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엔 커다란 볼록거울이 있다. 볼록거울엔 참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우산 든 남자가 볼록거울 속으로 들어와 빵집 문을 연다. 그가 빵을 고르고 주인이 계산하는 동안 단발 여인이 네거리 약국 지나 떡갈나무 무성한 언덕을 향해 걷는다. 노란 비옷 입은 아이가 단발 여인을 따라가다 파란 대문을 열고 사라진다. 빵집 문 열고 나온 남자가 거울 속 떡갈나무 언덕으로 들어간다. 볼록거울 속으로 먹구름이 몰려온다. 거울에 비친 빵집 유리창을 적시며 비가 내린다. 자전거 한 대 가로수 휘청대는 도로를 따라 거울 속으로 들어왔다 사라진다. 볼록거울엔 멀리 있는 아파트도 들어와 있다. 거울 속 아파트엔 창문 열린 집도 창문 닫힌 집도 있다. 너무 작아 잘 보이진 않지만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가는 나방도 나방을 잡으려고 줄을 친 거미도 있을 게다. 급한 일이 있는지 빵집 주인이 셔터를 내리고 거울 밖으로 사라진다. 골목엔 작은 빵집을 비추는 커다란 볼록거울이 있다. 볼록거울은 참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비 그친 깊은 밤이면 둥근 달과 노란 별들이 거울 속에 한참 머물다 갈 것 같다.
열대야
파란 소가 골목을 돌아다니는 여름 밤. 잠 못 드는 내가 파란 소와 함께 산책을 나서면 잠들지 못한 사람이 틀어놓은 음악 때문에 잠들지 못한 새들과 잠들지 못한 새들 때문에 잠들지 못한 풀벌레들과 잠들지 못한 풀벌레들 때문에 잠들지 못한 아기들. 잠들지 못한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아파트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밤. 거리에 도열한 가로수 초록 잎이 열풍에 조금씩 말라가는 밤. 내가 파란 소를 따라 건널목 건널 때 주황색 달이 커다랗게 떠올라 오렌지처럼 타오르는 밤. 그 열기 때문에 잠 못 드는 내가 파란 소와 함께 강변 모래밭을 횡단하는 밤
중앙동
회색 가로수 늘어선 거리 곳곳에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음악 흐르는 길거리 찻집에도 앉아 있었다. 투명한 잔에 담긴 푸른 차를 마시며 창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회색 도넛 같은 연기를 연거푸 뿜어 댔다. 검은 양복과 검은 구두 파란 넥타이 차림을 한 그들의 얼굴은 잿빛이거나 검은빛이었다. 회색 가로수에 단단한 열매가 매달린 거리의 낡은 건물들 사이로 바닷바람 불어와 길거리 의자에 앉아 있는 그들의 피곤한 몸을 스치며 지나갔다. 환한 한낮이었다. 하늘 높이 흰 구름 몇 점 떠 있는 환한 한낮. 이따금 검은 새가 가로수에 내려앉아 그들의 검은 양복과 검은 구두 그들의 파란 넥타이와 검은 얼굴을 훑어보다 도로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회색 가로수 늘어선 정류소에 버스가 도착했다. 노란 꽃무늬 원피스 입은 여자가 내렸다. 회색 가로수 늘어선 풍경 속으로 한낮의 환한 햇살 끝없이 쏟아져 내렸다. 길거리 찻집 주인이 오래된 레코드를 턴테이블에 올리자 벽에 걸린 낡은 스피커에서 트럼펫 소리 흘러나왔다. 찻집 천정 거미줄에서 쉬던 회색 거미들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거미의 집도 조금씩 흔들렸다. 폭풍이 지나간 구도심, 회색 가로수와 낡은 건물 즐비한 거리. 오래된 음악 흐르는 길거리 찻집과 찻집 건너 인쇄소와 인쇄소 옆 제본소와 제본소 옆 분식점과 분식점 옆 세탁소 지나 느릿느릿 걷는 노란 원피스의 여자를 지켜보는 회색 눈동자들. 그들의 메마른 입이 뿜어낸 담배 연기가 공중에 흩어졌다가 소용돌이 문양을 만들며 하늘에 뜬 구름을 향해 올라가는 밝고 환한 한낮. 큰길 너머 보이는 바다에서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트럼펫 소리의 둥근 파동과 찻집 주인의 잦은 기침 소리를 싣고 잿빛 거리로 나서는 낯선 손님들의 등을 떠밀며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시집『빵집을 비추는 볼록거울』(2016)에서 ------------ 김참 / 1973년 경남 삼천포 출생. 1995년 《문학사상》을 통해 시 등단. 시집『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미로여행』『그림자들』『빵집을 비추는 볼록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