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ulpture of King Louis XIV 루이 14세 조각상 Antoine Coysevox
반전의 예술사 ⑦ 태양왕 루이 14세
아름다움은 곧 권력이다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군주나 정치가는 동시에 빼어난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가지고자 노력했다. 권력과 교양의 상부상조는 오늘날에도 대세를 이루는 경향이다. 정치가나 기업인들이 모여 고전음악이나 미술 감상 모임을 가지고, 기부를 하고, 나름 교양 강좌에 열의를 올리는 모습은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전통이 된 지 오래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정착의 기미가 보인다.
하지만 실은 거꾸로 보는 게 맞다. 즉, 오피니언 리더가 되기 위해 예술을 덤으로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 예술에 해박한 사람들이 결국 성공적인 리더가 된다는 말이다.
심미안의 소유자들은 아름다움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서 익히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무기 삼아 대중에게 남다른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美)를 앞세운 권력은 사실 천하무적이다. 그 어떤 합리적인 이성도, 도덕심도, 아름다운 것에 이유 없이 끌리는 인간의 본능에는 도통 당해낼 도리가 없다.
역사상 이와 같은 예술의 힘을 누구보다도 통찰하고 가장 스케일 크게 활용했던 인물이 바로 프랑스 왕 루이 14세다. 그는 통치 기간부터 남달랐다. 1638년 태어나 네 살에 왕위에 등극하고 1715년 죽을 때까지 무려 72년 동안 왕좌를 지켰다. 당시 서른 살을 넘기지 못하던 유럽 인구의 평균 수명과 비교하면 획기적인 장수 기록이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장수 통치가 반드시 탄탄한 집권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이 역사적인 절대군주의 시작은 미미하고 또 위태로웠다. 상식적으로도 아무리 조숙하고 총명하다 한들 고작 네 살짜리 왕의 호령이 먹힐 만큼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오히려 당사자는 어린 시절부터 숨이 다할 때까지 죽음과 질병의 공포에 시달렸다. 이 국왕을 거쳐간 온갖 병들을 살펴보면, 10대에는 천연두, 20대에는 성홍열과 홍역을 연달아 앓으며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얼마나 심하게 앓았는지, 천연두로 얼굴은 곰보가 되었고, 성홍열을 앓고 난 다음에는 머리가 다 빠져 대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남달리 미적감각이 뛰어났던 그로서는 이때부터 자신의 외모가 용납이 안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평생 동안 가발에 집착하며 살았다.
이 밖에도 피부병과 위염, 설사를 비롯해 편두통, 치통, 통풍, 신장결석, 당뇨 등 오늘날의 대표적인 성인병들을 평생 달고 살았다. 사실 루이 14세가 아직 어릴 무렵, 그의 정적들은 왕의 병약함이 암살의 수고를 알아서 덜어줄 것이라 은근 기대했다.
기대와는 달리 왕은 열 살을 그럭저럭 넘겼다. 귀족들은 1648년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하던 안 도트리슈 모후와 루이 14세, 그리고 귀족들의 특권을 빼앗으려는 실세 마자랭 추기경을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저 유명한 프롱드 난이다. 폭도들의 기세에 질려버린 연약한 모후는 어린 루이 14세를 데리고 허겁지겁 파리를 탈출했다. 왕실은 가까스로 생제르맹으로 피신했지만 이들이 노출시킨 놀라우리만큼 유약한 모습은 없던 사심마저 생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여기저기 온천수처럼 뿜어져 나온 반기와 폭동은 5년이 지난 1653년 중심을 잃고서야 제풀에 사그라들었다.
제대로 바닥을 친 왕실의 권위는 어린 루이 14세에게 세 가지 영향을 끼쳤다.
첫째, 그렇지 않아도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그는 더욱 일찍 철이 들었다. 둘째, 그런 어설픈 반란은 꿈도 꾸지 못하게 할 만큼 절대왕정을 구축하겠다고 결심했다. 셋째, 그럼에도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던 파리는 결코 사랑할 수 없었다.
루이 14세 조각상
루이 14세 조각상. Gianlorenzo Bernini - Equestrian statue of Louis XIV (1638-1715)
루이 14세는 자신을 그리스-로마 시대의 영웅으로 묘사하기를 좋아했다.
