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개싸움의 원리
민주주의는 이성이 있을 때 꽃을 피우는 사상일 것이다. 이성이 불을 켰을 때 비로소 다수가 지배하는 판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민주라는 말은 전가의 보도처럼 내가 갖는 것이 오로지라는 패권적인 사고가 지배해왔다. 여기서 불통이라는 막힘이 나타나고 또 독선의 함정에 빠지는 결과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내가 가장 옳고 너는 타도의 대상임을 억지로 강변하는데서 민주라는 말은 슬픔을 견디고 있어 왔다. 심지어 가장 악랄한 북한의 이름조차 조선 민주주의공화국이란 미명을 달고 있어 합리라 주장한다. 우리사회에서 민주노총이라는 말과 전교조와 문학작가회의 3가지 축은 민주라는 용어를 독점하면서 가장 비민주적인 폭력과 억지를 포장하는 집단이다. 물론 양비론적인 말이 될지 모르지만 다소의 합리가 있을 수 있음—초창기 전교조는 교육현장의 불합리에 도전하는 정신은 찬사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이후 정치적인 색채의 가미에 따라 독선과 불합리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교육현장을 황폐화한 것도 지적의 대상이다. 기실 작가회의 진영의 경우도 똑 같다. 숫자로 보면 극소수가 대다수를 압도하는 지경은 독선과 악을 쓰는 소리 지르기 게임으로 결국 다수가 체념 혹은 포기하는 전략이 통해왔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집요의 방법이 주효한다. 가령 악착같은 개-흔히 볼 수 있을 –덩치가 큰 개라 할지라도 죽기 살기로 악을 쓰면서 덤비면 큰 놈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일이 개싸움의 원리 중에 하나다. 이런 전법이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민주를 유린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집단이 되었고 사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집단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 이런 현상은 바로잡히는 길을 만들게 된다. 결국 시간의 낭비가 자심(滋甚)한 것이 문제의 단면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인내를 앞세우는 일이지만 이런 지경은 지금도 잘 통하는 전략에 하나가 되었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촛불이 민주주의의 본질처럼 호도하는 이른바 선동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눈치 보기는 이미 도를 넘었고 마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시민권을 가진 남자들이 다수결원칙에 정치적 결정을 했던 방법이 이 땅에서 촛불로 함성을 지르고 있다. 그러나 이 함성은 자칫 우매한 소리게임으로 전락할 위험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왜냐하면 대중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지배하는 경향으로 흐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동의 위험이 내재하고 또 그 선동이 중심에 권력을 쟁취하려는 못난 자들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에 위험이 증대한다. 과연 순수로 시작했던 촛불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제 멈추고 생각하면서 바라보는 지점이 아닐까? 제도적인 장치는 이미 가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은 어찌 보면 이런 현상을 선동가에게 의사(意思)의 길을 헌납하는 우직스런 일을 쉽게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서 악착(齷齪)한 그룹이 중심처럼 행동하는 길을 만들어 줄 뿐이다.
노동계의 숫자나 문학 진영이나 교육현장에서 거의 같은 지경이 한국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경향이 점차 깨달음을 얻는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여전히 권력 패권을 노리는 암담한 지경이 진행형인 것도 사실이다.
