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9일부터13일까지 중국을 통해서 백두산 과 천지를 방문했다.
경상북도 영주에서 인천공항에서 10시 55분에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기를 탑승하기에 너무나 무리가 될것같아서 10월8일 저녁 6시 40분에 풍기역에서 출발하는 뭉궁화열차를 타고 청랼리역에저녁9시 40분경에 도착해서 지하철를 타고 서울역에 가서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역에 11시 20분경에 도착해서 개스트룸에서 하루 밤을 숙박하고 10월9일 아침 7시에 공항 로비에서 출국심사를 거처서 중국대련으로 아시아나 항공기로 10시55분에 출발했다.
대련에는 13시경에 도착해서 입국수속을 발고 화물을 찾아서 대련공항입구에 나오니 현지 가이드가 버스를 타고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대련항 시민공원을 관광하고 시내에 있는 한인2세 식당에서 중식을하고 오호 공원을 관광하고 단동숙소로 이동했다.숙소에 들어가기전에 석식을 하고 호텔에 들어가서 각자의 방을 배정받아서 화장실과 욕조사용방법을 배우고 여장을 풀고 일박을 숙식한다음 날 압록강단교(육이오때 미군 공군기에 의해서 폭파된다리)를 보고 슬픔과 민족상잔의 비통함을 깨닫고 쓸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더욱기 가슴아프게하는것은 단교된 부분에는 조중 국경표지석이 설치되어있었으며중국쪽에는공산국가이지만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면서생업에 열중하고 있는반면에 동일 민족이며 같은 단군 자손살아가는 내나라 내 국토이면서도 발을 내 딛뎌보지도 못한채 단교된 다리 중간에서 쌍안경으로 강건너 편을 바라고니 몇몇 사람들이 리어카를 끌면서 무엇인가를 이동하는 모습과 자동차 한대가 지나가는 모습이 전부였고 강물은 유유히 흘러흘러 가고 있는 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비애에 몸서리를 쳤다.아픔을 멀리라도 하듯 압록강 강변도로를 따라 상류로 올라 가면서 위화도(이성개 장군이 몽고를 치라는 공민왕의 왕명를 어기고 회군했던 곳)를 바라보면서 압록강 수풍댐을 바라보면서 유람선을 타고 손에 잡힐듯잡힐듯한 거리에 있는 우리의 산하 자락을 바라보는 모두의 마음에는 애닳음과 한이 서려내렸다, 맞은편 강가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에게 말을 건네니 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아픔을 달래면서 선착장으로 돌아와서 중국산 과일을 사서 차내에서 나누어 먹으면서 중식을 할 수 있는 중국식당으로 가서 중식을 한 다음 고구려 시조 주몽대왕이 세운 졸본성에 올랐다. 천연의요새요 삼면이 천연해자인 물로 감싸있고 한곳만접근이 가능한데 그곳마져 너무나 가파른 산으로 되어 있어서 접근조차 어려운 천혜의 요새였다. 또한 중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팔궤의 성이였다고 전해 진다. 이럴듯 우리들 조상님들은 그 어느 민족에게도 굴하지 않고 만주벌판과 중원을 호령했었다는 사실에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갖기에 너무나 부족한 후손들이어여 부끄럽고 못나서 고개를 들수 없었습니다. 그 옛날의 광영을 되찾을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도 남북이 하나가 되는 길인데.... 그 옛날의 광영을 되 찾을 수 있는 내일의 희망을 안고 하산해서 오늘 저녁 숙소가 있는 통화로 와서 석식을 한 다음 단체로 하루의 피로를 풀기위해서 발맛사지를 받고 숙소로 가서 여장을 풀고 내일 백두산 과 천지 방문을 위해서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백두산과 천지 방문을 위해서 10월11일 아침 6시에 통화 숙소를 출발해서 백두산과 천지가 위치해 있는 길림성 백산시로 가서 하늘아래 첫동네인 이도백화 마을에서 조선족 식당에서 중식을 하고 오후 두시경에 백두산 첫 관문에 도착해서 현지에서 운용되는 버스로 갈아타고 둘째관문을 통과해서 셋째 관문에 도달해서 다시 백두산에만 오르내리는 4륜차로 갈아 타고 자동차로는 더 이상 갈수 없는곳까지 오후 세시에 도착해서 걸어서 백두산 정상(2744미터)에서완전나체의 천지를 바라보는 감회는 형형할 수 없는 벅참과 감회에 젖어서 탄성이 절로 나왔으며, 완전 나신의 천지를 보게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감사한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어느 분은 4번째 와서 오늘과 같은 전체 천지를 볼수 있었으며,어떤 분들은 다섯번을 찾아왔지만 천지 전체를 완전히 관찰하지 못한채 돌아갔다고 가이드는 전했습니다만 우리 일행은 난생처음 대하는 천지의 나신을 보게되는 영광과 행운을 갖게 되었기에 그 얼마나 감회가 새롭지 않았겠습니까? 