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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와나에 인생 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고민중
문경새재 찾아 가는 길
문경새재탐방로
49.영남 제3관 | 조령관(사적 제147호) 숙종 34년(1708)에 설관 |
48.부봉 |
해발917m의 바위산으로 노송이 유명함 |
47.마패봉 | 해발925m의 백두대간으로 일명 마역봉이라고도함 |
46,군막터 | 조선시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의 대기소 |
45.조령약수 | 새재정상에서 솟아나는 백수령천(百壽靈泉),낙동강 3대 발원지의 하나 |
44.장원급제길 |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청운의 길 |
43.책바위 | 각종 시험들에 합격을 기원하는 돌탑 |
42.동화원 | 조령원과 같이 길손들의 숙식을 제공하던곳 |
41.이진터 | 임진왜란때 신립장군이 진을쳤다고 전해지는곳 |
40.조령산 | 해발1,026m로 백두대간에 위치한 명산 |
39.귀틀집 | 산악지대에서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집 |
38.바위굴 | 새재길을 지나는 길손들이 비를 피하던장소,새재우의 전설이 있는곳 |
37.문경새재아리랑비 | 문경새재 물박달나무에 얽힌 민요를 새긴 비 |
36.시가 있는 옛길 | 조선시대 새재를 넘던 선비들의한시를 감상할 수 있는곳 |
35.조곡약수 | 길손의 갈증을 풀어주는 명약수 |
34.영남 제2관 | 조곡관(사적 제147호)선조 27년(1594)에 설관 |
33.주흘산 | 해발1,106m로 조선시대 문경현의 진산 |
32.조곡폭포 | 주흘산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는 45m의 3단 폭포 |
31.산불됴심비 | 조선시대 설치된 한글로 된 산림보호비(문화재자료 제226호) |
30.예배굴 | 조선시대말 기독교인들의 비밀 예배장소로 추정되는 바위굴 |
29.교귀정 | 체임하던 신,구관찰사가 관인을 인수인계하던 곳 |
28.소원성취탑 | 장원급제, 부자, 출생, 쾌유 등을 기원한 돌탑 |
27.꾸구리바위 | 계곡 바위속에 꾸구리가 있어 아가씨가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함 |
26.팔왕폭포(용추) | 시인,묵객(墨客)이 즐겨 찾았던 경승지(궁예 최후의 장면 촬영지) |
25.주막 | 새재길을 넘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잔 술로 여독을 풀던 곳 |
24.상처난소나무 | 일제말기 일본군이 한국인을 동원하여 송진을 채취하던 자국이 남은 소나무 |
23.무주암 | 무인주점이 있던 장소로 전하며 조령산 능선의 경관이 잘 조망됨 |
22.조령원터 | 조선시대 길손들의 숙박과 물물교환장소로 사용 |
21.지름털바우 (기름틀바위) |
기름을 짜던 틀처럼 생긴 바위 |
20.마당바위 | 가로 5m,세로 4m정도로 마당같이 평평한 타원형의 바위 |
19.등룡정 |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무예를 익히던 활터를 재현한 KBS촬영세트 |
18.혈지른자리 | 임진왜란시 큰 인물이 날 자리라고 하여 혈을 질렀다고 하는 곳 |
17.조산 |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돌무덤 |
16.KBS드라마촬영장 | 세계 최대규모의 사극촬영세트 |
15.망치등 | 봉수대와 망루가 있던 능선으로 전하며 포루라는 기록도 보임 |
14.산신굴 | 주홀산의 산신인 호랑이가 살던 곳으로 전하는 바위굴 |
13.선정비군 | 관찰사나 현감등 관리들의 선정을 기념하는 비(碑) |
12.경북 개도100주년 타임캡슐 |
경북도민의 생활상등 자료매설 |
11.대궐터 |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행재소(대궐)를 세운 터 |
10.혜국사 |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한 곳으로 전해지는 신라시대에 건립된 사찰 |
9.여궁폭포(파랑소) | 20m의 장대한 폭포, 일명 여심폭포(女心瀑布) |
8.신길원 현감 충렬사 | 신길원 현감의 위패를 모신 사당 |
7.성황당 | 병자호란 당시 지천 최명길과 여신과의 전설이 있는 곳 |
6.영남제1관 | 주흘관(사적 제147호) : 숙종 34년(1708)설관 |
