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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기 지역연구 원문보기 글쓴이: 박준서
4) 은자, 빈자의 호
화쟁에 자의, 타의 몸담았다가 환멸을 느끼고 몸과 마음을 숨긴 이들이 선택한 호다.
○ 조은(釣隱) 최치운 :
태조, 세종 때의 청백리로 어려운 정치현실에서 몸을 숨기고자하는 뜻과 함께 신유학(주자학) 추종자들의 학문적 지향점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낚시(釣)는 은자의 최대 소일거리였다.
○ 망천(忘川) 이고(李皐)
여말 이성계의 창국에 반대하여 수원의 팔달산으로 은둔한 학자로 忘川은 수원천에서 낚시를 하며 망국의 시름을 잊겠다는 뜻으로 쓰임. 수원천의 옛 이름이 망천으로 불렸음. 한편 팔달산의 팔달도, 권선동의 권선도, 인계동의 인계도 이고 선생과 관련한 지명이다.
○ 무위자(無爲子) 강희맹(姜希孟)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 즉 자연의 상태대로 맡겨놓고 아무런 인공적인 작위를 가하지 않는다는 뜻.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매화와 달을 벗 삼아 현실에서 초연하여 은둔하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자신이 거처하는 서재의 이름으로 지은 당호. 어려서부터 시문에 재주가 뛰어나 五歲神童으로 불려 金五歲가 별명이 되었으나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분개하여 오세의 음을 빌려 汚世(더러운 세상!)로 호를 짓고 승려가 되어 산수를 방황하며 일생을 마침. 설악산에 그가 거쳐하던 오세암(五洗菴)이 있다.
한편 김시습의 시습은 논어의 학이편 첫 구절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라! 그 이름 참 명쾌하다!
○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세속의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걱정 없이 한가로이 지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호. 세조의 왕위 찬탈 후 벼슬을 물러나 고향 태인에서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 賞春曲 불우헌곡, 불우헌가 등 시가문학사상 중요 자료가 그의 작품들이다.
○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정치현실에 환멸을 느낀 시인이 강가에 살며 낚시와 술과 시작으로 소일하며 지내겠다는 뜻의 호. 가을 강은 고독과 은둔의 이미지를 표현할 때 많이 쓰였다. 생육신의 한 사람.
5) 존경하는 인물을 기려 짓는 호
○ 청련거사 이후백
명종대의 이조판서. 이백(이태백)의 뒤를 잇는다하여 이름도 이후백. 호도 이백의 호인 청련거사의 ‘청련’을 그대로 썼다
○ 보담재(寶覃齋) 김정희, 보소재(寶蘇齋) 옹방강
위에서 언급
○ 사임당(사임당) 신씨-신인선
흔히 신사임당이라 불리는 이 율곡의 어머니 신씨. 본명은 인선이다. 신사임당이 스스로 자신이 거처하는 곳의 이름(당호)을 지은 것이다.
師任에서 師는 스승 '사'자로 ‘흠모하여 존경하다’란 뜻을 갖는다. 사임의 任은 옛날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뜻한다.
신사임당이 태임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태임을 스승으로 본받고 싶다는 의미에서 師任이라고 지은 것이다. 특히 태임의 태교를 본받고 싶었다고 전해진다.
태임의 성품은 단정하고 성실하며 오직 덕(德)을 실행하였다고 한다. 그가 문왕을 임신해서는 눈으로 사악(邪惡)한 빛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란(淫亂)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 입으로는 오만(傲慢)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문왕을 낳으니 총명하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알더니, 마침내 주(周)나라의 으뜸 임금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태임의 태교와 교육을 본받고 싶어서 당호를 사임이라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堂은 본채나 별채 등 안주인이 기거하는 집안의 한 건물을 말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임당은 사람의 호가 아니라 집안 건물의 이름이다.
