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만난 광주
5,18( 5,1,8은 그냥 숫자인데 39년 전부터 5,18은 평범한 숫자가 아닌 게 되었다)아침,
용산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벗들과 ‘목포근대역사 문화 공간 탐방’을 하는 날이다. 지난 며칠은 여름처럼 더웠는데 오늘은 비예보가 있다. 맑았다 흐려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차여행을 시작했다. 5월 들판은 푸르고 곱다. 멀리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나무들도 향기를 보낸다. 논에는 모심기가 끝난 곳도 있고 농부들이 모여 일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옛날부터 모내기한 논을 좋아하는 나는 ‘예쁘다’를 연발했다. 옆자리의 이은샘은 ‘보는 사람은 예쁘죠, 하는 사람은 죽어요.’한다. 주말마다 농장에서 땀 흘리는 이은샘의 ‘살아있는 표현’이다. 우리는 마주보며 웃었다. 밀린 이야기와 학교 현장의 어려움을 다 풀어내기도 전에 목포에 도착했다. 아침을 못 먹은 나는 ‘배고프다’소리를 열 번도 넘게 했다.
목포역에서 만난 풀씨와 목포역 앞 항구를 구경했다. 바다냄새도 맡고 해변에 널어놓은 생선들도 봤다. 농부들이 곡식을 말리듯 ‘바다곡식’들이 나란히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항구 앞의 시장엔 갖가지 해산물이 싱싱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가져갈 수만 있다면 다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목포의 ‘근대역사 문화공간 탐방’을 기획하고 안내해 주실 은숙샘이 해남에서 오셨다. 반가운 인사를 한 뒤 우리는 바로 점심을 먹으로 갔다. 김치찌개를 바닥까지 다 비우고서야 우리는 느긋해졌다.
‘목포는 일제강점기시절 전쟁 군수품과 물품들이 유입되고 수탁한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항구도시였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목포의 전부였다. 그런데 ‘정명여고, 양동교회, 목포근대역사관1(구 목고일본영사관), 목포근대역사관2(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유달초등학교(구 심상소학교), 목포진역사공원’ 등을 걸으며 일제 시절 만들어진 여러 건축물들과 공간이 지닌 역사에 대해 제대로 보고 배우며 진짜 목포를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목포 정명여고에 있는 구 선교사 사택 건물은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 사택으로 건립되었으며 1990년까지 교장 사택으로 사용되다가 현재 정명여자고등학교의 100주년 기념관과 음악실로 사용되고 있다’
‘1898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에 의해 설립된 목포양동교회는 1919년 3월 21일에 일어난 목포 3·1만세운동의 중심지였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 이경필 목사를 비롯한 교인들이 같은 선교 구내의 영흥학교·정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준비했고, 3월 21일 일어난 목포만세운동은 이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200여 명의 대부분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교인 서상술과 박상봉은 일제가 휘두른 칼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20년 후에는 박연세 목사가 일제의 신사참배정책에 항거하다 투옥되어 194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
‘목포근대역사관은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에 위치한 근대역사 전용 박물관이다. 건물은 구 목포 일본영사관이 1관이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의 건물은 2관이다.’
-탐방 자료 중에서-
정명여고 선교사사택 건물로 들어가는 작은 정원은 정말 아름다웠다. 이 정원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으면 참 예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이 3,1운동을 주도했던 학교라는 생각을 하니 나무 한그루, 건물의 작은 돌 하나도 귀하게 여겨졌다. 양동교회는 입구에서부터 발걸음이 멈춰졌다. 목포에 산다면 이 교회를 다니고 싶을 정도로 건축물이 근사했다. 더군다나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고초를 당한 바로 그 공간이라니 무신론자인 나도 고개가 숙여졌다. 오늘날 보수 기독교의 행태들을 생각하니 더 돋보인다. 일본 영사관이 있던 자리와 수탈의 상징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을 보며 그 당시 조상들의 삶을 그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느 시대나 신도심과 구도심이 있나보다. 일제강점기에도 이곳 목포엔 일본인이 거류하던 쪽은 도심으로서의 갖가지 건축물과 학교, 편의시설이 다 있었고 전시된 사진으로만 봐도 살림살이가 확 차이가 났다. 그 시절 일본인이 거주하던 과거의 신도심이 지금은 구도심이 되어 군데군데 낡고 허름한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명여고를 비롯해 양동교회 등 일제에 항거했던 중심지도 바로 그곳에 있었다.
목포역을 중심으로 근대역사 문화공간을 종일 걷다보니 어느새 목포가 ‘우리 동네’같은 친근감이 들었다. 노랫말에서만 들었던 노적봉에도 올라보았다. 노적봉은 이순신장군의 이야기도 있지만 광주항쟁당시 시민들의 항의로 방송을 중단하게 되었다는 기록을 남긴 MBC옛 건물도 있었다.
