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편 링크 - https://cafe.daum.net/Europa/1AT/30930
2편 링크 - https://cafe.daum.net/Europa/1AT/31175
이번에도 공백 포함 약 1만 9천자쯤 나왔습니다. 5편으로 확실히 완결합니다. 아마도.
파트리샤의 예상과는 달리 보석금 지불은 사흘이나 늦어졌다. 바로 풀어주리라 낙관했던 모양인지, 주군의 집에서 흉기를 빼든 아들을 되찾으러 온 늙은 아비들은 부디 모자란 아들의 경거망동을 용서해 주십사 하며 아들보다 더 어린 국왕에게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반역이라는 무시무시한 혐의를 어떻게든 피하게 해주려는 아비의 정에 국왕은 큰 책망 없이 둘 다 돌려보냈다. 침대에 길게 누운 파트리샤는 졸음에 겨워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이 든, 갓 구운 흰 빵처럼 뽀얗고 통통한 딸을 부드럽게 껴안은 채로 맞은편의 길패트릭에게 말했다.
“하루 만에 당신에게 잘못했다고 바짝 엎드리게 할 방법이 있어요. 아직 싸우고 있다면서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귀여운 아이를 품에 안고 토닥토닥 재우고 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천상의 풍경보다 더 아름다워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고만 싶다. 그래서 길패트릭은 파트리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해가 기니 사람들이 다들 기운이 넘쳐서…….”
“기운이 넘치면 쟁기질이나 한번 더 하지, 왜 그걸 당신에게 풀고 있는데요? 당신이 소예요?”
찌릿. 따스한 웃음기를 담던 초록빛 눈이 살짝 동그래지면서 매서운 반박이 바로 날아가 꽂혔다. 비록 잠든 아기를 깨우지 않으려 목소리를 낮췄으나. 길패트릭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파트리샤의 따뜻한 뺨을 어루만졌다.
“착하죠, 착하죠. 화내지 말아요.”
그러자 파트리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눈을 반달처럼 휘었다.
“…여보세요, 혹시 3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세요?”
“나는 당신과 우리 딸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지요.”
길패트릭은 서슴없이 답하며 아내의 눈을 마주 보고 웃었다. 마지막 햇살이 남긴 여명이 스르르 저물고 밤의 어둠이 방을 물들여 파트리샤는 더욱 하얗게 보였다. 곁의 어린 딸도.
“아무튼, 이제 곧 외국 사절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상단의 명부를 발표할 거잖아요? 자식 내놓으라고 싸우는 둘 다 이름을 빼버린다고 해요. 바로 납작해지는 꼴을 보게 될 거예요.”
그 말에 길패트릭은 잠시 멈칫했다. 국혼에다가 대관식이다. 아키텐 전역에 지점을 뻗치는 상단은 물론이고 가진 것이라곤 점포 하나가 전부인 소상공인, 보따리를 인 장돌뱅이까지 모두 이번 대목을 노린다. 대로를 따라 늘어설 임시 점포 자리도 벌써 대리인과 선접꾼을 보내 목 좋은 곳을 차지하려고 5일 뒤 접수할 관청 인근의 여관을 가득 채우며 서로 안면을 틔우는 중이다. 그중에서도 정부의 중개를 통해 외국 사절이 직접 수행으로 선발한 상단과 교류할 수 있는 특권은 그 자체로도 국왕이 상단의 유망함과 안정성을 보장한다는 증표이니 아키텐 전역에서 내로라하는 상단은 모두 형형한 눈으로 사활을 걸고 있다. 하루 벌이로 사는 이들도 겨우 얻은 장기 고용과 목돈에 희망을 품을 텐데. 그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건 너무하잖습니까.”
“너무한 게 누군데 그래요? 내 신랑이 죽겠다고 하는데. 내가…….”
텁. 파트리샤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유리구슬 같은 초록빛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빡거렸다. 길패트릭은 난처해하며 눈빛으로 오라드를 가리켰다.
“…우리 딸이 자고 있잖아요.”
그건 잊어줘, 제발. 그렇지만 신혼 때 만취시켜 받아낸 자백을 지금까지 우스워하면서 잘 이용하는 걸 보면 아마 이 일도 신부가 결혼 시장 하자품일 거라 짐작했었다는 과거 마냥 몇 년은 거뜬히 써먹을 것 같다. 길패트릭은 자포자기하며 파트리샤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파트리샤가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당신처럼 내 말 잘 들어줄 사람을 어디 가서 찾겠어요.”
길패트릭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사라지며 미소가 빙그레 감돌았다. 그는 딸의 배 위에 얹은 아내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나는 당신에게 늘 배우니까요. 그리고 그 일은 내가 직접 찾아가 상단주 둘 다 차례로 만나볼 생각입니다. 싸움에 정신이 팔려 아직도 가을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요청하지 않아도 내가 물량 배정에서 제외함은 물론 향후 3년간 절대로 돕거나 일을 맡기지 않겠습니다. 그 정도면 될까요?”
“살펴볼 생각이라면 당신이 가는 것보다 내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남자보다는 여자가 덜 위협적으로 보일 테니 방심할 거예요.”
“국왕 폐하의 친누이가 행차하는 것보다는 벼락감투를 쓴 이방인 출신 풋내기 장관이 가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길패트릭은 바깥에 떠도는 말을 옮겼다. 자조도 자기비하도 아닌 단순한 인용이었으나 파트리샤는 남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을 빼서 그의 귀를 살며시 덮었다.
“못된 말은 듣지도 말고 기억하지도 말아요. 나도 우리 가족도 당신이 만나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이 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무척 속상할 거예요. 나 속상하게 하지 않을 거잖아요.”
파트리샤는 손을 스르르 내리고 이번에는 오라드의 배 위에 얹은 길패트릭의 손을 꼬옥 잡았다. 오늘도 무척 피곤했는지 따뜻한 손이었다.
