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6월13일 목요일.
[(백)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코린토 2서 3,15─4,1.3-6
복음 마태오 복음 5,20ㄴ-26
◈ [서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2019년 다해 6월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방탄 소년단, 류현진 선수, 손흥민 선수, 김연아 선수는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그 실력과 능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평소에 훈련과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방탄 소년단은 매일
10시간 이상 안무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선수들도 최상의 몸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하기에 열정과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었습니다. 야구를 좋아하기에 어깨에 부상이
생기는 것도 모르고 공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기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축구 유학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빙판 위에 서는
것이 좋았기에 외로움과 아픔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타고난 재능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은 뼈를 깎는 노력과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땅속에 묻혀있는 보물로 남았을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은 무엇입니까?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삶입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는 삶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밤길을
나서는 삶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마저 내주는 삶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까지 기꺼이 함께하는 삶입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인의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는 희생과 고통까지도 감수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을 밝고 환하게 비추고,
세상에 참된 맛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은 무엇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은 외모, 능력, 재산, 명예, 권력으로 평가를
받지는 않습니다. 신앙인은 남을 비난하고, 욕하고, 원망하고,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를 가지고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율법과 규율이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를
편안하게는 하지만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해방해주고,
자유롭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하느님의 뜻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연중 제10주간 목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13일 연중 제10주 목요일
복음: 마태 5,20-26: 살인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탈출 20,13과 신명 5,17의 ‘살인하지
못한다.’는 계명을 들어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인뿐 아니라
이웃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금하신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시하거나 분노를 품어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분노는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하는 것은
분노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야고 3,8)
사람의 혀를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 주실
하느님께로 피신해야 한다. 말이나 소, 낙타, 코끼리, 사자를
길들이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이처럼 인간이 길들여지려면 하느님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분노를 버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려 준다.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그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워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23절)라는 말은 주님께서 마땅히
당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은 제쳐 놓으시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신다. “너의 사랑이 계속
되도록, 나에게 예물을 바치는 일을 잠시 멈추어라. 네가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나에게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형제와 화해와
사랑이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너를 고소한 자와 타협하여라.”(25절) ‘너를 고소하는 자’는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갈라 5,17) 그러므로 우리의 현세의 삶이라는 여행에서 그분과 함께
늘 살아가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의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며,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웃과의 불목은 그 이웃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때문에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과도 불목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의로움은 자비와 비례한다
2019년 다해 6월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의로움은 자비와 비례한다>
복음: 마태오 5,20ㄴ-26
2005년 11월 3일 요르단강 서안의 예닌에 살던 아흐메드 카티브(12)
는 이슬람 축제일을 맞아 플라스틱 장난감 총을 갖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실제 총을 가진 ‘무장 전사’로 오인한 이스라엘군이
카티브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소년은 머리와 배에 심한 총상을 입었고
곧바로 팔레스타인 지역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다시 이스라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이틀 뒤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소년의 아버지 이스마일은 “내 심장은 울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보다 중요한 희망이 있다.”며 아들의 장기를 이스라엘 아이들에게
떼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스마일은 수년전 자신의 동생이 간을
이식받지 못해 세상을 뜬 기억 때문에 이 같은 결심을 굳히고는
“팔레스타인 사람 모두가 평화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AP통신에 따르면 소년 카티브의 심장과 폐와 간은 6일 이스라엘 소녀
3명에게 각각 이식되었습니다. 카티브의 심장은 같은 날 동갑내기
이스라엘 소녀 사마흐 가드번에게 전해졌고, 허파는 또 다른 14세
소녀에게, 간은 태어난 지 7달 된 아이에게 각각 이식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숨진 아들의 장기를 적국인 이스라엘에
기증하여 3명의 생명을 살아난 것입니다.
심장을 이식받은 동갑내기 소녀 사마 가드반의 아버지는 “카티브의
부모가 내 딸을 자신들의 딸로 생각해주기를 바란다.”면서 가드반의
퇴원 날짜에 맞춰 카티브 가족을 초청했습니다.
카티브의 아버지는 “간을 기증 받지 못해 죽은 남동생이 떠올라
누군가를 꼭 돕고 싶었다.”며 “알라 신은 우리에게 어려움에 빠진 자는
누구든 도울 수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군 측은 오인 사격에 대해 즉각 사과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저항운동으로 수감된 팔레스타인 전사들은 카티브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적에게 신장을 주지 말라.”며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참조: 국민일보, 한국일보 2005/11/0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우선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의로움’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움은 무엇일까요? 내 아들이 당했으니 나도 되갚아주는
것이 의로움일까요? 물론 단순한 의로움의 개념은 100원 꾸었으면
100원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카디브의 아버지가
이스라엘에게 보복을 했다면 그는 의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인
입장에서는 자녀도 다 주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가져가실 수 있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마치 내가
잃는 것들이 나의 것인 양 여기며 화를 내는 것이 의롭지 못한
행위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의롭지 못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 의로움을 원죄로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의로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빚이 없었기 때문에 떳떳했습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떳떳함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이후부터는 스스로의 힘으로 떳떳해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리려 시도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시며 당신
앞에 서기 위해서는 의로운 누군가가 죽어서 그 의로움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줘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아드님을 통해
그들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셨습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이란 바로 나뭇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거나 나무 뒤로 숨는 노력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럴 것 같았으면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를 갚아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거룩하신 당신 수난으로
우리에게 의로움을 얻어 주셨다.”고 가르칩니다(교리서 617항 참조).
