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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인을 요제로 드리다
민 8:1-13
1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등불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할지니라 하시매
3 아론이 그리하여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4 이 등잔대의 제작법은 이러하니 곧 금을 쳐서 만든 것인데 밑판에서 그 꽃까지 쳐서 만든 것이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보이신 양식을 따라 이 등잔대를 만들었더라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
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되 곧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에게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고
8 또 그들에게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가져오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가져오고
9 레위인을 회막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10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안수하게 한 후에
11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라
12 레위인으로 수송아지들의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네가 그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려 레위인을 속죄하고
13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 여호와께 요제로 드릴지니라
민 8:1-13 / [등잔을 올려 놓아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아론에게 이렇게 일러라. 등불을 밝혀 놓을 때에는 등잔 일곱개가 앞쪽에 환히 밝힐 수 있도록 등잔을 등잔대 위에 잘 올려 놓으라고 하여라.' 3) 아론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지시하신 대로 등불이 등잔대 앞쪽을 환히 비출 수 있도록 잘 올려놓았다. 4) 등잔을 올려놓은 등잔대는 금을 두들겨서 만든 것이다. 밑받침부터 꼭대기에 있는 꽃모양 장식까지 모두 금으로 두들겨 만들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모양대로 모세가 만든 것이다. 5) [레위인을 정결케 하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6)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서 레위인들을 따로 데려다가 특별히 깨끗게 하여라. 7) 내가 네게 일러주는 대로 그들을 특별히 깨끗게 해야 한다. 죄를 깨끗이 씻어 내는 물을 그들에게 뿌린 다음 그들에게 온몸을 칼로 밀어 털을 깎아 내고 옷도 깨끗이 갈아입어 몸을 깨끗이 하라고 일러라. 8) 그런 다음 그들에게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곡식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게 하고 속죄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가져오게 하여라. 9) 또 이스라엘 온 공동체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 레위인들을 만남의 장막문 앞에 서게 하여라. 10) 이렇게 레위인들을 나 여호와 앞에 나와 서게 한 다음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레위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라. 11) 그러고나서 아론은 이 레위인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 여호와께 바치는 제물로 흔들어 바쳐라. 이런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레위인들이 나 여호와를 섬기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 12) 또 레위인들에게는 수송아지 머리 위에 손을 얹으라 이르고, 너 모세가 그 가운데 하나는 속죄제물로 또 하나는 번제물로 나 여호와에게 바쳐라. 이렇게 레위인들을 특별히 깨끗게 하는 예식을 올리도록 하여라. 13) 또 레위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 나 여호와에게 흔들어 바쳐라.
선택된 레위인은 정결한 모습으로 제사장 배후에서 협력하는 일 가운데 회막 안을 밝히는 등잔대 돌보는 일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은 일곱 등잔에 불을 밝혀 회막 안에 두도록 명하셨습니다.
등잔을 등대 앞으로 비추게 하라(1-4)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하면서도 반드시 갖고 다니는 회막의 기구들 가운데 하나가 금 촛대(메노라)였습니다. 회막에는 창문이 없기 때문에 회막 안에는 등잔대의 빛이 계속적으로 비추어야 됩니다. 이 등대와등잔과 관련된 것은 전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제조되었습니다(4). 일곱 개의 등잔 가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등잔은 금을 쳐서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금 촛대가 성소에 비치되어 제사장들의 활동과 사역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금 촛대에는 ‘앞으로 비추게 하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앞에는 진설병이라는 떡상 열두 개가 있습니다. 그 떡상은 빛을 받아 빛을 발합니다. 금 촛대가 양식을 빛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금 촛대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비추게 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빛이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빛 가운데 거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레위인을 정결하게(5-13) 하나님의 일꾼은 기능이나 기술보다 중요한 것이 정결입니다.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먼저 속죄의 물을 몸에 뿌림으로 정결케 하는 예식을 행했습니다. 구체적인 정결을 위하여 전신을 삭도로 밀고, 의복을 세탁하여 입고, 몸을 정결하게 하고, 수송아지를 번제물로 취하여 레위인을 온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회막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안수 받게 합니다. 이것은 레위인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제물을 번쩍 들어서 좌우로 흔들어 드리는 요제로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드립니다. 레위인으로 수송아지들의 머리에 안수하고 하나는 속죄 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립니다. 레위인들은 대제사장 아론에게 협력하여 헌신했는데 레위인 역시 매우 중요한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배후에서 협력하는 자들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주를 위해 무슨 일을 하든지 정결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헌신해야 합니다. 레위인처럼 합당한 봉사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적용: 교회에서 크고 작은 일을 떠나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정결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사회학에는 '거울 자아 이론'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된다는 이론입니다. 특히, 중요한 사람의 시선은 상대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선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가 공부를 못 한다거나 재능이 없어서 부모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늘 응원하며 기다려줘야 합니다. 지금은 평범한 아이일지라도 부모가 자녀를 긍정적으로 바라볼수록 아이는 더 큰 꿈을 품고 비상할 것입니다.
< 설 교 >
이 같이 레위인을 구별하라
민수기 8:1-26 / 최도영 목사
요절 / 민수기 8:14,15 “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In this way you are to set the Levites apart from the other Israelites, and the Levites will be mine. "After you have purified the Levites and presented them as a wave offering, they are to come to do their work at the Tent of Meeting. NIV)
우리는 지난 해 연초 민수기 7장까지 공부한 바 있습니다. 그 이후 누가복음 전체를 공부하느라 1년 반이 지난 이제야 다시 민수기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전에 앞부분에서 뭘 공부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앞에 공부한 내용을 상기해 보면 이렇습니다. 1장에서는 20세 이상의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게 하신 내용입니다. 2장에서 회막을 중심으로 몇 지파씩 진영을 편성하신 내용입니다. 3-4장에서는 레위 지파의 임무를 정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5장에서 진영의 내적 그릇을 견고히 하기 위한 전염병이나 죄 문제, 부부간의 의심 문제 처리 법을 주신 내용입니다. 6장에서는 나실인 규정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7장에서 지휘관들이 출진을 앞두고 제사를 드려 헌신케 하신 내용입니다. 이를 포함한 10장까지의 내용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8장 말씀은 레위인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하게 하기 위한 공식적인 임용 절차를 진행하는 내용입니다. 구약 시대에 보면, 레위인은 제사장, 나실인과 함께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들을 그렇게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는 어떻게 구별하셨는가가 상세히 나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별된 자세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레위인을 구별하는 이야기에 앞서, 1-4절에는 등불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회막 안의 등불을 켤 때 일곱 등잔의 방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즉, 등잔대 앞을 비추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등잔대는 금을 쳐서 만든 것으로 일곱 개의 등잔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40:24에 보면, 이 등잔대 맞은 편에는 떡을 놓아두는 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등불을 떡 상을 비추도록 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론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이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진영의 출발 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 왜 갑자기 등불 이야기를 여기에 할까 하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기 40장의 성막 완공식 후에 성막 운영과 관련해 나왔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등불의 방향과 관련해서 추가적인 방향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등불은 단지 성막 안을 밝히기 위해 켜 두는 것이 다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것에는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등불을 켜는 것은 성막 안에서의 제사장들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등불의 방향을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등불이 아무렇게나 방향 없이 비추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비추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등불은 빛이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상 위의 떡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등불이 이 떡 상을 비추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초점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에 모든 하나님의 일의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그런 점에서 등불 이야기는 가나안 땅을 향한 행진 준비를 하는 이야기들 중간에 하나의 이정표와 같이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들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이야기들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이야기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66권의 이야기를 읽을 때, 때때로 이런 이정표들을 확인하며 읽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어느 말씀에서도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요,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5절부터는 오늘 본문의 주된 내용인 레위인을 구별시켜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를 위한 방향을 말씀하셨습니다. 레위인들의 성막 근무를 위한 임용 절차는 오늘날처럼 3차에 걸쳐 진행이 됩니다. 1차는 정결하게 하는 것이고, 2차는 그들을 위한 속죄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3차는 그들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차로,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레위인은 성막에서 제사장들을 도와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이런 그들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이어야 하기 때문에 정결하게 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제가 어제 팔꿈치의 염증이 심해져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자 구급실에서 기다리며 간호사들이 어떻게 하나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의사가 주사를 놓기 전에, 기구들을 준비하는 데, 모든 의료기구들을 젓가락으로 옮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인들이 더러운 옷을 입고 뭐가 잔뜩 묻은 더러운 손으로 의료기구들을 막 만지고 있다면 환자들은 기겁을 하고 그곳을 뛰쳐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일반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윤리가 요구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면 레위인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결하게 하도록 하셨습니까? 첫째는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리게 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접한 모든 부정한 것들을 정결하게 하는 의미였습니다. 둘째는 온 몸의 털이란 털은 다 면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앞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로서, 세속세계와 자신을 철저히 구별하게 하신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불교에서도 출가할 때는 머리털을 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그 의복을 빨도록 하였습니다. 넷째는 몸을 씻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레위인들이 스스로 해야 할 준비에 속합니다.
다음으로 2차과정은 레위인들을 위해 죄를 속하는 속죄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레위인들이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수송아지 또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번제물로는 번제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때의 번제는 수송아지가 죽어 불태워져 하나님께 드려진 것과 같이,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도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과 봉사를 드리겠다는 의미의 제사였습니다. 소제는 곡식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로 드렸습니다. 이는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돌봐 주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였습니다. 속죄제물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그 죄인을 위해 드리는 제사로, 죽을 죄인의 죄를 속죄하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충성하겠다는 헌신의 제사였습니다.