6) 즐겨하는 취미와 일, 그리고 완물을 이용한 호
○ 노가재(老歌齋) 김수장(金壽長)
늙은 시조가인들이 모여 시와 시조를 읊는 서재라는 뜻. 자신의 화개동(삼청동) 집에서 가객들과 교류하며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지으며 살았다. 아전 출신으로 조선후기의 대표적 시조작가.
○ 삼혹호(三酷好) 이규보(李奎報)
세 가지를 지독히 좋아한다는 뜻. 시와 술과 거문고를 지독히 좋아하여 스스로 지은 호.
○육일거사(六一居士) 구양수(區陽修)
장서 일만 권, 금석문 일천 권, 거문고 한 개, 바둑판 한 개, 술 한 병,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늙은 자신을 가리켜 육일이라 했다.
○ 주선옹(酒仙邕) 이백(李白)
이태백이다. 태백은 그의 字다. 술을 즐겨 주선옹이라 자호했다. 詩仙이자 酒仙을 자처한 셈. 행동거지가 초연하여 이 세상으로 귀양 온 신선이라 불렸다. 靑蓮居士는 그의 또 다른 호다. 맑은 물에 씻기운 연꽃이란 뜻으로 군자가 좋아하는 꽃의 상징이다.
○ 취묵헌(醉墨軒) 인영선
먹 향기에 취하는 방. 서예가 인영선의 호다.
○ 석치(石痴) 정철조
조선후기의 벼슬아치다. 벼루에 미친 사람이다.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아 나눠줬다. 무엇엔가 미친 사람을 일러 벽(癖) 또는 치(癡)라고 한다. 돌에 미친 사람 석치!
○ 석당(石堂) 이유신(李維新)
신위(申緯)라는 이가 있다. 괴석에 미쳐 괴석 모으길 좋아하는데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며 수레에 괴석만 잔뜩 실어왔다고 한다. 동행한 화가를 시켜 그 그림을 그리게 하며.
이유신이란 화가가 있다. 그 또한 돌에 미친 사람이다. 어느 해 정초에 돌을 좋아하는 신위에게 세배하러 갔다가 그만 돌에 마음을 빼앗겨 세배하는 것도 잊고 돌만 어루만지고 있더란다. 신위가 그 돌을 선물로 내주자 역시 세배하는 일도 잊고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횡하니 내빼더란다. 그의 호가 석당(石堂)이다.
○ 억만재(億萬齋) 김득신(金得臣)
자못 엽기적인 노력가다. 절대로 IQ가 두 자릿수를 넘지 않았을 것 같은 위인이다. 그의 아버지가 태몽으로 노자를 보았다하여 노자의 이름인 담(耼)을 따서 ‘몽담(夢耼)’이란 아명을 주었다. 신통한 꿈을 꾸고 낳은 아이라 한 문장 하겠구나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머리가 지독히 나빴다. 10살에 이르러 글공부를 겨우 시작했는데 스무 살이 되어서야 겨우 글 한편을 지어 아버지께 올렸다고 한다.
머리가 나쁜 대신 지독한 노력을 하였는데 그 아버지는 “저 아이가 저리도 미욱하나 포기하지 않으니 대기만성 할 걸세”하며 그의 아들을 두둔했다고 한다.
그의 독수기(讀數記)가 전해지고 있다. 독수기란 책을 읽은 수를 기록한 문서다. 백이전이란 책은 1억1만3천 번. 모두 36종의 책을 1만 번 이상 읽었다. 1만 번 이하로 읽은 책은 아예 여기에 적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횟수를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 김득신의 미련이 아니고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의 엽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 1억 번 이상 읽었다는 책. 때는 단옷날이라 그와 관련한 좋은 시제를 하나 얻었는데 그 댓구가 영 떠올려지지 않아 끙끙거리자 그의 말고삐 시종이 왜 그런지를 물었다. 이유를 말하자 그의 말 시종이 대뜸 그 다음 시제를 읊더란다. 그러면서 말하길 “마님이 노상 읽은 아닙니까?”라고 한다. 하도 읽어 주어들은 종도 다 외울 지경인 글을 그는 또 잊고 만 것이다. 이에 김득신은 말에서 내려 “네가 내 재주보다 나으니 내가 네 말구종을 들겠다”며 하인을 말안장에 앉혔다고 한다. 이런 그가 자신의 호를 억만재(億萬齋)로 삼았다. 억 만 번을 읽고, 읽고 또 읽고.
