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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도(修羅道)
김 정 한
“저 애씨는 시집 몬 갈까봐 불공 디리러 왔나? 이 비좁은 방에 온!”
“와 그라노, 우리 부체새끼를…… 그라지 마라, 내 손지다.”
아직 불당답게 채 꾸며지지도 않은 방 안벽받이에 안치된 커다란 돌부처 곁에 빠듯이 끼어 앉아 있는 소녀는, 겨우 여남은 살 될까 말까 하는 나이다. 소복 차림의 보살할머니들이 웅성대는 양을 눈여겨 보고 있던 소녀는, 별안간 자기를 놀려주는 핀잔 소리에 눈이 오끔해지다가, 할머니 가야부인의 감싸주는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딱다그르 하고 웃는 바람에, 못내 수줍어진다. 소녀의 얼굴보다 더 붉게 물들여진, 수박처럼 둥글둥글한 종이등들이 천장이며 뜰안을 온통 메우고 있다. 관등절의 오후였다.
……분이는 이러한 어릴 때의 아득한 기억을 더듬으며, 할머니 가야부인의 장엄한(그녀는 장엄이란 형용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임종을 지켜보고 있다. 벌써 그녀는 소녀가 아니다. 낭자가 반듯한 색시다.
덩치가 큼직큼직한 아들들이 할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참기 어려운 마지막 고통인 듯 가야부인의 넓은 이마에 잇달아 맺히는 땀방울을 차례로 닦아준다. 눈같이 희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땀기로 인해 이맛살에 착 들러붙어 있다.
멀리서 적을 가상한 훈련 포성이 쿵, 쿵,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려왔다. 아주 정나미가 떨어지는 포성이다. 그 포성이 갑자기 커질 때마다 가야부인은 눈을 힘없이 떠보기도 한다. 그러나 시선은 내처 방향을 못 잡는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눈이라든가 이마에는 그렇게 열반의 고통이 뚜렷한데도 불구하고, 굳게 다물린 입 언저리만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금방 미소라도 떠오를 듯한 부드러운 모습 그대로다.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그녀의 머리맡에서 『반야심경』을 읽고 있는 안면 있는 스님의 나지막한 목청은, 분이의 생각을 줄곧 아기소녀 시절로 이끌고 갔다.
할머니의 얼굴에 미륵불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져 보였다. 할머니가 미륵불로도 보이고, 미륵불이 할머니로도 보이고……
할머니가 아직 젊었을 때의 일이었다. 강 건너 고암삼이 이쪽 미륵당 아래의 강 구부렁이로, 그 웅장한 그림자를 쑥 내밀고 있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물빛이 한결 시퍼런 강 구부렁이 쪽으로 사타구니처럼 벌어져간 골짜기의 오목한 부분에, 미륵당이란 절이 납작하게 앉아 있다. 그래서, 모신 미륵불은 어지간히 크긴 해도 절 이름을 미륵암이라고 부르지 않고, 보살할머니들은 그저 미륵당이라고만 불렀다. 그마저 선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둘레에 아직 커다란 수목들도 없고 해서 절 같은 맛이 나지 않고, 웬만한 집 재실만도 못한 당집인데, 그것을 에워싼 청룡이니 백호니 하는 산등성이에 철따라 핀 진달래꽃들이 어쩜 석가여래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사월 초파일 같은 기분을 느끼게도 했다.
분이는 좁은 길섶에까지 피어 있는 진달래꽃을 조갑지 같은 손에 꺾어들고 할머니 가야부인을 따라갔던 것이다.
“저 새가 암매 서천 서역국에서 오는 샌지도 모르지. 꼭 이때가 되면 와서 저렇게 울어쌓거든!”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분이는 무슨 뜻인지 잘 못 알아채고, 그저 뻐꾹뻐꾹 하는 소리만 들었다. 이쪽 산에서도 울고, 강 건너 고암산 쪽에서도 울어댔다. 어떤 소리는 아주 더 먼 데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건 아마 할머니가 가끔 말씀하시던, 고암산 저쪽 백운암인가 하는 절이 있는 무척산에서 들려오는 건지도 모른다고 분이는 생각했다. 가뜩이나 큰 키에 언덕길을 올라서는 할머니를 돌아보았을 때, 분이는 우리 할머니가 제일이다 싶었다. 다른 집 할머니들보다 얼굴도 희고 키도 훤칠할뿐더러, 남들이 잘 안 쓰는 처네*까지 꼬박꼬박 쓰고 다녔다. 자줏빛 천에 이마를 반듯하게 가로지른 새하얀 처네 동정이 한결 의젓하고 깨끗해 보였다.