백두산 과 천지를 등지고 기념사진을 찍고 2012년 첫 눈을 백두산 정상에서 밟아 본 이가 아니면 이야기 할 수 없는 사연을 안고 하산중에 제 2 관문에서 백두산 폭포(중국령으로 되어 있고 중국의 동국정공 정책에 의한 명칭 장길산 폭포)를 관광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하산했다. 백두산 폭포로 가는 중간에는 노천 온천이 있어서 그 신비함에 젖어 힘든줄을 모른채 둘러보는데 폭포 를 눈앞에서 곧 바로 보지는 못한채 돌아와야 했다. 폭포를 지키는 중국 공안이 자신이 빠른 퇴근을 위해서 수 만리에서 찾아온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폭포로 가는 길의 출입문을 닫았던 것이다. 다시금 찾아오리라는 결단과 함께 하산해서 통화로 돌아 오는 길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수만리를 돌아서 백두산과천지의 나신을 보았지만 무엇때문에 왜 이렇게 어렵게 와서 내 국토 내 산하를 봐야하는지. 왜 다른 나라에 돈을 주고 와야 하는지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백두산과 천지를 바라 볼때의 시원함이 답답함과 형언할 수 없는 비애로 되돌아 오는 것은 웬일일까요.? 밤 11시경에 숙소에 도착해서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여정을 바라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음날 일정은 관개토왕비와 관개토왕능과 장수왕능과 국내성 방문이 계획되어 있었다. 10월12일 계획된 일정에 따른 광개토왕비와 광개토왕능과 장수 왕능을 방문한 우리 일행은 마음이 어제보다 더욱 착잡했고 비애에 젖었다. 광개토왕비는 보호면목아래 비각을 세우고 4면을 알루미늄사시창문으로 막아놓았는데 제대로 보호방책을 하지 않았으며 광개토왕능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않고 있었으며 다 허물어져서 왕능으로 쌓았던 돌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거기에다 광개토왕을 중국이 동국정공정책으로 호태왕으로 부르고 있으면 모든 안내표지와 유물에 호태왕으로 사용하면서 고구려를 중국의 동쪽의 한개의 변방왕국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답답하고 착잡한 마음밖에 그 무엇을 하리요. 국내성앞에 있는 묘향산 북한 식당에서 중식을 하는 우리 일행에게 된장찌개 뚝배기는 한쪽이 깨진채로 상에 올라와있어서 중국으로 인해 얻은 스트레스 울화통을 같은 민족인 북녁동포에게 내 뱉고 말았다. 백두산과 천지 방문 여행은 처음에는 기대와 설레임과 기쁨에 넘쳤던 마음은 사라지고 남는것은 해결할 수 없는 그 답답함과 중압감에서 헤어날수 없어서 슬픔과 비통합으로 얼룩졌다. 또한 중국의 동국정공에 맞서서 광개토왕과 장수왕께서 누워계신 그 옛날의 광영의 땅을 되찾고 국권을 똑바로 세울수 있는 방안을 우리 민족 한사람 한사람은 강구해야 할 것이다.우리 민족 한사람한사람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1905년도 을사 보호 조약과함께 국토를 빼앗긴이래 1907년도에 중국과 일본이 맺은 조약에 의거 길림성과 흑룡강성과 요동성을 중국이 관리하게 되었는데 국제법상 국가와국가와의 조약은 100년이 넘으면 원주인에게 돌려주도록되어있습니다. 바로 영국이 지배했던 홍콩을 영국이 중국으로 돌려준 예가 바고 그것인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옛고구려땅을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되돌려받을 수 있는 방도를 우리 민족들은 하나로 뭉쳐서 강구해야 하는것입니다. 중국은 고구려였던 위의 3개의 성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동국정공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 하나하나는 고구려 옛땅을 언제인가는 되찾을 수 있도록 후손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가르쳐야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글 잘 썼내요.좋은 알림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마어마한 문장으로 정성드려서 열심히도 써 놓았구먼 즐거운 여행길이돼었나보군 늣게보아주어서 미안혀유.....
아닙니다.저는 우리 조상님들께서 피흘려 지켰던 그 땅을 되찾았으면 합니다.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