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헉’ 소리가 날 만큼 학습량이 많은 중학생이 있습니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엄마 바람대로 특목고에 진학하고 명문대에 들어가면 고생한 보람이 있겠죠. 하지만 쉼 없이 달리다 보면 탈이 나게 마련. 번 아웃 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과도한 학습으로 탈진한 아이들을 유형별로 나눠 해결 방안을 모색해봤습니다. 자녀 상태를 돌아보도록 체크리스트와 예방법도 담고요. 밀어붙일 때와 잠시 쉬어 갈 때를 파악해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 엄마의 역할입니다.
“더는 못 해요!”
아이의 구조 요청에 귀 기울이기
초등 때는 엄마가 만든 시간표와 로드 맵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며 잘 따라오던 아이. 중학생이 되더니 짜증을 내는 횟수가 부쩍 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모습이다. 선행·속진 학습으로 기운을 빼고 지쳤기 때문. 이런 때 “학습 동기가 부족하다”며 학습량이 더 많은 학원으로 내모는 것은 금물. 아이가 평소와 달리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거나 무기력하게 행동하면 번 아웃 증후군이 아닌지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취재 허정숙 리포터 jshur7@naver.com
도움말 노규식 원장(연세휴클리닉)·임은영 원장(ENS브레인맵)·현용호 원장(연세푸른정신과)
Step 1 평소와 다른 모습? 번 아웃 의심!
공부로 지친 아이들이 나타내는 가장 큰 특징은 학습에 대한 자기 주도성이 확연히 줄어드는 것. 학원 선택이나 수강에 관심이 없는 것은 물론, 공부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성적이 큰 폭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짜증이 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도 특징 중 하나. 눈에 초점 없이 멍하게 앉아 있을 때가 많고, 학교나 학원에서 엎드려 자는 경우도 있다. 심한 스트레스는 육체적인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자주 아프고 컨디션 조절이 어렵다. 초등 때부터 학습을 강요한 엄마와 관계 역시 악화된다. ENS브레인맵 임은영 원장은 “공부 때문에 지친 아이들은 엄마가 자신을 통제하려는 데 거부감이 크다. 때로는 엄마가 해주는 밥까지 거부하기도 한다. 증상이 심해지면 부모한테 욕이나 막말을 하고 가출을 감행한다”고 말한다.
중학생이 호소하는 스트레스의 원인은 교우 관계, 부모와 관계, 학업 성적, 이성 교제 등 다양하다. 과도한 학습에 따른 번 아웃 증상은 사춘기 우울증과 구별하기 어려워 학원 개수와 주당 공부 시간 같은 객관적 기준으로 진단하는 건 불가능하다.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받아들이는 강도가 아이마다 제각각이기 때문. 연세휴클리닉 노규식 원장은 “ ‘번 아웃’으로 진단하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
초등학생 때 엄마가 설정한 로드 맵에 따라 열심히 공부한 아이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부모가 아이 성적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채근하는 성향이 강하면, 자녀가 번 아웃 증후군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고 말한다. 특히 논리적인 설득력이 강한 엄마 밑에서 자라는 순응적인 아이들은 고위험군.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보니 힘든 상황을 인내한다. 괴로움을 토로해도 엄마가 참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때문에 피할 길이 없다. 결국 번 아웃되고 원하는 학습 효과를 거둘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 이른다.
Step 2 유형별로 다른 번 아웃 증상 알아보기
Case 1 소심하게 공부 거부하는 수동 공격형
한 자리 전교 등수를 유지하며 전국 단위 자사고를 준비하던 지현이는 지난 기말고사 때 성적이 뚝 떨어졌다. 성취도 B가 속출한 것. 수학은 물론이고 과학까지 선행 학습하며 자사고 준비를 했는데, 최근 의욕이 떨어져 공부하는 시간이 준 것이다. 지현이는 “모든 것이 귀찮
고 늘 졸려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앉아 있긴 하는데 멍하니 딴생각을 하는 것 같다”며 요즘 아이가 예전과 많이 다르니 주의 깊게 보라는 게 학원 선생님의 조언이다.
Advice 대체로 순응적인 아이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학원에 다니고 공부는 하지만, 눈에 초점이 없고 멍하다. 의욕이 없고 틈만 나면 엄마 눈을 속이고 스마트폰이나 게임을 한다. 본인 스스로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해 공부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가장 많은 유형이지만 증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부모가 모르고 넘어가기 쉽다. 클리닉을 찾지 않는 대다수 아이들이 보이는 양상이다. 공부를 많이 시키는 부모에게 반감이 있으나 드러내지 못한다.
