀과 알버트 아인슈타인, 조지프 롯 블라트 등 11명의 저명한 학자들이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해 세계 과학자들의 공동연구와 실천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한 것이 계기였다.
퍼그워시 회의는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비정부 국제연대기구로 ‘핵무기 없는 세계, 전쟁 없는 세계’를 추구하며 세균금지조약(1972년), 화학무기금지조약(1993년),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등 대량 살상무기 확산 방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 초중반 북한 핵위기 때 북-미 대화를 중재하고 제네바 합의와 경수로 제공의 길을 터놓은 것도 퍼그워시 회의였다.
▶1952년 세계최초 제트여객기 코메트
(BOAC항공)가 런던∼동경간 최초 운항
▶1951년 남북간 휴전회담 시작
▶1950년 전국에 전시계엄령 선포
▶1950년.대한학도의용대 결성
▶1950년 일본 경찰예비대 발족
▶1941년 독일-이탈리아,
유고분할 협정에 조인
▶1939년 일본, 국민징용령 공포
▶1914년 손문,
동경서 중화혁명당 결성
▶1912년 제3차 러일협약 조인
▶1907년 국문연구소설치(소장 윤치오)
▶1900년 경인선 전선(全線) 개통
▶1592년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대장 와키사카에게 조선 수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73척의 대함단을 이끌고 있는 그에게는 낭보였다.
`학익진도`
한편 전라좌수사 이순신도 이억기ㆍ원균 등과 함께 55척의 함대를 이끌고 전날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일본 함대를 공격하려면 견내량을 지나야 하는데 이곳은 포구가 좁고 암초가 많은 지역이었다. 적을 유인할 생각으로 몇 척을 견내량으로 보내자 예상대로 일본 함대가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일본 함대가 견내량을 거의 빠져나올 즈음, 와키사카는 주변을 살폈다.
아뿔싸! 일본 함대는 좁은 해협을 빠져나오느라 진형도 갖추지 못한 채 나란히 늘어서 추격에만 전념하고 있었고 조선 함대는 학이 날개를 편 듯한 모양의 학익진(鶴翼陣)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용머리를 한 정체불명의 배(船)들은 화포를 쏘아대며 돌진해 오고 있었고 학 날개의 양쪽 끝도 점점 조여지고 있었다. 조선 수군이 좌우를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거북선에 옆구리를 들이받힌 배들은 가라앉거나 화염에 휩싸여 순식간에 47척이 격침되고 12척이 나포됐다. 이 해전을 후대 사람들은 한산도대첩이라 불렀다.
https://youtu.be/XZaMu0cTgiU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