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 접근법 443 - 선 예술파산, 후 예술회생
팔순에 가까운 노모와 처음으로 화상통화를 했다. 별로 놀라시지도 않는다. 이미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익숙해진 이후이기 때문이다. 아침드라마부터 재방송까지 합하면 족히 하루에 열대여섯 편을 보신다. 아무리 신진 문명이라 해도 이미 경험하고 계신다. 인터넷을 못 하셔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계신다. 손자 손녀의 사진을 핸드폰에 담아두신다. 앨범보다 편리하게 사용한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 최근에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형성되는 담론이 정치화되기도 한다. 1995년 1회 광주비엔날레 당시 2500여 개의 맥주병과 목선으로 설치한 알렉시스 레이바카초의 '잊어버리기 위하여'라는 작품을 기억해 보자. 본인이 직접 설치한 것이 아니라 팩스를 통해 설치를 지시 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를 넘어서면 ‘메일아트’가 등장한다. e-mail로 예술작품이 왕래 했다. 메일로 작품제작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메일이라는 문명자체를 예술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최근에는 앱아트가 등장했다.
어플(application)로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한다. 종이그림보다 표현도 쉽고 잘 그려진다. 수정도 수월하다. 기계 기술문명에 대한 담론과 예술담론의 교집합에 의해 새로운 현대성을 획득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젊은 예술가 집단과 이를 관망하는 기성 독립 예술가들 사이의 교류가 필요하다. 협업(콜라보레이션 collaboration)이 시급하다. 산업과 예술의 협업보다 더 시급한 것이 기성 예술가와 신인 예술가의 협업이다. 원로 미술가의 작품을 젊은 미술가가 따라 만들고, 젊은 미술가의 작품을 원로 미술가가 따라 제작해 보면 좋겠다. 형식을 포함해서 의미까지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달라진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두 미술가를 통해 의도된 희극성을 살펴보고 싶다. 서로 다른 두 시대적 흐름과 세계관의 대립이다.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적응과 가만히 있는 것의 대립이다. 대립은 반대가 아니라 스스로를 인정하기 위한 대상의 물색이다. 정치에서도 여당과 야당은 항상 대립한다. 그래야만 자존감이 형성된다. 반대가 아니다.
기술이 극도로 발전하면 경외심에 의해 예술로 변신한다. ‘정말 예술이야~’라고 한다. 보통사람이 생각하는 예술은 보통스럽지 않은 모든 것에 붙이는 보통명사다. 보통보다는 훨씬 뛰어나거나 일반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어떤 젊은 남성이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이야~ 예술이다. 예술!’이라 말할 때는 자신과 연결될 수 없는 미모의 소유자이다. 국민요정 김연아가 얼음판 위에서 연속해서 세바퀴씩 세 번도는 것도 예술이고, 어느 여성에게는 조인성이 예술이다.
이참에 예술파산을 선고하자.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건 신경쓰지 말고 모든 것을 버리자. 그러고 나서 예술회생에 힘써야 한다. 처음부터 시작할 필요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능력과 기술을 토대로 현재의 문명을 적극 수용하는 방식을 택하자. 재도약이 아니다. 다시 시작도 아니다. 젊으면 늙은 정신을, 늙었으면 젊은 형식을 배워볼 필요가 있다. 파산해야 가능한 일이다.
정수화랑(현대미술경영연구소)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41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