5.장승공원 | 잡귀를 막고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민간 수호신 |
4.자연생태공원 | 생물의 다양성확보와 자연환경보전의식 고취를 위한 자연체험장 |
3.문경새재박물관 | 이 고장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전시 |
2.신길원 현감비 | (지방유형문화재 제 145호) 임진왜란때 순직하신 신길원 현감의 비 |
1.선비상 | 전통사회의 구심점이었던 선비의 의식과 정신을 상징 |
문경새재(聞慶鳥嶺)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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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申砬) 장군,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이 남긴 사담(史談)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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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聞慶鳥嶺)의 유적 및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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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경상도와충청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죽령을 지나 대미산, 포암산, 주흘산, 조령산, 희양산, 대야산, 청화산, 속리산으로 이어져 소백산맥을 이루어 나간다. 삼국과 고려 때에는 문경 관음리에서 충북 중원군의 수안보로 통하는 큰길인 하늘재(계립령)가 있었고, 문경 각서리에서 괴산군 연풍으로 통하는 소로인 이화령이 1925년 신작로로 개척되어 지금의 국도3호선이 되었다. 옛날에는 1978~1979년 확장 포장된 이우리재(이화령)와 가은에서 충북 괴산으로 연결된 불한령, 문경군 농암에서 충북 삼송으로 다니던 고모령 등이 있어 신라와 고구려,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곳이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조선시대의 가장 큰길[嶺南大路]이었던 곳이며 옛날의 유지(遺址)로는 원터, 교귀정, 봉수터, 성터, 대궐터 등이 잔존하고 있다. 조령로의 번성을 말해 주듯 조령로변의 마애비는 관찰사, 현감 등의 공적을 새겨 놓았으며, 주흘관 뒤에는 선정비, 불망비, 송덕비가 비군(碑群)을 이루고 있다. 주위의 주흘산, 조령산, 부봉과 각 골짜기마다 동·식물자원이 자연 그대로 보존된 관광명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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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 너덜 제2관문에서 조곡계곡을 따라 약 4km 올라가면 산허리를 돌무더기와 긴 돌로 세워 놓고 그 위에 작고 넓적한 돌을 얹어 마치 장승처럼 세운 곳이 나오는데 이곳이 꽃밭 서들이다. 오가는 사람들이 소원성취를 위하여 이렇게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들을 못 낳는 여인이 여기 와서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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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 |
용추
새재 길 옆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시인(詩人)이나 묵객(墨客)이 즐겨 찾는 경승지(景勝地)이다. 『동국여지승람』 「문경현편(聞慶縣篇)」에 의하면 새재 밑의 동화원 서북쪽 1리에 있다. 폭포가 있는데 사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한다.
『在鳥嶺桐院西北一里, 有瀑布四面及底背石, 其瀑不可測, 俗傳龍騰處』
바위에 새겨진 용추(龍湫)라는 큰 글씨는 "구지정(具志禎) 숙종(肅宗) 25년(己卯, 1699)에 쓰다(己卯具志禎書)"라고 새겨져 있다.
