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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을 누리자
구자훈
‘아름다운 삶을 누리자’
6학년이 된 첫날이었다. 운동장 조례 때 우리 담임으로 소개된 그가 교실에 들어와
“내 이름은 아까 운동장에서 들어서 알았을 테고, 우리 올 1년 열심히 하자. 내가 가르치는 거 처음이라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겠다.”
하고 칠판에 백묵으로 커다랗게 쓴 것이다. 그는 스승 사(師)가 볼록 두드러진 단추가 다섯 개 달린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이 학생복인 줄 그때는 몰랐다. 스승이라 스승 사(師)가 새겨진 단추가 달린 옷을 입었나 했다.
그가 학적부를 뒤적여 보더니 한 아이의 이름을 불러 대나무 교편으로 칠판에 써 놓은 것을 가리키며 읽어보라고 했다. 지시받은 아이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겨우 들릴까 말까 한 작은 목소리로
“아름다운 삼을 누리자.”
했다. 나는 웃지 않았다. 58명 아이 가운데 글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아이가 별로 없었으니까. 그는 바르다 틀리다 말도 없이 다른 아이를 지명해 읽어보라고 했다.
이번 아이는 앞서 읽은 아이가 잘못 읽었다고 판단했는지
“아름다운 살을 누리자.”
하고 읽었다.
잇달아 지명받은 아이들은 앞서 읽은 두 아이 중 하나처럼 읽었다. 반장은 지명받지 않았다. 몇 명째인가 내게 차례가 돌아왔다. 아마 내 앞에 스무 명쯤 읽었을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읽었다.
“아름다운 살믈 누리자.”
그가 말했다.
“37등이 읽는 것을 우등생도 못 읽다니. 먼저 읽은 아이들 다 틀렸다.”
그랬다. 나는 5학년 말 학업 성적이 37등이었다.
6‧25 전쟁 때문에 5학년 때에 담임이 없었다. 교장이 담임을 대행했는데 거의 자습으로 보냈다. 칠판에 한자를 몇 자 적어 주고 그것을 반복해서 쓰게 하는 것이 담임으로 한 일 중 최선이었다. 다른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 시험도 친 적이 없다. 담임 대행인 교장은 학생들에게 점수를 기록하는 카드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거기에다 수시로 점수를 적어 주었다. 사친회비 내면 몇 점, 이발하면 몇 점, 손발이 깨끗하면 몇 점, 의복이 단정하면 몇 점, 자기한테 선물하면 몇 점 등. 가끔 아버지나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짚으로 감싼 달걀 꾸러미를 교장에게 전달하는 아이가 있었다. 사친회비 납부가 늦거나 몸에 때가 있거나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길거나 하면 감점도 주었다. 담임 대행 교장의 평가는 좋게 보면 종합평가라 할 수 있겠는데 그게 공정하지 못했다. 만약 공정했다면 나는 형편없는 학생이었다. 5학년 종업식 날 성적 카드로 예측한 36등보다 더 나쁜 37등의 성적통지표를 들고 집으로 들어서며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까지 그렇게 서럽게 운 적이 없었다. 그렇게 운 덕인지 어머니한테도 아버지한테도 꾸지람을 듣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가끔 아버지가 객귀 물리던 장면을 떠올리며 교장을 증오했다. 그러나 학년말 몇 개월 전 12월에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 한국 방문 환영 대회가 이웃의 신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그 구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장의 학급 관리 소홀 덕이었다. 그 행사는 동 대항의 풍물대회였는데 나는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은 친구가 함께 가자고 해 학교를 빼먹고 그 대회 구경을 갔다. 어차피 자습으로 때우고 수업은 없을 것이라 그렇게 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구경에 대한 기대가 커서 나중에 벌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같은 건 추호도 안 했다. 