의로움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주님께서 내 죄를 대신 다 갚아주셨음을
믿는 것에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믿음을 통한 의화(義化)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의로워지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는 주님 앞에
서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의인인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처럼 의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특징이 이웃에게 화를 낸다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가다 금덩이를
주워 부자가 된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만으로 의로움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 있는
처지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물을 바치기 이전에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빨리
가서 화해하고 오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화가 나 있는 사람은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상태로 예물을 바쳐봐야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참된 의로움은 용서로써 증명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의로움은 분노와 미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참된 의로움은 자비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19년 다해 6월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며칠전 스마트폰을 분실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더군요. 요즘 스마트폰이 대세인 시대라 엄청
답답하고 불편했습니다. 갑자기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이 생각나서,
그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한 몇 시간 뒤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좀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못은 내가 해놓고, 왜 아무 죄도 없는 안토니오 성인을
괴롭히는가? 청할게 있고, 안 청할게 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기계가 오래되기도 했고 해서, 새것으로 구입했습니다.
이탈리아에 잠시 머물 때였습니다. 신심이 깊기도 하고, 소박하기도
한 그곳 사람들은 안토니오 성인께 자주 전구를 하더군요. 뭔가
잃어버리기만 하면, 즉시 안토니오 성인께 찾아 달라고 부탁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 유래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물어봤더니, 사연 하나가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회원이었던 안토니오였기에 지니고 있던 것이 거의
없었는데, 유일하게 애지중지, 자신의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영성
서적이 한 권 있었습니다.
한 젊은 수도자가 있었는데, 당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명설교가
안토니오가 언제나 들고 다니던 영성 서적에 눈길이 갔습니다. 대체
어떤 책일까?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가
드디어 기회를 잡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경당, 안토니오의 자리에
놓여있던 그 책을 슬그머니 챙겼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책이 없어진 것을 안 안토니오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나머지 눈물로 기도했더니, 어느 날 그 책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그런 사연입니다.
이제는 시대도 바뀌었으니,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달라고 안토니오
성인께 전구하기 보다는,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게 해달라고, 잃어버린
순수했던 신앙을 되찾게 해달라고, 잃어버린 첫 열정을 되찾게
해달라고, 멀어져버린 주님, 성모님을 되찾게 해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또한 안토니오는 교회 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명강론가셨습니다. 그가 명강론가로 자리매김하게 된 계기도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회에서 프란치스코회로 적을 바꾼 안토니오는 1221년
아시시에서 개최된 프란치스코회 총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거기서 꿈에
그리던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만남을 갖게 됩니다.
총회 이후 안토니오는 현재 루마니아 포플리 근처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사제서품식에 참석했다가 예기치 않게
강론을 부탁받게 됩니다. 서품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이방인 수사였던 안토니오의 강론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자마자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그의 강론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리저리 떠도는 무명의 수사로만 알고 있던 안토니오의 입에서 너무나
감미로운 천사의 언어, 논리정연하고 감동적인 대학자의 언어, 그
자리에서의 회심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에너지로 가득한 생명의 언어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늦게야 안토니오의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장상들은 그를 북부
이탈리아로 파견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활개를 치고 있던 개신교도들과
이단자들의 회개를 위한 선교사로 대활약을 하게 됩니다. 그의 활동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던지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이단자의
망치’, ‘살아있는 계약의 궤’란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그가
강론대에서 선포하는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고 아름다웠으면 사람들은
‘전무후무한 설교가’라고 칭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 안에서도 당신의 특별한 계획을 지니고
계십니다. 때로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도록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안토니오에게 하신 것처럼 더욱 완전히
당신을 따르도록 새로운 가치와 인생관을 선물로 주십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이 효과를 발휘합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잎사귀만 있고 열매는 하나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처럼 우리도 저주하실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말하도록 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13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맑고 기쁜 은총의 날씨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지만
함께 살아가는 일은 여전히 힘든 일입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는 우리마음을
단련케하는 좋은 거울이 됩니다.
끊임없는 화해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가면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분노 슬픔을 보게됩니다.
미움과 분노 슬픔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참된 기도는 화해이며 용서입니다.
미움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게 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미움이 돌아가야 할 곳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품입니다.
인생길에서 마주하게 되는 미움과 분노와 슬픔은
지쳐있는 우리자신을 위로하고 끌어안는 봉헌의 시간입니다.
진정한 봉헌은 나와 너 우리모두를
살게하는 은총입니다.
미움도 은총이 되고 분노도 만남이 되며 슬픔도 성숙이
되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마음을 되돌려 주십니다.
맑고 푸른 하늘처럼 마음을 봉헌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6월13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마태5,20-26)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고해성사를 준비합니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
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5,20). “능가하지
않으면!”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6월13일(목) 죄 사함의 유일한 장소 성막
오늘은 ‘죄 사함의 유일한 장소 성막’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레위기 1장 1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이 죄인을 구원시키는 장소가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죄인을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인은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죄를
정죄할 줄 알지 용서할 줄 모릅니다.
더 중한 죄는 감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받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1장 4절 말씀에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지니 그리하면
연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시고 용서하시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은
성막에서 제물을 드렸고 하나님은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신다는 것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증거이자
용서의 영수증입니다. 모세 시대에서 성막은 죄인이 구원받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할렐루야! (임준식 목사 성막계시 참조)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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