6) 이름으로 세상을 조롱하다.
○ 필재(疋齋) 이단전(李亶佃)
천한 신분의 조선 후기 시인이다. 그의 이름 亶佃은 ‘진실로 단’에 ‘밭갈 전’자로 소작인 또는 종놈을 뜻한다. 이를테면 ‘진실로 종놈’인 셈이다. 여기에 스스로 붙인 그의 호가 또 걸작이다. 필재(疋齋)! ‘필(疋)’자를 파자하면 하인(下人)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진짜 종놈에 불과하다며 신분사회에 대한 조롱을 퍼 부운 것이다. 천한 신분에 시인이라면 필시 筆才임에 틀림없겠으나 疋齋라!
○ 송산(松山) 조견(趙狷)
여말선초.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도와 일등공신이 된 조준(趙浚)이 있다. 그러나 그의 아우 조견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어찌 두 왕조 두 임금을 섬기겠는가? 해서 개성을 버리고 수원의 인근 청계산에 은둔했다. 원래 이름이 윤(胤)을 버리고 아예 견(狷)으로 고쳤다. 견(狷)은 지조와 절의를 지킨다는 뜻이다. 그리그 그의 자(字) 또한 종견(從犬)으로 고쳤다. ‘옛 주인을 잊지 못하는 것이 개와 같고, 나라를 잃고도 죽지 못하는 것이 개와 같다’는 얘기다.
○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이기도 한 오원 장승업. 세속의 일은 안전에도 없이 예술 혼을 불사른 조선의 3대가 또는 4대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19세기의 화가. 금전도, 권력도, 가정도 심지어 임금의 명도 거부한 채 살아가는 호기방탕한 사나이.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등 가장 뛰어난 화가에게 붙여 준 원(園)에 빗대어 “나도(吾) 원(園)이다!”라고 자호 했다.
○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나와 시詩와 담배는 이음異音 동곡同曲의 삼위일체三位一體. 나와 내 시혼詩魂은 곤곤滾滾히 샘솟는 연기. 끝없는 곡선曲線의 선율旋律을 타고 영원永遠히 푸른 하늘 품속으로 각각刻刻 물들어 스며든다....
담배와 함께 평생을 살다간 6.25를 전후한 시인 공초 오상순. 잠에서 깨어 담배를 피워 물면 다시 잠 잘 때까지 담뱃불을 꺼뜨리지 않았다던 그다. 세수할 때도, 밥 먹을 때도. 그래서 그의 별명은 ‘꼴초’다. 허나 어쩌랴! 그 전쟁 통에 시가 밥이 되었으랴! 담배 한 갑이 되었으랴! 꼴초인 그는 늘 남이 피우다 버린 꽁초나 탐내는 위인이었던 것을!
그의 별명을 빌려 공초(空超)라는 호가 만들어졌다. 시가 밥 한 줄이 되지 못하거늘! 늘 남의 꽁초에나 눈독 들이는 처지인들 가진 것을 탐할 소냐? 집 한 채! 시집 한 권!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의 자유인 空超! 다.
북한산자락 그의 무덤 앞에 재떨이가 있다. 자연석 재떨이. 죽어서도 담배 공양을 받는다. 담배 굴뚝인지 구멍 뚫린 석비도 하나 서 있다.
○ 봉이 김선달
조선 후기의 풍자적인 인물 봉이 김선달 (본명 김인홍. 자호로는 낭사. 평양출신의 재사 김선달이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 위하여 서울에 왔다가 서북인 차별정책과 낮은 문벌 때문에 뜻을 얻지 못하여 울분하던 중 세상을 휘젓고 다니며 권세 있는 양반, 부유한 상인,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기지로 골탕 먹이는 여러 일화들이 있다.