친구와 나는 어버지의 친구인 정남발 씨의 아주 기발한 분장과 감쪽같은 연기 덕으로 우리 동네가 1등을 차지해 황송아지를 상으로 받은 자축 뒤풀이까지 따라다니다가 밤늦게 귀가했다. 우리 동네에 1등을 안겨준, 여인이 사내를 업고 춤을 추는 역할을 혼자서 한 놀이에 속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여인의 다리와 업힌 사내의 상체가 정남발 씨고, 고깔을 쓰고 고개를 숙인 여인의 상체는 인형이었다. 정남발 씨는 복화(腹話)로 여자 목소리도 기막히게 잘 구사했다. 쉴 때 누가 ‘무거울 텐데 내리시지요.’ 했을 때도 복화로 ‘이 사내가 하도 헤깝아서 괜찮심더.’ 여자 목소리로 말해 모두 속아 넘어갔다. 친구와 나는 이튿날 각오한 벌을 받지 않았다. 교장이 아침부터 급장에게 학급 관리를 맡기고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고자질하지도 않았고. 나를 꾀어 함께 구경 간 친구는 덩치가 나보다 훨씬 컸다. 이 친구는 저학년 때 자기 집에 있는 시계에 하루에 한 숟가락씩 설탕을 먹인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시계의 태엽 감는 일을 밥 준다고 했고, 다른 집엔 시계가 없었던 터라 그 말을 모두 믿었다. 터무니없는 믿음은 또 있었다. 하나는 전쟁 중 김일성에 관한 소문으로 김일성이 파리로 변신도 해 절대로 죽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아이들을 공포의 도가니에 휩쓸리게 한 뇌염에 관한 것이었다. 걸리면 죽고, 사람 많은 데 가면 바로 옮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빼먹은 일도 있었다. 홍역이 한 번 돌면 한 집에 몇 명이 죽어 나간 일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가정상비약으로 코딱지 같은 검은 아편과 금빛 금계랍이 있었다.
6학년인데도 아이들이 글만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구구단도 좔좔 외는 아이는 다섯 명도 안 되었을 것이다. 3학년 때 6‧25 전쟁으로 피란을 가는 바람에 수업을 몇 달 빼먹었고, 5학년 때는 수업도 받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6‧25 전쟁은 많은 낯선 일들을 치르게 했다. 피란을 하기 전 마을에 군부대와 그 가족들이 들어왔다. 어떻게 군부대와 그 가족들이 함께 우리 마을에 들어왔는지. 지프차, 스리쿼터, 지엠시 등 군용차들은 나뭇가지와 풀 같은 것을 위장망에 꽂아 하늘에서 몰라보도록 했다.
군부대와 함께 들어온 사람 중 우리가 내어준 건넌방에 든 가족 중에 5학년인 성두승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내가 다닌 학교에 전입학을 했고, 그의 낭독이 훌륭하다며 교실마다 다니며 시범 낭독을 했다. 우리네 낭독과는 판이한 높낮이가 확연한 그러한 낭독이었다. ‘서울내기 다마네기’라는 말도 떠돌았다. 까도 까도 속이 안 나온다고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을 향해 욕할 때 새끼라고 하는 욕도 전에는 없었다. 고작 이놈이라고 했다.
피란민 중에 젊은 여자 폐결핵 환자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폐병쟁이라 했다. 그는 나를 귀여워했는데 몸이 대단히 야위었고, 얼굴이 파리했으나 곱고 예뻐 보였다.
우리도 소개 명령이 내려 피란을 갔다. 달구지에 솥, 냄비, 식기, 수저들과 옷가지들을 실을 만큼 싣고 갔다. 첫날부터 며칠은 팔달교 인근 부엉데미에서 보냈다. 팔달교 부근 금호강 모래밭에 미군이 주둔해 있었는데, 사촌 형이 미군 하우스보이를 해서 껌, 초콜릿 따위를 얻어오곤 했다. 막내 삼촌은 사과를 떼어 길가에서 팔기도 했다. 가끔 소년들이 ‘평화신문’이라고 외치며 신문을 팔러 다녔는데 나는 그 신문이 평화가 왔다고 알리는 신문인 줄 알았다. 어느 날 우리 소가 가마솥 전을 밟아 다치는 바람에 그 소를 잡아야 했다. 장조림을 조리해 오래오래 먹었다. 재산상 큰 손실이었으나 우선은 곶감이었다. 얼마 후 노곡동으로 옮겼다. 거기서 헛간에서 지냈는데, 집주인이 할아버지가 재실을 지어준 일이 있어 배려해 준 덕이었다. 거기서 지낼 때 백부가 보국대에 동원되었다. 또 소개령이 내려 그곳을 떠난 것은 달도 없는 어두운 밤이었는데 열여섯 식구의 가장인 할아버지는 만약 가족을 놓치면 할아버지라도 이름을 부르라고 일렀다. 강을 건너서는 물에서 좀 떨어진 강바닥에서 그 밤을 보내고 이튿날 강의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서 대구 시내로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노렸다. 