코이세보는 당시 루이 14세의 직속 궁정 수석 조각가로 이러한 왕의 취향에 전적으로 부응하여 베르사유 궁정 여기저기에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특히 루이 14세의 기마상은 바로크의 역동성을 알리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거울의 방. Palace-of-Versailles-Room-of-Mirrors
베르사유 궁정 안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단연 당대 최고의 건축가 망사르의 걸작 '거울의 방'이다. 베르사유 궁정 중앙의 본관 2층 정면 전체를 차지하며 당당히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가장 호화로운 장소이다. 전체 길이가 73미터에 이르며 정원을 향해서는 17개의 창문이 반대편 벽에는 17개의 거울이 배열되어 있다.
1661년 모후의 비호 아래 있던 마자랭이 사망하면서 루이 14세는 본격적으로 왕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귀족들의 참여를 제한하는 한편 콜베르 총리를 비롯한 총명한 부르주아 출신들을 발탁해 요직을 맡겼다. 또한 지방 곳곳에 직속 관리를 파견하여 귀족들을 감시했다.
반면 귀족들에게는 ‘국왕 직속 수건담당’, ‘국왕 직속 심부름꾼’, ‘국왕 직속 낭독인’과 같은 차마 웃지 못할 사이비 직함을 하사해 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나라의 핵심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든 사생활에서든 그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직성이 풀렸다. 이러한 심리는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 향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배우와 비슷한 것이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좁게는 궁정, 넓게는 나라 전체가 하나의 무대이며 자신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궁정 사람들을 에티켓으로 포박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교양인’인지 일일이 규정했으며, 이러한 규범은 여자와 남자가 달랐고, 귀족과 시종이 또 달랐다. 즉, 이 시대 왕실의 예절은 무대 위의 각본과 같았다. 그리고 그 각본대로 따를 때,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주인공인 국왕 자신이었다.
더불어 그는 탁월한 흥행사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자고로 사람이란 보이는 것에 약한 법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역사상 최대 비용으로 최고의 화려한 공연이 프랑스 왕실을 중심으로 펼쳐졌으니, 그 무대는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사실 베르사유가 처음부터 부와 사치를 상징하던 것은 아니었다. 사냥을 좋아했던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가 1624년 숲 한복판에 세웠던 소박한 사냥용 천막이 베르사유의 태동이었다.
어린 시절 자신을 공격했던 수도가 불편했던 루이 14세는 궁정에 오래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자주 이곳을 들르다가 아예 정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대 예산은 오늘날 경제 개념으로도 천문학적 액수를 꼽았다. 투입되는 비용이 무제한이라는 소문에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저마다의 걸작을 남겼다.
수십 년에 걸친 창작의 고통의 결과, 오붓한 분위기의 베르사유 사냥용 천막은 1만 명 이상의 왕실 식구가 상주하며 한 달을 머물러도 다 돌아보지 못할 만큼 거대 궁정으로 탈바꿈했다.
최고의 건축가 망사르가 만든 궁정 외관, 푸생과 로랭 등 당시 유럽에서 최고로 잘 나가던 화가들의 그림이 지하철 광고처럼 줄줄이 걸려 있는 이 럭셔리한 궁정은 미적 스케일에 있어 나라 안의 귀족은 물론 유럽 모든 왕실을 압도했다.
Le roi danse .영화 <왕의 춤>.
제랄 코르비오 감독의 2001년 작품으로 발레와 음악을 즐기던 루이 14세와 왕을 위해 음악을 작곡한
이탈리아 출신의 궁정 음악가 장 바티스트 뮐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루이 14세의 '태양의 춤'을 고증하여 남다른 화제를 불러 모았다.
View of the Palace from the garden
힘이 아닌 춤으로 나라를 통치하다
권력자가 예술을 향유함에 있어 루이 14세의 가장 남달랐던 점은 그 스스로가 예술의 주체, 즉 아티스트였다는 데 있다. 근사한 극장을 지어주고, 일류 예술가들을 데려와서 VIP석에 앉아 관람하고, “끝으로 오늘 이런 멋진 자리를 마련해주신 국왕 폐하께 우리 모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냅시다” 라는 멘트에 한 손을 들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답례하는 걸로 루이 14세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천성이 연예인이었다. 배우에게 향하는 박수조차 질투한 그는 자신이 무대 위에 서는 쪽을 택했다. 네덜란드계 미술사학자 반 룬은 이런 루이 14세에 대해 “왕으로 태어났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한량이 되었을 인물”로 묘사했다.
