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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밭 가운데 외길을 걸어 오르다 보면 소귀천과 우이령 안부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물이 합수되어 흐르는 천을 우측으로 만나게 된다. 천의 이름은 우이천이다. 우이천을 걷는 사람의 우측 어깨에 두고 줄곧 걸어 나가다 보면 너른 잔디와 수목 사이로 아름다운 한옥이 놓여 있었다. 한옥 뒤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던 계곡이 절경이었으며 절개된 산과 산 사이 오솔길을 넘어가면 조선시대 패주 연산군 묘역이 있고.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가슴을 펴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 삼각산 봉우리가 보이는 명당이었다.
용암문을 중심으로 시선을 북으로 돌리면 삼각산, 도봉산의 수만 가지 경지를 조망할 수 있다는 만경대가 나오고 늘 흰구름에 휩싸여 있다는 백운대, 우측 아래로 어진 생명을 연상시키는 큰 바위 인수봉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던 곳이 바로 한옥 뜰이었다. 한옥 맞은편에 마을을 이루는 동네가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우이동이었다. 계곡 상단에 큰절 도선사가 있어 우이동은 사하촌(寺下村) 성격이 짙은 마을이었다. 사하촌 마을에서 북으로 나가는 산 길을 걷다 보면 삼각산과 도봉산의 경계인 우이령에 서게 된다. 우이령은 송추를 통해 고양이나 양주로 다가가는 지름길이었다. 우이령 길 따라 펼쳐진 계곡은 풍광이 수려하고 물이 풍부하여 예부터 수도 서울의 도시인들에게 유원지를 제공하여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던 곳이다. 지금도 그 잔재들이 많아 남아 있다.
봄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봄이 좀 익으면 진달래와 철쭉이 두견새와 더불어 삼각산 자락을 휘감았었다. 여름이 시작되면 소귀천, 우이령 계곡 곳곳은 유원지로서 명성을 장안에 떨쳤었다. 지금의 설악산 천불동이나 백담계곡에 지지 않는 아름다운 계곡 풍광이 압권이었으며 지금 이맘때가 오면 가을의 행락객으로 백운대 정상까지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이다.
대관령 엣 길을 다녀온 날 즈음 어느 날 불쑥 삼각산이 그리워졌다.
19일 대관령으로 가는 날, 산이라는 매체로 깊고 넓게 평생 우정을 쌓고 살아온 악우들이 산에 오르자는 전갈이 있었다. 즉시 참여를 하지 못하는 사연을 보내고 양해를 구하였는데.... 이 악우들이 산을 다녀오면서 옛 기억을 더듬으며 우이동, 수유동 일대를 섭렵하다, 20대 초반에 자주 들러 통음을 하던 통술 집도 찾은 후 가을 하루를 소일했던 기억으로 산행 기행문을 적어 나에게 보내온 것이다. 그 내용에는 참석을 회피한 질책성도 섞여 있었다. 나는 즉시 반박성 언어를 구구절절 사용하며 반기를 들고 한 달 일정에 대하여 보내며 다시 모일 때 참고하라고 하며 글로 언성을 대신하였었다. 이러한 연유들이 나를 삼각산 가을 유희로 끌어당긴 동기다.
23일 아침 가장 편한 BACK-PEACK을 준비하고 가을등반 하루 사람살이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리고 삼각산 지도를 펼쳐 놓고 단풍 동선을 찾고 있었다. 동선이 잡힐 무렵 카톡이 울린다. - 단풍구경 안 가시나요?_ 귀신이다. 어찌 눈치를 채고... 즉답으로 - 가시고 싶으면 10시까지 00 버스 정류장으로 오시지요_ 참 정중하게도 초대장을 보냈다. 그리고 함께 버스를 이용하여 아주 오랜만에 우이동에 도착하였다. 사하촌 부근에 있는 두부 전문집으로 가 점심을 챙긴 후 급경사를 오르며 가을을 채집하기 시작하였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도선사, 성철스님의 도반이셨던 청담스님이 상주하시면서 절 집은 번성하기 시작한다. 길이 새롭게 열려 차가 오를 수 있게 됨므로써 많은 신자들이 접근성이 좋다 보니 몰리는 이유도 있었지만 청담스님의 법문이 너무 좋다는 유명세가 신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면서 신도들의 세가 늘기 시작한 것이다.
