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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1:1-4(p,960) 사랑 고백(告白)
텔레비전 드라마나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대부분은 남녀(男女)간의 사랑을 소재(素材)로 만들어진 영화(映畫)입니다.
불륜(不倫)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도 많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사랑이라 표현하기도 민망한 동성애를 주제로 만들어진 드라마나 영화도 있습니다. 사랑을 소재(素材)로 만들어진 드라마나 영화의 대부분이 건전(健全)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 아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아가(雅歌)서입니다. 아가(雅歌)서는 솔로몬이라는 왕과 시골뜨기 술람미라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나지만 그것에 전혀 상관없이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했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는 단순히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깊은 영적인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내용은 아가(雅歌)서라는 책 이름을 설명하면서 언급(言及)하려 합니다.
‘아가’서의 ‘아가’(雅歌)’라는 한자(漢字)를 풀어보면 ‘우아한 노래’라고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를 영어로는 'Song of Songs'인데, 보통 노래가 아니라 ‘노래들의 노래’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제목은 ‘쉬르 하쉬림’으로 직역하면 ‘노래들 중의 노래’가 됩니다. 그래서 ‘아가’서는 영적(靈的)인 노래입니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솔로몬 왕은, 신랑(新郞)되시는 예수님을, 솔로몬이 사랑하는 술람미라는 여자는 신랑되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교회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를 항상 전제(前提)하고, 이런 관점(觀點)으로 아가(雅歌)서를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게되면 아가서는 삼류(三流) 연애소설로 전락(轉落)하고 맙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기억하시고 아가서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셨으며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살펴보시므로 우리 역시 그 사랑에 화답하여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나누시므로 우리의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2절 말씀을 봅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2절은 술람미 여인이 혼자하는 말입니다. 즉 술람미 여인의 독백입니다.
(1).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술람미 여인은 신랑되는 솔로몬왕이 자기에게 입맞추기를 원하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살던 이 시대의 히브리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입술이나, 볼 혹은 손과 발에 입술을 대는 것은 상대방을 존경하거나 애정의 표시였습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 입맞추기를 원한다는 이 말은 솔로몬이 술람미를 지극하게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김을 보여줍니다.
한편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되는 성도들과의 영적인 교통이 있기를 원하고 계심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있게된다 하였으니 이보다 더 가까울 수는 없습니다.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주님과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주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부부가 하나이듯 우리는 주님과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항상 주님과 교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로 사는 것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입맞추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입에서 더러운 냄새가 난다면 입을 맞추려하시다가도 얼굴을 돌려 버릴 것입니다.
우리 입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야 입을 맞추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은 버려야 할것입니다. (엡5:3-4) 이런 말은 심한 입냄새와 같아서 주님이 외면하십니다.
한번은 산책 길에 4-50대 여자 4-5분이 공원 벤취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들의 입에서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어디 춤추러 갔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남자들 이야기 였습니다. “그 새끼는 메너가 있더라, 그 새끼는 어떻더라...,” 전부다 새끼였습니다. 생긴 것은 다 괜찮게 생겼고, 입은 옷들을 보니 명품을 걸친 것 같았는데, 그들의 입은 하수도 뚜껑이 열린 것 같았습니다. 시궁창 썩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입술에는 입을 맞추려하시지 않으십니다.
엡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덕을 세우는 말을 하는 성도,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하는 성도..., 감사하는 말을 하는 성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읊조리는 입을 가진 성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성도,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위로하고 말씀으로 권면하는 성도를 주님은 아름다운 신부로 보시고 사랑에 사랑을 더해주시며 존귀하게 여겨 주시어 복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2). 네 사랑이 포도주 보다 나음이로구나
신부는 신랑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나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포도주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음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도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시 4:7).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 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다.
이제 신부는 신랑의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사모합니다. 신부의 사랑은 신랑의 사랑을 사모하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사모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73:25절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빌 3:7-8).
