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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학분위기 조성한 대학새마을 운동
전북대학교 무역학교 4학력
유 병 팔
지난 날 학생들이 가졌던 불신사조와 무조건적인 반항의식, 이에 편승하여 연례행사처럼 되었던 학원사태, 우리의 일임이 분명한데도 나의 일이 아니면 방관하던 생활습관이며 또 뚜렷한 목적도 없이 비일비재하게 행해졌던 대학가의 행사 등은 결국 그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대학생들이 가져야 할 건실한 꿈과 의지를 왜곡시키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 호국단 창단과 함께 새마을부의 발족으로 이제까지의 무사안일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에 새로운 채찍이 가해져 학생들의 기강확립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초대 새마을부장이 된 저는 지난날의 뼈아픈 고생을 발판 삼아 다음과 같이 전북대학교의 새마을운동을 전개시키게 되었습니다.
첫째, 말없이 행동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검정 작업복에 작업화를 신고 환경정화를 위한 일환책으로 7,500명 전북대학생의 등굣길 잡초제거와 휴지 담배꽁초 줍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변소의 청결을 위해서 낙서제거 및 더러운 오물제거를 위한 세척작업을 혼자서 다 하였고 또 미처 처리하지 못한 변소의 오물을 지게를 빌려 밤늦도록 퍼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변소청소와 소독을 1주일 간격으로 계속하며 하다 보니 이젠 어느새 학생들의 불편한 점을 맡아 고쳐줘야 되는 관리부장이 된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정말 돌아 버렸다는 조소를 보내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거의 나태하고 해이했던 정신 상태에서 이제야 올바른 것을 찾았다고 자부하면서 형식이나 체면 또는 잔일 궂은일의 선택의 겨를이 없이 거의 힘이 미치는 한 최선을 다 하였고 이리하여 새마을운동은 청결과 번영의 씨앗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마침내는 유병팔 가는 곳엔 청결뿐이라는 색다른 표어를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아무리 해도 별 뾰족한 수도 없으며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는 빈정거림 때문에 젊은 혈기에 많은 자극도 받아 속이 상하고 입에서는 쓴 물이 돌기도 하고 눈에서는 깊은 누천에서만 흐를 수 있는 피눈물을 흘리며 혀를 깨물어야 했던 때도 정말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를 개척하는 심정으로, 선구자는 항상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과거의 형식과 겉치레 위주의 실속 없는 소극적인 행위에서 땀과 젊음을 불사르는 봉사로 일관 된 신실을 보이자 그제야 조금은 이해하는 듯 하였습니다. 그리고 면학분위기 조성의 일환책으로 개강, 종강파티에 막걸리 통을 벌리지 않고 간단한 좌담회 형식으로 바꾸어 우리의 처지를 알아 창조와 개척의 정신을 기르는데 힘을 기우렸습니다. 수업시간 전에는 교실의 자리 정돈과 앞자리 채워 앉기, 칠판의 청결에 신경을 썼고, 교수님께는 시작과 끝에 경의를 표하며 탁자 위엔 꽃을 놓는 마음을 길렀으며 강의 없는 시간의 카드놀이나 동전치기의 사행행위 금지와 시험 때의 부정행위 근절을 위하여 나이 먹은 형의 입장에서 동생 같은 동료 학생들의 호응을 얻기에 온갖 노력을 다 하였습니다.