“괜히 불필요한 일이 없도록 언제 방문할지 미리 알려주고 가요. 우리 일정도 그렇고 부랴부랴 구색을 갖출 여유조차 없어지려면 모레가 좋겠네요. 그리고 가기 전에 그 덥수룩한 머리는 꼭 다듬고 나가요. 곧 눈을 찌르겠어요.”
해야 할 일이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다. 길패트릭은 턱선 아래까지 내려오려는 옆머리를 떠올리며 물었다.
“폐하처럼 머리를 길러볼까요?”
“그 애는 긴 머리가 어울리는데 당신은 그저 그래요.”
단호한 대답에 그는 피식 웃었다. 이윽고 어둠이 완전히 방안을 덮어 피곤한 그들의 눈을 감기고 스르르 졸음에 잠기게 했다. 아이가 몸집이 커져 이제 부모에게 눌리지 않을 거라는 허락을 받고 세 식구가 한 침대에서 잠드는 첫날이었다. 파트리샤가 잠결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길패트릭은 놓치지 않았다.
“우리 딸, 당신하고 자는 얼굴이 똑같아요. 바보 얼굴.”
비록 꿈은 꾸지 못했으나 행복에 감싸여 잠들고 일어난 뒤 길패트릭은 일찌감치 시종을 불러 왕실의 전속 이발사에게 기별을 넣었다. 전속 이발사라고는 해도 왕족의 머리카락을 다듬는 일보다는 왕성에서 주로 생활하는 궁내관과 친위병의 머리카락을 다듬을 일이 훨씬 많으니 순번 문제로 괜한 불만을 사지 않으려면 시간을 따로 잡아야 했다. 어쩌면 간밤에 누군가가 크게 다쳐 그 처치를 하러 달려가 한창 수술 중일 수도 있으니. 그러나 충분히 기다릴 용의가 있었던 그와는 달리 이발사는 당장 도구를 들고 달려와 그의 목에 두꺼운 천을 두르며 히죽 웃었다.
“지금쯤 불러주시지 않을까 싶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길패트릭은 이발사의 그 웃음이 가위질할 보람이 있는 대상을 찾은 기쁨임을 느끼며, 시야의 윗부분을 가렸던 앞머리를 눈동자만 움직여 흘끗 보며 물었다.
“그렇게 답답해 보였는가?”
“공주께서 단정한 것을 좋아하시니까요. 마나님이 하자는 대로 해야 늘 맛있는 수프를 먹을 수 있는 법이죠.”
문득 길패트릭은 신혼 때 먹었던, 새신부의 사랑이 듬뿍 담긴 암살 시도… 아니, ‘여러 가지 수프’를 떠올리고 풋 웃었다. 정리하면서 요리하는 법을 몰랐던 공주님은 반드시 자신이 직접 하고 싶다며 몸에 좋다는 각양각색의 재료들을 다 늘어놓고 손질을 시작했는데, 안 그래도 불이 많은 곳이 어수선해지고 가루까지 날리니 뒤에서 지켜보던 주방장이 화재를 막기 위해 조수들을 붙여 재빨리 찌꺼기를 치웠다. 다만 주방장의 권한으로도 넙치와 메추라기, 훈제 청어, 소금에 절여 말린 돼지고기, 양배추절임을 포함해 맛의 배합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영양만 따진 채소들이 처참하게 조각나 물 조절까지 실패한 수프에 들어가는 건 막지 못했다. 너무 많이 만들어버린 그 수프는 ‘첫째 공주님의 정성’이라는 이름이 붙어 부왕과 모후, 할머니, 이미 크레타 대공비로 떠난 둘째 필리파 공주를 제외한 나머지 두 동생과 신랑에게 전해졌다. 다른 잘하는 게 많으니 이런 건 요리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라는 부왕, 엄마는 언제나 널 사랑한다는 모후, 혹시 몸이 안 좋아 맛을 못 느끼냐는 할머니,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라는 다섯 살 어린 남동생, 언니가 날 미워한다며 울음을 터뜨린 열 살 어린 여동생……. 유일하게 신랑만큼은 그 수프를 다 비웠다. 순전히 재료가 아까워서! 그리고 체해서 이틀간 고생했다.
“그렇지만 요즘 젊은 친구들은 머리를 기르겠다며 버팁니다. 그러다가 덥다고 고생할 텐데 말입니다. 국왕 폐하께서도 어제 제 숙부에게 숱을 쳐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오늘처럼 흐린 날이면 머리카락이 붕 뜨기도 할 테니까요.”
이발사는 말하면서도 재빠르게 찰칵찰칵 가위를 움직여 길패트릭의 갈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다듬었다. 제멋대로 삐죽삐죽 자라던 정원수가 솜씨 좋은 정원사를 만난 것처럼. 손을 바쁘게 움직이는 것 외에도 이발사는 이 특별한 손님에게 아기는 요즘 어떤지, 귀찮게 하는 작자는 없는지 정답게 물었다. 길패트릭은 정무와 관련된 이야기는 최대한 피하면서 곧 형을 만날 거라는 기쁜 소식과 들뜬 얼굴을 보여주었다. 아키텐의 중신이면서 친형을 사적으로 만나도 괜찮을지 하는 우려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머리로는 가볍게 나눌 대화 주제가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다.
여전히 재상의 자리를 비워둔 채로 조회가 열렸다. 국왕은 병석에 누운 알바라신 백작 마리 경이 스스로 재상의 인수를 반납하기 전에는 새 재상을 임명할 뜻이 없어 보였다. 국왕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선왕을 보필했던 개국공신을 임의로 사직시킴이 부담스러워 그런지, 아니면 왕자가 되기 전부터 종종 업어주었던 친밀한 아저씨에게 갖추는 우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개국 10년을 조금 넘긴 이 새 왕조의 궁정에서 중신들이 국왕에게 보내는 사랑은 일반적인 세습군주의 궁정에 비해 특별한 데가 있었다. 겨우 18세를 지나자마자 한 달 간격으로 숙부와 아버지를 잃은 어린 주군이었기에 더욱.
