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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체육대회에서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마음은 낭만이 가득한 소년 그대로인데,
정년 퇴직의 그 날이 며칠 안 남았습니다.
새해 들어 [학교 이야기]에 올린 글이 없는 것은 그만큼 우리 학교와 정을 떼기 위한 게으름이라고,
웃어주기 바랍니다.
아래 글은 [육하학원 설립 30주년]을 맞아 내가 쓴 <남기고 싶은 이야기>인데, 여러분과의 마지막 인사로 삼으려고 합니다.
늘 나를 지켜봐 주신 모든 분들에게 '고맙습니다." 라고 고개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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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일 야사(野史)] - 남기고 싶은 이야기
1.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로 다녀야 했던 제자들
< 겨울날,
수업을 하다가 문득 귀를 기울이면
전신주를 울리는 겨울바람 소리가 저리고,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은 가녀린 소녀들,
새싹처럼 순한 소녀들이 내 곁을 떠나 교문으로 나가서
바람 휘몰아치는 저 세상에서 견뎌날 수가 있는 것일까,
걱정으로 목이 메고
얼핏 시선을 피해 바라보는 겨울하늘은
새파란 얼음처럼 너무도 차고 딱딱해서
그만 눈을 감았던,그런 때가 있었단다. >
1981년 12월의 어느 겨울날,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전신주 줄을 울리고 유리창을 뚫고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위잉~윙 사나왔습니다.
1회 졸업이 얼마 안 남은 시점이라 그랬는지 그 날 따라 사나운 바람소리가 내 가슴마저 사정없이 할퀴며 이런 감상(感傷)을
일으키게 했나 싶습니다.
졸업이 코 앞에 다가왔는데 대학에 가지 못하고, 방향을 못 잡고 좌절하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시베리아 눈보라 치는 벌판으로 떠나보내는 심정이 가슴 아팠으니까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란 말이 없었던 그 무렵,
평준화 배정을 받지 못한 학생들이 지원하는 특수지 고등학교의 하나였던 상일여자고등학교.
그래서 학생들의 성적은 저조했고,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학교를 못 다니고 서울 곳곳에서 동쪽 끝에 있는 이 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대부분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고,
가족과 이웃의 시선을 의식하며, 따라서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이 저마다의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들도 학생들처럼 특수지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설움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특수지’ 라는 말 때문에 “그 학교가 특수학교라면 인가가 난 학교냐, 실업학교나 전수학교가 아니냐, 졸업하면 졸업장을
주느냐, 대학을 갈 수 있는 학교냐, 선생님들도 교사자격증을 가지고 있느냐.“ 등등 듣기에 민망한 내용의 문의 전화가
많아 선생님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습니다.
성적이 낮은 학생들 중에는 생활자세도 바르지 못한 점이 많고, 통학생이 많다 보니 지각생도 많았습니다.
때는 교련시간에 군인들처럼 조회시간에 열병과 분열까지 있었던 80년대 초,
선도부 학생들이 헌병같은 장비를 갖추고 아침마다 교문에서 등교지도를 했습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삼엄한 경계 속에 각종 검사가 이루어졌고, 고함 소리 속에 머리카락이 잘리고, 뺨을 맞고,
엎드려 뻗쳐에다 빳다까지 그야말로 살벌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예체능 수업시간에는 선생님들과 함께 운동장에 있는 돌을 주워 리어카에 담아 갖다버리고,
삽으로 흙을 퍼서 구덩이를 메우고 발로 다지고, 나무 옮기고 심는 일을 거들며 학교 만드는데 한 몫을 톡톡히 했습니다.
수업 중에는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꾸중이 “너희들 이렇게 쉬운 것도 모르냐, 국민학교 애들도 다 알 텐데”
이런 식으로도 나타나 어린 제자들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습니다.