피란민들이 대구 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게 충북경찰대가 지키고 있었다. 금호강 강변 제방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대구 시내로 들어갈 방법을 모색하는 중에 사촌 형이 양식용 미제 나이프를 가지고 있었는데 종조부가 그것 가지고 있다가 혹시 인민군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어쩌려느냐 야단치며 버리라고 해 못내 아쉬워하며 버렸다. 당시 어른들 사이에는 전쟁에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던 듯하다. 하긴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하를 했으니. 노곡동 뒷산 엎어놓은 함지 모양의 속칭 반팅이 산에 적의 포탄이 떨어지고 흙이 풀썩 솟아오르기도 했다. 대구로 들어간 것은 침산 부근에서였다. 할아버지가 지키는 사람에게 돈을 좀 찔러 주어서 가능했다. 최종 피란지는 대구 종합운동장 앞이었다. 오래전부터 거기에서 살던 육촌 형의 집이었다. 할아버지가 지은 집이었다. 밤이면 팔공산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예광탄이 간헐적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철없는 나에게는 그것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낮에는 종이 탱크를 만들어 바람에 굴리며 놀았다. 짧고 굵은 종이 원통을 만들어 구멍을 숭숭 뚫은 것인데 바람을 맞으면 탱크의 캐터필러처럼 굴렀다.
하늘에서 전단이 반짝이며 눈처럼 쏟아졌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소식이었다. 며칠 후 피란을 끝내고 귀향했다. 사수 고개에서 집 쪽을 보니 문간방 한 칸, 디딜 방앗간, 그리고 외양간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 있었다. 그 건물이 없어져 사랑채의 마루가 훤히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가 아군의 포진지였다. 피란에서 돌아와 독에 담아 뒤꼍 석류나무 아래에 묻어둔 책을 파보니 무사히 있었다. 그러나 곳간 바닥에 묻어둔 옷가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구덩이를 파낸 흙이 마당에 쌓여 있어서였을 것이다. 사랑채 마루로 오르는 섬돌 아래에 묻어둔 것은 그대로 있었다. 학교에 가니 책걸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교사가 남아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교사 기와지붕에 알 수 없는 꼬부랑 큰 글씨가 희게 씌어 있었는데 그 덕분에 교사가 무사했다고 했다. 그것은 나의 담임 교사가 쓴 것으로 학교 이름이라 했다. 학교라서 폭격을 면했다고들 했다.
나는 그 무렵 자주 앓았다. 이질이 걸리면 생 쑥을 찧어서 즙을 내어 마셨다. 한 대접씩. 입에 몹시 썼으나 곱똥이 간단없이 바지에 내질러지는 지저분한 병에서 벗어나자면 어쩔 수 없었다. 학질도 연례행사처럼 치러야 했다. 학질을 낮에 존다고 도둑놈병이라고도 했다. 큰집 재실 뒤에 있는 아름드리 참나무에 새끼로 학질을 앓는 아이를 묶어놓고 도끼로 참나무를 찍으며 병을 쫓는다고 하는 일도 있었다. 도둑놈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일을 겪지는 않았고, 금계랍을 먹은 적이 있다. 나는 쇠버짐을 몹시 앓은 적도 있다. 온갖 조약을 했으나 듣지 않았다. 또 혓바늘이 자주 돋았다. 대구 묘포장(苗圃場)에 주둔해 있었던 미군 부대에서 위생병인지 군의관인지 알 수 없는 흑인 군인에게 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 얼굴에 마른버짐도 많이 피었다.
나는 1941년 3월 21일에 칠곡, 달성 두 개 군에 걸쳐 넓은 토지를 소유했던 대지주의 여러 증손 중의 한 명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 그때 아버지는 만주에 있었다. 일제의 징용을 피하려고 망명도생(亡命圖生)해 하얼빈에서 북쪽으로 80리 떨어진 북성현에서 노는 땅을 개간해 규모가 꽤 큰 농사를 지었다. 말이 네 마리였다고 한다. 거기서는 말이 소 역할을 했다.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다.