각 장관의 부처 보고로 시작해 국왕령 각지의 현황, 국경과 맞닿은 주요 영주들의 보고 등 별다른 일 없이 끝날 것만 같았던 조회였으나 접견 허락을 받은 외국 사신이 들어오자 장내가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처럼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위치상 가장 먼저 사신을 본, 조회에 참여한 지 얼마 안 된 관원부터 왕좌 가까이에 자리한 나이 지긋한 고관까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는 양 그 일행을 여러 번 훑어보았다. 조회를 구경하는 복도에서도 조신들이 왜 저러는지 궁금해하는 사람과 상황을 파악하고 깜짝 놀란 사람이 뒤섞여 어수선하게 웅성거렸다. 국왕은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사신들을 맞이했다. 정사로 보이는 자는 사절이 군주를 알현할 때 흔히 갖춰 입던 모피 한 자락 없이 그저 영주의 간단한 서신을 지니고 온 종자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서른 근처로 보이는 그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창백한 빛을 드리우고 주저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프랑스를 다스리시는 위대하신 우리 국왕 폐하께서 아키텐을 관리하시는 대공께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알현실 여기저기서 “저 발칙한!”이라며 몇몇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키텐이 프랑스에서 분리된 지 불과 10년 남짓해 비록 억양의 차이는 있으나 이 알현실에서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대 파란을 일으킨 그는 더욱 겁에 질리며 보기에 딱할 만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페 가문의 인장이 찍힌 밀봉된 서신을 내밀었다. 국왕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기에 시종장은 서신의 봉인을 제거한 후 한 번 털어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순물을 방지한 뒤 국왕에게 건넸다. 국왕은 눈을 서신에 둔 채로 가만히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였다. “정숙하라!” 시종장이 외쳤다. 그러자 옆 사람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침묵이 즉시 알현실을 메웠다. 국왕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국왕은 피식 웃으며 시종장에게 “저 친구가 읽게 하도록.”이라고 짧은 지시를 내리며 펼친 서신을 건넸다. 시종장은 서신에서 몇 글자를 찾아내고 굵은 회색 눈썹을 약간 꿈틀거렸으나 삼십여 년간 몸에 밴, 그리고 그의 가족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침착함으로 흔들림 없이 명을 수행했다. 주군의 친서를 돌려받은 사신은 곁눈질로 국왕과 조신들을 흘끔거리다가 대독을 시작했다.
“……친애하는 사촌에게. 그대가 어느덧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니 진심으로 축하하오. 그런데 어째서 그대의 군주에게 지금껏 축복을 청하러 오지 않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구려. 그대의 공위 계승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했던 좋은 술은 이미 식초가 되었고 고기는 말라비틀어져 개가 다 먹은 지 오래요. 가지고 놀 뼈다귀가 없어 아쉽겠소만…….”
그 말에 장내는 넘실거리던 강물을 막아둔 둑이 터진 양 왁자지껄한 소리의 홍수에 뒤덮였다. 군중은 성난 파도처럼 흥분했다. 평생을 군인으로 보낸 늙은 장군들은 수염을 파르르 떨며 고리눈에 불을 켰고 점잖은 관료들도 허연 뼈가 비쳐 보일 만큼 주먹을 꽉 쥐며 짧은 욕설과 비난을 입에 담았다. 젊은 위병들은 당장 프랑스 국왕의 목을 베어올 것처럼 이를 악물며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길패트릭은 하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옆의 파트리샤, 국왕, 그리고 그의 장모인 왕태후 콩스탕스를 번갈아 보았다. 파트리샤는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시선은 아우와 어머니를 살피고 있었으며 콩스탕스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공허한 초록빛 눈으로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길패트릭은 그의 장모가 지금 이 자리에 선 누구보다도 위태롭고 난처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알았다. 선왕인 초대 국왕 기욤 1세의 하나뿐인 아내, 현 국왕 조슬랭 1세의 모후, 그리고 적국 프랑스의 공주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큰고모 콩스탕스 카페. 푸아티에 가문과 카페 왕가의 화합을 상징했던 공주는 아키텐 독립을 거치며 프랑스에는 혈육을 등진 반역자가 되었고 아키텐에는 이반의 혐의가 있는 적의 딸이 되었다.
그때 국왕이 가만히 손을 들었다.
“조용히 하시오!”
시종장이 다시 외쳤다. 국왕은 짧은 수염이 돋은 턱을 까딱 움직였다. 계속하라는 지시를 받은 사신은 입술을 떨었다.
“……그대의 가문은 대대로 왕가를 보호하던 충성스러운 봉신이었소. 불행히도 내 고모부이기도 한 공의 선친은 신 앞에 한 맹세를 저버리고 패역을 저질러 수많은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나, 공은 선대의 탐욕과 과오에서 벗어나 바른길로 돌아오기를 우의로써 기다릴 뿐이오.”
대독을 마친 사신은 칼날 같은 군중의 시선을 받으며 더욱 몸을 움츠렸다. 누군가가 “저자의 목을 쳐야 합니다!”하고 고함치자 이어 “그렇습니다!” “죽입시다!” 하며 섬뜩한 외침이 연이어 퍼졌다. 알현실은 순식간에 천인공노할 죄인의 끔찍한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 집행장 같은 분위기로 달라졌다. 국왕은 자세를 고치며 살짝 몸을 내밀었다.
“거기 자네, 자네는 어쩌다가 내 사촌에게 밉보였나?”
국왕이 전혀 동요하지 않은 듯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는지 사신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예에?” 하다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우, 우리 폐하께서는 늘 공정하고 자비로운 주인이십니다.”
빈말이군. 길패트릭은 정사 뒤에 선 부사가 좀 전부터 날카로운 눈으로 정사를 주시하는 걸 빤히 보았다. 이 무례한 일행 중 진짜 사신이 있다면 필경 저쪽일 터. 서로가 창칼을 겨누는 와중에도 사신은 죽이지 않는다고 하나, 이런 모욕을 받으면 홧김에서든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이든 사신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음을 뻔히 알 테니 중요한 사람을 정사로 세웠을 리가 없다. 죽어도 상관없거나 아니면 아예 죽여달라고 보냈을 테지.