김선달이 봉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다. 김선달이 하루는 장 구경을 하러 갔다가 닭전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닭장 안에는 유달리 크고 모양이 좋은 닭 한마리가 있어서 주인을 불러 그 닭이 '봉'이 아니냐고 물었다. 김선달이 짐짓 모자라는 체하고 계속 묻자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정하던 닭장수가 봉이라고 대답하였다.
비싼 값을 주고 그 닭을 산 김선달은 원님에게로 달려가 그것을 봉이라고 바치자, 화가 난 원님이 김선달의 볼기를 쳤다. 김선달이 원님에게 자기는 닭 장수에게 속았을 뿐이라고 하자, 닭장수를 대령시키라는 호령이 떨어졌다. 그 결과 김선달은 닭 장수에게 닭 값과 볼기맞은 값으로 많은 배상을 받았다. 닭 장수에게 닭을 '봉'이라 속여 이득을 보았다 하여 그 뒤 봉이 김선달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유명한 일화로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재밌는 얘기가 있다.
김선달이 대동강가 나루터에서 사대부집에 물을 길어다 주는 물장수를 만났을 때 기발한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물장수를 데리고 주막에 가서 얼큰하게 한잔을 사면서 내일부터 물을 지고 갈 때마다 내게 한 닢씩 던져주게나 하면서 동전 몇 닢씩을 물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 의관을 정제하고 평양성 동문을 지나는 길목에서 의젓하게 앉아서 물장수들이 던져주는 엽전을 헛기침을 하면서 점잖게 받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모든 사람들이 수군대며 살피고 있었다. 이때 엽전을 내지 못한 물장수가 선달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고 있었다. 이를 본 한양인들은 대동강물이 선달 것인데 물장수들이 물 값을 내지 못하게 되자 호되게 야단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여 내일부터는 밀린 물 값까지 다 지불하여야 한다고 엽전준비에 야단이 났다.
이를 참다 못한 한양상인들은 어수룩한 노인네 하나 다루지 못할 것인가 하면서 장수꾼들이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꼬득여 주막으로 모시게 된다. 술잔이 오가고 물의 흥정이 시작되었다. 선달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것이므로 조상님께 면목이 없어 못 팔겠다고 버티면서 이를 물려줄 자식이 없음을 한탄까지 하였다.
한양상인들은 집요하게 흥정을 했다. 거래금액은 처음에는 1천 냥이었다. 2천 냥, 4천 냥으로 올라가 결국 4천 냥에 낙찰되었다. 당시 황소 60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당시의 매매계약서는 다음과 같다.
품 명: 대동강(대동강)
소유자 봉이 김선달
상기한 대동강을 소유자와의 정식 합의하에 금년 5월 16일자를 기해 인수함을 증명함과 동시에 천하에게 밝히는 바이다.
인수자- 한양 허풍선
인수금액-일금 4천 냥
인도자 김선달
선달은 못내 도장 찍기를 서운한 듯 도장 찍기를 주저한다. 그러자 상인들은 졸라대기 시작하여 결국 계약이 체결된다.
재산은 모으지 못했다고 한다. 워낙 풍류와 시를 좋아하고 어려운 서민을 보면 양반들을 골탕 먹이고 뺏은 돈을 서민에게 다고 한다.
7) 한글로 지어진 호
한글학자인 주시경 선생의 '한흰샘', 이병기 선생의 '가람', 최현배 선생의 '외솔' 등은 널리 알려진 한글 호다. 서예가 가운데도 '꽃뜰 이미경 선생, 갈물 이철경 선생께서 한글호를 사용한다. 앞서 설명한 쇠귀 신영복 선생도 마찬가지.
가람 이병기 선생은 자신의 호를 짓게 된 경위를 그의 일기장에서 술회한 바가 있다. 그의 일기장에는 "가람은 강이란 우리말이니 온갖 샘물이 모여 가람이 되고 가람물이 나아가 바다물이 된다. 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것이니 근원도 무궁하고 끝도 무궁하다. ...중략...우리말로는 가람이라하고 한자로는 임당(任堂)이라 하겠다"라고 호를 지은 연유를 밝히고 있다.