어머니는 열일곱 살 때 열아홉 살인 아버지와 혼인을 했다. 아버지는 간이학교도 서당도 다니지 않았으나 한글은 부려 쓸 수 있었고 한자도 좀 알았다. 어머니 역시 학교고 서당이고 다니지 않았으나 소학교를 다닌 두 오빠 덕에 한글과 한자 습득 정도가 아버지 정도는 되었다.
할아버지는 막내이자 셋째아들이었는데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목이었다. 멀리 부산에서 재실을 짓기도 했다. 설계도도 잘 그렸고, 상량문도 직접 쓰는 경우가 많았다. 3년 상중에는 좁은 단위의 집안 족보다 붓으로 직접 썼다.
어린 나를 고모들이 서로 업고 나가려고 했다 한다. ‘그놈 밉상이다.’ 소리 듣는 재미로. 나보다 두 달 정도 늦게 난 4촌 여동생은 외면당했고. 어머니는 내가 훤하게 잘생겨 그랬다고 했으나 아마 남아 선호 사상이 빚어낸 결과이리라.
초등학교 입학하기 1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전기한 4촌 여동생에게 꼬여 발가벗은, 땟국이 조르르 흐르는 맨몸으로 고추를 달랑거리며 아랫마을 큰고모네 집까지 간 적이 있다. 큰고모가 얼마나 당황했을까. 큰고모가 내 몸을 뽀드득뽀드득 씻겨 주었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 옷을 입혀 보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때 많이 모자라는 아이였다. 여름이었는데도 내 몸에 땟국이 흐른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할아버지 집에 떨구어 놓고, 대구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6‧25가 일어나 할아버지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면서 합가할 때까지 어머니의 속병과 내 동생의 척수로 치료차 대구에서 살았던 것이다. 합가는 우리만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농토를 싸게 팔아 대식구 피란에 다 써버린 탓이었다. 경마장에 붙어 있는 그 농토를 판 것도 할아버지가 그냥 가지고 있으면 경마장에 주둔한 미군에게 뺏긴다고 성화해서 팔았다고 어머니가 뒷날 여러 번 어려울 때마다 들먹이며 아쉬워했다.
어머니가 나를 낳은 것은 스물한 살 때였다. 나는 아버지 망명 중 돌을 맞았고 그런 나의 돌이 쓸쓸할 것을 가엾이 여긴, 어머니의 오빠들이 와서 돌떡 값을 주고 갔는데 그 돈을 소학생이었던 셋째 삼촌이 들고 가 놀음으로 날려 버렸는데, 어머니는 내 앞이 잘 풀리지 않고 꼬인다 싶으면 그 때문은 아닌가 하기도 했다. 삼촌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돈을 따서 다시 갖다 놓으려 했다고 고백을 했다고 했다.
스물세 살 어머니가 나를 업고 이틀 밤낮 걸려 하얼빈까지는 열차로 거기서 다시 마차로 80리 북쪽으로 아버지를 찾아간 것은 내가 세 살 때였다. 열차에서 내렸을 때 짐을 들어준 빨간 모자의 마루보시 직원의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도망가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만주에서 중병도 앓았다. 그때 나의 비싼 약을 고양이가 먹어 버렸고, 그 고양이가, 아버지가 던진 사발에 맞아 다리가 부러진 채 절뚝거리며 다녔는데, 나의 어머니는 가끔 영물인 고양이를 그렇게 한 탓으로, 당신의 둘째 아들, 내 동생이 병을 얻어 낫지 않아 장애인으로 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만주에서 손발이 얼었는데 그 후유증은 운동화를 제대로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발가락이 붓고 손가락이 터질 정도로 중3 때 극에 달했고 군 복무 때까지 이어졌다.
만주에서의 기억은 어릴 때라 별로 없다. 막내 고모와 함께 걷던 넓은 신작로가 떠오르고, 자운영꽃이 만개한 논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꿩꿩 우는 꿩 소리를 듣고 꿩알을 찾아 논의 풀 속을 뒤지기도 했다. 주위에 산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붙어 불 들어가는 아궁이 앞에서 보낸 일도 생각난다. 옥수숫대가 땔감이었다. 화적을 막기 위해 마당에 화톳불을 피우고 그 불 둘레에 화총을 앞에 세우고 둘러선 어른들의 수런거리던 일도 기억이 난다.