예수님을 사모하며 사는 것이 이 땅에서 삶에서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행 배를 타고 갈 때, 유라굴로 광풍이 불어 배가 파선지경이었습니다. 승객들이 벌벌 떱니다. 그때 바울이 사도행전 27:22-25에서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힝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파선 위기에 처한 배에도 하나님이 임하셨습니다.
바울에게는 거기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 담대함과 평안이 어디서 온 겁니까? 하나님이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우리가 그런 평안과 기쁨과 담대함을 가지지 못하고 염려와 근심 속에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작곡가 멘델스존이 유럽에서 최상의 오르간을 가진 예배당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잠시 오르간의 연주에 귀 기울이고 있다가, 오르간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오르간니스트에게 자기가 한번 연주할 수 있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오르간을 연주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이 음악가는 끈질기게 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멘델스존의 손가락은 건반 위를 달리고 그의 발은 숨가쁘게 페달을 밟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예배당 안은 신비한 멜로디로 가득 찼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눈에 띠우면서 방금 전의 그 오르간니스트는 멘델스존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음악의 거장(巨匠)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제가 멘델스존입니다." 그때 그 오르간니스트는 놀랄 뿐이었습니다. "아! 멘델스존에게 이 오르간을 연주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다니 나는 얼마나 멍청이인가?" 라고 하였습니다.
내 인생의 건반에 손을 얹고 최상(最上)의 연주를 해 줄 오직 한분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의 죄의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는 자는 부활의 영광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우리 삶을 전적 맡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일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봅니다.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술람미 여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처녀들이 솔로몬을 사랑하였다 하였습니다.
제가 어릴적에는 여름이 되면 농활(農活)이라 하여 대구에서 대학생들이 농촌봉사 활동을 오게 됩니다. 그러면 동네 처녀들이 난리(亂離)가 납니다. 자기 동네 총각들은 전부 지개지고 일하러 다니는 떠꺼머리 총각들인데, 도시에서 온 대학생들은 시골 총각들과 비교가 않되는 것입니다. 피부도 하얗지요. 시골 총각들은 이야기꺼리가 농사짓는 이야기인데, 도시서 온 대학생들은 시골 처녀들이 들어보지도 못한 연애인 이야기, 거기다가 기타를 치면서 영어 노래..., 즉 팝송을 부르지요. 동네 처녀들이 전부 도시 총각들에게게 반해 버리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 주변의 처녀들은 솔로몬을 전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이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였고 그의 이름이 쏟아 부어놓은 향기로운 향수기름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다’는 것은 이상적인 신랑의 아름다운 인품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시고, 사랑이시며, 온유하신 인품은 향기로운 기름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마26:6-7). 매우 귀한 향유였지만 그것을 여자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은 예수님은 그 이상으로 귀하신 분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시편8:1에서 다윗은 “여호와 우리 주여,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
요한계시록 5장에는 하늘의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2)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그 이름이 쏟아부은 향기름처럼 고귀한 이름이시므로 처녀들은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여기서 ‘처녀들’은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열 처녀 비유에서 성도들을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에 비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중매(仲媒)할 처녀들이라고 표현하였다(고후11:3). 요한계시록14:4절 말씀에서는 성도들을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처녀들]”이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이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救贖)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합니다. 마귀 권세 두려워도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깁니다.
성도는 예수의 이름을 최고로 믿습니다.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세상의 금과 은보다 더 믿습니다.
행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보니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걸인의 구걸하는 것을 보게된 베드로와 요한은 뭘 주고는 싶었으나 돈이 한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그 걸인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금과 은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이 이름보다 더 권능(權能)있는 이름은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름입니다. 누구에게나 이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되는 이름입니다.
