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인 배추 무더기
절인 배추 김칫소 넣기
큰손녀가 그린 김장 풍경
작은손녀가 그린 김장 풍경
어린 시절의 농촌 우리집 김장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겨울 초입의 이맘때였습니다. 수동식 펌프가 있던 안마당에는 절인 배추와 무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습니다. 김장 품앗이를 하는 이웃집 아주머니들과 함께 온 가족이 하루 종일 김장에 매달렸습니다. 김장은 모심기, 보리타작, 벼타작과 함께 그해 가장 중요한 행사의 하나였습니다. 그때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렇게 손수 김장을 했지요. 날이 어둑해질 무렵에야 인디언 티피(Tipi) 텐트의 모습을 닮은 바깥마당의 김치각에 김장독을 묻고 볏짚으로 엮은 이엉으로 김치각을 감싸 안아 둘러주는 것으로 김장이 끝났습니다. 그 김장 김치는 겨우내 우리집 여러 식구의 필수적인 먹거리가 되었습니다.
김장의 풍경이 그때와는 적잖이 변했지만 우리집은 지금도 연중 가장 큰 집안 행사의 하나로 그때와 못지않은 많은 김장을 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집의 김장은 생존을 위한 필수 가내 작업이었다면, 지금의 우리집 김장은 하나의 잔치, 겨울맞이 축제입니다. 또 맛있는 우리만의 김치를 담그는 우리 집안의 풍습이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이 아니고서는 손수 김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편리성만을 따진다면 마트에서 김치를 사다가 먹는 게 훨씬 더 편리합니다. 이웃과 어울려 김치 울력이라는 걸 하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김장하는 과정은 또 얼마나 복잡하고 고단한 작업인가요?
우리집 김장 방식은 매우 독특한 형태로 진화되었습니다. 현대사회 우리의 가정과 가족관계의 변모, 식생활 습관과 여가 활동의 변화 등이 우리집의 김장 방식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우선 이웃 공동체 관계의 환경에서 가족공동체 관계의 방식으로, 부계 중심의 모임으로부터 모계 중심의 모임으로의 변모가 이루어졌습니다. 또 거의 모든 재료를 자급자족 형태로 조달하던 방식에서 여가 텃밭 농사를 통하여 중요한 일부의 재료는 자체 조달하는 방식으로 김장 재료의 조달 방식이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집 김장은 처제, 처남 등 세 집과 분가한 다른 세 자녀의 집 가족이 함께 모여 1박 2일의 일정으로 치르는 모계 가족의 행사입니다. 또 각자의 주말 텃밭에서 가꾸어 마련하는 배추와 무, 고춧가루, 양파 따위를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김장김치를 담급니다.
특이한 것은 우리 김장의 마스터는 아내의 바로 밑 여동생인 처제입니다. 근 20년 가까이 우리의 김장 잔치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맘씨 좋고, 발 넓고, 손도 큰 처제가 발 벗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처제는 우리의 김장 마스터로서 모든 걸 총괄하고 지휘합니다. 재료 조달의 분담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서로의 몫이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모두 한 집에 20~30포기씩 모두 약 150포기의 배추, 깍두기와 동치미용 무, 그리고 소금, 양파, 파, 마늘, 생새우, 생굴, 새우젓, 멸치액젓... 수도 없이 많은 부수 재료와 양념이 미리 준비됩니다.
김장은 무척이나 오랜 준비의 과정을 거칩니다. 일 년 전쯤부터 시작이 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김치에 들어가는 양념 채소인 마늘과 양파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한 해 앞서 늦어도 10월 하순까지는 그 모종을 심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듬해 봄에는 고추 모종을 심고 대파 씨앗을 뿌려서 가꿔야 합니다. 한편 8월에는 김장배추와 무, 동치미와 총각김치 무의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심어 가꿔야 합니다. 물론 김장에 소요되는 재료 모두를 손수 재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기초적이고 많은 분량이 소요되는 배추와 무는 큰처남이 원주 텃밭에서 재배하는 약 100여 포기의 배추, 처제와 막내처남이 주말농장에서, 그리고 내가 나래실농원에서 재배하는 50여 포기의 배추와 무, 이렇게 세 곳의 주말 텃밭에서 조달합니다. 올해는 고춧가루도 텃밭에서 손수 가꾼 것으로 마련했습니다. 양파와 마늘, 대파, 갓, 총각무, 고춧가루 따위의 부재료의 일부도 손수 재배하는 것으로 충당하기도 합니다. 어느 해는 갓이나 강화 순무를 얻어오기도 합니다. 소금은 미리 몇 해 전에 천일염을 구매해 간수를 내려서 쓴맛이 가신 구수한 소금으로 숙성을 시켜 사용합니다.
그리고 입동 전후로 김장 날짜를 미리 잡습니다. 보통은 11월 둘째 주 주말의 이틀을 정합니다. 11월 초순에 드는 “입동에는 김장하지 않는다.’는 속설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한편 김장에 앞서 2, 3일 전부터는 밭에서 배추와 무, 파 따위를 뽑아서 다듬고 옮겨 오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또 김장 전날까지 온갖 부재료의 준비를 서둡니다. 이틀 동안의 김장 날 내내 모든 가족이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첫날은 배추를 쪼개서 소금물에 절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무를 씻고 쪽파를 다듬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면 무채를 치고 양파 따위의 양념 채소를 김칫소 재료를 준비합니다. 이런 일을 모두 마치면 김장 첫날 임무 끝. 이슥해진 저녁 시간이 되면 모두 함께 즐거운 막걸리 잔치를 벌입니다. 그 인기 덕에 '술취한 쌀(Drunken Rice)'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얻은 막걸리는 김치와는 뗄레야 때어놓을 수 없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한 팀은 절인 김치를 물에 헹구어 냅니다. 다른 한 팀은 집안에서 큰 매트리스 함지박 안에 무채와 온갖 채소, 고춧가루와 양념들을 넣어서 김칫소를 버무립니다. 그리고 김장의 하이라이트인 절인 배추에 김칫소 넣기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 일에는 손맛이 좋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지난해 김장에는 초등학교 3학년인 쌍둥이 두 손녀가 김칫소 넣는 일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걸 그림으로도 그려 보았구요.