둘째, 호국단 간부와 친구 후배를 중심으로 사업을 확대시켰습니다. 호국단 간부와 친구 후배들과 더불어 등교 1시간 전에 모여 화단을 정돈하며 자갈길을 다듬고 쓸며 잡초를 뽑는 새마을 조기청소를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저희들을 격려하기 위해 직접 삽을 잡으시던 총장님과 여러 교수님들의 손길에 등굣길의 걸음을 멈추고 같이 참여해주는 학생도 많아졌습니다. 이 일을 2주일간을 계속하고 그 후엔 1주일에 두 차례씩 100여명 이상이 조기 청소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중엔 제 체면에 못 이겨 나오는 학생, 약속을 하고서도 나오지 않는 학생, 계속해서 나오지 않고 번갈아 가며 나오는 학생도 많이 있는 것을 알았을 땐 가슴이 메어지도록 슬펐습니다. 이젠 휴지나 담배꽁초를 무조건 버리기만 했던 버릇이 주워 담을 수 있는 습관으로 바뀌어 몸에 배었던지, 아니면 나이 먹은 형에게 미안해서였던지 버리는 사람보다는 줍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셋째, 표어, 게시판, 방송, 신문 등 시청각적인 방법으로 전개시켰습니다. 새마을운동이 벽지 농촌만이 아니라 우리 대학에도 실시 돼야 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인 뒤 학교의 방송국과 신문사의 협조를 얻어 새마을운동의 필요성 및 활동상황의 특집기사를 게재 학생들의 지성에 호소하였습니다. 또 표어를 모집하여 각 교실과 복도에 부착시키고 학교 통학버스, 대기소 및 각 대학의 진입로에 표어와 게시판을 세워 새마을운동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게 들리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넷째, 도시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학교 새마을운동의 효과에 힘입어 지역사회 발전의 운동으로 확대시켰습니다. 공원주변의 청소와 변소, 승강장에서의 한 줄서기 운동과 함께 경노사상 앙양, 좌측통행, 침 안 뱉기 등의 표어 등의 표어를 각 시내의 버스에 부착시켜 범시민적인 계몽운동을 우리 대학에서 자진 참여하여 전개했습니다. 틈틈이 농촌의 바쁜 일손을 도왔고, 의류와 학용품을 수집하여 양로원 고아원을 찾았습니다.
다섯째, 새마을 부원과 서클을 이용하여 자체대화와 정신교육으로 차원 높은 새마을운동을 심어왔습니다. 새마을 부원으로 종전과 같이 환경정화, 면학분위기 조성에 더 박차를 가했으며 교내에서는 각 대학 각 교실, 지역사회에서는 취약지구에 나가 새마을 정신교육 및 영화상영 등으로 그릇 되고 무기력한 과거의 의식을 새롭게 해주었습니다. 이번 여름방학 때는 새마을 부원과 함께 취약지구인 임실군 학암리에서 상수도 여과탱크 축대공사를 마치고 젊음의 열정이 과연 무엇이고 피와 땀의 결정체가 어떠한 것인가를 실감하였고 또 수해지구의 복구 작업을 매주 마다 새마을 부원과 서클을 동원하여 크게 도와주었으며 최근에는 부모 없이 불쌍하게 생활하는 삼성보육원의 상수도 시설을 우리 대학생들이 손이 터지고 찢기는 아픔을 이기며 완성시켜 주었습니다.
이 운동이 시작 되어 1년 반이 지난 오늘을 볼 때 학교와 도시 새마을운동에 과감히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고 빈국을 부국으로 이끌어 가시는 영도자의 굳은 의지를 본받아 몇 달 남지 않은 대학생활 안팎의 혁신을 위해 마지막 온갖 정열을 쏟을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내 한 몸 새마을정신으로 더욱 무 장 하고 희생과 봉사정신으로 떳떳이 이바지하겠습니다.
바위도 부수는 작은 물방울처럼
경남 삼천포시 송포동 송천마을
부녀회장 이 삼 순
제가 살고 있는 삼천포시 송포동 송전이라는 마을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장렬한 최후를 마치신 노량 앞바다를 한 눈으로 바라 볼 수 있는 해변에 63세대 377명의 주민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조그마한 갯마을입니다.