“나는 어릴 적에 루이와 같이 지낸 적이 몇 번 있네. 내 사촌 아우는 짓궂고 천방지축인 아이였는데, 어른이 되었어도 그 성질은 버리지 못했나 보군. 자네가 고생이 많았겠어.”
국왕은 조금 전 모욕을 당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자상한 눈빛과 어조로 사신을 위로하더니 넌지시 물었다.
“보르도로 옮기는 것이 어떤가? 루이는 자네의 도움을 크게 바라지 않을 테고 내 궁정은 언제든 자네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네. 자네를 보호해주지 못할 주인을 떠나는 것은 흠이 되지 않아.”
사람들은 국왕의 제안이 거짓 없는 진심임을 모두 느꼈다. 단순한 이는 혈기 왕성한 청년답지 않은 아량에 감탄했고 조금 세심한 이는 적국의 국왕을 지근에서 모신 망명자를 받음으로써 얻을 이득을 헤아렸다. 파리 궁정에서 생활했으면서 프랑스 국왕에게 좋은 감정이 없을 이를 포섭한다면 결코 나쁜 일이 아닐 것이므로. 사신의 까무잡잡한 뺨에 관자놀이에서 내려온 긴 물줄기가 흘렀다.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씀은 감사하오나 파리에 늙은 아비와 다리를 저는 어린 누이가 있습니다.”
조신들은 국왕이 더 권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국왕에게도 발이 휜 어린 누이가 있으니 그것이 진실이든 자리를 벗어나기 위한 거짓이든 가족의 안위가 걸린 모험을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왕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먼 길 오느라 고단했을 테니 다들 편히 쉬다 가게. 그 녀석은 내가 보낸 사신들을 밥도 안 먹이고 쫓아 보냈지만 아키텐에서 그대들이 위해를 당하는 일은 없을 걸세. 수고가 많았네.”
국왕이 사신단의 후대를 보장하자 장내는 다시금 술렁였다. 모욕을 당하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명예를 되찾음이 고결함이요 사내다운 행동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인내심은 오히려 나약하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국왕은 굳이 해명하지 않고 어전 회의를 파했다. 프랑스의 공주로 태어났으나 아키텐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의 처지를 헤아려주는 착한 아들이라고 여겨주든, 이미 대내외의 왕실과 제후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축제 준비 중임을 떠올려주든, 알아서 떠들게 둬도 좋게 보아줄 여지는 차고 넘쳤다.
공석이 아닌 자리에 가서야 국왕은 약관 청년의 앳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재수 없는 자식. 대대손손 미친개에게 물려 고자나 되어버려라.”
이른 아침부터 내내 자욱하던 두꺼운 구름이 바람에 쓸려 잠시 걷혀 하얀 햇빛이 복도로 쏟아졌다. 잠깐이라도 꼭 귀여운 조카를 보고 기분 전환을 해야겠다며 육아실로 걸음을 옮기던 국왕은 조카의 부모인 큰누나와 자형 사이에서 투덜거리며 푸념했다. 부모는 안 되고 형제에게만 말할 수 있는 하소연도 때로는 있는 법이다. 길패트릭이 물었다.
“고자가 되면 자손을 못 남기지 않습니까?”
“딸 하나 있잖아. 딸 있으면 됐지, 뭘 더 바라.”
프랑스의 공주는 왕위계승권을 아들과 손자에게 전할 수는 있어도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는 없다. 만일 프랑스의 선왕인 루이 6세의 가계가 끊어지면 계승법에 따라 루이 6세의 누나이자 필리프 1세의 적장녀인 아키텐의 왕태후 콩스탕스의 남자 후손에게로 프랑스 왕위가 넘어온다. 현 국왕인 루이 7세가 왕자를 얻지 못해도 왕제가 둘 있고 브르타뉴의 왕후가 된 누이도 있으니 아키텐 국왕의 자연스러운 상속은 요원한 일이기는 하나. 그리고 국왕이 진심으로 그런 요행을 바랐다면 자객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방법을 썼을 테니, 지금 한 저주는 그저 홧김에 한 소리일 뿐이다. 파트리샤는 아우를 다독였다.
“잘 참았어. 잘했어. 나는 네가 잘했다는 걸 알아. 우리 어머니도 네가 잘했다고 하실 거야.”
아키텐이 프랑스 국왕에게 반기를 들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는 급격히 냉랭해졌다. 푸아티에 가문과 카페 왕가의 가교였던 어머니는 아키텐이 독립을 주장하자 동생과 남편 사이에 끼게 되었고, 주군의 아이를 넷이나 낳은 자애로운 주모에게 경애를 바치던 가신들은 첩자의 의혹이 있는 자를 감시하듯 프랑스 공주를 주시했다. 결국 바티칸의 승인으로 아키텐이 왕국의 이름을 받고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 마련한 왕후의 금빛 로브를 입고 아버지 곁에 나란히 왕관을 썼으나 그 외에는 신년 하례와 자식의 결혼처럼 꼭 동반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나오지 않았다. 개국 당시 열다섯이던 언니와 열 살이던 오빠는 어린 막내를 위해, 몸이 약해 부왕과 동석할 수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진상을 숨겼다.
“어머니가 또다시 아들과 친가 사이에서 선택하게 되느니 차라리 내가 겁쟁이 소리 듣는 게 낫지. 어차피 내가 그런다고 떠날 사람은 없을 테고, 있어도 잡아야 할 만한 인물은 아닐 테니까. 나는 프랑스 사람을 기꺼이 받아주겠지만 루이는 우리 아버지와 함께한 사람이라면 죄다 잡아 죽이고 싶을걸? 외숙이 루이에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을 테지만 나라를 반 토막 내고 자기 아버지 실의에 빠져 죽게 만든 우리가 고울 리 없지. 설령 내가 왕위에서 물러나 프랑스의 대공으로 돌아가겠다고 해도 그 녀석은 우리 아버지의 친구들을 단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을 거야.”