성적이 나쁘다고 맞고, 복장상태가 불량하다고 맞고, 엎드려 잔다고 맞고, 지각생이 많다고 맞고,
지금 생각해도 참 많이들 맞으며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인권 침해다, 비교육적인 처사다 해가며, 휴대폰으로 사진 찍고, 119 고발까지 벌어질 지 모르지만,
그 때는 선생님들의 횡포(?)를 제자들이 당연히 받아 들여 큰 말썽 없이 교육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어려운 교육환경 속에서도 하나부터 열까지 부족한 제자들을 이끌어 올리기 위해 애 쓰는 신설 특수지학교 선생님들의
헌신과 안타까움을 학생이나 학부모들이나 다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죽 가슴 속에 맺힌 것이 많았으면 제1회 졸업식에서 답사를 읽던 졸업생 대표(정미식)이가
“공부 못한다고 구박하던 저희들을 그래도 잊지 마시고 영원히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했을 때 재학생과 졸업생과 선생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눈물바다가 되었던 그 장면은 영원히 기억에 남아
지금도 뜨거운 눈물을 솟아나게 합니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은 ‘잊을 수 없는 제자들’이라서 졸업하고 먼 훗날 ‘스승의 날’,
사은회를 몇 번 열어 준 제자들은 ‘공부 잘 하던 제자들’이 아니라, 구박(?) 받고 자라던 그 때의 제자들이었습니다.
1회 때, 2회 때 제자들이 아직도 스승의 안부를 묻고, 저녁식사 자리를 만들고, 노래방까지 이어지는 사은 잔치를 베풀어
주어 스승의 가슴 속에 가득한 보람과 함께 제자의 이름을 선명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행복은 물론 “ 감사도 성적순이 아니예요.” 라는 새 말을 만들어 내었다고 봅니다.
2. 학교 만들기에 앞장 섰던 선생님들
선생님들의 근무여건은 참 열악했습니다.
개교한지 1년이 넘었어도 교실 증축공사는 계속되고 있었고, 지하에 임시로 쓰고 있던 교무실도 바닥 공사가 다 마무리
되지 못해 울퉁불퉁한 세멘트 바닥에 물이 새서 질퍽거렸고, 수업 중에도 인부들이 자재를 나르고 작업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으며, 숙직날은 숙직실이 없어 1층 서무실에서 책상을 붙여 놓고 그 위에서 담뇨나 이불을 덮고 자야 했습니다.
그 당시 신입생 모집이나 학교 홍보차원에서 인근 중학교나 고등학교 선생님들과 친선경기(소프트볼과 축구 그리고 배구)를 많이 했는데, 어느 토요일 어린이대공원 옆에 있는 선화예고에서 소프트볼경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경기를 하기 전 학교시설을 둘러보던 중 숙직실을 보았는데, 널찍한 방에 침대며, TV며, 샤워를 할 수 있는 화장실이며
정말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회식을 하는 중에 그 쪽 선생님들이 학교에 대한 불만을 많이 늘어놓는 것을
보고 이상해 하던 기억이 날만큼 우리 선생님들의 고생이 심했습니다.
낮에는 운동장 정지작업과 식목작업 - 지금 중앙현관 앞에 있는 큰 소나무는 원래 학교 뒤편에 있던 농가 옆에 심어져
있던 것을 캐서 선생님들이 밧줄로 묶은 다음 목도를 메고 옮겨다 심은 것입니다.
목도도 난생 처음 메어 본 것이지만, 큰 나무를 옮겨 심을 때는 구덩이에 막걸리를 부어서 나무를 취하게(?) 만들어야 잘
산다는 것도 그 때 보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운동장에 한 줄로 늘어선 은행나무,
어느 날 방과 후 선생님 몇 분과 함께 줄자를 가지고 간격을 똑같이 재고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에 넣고 흙으로 메꾸고
발로 다져서 심은 것입니다.
그 때는 어린 나무라서 한 손으로 작은 나무를 들어 옮겼는데, 지금은 무성한 가지와 잎으로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로
자라 30년 세월의 크기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어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은행나무는 상일여고와 영원히 함께 할 나의 분신(分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중 앞에 있던 온실 공사의 마무리는 남자선생님들이 밤 늦게까지 남아 도와야 했습니다.