사실은 기억한다는 것도 더러는 들은 이야기를 기억으로 착각하는 것도 있으리라.
나의 만주 생활은 조국광복으로 막이 내린다. 아, 그때 아버지가 고향에 가 있지 않았다면 나는 조선족 중국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동안 그곳에 상당한 기반을 쌓았고 그것을 그냥 버릴 용기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일시 귀향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중국에서 아주 값나가는 섬유 제품을 대구에서 사서 중국에서 팔아 거액을 거머쥐겠다는 의도였던 것.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 아버지는 화적에게 돈을 털릴까 봐 솜처럼 옷에 누벼서 고향에 왔다. 아버지는 그 많은 돈을 우선 할머니에게 맡겼다가 갖가지 옷을 사서 여러 궤짝을 꾸려 만주로 보냈는데 광복으로 그만 증발해 버렸다. 두 고모가 ‘우리나 한 벌씩 주지’하며 아쉬워하는 소리를 나도 몇 번 들었다. 얼마나 아쉬웠으면 먼 훗날까지도 이따금 되풀이했을까. 막내 고모는 그때 뒤늦게 합류해 만주에 있었다.
어머니, 나, 여동생, 고모, 삼촌은 아버지 없이 열차로 한 달여 걸려 귀국을 했다. 키우던 개가 역까지 따라왔는데 이 개가 아주 영리했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가 밤늦게 귀가하면 발소리로 알아보고 멀리까지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귀국 길에 화물열차 지붕에 빈대처럼 붙어서 온 적도 많다. 비가 오면 가마니때기를 덮어쓰기도 했다. 내가 심하게 앓기도 했다 한다. 터널을 지날 때는 납작 엎드려야 했고 터널을 벗어나면 얼굴은 숯검정이 되었다.
열차는 시간을 정하여 운행한 것이 아니라 한 번 멈추면 언제 다시 출발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기약 없이 서 있기가 일쑤였다. 일단 서면 차에서 내려 밥을 해 먹곤 했는데 뜻밖에 일찍 출발하면 안친 쌀을 쏟아버리고 차에 오르곤 했다. 차를 놓치면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다음 열차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차해 있던 차가 갑자기 출발하는 바람에 만주에서 태어난 내 여동생을 업은 어머니가 승강구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 다음 정차할 때까지 몇십 리를 버틴 적도 있다 한다. 나는 셋째 삼촌에게 업혀 올 때가 많았다. 셋째 삼촌은 내 돌떡 값을 고스란히 놀음으로 날린 바로 그로 소학교 졸업반 때 담임 교사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소년병 지원을 했다가 그 소년병이라는 것이, 폭탄 실은 비행기를 혼자 타고 적 군함을 들이받아 자폭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의 아버지인 형한테로 멀리 도망을 친 것이다. 몇 년 전 그 삼촌이 나에게 보여준 당신의 소학교 학적부 복사본에는 마지막 학년에 담임 교사의 도장이 찍혀 있지 않았다. 그 삼촌은 6·25 전쟁 중 소집 영장을 받고 입영하는 환송식에서 다른 장정들과 함께 태극기 머리띠 두르고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도 계세요. 까마귀 우는 곳에 저는 갑니다. 삼팔선을 돌파하여 … 죽어서 백골이나 돌아오리라’,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 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치는 애국이 깃발 높고 넓은 사나이 마음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같은 처연한 노래를 비장하게 부르고 입대를 했으나 할아버지의 끔찍한 자식 사랑 덕에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마치고 칭병으로 부산의 거제리 병원에서 보내다 제대를 했다. 할아버지가 제주도까지 가서 군의관인지 누군가에게 남이 보거나 말거나 돈 보따리를 안기며 막무가내로 매달린 결과였다. 군인이 전사하면서 ‘빽’ 했다던 시대였다. 백부는 일제 때도 끌려가 부역을 했는데, 6·25 때도 보국대로 참전을 했다. 아버지는 보국대에 갈 나이였으나 어떻게 피했는지 가지 않았다. 전쟁 중 청송에서 숯을 굽는 산판을 했는데 한번은 공비가 쏜 총이 숯 운송차로 날아오기도 했다 한다. 그때 구해온 토종꿀도 떠오른다. 작은 질그릇 단지에 담긴 굳은 것이었는데 옅은 미색이었다.
