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의 설원에 서다
박 재근
오늘의 일용할 양식과 동장군의 엄습을 격퇴할 여벌의 옷을 배낭에 챙기고 도둑고양이마냥 살금살금 현관문을 따고 나왔다. 가보지 못한 곳을 간다는 설레임은 나만의 감정일까?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새벽을 깨우고, 일어나지 않은 도시를 지나 미아삼거리 새한병원 앞에 당도했다. 하루의 일상을 즐거움으로 시작하려는 각양의 인생 속에 끼어들어 낯익은 얼굴과 인사를 나누고 절친한 친구완 반가움을 나눴다. 산을 즐기고 자연을 사랑하는 호감어린 친구로, 이런 점에서 가치관이 상통한다.
들뜬 나를 실고 상기된 그를 담아 매끈한 버스는 중부도로를 매끄럽게 미끄러져갔다. 먼 곳에서 서서히 먼동이 트며 어스름은 바래가고, 산 너머 산 위에는 붉은 해가 두둥실 떠올라 빛의 영광을 드러낸다. 미지를 달음박질하는 차창에 그 광영이 찬란히 스민다.
어둠을 헤치고 달려온 달구지는 잠시 여주휴게소에 들려 따끈한 된장국을 차려내고, 맛깔스런 김치와 찰진 밥을 겸상으로 베풀었다. 후루룩 말아 넣고 아침을 정리했다. 더운 기운이 들어가자 온몸이 나른하게 풀리며 졸음이 찾아들었으나 오래 머물진 못했다. 낯선 곳의 낯선 풍광이 허락지 안했기 때문이다.
선잠 속에 영월군이라는 이정표가 이슬 먹은 창을 비집고 어렴풋이 스쳤다. 쓰윽 성에를 거둬내고 멍한 동공에 기민함을 주자, 정선슈퍼가 초라하게 선명했고, 시골 내음이 울컥 달려들었다. 인적 없는 조용한 산골은 여느 시골과 다름없으나 유별히 짙은 회색 산천이 다르다 하고, 2중3중으로 겹겹인 산등성이 틀리다 한다.
정원을 초과한 육중한 달구지는 심심산중을 따라 비탈길을 타고 경사로를 꾸역꾸역 올랐다. 오지에 들었음에도 희끗희끗 눈덩이만 송림 뒤에 숨어 간간이 지나갈 뿐, 강원도의 상징인 수북한 눈은 어디에도 없다. 좋지 않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고 간절한 기대는 곧잘 물거품이 된다 했던가.
절박함이 실망이 되고 실망이 절망이 되어 아귀가 맞지 않은 문짝처럼 엇나갈 무렵, 차창을 때리는 우렁찬 함성이 터졌다.
“우~아~!!”
일제히 기린의 목이 되어 창을 향했고, 송아지의 눈망울처럼 커진 눈은 사방을 넘나들었으며, 순식간에 흑에서 백으로 전환된 뇌 모드는 심히 갈팡질팡 이었다.
몇 분의 시차에 별안간 드러난 신천지.
“세상에~세상에”
많은 탐방객과 차량으로 범벅이 되어 서행 중인 버스는 불현듯 들썩이고, 얼른 박차고 나갈 기세로 시끄럽게 소란했다. 눈치 빠른 기사님은 그 맘을 잽싸게 열었고, 뛰쳐나온 산님들은 별천지의 신세계에 근방 동화되었다.
강원 산간의 매서운 바람은 이곳의 대명사지만 외출 하나 없고 산신령께 빌고 빌었다는 어느 산객의 정성이 하늘에 닿은 까닭으로, 기온은 온화하여 덕스럽기 그지없다. 전날 때맞춰 내린 눈으로 그야말로 보이는 것, 하나하나가 하얀 나라의 하얀 세상이었다.
색은 혼란을 부추기고 음심을 돋우며 정연한 정신의 질서를 해치는 사악한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폄하되었으나 백과 흑만은 예외였는데, 그 진가가 여지없이 이 자리에서 드러났다. 설레게 하면서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 해맑은 순백이 천지를 이루고, 설편이 크고 작은 가지마다 우아하게 내려앉아 눈부신 광채를 자아냈다.
만항 마을에서 유래된 고개, 만항재를 디딤돌로 장엄한 눈꽃의 퍼레이드를 따라 폭삭폭삭 느낌 좋은 걸음을 옮긴다. 산마루를 향하는 산객들의 울긋불긋한 옷태는 백의 확연함 속에 더욱 두드러지고 산님들의 즐거운 대열은 꼬리를 이어 매달렸다. 무언가 잔뜩 담아가려는 두 눈은 반짝이며 촉망하고 불그스레하게 뺨을 적신 홍조는 환희를 대변한다. 길 없는 길에는 고요한 동물들의 발자취만이 무수히 어지럽고, 있는 길에는 오고가는 산님들의 행복만이 교차했다.