옛적에는 도선사 뒤 계곡을 이용하여 오르다. 계곡이 갈리지는 지점에서 우측 산 능선을 넘어서 백운대를 오르고 내렸었다. 이 길이 지금은 막혔지만 깔딱 고개를 넘어서 백운대로 가는 길 보다 호젓하고 산세도 부드럽고 풍광도 좋았었다. 지금은 이 길이 잊힌 길이 되고 깔딱 고개가 막히면서 하루재란 언덕이 생겨 인수봉 아래를 돌아 백운대로 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느새 도선사 마당에 도착하였다. 가을 단풍이 좋은 계곡을 알기에 이 길을 선택하고 이 방향으로 오른 것이다.
삼각산 이란 아름다운 이름은 백운대를 중심으로 좌측엔 만경대, 우측은 인수봉이 놓여 있어 삼각형을 유지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북한산의 옛 이름이다. 이러한 본래의 이름은 슬며 시 자취를 감추고 北漢山이란 이름이 고착화된다. 북한산이라고 부르는 이름은 漢水 즉 한강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漢水를 중심으로 이북에 있다 하여 북한산이라 하고 그 안에 산성이 있어 북한산성이라 불렀다. 이와 반대로 한강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南漢山이라 부르고 이곳 역시 산성을 쌓아 南漢山城이라 한 것이다. 북한산 세 봉우리의 삼각 형태를 자세히 느끼려면 서쪽 일영이나 구파발 등에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고 저 멀리 개성에서 조차 그 모습은 뚜렷하게 보일 정도다. 하긴 백운대 정상에 서서 맑은 날에 개성 송악산도 잘 보이긴 마찬가지다. 이러한 가시거리가 일제 식민지화 시대에 그들로 하여금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였었다. 백운대 정상석에 쇠말뚝 깊게 박아 한양을 중심으로 인재가 출생하여 조선을 독립시키려는 기운의 싹을 잘라버린 것이다. 그 대상이 향한 곳은 전국 사방팔방의 명산을 중심으로 삼았다. 개성 송악산, 강화 마니산, 화산인 관악산, 운악산, 등등 해방 후 이러한 연유를 알아차린 대한민국 정부는 주도 아래 삼각산 동쪽 기슭에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마련하고 아울러 4.19 혁명 당시 순국한 사람들을 묘역을 마련하여 민족의 정기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 산천의 지명은 대부분 지형과 지세 등의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정해 지거나 불교를 민족 신앙으로 삼았던 당시 불교 내용을 빌려 정해진 이름이 대부분이다. 牛耳洞이란 한문이 뜻하는 바대로 소 귀를 닮은 바위의 모습에서 온 것이다. 牛耳岩이란 바위가 도봉산 끝자락에 서서 우이동 일대를 내려다보고 있어 그 아래 고갯길은 우이령이라 부르고 사하촌으로 흐르는 물의 시원인 계곡을 소귀천이라 한다. 그리고 중랑천으로 흘러들어 가 한강과 합수되는 천의 이름도 우이천이라 부른다. 그리고 서두에 밝힌 아름다운 한옥은 바로 육당 최남선 머물던 별서였는데 이곳에서 육당은 많은 글을 남긴다. 신문학의 근거지였으며 역사적으로도 소중한 자료가 되는 장소였는데 무슨 연유인지 후대였던 모대학 종합병원 의사였던 후손이 팔아버려 그곳에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버렸다. 당시 매매에 대한 이야기가 돌 무렵 유지관리에 대한 보상에 대하여 서울시와 접촉이 상당하게 있었는데 시가 응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홧김에 팔아치웠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이령을 가려면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하였는데 그 옆에 있던 송월(松月) 旅人宿은 나름 주변 풍광과 어울려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 성업중이기 하였는데 재일교포가 그린파크라는 신식 호텔과 놀이동산 만들어 영업 이후부터 기능을 상실하다가 결국 젊은 대학생들 상대로 MT 행사장소로 빌려 명맥을 유지하였었는데 지금은 헐려 사라져 버렸다.
