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8.24. 신문에서 알게 되었다, 퇴임식을.
신영복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1989년도인 대학4학년때였다.
그 당시 분위기에서는 '사색'을 읽기 힘든 상태였다,정신적인 여유가.
해가 바뀌고 서울에서 기나긴 실업기간이 시작되었을 때, 이문동의 추운 자취방에서
처음으로 '사색'을 접하게 되었다.
그후 어려울 때마다 그 책을 뒤적이며 다시금 자세를 고쳐 잡고 살려고 했다.
공무원이 되고나서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여자마다 그 책을 권하거나 사주었으나
그걸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거의 만나지 못한 게 슬픔이었다.
다행히 현재의 아내는 그나마 그 책을 그 분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늘 그랬지만 다람쥐체바퀴 도는 것처럼 사는 게 답답했다.
신 선생님의 책이 나올 때마다 매번 사보았고 어느 븐에게 빌려주었는데
되돌려주지 않아서 지난해에는 또 보고 싶어서 그분 책을 개정판으로 다시 사기도 했다.
'강의'는 호흡이 짧아져 다 읽지를 못했다.
어느날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다가 더불어숲을 알게 되어
2004년 9월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미산리 산방에서의 모임에 가게 되었다.
그땐 두려웠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임에는.
그래서 그 분을 처음 뵙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더불어숲 모임에 가지를 않으니 홈페이지도 기웃거리지 않아
퇴임식도 놓칠 뻔했다.
25일 아침부터 설레이기 시작했다. 같이 갈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
'초대_2,처음처럼',후배 진수에게 연락을 했다.
처음처럼 님만 간다고 했다.
너무 늦게 가 이미 자리는 다 차 있었다, 7시 45분인데도.
인사를 드렸다. 초청장을 가져왔냐고 하셨다. 없다고 하시니
서명을 하고 책을 받아가시라 하신다. 죄송했다. 염치가 없었다. 받아서 같이 간
'처음처럼'을 닉네임으로 쓰는 송계수 님에게 주었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대 박경태 교수가 사회를 보았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꽁지머리를 길러도 받아들여지는 성공회대의 학풍이 부러웠다.
어쩌면 성공회대 학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곳은 해방구일지도 모른다.
은사인 이현재 선생님께서 나오셔도 열변을 토하셨다.
웬지 정치인만 보면 좀 그렇다.
'처음처럼'을 두산소주에 쓰게 만드신 분
놀라웠다. 현대그룹의 현정은 대표이사.
선생님의 가정교사시절의 제자인 심실 님의 친구란다.
그는 참으로 대단한 일꾼이다. 집회때마다 그의 얼굴을 여러번 보아왔다.
그가 읊었다.
치과에 가서 이빨을 뽑으면 뽑은 이빨을 커다란 포르말린 유리병에 넣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모았을까 두어 됫박은 족히 됨직한 그 많은 이빨들 속에 나의 이빨을 넣고 나면 마음 뒤끝이 답답해집니다.
지난번에는 물론 많이 흔들리는 이빨이기도 했지만, 치과에 가지 않고 실로 묶어서 내 손으로 뽑았습니다. 뽑은 이빨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어느날 운동시간에 15척 담 밖으로 던졌습니다. 일부분의 출소입니다. 어릴 때의 젖니처럼 지붕에 던져서 새가 물고 날아갔다던 이야기보다는 못하지만 시원하기가 포르말린 병에 넣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10년도 더 된 이야깁니다만 그때도 치과에 가지 않고 공장에서 젊은 친구와 둘이서 실로 묶어 뽑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담 곁에 갈 수가 없어서 바깥으로 내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마침 우리 공장에서 작업하고 있던 풍한방직 여공들의 작업복 주머니에 넣어서 제품과 함께 실려 내보낸 일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아무리 종이로 예쁘게(?) 쌌다고 하지만 '죄수의 이빨'에 질겁했을 광경을 생각하면 민망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징역 사는 동안 풍치 때문에 참 많은 이빨을 뽑았습니다. 더러는 치과의 그 유리병 속에 넣기도 하고, 더러는 교도소의 땅에 묻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담밖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비단 이빨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곧 우리들의 심신의 일부분을 여기, 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묻는 과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무심한 한마디 말에서부터 피땀어린 인생의 한 토막에 이르기까지 혹은 친구들의 마음 속에, 혹은 한 뙈기의 전답(田畓) 속에, 혹은 타락한 도시의 골목에, 혹은 역사의 너른 광장에……, 저마다 묻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느껴집니다.
돌이켜보면 나의 경우는 나의 많은 부분을 교도소에 묻은 셈이 됩니다. 이것은 흡사 치과의 포르말린 병 속에 이빨을 담은 것처럼 답답한 것이기도 합니다.
교도소가 닫힌 공간이라면, 그래서 포르말린 병처럼 멎은 공간이라면 그러한 느낌도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돌이켜보면 교도소는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곳이 아닐 뿐 아니라 도리어 우리 사회, 우리 시대와 가장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그것의 어떤 복판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웠을 경우 그 꼭지점이 땅에 닿는 자리, 즉 피라미드의 전 중압(全重壓)이 한 점을 찌르는 바로 그 지점에 교도소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도소는 사회의 모순 구조와 직결된 공간임으로 해서 전 사회를 향하여 활짝 열려 있는 공간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도소에 묻은 나의 20여 년의 세월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포르말린 병의 그 답답함이 연상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징역살이라 하여 한시도 끊임없이 내내 자신을 팽팽하게 켕겨놓을 수도 없지만 어느새 느슨해져버린 의식과 비어버린 가슴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이것은 깨어 있지 못한 하루하루의 누적이 만들어놓은 공동(空洞)입니다. 피라미드의 전 중압이 걸려 있는 자리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공동화(空洞化) ― 역시 교도소가 만만치 않음을 실감케 합니다.
묻는다는 것이 파종(播種)임을 확신치 못하고, 나눈다는 것이 팽창임을 깨닫지 못하는,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나의 소시민적 잔재가 치통보다 더 통렬한 아픔이 되어 나를 찌릅니다.
-'사색'중에서
한영애 님
장사익 님
더불어숲 회원들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