혹독한 추위가 엄습하는 겨울철이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여름날에도 하루도 쉴 새 없이 굴을 따고 조개를 캐야만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 가난한 갯마을에서 그래도 저는 제법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6.25는 저를 가난에 시달리는 고난의 세월을 갖다 주었습니다. 6.25동란, 전화가 휩쓸고 지나간 저의 가정은 가장이었던 큰 오빠가 전사하신 후부터 사공 잃은 돛단배처럼 세상풍파에 흔들리다 결국엔 풍비박산이 되어 버리자, 저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졸업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가정은 말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가난 속에서 어린 저는 손을 입에 대고 호호 불어가면서 굴을 캐고 조개를 캐야 했고 틈만 있으면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야 하루의 끼니를 이어갈 수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제가 18살이 되고 작은 오빠가 군에서 제대를 하게 되자 결혼의 의미도 모르면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가난한 생활이기에 결혼을 하면 좀 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결혼을 했지만 시집살이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시집식구가 14명이었는데 18살짜리 취사 당번으로서는 너무나 벅찬 가정이었습니다. 밤에는 길쌈을 해야 하고 틈만 있으면 가마니를 짜야 끼니를 이을 수 있는 생활은 결혼 전이나 후나 똑 같았습니다. 결혼 한지 6개월이 되자 남편이 군에 입대하게 되어 저의 서운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시집식구들과 정을 들여 시부모님의 귀여움 속에 착한 며느리라는 칭찬을 들으면서 7년이라는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하루는 시어머님께서 부르시더니 우리 마음 같으면 평생을 같이 살았으면 좋겠지만 너희들도 이젠 살길을 마련해야 된다면서 저의 손을 꼭 잡으시면서 잘 살고 못하는 것은 여자에게 달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희들은 살림을 나게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오막살이에 몇 푼 되지 않는 살림살이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으므로 또 다시 가마니 짜기를 시작했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싫증나는 일이었지만 살아야 한다는 생의 의욕과 가난을 몰아내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한 보람으로 몇 년 후엔 아담한 집도 마련할 수 있었고 농토도 늘려 그런대로 자립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지만 이웃사람들은 안일하고 무기력한 생활태도를 가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부녀자들은 굴을 캐고 조개를 캐서 생계유지에 노력하고 있었지만 남자들의 생활이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습니다. 농토는 좁고 할 일은 없으니 마을 사람들은 술집에만 모여 앉아 밤이면 도박, 낮이면 윷놀이로 처음에는 웃음판이 싸움판으로 변하기가 일쑤였고 심지어는 가정으로까지 번져 가난으로 굶주린 아내들을 들볶고 귀여운 자녀들의 진학 길을 막으며 패가망신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이런 생활을 보고 저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나 하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부녀자들을 모아 놓고 우리가 남자들의 타락한 생활을 몰아내고 좀 더 부지런하고 활기 있는 마을로 만들어 보자고 설득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비웃기만 할 뿐 한 사람도 동의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는 배우지 못한 것과 가난한 마을에 태어난 것이 너무나 서러워서 우리의 가난을 절대로 후손들에게는 물려주지 말자는 생각으로 부녀자들을 수십 번이나 찾아다니면서 호소를 했더니 차츰 부녀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은 서로가 마음을 털어놓고 의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녀자들은 제일 먼저 남편들의 도박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도박판을 찾아다니면서 간곡히 호소하고 설득도 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저는 말로서는 도박을 쉽게 중단시킬 수 없음을 인식하고 노름하는 남편의 부인과 도박판을 찾아가 화투방석을 뒤엎은 적도 있었습니다만 도박은 쉽게 중단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낮 뜨거운 조롱을 했지만 저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지만, 도박을 하면 자기 가정은 물론 온 마을이 망한다고 끈질긴 설득을 했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과 같이 마을사람들은 한 사람씩 두 사람씩 화투장을 던지게 되었고 끝내는 모든 사람이 화투장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도박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체념과 나태 그리고 무절제했던 생활습성을 말끔히 청산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 부녀자들은 이와 같은 결실을 더욱 승화시키기 위하여 남자들은 농사개량 클럽을 여자들은 생활개선 클럽을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틈틈이 농촌지도소를 찾아가 지도를 의뢰하면서 많은 계몽잡지를 얻어와 마을사람들의 지식을 넓히는 데 노력하자 농촌지도소에서도 매일 우리 마을에 오셔서 지도해 주시면서 우리 부녀자들의 의욕을 고취시키는 뜻에서 우리 마을을 생활개선 시범마을로 지정하면서 어린이 두유, 요리기구들을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녀자들은 이에 용기를 갖고 농번기의 일손을 좀 더 원활히 하고 보다 많은 작업능률을 올리기 위하여 농번기 임시 탁아소를 설치함과 동시에 마을 앞 술집 폐지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다 돌아오면 길에 막걸리 한두 잔 하는 것은 좋지만 술타령이나 하고 도박이나 하면서 남을 비방하던 이런 술집은 우리 마을에서 아무 소용없는 곳이었습니다.
우리 부녀자들은 술집을 폐지시키기 위하여 공동구판장을 운영키로 하였습니다.