이런 제물을 가져오게 한 다음, 레위인들로 수송아지들의 머리 위에 안수하게 하였습니다. 제물에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그 제물로 자신을 대신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모든 죄를 그 제물에 전가하여 대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수 후에 수송아지 중의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림으로 레위인을 위해 속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죄인이 죄 있는 채로는 하나님이 계신 성막에서 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3차의 과정은 레위인들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레위인들을 회막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모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레위인에게 안수하게 하고,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레위인에게 안수하는 것은 레위인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여 자기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를 다시 정리해 보면, 레위인을 먼저 정결하게 하고, 다음으로 그들을 위해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절차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한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절차를 반드시 거침으로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자가 되게 한 후에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수 있게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이 같은 절차를 거쳐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하게 하신 것은 왜 입니까? 16절에서 하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들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이 되는 것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을 노예로 잡고 놓아주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열 번 째 재앙으로 애굽 지역 안에 있는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죽음으로 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역시 애굽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나 짐승의 모든 처음 태어난 것은 죽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어린 양을 대신 죽게 하시고, 죽음이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는 명절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하나님께 속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 민수기 3장에서 진영을 편성하시면서, 레위인을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대신하게 하셨습니다(3:12). 레위인을 대신 취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가정에서 장자를 다 취했을 때 생기는 각 가정의 어려움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신 데는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구원을 위한 대속의 원리를 이를 통해서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오는 구원을 위해서도 사실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처음 태어난 자가 죽어야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장자들의 희생이 있어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으로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출애굽 후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주권적으로 레위인을 취하셨습니다(3:12,4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셨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회막에서 도울 사람들이 필요함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의 장자들을 다 징발하는 대신에 아론과 같은 지파인 레위인들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동역도 더 잘 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데도 더 좋았기 때문이실 것입니다.
19절은 이런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에서 세 가지를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레위인들을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이 온 몸의 털을 밀고,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바쳐져 회막에서 평생 궂은 일만 하는 것은 실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레위인들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레위인들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속죄한다는 것은 죽어야 할 이스라엘 자손 대신에 레위인이 대신 죽는 속죄물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한 마디로 레위인들은 성막에 들어가 평생 세상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형제들을 살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자손들도 레위인들의 은혜를 알 필요가 있고, 레위인들도 자기들의 삶이 얼마나 귀한 가치가 있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한다는 것은 성막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나, 또는 성막을 옮겨야 할 때에 자기들도 돕겠다며 가까이 할 경우를 말합니다. 이때 앞에 나오는 정결, 속죄제사, 제물로 바쳐 짐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성막에 가까이 하면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3대 명절이나, 또는 각자의 속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러 성소에 나아오게 됩니다. 이때마다 그들은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직접 거룩한 제사의 모든 절차를 진행해 제사를 드리게 되면 실수를 범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율법과 규례를 다 주셨는데, 실수했다고 봐 주실 수도 없습니다. 최근 신문에서, 공부를 강요하며 때리는 어머니를 살해한 고등학생의 최종 재판 기사를 보고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판사는 판결문을 읽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실형을 선고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학생이 겪은 아픔이나 장래를 생각할 때는 집행유예를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법이 있는데 법을 지키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 실수나 무지로 재앙을 당하는 것을 피하게 하기 위해, 레위인들이 제사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 그 일을 맡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에는 전문가를 두어 그들이 전담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길게 보면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수준에서 잘못되지 않게 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취하신 것은 철저히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레위인의 이같은 위치와 역할을 이해하고, 그들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자신들을 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습니다. 즉, 레위인은 성막에서 봉사하기 위해 그들이 준비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죄에서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그들의 옷을 빨았습니다. 또 아론은 그들을 요제(흔들어 바치는 제사)로 여호와 앞에 드리고,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여 정결하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회막에 들어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레위인의 일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게 하신 것을 따라 그들에게 행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의 직무연한에 관한 방향도 주셨습니다. 그것은 레위인은 이십오 세 이상으로는 회막에 들어가서 복무하고 봉사하며, 오십 세부터는 그 일을 쉬어 봉사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막에서 섬기는 일이 육체적으로 고된 일이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가장 힘이 왕성할 때만 섬기도록 하신 배려였습니다. 한편으로 영적으로는 그들의 경험과 지식은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형제와 함께 회막에서 돕는 직무를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은퇴한 후에는 직접 일하지는 말도록 하신 것은 그렇게 하면, 새로운 세대가 제대로 일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상에서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취하신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와 영적 원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레위인들이 거쳤던 그런 절차를 거쳐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가 커서 누구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함부로 섬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성경선생이요 목자로서 구별된 자로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는 로마서 12:1-2절에서 말씀하듯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의 욕심이나 세상의 헛된 일을 위해 자신을 드려서는 안 됩니다.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들은 말씀대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항상 고민하며 추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을 따라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죄인 됨을 잊지 않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겸손히 붙드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맡겨주신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고자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 안에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알게 하는데 우리를 써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가 결코 헛되고 의미 없이 멸망하는 죄인의 삶으로 끝나지 않게 하시고, 예수님 안에서 복음의 제사장이 되어 이 세대를 살리는 일에 값지게 써 주실 것입니다.
정결하고 구별된 자의 헌신
민수기 8장 5-19절 / 최도영 목사
이스라엘 백성은 총 12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 ‘레위 지파’를 선택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회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들도 정결해야 했으며, 거룩하게 구별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레위인들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정결’이라는 말은 ‘흠이 없다’라는 뜻 입니다. 세상에 흠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레위인들도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도 죄를 짓고 사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따라서 레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죄를 씻는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이죠.
하나님은 결코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가슴에 죄를 품고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막에서 봉사할 레위인들에게 정결함을 요구하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는 열심만 가지고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열심 보다 정결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들도 지금 내 자신의 삶 안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러운 죄가 없는지, 혹 회개해야 할 죄악들이 남아 있지 않은지 늘 우리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레위인들이 성막에서 사역을 하기 전에 그들의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제사를 드렸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레위인들은 죄로 더러워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정결하게 했을까요? 그 내용이 7-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새벽에는 시간 관계상 특별히 이 두 구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보겠습니다. 레위인의 정결 예식을 위해서 하나님은 총 3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첫째 그들에게 속죄의 물을 뿌리고 온 몸의 털을 삭도, 즉 면도칼로 밀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입은 옷을 다 깨끗하게 빨래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8절을 보면 하나님께 번제, 소제, 속죄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가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레위인의 정결을 위해서 첫째로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의 털을 제거하라고 하셨습니다. 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민 8: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여기서 말하는 ‘속죄의 물’이란 붉은 암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남은 재를 물에 섞어 만은 “의식용 물” 입니다. 오늘 우리는 손에 이물질이나 더러운 것 묻으면 비누로 씻지 않습니까? 속죄의 물이 바로 쉬운 의미로 ‘비눗물’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속죄의 물을 레위인들에게 뿌리라고 하신 것이죠. 이러한 행위를 통해 레위인의 모든 죄악의 요소가 깨끗하게 제거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날 우리가 붉은 암송아지를 태우고 남은 재를 섞어 만든 속죄의 물로 죄를 씻음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죄를 씻음 받습니까? 우리의 죄를 씻는 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보혈 밖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피를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에 뿌려야 합니다. 죄로 물든 우리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죄로 더러워졌습니까? 십자가에서 우리들을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자, 7절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여기 보니 속죄의 물을 뿌리고 그 다음에는 전신을 삭도로 밀라고 했습니다. 온 몸의 털을 제거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처럼 전신의 털을 제거하는 장면은 성경에 한 번 더 기록된 적이 있습니다. 레위기서 14장에 보면 문둥병자로 판명되었던 사람이 그 병이 치유되어 제사장에게 “이 사람은 깨끗합니다.”고 판결을 받으면 그 때 전신의 털을 제거 했습니다. 오늘 예식도 이와 동일한 것이죠. 따라서 레위인이 자신의 죄로 인해 영적인 문둥병자처럼 더러워졌으나, 이제는 정결예식을 통해 죄가 사함 받고 정결케 되었음을 나타내는 의식 입니다. 7절 말씀을 다시 보면 ‘전신’이라고 했습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제거 하는 것입니다. 즉 레위인 자신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문둥병이 퍼져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환자처럼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죠.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먼저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다 더러운 죄인인지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알면, 이런 죄 많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의 털을 밀게 했습니다.
두번째는 그들이 입은 의복을 빨래 하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옷을 빠는 행위가 뭐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들은 물이 귀한 광야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수 백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마실 식수가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그러니 광야에 사는 이들이 빨래는 제대로 하고 살았을까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거룩한 봉사를 하는 자들에게 거의 필수적으로 요구하신 것 중 하나가 그들의 옷을 빠는 것이었습니다.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옷을 빨아 정결하게 되었다면, 우리들도 정결해지기 위해서는 빨래를 해야한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물 같은 것 가지고는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7장 14절을 보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세상 속에서 더러워진 우리의 죄악을 씻습니다.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며, 더러워진 옷을 빨래 하듯이, 예수의 피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어야 합니다.
레위인들을 정결케 하는 예식 세 번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민 8:8) 또 그들로 수송아지 하나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취하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하나를 속죄물로 취하고” 여기 보니 하나님은 레위인에게 세 가지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입니다. 번제는 동물의 가죽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리는 제사 입니다. 마치 동물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듯이, 제사 드리는 이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겠다는 신앙의 표현이 바로 번제 입니다. 소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 입니다. 곡물을 그냥 드리지 않고 가루로 빻아서 드립니다. 소제도 번제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헌신하겠다는 표현 입니다. 마지막 속죄제는 말 그대로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 입니다. 하나님께 충성과 헌신을 다짐하는 번제와 소제, 죄를 사함 받기 위한 속죄제를 드렸던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날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드리는 헌신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의 기도도 드려야 합니다.