광복 후 만주서 돌아올 때 3·8선을 넘을 때는 야반에 안내하는 꾼에게 돈을 주고 숨죽이며 걸어서 넘었다. 총소리도 ‘딱콩’ 하고 간헐적으로 들렸다.
나의 만주 생활은 동상에 걸린 것뿐만 아니라 다른 후유증도 남겼다. 그것은 말이었다. 우리말 구사가 어둔했고 높임말을 쓸 줄 몰랐다. 내가 높임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 때였다. 교사에게 내 이름이 불려 ‘예’하고 대답을 한 것이. 그것도 학교로 가는 길에 나를 데리고 간 고모가 수없이 겁을 주며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한 것이었다.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 때 나는,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온 어른이
“네 아버지 계시냐?”
하고 물으면
“없다.”
하고 대답했고, 그러면 어떤 사람은
“허, 그놈 참 양반이네, 허허.”
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양반은 소위 상것들에게는 하게도 아닌 해라를 했다. 나이가 장년은 되었을 마을 하님이 있었는데 그에게 아이들이 합쇼를 하면 어른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꾸짖었다. 남자였는데 왜 하님이라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급우들은 대개 나보다 한 살, 두세 살 위였다. 마을에서 내 동갑들은 다 한 학년 또는 두 학년 나보다 아래였다. 심지어 세 학년 아래도 있었다. 나의 입학도 할아버지가 통학길이 멀다고 아직 안 된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는데 어머니가 고집을 피워 가능했다. 할아버지의 장손인 사촌 형과 막내 삼촌이 나보다 네 살 위였는데 학교는 2년 선배였다.
초등학교 입학 전 몇 해는 나에게 아주 화려한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작은외삼촌과 함께 증류식 소주를 고아 제법 여유 있게 살았다. 어린 나도 맞춤 양복을 입고 으쓱했고, 동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아버지의 술도가에 마을 사람들은 일도 얻었고, 멍석에 널어놓은 고두밥을 슬쩍 집어먹거나 소주와 술지게미 등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세무서에서 와락 덮쳐 기물을 다 실어 가버려 풍비박산 깨끗이 망했다. 아버지의 양조는 불법으로 밀주를 제조해 그럴듯한 상표를 붙여 팔았던 것이다. 싸게 팔아 찾는 고객이 많았던 것 같다. 무허가가 어떻게 몇 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는지.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에야 공부를 좀 하는 축에 들었다. 2학년 1학기 28등, 2학기 20 등이었던 2학년 때에 비하면 큰 진보였다. 2학년 때 담임이 3학년 때도 담임을 맡았는데 3등을 했다. 4학년 때 담임이 바뀌었으나 그 자리를 지켰다.
6학년 때는 나의 전성시대였다. 담임 교사가 우리를 맡은 첫날 ‘아름다운 삶을 누리자’를 제대로 읽은 나를 좋게 보았는지 그는 무척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나에게 운동장 전체 체조 때 교단 위에서 시범 체조를 하게 했다. 음악에 맞춰서 했는데 빠르다는 지적을 여러 번 받았지만 계속했다. 학예회 때는 그가 극본을 쓰고 연출한 계몽극에서 주연인 교사역을 맡겼다. 급장에게는 조연인 동장역을 주었다. 5학년 학예회 때도 연극 원술랑 공연에서 배역을 맡았으나 단역이었다. 그때는 반장이 원술랑을 맡고 부반장이 임금을 맡았는데 나는 임금 옆에 엎드려 있는 신하역을 맡았으나, 연출한 여교사가 나에게 맡긴 주 역할은 부급장의 대사를 일러주는 것이었다. 급장은 나보다 세 살이 더 많았는데 팔방미인이었다. 못하는 게 없었다. 6학년 때 대구사범학교 주최 어린이 사생대회에 참가해 4등에 입상하기도 했다. ‘원근이 잘 나타나는 걸 그렸으면 1등도 할 수 있었는데’ 하고 지도했던 교사가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어, 셈본, 사회, 과학 성적은 내가 더 좋았다. 그 학교 교사로 근무했을 때 확인해 본 결과다. 담임은 나에게 학급회 총무도 맡겼다. 가을 소풍 때다. 담임은 소풍 장소로 20리 떨어진 자기 마을 노곡동 앞 금호강 모래밭으로 정했다. 우리 가족이 피란 때 잠시 머물렀던 마을 앞이었다. 그때 나는 아이들에게 거둔 학급비를 가진 채 자유롭게 놀았다. 그 돈으로 담임한테 무엇을 사 드려야 하는데. 그 6학년 때 나는 아무도 풀지 못한 셈본 문제 하나를 칠판 가득 풀이한 적이 있었다. 담임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물었으나 누구에게도 배운 것이 아니었고 참고서나 자습서도 없어서 그런 걸 보고 예습한 것도, 혼자 예습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담임은 맞았다는 말도, 틀렸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담임이 해 볼 사람 손들라고 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있으면 들지 않았다. 손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손을 들었다. 그때도 그랬다. 졸업 때 반장은 교육감상을 받고 나는 교육회장상을 받았는데 나의 부상은 두툼한 모범서간문이라는 한자가 섞인 책이었다.