김칫소를 넣은 김치를 저마다 가져온 김치통에 가득 채워 넣고 나면 보통은 늦은 점심시간이 됩니다. 이래서 점심이 다소 늦어지기는 하지만 기다리던 또 다른 하이라이트 김장 점심이 시작됩니다. 김장 점심 잔치를 벌입니다. 점심상에는 배추를 푹 끓인 된장국, 푸짐한 돼지고기 수육, 생굴무침, 신선한 절임 배추와 김칫소 보쌈양념, 그리고 금방 버무린 신선한 김치 따위가 가득 올라옵니다. 시장기를 느끼던 사람들은 모두 맛난 막걸리를 곁들인 식사를 즐깁니다. 점심이 끝나고 난 뒤에는 동치미와 백김치, 총각김치, 무와 순무 김치 따위를 담가서 제집마다 각자의 기호에 맞는 것들을 골라 담습니다.
김치를 모두 담그고 크게 어질러진 집 안팎을 모두 치우고 나면 늦은 오후가 김장의 대역사(大役事)가 마무리됩니다. 이제는 각자가 챙긴 김치통을 옮겨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모두가 그 이듬해 초여름 봄배추가 나오기까지 자신의 정성과 노고가 듬뿍 들어간 김치를 먹으며 잊지 않고 그해의 김치 맛에 대한 품평을 거듭하고는 합니다.
올해도 11월 둘째 주인 지난 주말의 이틀 동안 김장을 했습니다. 김장을 위한 지난(至難)한 준비 과정과 이틀 동안의 북새통을 생각하면 이런 김장 행사를 앞으로도 계속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올겨울도 넉넉하게 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넉넉함과 안도감을 느낍니다. 더구나 손수 담근 김치의 맛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미 내년 김장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 상태입니다. 이미 내년 김장용 마늘과 양파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또한 흥겹고 즐거운 내년의 김장 잔치를 또다시 기다리게 될 듯싶습니다. (2021.11.18.)
첫댓글 김장 페스티벌이군요. 멋들어진 그림에 손녀의 소박한 꿈이 담겨있군요. 힘이 들기는 하지만 가족이 모여 축제를 벌이는 기회를 가지는 게 얼마나 좋은가요. 나도 아내와 함께 김장을 합니다. 양은 많지 않으나 서울에 사는 처제와 부산에 계시는 장인 장모님, 그리고 혼자 사는 나의 누나에게 조금씩이라도 보냅니다. 아직 하지 않았고 12월경에나 예정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맛있었던 김장김치는 전방 대대장 시절이었습니다. 관사 뒷뜰 땅에 장독을 묻어 익혔던 맛이 최고였습니다. 요즘엔 김치냉장고가 대신 하고 있으나 그래도 땅에 묻은 것만큼 맛있지 않아요. 언젠가 단독주택에 살 기회가 온다면 김장독을 묻고 싶습니다.
소대장, 대대 작전보좌관 하던 양구에서의 초년장교 시절, 사방 5M×5M 깊이 2.5M 정도의 큰 콘크리트 박스에다가 장화를 신고 들어가서 소금과 약간의 양념. 그리고 고춧가루는 들어가는둥 마는둥 했던 김치가 맛이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땐 모든 게 맛있었던 것 같습니다. ㅎㅎ
순우친구의 글을 읽는 동안 내내 우리집 김장 풍경을 생각 했습니다.김장은 5남매의 가족들이 하루전에 모여 절이는 일부터 김장
하는 날에는 10여명의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각자의 입담을 과시하며 김칫소를 넣는 것을 보면,그야말로 한 해를 결산하는 축제
인 것이 맞습니다.그런데 90세인 어머니가 품앗이를 하셔야 되고,준비과정에 긴긴 날을 메달리셔야 되는게 과연 맞는 것인지요 ?
저는 장남으로서 막내매제의 적극적 도움과 함께, 작년 김장 후에 장남으로서 김장종전선언을 햐였는데,어머님은 쉬쉬하면서 귀농한
동생의 뜻을 받아들이시어 어제 김장을 하였다고 막내여동생편에 김장 한통을 보내 주셔서, 애쓰셨다 전화는 드렸습니다만,
이런식으로 김장은 과연 지속해야될 가치가 있는 건가요 ? 시의성 있는 좋은 글,감사해요.
순우의 김장과정은 옛 시골모친의
김장철을 연상케 합니다.
서양과 달리 김치의 가장 큰 장점은
발효식품이라는 것이지요.
건강이 허용하는한 손수 김장준비는
크게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손녀들 그림 솜씨가 대단하네요. 순우선생의 DNA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옛날 겨울나기 위해 김장하고 연탄 들여놓으면 한없이 마음이 따뜻한 시절이 있었지요. 김장울력 힘들지만 하고 나면, 일년동안 두고두고 맛있는 김장김치와 묵은지를 먹을 수 있으니 고충을 상쇄할 만하지요. 처가집 식구와 함께 하는 김장두레 부럽기도 합니다.
집안 온 가족이 한데 모이기도 쉽지 않은데 김장을 매개로 이런 거창한 행사를 하시다니 새삼 부럽네요. 요새는 절임을 택배로 받으니 배추농사 짓는 것도 귀찮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