구판장 운영자금은 절미저축으로 충당키로 했는데 15일 간격으로 돌아가면서 해본즉 한 달 절미 저축이 3천5백 원이었습니다. 자금이 조금씩 늘어가는 것은 여간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우리 부녀자들이 마을을 위해서 좀 보람 있는 일을 해보려고 결심을 했을 때 71년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마을마다 새마을지도자를 선정할 때 저는 새마을지도자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거 해보겠다는 마음과 내 이웃을 위하는 길이라 믿고 지도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우리 마을 부녀회도 59명으로 조직 되었으며 회장도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여자들이지만 일치단결 된 부녀자들의 힘은 서서히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부녀자들의 모든 힘을 새마을로 쏟고 고생하는 이웃을 돕고 이 마을을 잘 사는 마을로 만들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제일 처음 시작한 사업은 환경개선사업으로 밤만 되면 캄캄한 골목길에 가로등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구판장 운영으로 모은 자금 중에 32,000원을 들여 8개의 가로등을 마을 요소요소에 설치하여 부락민이 밤길 다니기에는 도시 길 못지않게 되었으며 마을 앰프도 주민들의 협조로 설치하여 부녀회 활동은 물론 마을에도 유익하게 활용하도록 되었습니다.
저는 기왕 새마을지도자가 되어 마을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결심한 이상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새마을교육을 수차례나 받았습니다. 교육을 받으면서 새마을지도와 부녀회지도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꼭 한 번 해보겠다는 결심으로 환경개선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갔습니다.
매월 1인당 시멘트 한 포 모우기 운동과 모래 이어 나르기를 해서 초가집 30여 채를 개량했고 부엌도 40여 개나 개량하게 되니 부녀회의 활동에 주민들의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정부로부터 시멘트와 철근을 지원 받게 되자 우리 부녀회는 기금을 더욱 보람 있게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온 마을은 의욕의 열기 속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500m의 마을 안 길 확장, 50여 동의 지붕개량, 1800m의 농로개설, 30m의 빨래터, 160m의 하수구 복개 등등 10개 사업을 73년도까지 완료했습니다.
기왕 새마을사업을 시작했으니 이 기회에 우리 주부들이 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간이수도를 설치하기로 결심하고 기술자에게 공사비를 문의했더니 820,000여 원이 든다고 했으나 그 때 부녀회의 자금은 불과 300,000여 원 정도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나머지 50만 원을 염출하기 위하여 부락민에게 협조를 구했습니다. 이에 대부분의 부락민은 반대 없이 부녀회의 뜻에 협조해 주어 자금은 확보 되었으나 기계실 설치 장소가 없어서 고심하다가 저는 남편과 상의하여 우리 집 창고 1칸을 이용하기로 승낙을 얻었습니다. 막상 공사를 착공하려고 하니 어떤 주민은 물이 모자랄 것을 염려하여 수도가설을 못하게 했고 또 어떤 이는 상수도 가까이 있는 사람은 수도의 혜택을 볼 수 있지만 멀리 있는 사람은 수압이 낮아 수도의 혜택을 볼 수 없는데 무엇 때문에 수도공사를 하려고 하느냐면서 불평을 하며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설득하여 만약 전 부락민이 수도의 혜택을 볼 수 없으면 공사비 전액을 제 개인이 부담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공사를 착수하여 완공을 보게 되고 수돗물이 꼭지만 틀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니까 마을 주민들은 웃음과 박수로 아우성을 칠 때 지도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기쁨을 맛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공사를 반대하였던 사람들은 저를 찾아와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사과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앞으로는 서로 믿고 서로 도우면서 우리 마을을 잘 사는 마을로 만들어 보자면서 그 사람들과 굳은 약속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차로 환경개선을 마무리 짓고 보니 이제는 좀 더 잘 살아 보자는 의욕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민소득을 올리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해오던 그 싫증나는 가마니 짜기를 농한기에는 쉬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저의 마음 같으면 이제는 가마니 짜기만은 그만 두고 싶었지만 주민의 소득증대를 기하고 주민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열심히 가마니를 짜고 가마니 장사까지 겸해서 하고 보니 연간 주민 소득이 60만여 원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60여 호 마을에 중고등학생이 불과 2~3명이었으나 이때부터는 중고등학생 수는 급격히 불어나게 되었고 우리도 ‘하면 된다.’ ‘우리 마을도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은 더욱 높아 갔으며 이제는 가마니만 짤 것이 아니라 다른 소득증대 사업을 의논하며 바다에서 소득을 올리기로 결정하고 마을 공동 양식장을 만들기 위하여 투석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부녀회원들은 머리에 돌을 이고 청년들은 지게나 리어카로 돌을 운반하는 작업을 74~75년까지 계속하여 10,000평의 바다에 굴 양식장을 만들어 연간 100여만 원의 소득을 올리게 되어 우리 마을의 연간 호당 소득은 130여만 원으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녀자들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75년도 추석 절에는 경로잔치를 베풀어 평소 새마을사업이나 부녀회 활동에 비록 몸으로는 돕지 못해도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성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마을 어른들을 위하여 음식과 선물을 대접했더니 비록 조촐한 것이었지만 우리들의 정성이 담긴 잔치에 노인들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때 크나큰 보람을 느꼈고 기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75년도의 일중에 정말 잊을 수 없는 일은 부녀회 공동퇴비증산이었습니다. 연약한 우리 부녀자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풀을 베기 시작하였으나 한 가지 곤란한 것은 마을에서 10여 리 떨어져 있는 산에서 풀을 베어야 했고 비좁은 비탈길로 풀을 운반하기에는 너무나도 고된 일이었습니다.