이처럼 레위인의 정결 예식은 처음도 정결이요, 마지막도 정결 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일꾼들은 무엇보다 정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는 열심히 봉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거룩하고 정결하게 구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정결하고 구별된 삶을 통해 주님께 헌신된 주님의 일꾼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구별된 자의 삶
민수기 8:5-19 / 최순성 목사
지금까지 민수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다른 지파와는 달리 레위 지파를 특별히 구별하였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하게 된다. 특별히 민수기는 인구조사로 시작하게 되는데 전체 인구조사 할 때에 레위 지파는 그것에서 빠졌고 특별히 3장과 4장에 걸쳐서 특별히 레위 지파만 따로 인구조사를 하게 되는 것을 보게된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인 성막사역을 언급하게 된다. 또한 14절,16절, 19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라는’라는 어구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14절: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16절: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19: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라’는 어구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사용하고 계신다. 이것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은 레위인을 구별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오늘 본문은 레위인들이 성막사역을 감당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 그들을 드리는 봉헌식을 하는 내용이다. 이런 봉헌 의식의 순서가 다소 복잡하다. 6,7절을 보면 레위인들에게 속죄의 물을 뿌리게 한다. 그 물이 어떠한 물이였는가는 성경에 정확하게 나와있지는 않지만 이런 봉헌의식에만 사용했던 어떤 특별한 물 정도로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레위인들에게 속죄의 물을 뿌리게 한 후에 레위인들로 하여금 온 몸의 털을 다 밀게하고 옷을 빨게 한다. 이어서 번제물과 곡식제물인 소제물을 준비하게 하고 또한 속죄 제물을 준비하게 한다. 그리고나서 레위인들을 회막 앞으로 나오게하고 이스라엘 온 회중을 모은다. 그리고 나서 레위인들에게 안수하게 한다. 그리고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여호와께 레위인들을 흔들어 바치는 예물로, 요제를 드린다. 그리고 나서 레위인들로 하여금 수송아지 두 마리에 안수하게 한다.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제물로 드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아론과 그 아들들, 제사장들이 다시한번 레위인들을 요제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봉헌식을 마무리 하고 있다.
아마 14절과 15절이 봉헌식의 요약본이 아닌가 싶다.
(민수기 8:14-15)
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구별하셨고 여러가지 의식의 과정을 통해서 정결하게 하신 후에 또한 요제로 하나님께 드리게 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야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하게 했다. 14절과 15절에도 반복되는 의미의 구절이 있다. 바로 ‘내게 속할 것이라’ 그리고 ‘ 요제로 드린 후에’ 요제는 하나님께 드린 바 되었다. 하나님께 속한 바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두번이나 반복한다. 아론을 통해서, 아론과 그 아들을 통해서 레위인을 하나님께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드린다. 이렇게 두번이나 반복한 것은 레위인은 ‘내게 속하였다. 나의 소유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계신것이다.
16절에서 18절을 보면 하나님이 왜 레위인들을 하나님께 속하였다. 구별하였다는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열가지 재앙을 내리셨는데 마지막 재앙이 바로 초태생, 처음 태어난 모든 것을 죽이시는 재앙이었다.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모두 죽이는 재앙이었는데 이때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태어난 것들은 살리시고 대신해서 레위인을 취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취하시고 또 오늘처럼 성막의 일을 맡기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이미 의식의 절차에서도 제가 언급하면서 느끼셨겠지만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안수를 한다. 그것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레위인들을 속죄 제물, 대속 제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레위사람들은 송아지 두마리 위에 안수를 한다. 그것은 그 송아지들이 레위인들의 대속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속 제물로 수송아지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19절을 보면 이 모든 의식이 목적이 나타나있다
(민수기 8:19)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이 의식을 통해서 레위인들을 성막에서 봉사하게 한 목적 외에 레위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들을 속죄하게 하는 역할을 맡기셨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재앙을 받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죄의 대가를 그 역할을 레위인들에 맡기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아야할 진노를 어떻게 보면 레위인들이 흡수를 한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재앙을 받지 않고 성소에 가까이 할 수 있게 된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계신다. 죄로 인해서 결코 하나님앞에 나아올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셨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다. 우리가 흘려야 할 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셨다. 우리가 달려야할 그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셔서 죽음으로 우리 모든 죄값을 치르셨다. 그렇게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 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영원한 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 올 수도 없었고 나오면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올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구별해서 거룩한 사명, 반드시 그들이 지켜야할 거룩한 사명을 레위인에게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에게 주신 사명을 레위인들은 반드시 감당해야만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주시고 우리를 구별하신 후에 우리에게도 거룩한 사명을 주셨다.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빌립보서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삶과 다른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다. 이전에 우리가 어둠의 삶을 살았어도 이제는 내 안에 빛되신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빛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래서 더 이상 이제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의 삶에 매몰되어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주변 환경과 형편에 휘둘려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수 많은 상처와 아픔이, 그리고 걱정과 근심이 우리 정신 못 차리게 하지만 그것들에 짓눌려서 아무것도 못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뒤로 하고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와 그 역사를 생각하고 또 묵상해서 우리 자신을 회복하고 우리 자신이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내쉬는 깊은 한숨 대신해서 기쁨의 찬양을 불러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그 놀라운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가 회복될 수 있다. 그것을 묵상할 때 우리가 살아날 수 있다. 좌절과 낙심 그것을 대신해서 확신과 소망을 품어보면 좋겠다. 불평과 불만 비난과 정죄을 멈추고 기쁨과 감사, 그리고 칭찬과 격려의 말로 바꾸어 보자! 주 안에서 우리가 소망을 품고 우리의 말을 바꿀 때 내가 변화하고 내 주변이 변화한다. 로마서 12장 1-2절의 말씀이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도 레위인처럼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자신을 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구별된 자의 살을 살아야 한다. 이 세대를 본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믿는 자가 세상과 구별되지 않으면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 우리가 세상에 빛을 비추지 않으면 세상의 어둠이 거두어 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 연약하고 부족하다. 때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가 내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가 맞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부족함에 집중하지 말고 그리고 계속해서 한 숨을 내쉬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신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빛을 발해야한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 행동 하나 하나로 세상의 빛을 발해야 한다. 내 힘으로는 어렵지만 내 능으로는 어렵지만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별되었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세상의 빛이 되었다. 내 입술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내 삶은 그리스도의 빛을 발할 때 내가 변화하고 내 주변이 변화한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기도를 하고 이 전을 떠날 때에 부푼 기대와 소망을 갖고 떠났으면 좋겠다. 또한 속으로 외치면서 이 전을 떠났으면 좋겠다. 구별된 나를 통해서 가정이 변화할 것이다. 구별된 나를 통해서 일터가 변할 것이다. 구별된 나를 통해서 학교가 변할 것이다. 구별된 나를 통해서 교회가 변할 것이다.
대가를 치르며 살라
민수기 8장 5-8절 / 이한규 목사
< 몸을 정결하게 하라 >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중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5-6절). 레위인의 정결을 위해 3가지를 행했다(7절). 첫째,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렸다. 속죄의 물은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를 섞어 만든 물로써(민 19:2-9) 인류의 죄를 속하는 예수님의 보혈을 예표한다(히 10:22). 둘째,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었다. 즉 머리에서 발끝까지 신체의 모든 털을 깨끗이 면도해 물로 씻기지 않은 불결함까지 철저히 제거했다. 셋째, 의복을 빨게 했다. 그것도 부정과 불결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조치였다.
레위인의 정결 의식은 당시 치유된 나병환자의 정결을 공표할 때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몸을 씻는 의식과 겉의 같았다(레 14:8). 죄를 나병과 동일시했다는 암시다. 그처럼 하나님께 헌신된 존재가 되려면 몸과 옷은 물론 마음과 영혼까지 성결해야 한다. 성결함이 없으면 어둠과 불결로 뒤덮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다. 어두운 현실을 이겨내려면 하나님의 일꾼부터 성결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요즘 기독교의 세속화는 큰 문제다. 기독교가 불의를 꾸짖는 의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 곳곳에 미친 어둠의 얼룩을 닦아내는 역할을 하는 정결한 하나님의 일꾼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실상 많은 위대한 일이 더러워진 얼룩을 닦아내고 불결함을 청소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옛날에는 참된 선생이 참된 제자를 길러내기 전에 마당 청소나 마구간 청소부터 시켰다. 그 일을 통해 마음을 청소하는 훈련부터 시킨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공동체의 죄와 불결을 막아내는 선봉 역할을 하도록 레위인들의 정결 의식을 통해 그들에게 정결한 삶을 도전하고 의식화시키셨다. 영적인 의미에서 성도는 교회에 온전히 속해 있으면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나의 것을 희생하고 세상 경계로 나아가야 한다. 모험이 없으면 발전도 없고 사명도 이룰 수 없다. 위태함을 감수해야 권태감을 극복할 수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거룩한 사명을 따라 안전한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있어야 아브라함의 축복을 공유할 수 있다.
< 대가를 치르며 살라 >
레위인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필요한 제사는 번제, 소제, 속죄제였기에 각각의 제사를 위한 제물이 필요했는데 번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 소제물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속죄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가 요구되었다(8절). 번제물과 속죄제물로서 값비싼 예물인 수송아지가 요구된 것은 그만큼 레위인 정결 예식이 중요한 예식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는 암시다.