또 문익환 선생님은 ‘늦봄’을 사용한다. 고희에도 만년 청춘이었던 그다.
이외에도 오리 전택부(전 YMCA 명예회장), 한솔 이효상(전 국회의장), 눈뫼 허웅(한글학회 이사장), 한결 김윤경, 한벗 김계곤, 구름재 박병순, 높세율 남영신 (이상 한글학자), 얄라 이봉원(영화감독), 늘봄 전영택(소설가) 등이 있다.
한글호를 짓는 또 하나의 경향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고한어(古韓語)를 살려 호로 사용하는 예가 그렇습니다. 주로 한배달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분들인데 봄수레 노재춘, 사라아리 권희영, 해머슴, 아라가비, 수바마니, 나난도리, 다라사니, 마루달, 나랑아루, 무파랑 등이 그 예다. 호를 지으매 같은 자수로 한글도 되고 한자도 되면 더욱 좋겠다. 쇠집 鐵齋, 쇠귀 耳牛, 늦봄 晩春, 눈뫼 雪山 등.
8) 그룹 짓기 호
흔히 스님들의 법명을 지을 때 사승관계에 따라 돌림자를 넣거나 한 동아리에서 인연이 있는 한 글자와 각자의 특징에서 찾은 한 글자를 따서 짓는 경우다. 정조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미스테리를 엮은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에 보면 죽란사(竹欄舍)란 비밀조직의 동아리들이 주자를 붙여 호 하나씩을 지어갖는 장면이 나온다. ‘얼굴이 검은 이유수는 오죽(烏竹), 담배를 많이 피워 공방대 장죽을 물고 사는 윤지눌은 장죽(長竹), 홍시제는 청승맞게 생겼다고 상제 지팡이를 뜻하는 상장죽(喪杖竹), 깡마르고 키가 큰 유치명은 수죽(脩竹)....’하는 식이다.
9) 선조의 대를 이은 호
호의 대종을 이루는 것 중 자신이 사는 곳이나 마을 · 산이름 · 강이름 등에서 한 글자를 따서 거기에 동 · 서 · 남 · 북 방향을 가리키는 글자를 넣거나 은거한다는 뜻으로 '은○' 자를 붙인 것이 많다. 자기를 겸손하게 표시하여 한낱 나무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초○' 자를 넣어 자호하기도 하였고, 선향의 땅이름을 담은 글자에 ○암 · ○당 · ○재 · ○헌· ○와 등의 글자를 붙여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조의 호에서 한 글자를 따고 그 후손이라는 뜻으로 '후○' 자를 앞에 붙이든가, '운○' 자를 뒤에 붙여 짓기도 하였습니다. 또는 어느 부분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의 경우 그 후손이 선조의 호를 그대로 쓰고 ‘○○二代’ 식으로 대를 잇는다는 뜻을 표하기도 한다.
○ 철재(鐵齋) 오옥진 그리고 철재이대(鐵齋二代) 오윤영.
서각의 원류인 각자(刻字)에서 독보적 위치를 갖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기능보유자 오옥진의 호는 쇠집 철재(鐵齋)다. 4대를 이어온 목수집안의 손이다. 각자에서 일가를 이룬 그를 이어 장남 윤영의 호는 鐵齋二代다. 철재를 통해 사사받은 이들을 鐵齋刻緣이라 한다.
○ 이향(里香), 호호득(呼好得) 민학기
명성왕후 민비의 조카로 19세에 조선조 최연소 이조정랑이 된 민영익(閔泳翊. 1860-1914). 이향 민학기에게는 증조부 뻘이 된다.
선비화가로 자는 자상(子湘), 호는 운미(芸楣), 원정(園丁) 또는 천심죽재주인(千尋竹齋主人)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정치적 혼란기에 미국전권대신,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등의 요직을 지냈다. 개화기 외교업무를 통괄하는 자리에 있은 이유로 한국인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일물로 기록되고 있다.