이 곳의 경관을 읊은 시(詩)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문경새재민요비 조곡관을 지나 약 500m가면 도로 변에 자연석을 깎아 새긴 비(문경새재민요비)로 민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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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궁폭포(女宮瀑布 : 原名 - 파랑소) 높이 20m의 이 장엄한 폭포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노송의 멋, 기암절벽의 풍치 등과 조화를 이루어 그 경관이 수려하다. 옛날 7선녀가 구름을 타고와 여기서 목욕을 했다는 곳으로 밑에서 쳐다보면 마치 형상이 여인의 하반신과 같다하여 여궁 또는 여심폭포라 불려지고 있다. |
주막(酒幕) 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잔의 술로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곳이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이 주막을 1983년 11월 조국순례자연보도 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대로 되살려 선조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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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흘산(主屹山 : 해발 1,106m) 문경지방의 진산이며 옛 문화의 터전으로 이 협곡에는 유서 깊은 3개 관문이 있으며 기암절벽의 장관과 여러 갈래의 오솔길은 천혜의 멋진 등산로이다. 1974년 12월10일 이 일대가지방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
조령산(鳥嶺山 : 해발 1,026m) 조령산은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조령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영남대로상의 큰 고개인 조령이 있고 남쪽으로 3번 국도인 이화령이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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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고려 때 중요 교통로인 하늘재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조령에게 그 임무를 넘겨주고 이우릿재 이화연이라 부르던 고개에 도로가 생겨나면서 이름까지 이화령으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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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산 능선의 신선봉 | |
부봉(釜峰 : 해발 916.2m) 문경 새재길을 걷다 보면 조곡관(제2관문) 주위에서 보이는 우뚝 솟은 바위산, 이름하여 부봉이라고 부르고 있는 산이 있다. 백두대간이 하늘재를 지나며 조령까지 주능선을 이어 놓으면서 한가지를 뻗어 주흘산(1,106m)을 또 부봉에 와서 다시 한가지를 뻗어 6개의 봉우리를 만들어 놓았으니 새재길에서 보이는 부봉이 6번째 봉우리라는 것은 부봉능선을 등산해 보아야 이해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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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봉 | |
백두대간이 지나는 부봉의 제1봉이 917m, 제2봉이 933.5m, 제3봉이 911m, 제4봉이 923.9m, 제5봉으로 사자바위가 있는 곳이 916m이고 새재길에서 보이는 것이 제6봉으로 우리들이 흔히 부르는 부봉이며 916.2m이다. | |
부봉의 6개 봉우리 | |
부봉의 능선 | 부봉의 마당바위와 사자바위 |
부봉의 부처바위 | 부봉의 노송 |
조곡약수(鳥谷藥水) 이 약수는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청산계곡 사이로 흐르는 용천수로서 물이 맑으며 맛이 좋아 길손들의 갈증과 피로를 풀어주는 영약수(靈藥水)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
조령약수(鳥嶺藥水) 이 약수는 조선 숙종 34년에 조령성을 구축 시 발견된 약수터이며 우리 조상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길을 넘나들 때 이 감로수(甘露水)로 갈증과 피로를 풀었으며 춘하추동 수온이 일정하여 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백수영천(白壽靈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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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곡폭포(鳥谷瀑布) 산불됴심비에서 200m 위치에 있는 조곡폭포는 산수 수려한 주흘산 깊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20m의 3단폭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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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급제길 문경 땅 바로 이 길은 조선조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차 한양으로 넘나 들던 옛적 그대로의 길이다.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또한 택리지에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이 곳을 왕래 하였음을 헤아릴 수 있고, 아울러 장원급제한 선비들도 상당하였음에 연유하여 이 길을 "장원급제길"이라 부르게 되었다. |
군막(軍幕)터 이곳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軍士)들의 대기소(待機所)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제3관문 옆에 위치하고 있다. |