늘 대가를 치르려는 책임적인 존재가 되라. 예수님은 늘 치를 대가를 인식하며 사셨기에 삶의 가벼움이 없으셨다. 특히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은 대개 유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거기서 십자가를 지고 삶을 마감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마다 십자가의 희생에 대한 생각으로 종종 깊은 침묵에 잠기셨을 것이다. 그때도 제자들은 세상적인 욕망을 따라 종종 철들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에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실 때 잎이 무성한 데도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다. 그 무화과나무를 통해 형식과 소리와 행동은 많아도 참된 희생의 열매가 없었던 교권주의자들을 연상하며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네가 잎이 무성해서 화려하게 보이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네 모습이 말뚝과 같구나.” 그런 속마음이 표출되어 당시 희생의 열매가 없는 종교인들에 대한 경고의 음성이 저주처럼 흘러나왔을 것이다. 결국 그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다.
십자가의 대가를 치를 줄 모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니고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예고한다. 왜 형식은 있어도 내용이 없는 허전한 인생이 펼쳐지는가? 대가를 치르는 삶의 부족 때문이다. 야망과 욕심으로 인해 나의 심령이 혼미에 빠지지 않게 하라. 어디서든지 비싼 대가를 치르려는 삶에서 내빼거나 뒤처지지 말라. 그래야 내 삶에 이기심의 독버섯이 자라지 않고 공허함의 신기루가 드리워지지 않는다.
< 몸을 정결하게 하라 >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중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5-6절). 레위인의 정결을 위해 3가지를 행했다(7절). 첫째,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렸다. 속죄의 물은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를 섞어 만든 물로써(민 19:2-9) 인류의 죄를 속하는 예수님의 보혈을 예표한다(히 10:22). 둘째,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었다. 즉 머리에서 발끝까지 신체의 모든 털을 깨끗이 면도해 물로 씻기지 않은 불결함까지 철저히 제거했다. 셋째, 의복을 빨게 했다. 그것도 부정과 불결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조치였다.
레위인의 정결 의식은 당시 치유된 나병환자의 정결을 공표할 때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몸을 씻는 의식과 겉의 같았다(레 14:8). 죄를 나병과 동일시했다는 암시다. 그처럼 하나님께 헌신된 존재가 되려면 몸과 옷은 물론 마음과 영혼까지 성결해야 한다. 성결함이 없으면 어둠과 불결로 뒤덮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다. 어두운 현실을 이겨내려면 하나님의 일꾼부터 성결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요즘 기독교의 세속화는 큰 문제다. 기독교가 불의를 꾸짖는 의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 곳곳에 미친 어둠의 얼룩을 닦아내는 역할을 하는 정결한 하나님의 일꾼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실상 많은 위대한 일이 더러워진 얼룩을 닦아내고 불결함을 청소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옛날에는 참된 선생이 참된 제자를 길러내기 전에 마당 청소나 마구간 청소부터 시켰다. 그 일을 통해 마음을 청소하는 훈련부터 시킨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공동체의 죄와 불결을 막아내는 선봉 역할을 하도록 레위인들의 정결 의식을 통해 그들에게 정결한 삶을 도전하고 의식화시키셨다. 영적인 의미에서 성도는 교회에 온전히 속해 있으면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나의 것을 희생하고 세상 경계로 나아가야 한다. 모험이 없으면 발전도 없고 사명도 이룰 수 없다. 위태함을 감수해야 권태감을 극복할 수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거룩한 사명을 따라 안전한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있어야 아브라함의 축복을 공유할 수 있다.
< 대가를 치르며 살라 >
레위인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필요한 제사는 번제, 소제, 속죄제였기에 각각의 제사를 위한 제물이 필요했는데 번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 소제물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속죄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가 요구되었다(8절). 번제물과 속죄제물로서 값비싼 예물인 수송아지가 요구된 것은 그만큼 레위인 정결 예식이 중요한 예식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는 암시다.
늘 대가를 치르려는 책임적인 존재가 되라. 예수님은 늘 치를 대가를 인식하며 사셨기에 삶의 가벼움이 없으셨다. 특히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은 대개 유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거기서 십자가를 지고 삶을 마감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마다 십자가의 희생에 대한 생각으로 종종 깊은 침묵에 잠기셨을 것이다. 그때도 제자들은 세상적인 욕망을 따라 종종 철들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에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실 때 잎이 무성한 데도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다. 그 무화과나무를 통해 형식과 소리와 행동은 많아도 참된 희생의 열매가 없었던 교권주의자들을 연상하며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네가 잎이 무성해서 화려하게 보이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네 모습이 말뚝과 같구나.” 그런 속마음이 표출되어 당시 희생의 열매가 없는 종교인들에 대한 경고의 음성이 저주처럼 흘러나왔을 것이다. 결국 그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다.
십자가의 대가를 치를 줄 모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니고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예고한다. 왜 형식은 있어도 내용이 없는 허전한 인생이 펼쳐지는가? 대가를 치르는 삶의 부족 때문이다. 야망과 욕심으로 인해 나의 심령이 혼미에 빠지지 않게 하라. 어디서든지 비싼 대가를 치르려는 삶에서 내빼거나 뒤처지지 말라. 그래야 내 삶에 이기심의 독버섯이 자라지 않고 공허함의 신기루가 드리워지지 않는다.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라
민수기 8장 1-3절 / 이한규 목사
< 예수님의 빛을 비추라 >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아론에게 일곱 등잔을 켤 때는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하라고 하셨다(1-2절). 누구에게 등잔을 켜는 사명을 맡기셨는가? 대제사장 아론이다. 등잔대는 세상에 빛을 비추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성도도 예수님처럼 세상의 등잔대 역할을 해야 한다. 성도의 언행은 남에게 영향을 미친다. 파괴적인 언행을 삼가고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힘쓰라. 특히 가족에게는 더욱 파괴적인 언행 대신 아우르는 언행을 나타내라.
믿음이 좋고 기도 많이 한다면서 상처의 고리를 끊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상처의 전달 고리가 되는 것은 잘못이다. 가깝고 사랑하는 대상일수록 상대를 종처럼 대하지 말고 내가 종의 자세로 대하라. 말 한 마디도 조심스럽게 타인 감수성이 녹아든 언어를 쓰라. 바른 정신과 태도를 가지고 바른 길로 나아가면서 어둔 세상에 빛 역할을 감당하며 축복받아야 그 축복에 부작용도 후유증도 없게 된다.
얼굴에 빛 된 형상이 나타나고 행동에 빛 된 모습이 나타날 때 은혜와 축복도 넘치게 된다. 교회에서도 빛 된 교인이 되라. 좋은 것을 얻으려고 교회를 찾으면 어둠의 기운이 짙어지고 불평이 넘치게 되지만 좋은 성도가 되려고 교회를 찾으면 빛의 기운이 짙어지고 감사가 넘치게 된다. 불평하며 남을 깎아내리면 사회에 어둠을 드리우게 되지만 감사하며 남을 높여주면 사회에 빛을 비추게 된다.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끊임없이 나의 성숙과 개선에 힘쓰면 세상의 빛 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라 >
등잔대에는 중앙 줄기를 중심으로 좌우에 3개의 가지처럼 뻗어진 등잔이 있어서 총 7개가 있었다. 그 각각의 등잔에 켠 불이 진설병이 놓인 정면의 떡상을 향하게 했다. 그 등잔의 불빛은 창문이 없는 어두운 성막에서 유일한 빛이었기에 제사장의 활동에 꼭 필요했다. 결국 아론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대로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다(3절). 그것은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 세상에 시간만큼 무서운 힘을 가진 것은 거의 없다. 시간의 힘은 뒤로 돌아가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에서 나온다. 시간은 어떤 경우에도 거꾸로 가지 않는다. 누구도 시간을 멈추거나 막을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시간과 보조를 맞추며 나아갈 때 생명력이 넘치게 된다. 사람이 가치 있게 될 때도 자신에게 남은 생명의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인식하고 잘 활용하려고 할 때다.
종말 시대는 스피드 시대지만 시간의 흐름 자체는 이전과 한 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너무 빨리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적절하게 앞을 바라보며 나아가라. 조급함과 서두름은 기다림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기다림의 의미를 알고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고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나님의 때가 나의 때가 된다. 가끔 조절하기 힘든 분노의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면 “한 템포 늦추며 살리라.”라고 새롭게 다짐할 때다.
흔히 과거나 미래의 시간보다 ‘지금’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이란 개념을 ‘즉시’라는 개념으로 오해하지 말라. ‘지금’의 가치는 지금 즉시 모든 것이 해결되거나 지금의 현실만 누리는 것에서 생기기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생긴다. 욕망을 따라 문제 해결을 위해 빨리 나아가기보다 사명을 따라 소중한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라. 빨리 조급하게 나아가기보다 앞으로 느긋하게 나아갈 때 시간의 향기와 인내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다.