1905년 러일 전쟁 후 명성황후의 시해와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홍콩, 상해로 망명하여 오창석(吳昌碩)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묵란(墨蘭), 묵죽(墨竹)을 특히 잘 그려 흥선대원군인 석파 이하응과 쌍벽을 이뤘다. 상해 망명 시 칠리향장(七里香蔣)이란 당호를 사용했다. 칠리향이란 ‘한눈에도 다 뵈는 아주 작은 마을에 맑은 향기를 전하는 집’이란 뜻이다. 이향은 선대의 당호에 장난기를 더해 지은 호다. ‘우리 할아버지가 7리를 풍기니 난 그 두 배 쯤 풍겨보지. 뭐! 십사리(十四里)는 그렇고 시오리향(十五里香) 정도!’ 그래서 사용한 것이 ‘시오리향’이고 그 중 두 자를 취해 ‘里香’이란 호를 사용하고 있다.
내 머무는 자리에서 한 시오리쯤 풍기는 맑은 향이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지었습니다. 주변에서 향기는 무슨? 발구린 내에 입구린내만 풍기고 다닌다는 조롱도 참아내며 사용하고 있지요. 담배도 하루 두 갑 정도 피워대는 왕골초니 그런갑다 이해하기를 빌며. 또 다른 호로는 호호득(呼好得)을 사용하고 있다. 전각을 새길 때 칼로 새겨낸 돌가루를 입으로 호호 불며 새기는데 이때 입부는 소리인 호호(呼呼)와 칼로 돌 새기는 소리인 득득 소리를 합치면 ‘호호득득’이 되는데 이 소릿말을 약간 바꿔 ‘득득[得] 새겨 호호 불면[呼] 좋은 한 세상을[好得 : 篆刻 一顆] 얻는다[득]’란 뜻으로 전각의 일과를 얻는 과정을 호로 표현 했다.
10) 특이한 호
○ 상백(想白) 이상백(李相佰)
국호도 없었던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를 가능케 만든 체육인 이상백(李相佰). 그의 호는 상백(想白)이다. 그의 4형제 모두가 독출한 지사들인데 그의 맏형은 이상정 장군이며 둘째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항일 시인 이상화다. 농구를 올림픽 종목에 올려놓았으며 국제심판 1호도 그의 몫이다.
체육인 뿐 아니라 그는 사학자이기도 하다. 진단학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서울대사회학과를 만든 장본인이기 하고 몽양 여운형과 건준과 근로인민당 등의 활동을 했다. 체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한 선각자다. 그의 형 이상화(李相和)의 호도 음이 같은 상화(尙火)다.
○ 이호우(爾豪愚) 이호우(李鎬雨)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호 이호우(爾豪愚)도 이름과 호의 음을 같게 한 경우이다. 이호우의 당호는 청우헌(聽雨軒)이다. 빗소리 들리는 집. 가람 이병기의 [청우헌에서 빗소리 듣다]라는 시조가 있다.
10) 호기(號記)를 적는다.
옛사람들은 자신이 호를 지으면 호를 짓게 된 변(辨)이나 기(記)를 짓기도 하고, 남에게 호를 지어 줄때도 그 글자의 출전이나 뜻을 밝힌 글을 주기도 하였지요. 이런 종류의 글을 호변(號辨) 혹은 호기(號記)라고 합니다. 다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 김지하의 호기다. 그의 홈페이지에서 참고로 옮겨본다.
○ 노겸(勞謙) 김영일( 일명 김지하)-그의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이다.