‘아름다운 삶을 누리자’로 인상 깊게 만난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 내 인생을 결정지었다. 그가 권한 중학교에 진학한 것부터 비롯해. 특차 모집이었던 그 학교에 떨어지고 1, 2차 시험에서도 공립학교에 합격 못 하면 들어갈 공장이 나에게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학교 입학시험 때, 지원서 사는 것도, 접수도 함께 지원한 반장과 둘이서 했다. 학교에서 사수동, 금호동을 거쳐 팔달교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시영버스를 타고 종점인 대구역까지, 거기서 내려 걸어서 학교까지 가서였다.
어머니가 저고리 안에 나의, 보통 배냇저고리라고 하는 일안저고리를 저고리 안에 꿰매준 옷을 입고 시험을 쳤다. 일찍 운행하는 버스도 기차도 없어 어둑어둑할 때 출발해 고개를 두 개 넘으면 길이 단축되기는 했으나 혹시 화물차라도 얻어 탈 수 있을까 도로를 따라 추동교, 태전교, 팔달교를 거쳐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호리 45번지에서 대구시 대명동 108번지까지 60리 길을 아버지와 함께 걸어서 시험장까지 갔다. 아버지가 점심으로, 태어나 처음 먹어본 중국 고기만두를 고사장에서 멀리 떨어진 시내에 나가서 사와 구내식당에서 산 국과 함께 먹게 해 주었다. 그때 아버지를 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마다 떠올렸다. 그러나 합격은 가망 없어 보였다. 필답고사 이튿날 신체검사를 했는데 그때 대구 아이들이 나는 300점이다, 290점이다, 해 쌓았다. 나는 그때까지 그처럼 어려운 시험을 쳐 본 적이 없었고, 형편없는 점수밖에 못 받을 것이 뻔하다 싶었다. 그때까지 가르쳐준 사람이 출제한 시험 문제에 익숙해 있었고, 그런 시험에서 오답을 쓴 적이 별로 없었던 나에게 답을 알 수 없는 문제가 가끔 돌출하는 바람에 맑은 날에 벼락을 맞는 것 같았다. OX 문제도 많았는데, 학교 시험에서는 그러지 않았는데 틀리면 감점을 한다고 해 불안하게 했다. 애국가 가사를 띄어쓰기에 맞게 써야 하는 문제는 제대로 맞혔고, 비워둔 애국가 곡조의 음표 및 쉼표도 바르게 그려 넣었다. 그러나 애국가를 한자로 쓰기는 착각으로 틀렸다. 애국가를 노래로 이해하지 않고 애국하는 사람으로 오해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노래 가(歌)를 써야 하는데 집 家(가)를 쓴 것이다. 애국자는 왜 떠오르지 않았는지. 애국가에 관한 문제가 두 문제나 더 있었는데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생각할수록 실수가 뼈아팠다. 그것 말고도 틀린 문제가 많은데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며 생각을 털어버리려 하기도 했다. 애국가 문제가 세 문제나 출제된 것은 전후라 그랬는지 사범학교에 병설된 학교라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머니의 ‘죽으면 썩을 몸, 뭘 그리 아끼느냐’는 소리를 귀따갑게 들으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한 것은 반성하지 않고, 시골 학교에 다니게 한 부모만 원망했다. 아버지한테는 감히 말하지 못했지만. 아주 잘못 치른 시험이라 결과 발표도 보러 가지 않으려고 했다. 매일 밤 사과와 달걀 한 개씩을 챙겨주며 뒷바라지했던 아버지, 어머니도 발표는 봐야 할 것 아니냐는 소리도 안 했다. 사과도 달걀도 당시 우리 형편에 예사 호사가 아니었는데 그걸 꼬박꼬박 받아먹은 게 미안했다. 그때 어머니는 임신 중이어서 먹고 싶은 음식도 많았을 것이다. 어느 일요일이었던가 어머니가
“치도에 오징어 있을 낀데”