레위인을 구별한다는 의미
민 5장
1. 8장은 레위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거룩히 드리는 내용인데, 먼저 성막의 등잔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한다(1~4). 이것은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하나님의 ‘살아있는 등불’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성별과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삼는 이상을 구현했다. 여기서 등은 하나님께서 빛의 근원이심을 가르쳐주는 상징이고 일곱개의 가지들은 ‘성령의 기름을 공급받아 사는 교회’를 상징한다. 3절에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다’고 했는데 이 빛은 진설병이 있는 테이블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살아가는 비결은 하나님의 지시와 말씀의 빛 속에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한 시편 기자의 고백은 매우 실제적인 고백이었다(시 119:105). 사도 베드로의 고백도 이것을 보여준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
2.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을 성별하는 의식을 명령하셨다(5~13). 왜 레위인을 구별하고 정결케 하는 이런 의식이 필요한가? 의식은 상징을 가지며, 이 상징은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요구한다. 그리고 모든 상징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다. 이 정결의식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상호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들이다. 성찬식에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기에(실제로 고린도교회에서는 무분별하게 성찬에 참여한 자들이 죽거나 병들었다) 믿음으로 참여해야 하듯이, 구약 시대에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레위인 정결의식의 목적은 레위인을 성별하는 것이었다. 거룩한 곳에 서기를 원하는 자들은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해야’(시 24:4) 했는데 바로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 정결의식이었다. “그들을 정결하게 하되 곧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에게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고”(7). 이것은 신약에 ‘중생의 씻음’이나 거듭남 그리고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는 것’과 유사한 표현들이라고 볼 수 있다(딛 3:5; 히 10:22). 죄의 더러움과 오염에서 새로워진 신자들의 마음의 영적 정결을 상징하는 것이다. 의식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먼저 레위인들에게 안수했고(10)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요제로 드려졌다(11).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과 같다. 첫째로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레위인은 열 두 지파의 장자를 대신하였고, 둘째로는 하나님께 대한 온 민족의 헌신을 대표했으며, 세째로 백성들의 죄에 대한 상징적인 희생 제물이 되었다. 레위인들이 수송아지에 안수하여 한 마리는 속죄제로, 한 마리는 번제로 드린 것은 레위인 자신들을 위한 속죄였다(12). 이 모든 안수 행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레위인은 동일시되었고 다시 레위인과 수송아지가 동일시되었다. 이것은 속죄가 봉사의 기초임을 다시 가르쳐준다. 먼저 속죄제물로 드려지고 이어 번제로 드려지는 것이다!
3. 이렇게 레위인을 특별히 구별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레위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초태생을 대신한다(16,17). 애굽에서 나오던 날 초태생이 다 죽었는데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들도 하나님께 바쳐진 바 된 것이다. 여기서 바쳐졌다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내포한다. 이 장자들의 생명을 대신하는 것이 레위인의 존재였다. 이 점에서 하나님께 장자들을 대신하여 바쳐진 레위인들의 삶은 자신에 대하여 죽은 삶이어야 했다.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20~22). 그리고 레위인 자신들이 순종했다. 그들은 스스로 정결케 하였다. 죄에서 떠났다. 그리고 제사장들 앞에서 봉사하였다.
4. 레위인들의 은퇴 규정이 나온다(23~26). 레위인은 25세에서 50세 이전까지만 회막에서 봉사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후에는 은퇴를 해야 했다(25세부터 30세 전까지는 수습기간이었을 것이다). 은퇴 후에는 스스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은퇴하지 않은 레위인 형제들을 도와서 일을 할 수는 있었다.
5. 본문은 몇 가지 분명한 교훈을 준다. 첫째, 하나님의 빛은 오늘날도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향하여 비추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빛을 따라서 걷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 지혜와 세상의 빛 안에서 걷고 있는가? 둘째, 레위인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세상에서 누리는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들의 기업이 되시며, 인생의 모든 시간이 다 하나님께 바쳐진 삶이 자신들의 삶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레위인들은 그저 이스라엘 민족의 대신일 뿐이었다. 그들은 레위인들에게 안수했다! 셋째,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은 레위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었다는 의미다. 자기의 사적 삶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롬 14:7에서 한 말의 의미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가 레위인이다!
6.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삶이 저희 삶이라는 사실을 다시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알고,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레위인의 정결 예식
민수기 8:1- 26 / 김근중 목사
지금까지 성막이 완성되고 성막 제사를 행하기 위해 성막 성물들을 거룩하게 하는 예식을 행했습니다. 이제 8장에서는 성막에서 봉사할 레위인들을 정결케 하는 예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맡은 자들이 정결함과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1-4절은 성소 안의 등불 정리에 대한 책임에 대해, 5-13절은 레위인의 정결 예식법에 대해 14-22절은 성막 봉사에 레위인이 선택된 이유에 대해, 23-26절은 레위인의 봉사 기간이 나와 있습니다.
1. 등불 정리의 책임 (1-4절)
성막의 출입문을 지나 뜰로 들어가면 번제단과 물두멍을 맞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성소가 있는데 그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있는 것이 등대(燈臺)입니다. 등대는 밤에(저녁부터 아침까지) 등잔불을 켜서 성소 안을 밝히 비추는 역할을 하는 기구입니다 (레24:3). 성막의 성소에는 창이 없으므로 햇빛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소를 밝힐 등대를 둔 것입니다. 그 등대(燈臺)는 정금 한 달란트로 쳐서 만들었는데 한 줄기에 좌우 세 가지씩 모두 일곱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일곱 가지 끝에는 일곱 등잔이 있었습니다 (출25:31-40). 등잔에는 순결한 감람유 기름을 두게 했고 저녁에서 아침까지 항상 불을 밝혀 놓게 했습니다 (레24:2-3, 27:21, 슥4:1-6). 그 등불은 아론과 그 후손이 아침 저녁으로 정리하게 했습니다 (출27:21).
① 일곱 등잔을 등대 앞으로 비취게 해야 합니다 (2절).
등(燈)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대 앞으로 비취게 해야 합니다. 그 말은 등대의 등불이 맞은 편을 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소의 좌편에는 등대가 있고 우편에는 진설병상(떡상)이 있었습니다. 등대의 등불이 앞을 향하게 하는 것은 진설병상 쪽을 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등대의 등불이 성소의 사역 곧 진설병상 사역과 분향단 사역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등대의 등잔(燈盞)은 모두 7개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靈)이신 성령께서 어떤 사역을 하시는지에 대해 상징으로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요한계시록4:5에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계3:1참조).
등잔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등대의 맞은 편에 있는 진설병상(陳說餠床)과 그 위에 있는 진설병(차려놓은 떡)을 비춰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진설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진설병을 응식으로 먹는 일을 도와줍니다. 이 진설병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시에(요14:6)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마4:4).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요14:16). 그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진리되는 모든 말씀 가운데로 인도합니다(요 6:48-59, 14:26, 16:13). 요한복음16:13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εν τη αληδεια)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진리 안으로 (ειs την αληδεια) 인도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λογs)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말씀을 적용 (ρημα)하도록 도와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의지와 그 말씀을 지킬 때에 은혜를 느끼도록 감동시키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영적인 필요한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벧후1:19-21, 계2:7 참조).
등잔의 또 하나의 역할은 등대의 좌편(지성소 휘장 앞)에 위치한 분향단(焚香壇)을 비춥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분향단 사역을 할 때 도움을 받습니다. 분향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상징하는 동시에(롬8:34)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시141:2). 요한계시록5:8에 "~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기도하고자 하는 열의를 갖도록 감동시키시며,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에 대한 감동과 확신을 얻도록 도와주십니다. 로마서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② 등대는 금을 쳐서 만든 것입니다 (4절). 등대는 하나님이 보이신 식양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출25:31-40).
등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성물입니다. 등대에는 인칭대명사(His- KJV)가 적용되었습니다. 곧 등대가 인격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인격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등대와 같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요12:46). 그리고 등대의 원줄기가 예수님이라면 등대의 가지들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계1:20). 이 가지들이 원 줄기에 붙어 있듯이 교회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요15:5, 엡5:31-32). 어느 누구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요10:28, 롬8:35-39).
등대의 제조 방법은 예수그리스도와 교회가 어떤 방법으로 연합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등대는 정금 한달란트(34kg: 약 100근)로 만들어졌는데(39절), 주조가 아닌 단조로 만들어졌습니다 (출25:36). 곧 금물을 주형에 부어 만든 것이 아니라 공교한 금세공 기술로 쳐서(두둘겨서) 만든 것입니다. 한달란트의 정금 자체가 귀하기도 하지만 침을 받으므로 더욱 값진 기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연상케 하는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값에 대한 진노의 형벌을 받으시므로 택한 백성을 구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교회가 탄생된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신앙도 침(두둘김) 속에서 연단되어지며 더욱 온전케 됩니다.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 정금보다 더 귀한 존재가 되어 영광과 칭찬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베드로전서1:7에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고, 4:12-13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그런 소망을 가졌습니다 (욥23:10).
2. 레위인의 정결 예식법 (5-13절)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성막 봉사자로 선택한 족속입니다. 그리고 이미 성막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1:47-54, 3:1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결 의식을 행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선택한 자라도 사역을 맡긴 자에게 내적 성결을 요구하십니다.
① 레위인이 몸을 정결 정결케 해야 합니다 (6-7절).
레위인에게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고, 의복을 빨아야 합니다. 이는 물로 몸을 씻되 더러운 이물질의 잔존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고 더러움의 영향력 아래 있는 도구에 잔존해 있는 것까지도 허락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모두 외적 정결의 상징 행위들입니다.
그 의식은 문둥병에서 치료된 자가 행하는 정결 의식과 같습니다. 레위기14:8에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 일을 거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인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된 것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게 된 것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며 예수 그리스도시며 성령님이십니다. 그들이 이미 우리를 법적으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내주로 이미 거룩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로서 날마다 새롭게 하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분들이 현재에 우리를 정결케 하는 방편들이 많이 있지만 대표적인 방편은 말씀입니다. 에베소서5:26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기초한 기도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디모데전서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② 레위인이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8절).