5. 16 군사 쿠데타 뒤니까, 아마도 스물두 살 때였나 보다. 그때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학교 앞에 ‘학림’이라는 음악다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다방에서 곧 나의 시화전(詩畵展)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가 여름이었다. 그때 내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인데 문단에 이미 같은 이름의 문사들이 여럿 있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 개인 시화전을 여는 것은 마치 시집을 한 권 내는 것만큼 ‘준문단적’, 혹은 ‘준준문단적’ 사건이었는지라 아무래도 필명(筆名)이 하나 필요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런데 그런 어느 날 동아일보사에서 일하던 한 선배가 점심때 소주를 사줘서 실컷 먹고 잔뜩 취해가지고 거기서 나와 동숭동 대학가의 아지트였던 바로 그 음악다방으로 가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니 돈도 버스표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여름 한낮의 태양은 뜨겁고 술은 오를 대로 올라 비틀거리며 종로길을 갈지 자로 걸어오던 때다. 그 무렵 막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있었는데, 요즘에도 흔한 것이지만 길가에 자그마한 입간판이 주욱 늘어선 것이다. 다방, 이발소, 이용실, 뭐 그런 것들의 입간판인데 술김에도 괴상하게 여긴 것은 그 간판 위쪽에 다 똑같은 자그마한 검은 가로 글씨로 모두 한글로 ‘지하’라고 하나같이 써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하실에 다방, 이발소, 이용실이 있다는 얘긴데 왜 하필 그 글자만은 유독 똑같은 한글, 똑같은 검은 글씨로 맨 위쪽에 가로로 조그맣게 써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똑같은 것들이 여기도 ‘지하’ 저기도 ‘지하’ 저기만큼 가서도 또 ‘지하’, ‘지하’, ‘지하’! 그야말로 도처에 유(有) ‘지하’였다. ‘옳다! 저것이다! 저것이 내 필명이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해서 김지하의 지하 시대(地下時代)가 열리기 시작한다. 그 뒤로 내내 정보부 지하실과 경찰서, 유치장, 감옥, 지하 술집, 뒷골목과 허름한 싸구려 여관, 남의 집 문간방을 전전하거나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기 일쑤인 스산하고 을씨년스런 지하시대 삼십여 년이 펼쳐진다.
작명가(作名家) 김봉수 왈, “이것도 이름이야? 감옥에 서너 번은 족히 가겠구먼!” 그랬다. 심지어 한창 지하시대에는 ≪워싱턴 포스트≫의 한 특파원이 내게 처음 악수하며 던진 말이, “헬로! 미스터 언더그라운드 킴!” 이었으니까 뒷말은 할 필요가 없다.
‘언더그라운드’라면 혁명가를 뜻하는데, 모자라게도 그걸 은근히 즐길 때까지 있었으니 고생해도 싸다고 하겠다. 이름을 고치라고 충고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고집도 부렸지만 또 고쳐서 신문에 발표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국엔 그것이 그것,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나 그대로 ‘지하’였다. 왜일까? 때가 차지 않아서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과시 나의 필명 지하의 유행과 삶에서의 지하시대는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름은 ‘위(位)’요 ‘궁(宮)’이라 ‘중(中)’ 즉 ‘마음’이 놓이는 ‘자리’를 말함이다. 일종의 ‘닻’의 뜻이다. 큰 바람이 불기 전에 벌레들이 자리를 옮기는 것은 그 때문이니 내게 큰 변화가 올 것이 틀림없다.
연초에 역(易)에 물으니 왈, ‘견군용(見群龍)’이라 했다. 천지가 요동하는 대개벽이다. 짐작대로다. 처신을 물으니 왈, ‘무수길(無首吉)’이라 했다. ‘목이 없으면 길하다’는 뜻이다.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목을 숙이지 않으면 가차없이 잘려나간다는 뜻이니 그러매 크게 깊이 겸손해야 겨우겨우 길하다는 말로도 된다. 그만큼 내게 다가올 변화는 심각하고 그에 대한 대응은 어렵다는 것이리라.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연초 한낮 내 방에 그냥 홀로 무료하게 앉아 있을 때다. 문득 ‘노겸(勞謙)’이란 두 글자가 뇌리에 떠올라와 그 의미가 깊이 각인된다. ‘근로’와 ‘겸손’이니 언뜻 알아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앞으로 내 호(號)로 삼기로 작정하였다.