마지막으로 4절 말씀을 봅니다.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술람미 여인은 지금 그녀를 둘러싼 ‘처녀’들과 함께 솔로몬 왕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면서 한 가지 간절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왕 자신이 거주하는 침궁(寢宮)으로 들어오도록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침궁으로 들어오라 하였다 하여 쭐래 쭐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나를 인도하여 주셔요”라고 간절히 부탁하였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인의 겸손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자신의 부족함과 왕의 권위를 인정하여 왕의 뒤를 따르기만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우리가 예수님 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전쟁에 능한 장수(將帥)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이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광야(廣野)로, 또는 산악지대(山岳地帶)를 들짐승 처럼 숨어 다니면서 동물적인 기질(氣質)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에 임할 때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적을 치러 올라갈까요? 어떻게 할까요?” 하고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대로 하였습니다.
삼하2:1절 말씀에 보면, 사울왕과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었을 때 다윗은 어찌할바를 몰랐습니다. 일국의 왕이 전쟁터에서 죽었으니 당황하기도하고 나라의 안녕(安寧)이 염려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 어떻게할지를 물었습니다.
삼하2: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해야할지를 여호와께 여쭈기를, “유다의 한 성읍 올라가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올라가라’하셨습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묻기를 “그러면 어느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께 여쭈고 그리고 주님이 가르쳐주시는대로 따라갑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양이기도 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거룩한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기도로서 하나님께 아뢰는 이것이 또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엡6:18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여러분은 언제나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모든 경우에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늘 깨어서 꾸준히 기도하며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동번역 참고)
여호수아 당시에 기브온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은 적이 있습니다. 왜 속았는가하면 <수9:14절>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할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여> 속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묻지마 투자’라는 말도 있고, ‘묻지마 관광’이라는 말도 시중에 있습니다.
이런 광고를 보고 기족들에게도 묻지 않고 투자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집을 잃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묻지 않고 ‘묻지마 관광’을 갔다가 가정이 파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어보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학생은 선생님께 자주 물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묻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물어서 답해주는대로 하면 책임이 공동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묻는 일도 이만큼 중요하다면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게 묻지 않는다면 손해일뿐 아니라 불신앙이 됩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을까요?
1. 아주 사소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묻지(기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대 부부간에는 할 수 있는 일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에 갔다오면 유치원에서 있었던 자잘한 이야기 시시한 이야기를 재미있어하면서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이야기 합니다. 유치원에 갔다온 아이가 ‘트럼프 대통령이 어떻고, 김정은이가 어떻고, 환율이 올라가느니 떨어지느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생각할때는 별것 아닌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게 부모와 아이 사이에 틈이 없기 때문에 자잘하고 시시한 이야기고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엄마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들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사소한 일, 작은 일, 별것 아닌 것일지라도 이야기하게되면 예수님은 신랑되시기 때문에 들어주십니다. 재미있어 하십니다. 이런 작은 일도 이야기드릴 때 예수님이 함께해주시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런 행복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모든 일이 잘 되고 있을 때는 묻지(기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일이 잘 되고 있을때는 엄마 아빠 찾지 않습니다. 주머니가 두둑하면 엄마 아빠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는 잘되는 날에도 기도생활은 해야 합니다.
야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3. 내가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할 때 묻지(기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 할 수 있어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묻지 않는 자체가 불신앙인 것입니다. 잘 되어도 묻는다는 말은 상대를 존중히 여기고 그 묻는 것을 통해 사귐을 갖고저 하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미운 사람과는 대화가 없습니다.
주님은 신랑되십니다. 다정다감하게 작은 일도 힘든 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잘 되고 있어도 자꾸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생활 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대화가 중단됨이 없도록 하시라는 말씀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자꾸 이야기해야 사랑도 커집니다. 소 닭보듯 하면 사랑이 불붙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순간 마다 하나님에게 묻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십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신부처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입을 맞추듯 교회와 친밀한 교제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포도주가 즐거움을 주듯 예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존귀하고 권능 있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마귀권세를 물리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망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케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마치 침궁으로 우리를 데려가시듯 그 무엇에게도 우리를 빼앗기지 않으시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사랑으로 교통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십시다. 사람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때 행복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랑은 식어지고 변질되고 끝내는 끝날 날이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갈수록 사랑이 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깊은 사랑 가운데 사시는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