레위인은 번제물로 수송아지 1마리와 소제물로 기름섞인 고운가루와 속건제물로 수송아지 1마리를 취하여 가지고 회막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레위인은 생축에게 안수를 해야 합니다. 레위인이 수송아지에게 안수를 하여 1마리는 번제물로, 1마리는 속죄제물로 삼아야 합니다 (12절).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는 헌신과 희생과 속죄의 상징입니다. 특히 레위인이 생축에게 안수하는 것은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생축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축이 죽으므로 인하여 레위인의 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9:22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없어지는 것이 진정한 정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자들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 받은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죄사함 받은 자라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것을 깊이 재인식해야 합니다.
③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인들에게 안수를 해야 합니다 (9-10).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 앞에 나온 레위인들에게 안수를 해야 합니다. 이 안수는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일일이 안수하게 한 것 같지는 않고 백성의 대표자들이 안수를 하게 한 것 같습니다 (Matthew Henry).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안수를 한 것은 자신들의 모든 의무와 권리를 레위인들에게 위임한다는 의미입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성막 사역을 감당할 자들이므로 그들의 위치를 공적으로 인정하고 직임에 따른 권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전문적으로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복음 사역자들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에 전문적으로 사역을 할 자들은 하나님의 직능적 선택과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소명은 모든 사람들의 인정으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시는 방법입니다. 왕정시대에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에 미리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을 붓게 한 다음 백성들 앞에서 제비를 뽑게 했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울 때에도 하나님은 이미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으로 기름을 붓게 하였고, 그 다음에 하나님은 다윗이 백성들에게 인정받을 기회를 제공하였고, 백성들은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인정했습니다. 다윗은 그 이후에야 비로소 왕이 된 것입니다.
둘째, 교회 회원들은 교회 전문 사역자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만인이 영적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전문 사역자나 일반 교인이나 직능만 다를 뿐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영적 권위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서의 영적 권위를 말하는 것이지 사역에서의 직능적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교인들은 목회에 관련한 일을 전문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문 사역자로 부르지 않았고 그에 따른 직능적인 은사가 없습니다. 그 사역에 대한 전문적 학문을 수학하지 못했고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연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교회 일을 전문 사역자들에게 맡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사역의 효율성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 만큼 교인들은 전문 사역자들에게 목회에 따른 권리를 부여해야 하며 목회에 관한 사역에서 일체 순종해야 합니다.
④ 아론이 레위인을 요제로 드려야 합니다 (13절).
아론과 그 아들들이 레위인들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려야 합니다 (11, 15절). 요제(搖祭)는 제사의 종류가 아니라 제사의 방법입니다. 요제는 흔들어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하나님께 앞뒤로 흔들어 올리는 제사입니다. 레위인을 요제로 드린 것을 두고 이론들이 있습니다. 그 중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레위인이 단 위로 올라간 다음 다시 내려오는 방법으로 드려졌다는 주장입니다 (Keil). 그러나 12절의 속죄 원리를 볼 때 레위인을 직접 드린 것이 아니라 레위인이 안수하여 대신 죽게 한 생축을 드린 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그 생축이 드려진 것은 제사 원리로 볼 때 안수한 레위인이 드려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록 생축이 드려졌다 해도 그 제물을 안수하여 드린 레위인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으로 간주되어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레위인이 바침이 되는 데 있어서 요제(搖祭)라는 제사 방식을 채택한 것은 요제가 갖는 특수성 때문입니다. 요제는 제물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 다음 제사장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레7:30-34). 레위인은 하나님께 드려진 다음 실제적으로는 제사장들에게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 수하에서 성막 봉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3:5-10).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음 사역을 위해 부름받은 자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로마서12:1에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실제적 의미 가운데 하나는 예배 사역을 위해 예배 인도자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모든 복음 사역에 헌신된 목회자를 협력하고 그를 돕는 것입니다.
3. 레위인이 선택된 이유 (14-22절)
레위인들은 제사장들을 돕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3:6). 크게 나누어 첫째, 성막을 철수하고 운반하고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성막 기구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성막과 성막 기구를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넷째,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하는 것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1:51, 3:8-9).
① 레위인이 선택된 근거는 출애굽 때 지킨 유월절 사건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낼 때 마지막 애굽에 재앙을 내렸습니다. 마지막 재앙으로 모든 초태생(初胎生; 맏 아들과 처음난 짐승)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했고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피가 발라진 집은 재앙을 내리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출13:1-16). 그 유월절 사건 직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초태생을 요구했습니다. 출애굽기13:2-3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초태생은 하나님이 죽음을 면하게 했으므로 하나님이 자기 소유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바침이 된 초태생을 성막 봉사에 전무하게 해야 하지만 그들을 대신하여 한 지파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인구조사와 군대편성과 성막직무 분담에서 각 지파와 종족과 가속을 따라 분담하게 했던 이유와 같았을 것입니다 (2:3-31). 그것은 갈등과 분열의 소지를 없애고 공동체 의식과 사역의 일체감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막 봉사에 전무할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이미 바침이 된 각기 다른 지파의 초태생(장자)들 보다 한 지파를 선택하여 그 직무를 대신하게 한 것입니다. 곧 레위인은 하나님의 소유인 초태생들을 대신하여 바침이 된 자들인 것입니다 (3:12-13, 8:16-18).
② 레위지파가 선택된 이유는 그들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사건에서 보여준 충성심 때문이었습니다.
성막 봉사를 전무할 지파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레위 지파가 선택된 것은 야곱의 축복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지만 (창49:7), 직접적인 계기는 레위 지파가 금송아지 우상 사건 때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모세가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아론을 위시한 백성들은 애굽에서 우상을 섬기던 방식을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자기들의 신이라고 하며 자기들을 인도하라고 하며 그 신상을 돌며 제전 의식을 행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율법판(십계명)을 받아 내려와 그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율법판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우상 숭배에 참여한 자들을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출애굽기32:26-27에 보면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사람이 그 일에 참여했거나 참여한 자들과 관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들이 칼을 차고 나와 그들을 모두 진멸했습니다. 그 때에 도륙한 수가 3,000명 가량 되었습니다 (출32:29). 금송아지 사건은 레위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 모세에 대한 순종심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지파에게 맡기지 않고 레위 지파에게 성막수호와 봉사직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막의 제사사역을 하게 하므로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속죄함을 얻게 되고 긍휼과 은혜를 입게 한 것입니다(18:19).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던 성막을 관리하고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생명을 마치는 자들이 맡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제사 사역을 수종드는 일은 하나님 말씀대로 지시하는 지도자를 절대 순종하는 자들이 맡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침이 된 자들입니다. 베드로전서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겼습니다. 우리는 만인을 대표하여 드려진 자들입니다. 우리를 통해 만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속죄함을 얻게 되고 긍휼과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위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4. 레위인의 봉사 기간 (23-26절)
레위인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맏아들들을 대신하여 평생 하나님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성막에서 공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간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레위인이 성막에서 봉사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간은 25세~50세였습니다 (24절). 성막에서 봉사할 수 있는 나이를 역대상23:24에는 20세 이상으로 규정했고, 본문에서는 25세로 규정했고, 4:3에는 30세 이상으로 규정했습니다. 정년의 나이는 동일하게 50세까지로 규정했습니다. 아마 5~10년 정도는 견습생으로 참여하고 30세부터 전적으로 참여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50세 이후에는 일선에서 물러나 젊은 레위인들에게 조언을 하고 성막 기구 관리를 도왔던 것 같습니다.
성막 봉사에 정년(停年)을 둔 것은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많을 경우 분별력과 책임감이 없고 그 일을 감당할만한 총명과 기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사역인지를 반증하는 대목입니다.
신약시대에 모든 성도는 복음의 직책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 직책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서 가져야 할 정신은 첫째,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사역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역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무나 대강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둘째, 훈련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철저한 견습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조금의 실수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배우고 연단받는 훈련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무엇이든 적어도 5~10년은 배워야 하며 그 정도는 낮아져서 연단받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셋째, 성실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일할 수 있을 때에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일할 수 있는 기회는 불과 20~30여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혜와 힘과 능력과 환경이 허락된 때에 봉사하지 않으면 주의 일을 보람있게 할 기회를 가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부름받았습니다. 복음 사역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우리를 통해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오고, 죄사함을 받고, 은혜를 받게 됩니다. 만민이 우리 때문에 재앙을 당하지 않고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치에 있는 자로서 얼마나 정결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레위인의 사명
민 8:1- / 구영철 목사
민수기 8장 주제 : 레위인의 사명은 봉사의 일을 하며,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대통령이었던 링컨에 관한 유명한 일화입니다. 남군과의 전쟁에서 북군이 밀리기도 하고, 팽팽한 접전을 이루고 있을 당시 측근들은 초초해 하며 대통령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실까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 북군과 함께 하실까요?” 신앙이 좋은 링컨대통령에게 그들은 전쟁에 대한 확신을 얻기 원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지 묻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를 점검하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서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서 있는가? 우리가 성결하고, 거룩한가? 그런 태도로 링컨은 기도하면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삶 속에서 종종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이 이 문제 속에 계실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까? 질문합니다. 그러나 링컨의 대답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가? 우리가 거룩하고 성결한가?를 질문할 때, 우리가 고민하고, 어려워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민수기를 읽어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민수기 1장에서 9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준비과정속에서 하나님이 왜 그렇게 뜸을 들이시는지 깨달아 지십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시는 내용의 핵심이 바로 거룩입니다. 정결입니다. 구별함입니다. 거룩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인됩니다. 오늘 본문은 성소의 등잔대에 관한 말씀이 (1-4)까지 언급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께 바쳐진 레위인의 정결예식에 관한 말씀(5-26)까지의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레위인들에게 철저한 정결을 원하십니다. 거룩을 원하십니다. 6-7절 정결하게 되는 상징으로 속죄의 물을 뿌립니다. 온몸을 삭도로 밀고, 의복을 깨끗이 빨게 됩니다. 그 다음에 번제물, 소제물, 속죄제물을 바치면서 레위인이 거룩히 구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정결할 것을 원하십니다. 현시대의 가장 큰 문제로 리차드 포스터는 피상성이다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거룩도 피상적인 거룩함, 정결함 만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내가 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내가 행동하는 것은 거룩합니까? 8장의 내용에서 하나님은 레위인의 구별을 통해서 우리도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2. 레위인은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질 때 요제를 통해서 드려집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레위인에게 두가지 큰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구별된 레위인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사명은 무엇입니까? 1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1) 먼저는 제사장들과 함께 성막에서 봉사하는 사명을 레위인에게 주셨습니다. 성막에서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보존하는 일은 레위인에게 중대한 사명이었습니다.