남부 영토와 플랑드르의 상실, 피카르디의 이탈, 절망에 잠겨 독한 술로 날을 지새우다 실명까지 하고 나이 40에 요절한 아버지. 그나마 그 심정을 알기에 국왕과 파트리샤는 사촌의 정으로 아무 비난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에게 아키텐은 아비의 원수인 반역자 집단에 지나지 않을 테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영토를 수복할 기회가 온들 아키텐의 선주가 왕을 칭하는 데에 조력한 이들은 멸족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파트리샤는 덧붙이듯 말했다.
“너부터 죽이겠지. 다시 뭉치지 못하도록.”
“내가 없어도 누나가 있잖아?”
국왕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양 푸른 눈을 깜빡이며 여상히 말했다. 묵묵히 곁에서 걷던 길패트릭은 자기도 모르게 바짝 굳고 말았다. 그는 이 남매의 우애가 티 한 점 없는 진심임을 믿으나 아무 생각 없이 놀린 혀가 나중에 체포 영장으로 돌아오는 꼴을 여럿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우와 비슷한 눈을 하고서 말을 받았다.
“나는 욕 먹는 자리는 딱 질색이야. 우리 아버지는 너를 골랐어. 아버지 눈에는 내가 너를 대신할 수 없었을 거야. 우리 남매 중에서 네가 제일 성격이 좋으니까.”
파트리샤는 아우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키 차이가 크지 않았다면 어깨를 두드렸을 손짓이었다. 국왕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버지는 누나를 가장 사랑하셨어.”
“내가 아니라 줄리아나였을걸. 원래 늦둥이 막내가 가장 예쁜 법이야. 대신 어머니는 너를 가장 사랑하시니까 억울해하지 마.”
가장 사랑하는 자식의 자리를 동생들에게 차례로 양보하며 파트리샤는 한 발짝 앞장섰다. 조금만 더 가면 뽀얗고 통통한 어린 딸이 햇살처럼 화사한 웃음으로 “엄마!” 하며 반겨줄 테니까. 굳이 보러 가야겠다고 인도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도. 어느새 누나 뒤를 따라가게 된 국왕은 옆을 흘끗 돌아보며 물었다.
“참, 머리가 나아졌네. 중요한 사람이라도 만나? 아, 그랬지. 선물할 건 많이 골랐어?”
감상, 질문, 깨달음, 또 질문. 갑작스럽게 휙휙 바뀌는 말의 흐름을 쫓아가느라 길패트릭은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모든 의미를 파악하고 차근차근 답하기로 했다. 국왕은 사실 한 가지만을 묻고 있는 것이지만 그가 해야 할 말은 좀 더 길었다.
“내일 오후에 재무부의 관원 몇을 데리고 곡물저장소와 대로의 몇 군데를 다녀오려고 합니다. 서기관에게 이미 알려두었으나 폐하께 선보고할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라 다녀온 뒤에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 형은 국왕의 정식 사절이 아니니…….”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보는 거지? 같이 밥 먹게 우리 집으로 데려와. 나머지도 재워 줄게. 필요한 게 있으면 누구한테든 미리 말해둬.”
“폐하, 정식 사절이 아닌 이들을 폐하께서 몸소 초청해 후대하시면 이미 보르도로 파견단을 보낸 다른 군주가 자신을 홀대한다고 여기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탁. 걸음을 멈추는 소리가 복도에 묵직하게 울렸다. 국왕은 서글서글하던 빛이 한층 가신 푸른 눈으로 길패트릭을 쏘아보듯 돌아보았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사돈이 왔다는데 그냥 모른 척 잠자코 있으라고? 오늘 나랑 같은 장면을 본 사람 맞아? 내 외가는 나를 잡아 죽이고 싶어 벼르는데, 인척이라고 기껏 보내줬더니 못 본 체하면 아키텐과 프랑스에 한 손씩 걸치고 있는 스코틀랜드 국왕이 퍽이나 좋아하겠어, 그렇지?”
아키텐이 프랑스에서 분리된 뒤 프랑스의 선왕 루이 6세는 덴마크를 통치하는 에스트리드 왕가의 공주를 태자비로 맞이하고 장녀 스테파니 공주는 브르타뉴의 왕후로, 장녀와 나이 비슷한 막내 누이 엠마 공주는 스코틀랜드 국왕 길크리스트의 왕제 월디브의 비로 보냈다. 고국을 떠나는 그 날까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으나 자신이 아키텐 왕국의 재무장관이 된 뒤로 꼬박꼬박 ‘조카’라며 편지를 보내는 두 살 위 외당숙을 떠올리며 길패트릭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앞서가던 파트리샤는 걸음을 멈추고 다급한 손짓으로 동생의 손목을 잡았다.
“미안해, 이 사람이 이런 일 처음이라 아직 잘 몰라서 그래. 내가 제대로 설명했어야 하는데 경황이 없어서 깜빡 잊었어. 내 잘못이 커. 이번만 이해해 줘, 응? 다음에는 이러지 않게 할게.”
“……생각이 짧았습니다.”
길패트릭은 축 처져 풀이 죽은 목소리로 우물거리듯 시인했다. 비록 친형제라 하나 아키텐의 중신으로서 타국 군주가 보낸 사람을 사적으로 만나도 되는지 하는 문제에만 골몰했던 것이 어리석었다. 만약 자신이 형과 살아서든 죽어서든 다시 보지 않겠다며 결별했대도 친척을 그리워하는 아키텐 국왕에게 선사하는 스코틀랜드 국왕의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다. 결국 사적인 부분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당분간 가스코뉴의 수도원으로 보내 양어장에서 왜가리나 쫓게 시킬 거야.”
국왕은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으름장을 놓으며 걸음을 옮겼다. 좌천, 파직, 유배,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가족과 강제 별거가 가장 끔찍한 길패트릭은 떨떠름하게 굳은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아내에게 붙어 팔짱을 꼈다. 파트리샤는 고개를 살짝 들어 남편의 안색을 살피긴 했으나 팔짱 낀 팔을 마주 잡아주지는 않았다. 뿌리치지도 않았지만.
