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사에서 '저우언라이'라는 이름은 총리라는 직함 하나로 담기지 않는다. 혁명의 설계자였고, 궂은 실무를 도맡은 조직가였으며, 외교 무대에서는 중국의 얼굴이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도 그는 끝내 온건함의 자리를 지켰다. 숱한 지식인과 관료를 감싸 안았고, 그 덕에 '인민의 총리'라는 호칭을 얻었다. 세월이 바뀌고 정세가 뒤집혔어도 중국인들은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뼛속까지 중국을 사랑한 중화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국공내전 무렵 한 미국 기자가 "중국인과 공산당원 중 무엇이 더 중한가" 물었을 때, 그의 답은 망설임 없이 "중국인"이었다. 그런 그가, 바로 그 애국의 방식으로, 한족 중심의 대국주의만큼은 끝까지 반성하고 바로잡으려 했다.
1963년 6월 28일 베이징.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그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말을 남긴다.
당시 북·중은 국경 획정 협상을 벌이던 참이었고, 이 발언은 그 한복판에서 나왔다. 기록은 훗날 중국 외교부 내부 자료에 실렸고,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2004년 국내에 공개된 번역본이다. 중국 측 원문은 지금껏 공개되지 않았으니, 아래 인용은 그 번역을 따른다.
그는 먼저 역사 서술 자체를 겨눴다.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이 진실과 어긋나는데, 그 주된 원인이 중국 학자들이 대국주의 · 대국 쇼비니즘의 눈으로 역사를 써 내려간 데 있다고 했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래 오랫동안 그곳에 살아왔고, 요하와 송화강 유역 곳곳에 그 발자취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요하 · 송화강 · 도문강 유역에서 나온 문물과 비문이 이를 증명하고, 수많은 조선 문헌에도 흔적이 뚜렷하다고 했다. 경박호 부근을 두고는 발해의 유적이 남은 곳이자 발해의 수도였다고 못 박았다. 거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그곳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였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사과는 그다음이었다.
왕성하던 시기의 중국 영토가 지금보다 컸던 것은 역사의 흔적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눈감을 일은 아니라고 했다. 조선의 땅을 밀어붙여 좁게 만들고 자신들의 땅을 키운 데 대해, 조상을 대신해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왜곡에 대한 반박이 이어졌다. 도문강과 압록강 서쪽이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더 나아가 조선이 예로부터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을 그는 황당한 이야기라 잘라 말했다. 역사의 진실성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며, 역사는 왜곡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 발언의 무게를 떠받치는 것은 같은 시기의 또 다른 기록이다. 마오쩌둥은 이듬해인 1964년 10월 7일, 최용건이 이끄는 조선 당·정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거의 같은 취지의 말을 남겼다.
이 담화는 중국어 원문이 전한다.
原文: "至於你們的土地,不是我占的,是隋煬帝、唐太宗、武則天。你們的邊界是在遼河以東,是封建主義把朝鮮人趕到鴨綠江邊。封建主義可厲害啦。"
"당신들의 땅으로 말하자면, 내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수 양제와 당 태종, 측천무후가 그랬다. 당신들의 경계는 요하 동쪽이었는데, 봉건주의가 조선인을 압록강변까지 내몬 것이다. 봉건주의란 참으로 무섭다."
마오의 이 발언은 1958년과 1964년 두 차례에 걸쳐 나온 것으로, 저우언라이의 1963년 담화와 한 쌍을 이룬다.
최고 지도부 두 사람이 같은 국면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는 사실은, 그 말이 순간의 외교적 립서비스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중국 최고 지도자가 한민족의 역사적 주체성을 인정하고, 과거의 침탈을 사과하고, 역사 왜곡을 정면으로 비판한 기록인 것이다.
이 언어의 값은 훗날 드러났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앞세워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자국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 했을 때, 한국 학계는 바로 이 발언들을 반박의 근거로 세웠다.
반세기 전 '공산당 전체의 모범'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이미 발해를 조선의 지파로 규정해 두었으니, 후대의 왜곡은 그 앞에서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저우언라이의 말은 대종교가 오래 지켜온 민족 주체 사관, 그리고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과도 맞닿는다. 한민족의 역사를 영토의 넓고 좁음으로만 재지 않고, 인류를 널리 이롭게 하려는 보편적 가치의 여정으로 읽는 시선. 그 시선은 저우언라이가 힘주어 말한 '왜곡 없는 역사, 대국주의의 시정'과 조용히 공명한다.
그는 늘 말을 아끼던 사람이었다. 이상과 타협 사이에서 평생 줄을 탔고, 언어에는 언제나 계산이 배어 있었다. 그런 그가 1963년 그날만큼은 드물게 솔직했다.
중국을 그토록 사랑했기에, 그 사랑을 대국의 오만이 아니라 진실의 회복으로 증명하려 한 사람. 그의 고백이 지금도 살아 있는 증언으로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