레위인이 요제로 하나님께 드려진 이유는 이러한 성막에서의 봉사의 이유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요제로 구별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봉사하기 위함입니다. 요제가 무엇입니까? 요제(搖祭)란 희생 제물의 가슴 부분 혹은 땅의 첫 수확 등을 제사장의 양손 위에 올려 놓고 제단 앞에서 앞뒤로 흔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 방법을 말합니다. 이렇게 흔드는 행위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제로 바쳐진 제물은 제사장의 몫으로 다시 들려졌습니다. 이 레위인 요제는 레위인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바침과 동시에, 그 바쳐진 자들을 다시 제사장의 몫으로 돌렸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따라서 레위인들은 제사장의 수하에서 그들을 도와 성막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이제 레위인들은 '요제'를 통해 세상과 구별된 자로서, 제사장에게 소속되어, 성막에서 하나님만을 위해 봉사해야만 했다. 레위인이 요제로 구별된 것은 성막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보존하는 봉사를 하기 위함입니다. 봉사없는 구별, 섬김없는 거룩은 무의미합니다. 내가 더 하나님 앞에 거룩해지고자, 구별되고자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2) 레위인이 하나님께 구별된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기 위함입니다. 19절 뒷부분에 보면 언급되어 있습니다. 레위인에게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맏아들로서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에 나와서 그들의 죄를 속하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속죄의 사명을 위해서 레위인은 성막에서 봉사하며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비록 제물을 드려서 죄를 속하는 일은 직접적으로 제사장이 수행할 일이었지만, 레위인들도 회막 봉사와 제사장의 제사 집례를 보조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는 일에 간접적이나마 일익을 담당했다. 더욱이 그들은 성막 경호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무모한 죽음을 예방하였는데, 이 역시도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속죄'에 대한 간접적 봉사라 할 수 있다. 사실 그들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면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보존하는 동시에 백성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게 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의 맏아들로서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는 사명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에 놓여져 있습니다. 다른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인 레위인으로서 그들을 속죄하는 다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해서 그들은 죄를 속할 수 없습니다. 거룩이 무엇인지 몰라서 타락으로 영혼이,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방법을 모르는 비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인스턴트식 만족을 느끼며 하루 하루를 연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대속의 사명은 구별된 레위인으로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중요한 사명입니다. 내 주변에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거룩한 부담감으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하는 하루를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대속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속적으로 우리 자신을 스스로 거룩해 해야 합니다. 날마다 구별해야 합니다. 세상안에 살지만, 세상을 정화시키는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거룩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성결한 삶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줄 수있습니다. 오늘 하루 이 새벽에 기도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요제로 온전히 드린 바 된 자
민수기 8장 1-26절 / 석기현 목사
지구상의 자연계가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공기와 물 외에도 햇빛이 꼭 필요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살 때 제 집의 해수(海水) 어항에 열대어와 산호를 키우면서 이 사실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어항은 진짜 햇빛 대신 전등과 형광등으로 조명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 등이 아침에 켜지고 밤에 꺼질 때까지 바로 그 빛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은 비록 어항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이기는 했지만 제 눈에는 실로 오묘하고 흥미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인조 햇빛’이 비취기 시작하면 밤새 움츠려 있던 산호들이 기지개를 켜는 양 몸을 떨면서 촉수를 뻗기 시작합니다.
또한 돌 표면 같은 곳에는 이끼 같은 해조류들이 그 빛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하면서 아침과 저녁이 다르게 보송보송 자라납니다.
그런 가운데 열대어들은 그 이끼를 뜯어 먹느라고 혹은 돌 틈에 있는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느라고 온종일 산호 틈새를 비집고 헤엄쳐 돌아다닙니다.
그야말로 빛이 비취는 바로 그 순간부터 어항 안의 모든 생명체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세운 성막 역시 어떤 빛이 그 안을 비추게 되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절부터 4절에 “1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등불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할지니라 하시매 3아론이 그리하여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4이 등잔대의 제작법은 이러하니 곧 금을 쳐서 만든 것인데 밑판에서 그 꽃까지 쳐서 만든 것이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보이신 양식을 따라 이 등잔대를 만들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성막이 완성되고 제사장들이 위임식을 하고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특별예물을 드리는 일련의 준비 과정이 다 끝난 후 이제 드디어 그 성막이 공식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함을 알리는 점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일곱 등잔”으로 이루어진 “등잔대”에 불을 켜서 그 빛이 “등잔대 앞으로” 즉 등잔대 맞은편으로 “비추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소의 구조를 보면 등잔대 맞은편에는 열두 덩이의 떡 즉 ‘진설병’이라 불린 떡을 두 줄로 쌓아올린 상이 있었습니다.
그 진설병의 상은 바로 하나님께 항상 헌신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백성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을 향하여 등불이 항상 비취는 것은 곧 성령의 조명이 항상 그 선민에게 충만히 부어지고 있음을 상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빛을 받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은 날마다 살아 움직이며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내용에 이어 5절 이하에 레위인의 취임식이 나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성막의 등불이 비췰 때 그 빛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연히 그 생명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성막에서 특별히 봉사하게 될 레위인부터 나타내야 마땅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오늘도 교회를 중심으로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선한 일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성도가 과연 어떻게 살아 움직이면서 부지런히 섬겨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교회봉사가 자신을 하나님께 가장 정결하게 바치는 귀중한 기회로 알고 섬겨야 합니다.
5절부터 13절에 기록하기를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 7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되 곧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에게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고 8또 그들에게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가져오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가져오고 9레위인을 회막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10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안수하게 한 후에 11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라 12레위인으로 수송아지들의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네가 그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려 레위인을 속죄하고 13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 여호와께 요제로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레위인의 취임식에는 크게 두 가지, ‘정결의식’과 ‘제사’가 따르게 됨을 보게 됩니다.
비록 제사장 위임식의 경우보다 좀 더 간단하기는 했지만 레위인 역시 먼저 자신을 “정결하게” 준비하고 그 직분에 임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순서는 “속죄의 물”을 뿌림 받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냥 ‘정결의 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전신을 삭도로 미는” 것은 나병 환자가 고침을 받았을 때에도 적용된 규례였는데(레 14:7-9), 레위인의 경우에도 역시 이 정결의식이 적용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사장이 특별한 의복을 입었던 것과는 다르게 레위인은 그냥 자기가 입던 “의복을 빨아서” 입도록 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가 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예비한 후에 성소를 섬기는 직분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레위인은 성소를 섬기는 직분에 종사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욱 거룩하고 정결한 모습으로 유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들은 온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특별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중에서 “번제”는 ‘헌신’을, “소제”는 ‘최상의 것을 바침’을 뜻하며, “속죄제”는 물론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특별제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레위인을... 여호와께 요제로 드릴지니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 “요제”란 제사의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화제’는 불에 태워 드리는 것이고, ‘거제’는 높이 들어 올려서 드리는 제사인 반면에, ‘요제’는 짐승의 뒷다리나 가슴을 좌우로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레 7:30-34). 물론 이 경우에는 제사장이 레위인을 직접 붙잡고 공중에서 흔든 것은 아니며, 여기서 바쳐지는 제물들을 레위인 대신 그런 방법으로 드렸다는 뜻입니다.
요제와 거제는 그처럼 ‘들어 올리거나 흔들어서’ 일단 하나님께 드려진 후 그 제물 자체는 제사장에게로 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을 요제로 드릴지니”라는 말이 이 8장에 네 번(11, 13, 15, 21절)이나 반복되어 나오는 것은, 그 레위인은 특별히 제사장에게 속하여 그들을 도와 성막을 섬김으로써(19절상)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림이 되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교회를 섬기는 것 역시 이처럼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정결한 제물로 바치는 지극히 고귀하고도 귀중한 기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레위인이 요제로 드린 바 되어 제사장을 도와 성막을 섬겼던 것처럼, 여러분 역시 반드시 교역자의 지도와 감독 하에서 교회봉사를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런 봉사가 그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교역자를 섬기는 일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열심히 교회봉사할 것을 가르치고 명하는 것은 세상에서 사장이 직원에게 일을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경우와는 전혀 다릅니다.
회사 사장은 자기에게 돌아올 이윤이 조금이라도 더 많게 하기 위하여 직원들을 다그치는 것이지만, 교역자는 본인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주일학교 교안준비를 잘 해 오지 않은 교사에게 꾸중을 하고, 전도사가 구역장더러 심방 같이 가자고 조르거나 찬양대 좌석에 앉는 대원 숫자까지 체크하면서 전도회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거는 것은, 절대로 자기 밥줄 끊어질까봐 걱정이 되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교역자들이 교인들을 그처럼 영적으로 ‘붙들고 흔드는’ 이유는 오로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빠짐없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제물’로 만들어 바치고자 함일 뿐입니다.