불을 밝힌 다음, 인부들과 함께 모래와 시멘트를 나르고 섞은 다음 물을 부어 반죽을 하고 리어카에 담아 나르고,
아마 그 날로 끝을 보느라고 선생님들의 손까지 빌리지 않았나 짐작이 갑니다.
온실 자리를 팔 때는 땅 속에서 석관이 나와 인부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무덤 자리라 꺼림칙해서 더 이상 공사를 할 수 없다는 인부들을 달래기 위해 막걸리와 북어와 사과를 사 다 놓고 제를
지낸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개교할 때 교문은 온실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의 교문 쪽에는 새마을부에서 밭을 만들어 옥수수를 많이 심었습니다.
계분(닭똥)을 사다가 밭에 뿌리면 냄새가 너무 독해 코를 막고 숨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지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남자선생님들은 방과 후면 집으로 퇴근할 생각을 잊은 채 으례히 황혼주 한 잔 하는 풍속을 만들었
습니다.
자가용도 없던 시절이라 주로 상일초등학교 건너편 지하에 있는 ‘상일식당‘에 모여 삼겹살 안주에 막걸리나 소주를 많이
마시며 상일가족의 화목을 다졌습니다.
언젠가는 식당 뒤에 있는 화장실로 가다가 배추밭에다 분뇨차에 모터를 달아 분뇨를 비료로 주는 것을 봤는데,
굵은 호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뇨가 그대로 배추 위로 쏟아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술기운이 넘치면 2차는 길동과 천호동 술집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길동시장 들어가는 골목에 있었던 호프집, 얼마나 자주 갔는지 첫 번째 술집은 ‘OB 1', 두 번째 술집은 ’OB 2'라고 하면
다들 통했고, 3차는 그 골목에 있었던 “유신 빠‘였는데 누가 마이크 잡고 노래를 부르면 모두 한데 엉켜 춤을 추며 하루를
끝내던 때가 무시로 있었습니다.
“지하실의 멜로디“라고 명명(命名)한 선생님들의 불상사도 그 당시 일어난 ‘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신설학교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분투하는 선생님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학교에서 마련한 자리였는데,
체육관 지하실에 무대를 꾸미고 선생님들의 사모님까지 초대한 잔치였습니다.
흥을 돋우기 위해 각 부서별로 돌아가며 장기자랑을 했는데, 중간쯤까지는 춤과 노래와 만담과 즉흥쇼까지 연출하며
폭소와 박수, 웃음소리로 떠들썩 흥겨웠습니다. 무대 위에서 어떤 부서의 춤판이 반주소리에 맞춰 신나게 벌어지고 있었
는데, 갑자기 무대 아래에서 선생님들끼리 싸움이 붙었습니다.
테이블이 넘어지고, 술병이 깨어지고,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터지고, 어찌 된 일인지 선생님들 모두가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주먹질은 없었지만 뒤엉켜 쓰러지고 난장판을 벌이는 주인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맥주와 소주와 '캡틴Q'라는 양주에다 그 동안 쌓인 한(恨)이 섞이다 보니 영문도 모른 채 난장판에 휩쓸리게 되지 않았나,
나의 분석 결과입니다. ^^^
3. 학교 안팎에서 일어났던 갈등과 사건들
학생들간의 갈등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주간부 10학급에, 야간부도 5학급이 있었는데 -야간부는 1992년 평준화가 되면서 모집을 중단했습니다
- 처음에는 교실이 남아서 야간부도 주간부와 같이 한 건물에서 똑같은 시간표로 공부했습니다.
2학년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같이 갔는데 사건(?)은 마지막 날 밤에 있었던 학급별 장기자랑 때 일어났습니다.