“그런데 말이야, 우리 셋이 한꺼번에 나타나면 오라드는 누구를 먼저 부를까?”
천성적으로 분위기가 뜨악한 걸 못 견디는 국왕이 물었다. 파트리샤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당연히 나겠지. 엄마잖아.”
“의외로 아빠일 수도 있지. 가장 반가울 테니까.”
그래도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중이라는 건 알아준다. 길패트릭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삼촌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예뻐해 주시는 분이니까요.”
“뭐예요, 당신 왜 내 편 안 들어요?”
파트리샤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똑같은 얼굴이라 화도 못 내겠어.” 긴장이 풀린 길패트릭은 그 말을 받았다. “내 딸이 나를 닮은 거지요.”
“자, 정답 공개.”
육아실의 열린 문 앞에 가장 먼저 도착한 국왕은 시종에게 눈짓했다. 여기서 ‘국왕 폐하 납시오!’라는 말은 국왕의 의향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에 시종은 잠자코 문을 활짝 열었다. 꽃잎으로 둘러싸인 꽃술처럼 육아를 돕는 여러 시녀 가운데서 얌전히 앉아 손에 끼운 헝겊 인형 놀이를 보던 오라드는 가족들을 보자 방긋 웃으며 외쳤다.
“엄마!”
갑자기 나타난 군주와 왕족들을 보고 모두 부랴부랴 일어설 때 30개월 아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장아장 걸음으로 달려왔다. 파트리샤는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고 팔을 벌렸다.
“우리 딸 어서 와!”
밤잠 잘 자고 아침에 헤어졌던 모녀는 오랜만에 만난 양 반갑게 부둥켜안았다. 딸을 안아 올릴 수 없는 파트리샤는 그게 최선이었다. 아기는 차례로 “아빠, 삼촌.”을 불렀다. 국왕은 손가락으로 조카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역시 엄마가 최고네. 이리 와, 사자 아가씨. 엄마는 손목이 아프니까 삼촌이 안아줄게.”
오라드는 순순히 삼촌에게로 두 팔을 만세 하듯 뻗었다. 자신의 허리 높이에도 못 오는 작은 아이를 가뿐히 들어 올린 국왕은 아이의 하얀 이마와 뺨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 물었다.
“우리 사자 아가씨, 아빠가 잘생겼어, 삼촌이 잘생겼어?”
“삼촌이요. 삼촌은 잘생긴 사람이에요.”
“그러면 삼촌이 예뻐, 엄마가 예뻐?”
“할머니가 예뻐요.”
고민도, 눈길조차도 주지 않고 냉큼 답하는 딸에게 길패트릭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엄마도 예쁘다고 해야지.” 그러자 오라드가 바로 말했다. “엄마도 아빠도 삼촌도 다 예뻐요. 이모도 예뻐요.” 어쩐지 도매 묶음으로 딸려간 기분이었다.
“우리 천사, 삼촌이랑 같이 갓 태어난 당나귀 보러 갈까? 오리도 염소도 토끼도 다 보게 해줄게. 누나, 얘 내가 데려가도 되지?”
“엄마도 아빠도 같이 갈래요. 우리만 가면 엄마 아빠가 불쌍해요.”
오라드는 삼촌이 자기 혼자만 데려갈까 싶었는지 후다닥 청했다. 부유한 공주와 부마가 설마 새끼 당나귀를 못 봐서 서러울 리야 있겠냐마는 아이의 부모는 저절로 입술에 고운 호선을 그렸다. 파트리샤는 딸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정말 바로 갈게. 삼촌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있어야 해.”
그러고는 바로 국왕을 보며 덧붙였다.
“난 어머니한테 잠깐 다녀올게. 이 사람하고 할 이야기도 있고. 먼저 가 있으면 되도록 빨리 갈게.”
국왕은 큰누나 부부를 한번 번갈아 보더니 짧게 말했다.
“살살 해.”
누군가에게는 쐐기나 다름없는 말을 남기고 국왕은 조카딸을 안은 채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공주보다 더 곱게 차려입은 시녀들이 봄 햇살보다 더 환한 얼굴로 국왕을 따랐다. 궁정의 신하로서 군주와 친분을 쌓는 일보다 더 앞날에 도움이 될 일은 없으니 시녀들은 어느새 국왕의 곁에 자매처럼 친근히 붙으며 이런저런 말을 건네기에 바빴다. 신분을 생각지 않고 보자면 그저 소풍이 기대 돼 들뜬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온화한 성품을 지닌 활달한 미청년이 같이 놀아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대부분은 국왕이 ‘폐하’가 아닌 ‘왕자님’이었을 때부터 궁정 내실에 자주 얼굴을 비춘 이들이었다. 다음 세대의 첫 왕손을 돌보는 일을 아무에게나 맡길 리 없잖은가. 그렇게 곱게 차려입은 한 무리가 멀어지고 방이 조용해지자 파트리샤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애 괴롭히지 말아요. 안 그래도 힘든 애잖아요.”
졸지에 국왕을, 아니 착한 아우를 괴롭힌 못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길패트릭은 순순히 수그렸다.
“……미안합니다.”
“만약 저 애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거든 그 전에 나한테 먼저 말해요. 당신보다는 내가 저 애를 더 잘 알고, 속상한 말을 들어도 나한테는 소리 높이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이 무릅쓰지 않아도 돼요.”
장관은 재상을 통하지 않고도 국왕과 접할 수 있다. 조정에서의 서열은 그가 국왕에게 이르기 전 거쳐야 할 상관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그 점에 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다. 신하의 서열을 초월한 공주가 몸을 낮춰서 온 데다 방패막이를 자처하는데 자존심을 내세운다면 생트집일 뿐이다.
“고맙습니다, 내 사랑.”
그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맞췄다. 그녀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아까 말한 대로 어머니에게 가볼게요. 그래도 무척 놀라셨을 테니까요. 당신은……, 힘내요. 실망했겠지만 그래도 당신을 잡아먹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오라드가 아빠를 정말 좋아하니까 얼굴 한 번은 비춰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쉬는 모습을 보여야 남들도 눈치 봐서 짬을 낼 테니까요.”