Case 2 억누르던 감정이 폭발하는 분노형
초등 때부터 수학 영재였던 현수는 중1 때 KMO 본선에 진출해 상을 받았지만, 2학년이 되면서 게임에 빠져 엄마 눈을 피해 PC방을 전전한다. 경시대회를 준비하면서 주말도 없이 학원에 다니느라 지친 것. 엄마는 어떻게든 아이 관심을 다시 공부로 돌리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아이는 “이제 엄마를 위해 공부하기 싫다. 공부해서 남 주냐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억지로 시키는 걸 보니 엄마한테 좋은 것이 틀림없다”며 화를 내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Advice 아이가 분노를 표출하면 부모가 이상 징후를 발견하기 쉽다. 부모와 관계 회복을 위해 전문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상황에 따라 약물 치료도 병행한다. 전문 기관에서 아빠와 엄마가 동시에 상담을 받고 아이와 대화 방법을 바꿀 필요가 있다.
Case 3 자신감 잃고 의욕 상실하는 좌절형
고1 정기에게는 영재학교를 졸업하고 명문대에 진학한 형이 있다. 어릴 때부터 형과 비교되는 게 싫어 엄마가 짜준 로드 맵대로 공부했지만, 외고 진학에 실패했다. ‘공부로는 절대 형을 이기지 못한다’는 생각에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시험 전날에도 책을 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학교에서는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경우가 다반사. 학원 수업을 빼먹고 친구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엄마 애를 태운다.
Advice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원하는 학습 결과를 얻지 못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례. 특목고 입시 실패라는 외적인 자극이 좌절을 심화했다. 좌절형은 성적과 입시에 대한 결과가 나오는 중3~고1 시기에 많이 나타나고 원인이 뚜렷하다. 부모가 자신의 방식이 잘못됐음을 인지하고 아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Step 3 한 템포 쉬면서 부모와 관계 회복을
번 아웃이라고 의심되면 사교육 스케줄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책상에 앉아 자리만 지키는 비효율적인 상태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 그러나 엄마들은 내 아이만 뒤처질까 불안해서 학원을 끊지 못한다. 과도한 학습으로 전혀 쉴 틈이 없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이 있어야 한다. 지친 아이들에겐 ‘힐링’ 이 필요한데, 부모는 밀려나는 것이 두려워 용기를 내기 쉽지 않다. 노 원장은 “하루 1식처럼 학원 수강도 과감한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학원을 그만두면 공부의 끈을 놓지 않을까 걱정돼도 한 학기 정도는 인내심을 유지하면서 지켜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번 아웃 증후군은 주로 학기 중에 나타나므로, 쉬었다가 방학 때 다시 시작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사교육 기관을 고를 때는 아이 성향에 맞는 곳을 찾아 공부하는 양을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 현명하다.
번 아웃을 해결하는 또 다른 방법은 부모와 관계 회복이다. 어른의 논리로 아이를 설득해서 끌고 가다 보면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 겉으로 드러내든 아니든 자녀는 지나친 학습량을 강요하는 부모에게 반감이 클 수밖에 없다. 일방적인 부모일수록 힘들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는 아이의 신호를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주도한다. 아이는 부모가 바라는 것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 자기가 이기는 길이라 믿고,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부모와 투쟁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쓴다. 연세푸른정신과 현용호 원장은 “아이와 부모의 소망이 일치하면 이상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문제가 생긴다. 부모가 바라는 목표와 로드 맵을 수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아이와 타협하고 같은 편이 되어야 관계 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공부를 잘해야 한다’ 는 마음부터 내려놓으라”고 조언한다. 부모가 자기 마음을 이해한다고 느끼면 아이도 부모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얘기. 애착 지수가 높으면 번아웃 상태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
미리 알면 막을 수 있다!
번 아웃 증상 진단하기
공부하다가 힘들면 아이들은 저마다 SOS 신호를 보낸다. 나 몰라라 방치하면 우울증으로 이어지게 마련. 이런 때 필요한 것이 엄마의 ‘촉’이다. <미즈내일> 독자 20인이 귀띔하는 번 아웃 증상으로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아이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공부 탈진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취재 이은아 리포터 identity94@naver.com
도움말 노규식 원장(연세휴클리닉)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