그러한 할머니가 미륵당 문간을 들어서자, 안에 있던 할머니들과 스님은 모두 일어서며 반기었다.
“가야마님 오십니꺼!”
“설판재자* 오시네요!”
그녀들은 할머니의 친가가 김해라 해서 가야마님이라고 불렀다.
“아이고 모두 일찍 오싰네요!”
할머니는 분이의 손을 놓고서 그녀들의 손을 두 손으로 쥐었다. 아는 사람을 대할 때 그러는 것이 할머니의 버릇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처네를 벗기가 바쁘게 미륵불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분이의 손을 다시 잡고.
“알제. 부체님 앞에서는 절을 세 분 한데잇!”
이렇게 시켜가며, 예배를 마친 뒤, 여럿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앉자, 좌중은 다시 웃음과 이야기판이 되었다. 그래서 사월 초파일은 석가여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라기보다 시골 할머니들의 환담의 날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들의 이야기며 웃음들이 시종 자기 할머니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서 분이는 한결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가야부인이 남들로부터 그러한 추킴을 받게 될 만한 원 내력을 알게 된 것은, 분이가 훨씬 더 자라서의 일이었다. 분이는 제법 처녀티가 날 때까지도 곧잘 공양미를 머리에 이고 할머니를 따라서 미륵당을 찾아갔던 것이다. 할머니는 원래부터 불교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였다. 실은 그 미륵석불만 해도 수백 년 동안 땅속에 깊이 묻혀 있던 것이, 그와 같은 신심의 공덕으로 가야부인의 눈에 처음으로 뜨인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고, 그 미륵당이란 암자도 실은 할머니의 설두로 세워진 절이었다. 분이가 알기에도 할머니는 꼬박 십 년을 불교식 일종*이란 걸 마쳤던 것이다. 할머니는 분이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불교에 관한 것 이외에도 할머니는 구수한 이 야기들을 곧잘 하였다. 그러나 분이가 할머니를 특별히 따르고 좋아하게 된 것은, 흔히 보살할머니들이 치켜세우는 그러한 이유에서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것도 중대한 이유의 하나임에는 틀림 없었겠지만, 분이에게는 그보다 할머니가 하시는 모든 일들, 즉 할머니의 전생애가 대견스럽고 우러러보였던 것이다.
사실 분이는 할머니의 얘기라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를 판이었다. 그만큼 할머니는 다른 집 할머니들과는 달리, 생애의 폭이 넓고 깊었던 것이다. 괴로운 과거와 의젓한 처신들이 많았다. 할머니가 시집을 온 것은 한일합방이 있은 다음해라고 한다.
“시집올 때는 꼬박 사흘이나 안 걸렀디이나!”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아마 열 번도 더 했을 것이다. 이녁 동서끼리는 물론 장가를 들어서 애까지 둔 아들들도, 모여 앉으면 그런 얘기를 묻고 또 묻곤 하였다. 몇 번 들어도 싫지 않은 얘기라고, 분이도 오는 잠을 참아가면서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철이 애비(큰아들)는 그때 배에다 꽉 댕이(동여)매고 배를 안 탔디이나……”
할머니의 얼굴에는 그 당시의 결심 비슷한 빛이 퍼뜩 지나갔다. 옛날 ‘가야국의 자리인 김해가 안태본*이라 해서 가야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지만, 할머니의 친정 곳은 김해 고을에서도 저 남쪽 끝에 가 붙은 명호란 소금 곳이었다.
할머니의 친가에서도 소금을 구웠다고 한다.
“신도란 섬에 가면 우리 염전이 제일 킀지!”