도선사를 가는 길이 백운대로 가는 길이고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지금 신작로는 후에 만들어진 길이고 현재 덕성여대가 자리를 잡고 있는 솔밭에서 100M 정도 올라 가면 아주 오래된 洞理木인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 안으로 들어서서 걸어가면 아주 오래된 오솔길이 나온다. 그 길 끝이 바로 손병희 선생 묘 택과 천도교 봉황각까지 이어진다. 이 길이 옛적에 도선사와 백운대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세월의 흐름 따라 변화는 것이 바로 인간 문명의 사회다. 이런 생각을 하며 옛적 추억의 그림자를 밟아 나갔다. 계획하고 올라 온 장소에 이르자 단풍 숲이 환호성을 지르며 다가왔다. 아 ~~ 변함이 없구나. 오히려 나무들은 더 큰 성목이 되어 단풍을 겹겹 하게 쌓아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풍의 빛이 나의 마음 안으로 빛 파문을 일으키며 아프도록 다가왔다. 그것도 잠시, 색채의 파문은 결국 황홀로 바뀌어 쓰러져 내렸다. 해남의 어느 누구는 綠雨라는 표현을 빌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숲을 표현하였는데 내가 찾은 이 숲에 서서 丹雨가 쏟아진다는 표현으로 지금 나의 심정을 대변해 보았다. 동행한 사람을 사진 찍어 준 후 다시 단풍 숲 안부로 걸어 들어갔다.
주능선으로 다가 갈수록 숲은 깊어져 갔고 이에 따라 활엽수들은 노을빛에 물들어 가는 산천의 빛을 닮아갔다. 한 동안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에 몽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미움에 비해 좋음의 순간들은 환희심이 차오르며 나의 존재를 잊게 되는 순간이 길어진다.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황홀한 아름다움, 이것 또한 돌아서면 잊힐 일이지만 강렬한 기억은 남아 그 존재성에 대하여 기억하고 인식하며 아름다운 그 뜻과 정체를 살피며 나의 마음에 지속적으로 살아 숨 쉬며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 것이다. 인성이 아름다워야 하는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인성으로부터 발원되는 생각과 행위는 인성의 자취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보고 느끼며 그 보편과 타당 안에서 인식하고 자각하면서 사유의 지평을 넓힌다면 합리의 평등이 나를 무한하게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나를 스스로 구속해야 한다. 진실의 틀에 가두고 더욱더 겸손해야 하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삶을 버려야 한다. 필요한 것보다 불필요한 것을 더 많이 껴안고 살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의 삶이다. 이것은 바로 잘못된 선택에서 쌓이는 모순들이다. 모순을 가려낼지 아는 삶은 단순한 삶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화려함도 시간은 버릴 것이다.
곧 다가올 황량함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겨울을 이겨낼 수 없는 것처럼 분별을 통해 좋은 선택을 하지 못하면.....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지. 암 그렇고 말고, 단호하게 요즈음 세태를 보며 급하게 우울이 찾아오려고 나의 의식을 멈칫하게 만든다. 이념, 신념이고 결심이 어떠하든 간에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켜선 안된다. 합리화 순간 그자는 바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바로 짐승이 되는 순간이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분별력이다. 정의로운 분별력을 통해 인간은 수많은 자유로운 질서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고 명예도 유지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집단을 위하여 온갖 궤변을 들어 놓고 모여 앉아 교묘한 말장난으로 촛불의 신성함을 더럽히는 인간들이 위선자이며 단순한 동물 근성이지 어찌 인간들이라 스스로 말할 수 있는가! 참 개판이다. 죄를 졌으면 시인하고 사과하며 권력을 탐해서는 안된다. 왜? 그럴까? 그 사람이 정책을 대표하면 온통 위선만 난무하는 일을 저질러 놓을 것이니 그렇다는 것이다. 학자의 덕목 중 가장 큰 덕목은 양심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 바탕에서 학문의 가치가 존경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를 옹호하는 집단에게 더 이상 정치를 맡길 수 없다. 유치원생들도 알 수 있는 인간의 기초적 인성을 뭉개고 앉아 궤변을 늘어놓는 집단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유는 끝없이 이어져 갔다. 참 부그러운 것을 모르고 살고 있는 그들이 참 불쌍하다. 개혁 시대의 흐름에 알맞게 하면 되는 것이다. 하필 그 주인공이 부도덕한 조국인가? 참 병든 집단이다.
과연 그가 법을 논할 만큼 진정으로 정의로운 사람인가! 타락한 보수주의자가 저지를 만한 짓거리를 사정비서관 직책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는 청렴하고 가장 도덕군자로 위장하며 많은 글을 이 사회와 특정 집단에게 던졌다. 이러한 작자들이 너무 많다. 단풍 고운빛을 더럽히는 것 같아 사유의 세계를 그만 접었다.