정치는 이런 불합리를 바로잡는 일이 정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북한 편들기의 과거 10년 동안에 불균형의 가치는 더욱 한 쪽으로 쏠리는 지금까지의 지경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른바 보수와 진보라는 구별이지만 이런 말은 사실 극단적인 구분이라 합리성을 갖는 말은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이솝우화가 실험이 된 북한에 햇볕이라는 정책으로 많은 돈을 주어서 독재의 사슬을 벗기기는커녕 기울어가는 북한을 회생하는 역할의 핵개발을 도왔으니-이는 한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받는 것 밖에 아무런 소득이 없는 계산에서는 허무할 것이다. 또한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독재자를 만나 호의를 베풀었고-지금도 이런 집단을 신주처럼 떠받드는 세력이 창궐하고 있다. 바위위에서 자살의 이유가 밝혀지기는커녕 미덕으로 감싸는 기류 앞에 한국 민주주의는 ‘아직도’라는 잣대가 필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악을 쓰고 발악을 하면 다수는 그런가라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일이 불합리의 심화를 조장하기 때문이다.힘겨운 북한 백성을 위해 지원을 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주면 받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을 받았는가? 핵과 김가 왕조의 연명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작금에 블랙리스트를 종방에서 거의 중계 수준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오히려 홍위병들의 폭거가 10수년을 자행해온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성으로 독점이 아니라 소리 지르기로 압도했기 때문에 문학성과는 아무런 이유도 되지 않지만 황색 저널리즘과 소리꾼들과 짝짜꿍은 환상의 궁합으로 오도해왔다. 작금에 이런 현상을 바로잡으려는 정권은 거의 악의 축(軸)으로 매도하는 일이 실정이다. 전 정권에서의 독선으로 뭉친 홍위병들의 전횡은 까맣게 묻어두고 바로잡으려는 자들만 –명단을 작성해서 바로잡으려는 일은 옳은 수단은 아니지만 이해의 수준은 된다. 지금 어느 누구도 과거 그런 일에 대한 침묵- 다수의 문학인은 그저 말없음이 미덕으로 알면서 이들의 행위에 비겁하게 외면 혹은 눈을 감고 문학을 했다면, 정치계나 교육, 노동의 현장 또한 눈치 보기의 전전긍긍으로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소리 지르기의 합리성이 있는가를 물을 때 나오는 대답은 과연 무엇일까? 결국 다수의 침묵은 아우성 주체인- 저쪽에 찬성하는 의미로 끌려가는 일이 오늘까지의 우리 현실이라면 대책은 무얼까?
사실의 점검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햇볕에 노출하여 어떤 계산서가 옳은 것인가를 점검하는 언론의 역할이 선행되어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시대 예술계 좌파 싹쓸이 행태는 선(善)이었던가? 오로지 默音으로 넘어가는 답답증-이는 지금까지의 부처에서 지원의 통계 등으로 얼마든지 밝혀낼 수 있는 일이 아닐까의 유추이다. 우르르 떼 몰려가면서 마녀사냥의 한 쪽만 바라보는 사시(斜視)의 일은 결코 민주주의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사회는 자각의 종소리가 울려 퍼져야 한다. 기실 법(法)은 이성(理性)이고 소리 지르기는 감정(感情)이라면 우리사회는 여전히 이성보다는 소리게임이 우세한 것은 ‘아직도’라는 말에 이성의 민주주의가 신음하는 뜻이다. 단언 컨데 잘못이다*
시인은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시인뿐이 아니다. 작가는 결국 우리 시대의 책무를 짊어지고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나는 이 시대에 눈치보고 몸보신 잘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마치 블랙리스트에 들어간 작가들은 훌륭한 사람이고 거기 끼지 못하면 뭔가 부족한 듯한 세상의 흐름이 웃긴다.나는 분명 2012년 문재인을 지지한 적이 없는 촌뜨기- 4110명 중에 낀 이유를 부끄러워한다.정말 분노가 치민다. 설사 그가 다음 대통령이 된다해도-그럴리 가 없을 것이지만- 자질이 부족한 것이 눈에 보인다. 마치 개구리 떼가 노는 풍경이 우리의 사회 풍경이다. 이상한 비상식적인 소리를 지르면 대통령후보 명단에 들어가는 황색리스트가 슬프다.
마치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는 것처럼 대통령병 환자들이 설친다. 나도 대통령에 나가볼까? 하기사 트럼프도 미국 대통령이 되는판에....
첫댓글 속이 시원해 집니다.
소화재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햇살이 따듯해 집니다.
.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항상 감사 합니다.
이시대에 지성인으로 해야할
말씀을 해주시니 동감하며
최근에발족한 자유회의 취지문을 보내드립니다. 김세용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