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가슴 설레는 꿈의 길
- 말씀으로 베풀어주신 임강빈 스승님께
본지 발행인 리 헌 석
(사)문학사랑협의회 이사장
1.
“그래. 이제 마음을 굳혔는가?”
“네.”
“힘든 일을 결정한 것 같은데. 어떻게 도와야 하나!”
1993년 가을에 계간 문학사랑(당시 오늘의문학)을 창간하려는 필자에게 60대 초반의 은사이신 임강빈 시인께서 걱정하신 말씀입니다. 안정적인 고등학교 교사직을 내놓고, 문학잡지 발간이라는 가시밭길을 걷겠다는 제자가 참으로 걱정되셨나 봅니다.
며칠 후 은사님께서 현대문학 등단 후배 박명용 시인과 같이 오셨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박 시인의 맏딸 선영이를 담임한 바 있어 가슴을 열고 대화하였습니다. 두 분의 주선으로 당시 문단의 고명한 선배님들을 고문과 편집위원으로 모셨습니다.
* 고문으로 김양수 한국문학평론가 협회 회장, 박재삼 시인, 신동집 시인, 이우재 시인, 임강빈 시인, 임영창 한국불교문인협회 회장을 모셨습니다.
* 편집위원으로, 소설 : 김명주 이재인 이진우 지요하, 수필-이철호 조종국, 시-김동수 김명배 나태주 문충성 박명용 송수권 이광석 이복웅 이성선 조남익 채규판 허형만 홍희표, 시조-이도현 이은방 전태익, 아동문학-강복환 전영관 정만영, 문학평론 : 김대행 신경득 정영자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창간하는 잡지사에서 좋은 원고를 수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잘 알고 있었는데, 그 어려움을 어른들의 격려와 주선으로 해냈으니, 생각해 보면 감사할 뿐입니다. 2016년 겨울호에 이르기까지 결호缺號 없이, 400쪽 내외로 일관하며, 날짜도 어기지 않고 발행하고 있습니다.
2.
“출판사를 겸한다고?”
“네.”
“내 시집부터 만들지. 내 시집 500권을, 내가 아는 문인들에게. 내가 우송료를 들여 발송하면, 오늘의문학사가 좀 알려질 테지.”
한국문인협회 충남지회장을 역임하셨고, 당시 중학교 교장이시던 은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학교에서 월급을 받던 사람이 사업을 하면 망한다고 주위 분들 모두 말리는 상황, 그러나 은사님께서는 말리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다시 생각해봐.” 재고를 당부하셨지만, 의지를 확인하신 후부터는, 못난 제자 도우실 일만을 염두에 두셨으니, 생각하면 그 은혜에 가슴 먹먹할 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학잡지 발행은 마이너스(―) 행진을 합니다. 그런 이유로 여타의 잡지에서는 등단 문인에게 해당 잡지를 50권, 혹은 100권, 일부는 200권씩 할당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이 같은 관행에서 벗어나 깨끗한 잡지를 발간하고자 하였으며, 오로지 문학발전만을 위해 성심을 다하는 제자가 미더웠었다는 후문後聞이었습니다.
마이너스(―) 운영의 문학사랑을 발행하기 위한 방안으로 도서출판을 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출판사가 [오늘의문학사]입니다. 임강빈 은사님께서 <오늘의문학 시선집 1번>을 맡아주시고, 전태익 편집위원(시조시인)께서 3번, 박재삼 고문(시인)께서 4번으로 시집을 발간해 주셨습니다. 당시를 돌아보면 손 모아 감읍할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문학사]에서는 1년에 1,000만원 ~ 2,000만원을 사단법인 문학사랑협의회에 협찬하고 있습니다.
3.
“문학도서관을 하겠다고?”
“네.”
“투자만 하고, 나오는 건 없을 터인데. 어찌 운영하려고?”
일이 있을 때마다 임강빈 은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주위의 문인들은 우리 은사님을 충청도의 마지막 선비 시인, 무욕의 시인, 무색무취의 시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은사님을 가장 존경하던 터라, 무조건 은사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은사님께서는 기왕지사 시작하려면 돈을 더 벌어서 ‘문학관’ 혹은 ‘박물관’ 수준으로 개관하라고 하셨습니다. 시비공원(문학공원, 예술비공원)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려도 “그래.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큰 소리 한 번 치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잡아 주시는 손은 따뜻했습니다.