시장 상인들이 눈독을 들이던 새 공터는 시몬 경의 주장을 받아들여 경비소 터가 되었다. 상인에게 빌려주면 왕실은 추가 수입을 얻을 수 있었으나 국왕은 효율적인 질서 유지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징세를 담당하는 재무부는 기대 수익이 날아갔다.
“다녀오겠습니다, 예쁜 공주님.”
길패트릭은 파트리샤를 한번 꼭 안은 뒤 조용한 육아실을 뒤로 하고 재무부로 향했다. 아내 앞에서는 기운찬 발걸음이었으나 가족들과 멀어질수록 그의 걷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그것은 그의 고질병이나 다름없는, 출근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어서 느끼는 무기력과는 다른 문제였다.
아마 평생이 걸려도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겠구나.
그의 어깨가 저절로 축 처졌다. 부르봉의 소년 공작을 매제로 정한 지금의 국왕은 다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선왕은 딸에게 영화를 누리게 해줄 막강한 사위 따위는 처음부터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이 프랑스 왕실의 부마였기에 더욱. 특히 하나뿐인 아들의 다음 계승권자인 큰딸에게는 새끼 염소만큼이나 연약한 사위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들을 상대로 군사를 일으키기는커녕 뜬금없이 목숨을 거둔대도 본가에서조차 나서주지 않을 뒤꼍 없는 남자가. 그것은 우아하고 상냥하기까지 한 하얀 신부를 보았을 때 오래지 않아 알아차린 사실이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건 생각하지 말자, 시간 낭비다,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어 보아도 이럴 때면 자석에 이끌린 양 기분이 진창 바닥으로 처박히고 만다.
‘평범한 집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어릴 때는 엄마 아빠 품에 와락 안길 수 있는 아이가 가장 부러웠다. 좀 더 자란 다음에는 로스에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은 주제에 로스 성과 모레이 공작령의 정당한 주인이라는 사촌 형 길크리스트가 가장 부러웠다. 비록 작은형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형들을 잘 지내게 해주고 싶다는 목표를 이룬 지금에는 이런 가시 박힌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될 평범한 가정이 가장 부럽다. 왕가가 아니었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나이 비슷한 처남을 새 형제로 받아들이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함께 곡식 자루와 과일 바구니를 걸머지고 나귀에 짐을 실어 먼 길을 떠나고 밤이 되면 불 앞에 앉아 장부를 펼쳤을 것이다. 언제나, 지시 사항이 잘 수행됐는지 확인하러 온 파트리샤가 새로 도전한 요리를 내미는 장면에서 물벼락이라도 맞은 양 번쩍 깨어나는 환상이지만.
그때 그의 시선 멀찍이서 누군가가 잰걸음으로 지나갔다. 길패트릭은 흐릿한 눈으로도 그가 국왕 직속 첩보관임을 알아보았다. 아무래도 국왕의 휴식은 길게 가지 못할 것 같았다.
국왕이 어전 회의에서 시몬 경의 요청을 윤허해 재무부의 추가 수익이 줄게 된 소식을 듣고도 재무부의 관원들은 동요 없이 덤덤했다. 비록 집에 가져갈 돼지고기 몇 근이 아쉽게 사라지기는 했으나, 애초 재무장관의 국무회의 전투력을 기대하던 이가 아무도 없던 탓이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그러나 장관 부부의 세심한 성품이나 왕족이 있는 유일한 부서이니 국왕께서 재무부의 노고를 모른 체하고 지나가진 않으시리라는 느긋한 낙관이 관원들 사이를 감돌았다.
처음 길패트릭이 파트리샤의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 재무부 관원들은 그의 곱상한 외모와 스물을 앞둔 어린 나이, 그리고 스코틀랜드 국왕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출신 외에는 아는 것이 극히 적었다. 그러나 선왕에 이어 신왕도 절대 재무부를 손에서 놓을 뜻이 없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수장이 공주에서 부마로 바뀐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들은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눈이 퀭한 새 수장을 맞이했다. 4년이 넘는 시간을 버텼으나 인수인계도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해직된 전임자의 성격을 잘 아는 이들은 그 초췌한 얼굴이 단순히 가족을 잃은 슬픔 탓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 ‘새 재무장관’은 건드리면 툭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보름을 버텼다.
보름이 지난 뒤 새 재무장관은 자신의 식견이 부족함을 솔직히 밝히며 양해를 구하고 가장 말단 서기관의 직무를 같이 수행했다. 졸지에 왕족을 후배로 맞이하게 된 젊은 서기관은 부담감에 얼마간 목소리를 떨었다. 젊은 서기관의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한 달이 지난 뒤 새 재무장관은 다음 직무로 옮겼다. 첫 재무장관이었던 베아른 백작 가스통 경은 선왕의 오랜 봉신이었고 다음 재무장관인 파트리샤 공주는 공녀였던 어린 시절부터 내무를 습득했기에 적응 기간이 필요 없었던 것에 비해 그는 묵묵히 그리고 차근차근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들였다. 그동안 다른 관원들은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아키텐의 오크어가 모국어가 아니면서도 그가 보여준 빠른 습득력에 감탄했고 다른 누군가는 아랫사람에게 불평과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성품을 마음에 들어 했다. 겪어보면 모나지 않고 선심을 잘 베푸는 사람이었기에 처음부터 마음을 연 이도 있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왕족이고 재무부 관원들은 거의 평민 출신이었기에 대부분은 펜과 인장을 쥔 그의 하얀 손에서 보이지 않는 칼을 떠올리며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가 신뢰할 수 있는 동료로 인정받기까지는 평범하게 들어온 관원보다 몇 배가 넘는 시간이 흘러야 했다.
“부재하신 동안 생통주의 주 장관 보좌가 올린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지난 낙뢰 탓인지 그만 교각 일부가 무너졌는데, 수리할 규모를 파악하다가 어제 올 것이 오늘 아침에야 왔다고 합니다.”