‘열심히 일하는 겸손’이요 ‘활동하는 무(無)’요 ‘아상(我相) 없는 노동자’, ‘노예 노동자’의 옛 뜻이기도 하다. 도대체 내가 그 동안 얼마나 게을렀으면 ‘근로’가 나오고 또 얼마나 오만방자했으면 ‘겸손’이 나오랴 싶었으니 앞날이 더욱 걱정되었다. ‘근로’와 ‘겸손’ 아니면 갈가리 찢겨나가 살 수조차 없는 운명이라는 내 맏아들 놈의 연초 카드점괘가 이미 나와 있었으니까.
물론 나도 안다. 『주역(周易)』의 겸괘(謙卦)는 노겸군자(勞謙君子)가 곧 타고난 천자(天子)이면서도 남의 밑에서 고개 숙여 근신하며 온갖 선행을 다 베푸는 그 아름다운 법(法)으로 결국 하늘을 차지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뜻에는 일말의 흥미도 없다. 나 같은 뼛속까지의 쌍놈, 민중에게는 도무지 안 맞는 뜻풀이기 때문이다. 그저 윤리적 패러다임으로서는 ‘근로’와 ‘겸손’일 뿐이니 내게 지금 결핍되어 있고 앞으로 그렇게 일관하여 고개 숙이고 살다 가지 않으면 큰 실수를 범할 것이 빈번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굳세게 견지할 따름이고, 미적 패러다임으로서는 곧 ‘활동하는 무(無)’의 뜻이리라!
언어작업에서 훨씬 더 여백(餘白)과 틈과 침묵을 살리고 설명을 없애며 말을 줄이는 대담한 소통성(疏通性)으로 ‘흰 그늘’과 ‘한’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고 삶의 내면에서 무궁무궁 저절로 살아 생성하게 하는 그런 텅 빈 창조력의 언어구조를 갖추고 닦으라는 가르침으로 일단 받아들일 따름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이제 작년 개천절에 공언(公言)한 대로, 아버님이 지어주신 이름, 꽃 한 송이 ‘영일(英一)’로 돌아가고자 한다. 내 인생과 민족 역사에 작고 소담하고 예쁜 삶의 꽃 한 송이만 피우고 가겠다는 조촐한 서원과 함께……. 그렇게 하여 결정된 것이 바로, 노겸(勞謙) 김영일(金英一)이다.
그런데 여러 친구들이 말한다. 영일은 너무 애 이름 같으니, 그냥 한글로 ‘김노겸’이라 부르면 어떠냐는 것이다. 그 편이 무던하고 친밀감이 있어 좋다는 것이니 원컨대 부디 앞으로는 이 이름을 즐겨 불러주길 바란다.
○ 공재(空齋) 진영근의 호기(號記)
다음은 전각가 ‘아주 특별한 선물 심인당 도장가게’의 주인 진영근이 ‘내 별명에 대한 사족’이란 이름으로 간략히 적은 호기다.
아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없이 텅 빈 놈이라는 뜻으로‘空齋’라 ‘빈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木口’, 부평초 같이 살아온 지난날들을 되돌아 본다는‘顧萍軒’,
향기롭고 거창스런 理想은 엄두도 못낸다고 ‘察地人’, 허허로이 길을 걸어 간다는 ‘空步’,
수리산을 소요하면서 ‘수리산지기’, 마음을 새기고 마음에 새긴다는 ‘心印房’,
月·木房을 주재하면서 ‘月木舍主’, 분분한 세상사 능히 볼 수 있으나 굳이 말하지 않으리라
‘수리산 벙어리’, 虛名을 쫓다가 문득 깨달은 빛 좋은 ‘개살구’, 천둥에 개 뛰듯 살아온 부질없는 人生流轉을 되돌릴 수 없음을 지각하였는 바 이제부터는 ‘달팽이 걸음’, 사과나무도 시궁창도 다 보고 여기까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