15개 학급(주간 10학급 야간5학급)이 공연을 하니까 시간이 너무 걸릴까봐 미리 학급대표와 발표시간을 정해 놓고 시작
했는데도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장기자랑에 이어 벌어질 합동 디스코타임 순서가 가장 중요한 마무리 순서였는데,
밤은 깊어가고, 발표가 끝난 학급은 자기들 방으로 돌아가고 있고, 다짐을 받았지만 제한시간은 지켜지지 않고,
초조한 가운데 드디어 마지막 학급 공연, 역시 시간 초과가 되어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빨리 끝내라고 재촉을 했지만 요지부동, 어쩔 수 없이(?)공연을 중단시키고 디스코타임 순서로 들어가려 했지만,
학생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뒷반(11반~15반)이 야간부라서 차별을 받았다고 여겼는지 야간부선생님들조차 진행이 못마땅했는지 사태 수습에 소극
적인 것 같았습니다. 디스코 타임은 흥이 떨어졌고, 주간부와 야간부의 미묘한 갈등의 단면을 본 것 같은 사건이라 쉬 잊
혀지지 않습니다.
또, 재래파 학생(처음부터 지원한 학생)과 전학파 학생간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전학 오는 학생 중에 우수한 학생이 있으면 오자마자 상위권에 들고, 심지어는 전교 1등도 되니까,
선생님들의 관심이 전학생에게 쏠리게 되고 , 그러면 소외 당한(?) 재래파 학생들의 질투와 반발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내가 맡은 학급의 반장 선거 때도, 그 동안 학생회 간부도 하고 인기가 있었던 재래파 A와, 부산에서 전학 온 B가 후보였
는데, 개표를 중간 정도 진행하면서 남은 투표 쪽지를 보니까 우려했던 대로 전학생 B의 표가 압도적이라 개표를 중단시
키고 B를 반장으로 결정했습니다.
A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담임의 마음이었지만, 다음날 학생지도부 교사가 A의 항의를 받고 진상을 파악하러 나를
찾아왔습니다. 혹시나 해서 보관하고 있었던 투표지를 보여주며 설명하자 나의 결백(?)이 밝혀졌고, 나의 선의(善意)를
알게 된 A와 나의 사제지정(師弟之情)은 졸업 후에까지 이어지는 해피엔딩이었습니다.
통학생이 많다보니 이웃 학교와의 충돌도 자주 생겨났습니다.
이웃 동네인 하일동에 있는 정륜고등학교 학생들과 버스 안에서 주도권 잡기 비슷한 다툼이 일어나면 우리 학생들이
떼를 지어 쳐들어가기도 하고, 그 쪽 학생들도 이에 질세라 우리 학교로 쳐들어 온다는 첩보(?)에 학생부에 비상이 걸리
는 일이 많았습니다.
몇 번 정윤고와 강동고 학생대표들을 초대하여 ‘이웃사촌’의 우정을 들춰가며 만약의 불상사에 대비하느라 학생부선생님
들이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한번은 퇴근 후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는데, 버스 뒤 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다가가 보니 우리 학교 여학생 한 명이 정륜
고 남학생 한 명과 여학생 두 명을 쥐 잡듯이 다루고 있어서 놀랐는데, 더 놀란 것은 그 학생이 바로 우리반 학생이었습니
다. 물론 못 본 척하고 버스에서 내렸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지 혼을 내기는 커녕 자랑스러운 마음이 든 것은 인지상정(人
之常情)이었습니다.^^
지금도 삼일공고 학생들 중에는 우리 여학생들이 지나가면 소리를 지르는 못난 놈(?)이 있지만, 강동고 학생들이 상일여
고 학생들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강동고에 처들어가 강동고 스쿨버스의 유리창을 깨고 발길질을 했던 사건을
보면 유사(有事) 시에는 자매 학교의 몫을 단단히 할 것이라는 예상을 쉽게 하는 증거를 본 것 같아 미소를 짓곤 합니다.
대학입시 철이 되면, 입시 업무를 맡고 있는 대학교수들이 찾아와 교무실에 진을 치고 3학년 담임들을 만나려고 애 쓰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주로 전문대학 교수들인데, 서울 시내에 소재한 대학도 있지만 지방에 있는 교수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전라도 경상도에 있는 교수들까지 찾아와 학교 홍보에 열을 올리며 한 명의 입시생이라도 더 유치하려고 밤
늦게까지 기다리곤 했습니다.