병으로 사임한 전임자를 대신해 넉 달 전 취임한 신임 차관이 마디가 굵은 손으로 보고서 묶음을 내밀었다. 형식상의 결재를 해야 하는 선조치 후보고였다. 불만이 하나 있다면 낙뢰 사고는 여름 혹은 초가을에나 우수수 오는데 5월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생겼다는 것일까. 개국 후 선왕은 툴루즈 가문과 앙주 가문을 공작의 지위로 높이고 플랑드르는 반 플란데런 가문의 딸과 결혼한 아우에게 맡긴 뒤, 명목상 들고 있던 가스코뉴 공의 지위를 놓고 직할령이 있는 아키텐 공과 푸아티에 공의 지위만 유지했다. 아키텐 왕국에서 국왕이 직접 통치하는 주는 수도인 보르도, 관향인 푸아티에,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생통주 셋이다. 두 공작령의 재정, 인구, 물자, 토지와 작황을 총괄하며 국토 전역의 대영주와 직속 소영주를 보조해야 하는 재무부는 늘 숫자와 글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길패트릭은 보고서 맨 앞장에 사인 후 인장을 찍으며 말했다.
“내일 오후에 나와 같이 나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살펴야 할 것이 많으니 서리를 포함해 세 명 정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3할이 넘는 관원들이 외근 혹은 출장 중이다. 그중에는 국왕이 신부를 맞이할 동부의 국경 인근과 보르도까지 이어질 가도를 점검하러 간 조도 있다. 반나절 만에 돌아올 테지만 그 이상은 빼기 어렵다.
“공주께서도 동행하십니까?”
“나만 다녀오겠다고 이미 허락을 받았습니다. 수도 경비대에게는 한 조면 충분하다고 전해 두세요.”
그때 차관의 표정이 바깥 날씨처럼 약간 흐려졌다. 사람들은 으레 용력을 자랑하며 도적을 해치우는 무관은 고귀한 일로 치켜세우면서 그에 반해 자잘한 기록을 남기고 숫자 계산을 하는 문관은 낮춰 보는 경향이 있다. 그중에서도 조세 징수를 담당하는 세리는 피를 빠는 거머리처럼 싫어해, 주군이 특별세를 수금하기라도 하면 당연한 것처럼 길거리에서 돌멩이와 오물이 날아들고 재수가 없으면 얻어맞았다. 더군다나 재무장관에게 위해를 가했다고 중하게 처벌받은 죄인들이 아직 광장에 서 있는데 4명 경호에 겨우 5명이면 충분하다니?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모두 평복을 입었으면 한다는 것도 같이 전하고요.”
길패트릭은 차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덧붙였다. 그는 차관을 안심시키려는 듯 짐짓 미소를 지었다.
“내일 돌아올 때 맛있는 거 사 오겠습니다.”
HAPPY BIRTH DAY TO GIL, AND RICKY.
AND AURADE.
첫댓글 오 마참내 다음편이..! 평화로운 일상이 푸근푸근하네요.. 애들 눈은 확실하다는데 푸아티에 왕가가 다들 외모들이 출중한가봅니다. 불쌍한 길...ㅋㅋㅋ
그나저나 나중일을 알고있으니 참 씁쓰름하군요.. 항상 잘보고있습니다.
사실 1편에 빌드업이 있답니다. 삼촌이 자꾸 삼촌은 잘생긴 사람이라고 가르쳐놨으니…… "아빠가 잘생겼어? 삼촌이 잘생겼어?" 하면 30개월 애기가 할 대답은……… (◐ㅁ◐;) (ㅋㅋㅋ 그런데 인게임상으로 조슬랭이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습니다. 외모는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얘를 얼마나 각잡고 키웠는데 아 진짜…) 게임상으로 콩스탕스가 눈 큰 청순미인 타입인데, 오라드와 콩스탕스는 41세 정도밖에 차이 안 나는 조손간이니 "엄마보다 할머니가 더 예쁘다." 할 수도 있겠죠. 파티는 꾸미는 거 귀찮아하기도 하고. 설정상 '객관적인 미녀'는 콩스탕스와 오라드 둘입니다. 의외로 파트리샤는 아닌데, 파티는 하얗고+말랐고+순해보이는 인상일 뿐입니다^^;
길은 지금 시점으로도 사실 마음만 고쳐먹으면 일인지하 만인지상 급이라 인생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얘가 원하는 게 그게 아니다보니 셀프로 고통받고 쯧쯧. 섭정 맡고 난 뒤에는 이 시기를 정말 그리워하죠. 언제나 댓글 감사합니다.
인게임에서 확실히 외모 트레잇이 있는 건 조슬랭과(건장함) 줄리아나(추함+내반족), 길패트릭(천재+멋쟁이Groomy)인데, 갈발벽안 아빠(기욤)와 흑발녹안 엄마(콩스탕스)가 만나 아들은 갈발벽안 딸들은 죄다 흑발이면서 외모는 큰딸 아빠, 나머지 섞임, 아들은 엄마 닮아서 이런 설정이 나왔답니다. 게다가 오라드는 파트리샤 안 닮은 흑발녹안이라 아빠 닮았단(인게임상 인종이 달라서 정밀비교 불가;) 설정이 붙었고, 그러다보니 원래의 Groomy 설정에 덧붙여서 길패트릭이 곱상한 설정이 됐는데, 오라드는 인게임으로도 미인형인데다… 얘 인생과 얘랑 엮인 남자들 인생을 생각하면…… 전 얘를 세이렌으로 생각하면서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바깥에서는 정말 외모가 괜찮은 왕실로 보이긴 하겠네요. 콩스탕스 유전자가 열일했습니다. 오라드는…… 마성으로 분류해야 하니까………
저 주상께선 수명이 겨우 3년 반쯤 남으셨죠… 저도 쓰면서 생각합니다…… 여기 나온 사람 절대다수가 약 5년 내로……… 다음 편에는 오래 사는 본편의 레귤러가 잠시 등장합니다.
현실의 현존 왕실 중에는 스페인 펠리페 6세 가족이 한 미모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