마을 앞 공터에다 퇴비장을 만들어 놓고 매일 쉬지 않고 풀을 베어 나르니 쌓이는 풀을 볼 때마다 마음만은 기뻤으나 워낙 고된 작업이라 중간에서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청년 회원들이 부녀회원들의 단결심과 희생정신을 보고 시작이 반이라는 격려의 말을 하면서 우리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며칠만 도울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이 있어 부녀회원들은 더욱 용기를 내어 풀베기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연약한 부녀자들의 손은 산 풀에 찍히어 피가 흘렀고 그 고충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지만 퇴비증산이 곧 식량증산이라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풀을 베었습니다.
보 잘 것 없는 우리의 활동 상황을 당시 시장님께서 직접 돌아보시고 친히 격려해 주셨을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보람을 느끼게 됐으나 쌓인 풀이 썩어서 자꾸만 내려 않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도 그만큼 내려앉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념하지 않고 그 다음 날은 그 배의 풀을 베었습니다.
퇴비를 만들면서 일어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느 날은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기 때문에 낫과 풀을 산에다 버려둔 채 집으로 돌아오는 날도 있었고 또 풀을 이고 오다가 길이 미끄러워 다리를 다쳐 고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때 나의 잘못 된 일은 지도자의 책임인 것 같아서 너무나 송구스럽고 기가 막혀서 그만 주저앉고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지도자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않고 용기를 내라는 권고에 힘을 얻어 기필코 목표 달성을 하리라 결심하고 추석에는 친정 안 가기 운동을 전개했더니 이에 호응한 청년들은 처가 안 가기 운동을 벌여 호응해 주었습니다.
추석 하루를 쉬고 이튿날부터 또 풀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남양지구에 추석놀이 씨름대회가 한창이었지만 우리는 풀베기에만 열중했습니다.
드디어 심사가 끝나고 신문지상에서 송포동 송천마을 부녀회원 공동퇴비가 경남 2위로 입상했다는 보도를 보았을 때 우리 부녀회원들은 다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처럼 피나는 노력을 했으면서도 고된 줄도 모르고 일을 한 대가는 어김없이 찾아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경남도지사님으로부터 20만원, 시장님으로부터 30만원의 상금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상금을 어떻게 써야 좀 더 보람 있게 쓸까 하고 고심하다가 50만원 중 14만원은 부락 공동기금으로 적립하고 30만원은 공동석화양식장에 투자하였으며 나머지 6만원은 전 회원들에게 골고루 저금통장을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회원들의 의사를 물어봤더니 회원이 모두 찬동하므로 남양단위농협통장을 개개인에게 나누어 주면서 회원 1명이 매월 100원 이상 적금하기로 약속하고 현재도 그 저금통장은 한 달에 한 번씩 저금을 실시하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퇴비 증산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였을 때입니다. 대통령 각하로부터 특별지원금 50만원이 하달되어 부락 자체자금 40만원과 합하여 90만원으로 20평의 마을 공동창고를 건립키로 하고 11월 6일 착공을 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마을을 우리 힘으로 가꾸자는 새마을정신 아래 부녀회원들은 힘껏 도와 바다에서 모래를 퍼 올리고 벽돌을 나르는 등 부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한 보람으로 11월 31일에는 버젓한 새마을창고의 준공을 보았습니다.
이마의 땀을 씻으며 완공의 기쁨을 텁텁한 막걸리 잔으로 축하하는 남정네들의 모습을 볼 때에는 다시 한 번 흐뭇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과 같이 우리 마을에는 또 다시 즐거움이 찾아왔습니다. 대통령 각하의 특별 배려로 더 많은 지원금을 받게 된 것입니다.