학교성적이 떨어지니까 1회 때는 주간부에도 취업반이 있었고, 일반계열 대신 예체능계열로 방향을 바꾼 학생들 중 체육
지망이 제일 많아 방과 후에는 운동장에서 연습들을 많이 했고, 음악과, 미술 지망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1회 때는 지방에서 올라온 전학파 학생이 전교 1등이었는데, 지금이야 당연히 스카이(S.K.Y)대학으로 진학하겠지만,
결국 동덕여대에 합격하는 영광(?)만을 누렸으니 너무나 씁쓸한 추억입니다.
4. ‘반공(反共)’과 김종성이사장님의 한(恨)
우리 학교의 건학이념은 < 반공. 예의. 질서>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반공(反共)’이 ‘승공(勝共)’으로 바뀌고, ‘숭조(崇祖)’로 다시 바뀌었지만, ‘반공(反共) ‘은 건학이념의
핵심으로 우리들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북한에 남겨 두고 온 ‘여섯(六육) 식구’가 ‘어찌(하 何) 되었을까’,
사모님과 두 아드님과 세 따님은 이사장님 가슴 속에 사무치는 한(恨)으로 응어리졌습니다.
그래서 초대 김종성이사장님의 호가 ‘육하’가 되었고, 학원의 이름도 ‘육하학원(六何學園)’이 된 유래를 짚어보면 한 가족
의 한(恨)과 함께 반공이 강조되는 상일의 교육과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모든 행사 때마다 인사말 속에는 ‘반공(反共)’이라는 단어가 넘쳐나고, 학도호국단이 결성되어 여학생들도 군인들처럼
교련복을 입고 완장을 두르고 각반을 차고 검열을 받고, 제식훈련이며, 열병에 이어 분열까지 받으며 반공정신을 함양
했습니다.
미술시간에는 반공그리기와 포스타그리기, 국어시간에는 반공글짓기와 표어 짓기, 특별활동시간에는 반공웅변대회와,
귀순용사를 초청하여 반공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반공에 앞장 서는 학교로 유명했습니다.
안전기획부장관을 지낸 이종찬선생과, 대법원장을 지낸 이회창선생이 일일교사로 우리 학교를 찾아와 학생들을 지도해
주었으며, 북한에서 귀순한 황장엽총서기도 몇 번씩 우리 학교를 방문하여 북한의 실정을 폭로해 주었습니다.
황장엽총서기가 방문할 때면, 전날부터 경호원들이 학교를 찾아와 물샐틈 없는 경호벽을 쌓느라 촉각을 세우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반공을 위해 근검절약을 실천하시던 김종성이사장님을 회상하면 잊지 못할 몇 장면이 떠오릅니다.
학교 앞에 있던 사택은 전기를 아끼느라 불을 켜지 않아 항상 어두웠습니다.
언젠가 화장실에 들어가 보았는데 변기 앞에 두루마리 화장지 대신에 얇은 일력(日曆)을 반으로 잘라 철사에 꽂아 놓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사장댁에 일력이라니 믿기 어려웠지만, 또 어느 날 저녁 어두운 방에서 순대 몇 점 놓고 소주 한 잔 드시는 모습을 보면
서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북에 남겨 두고 온 식구를 생각하면 어찌 '맛난 것'이 목구멍을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 날 철사로 꽂아 놓은 일력을 두 장을 떼어 집에 가져온 것은 절약을 본받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2002년 4월, 상일동에 거주하는 주민들 중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육하지원재단]을 창립, 1억원의 기금을 기탁하신 일이나, [육하통일장학회]를 만들어 전국의 고교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반공 논문을 모집, 장학금을 수여하신
일들은 반공을 위한 절약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사례로 내 마음 속에 남았습니다.