보지 않는 자 알 수 없고, 찾지 않는 자 느낄 수 없다. 봐야 보이는 것이고, 찾아야 느끼는 것이다. “아~! 좋아, 좋아,” 절로 터진 탄성은 가득히 눈송이에 포개지고, “아~!!죽인다.”는 환호는 잇따라 눈꽃에 쌓였다.
우연이라 하면 행운이라 할 것이고 누군가의 의도라면 머리를 조아려 감사해도 모자랄 터. 산 따라 물 찾아 나그네의 길을 가다보면 가끔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는데, 그날인 오늘인 듯싶다. 그림에서만 봤던 환상이 적나라하게 눈앞에 펼쳐지고 끝없이 이어지며 황홀경의 신세계로 장장 4시간이나 여행되었다. 50평생 처음 본 광활한 눈꽃의 신비 앞에 심장은 깊게 콩당거리고 영혼은 무겁게 두근거렸다.
방자하리만큼 포근한 날씨는 화사한 봄이요, 송글송글 이마를 타는 땀방울은 여름이며, 청명이 푸른 하늘은 가을을 말함이고, 발목을 부여잡는 백설은 겨울이라. 4계절이 공존하는 기이한 함백산에서 온갖 세파를 쏟아내고, 무디어진 감성을 차곡차곡 채웠다. 누가 아름다운 자연 앞에 눈물이 흐른다 했으며, 시인이 아니어도 시인이 된다 했는가. 나는 철학자가 아니어도 철학자가 되었다.
이미 끝자락에 들어선 겨울의 옷자락을 잡고 바스러지는 낙엽 한 장을 주워 못 다한 이야기를 담아 눈꽃 주인인 겨울에게 띄운다. 잔치에 초대받은 고마움을, 그리움을, 따뜻한 사랑을,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너를 잃고 싶지 않은 지금의 내 심정을.....
예언자 마호메트는 죽는 날까지 지켜야 할 5가지 계율을 부과했는데, 신은 오직 한 분뿐이라 했고,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라 했으며, 라마단 기간에는 금식을 하라는 것이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계율은 이것이라 했는데, 바로 여행이다.
끝임 없이 발목과 무릎을 휘어잡는 희디 흰 눈을 보듬어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담아온 기쁨을 1,573m의 함백산 마루에 풀었다. 푸른 하늘의 하얀 구름은 하얀 눈과 친우 되어 산 아래에 노닐고,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에는 벚꽃 같은 눈꽃이 만개해 천년의 꽃을 피웠다.
정상의 판판한 자리에 빙 둘러 진을 치고 상을 차리니 수라상이 이에 비할 쏘냐. 산해진미,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라면국물을 마시며 “얼음 없이 시원하다.”는 어느 산님의 재치는 행복의 조미료요, 들뜬 맘의 양념이었다.
그 행복이 전신에 번지고, 이웃에게 전염되어 파다해지자 나그네는 다시금 그리움의 길을 밝혔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는 길이지만 발목을 부여잡는 눈길의 애원을 뒤로하고 하염없이 터벅거린다. 정이 깊어 머물고자 하나 어느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것이 나그네의 팔자요, 가야하는 것이 운명임을 그대는 알까.
석가의 사리가 수마노탑에 봉안되어 있기에 법당에는 불상이 없다는 정암사에 막바지 여정을 놓았다. 덧없이 가야하는 것이 나그네의 길이고 인생이라 하던가. 가야 할 어쩔 수 없는 길이라면.....거침이 없고 걸림이 없기를....관세음보살, 부처님 전에 간절히 빈다.
귀청을 뒤흔드는 요란한 디스코 멜로디와 현란하게 반짝이는 조명이 저물고, 새근새근 달콤한 단잠에서 아쉬움이 열리자 이 몸은 서울의 한 귀퉁이에 덩그러니 놓였다.
하루의 일상이 진한 여운으로 접어든다.
2009. 2. 7
※오늘을 마련하고 호의를 베푼 선호친구,
그리고 이곳을 기획하고 실행한 훼미리 산악회 임원진 님에게
감사함을 듬뿍 안깁니다.
첫댓글 박재근님 산행후기 정말 감사합니다. 앞뒤가 잘 짜여진 문장력에 다시금 감동하고 잘읽고 음미하고 갑니다. 염치업지만 다음에또부탁해도 될련지요.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작은 것을 크게 보시고, 부족함을 넉넉하게 보신 총무님의 풍성한 심성에 감사함을 올립니다. 아직 배우고 익혀야 하는 과정에 있는 애송이 이지만, 과찬으로 덧입혀 주시고 칭찬으로 칭송해 주시니...이런 데서 글 쓰는 보람이 있다 하겠습니다. 총무님처럼 산을 즐기고 여러 곳을 관여한 관계로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가끔 동행하게 되면 여력이 닿은 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관심에 다시 한 번 인사 올립니다. 늘 평안하십시오.