했다. 철이 없었던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웃의 친구가 자기는 시험을 잘 쳤다면서 발표를 보러 가자는 바람에 마지못해 따라갔는데 도중에 이미 발표를 보고 돌아가는 친구가 ‘다 떨어졌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며 돌아서는데 그 친구가 ‘너는 됐다’고 했다. 거기가 명덕초등학교 부근이었다. 시험 본 학교 쪽을 보니 운동장에 얼마의 학생들이 무질서하게 모여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합격자들이었다. 나는 급히 학교로 가서 별로 믿어지지 않은 합격을 확인했다. 교사 처마 밑에 붓글씨로 세로로 벌여 쓴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었고, 수험번호가 115번이었던 내 번호와 이름이 이내 눈에 잡힌 것이다. 116번이었던 반장도 당연한 일이지만 합격이었다. 애초에 담임은 반장과 나에게만 지원을 권했으나 모두 일곱 명이 시험을 보았는데 담임이 권했던 둘만 합격한 것이다. 나의 모교보다 세 배와 네 배로 큰, 지천면 소재지와 칠곡면 소재지의 두 학교는 합격생을 한 명도 내지 못했는데 둘이나 합격한 것이다. 5학년 때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경쟁률 9.3대 1이었던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6학년 담임 덕이다. 그는 아주 잘 가르쳤고 밤에도 늦게까지 학교에서 자습하게 했다. 그도 우리 뒤에서 대학 입시 준비를 했다. 가끔 대학 진학 준비서를 보여주며 우리 교과서에 있는 내용과 같은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인돌 같은 것이 그런 것이었다.
합격자 명단은 또 있었다. 요즘 에이4 용지인 8절지에 등사된 것이었는데 남녀별로 성적순으로 배열된 남녀별 명단이었는데 벽에 붙어 있었다. 내 석차는 120분의 88이었고 득점은 300분의 268이었다. 꼴찌 합격자의 점수는 264점이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겨우 합격한 것이다. 1등은 286점이었다.
입학금 납부 등 안내를 받고 학교를 떠나면서 교문을 벗어나며 뒤돌아보았는데 거기 작은 인공 동산 앞에 자연석의 한 면을 깎아 세운 비석에 세로로 새겨진 글이 눈에 들어와 나를 미소 짓게 했다. 교훈이었다.
아름다운 삶을 누리자.
첫댓글 안개를 걷어내는 듯한 유청소년기의 리얼리즘!
진솔한 흡인력에 느낌좋은 매력글.
오는 듯한 가을이 그냥 가고 있내요!
감미로운 말은 역시 듣기 좋군.
문장가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입담도 예술입니다.
외부에서 잠깐 들렸다가 흐뭇한 미소를 남기고,
귀가하여 큼직한 pc에서 마당놀이 할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자서전 같기도 하네요. 6·25 전쟁은 물론 당시의 사회상도 눈에 뵈는듯 함다.
참 어려웠던 세월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소. 부산넘
읽어 주시고 리뷰까지 달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은 대구사범 2회이시고, 대구 노곡동 분이셨습니다.
은혜를 조금이나마도 갚을 기회를 안 주시고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진로에 결정적 역할을 해 주신 분인데.
에고고 명치야.
줄 바꾸어 내려오니 여긴가? 아래인가? 헤맸다가 글자를 키우니 아랫 줄 당기느라 서툰 마우스질해야 하고
아~~! 바람새의 날개도 이젠 늙었나 봅니다.
끝까지 읽고 나니 눈 앞이 캄캄.
널문니 작가님의 기억력, 타자에 깜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