만날 때마다 인사를 드리면 “이선생, 잘 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하며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시던 일,
강화도로 교직원야유회를 갔을 때 술 많이 먹으라고 냉면 그릇에 소주를 부어주시며 권하시던 일,
별세하기 얼마 전 수술실로 들어갈 때 ‘전신마취가 아니고, 부분마취라는 거 의사한테 꼭 확인해 줘.”하고 당부하시던
이사장님의 떨리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5. 1992년 ‘평준화 배정’의 감격과, 명문 상일여고로의 도약,
개교 13년이 되던 1992년 3월,
드디어 우리 학교는 평준화 배정 학교로 지정 받아, 첫 신입생을 맞아 입학식을 가졌습니다.
특수지 학교의 13년 설움과 압박에서 ‘해방‘되어 평준화 학교의 ’광복‘을 맞게 된 것입니다.
야간부도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고, 상일고등학교도 삼일공업고등학교로 학교 체제를 전환하여 그야말로 일대 혁신의
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신입생들과 학부모와 불안과 우려를 해소시키기 위해 최대한 우수교사로 담임을 맡게 하고, 밤 10시까지 불을 환히 밝혀
놓고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했습니다.
특별보충수업은 물론이고, 우수학생을 따로 모아 특별수업을 병행했습니다.
선생님들은 13년간 가슴에 쌓인 특수지학교 교사의 한풀이를 하듯 교재연구에 몰두하고, 성적을 챙기고 개인상담에 전력
을 다했습니다. 모의고사 결과가 나오면 전국과 서울학교의 성적 평균과 비교하고, 강동 송파 이웃 여고의 성적과 비교하
는 통계표를 만들었습니다. 과목별 성적 비교를 통해 성적이 뒤지는 학과선생님들의 원인 분석과 대책이 세워지고 다시 다음 모의고사 결과에 기대를 걸며 가르쳤습니다.
성과는 곧 나타났습니다.
모의고사에서 전 과목 모두 상승세를 타더니, 드디어 1994년 평준화 1회 최효정(성덕여중 출신)이가 전국 모의고사에서 1등을 차지하는 경사를 맞게 되었습니다. 전교생들이 모인 전체조회에서 이사장께서 장학금을 수여하시자, 사기 백배,
자신감이 전교생을 향해 번져 나갔습니다.
인근 지역 여고에서도 어느 새 우리 학교와 성적을 비교하며 경계의 빛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맞는 평준화 1회 학생들의 대학입시 결과는 한 마디로 ‘격세지감(隔世之感)’ 네 글자였습니다.
평준화 이전에는 전교 1등이 동덕여고에 들어갔는데, 평준화 1회생부터 포항공대 장학생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스카이대학을 비롯하여 평균 40%의 4년제 대학 합격률을 기록하는 큰 성과가 어리둥절할만큼 너무 감격스러웠
습니다.
1회 때 이화여대만 19명이 들어갔는데, 입시가 끝난 후 분석을 해 보니까, 커트라인 예상을 너무 낮춰 잡은 것이 아니었나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감지덕지(感之德之)’라는 말처럼, “첫 술에 배 부르랴“ 라는 속담처럼 평준화 배정 당시는 첫
경험이라 욕심 내지 않는 안정권 배치가 우선이었다고 아쉬움을 위로해 봅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경사는 이어졌습니다.
수능시험 400점 만점(이지현), 수능시험 전국 여학생 1등(김영신), 연세대 최초의 여자총학생회장(정나리),
육사 여자수석합격(구민정) 등 ‘상일여고’의 명예를 드높인 졸업생들이 연달아 나타났습니다.
특별활동 부문에서도 뛰어나 고교합창단의 선두에서 활약하는 상일여고 합창단 ‘SC'(상일 코러스).
카네기홀공연과 청와대 초청공연과 전국합창대회에서의 화려한 최우수상, 대상(大賞) 수상에 빛나는 우리 학교의 자랑
입니다.