은사님께서 2016년 7월 16일에 소천하셨습니다. 소천하기 20일 전쯤 6월 27일에 안영진 최재학 선생님을 함께 모시고, 쇠약해지신 은사님께 메기매운탕을 대접해 드렸는데, 마지막으로 모신 자리가 되었습니다. 11월에 선생님의 시비를 충남 공주시에 세워도 좋다는 말씀을 하신 지 20여 일만에 소천하셨습니다. 평소에 “시비는 죽은 다음에 세워야지 옳아.” 하시던 말씀이 귀에 남아 뱅뱅 돕니다.
식사를 모신 며칠 후, 은사님께서는 시집, 시선집, 동인지 청와집을 가져오셨습니다. “한 권 남은 것도 가져왔지. 우리 집에 없는 시집도 있으니 잘 보관하고. 문학도서관이나 문학관을 만들거든 그 곳에 두고.” 겸연쩍은 듯이 웃으시던 은사님의 존안이 새삼 그립습니다.
4.
“[문학사랑 문학관]을 하겠다고?”
“네.”
“시작할 수는 있겠지만, 운영이 문제일 터인데. 내가 도와줄 수도 없고.”
하늘에 계신 은사님께서는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생시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가난한 제자를 도우려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 2016년 4월에 시집 원고를 들고 오셔서 “<오늘의문학 시인선 1번>으로 내 시집을 내었으니, 이제 내 <마지막 시집>도 이회장이 만들어 봐.” 왠지 쓸쓸해 보이는 표정이 가슴 아팠습니다. 마지막 시집 바람, 만지작거리다 서문에 <앞으로 시가 몇 편 나올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집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라는 말씀에 목이 메일 뿐입니다.
[문학사랑 문학관]을 건립하겠다고 대내외에 밝혔습니다만, 은사님께서 계시지 않아 두렵습니다.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바라만 보셔도 힘이 솟았는데, 이제 저 스스로 서야 하나 봅니다. 그렇지만, 주위에서 도와주시는 여러 문인 가족들이 계시기 때문에 은사님이 보고 계실 때처럼 열熱과 성誠을 다하겠습니다.
은사님, 은사님께서 같이 계시지 않아도 제 마음에는 늘 은사님이 함께 계십니다. ‘문학관’을 건립하겠습니다. 선생님을 모시듯, 선생님의 저서를 홀 가운데에 제일 먼저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은 날 찾아뵙고, 이승에서 가끔 모시던 것처럼 잘 모시고 싶습니다.
* [문학사랑 문학관] 건립 계획을 밝힌 지 며칠 안 되었는데, 서둘러 자료를 주셨거나, 자료 기증을 약속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삶의 변화를 모색할 때마다, 임강빈 은사님처럼 조용히 지켜보며,“좋아하는 일을 하는 당신이 좋아 보여요.”후원하는 아내 김근순 여사에게“고마워요.”인사를 나눕니다.
첫댓글 리헌석 이사장님의 문학여정을 한 눈에 보는 듯하네요
어찌 꽃길만 있었을라구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뜨거운 열정과 뚝심으로
문학의 텃밭을 일구어오신 이사장님께 무한박수를 보내드리며,
아무쪼록 그동안 쌓아오신 경륜과 지혜로
"문학사랑 문학관" 건립사업이 가뜩이나 외면 받는 문학계에
신선한 바람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과찬이십니다.
살아 있으니, 무언가 열심히 할 일을 찾았을 뿐입니다.
모든 계획한 일들이 이루어지빌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우리 말에 '울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럿이 힘을 모아 '영차 영차' 한 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울력으로 도와주시면 용기를 더 내겠습니다.
@디디울나루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격려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존경하는 은사님께서 소천하셔서 마음을 둘 데 없답니다.
그리움이 샘솟아서 스스로 용기를 얻기 위해 써 보았습니다.
귀하신분 찾아주시어
큰 기쁨입니다
어수선한 시기
우뚝 서심이 선생님 이십니다
글 기둥으로 굳건 하소서
참 감사합니다
문학사랑이 참으로 어렵게 간행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 마음을 내실때도 어려우셨을 테지만
은사님으로 임강빈시인님을 모시고 계셔서 여러가지 의논도 드리고
가르침도 받고 도움이 많이 되셨을텐데
지금까지 꾸준히 발전적으로 문학회를 꾸려 오신걸 보니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리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