여러분을 꼭 붙잡고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시간과 힘을 다른 데 허비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지는 헌신에 쓰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때로 여러분의 정신이 버쩍 들도록 쥐고 흔드는 것도 여러분이 나태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과 순결함을 지키는 가운데 제대로 봉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곧 ‘제사장의 임무’인 것입니다.
교회봉사는 결코 교역자를 섬기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하나님께 가장 ‘정결한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임을 명심하면서, 늘 교역자의 관할 하에서 그 지도에 순종하며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교회봉사가 하나님께 은혜의 빚을 진 자로서 마땅히 행할 의무인 줄 알고 섬겨야 합니다.
14절부터 19절에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이 그처럼 성막을 섬겨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주고 계십니다.
왜 레위인은 “구별”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속한”,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들인지, 왜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취하시고” 완전히 당신의 것이라고 공언하시는지를 또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레위인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들과 가축의 첫 새끼들까지 죽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셨던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 직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당신께 “속한” 것으로 바쳐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시 방법으로서 “레위인”을 위시하여 ‘레위인의 가축’ 혹은 ‘속전세’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을 “대신”하여 드리도록 앞서 민수기 3장에서부터 지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같이 레위인이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바쳐져야 할 의무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어느 누구도 이의나 반론을 제기할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레위인은 자기네가 성막에 상주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일반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불만을 품을 수가 없었고,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 레위인들을 자기들이 물질적으로 뒷바라지하게 되었다고 불평할 입장은 조금도 못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레위인의 봉사는 온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최소한의 요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지고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다 성막에 나와서 섬기라고 명하셨더라도 거역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 오직 초태생만으로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그것마저도, 모든 이스라엘 집안의 장남들로 하여금 다 섬기게 하지 않고 레위인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만약 그런 가장 기본적인 봉사조차 준행하지 않으면서 버젓이 성소에 “가까이” 나아오려 한다면 19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참으로 “재앙”을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빚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간에, 그야말로 입이 열 개라도 군소리 없이 따라야 마땅한 처지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와 복들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너무나도 가벼운 것들뿐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왜 내가 남들은 편히 노는 주일에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바쁘고 힘든 하루를 보내야 하나? 왜 나는 주중에까지 불려 나와서 다른 교인들은 하지 않는 고생을 사서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왜 우리 교구 담당 목사님은 구역장을 꼭 힘들게 만들려고 하시나? 왜 우리 주일학교의 담당 전도사님은 다른 교역자들보다 더 유별나게 주교교사들을 들들 볶나?’라는 유치한 생각이 혹 들 때가 있습니까?
교회봉사가 좀 힘들다 싶으면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내게 먼저 내려 주신 은혜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는 다 영벌의 지옥에 가야 마땅했던 자들이었는데 오로지 우리 대신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 덕분에 영생의 천국을 약속받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지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는 날 위해 지금 당장 순교해라.’라고 명하셔도 꼼짝 없이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할 도리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봉사’라고 거창하게 부르는 것들, ‘직분자’니 ‘청지기’니 하면서 아주 대단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이름을 붙이고 있는 섬김이란 것들은, 실상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에 비하여 그 얼마나 미미한 것이겠습니까?
교회의 모든 직분들은 다 ‘자원봉사’입니다.
문자 그대로 ‘자원’이니, 당회가 여러분에게 그 직분을 맡으라고 무조건 임명할 권리는 없으며, 교역자가 여러분에게 억지로 요구하거나 강제로 시킬 권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 교회봉사를 ‘자원’하도록 명령하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 그런 작은 봉사들 이상으로 훨씬 더 어렵고 진짜로 힘든 헌신까지도 당당하게 명령하실 권리를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봉사를 할 때 이처럼 자기가 섬기고 있는 ‘짐의 무게’만 느끼기보다는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한량없는 ‘은혜의 빚의 크기’를 기억함으로써 오히려 늘 기쁨과 감사로만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성도는 교회봉사야말로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최고로 활용하는 방법인 줄로 알고 섬겨야 합니다.
20절 이하 26절에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곧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21레위인이 이에 죄에서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그들의 옷을 빨매 아론이 그들을 여호와 앞에 요제로 드리고 그가 또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여 정결하게 한 22후에 레위인이 회막에 들어가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서 봉사하니라 여호와께서 레위인의 일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게 하신 것을 따라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23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4레위인은 이같이 할지니 곧 이십오 세 이상으로는 회막에 들어가서 복무하고 봉사할 것이요 25오십 세부터는 그 일을 쉬어 봉사하지 아니할 것이나 26그의 형제와 함께 회막에서 돕는 직무를 지킬 것이요 일하지 아니할 것이라 너는 레위인의 직무에 대하여 이같이 할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20절부터 21절의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앞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명령을 따라 레위인의 취임식을 거행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레위인은 본격적으로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하게 되었는데, 그 “복무”의 기간은 “이십오 세”부터 “오십 세”까지였습니다.
앞서 민수기 4장 3절에 보면 레위인은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성막의 일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여기서 “이십 오세 이상”이라고 한 것은, 레위인이 본격적으로 성막 봉사를 하기 전에 일종의 수습 기간을 가지도록 한 것을 뜻합니다.
즉 첫 5년 동안은 선배 레위인들의 가르침과 시범을 통해 성막 섬기는 법을 배운 후에 30세부터 자기 분야에 있어서 그야말로 전문가로서 봉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20년을 섬기고 50세가 되면 “그 일을 쉬어 봉사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완전한 정년퇴직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그 이후에도 “그의 형제와 함께 회막에서 돕는 직무를 지킬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그 형제 레위인들을 ‘도와서’ 혹은 그들을 ‘감독하면서’ 자기의 직무를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50세 이후에는 육체적으로 힘이 떨어지기 때문에 전성기 때처럼 성막에 관계되는 육체노동을 수행하기에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30세부터 50세 사이에 있는 실제 종사자들을 지도 감독하기에는 더 없이 적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25세부터 30세까지 수습 기간 중에 있는 레위인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역시 가장 ‘숙달된 조교’가 될 수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레위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을 따라 평생토록 성막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값있게 활용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바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젊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자신의 전 인생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특권이겠습니까?
자신의 힘을 한창 발휘할 수 있는 최전성기에 이랬다저랬다 시행착오하면서 낭비하지 않고 오직 의롭고 선한 일을 위해 충실하게 다 바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보람되고 알찬 것이겠습니까?
육신의 힘은 쇠잔하여 가더라도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고 교역자들을 잘 모시는 법에 대하여 자신의 체험을 통해 신앙의 후손들에게 지도하는 지혜는 날이 갈수록 더 충만해지는 노년이란 정말이지 그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세상일은 젊을 때나 한번 힘써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후세대에게, 더 똑똑하고 더 힘 있는 청장년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일들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회에서 소위 ‘명예퇴진’이다 ‘조기은퇴’다 하는 차가운 바람이 일고 있는 것도 그 한 단면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만큼은 그런 ‘불명예스러운 명퇴’나 ‘물러나고 싶지 않은 정년퇴직’이 없습니다.
잘 섬기는 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더 숙달되고 더욱 명예롭게 일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회봉사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선한 봉사에 한 해라도 일찍 시작하는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한평생을 다 낭비해 놓고 그것을 후회하면서 노년을 맞이하게 된다면, 한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교회를 통해 지금 맡고 있는 직분을 잘 섬기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내년에는 더 잘 섬기고, 그런 ‘작은 봉사’에 충성함으로써 ‘이보다 더 큰 일’까지 너끈히 해냄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 아쉬워할 것이 없이 완벽하고도 충만하게 채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의 성막에는 창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성막 안을 비취는 빛은 오직 등잔대의 불 하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비추고 있는 동안 성막의 생명적인 기능과 활동은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은 매일 상번제를 드렸고 레위인은 그 직무를 따라 부지런히 섬겼던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 된 교회를 향하여 성경 말씀의 빛으로, 보혜사 성령의 빛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조명해 주고 계십니다.
교회 안에는 이 빛 외에는 다른 빛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연도 빛을 받으면 온갖 생명 작용이 일어나듯이 이 빛이 있는 교회라면 그 안에는 그 교회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영적 생명 작동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를 통해 이 빛을 제대로 받고 있는 성도라면 결코 종일 잠만 자고 있거나 죽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그냥 영적 동면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 되는 즐거움은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항상 받아먹기만 바라는 비만증에 걸린 양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봉사를 가르치고 충성을 강권하는 목사, ‘레위인을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던 아론’의 모습은 오늘날의 소위 세련된 목사들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만 여겨지는 현실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헌신의 제물로, 수고하고 애쓰는 제물로, 회개에 합당한 구체적인 열매를 맺는 제물로 바쳐 드리고자 애쓰는 제사장을 만나면, 양들은 지레 겁을 집어 먹고 아예 도망가 버리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등불이 켜져 있는 성막 안에서는 결코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조명이 항상 빛을 발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는 섬기는 자들의 생명력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결한 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바쁘게 움직이는 성도, 교회의 모든 교인들을 그런 요제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역자 - 이들이야말로 빛을 받아 움직이며 활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지체’들이 아니겠습니까?
2019년도 벌써 반이 지나가고, 이제 두 주일 후에는 ‘하반기 직원임명식’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정결한 산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모든 어렵고 힘든 것을 넉넉히 이기며, 젊을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기 인생의 최고와 전부를 헌신함으로써 오직 ‘희년의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올해에도 끝까지 ‘요제로 온전히 드린 바 된 레위인’으로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