병약한 건강도 달랠 겸 스트레스도 해소할 겸 루이 14세는 어린 시절부터 틈틈이 발레를 배워왔다(그는 역사상 최초의 발레리노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이 실력을 1662년 마자랭 추기경이 죽은 뒤 친정에 나선 것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스물네 살의 국왕은 주인공인 로마인으로 분장해서 춤을 추었고, 이에 기즈 공작을 비롯한 당대 귀족들은 인디언으로 분장하여 함께 춤을 추며 왕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이에 맛을 들인 루이 14세는 같은 해, 왕세자 탄생을 기념하는 카루자 축제에서 더욱 대범한 시도를 계획했다. 루브르 궁정 앞에 임시 야외극장을 설치하고, 1만 5천 명의 관객이 운집한 가운데 그는 온몸을 황금빛으로 덮어쓴 금빛 ‘태양’으로 분장하여 궁정음악가 륄리가 작곡한 음악에 맞춰 우아하면서도 역동적인 춤을 선보였다. 바로 이 춤으로 그에게는 평생 ‘태양왕’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왕의 춤’은 루이 14세가 32세가 되던 1670년까지 계속되었다.
‘왕의 춤’을 단지 끼가 넘치는 국왕의 자기과시로 보기에는 그 부수 효과와 파급력이 엄청나다. 머리에 금빛 태양을 이고 우아한 춤을 추는 왕의 발 앞에 화려한 복장의 귀족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공연을 관람하는 백성들에게는 상하관계를 구분해줄 뿐 아니라 왕의 매력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루이 14세의 통치방식이었다. 역사상 다른 군주들과 비교할 때, 루이 14세는 결코 피에 굶주린 폭군이 아니었다. 때로는 무자비한 탄압이 행해지기도 했지만 횟수로 따졌을 때 그가 단두대에 보낸 인물은 현저하게 적었다. 최고의 권력을 자랑했지만 그는 이전 왕들보다 훨씬 부드럽고 온화하다는 평을 들었으며, 아무리 하급 신하일지라도 절대로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반드시 모자를 들고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왕을 증오하는 적조차도 그의 매력과 처세술에는 혀를 내둘렀다. 그는 사람들을 자신의 힘이 아닌 매력과 예술로 제압할 줄 알았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매일같이 미니시리즈를 찍는 데는 돈이 든다. 그것이 라이브 쇼일 때는 예산이 더 커진다. 예산 확보와 홍보를 위해 무대 밖에서 벌인 전쟁에서는 매번 패전을 거듭했다. 주인공 본인도 컨디션이 날로 떨어졌다. 하루 다섯 끼의 식사와 네 번의 간식을 소화해내는 대식가였지만, 결국 그로 인해 이빨은 충치로 모두 썩어버리고 입천장에는 구멍이 났으며, 소화기관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40대 말 이후 그는 죽과 같은 유동식 말고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그럼에도 일흔 살을 훌쩍 넘긴 그의 생명력은 놀랍기만 하다!). 루이 14세 생전에 프랑스의 국력은 이미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왕의 눈부시고 현란한 매력에 홀려 기울어진 그래프를 직시한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글·::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Marche pour la ceremonie des Turcs (Jean Baptiste Lully)
Jordi Savall, Cond / Le Concert des Nations Orchestra
`세상의 모든 아침(Tous les matins du monde)' OST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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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오른 쪽 글이 잘려나가게 보이는 것에 대해 자바님이 언급을 하셨었는데... 여기 아래 잘 보시면 오른쪽으로 옮겨볼수 있는 드레그 막대가 보여요 마우스 누르시고 막대를 드래그 하시면 오른 쪽 가려진 부분이 보일겁니다... ^^
^^~^
센스쟁이
예, 그렇게 보고 있어요. 단지 한줄한줄 넘어갈 때마다 그러려니 한두줄도 아니고 불편해서 그러지요..ㅎㅎㅎ
@Java 창을 넓게 쓰는 방법이 있는걸루 아는데요?
혹시
모르시나요?
@남산 다음에서 규정해 놓은 싸이즈가 있기때문에 넓게 사용하는 방법? 을 써도 그대로 입니다.
그 방법이라면 창 오른쪽 위 X 옆에 보이는 네모가 두개가 보이는 곳에 누르시면 크게 뜨고 다시 누르면 작게 뜨긴 하지만 그것은 컴의 전반적인 창을 말하는 것이지 인터넷 내 규정해 놓은 것을 우리가 어쩔수는 없어요.. ^^
@◀프랑스안테나▶ 으음~~~그링가요?
저도 함 알아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