문경읍 상초리 조곡관(鳥谷關)과 주흘관(主屹關)의 중간지점인 용연(龍淵-龍湫)위에 있다. 체임(遞任)하는 신구관찰사(新舊觀察使)의 교인처(交印處)로 성종조 신승명이 건립했다. 유지(遺址)와 김종직(金宗直)의 시(詩)가 전해 왔으며 1999년 10월 문경시가중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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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터(二陣址) 임진년(壬辰年, 1592) 왜장(倭將)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 진을 쳤다. 그가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정탐할 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은 신립(申砬) 장군이 농민 모병군(募兵軍)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립(申砬) 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 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였다. 대신 이곳 조령산 능선에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하고 충주 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쳤으나 왜군 초병(哨兵)이 조선 초병 머리 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한편 탄금대에서 배수의진을 친 신립(申砬) 장군의 조선 농민군(農民軍)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맞아 끝까지 싸웠으나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
원터(院址) 원(院)이란 지금의 여관과 같았다. 화봉원에서 고려의 유희가 시를 읊는 것을 보아 고려 때부터 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근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나라의 들에는 10리 길에 여(廬-초막)가 있고 30리 숙(宿-여관)이 있었으며, 후세에는 10리에 장정(長亭-쉬는 집) 5리에 단정(短亭-쉬는 작은 정자) 하나씩이 있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파발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院)을 두고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되 공과 사의 구별, 상과 하의 구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파발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것을 주관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평원이나 기름진 땅 안에 있는 원에도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가끔 있었다. 하물며 깊은 산골의 험하고 메마른 곳에 있는 원에는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들에는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원(院)이 없어도 잘 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골짜기 외딴 곳에서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범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등 길손의 걱정은 이에 더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조령산성 안에 조령원(鳥嶺院)과 동화원(桐華院)이 있고 현의 서쪽 15리인 이화령 아래 요광원(要光院)이 있었다. 하늘재 밑에 관음원(觀音院)이 있고 현의 북쪽 4리에는 화봉원(華封院)이 있었다고 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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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원(鳥嶺院)과 동화원(桐華院) 지금 조령원으로 전하는 제1관문에서 1㎞ 정도 떨어진 원터가 동화원이며 새재아래 동화원이라는 마을에 조령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문을 원터를 발굴한 신영훈 전문위원이 제기한 바 있다. 1530년(중종25) 이행 등이 증보 개정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조령원은 새재의 고개 동쪽에 있다고 해서 지금의 동화원 동리를 지칭하고 동화원은 현의 서북쪽 15리에 있다고 하여 지금 조령원 터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문경현지에서는 위치의 기록이 없고 열 개의 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라고 간단히 적고 있다. 16세기로 추정되는 필사본 지리지에는 조령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와 같이 조령의 동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동화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이 서북쪽 15리에 있으며 동화원과 함께 석담을 쌓았으나 지금은 폐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당시에 조령원, 불정원, 화봉원은 사용되고 있었고 관음원, 회연원, 동화원, 견탄원은 폐지됐다는 기록을 남긴 점으로 보아 일부 원(院)만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제1관문 안에 조령진(鳥嶺鎭)과 산성창(山城倉)을 두자 원의 기능이 불필요하게 되어 동화원이 먼저 폐지되고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이 조령원(현 동화원 마을)으로 옮겨 살며 옛 그대로의 원이름을 사용해서 혼돈이 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러나 와전된 원의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는지는 증명할 수 없다. 1927년에 제작된 조령편람(鳥嶺便覽) 현판에는 조령원에 담장이 상존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 지금까지 조령원으로 전하나 이는 잘못으로 생각된다. 원터는 1977년 8월과 12월 두차례에 걸쳐 300만원의 사업비로 신영훈, 홍사준 전문위원이 발굴하였다. 여기에서 고려시대 온돌(溫突) 유지(遺址)가 나타나 북방에서 시작된 온돌이 남점(南漸)하는 자료로 건축사에 중요한 사료(史料)로 평가되며 그 외에도 와편, 토기편(土器片), 자기편(磁器片), 어망추, 사금파리어음, 숫돌 수정편(水晶片), 철재 화살촉, 청동머리꽂이, 철재가위, 담뱃대, 부시, 손칼, 엽전, 마령(馬鈴), 말발굽쇠, 정, 자갈 마제도구(馬蹄道具), 화금, 문고리 등이 출토 되었다. 1978년에는 신영훈 전문의원 집필로 발굴조사보고서를 문경군에서 발간하였다. 원터의 석문과 석담(石垣) 축성방식이 동로면 명전리의 작성(鵲城)과 꼭 같다. 석문의 방형석주(方形石柱)며, 지방(地枋)과인방(引枋) 천장석 상하의 문지도리 홈의 규모가 같고 석담을 거랭이질하여 엇물리게 쌓는 방법이 또한 그러하다. 작성(鵲城)은 동로면 명전리 황장산(黃腸山)에 계곡을 막아 축성하였다. 공민왕이 대지 국사의 안내로 난을 피해 황장산 부근에 체류(滯留)할 때 작장군(鵲將軍)이 쌓았다고 전하며 고구려 석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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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과거길 옛 과거길옛날 선비나 상인들이 한양을 오르내리던 소로(小路)로서 현재 3개소 850m가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역사의 산실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