대통령 각하 하사금 100만원이 우리 마을에 하달되었을 때 우리 마을 주민들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75년도는 우리 마을의 발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 믿고 마을 자체 기금 125만원과 부녀회 자금 20만원 합계 145만원으로 마을회관과 구판장을 짓기로 결정하고 여태까지 부녀회에서 운영하던 마을 구판장은 일정한 장소가 없어 회원 집을 15일 간격으로 돌아가면서 운영하고 있던 것을 마을회관이 건립 되면 회관에서 운영 될 것이라는 부푼 마음으로 우리는 또다시 괴로움을 모르고 일을 했습니다. 76년 3월17일 우리의 애써 노력한 보람으로 아담한 회관이 건립 되어 준공식 석상에서 우리 부녀회원 중에서 최고령자이면서도 부녀회의 발전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모범회원 한 사람을 선정하여 표창했을 때 우리 회원들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즐거움에만 도취 될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 지은 회관에 각종 상품을 막 정리해 놓았을 때 수원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으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만하면 되겠다. 이만하면 남의 마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심으로 입교했으나 막상 연수원에서 원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교관님의 교육을 받으면서 선배 지도자님의 사례 담을 들어보니 제가 마을을 떠날 때 가졌던 자만심이 부끄럽게 생각 되고 앞으로 교육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면 현재보다 더 열심히 해야만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입니다.
저는 돌아오자마자 회원들에게 연수원 교육의 참뜻을 전달하면서 우리는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으로 잘 사는 마을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도록 우선 더 많은 저축을 하자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밤이면 어떤 회원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한 가구에 한 통장 갖기 운동을 전개한 보람으로 저축모범마을로 지정 되었습니다. 우리 회원들은 여기서 만족을 느끼지 않고 마을금고도 조직하여 재정은 날로 불어나가 금고가 조직 된지 불과 5~6개월 동안에 80만여 원의 자금이 형성 되었습니다. 저의 할 일은 이것뿐이 아니었습니다. 바쁜 가사 속에서도 뜸을 내어 공동취사장에 관한 교육을 이수한 후 회원들과 상의하여 시청으로 찾아가서 금년도 권농일 행사는 우리 마을에서 해주십사 하고 부탁했습니다. 6월 3일 거창하게 공동연찬회를 열고 공동모내기를 하면서 우리 부녀회원 56명은 공동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줄지어 늘어서서 약 350명의 점심식사를 대접했더니 시청의 각 기관에서 오신 분들은 감탄하시고 시장님께서 격려금 2만원과 지도소장님의 격려금 1만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녀회원들은 공동취사장이 그렇게 재미있고 절약이 되는 것인 줄을 미처 몰랐다면서 계속 운영하자고 모두들 다짐했습니다.
처음에 혼합 곡으로 밥을 지으면서 맛이 없으려니 했지만 각 기관장님들도 혼합 곡을 잡수시고 칭찬을 해주시니 얼마나 나에게는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내년에는 보다 능률적이고 영구적인 운영을 하기 위하여 취사장을 짓기로 결정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저의 부녀회에서는 부락의 간이상수도 전기료와 가로등 수리비 월 10,000원씩을 보조해 주고 있으며 주민들의 영양개선을 위하여 육용 토끼, 유산양과 닭 등을 각 가정마다 기르고 있습니다. 제가 지도자와 부녀회장직을 맡으면서 무임소장관 표창, 내무부장관과 도지사 표창 등 몇 차례의 표창과 감사장을 받았으나 이것은 저 혼자 잘하여 받은 영예가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협조와 노력의 소산으로 생각하여 조금도 자랑할 생각은 없습니다. 근면, 자조, 협동하는 새마을정신을 언제나 생활신조로 삼고 우리 마을은 더욱 잘 사는 마을로 만들기 위하여 77년도에는 주민의 건강관리에 더욱 힘쓰고 어린이 놀이터를 건립하여 아동들의 정서생활을 도우며 주민들의 복지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렵니다.
현재 주민소득 호당 130만 원정도이나 석화양식장 운영으로 80년대는 호당 150만원의 소득을 목표로 비록 연약한 여자의 몸이지만 저의 모든 힘을 다 바쳐 일하고 또 일하기로 약속드립니다.
우리 모두 대자연에 도전하여 영농의 과학화를 실현하고 승리의 개가를 올린 오늘의 이 자신과 의욕을 굳게 견지하고, 조상이 물려준 금수강산을 더욱 쓸모 있고 아름다운 국토로 개조하기 위하여 가일층 분발하자.
---박 대통령 각하 76.10.14.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 1단계사업준공식치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