이때 나를 회상이란 마음의 뒤뜰로 이끌어 간 것은 바로 낯이 익은 바위였다. 작은 공터지만 망루같이 높고 굽이쳐 내려가는 계곡을 조망할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참 낯익었다. 아하! 옛적 악우와 함께 추운 겨울, 이곳으로 들어와 천막을 치고 밤새 대화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통이 트자 천막의 지퍼를 내리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을 손과 몸으로 막은 후 밖으로 나오자 밤새 하얀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밤새 폭설이 온 것이다. 숲은 樹種이 변하고 형태도 바뀐다. 진화와 성장을 거치면서 변화는 것이다. 산 아래 도시가 팽창하고 발전하면 기후환경이 바뀌면서 숲의 모습과 계곡의 수량도 줄어든다. 그리고 인간의 무분별한 간섭은 자연의 생태계를 교란하여 자연의 질서를 무너트리게 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들이다. 풍화의 세월을 경험하겠지만 외형적으로는 불멸에 가깝다. 작은 숲 속의 빈터지만 주변에 바위들이 없었다면 나의 회상의 추억도 없었을 것이다. 북한, 도봉엔 나의 체취가 많아 남아 있는 곳이다. 젊은 날 열정적으로 Rock- climbing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수를 오르고, 설교벽, 숨은 벽, 백운대 서남 측을 오르다 노적봉 섭렵한 후 장소를 도봉으로 옮겨 오봉, 주봉, 만장봉, 선인봉을 오르다 방학이 다가오면 설악으로 자리를 옮겨 울산바위, 집선봉, 천화대, 용아장성을 이어 나갔었다. 이 순환은 오랜 세월 이어나가며 후배들과 어울렸었다. 지금도 눈을 감고 당시를 떠올리면 행복이 가득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암벽을 오르다, 중간 테라스에 서서 숲을 조망해 보면 가을이 물드는 모습을 완연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가을이란 절기는 암벽을 오르기에 너무 좋은 계절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을 조급하게 했었다. 곧 암벽이 시즌이 끝난다는 초조함 때문이었다. 곰이 동면하는 것처럼 4월까지 암벽등반 행위를 멈춰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수확은 있었다. 저 즈음이 단풍이 좋구나!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곳을 찾아가 켐프 사이들 만들어 며칠 묵은 적이 많았었다. 바로 그러한 곳이 오늘 찾은 계곡 안부다.
오늘 다시 새삼 느끼게 되었다. 발 길에 추억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행적이 바로 추억인 것이다. 되돌아보는 마음의 행로가 바로 행복한 추억이다.
또 다른 사진을 동행인에게 선물하였다. 우연히 알게 된 사회인으로서 나를 통해 테니스를 깊이 알게 되었고 잠시 사진을 찍기도 했던 사람이다. 생각이 맑고 단순하며 자신의 일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직장에 있던 거대한 조직으로 구성된 산악회에 나를 초대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나를 통해 아주 깊은 산 맛을 알게 되기도 했던 사람이다. 등반하기 쉽지 않은 설악의 용아장성과 천화대도 나의 등반대의 동료로 참석할 기회도 있었던 사람이다. 나보다 연상인 사람이지만 허물없이 동년배처럼 지내온 사람이기도 하다
이젠 나이 탓인가 예전에 기억하고 있는 깊은 우정보다 표면적 인성으로 바뀌고 있음을 상대를 통하여 깨닫게 된다. 그것도 자주 말이다. 이 또한 비슷하게 상대에게도 느껴지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은 적어도 상대의 모습을 관조하면서 익혀 나가는 일이 참 많은 의식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오죽하면 반면교사라는 단어가 있겠는가!