<특화교육과정 학교>로 지정 받은 미술반의 경사는, 2008학년도 홍익대 미술과 5명 합격을 비롯하여 36명이 미술대학에
진학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일반고교에서는 이룰 수 없다는 편견을 깨뜨리면서 명문 상일여고의 명성에 큰 보탬을 주었습
니다. 지하에 계신 김종성 초대이사장님의 웃음 짓는 모습이 선연합니다.
6, 김영식이사장님의 취임과 제2의 개교(開校)
그리고 2005년 4월 취임하신 제2대 김영식이사장님께서는 “즐거운 학교”, “가고 싶은 학교”를 목표로 내세우면서 학교
시설 환경 개선에 획기적인 지원을 해 주셨습니다.
높낮이 조절하는 새 책상과 걸상을 시작으로, 칠판과 게시판 교체, 사물함과 미닫이문 설치, 복도용 냉온수기 설치와
화장실 온수 공급, 전 교실에 멀티 스크린과 빔 설치, 교실 바닥 공사는 벌써 끝냈고, 영어전용교실과 음악실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대입수능시험을 치르기 위해 우리 학교에 온 타교 수험생들과 감독선생님들이 한결같이 우리 학교의 우수한 시설에 감탄
하면서 부러워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옛날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진 많은 시설과 기자재는 교육 효과를 높이면서 대학 진학에 연계되어 상일의 미래를
탄탄하게 닦아주는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또, 교문을 넓히고, 주차장 바닥에 보도블럭을 깔아 선생님들의 깨끗하고
안전한 주차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사장님의 이 모든 지원은 우리 학교의 자랑인 교사간의 화목한 분위기, 30여년 동안 어려운 여건을 함께 극복하면서 쌓
아온 동료애를 더욱 두텁게 해 주는 촉매가 되어 근래 교육현장에서 벌어지는 이념 논쟁이나 편 가르기식 갈등과 혼란을
막고, 우리 상일여고만은 한가족의 훈훈한 정을 나누는 ‘즐거운 학교’를 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다해 주고 계십니다.
이사장님과 3개 학교 선생님들이 함께 하는 겨울 세계여행은, 영하 40도가 넘는 눈보라치는 시베리아에서, 뜨거운 태양
내리쬐는 열사(熱沙)의 땅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죽음조차 신의 축복으로 받아 들이는 인도여행으로 연속되었으며,
다가오는 2월에는 일본 북해도 눈축제여행으로 이어져 한솥밥 식구의 훈훈한 정을 나누는 학교로 나타나 이웃학교의
부러운 시선을 거듭 받을 것입니다.
이제 2010년 신입생부터는 <학교선택제> 실시로 중학생들이 가고 싶은 학교에 지원하는 체제로 바뀝니다.
그 선택 현황에 따라 ‘좋은 학교’인지 아닌지, 쉽게 말해 명문고인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낙타고개 너머에 있는 우리 학교는 중학생들이 첫째로 꼽는 교통편에서 절대 불리한 여건 속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가 자체 개발한 <개인별 맞춤형 진학자료>가 서울시교육청의 우수 자료로 선정되어 서울시내 모든
고등학교에 제공되고 있고, 그 동안 우리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보여준 대학 진학의 성과와, 좋은 시설과 환경 속에서 공부
열심히 하는 ‘즐거운 학교’의 이미지가 중학생들의 선택을 많이 받는 명문학교가 되리라, 간절한 염원과 함께 확신합니다.
7. 30년 세월이 흘렀어도 제 자리를 지키는 상일여고
상일여고 제1회 졸업앨범을 펼치면, 72명의 선생님들 얼굴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교에 남아 있는 선생님들은 14명 뿐입니다.
나를 비롯하여 정민채 김병태 이덕구 서군영 문선주 박정수 곽창규선생님 8명이 여고에 근무하고 있고, 공고에 이상열
한미원선생님 2명, 여중에 김미화 송영미 하윤정 송주의선생님 4명만이 학교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제자들도 선생님들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지금 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한향심은 1회 졸업생인데, 3학년 5반 반장을 할 때 담임선생님이 바로 나였습니다.