여행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잘~먹는 것이 중요하다. 더구나 남도가 아닌가? 하루 동안 충분히 걸은 우리는 은숙님의 목포 사는 지인이 소개했다는 ‘아구찜’을 먹기로 했다. 소문처럼 손님이 엄청 많아 겨우 자리를 잡았다. 많이 걸어서 인지 순식간에 음식이 사라졌다.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목포역에서 광주항쟁 기념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목포역으로 향했다. 작년 5.18땐 광주에 있었는데 올해는 목포시민들과 함께 5.18을 기억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았다. 행사장엔 ‘임을 위한 행진곡’을 흐르고 있었다. 노래만 들어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빈석에는 유가족으로 보이는,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분들이 많이 계셨다. 39년! 그 시절을 광주는, 목포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목포에서 나는 5.18을 ‘현재형’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전두환의 뻔뻔스런 태도와 거짓말 그리고 자유한국당의 망언들도 현재형이다.
그런데 얼마 전 ‘진실은 영원히 감출 수 없다’는 걸 보여주듯 ‘5,18내부자들의 폭로와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허장완(보안사 특명부장)씨와 김용장(전 미군 501정보여단)씨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국회와 광주 그리고 다스뵈이다 등에서 증언한 내용을 보면 ‘5,18은 완벽하게 전두환과 신군부의 정권창탈을 위한 계획적인 시나리오였다’는 것이다. 희생지역부터 회의를 통해 ‘광주’로 결정하고 시민들의 민주화요구 시위를 폭동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직접 개입했으며, 광주시민들이 질서를 지키고 평온하자 편의대원들을 침투시켜 선동하고 유언비언을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폭동과 폭도가 필요했는데 광주가 평온하자 직접 요원들을 침투시켜 총을 들게 하고 계획된 작전들을 수행했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광주시민은 그렇게 ‘폭도와 빨갱이’가 되었고 ,광주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으며, 그 결과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신군부는 심지어 ‘5,11연구회’라는 것을 만들어 5,18관련 자료를 없애고 변조했다고 한다. 기막힌 시절을 산 광주의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심정이 어떨까?
목포기념식에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이야기다.
5.18당시 전남 모든 경찰들에게 총기를 군부대에 반납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아쇠 뭉치를 모두 제거해 경찰들과 함께 고하도 섬으로 들어갔다. 공수부대가 광주를 점령한 후 이 서장을 보안사에 끌려가 90일 동안이나 취조를 당하고 파면된다. 그는 5년 뒤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는 38년이 지난 2018년에 5.18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목포시민과 광주시민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살아온 이 땅의 사람들은 모두 광주의 희생자이고 유가족이다. 행사 내내 눈물을 흘리는 목포시민들, 광주 그날처럼 주먹밥을 나누는 사람들과 잠시라도 곁에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마트에 들렸다. 세월호 리본을 보신 목포시민께서 말씀하신다.
“거 왜 눈물 나게 그런 걸 달고 댕겨? 불쌍하게 죽은 애기들 생각나게.”
그러시면서 드시던 튀김을 하나씩 주신다.
광주와 세월호를 다르게 보지 않고, 구분 짓지 않으며 똑같이 보는 눈은 피흘리는 세월을 살아서 일거다. ‘고통 받으며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 아파봐서 얼마나 아픈지 아는 사람들’ 목포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랬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 땅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버렸다. 돌아오는 날 아침엔 목포신항으로 갔다. 녹이 많이 슬어버린 세월호, 돌아오지 못한 5명의 사람들의 사진과 바람에 펄럭이는 노란 리본들을 보며 한동안 머물렀다. 우리 눈물은 언제 마를 수 있을까?
첫댓글 잘 읽었어요. 하필 그날 강의가 잡혀서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네요. 이준규 당시 목포경찰서장님 이야기는 저도 최근에야 알았네요.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도 그런 분들이 계셔서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온전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감사할 일이지요. 늘 정갈하고 깔금한 문장으로 읽는 재미도 더해주는 귀비님의 멋진 후기도 감사하구요.
드뎌 오셨군요. 기다렸어요. 저는 바쁘다는 핑계로 다른 분들이 후기를 써주시기를 기다리기만 했네요. ^^
그날의 즐거움이 다시 생각나네요. 귀비샘과 다시 목포에 다녀온 느낌이에요.
글을 읽으며 맘이 짠합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목포.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5.18과 세월호의 잔영을 샘의 글로 함께 할 수 있어 참 고맙습니다. 집의 아이들 남푠님께 맡기고 고집피워 다녀올 걸 하는 아쉬움도 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