하루 만에도 수많은 근육이 사라지고 기억의 세포들이 사라지는 시기를 맞는 것이 노년의 시기다. 온전하게 모든 자신의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노년을 맞이하면 그 사람을 미쳐 죽어갈 것이다. 좀 느슨해지는 노년의 육신의 환경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겸손해지고 세월에 순응이 가능한 것이다. 마음의 수직은 버려야 하고 칼날 같은 이성적 경험도 전부 버리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모둠은 사랑을 우선 실천해야 한다. 먼저 느림의 미학을 찾아 다가서야 한다. 그리고 자주 자신을 돌아봐야 하고 자신을 향한 조언이나 충고를 듣는 시간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또한 자신의 현재 정체성에 대하여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이 바로 숲을 찾는 일이다. 걸으며 생각하고 묵상하며 삶의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사진을 만들어 주면서 나는 속삭이고 있었다. 仁兄! 어진 형이라는 뜻이다. 내가 평소 친구들에게 즐겨 사용하는 단어다, 인형 말이 외다! 건강하소. 늘 건강하소 오늘만큼만 건강하여도 불편은 없을 것입니다. 촬칵 촬칵~~
우리들의 삶의 시간과 그 안에 깊이 쌓여 있는 무수한 행복했던 감정들이 겹겹 하게 쌓여 있는 듯 아름다운 색채가 숲을 감싸고 있었다. 새들은 황홀한 빛에 취했는지 울고 날아다니던 새들도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새들이 떠난 숲은 너무 적막하여 제일 싫어하는 사람인데 너무 아쉬웠다. 나도 모르게 새소리를 대신하여 휘파람을 길게 불어 보았다. 청아하고 맑은 음률이 단풍 사이를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을 이렇게 마음으로 표현해 보았다. 가을 가무( 秋의 歌舞) 하하하 ~~^&^ 가을은 사람을 낭만의 서정으로 빠트리는 모양이다.
가을의 빛 위로 미끄럼 타고 싶다는 충동을 아끼며 가을을 즐기려니... 이 또한 즐거운 고통인가!
각자 지닌 본색을 드러내려는 듯 색채의 향연을 벌이는 숲의 가을 체질이 너무 정말 좋다!
미안했는지 상대도 스마트폰을 꺼내 나를 찍는다. 나는 배경이 너무 좋아 속사로 4장의 사진을 만들어 보내드렸다.
마지막 능선을 밟은 후 산성으로 다가 조망권을 찾았다. 빛이 많이 바래가고 있다는 증거를 숲에서 느낄 수 있었다.
빛의 량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게 되어 하산의 방향을 잡아야 하였다. 길을 잡아 나가다, 노적봉, 만경대, 인수봉이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백운대는 만경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그래 그러면서 안 보이면 그리움이 커지는 법이지 하였다.
그리고 생명의 단절을 의미하는 殺(살), 구멍에 비추는 단풍을 찾아 生을 불어 넣어 보았다.
생사의 구별성을 각인해 두고 싶어 낙엽과 단풍을 동시에 성벽에서 채집해 놓았다. 이런 인식이라도 붙들고 살아야 올바른 삶을 유지할 것 같아 찾아낸 가을의 전위 행위다.
가을 벼슬이 너무 좋아 마지막으로 세웠다. 그리고 인사를 건넸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좋은 단풍놀이였습니다. 꾸벅~~^&^
그리고 웃으며 문을 나섰다. 어릴 적 서울에서 태어나 살면서 부모님을 통해 고모님이나 이모님들을 통해 듣는 이야기를 떠 올렸다.
어디 가셔요? 어디 다녀오셔요? 그렇게 물으면 이런 답변을 주셨다.
어~~ 문밖에 다녀온단다. 문안 어디 어디에 다녀왔단다. 이것은 바로 한양도성 안과 밖을 이야기하는 버릇이었다. 당시 삶은 확연하게 성 안과 밖으로 구별되었었다. 일상적인 삶은 전부 성 안에서 해결되었지만 소풍이나 놀이를 위하여는 뚝섬, 노량진, 마포 샛강, 정릉, 우이동, 세검정으로 나가야 하였고 농산물이나 과일( 살구, 자두, 포도, 참외, 수박) 등을 싸게 사려면 자하문, 뚝섬, 답십리 벌로 나가야 하였고 콩을 사려면 김포 장단으로 출행을 하신 것이 어머님의 삶의 동선 이셨다. 그래 성의 안과 밖의 출행은 의미가 달랐다.
대동문을 나서면서 그 생각이 떠오르면서 어머니가 그리워졌다. 그리고 혼자 속삭였다. 겨울이 오기 전 가을 동네라 부르는 松楸 산에 계신 부모님 유택을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음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야! 네~~ 조심해서 내려가거라! 알겠습니다. 어머님~~ 꾸벅. 어머님의 보살핌으로 잘 내려와 봉황각 부근에 있는 20년 단골인 감나무 보리밥 집으로 가 막걸리 한 잔과 보리밥으로 허기를 채운 후 단풍놀이를 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