19세 꽃다운 소녀가 어느 새 46세 중년부인으로 바뀌었고, 나는 ‘동현이엄마‘라고 새 이름으로 부릅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때의 나의 출근길 -둔촌동 주공아파트 집을 나와, 걸어서 길동 정류장에 도착, 573번 시내버스를
타고 낙타고개를 넘어 상일동에서 하차, 길을 건너 구천초등학교(=상일초등학교)를 돌아 흙길을 밟으며 구불구불 , 돼지
우리 냄새가 심하게 났던 상일교회를 지나 나타나는 상일여고의 4층짜리 건물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더욱 또렷이 떠오릅
니다.
여고 평교사 근무를 시작으로 상일고교의 개교 교무부장으로, 다시 여고의 학생부장과 교무부장에서 교감과 교장으로, 또 상일여중의 교장도 했으니까 나는 온전한 육하학원 선생님이라고 자평할 수 있습니다.
나의 전성기와 정년 퇴직까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상일여고는 지난 역사처럼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합니다 ,
이제 나도 곧 ‘상일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 세상에서 자기 몫을 다해가며 살아가고, 후배 선생님들이 더 열심히 제자들을 가르치고,
내가 심은 은행나무며, 화단의 꽃들이 잎으로 꽃으로 열매로 모습을 바꿔가며 영원히 상일을 지키리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육하학원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009. 1월에> ****
첫댓글 선생님~ 30년이란 긴세월 한결같이 저희 상일여고를 진심어린 사랑으로 지켜주심에 깊은 감사를드립니다 학교에서의 많은일들과 사건들을 글을통해 뒤늦게알게돼서 그동안 선생님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아파요ㅠ~~ 일찍알았다면 좀더 착하고 말잘듣는 제자가됐을텐데..... 저희를가르쳤던 몇몇선생님들의 성함을들으니 그때의 학창시절이떠오르며 당장이라도달려가 뵙고싶은마음이 굴뚝같네요ㅎ 건강들하시죠?? 참" 정년퇴직이 얼마남지 않았다고하시는데 정확한날짜는 언젠지요? 그동안 일하시느라 고생많으셨으니까 앞으로남은인생은 건강에 각별히신경써주시고 뵙는그날까지 안녕히계세요 *^ㅇ^*
가장 먼저 글을 올린 미영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이상하게도 학교를 떠난다는 섭섭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직 학교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 [굿바이 미스터 칩스]라는 미국 영화에 나오는 칩스선생은 정년퇴직하고 나서도 학교 앞 하숙집에서 살며 학교 시간표에 맞춰 똑같이 살았는데 나는 당분간 학교 생각 안 하고 살고 싶구나. 그래도 내 마음 속에는 우리 학교가 영원히 자리잡고 있는 것, 너도 알겠지? 이제 봄이 멀지 않았다. 너도 나도 새 시간, 새로운 희망으로 살아가기를 빈다. 고맙다.
"굿바이 미스터 칩스"영화 시간내서 꼬~옥 보도록해볼께요 ^^ 학교를떠난 새로운삶의 선생님모습 앞으로도계속 저희들에게 소식 알려주세요 글구~선생님 항상 행복하세요 *^ㅇ^*
이렇게 많은 일화를 간직한 학교인줄 몰랐습니다. 평준화 둘째해에 입학해서.. 따가운 시선과 수근거림에 창피하게만 생각했던 학교였는데, 지금은 자랑스러운 마음만 남았습니다. 모두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선생님 뵈러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멀지도 않은곳에 살면서도.. 이렇게 찾아가기 힘든길인줄 몰랐습니다. 이번에는 '스승의날'을 핑계로라도 찾아뵈어야겠네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쓰신 글보니 추억의 그리움이 밀려오네요 정말 오래만에 들어본 상일교회, 그옆으로 떡볶기 가게에서 경숙이랑 라면도 무지 사먹었거든요 그동안 많은고생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