가보지 못한 함백산의 경치가 파노라마 처럼 비춰지는듯 합니다. 매끄럽고 시원한 글을 접하며 감동하고 있습니다. 자주 접할수 있는 기회를 주시길 바랄뿐입니다.
일반적으로 칭찬에 약한 게 우리들의 행태이지만, 님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겠으며, 참된 인생관을 갖추고 있다 하겠습니다. 귀한 존함, 마음 밭에 가둬 빗장을 걸어 두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박재근님 ,,, 어쩜 이런글을 쓸수 있습니까 소설가 처럼 조목 조목 ,,, 좋은 글 잘읽고 감니다 ,,, 어떤분인가 사진 한번 올려 주세요 ,,, 김선호님 친구,,? 주말인데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한 시간되세요~~
한영숙여사와 껴안고 찍은사진이 그 주인공이요.(정기산행인물사진457번)
하루하루가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융숭한 마음을 가진 님이 있기에...활력이 샘솟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드린 것 같으나 존체가 가물거리네요. 뵈옵고 다시금 감사함을 올리겠습니다. 무사 무탈 하십시오.
박 재근님 정말 감동스런 산행후기를 읽어습니다 ~~앞으로도 조은글 자주보여주세요~~
오신 분마다 이리 감동 스럽다 하니...제가 오히려 감동스럽네요. 지대한 관심 감사합니다. 행복하십시오.
한편에 대하소설입니다 저도오십평생처음입니다
짤은 글속에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고, 다양한 것이 함축되어 있네요. 감사합니다. 존귀한 나날이 되십시오.
박 재근씨 당신은 훼미리에 회원이 되어 이런 멋진글로 보답바란다.
다녀 가셨는가. 어려운 부탁을 쉽게 하셨네. 알다시피 다망한 관계로 깊숙이 참여하기는 그렇고, 지금처럼 변방에 머무는 것이 도리일 것이네.
맞갈스런 님의 산행기가 함백에서 보았던 새하얀 눈꽃보다 더 아름답네요 자주 들르시어 덕담 한마디씩 던지고 가시구려 ...
말씀 속에 아름다움이 있고, 아름다움 속에 넓은 맘이 있네요. 덕담....그래도 될련지....아무튼 실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함백산을 마음만 다녀온 숙이는 님의 아름다운글에 감탄하며 즐감 해습니다. 감사합니다.
종횡무진 이곳저곳을 활발히 움직이는 님께서 이곳에까지 아름다움을 심어 놓고 가셨네요. 일면식은 아직 없으나 존함은 익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재근회원님 산행후기글을읽고 너무나감명받았어요? 시간돼시면 김선호씨와 함깨훼미리산악회들러 좋은친구도만들고 좋은글도많이 올려주셨으면해요 그리고 다선에들리시면 소주한잔해요 (소주는제가사겠읍니다) 선호씨와함깨들러주세요?
이세연님이라...? 어리어리하여 카페를 뒤졌습니다. 아~! 송구합니다. 현 고문님이시고, 전 회장님이셨네요. 포근한 인상에 수장다운 면모를 갖춘 덕장님께옵서, 졸작에 호평을 주시고, 친구까지 챙겨 넓은 마음을 주시니.....감개무량합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배알하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한폭에 동양화 같은 함백산의 상고대... 거기에 맛갈 스럽고 소설같은 문장력에 감성과 감정이 풍부하게 엮으신 박재근님 우린 구면이죠! 아마도 잘 모르시면 한영숙의 남편이자 함백산을 같이 갈수있게 한 장본인 인데.... 앞으로도 자주 방문 하셔서 좋은 글 많이 남겨 주시길 바랍니다,수고 하셨습니다.................^0^
친구 외에 가장 깊게 각인된 분이시고, 친구로부터 자주 근황을 접했던 선배님이십니다. 거기다 함백산까지 가게한 장본인이시라니...제가 더욱 감사함을 올려야 하겠네요. 덕분에 참으로 좋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뎃글이 너무많이 달아져서 무어라 감상에 말을해야할지 학교 선생님인가요 교수님인가요 국어선생님같은 느낌이 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두루두루 살피시여 저희가 몰랐던 곳 많이 알려주시고 많으 글 부탁해요
귀한 손님께서 심히 고맙게도 두 손 가득...종합선물을..... 황송해서 어찌 하오리까. 예를 갖춰 머리를 조아려야 하나, 육신이 지척을 벗어나 있으니.....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는 선생님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며 더더욱 국어선생과는 관련이 없는 평범한 직장인 입니다. 다만, 책을 좋아하고 글을 사랑한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