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에도 있는 북천 경북 상주에도 있는 북천 강원도 고성에도 있는 북천
지명에도 있고 하천명에도 있고 간이역 이름에도 이대흠의 시에도 스님 법명에도 있는 북천
북천의 뒷산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살고 사시사철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이 출시되고 아이스크림 장사보다 참나무 장작 장사가 더 잘 될 것 같은 북천 청둥오리 떼를 잡아 연탄불 위에 굽는 저녁이 왁자할 것 같고 큰 강의 얼음장은 국어대사전보다 두꺼울 것 같고 이런 추측은 북천이니까 가능할 것 같고
꽁꽁 얼어붙은 북천에는 투기꾼들이 묵을 여관이 없고 고층아파트를 짓지 않으니 은행에 대출하러 갈 일이 없고 은행원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을 필요가 없고 연대보증 부탁하는 시간에 처마 끝 고드름을 따먹을 수 있어 좋고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동요를 부를 수 있어 좋고 북천의 언덕에서는 마을의 지붕이 손바닥 안의 스마트폰처럼 다 보이고
북천 주변의 산골짜기에는 자작나무가 살고 산꼭대기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고갯마루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경사지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산속의 화전민도 자작나무를 때고 산속의 사찰에서도 자작나무를 때고 일 년에 딱 한 번 초파일에 절에 가는 여자가 사는 집에서도 자작나무를 땐다
온천을 좋아하는 사람은 북천에 노천탕이 있나 생각할 것이고 삼복염천을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은 북천의 마구간에도 에어컨이 들어오나 걱정할 것이고 천상병의 시를 읽어본 사람은 북천이 소풍 가는 곳인 줄 착각할 것이고 부천에 사는 사람은 부천에 왜 기역자가 하나 더 붙었지 하며 의아해할 것이고
나는 북천에서 태어나 보지 못한 사람 북천에 나가 빨래를 해보지 않은 사람 나는 그럼에도 친절해져서 북천의 스피커처럼 말한다
북천은 바로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손 뻗으면 닿는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만질 수는 없지만 보이는 곳에 있어요 북천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쌓아둘 수도 없지만 북천은 부서지지 않고 흘러내리지 않고 물렁거리지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요 북천은 비누처럼 미끌거리고 대파처럼 맵싸하고 비스킷처럼 바삭거려요 이 의미 없이 좋은 북천
〈안도현 시인〉
△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
△ '소월시문학상' '석정시문학상' 수상
△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가야산 / 사진 〈Bing Image〉
〈신작시〉
북 산
안 도 현
북산은 함경남도 장진군 중남면과 장진면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2,070미터의 산이다 장진은 백석이 함흥에 살 때 장진 산골 날여멕이 바람이 강물을 스쳐와 희미한 선미(仙味)가 구름 우헤 떳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그 장진인데 그가 노루 새끼를 만난 장터에서도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어 넘석하는 거리라고 한 오지다 북산은 부전고원의 남쪽에 있다 부전고원은 개마고원의 서쪽에 있으므로 북산은 그러므로 한반도의 지붕이라 해도 되고 백두대간의 왼쪽 어깨뼈라 해도 좋겠다 북산에서는 벼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거머리나 벼메뚜기를 구경하기는 힘들 것 같고 감자밭이나 옥수수밭을 둘러싸고 있는 산중에 늑대 우는 소리는 들릴 것 같다 함흥에서 북산을 가려면 북산의 동쪽 부전호반까지 연결된 송흥선인가 신흥선인가 하는 철도를 이용해야 하는데 함흥역 가담역 부민역 장흥역 영광역 풍상역 천불산역 신흥역 동흥역 경흥역 송하역 송흥역 부전령역 함지원역 도안역 부전호반역 그 이름들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는 기어이 낙엽송이나 가문비나무 숲속에 있을 듯도 하다 철도의 일부 구간은 급경사 때문에 인클라인(incline) 장치를 설치했다 하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쇠밧줄철길이라 부른다 산꼭대기에서 늘어뜨린 쇠밧줄이 산허리 경사면에서 쩔쩔매는 기차를 끌어당긴다는 것인지 기차와 기차를 연결한 쇠밧줄이 아래쪽 기차를 끌어당긴다는 것인지 나는 당최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북산, 북산, 하면 참 아득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남한산성 북문 / 사진 〈Bing Image〉
〈신작시〉
북 문
안 도 현
눈보라가 들어와서 무릎 꿇고 울던 북문
오래전 여진족 기마 부대가 들이닥치던 북문
땔감 장수들이 지게 내려놓고 유곽 쪽을 힐끔 바라보던 북문
팔목에 쇠갈고리 끼우고 상이군인들이 찾아오던 북문
현판에 북풍한설이라 쓰고 태평천하라고 읽던 북문
월북 작가들이 빠져나간 북문
나무들이 발목에 흰 붕대를 감고 산에서 내려오는 북문
피부가 거친 굴참나무와 화상 자국이 또렷한 노각나무가 사는 북문
아는 나무보다 모르는 나무가 많아서 좋은 북문
나 제일 친한 친구의 집 어두운 처마 안쪽이 환하던 북문
장끼가 떨어뜨린 꽁지깃으로 벽에다 시를 몇 줄 끄적이던 북문
내가 쓴 시가 하늘로 가서 흰 눈이 되던 북문
북문 가까이 얼씬대지도 말라고 하던 북문
북문의 여자들을 생각하지도 말라고 하던 북문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만큼 눈발이 쏟아지던 북문
사진 〈Bing Image〉
〈자선시〉
모래무덤
안 도 현
우리가 몸을 섞을 때 정말 짜릿했지
너는 자주 나의 가슴 위로 스르르 미끄러졌어
냇물이 모래톱에 글자를 적다가 떠나면
냇물이 만든 문장을 해가 질 때까지 읽었고
너를 만나면 너를 위하여
발목과 무릎을 떼어 내고 나는
허벅지까지 서늘하게 도려냈지, 그때
부드러운 살을 열어주던 너는
들어가기 딱 좋은 무덤이었지
냇가에서 흰목물떼새의 발자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대처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아이를 낳았지
날개와 날개가 맞닿는 순간의 온도를 체크하고
별안간의 이별과 망각의 농도를 예측하면서
억새와 갈대와 달뿌리풀과 버드나무가 이주해 왔다더군 그들이 몸속에 이상한 정부를 세웠던 거야 너나 나나 어제보다 오늘이 극한상황이라는 거 몰랐어, 정말
너를 만지는 내 손, 이게 도무지 뭐냔 말이다
눈송이를 받을 줄 아는 손바닥이 있어도
허공이 헐거워져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
눈 내리는 소리를 듣고 싶은 귀를 가졌어도
너의 메마른 숨소리 귓가에 쌓이지 않는
모래 속에 몸을 묻을 때
그때 내 무덤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봐도 좋았으련만
삼겹살을 굽는 일도 싫증이 날 때쯤 술잔을 버리고 새 발자국이 끝나는 곳에 주저앉아 있어 봐도 좋았으련만
자갈은 언제 냇물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잘게 부서지나
나는 어느 때쯤 물소리를 팔아 거창하게 한몫 벌게 되나
사진 〈Bing Image〉
〈자선시〉
마음에 대하여
안 도 현
마음이란 게 있어서 마음이 발 달린 짐승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마음이 굴러가다가 제일 나중에 가닿고 싶은 그곳을 마음의 처소라고 부르자 더 이상 갈 데도 없고 해야 할 말도 없는 마음이 앞에 앉은 여자의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리, 성스러운 것도 속된 것도 없는 마음이 발소리 죽이고 어깨를 낮추고 빈 술잔에 입술을 댔다 뗐다 하는 자리, 이어지지 않았지만 끊긴 것도 없고 풀어놓지 않았지만 묶어 놓은 것도 없는 논바닥의 지푸라기 같은 심정을 마음이라고 부르자 볕 잘 드는 오후쯤에는 마른 들깻대를 털다가 들깨꽃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셋방을 놓을 수 없을까를 생각하고 그 셋방 얻으러 오는 마음에게 셋방 내주는 마음으로 술 마시고 싶은 자 술 마시게 하고 울고 싶은 자 울게 하고 인생 탕진하고 싶은 자 탕진하게 방치한들 어떠리 여기에도 마음이 있고 저기에도 마음이 있는 것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하려고 애쓰는 마음이나 매한가지일 것이니 창틈에서 손을 빼지 못하는 바람의 마음이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끼의 마음이나 바위 속에 식솔들 재워두고 세상 구경 나온 마애불의 마음이나 대처나, 안팎이 없으리 꽃에 손을 대면 그때부터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밥을 입에 대면 그때부터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처럼 마음이여, 가까이 닿으면 금세 사라지는 방아깨비 다리여 멀리 멀어지면 이마로 들이받고 싶은 천둥소리여, 너나 나나 마음이 편지가 아니니 전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연못이 아니니 담으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보자기가 아니니 펼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칼이 아니니 새기려고 하지 말 일이다 빨랫줄을 받치고 선 바지랑대의 마음이나 빨랫줄에 몸을 걸친 빨래의 마음이나 다 잇대어 있고 겹쳐 있는 것을 세상 한 바퀴 휘 돌아와 가까스로 알아채는 날이 오면 그 어떤 의도도 목적도 없이 마주 앉아 한 끼 밥을 먹어도 좋으리, 그 어떤 계획도 행선지도 없이 지갑도 카드도 없이 길을 나서는 궁리를 해봐도 좋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