할머니는 고향 얘기를 할 때는 염전 얘기를 빼놓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미륵당 길목인 태고란 나루터에 그곳 소금배가 와닿아 있는 걸 보면, 할머니는 곧잘 달려가서, 아무개 무쇠가마에 불 들었던가, 띠밭등 아무개 잘 있던가 하고, 친정 소식을 깍듯이 묻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러이더, 그러이더” 하고 대답하던 뱃사람들의 우스꽝스런 사투리를 분이는 재밌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런 먼곳에서 차도 발동선도 없던 옛날에 바다 같은 강까지 건너가며 시집을 오자니 사흘이 걸렸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말로는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길길이 자란 갈밭 속을 십 리도 더 빠져나와야 되는데, 그 갈밭 속 길이란 게 또 예사로 미끄럽지가 않은 데다, 돌이 지난 첫아이까지 달고서 가마를 탔으니까, 네 사람이 메는 가마라 하지만 교군꾼들이 땀을 팥죽같이 흘렸더란 거다. 게다가 강기슭에 나와서도, 하필 시위*가 내린 위에 바람까지 어떻게 사나웠던지, 배끌기 (배에 줄을 매어 어깨로 끄는 사람)들의 어깨가 뭉개질 정도가 되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두 차례나 팟자를 놓았다*고 한다. 이러다간 아무 일도 되지 않으리란 공론이 돌아서, 결국 시위너울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는 판인데, 만약에 파선이 되거나 한다면 아기와 함께 죽을 작정으로 신부(할머니)는 젖먹이를 자기의 앞배에다 친친 동여매었더란 거다. 그때만 해도 할머니의 친정은 명호서도 울리던 집안이라, 배도 예사 크지 않은 고물대 이물대가 다 갖춰진 큰 배였지만, 덩그런 사인교에다 상객, 몸종, 하인, 교군꾼 들까지 합쳐서 자그마치 일행이 열다섯도 넘는데, 오라범이 타신 청노새를 비롯해서 말까지 세 필이나 실어놓았으니, 그런 난리가 어디 있었겠느냐는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나불이 딜이닥칠 때마다 하님들은 상이 새파래가지고 떨어대지, 말은 하늘을 치다보고 홍호야 하고 울어대지…….”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에 겁을 내다가,
“제우(겨우) 황산 앞벌에 배가 밀쳐 닿자, 인자는 살았다 싶으더구만!”
하고 숫제 그때의 기쁨을 얼굴에 되살리는 것 같았다.
“할매는 그때 안 무섭던기요?”
듣고 있던 분이가 한마디 끼우면,
“와 안 무섭아! 간이 콩낟 같았지. 큰머리를 해노니 고개는 아프고…… 그러자 황산 장터로부터 시갓댁 마중꾼들이 달려오는데……”
할머니는 어제 일같이 눈에 선한 모양이었다.
“양편 종년들이 우리 애씨 내 모시겠다 하고 싸움들이 벌어지고…….”
이 대문에 가서는 언제나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서울로 빠지는 국도라고는 해도 그 당시의 ‘황산 베리끝’ 하면 좁기로 이름난 벼룻길*로서, 시가측에서 마중나온 사람만 보태도 서른 명이 넘었을 텐데, 구경꾼까지 합치면 줄잡아도 오륙십 명 가까운 사람이 외줄로 사뭇 늘어섰다고 하니, 과연 얼마나 볼 만했을까, 분이는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또 못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이 거추장스럽고 흐들갑스럽던 우귀* 행렬이었건만, 정작 가야부인이 실려간 허진사댁은 그때만 해도 여간 까다로운 유교가문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때 요부하던 가산마저 거의 탁방이 난* 무렵이었다. 물론 이런 정도의 사정은 친정 오라범으로부터 미리 듣고는 있었다.
칠보화관의 구슬잠이 떨리는 대례를 마친 뒤에도 고풍을 따라 삼년을 친정에서 묵는 동안, 한 해 두어 번씩은 으레 찾아와주시던 시아버지의 얼굴은 익혀 알았지만, 우귓날 그 앞에서 새삼 큰절을 드릴 때는 어련히 내리떠 보실 눈이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오냐, 수로에 고생이 많았겠구나. 시할아버님이 못 오셨으니 절은 내가 먼저 받게 됐다마는·…‥”
시아버지 오봉선생 (오봉산 밑으로 오고부터 부른 호라 한다)은 점잖게 닦인 말씨에 약간 울적한 표정을 짓다 말았다. 역시 고풍 따라 시집온 사흘째 되는 아침부터 가야댁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우선 훤칠한 키가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데리고 온 몸종 이외에도 삼월이니 구월이니 하는 부엌식구들이 있긴 했었지만, 가야댁은 부엌 일을 그녀들에게만 맡기지는 않았다. 어른들의 식성을 알고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시어머님은 내가 간을 본 국맛을 용키도 알디이라.”
할머니는 이런 말을 자랑삼아 하였다. 고을에서 알려져 있는 명문이라고는 해도, 시할아버님이 왜놈들의 등쌀에 못 이겨 늘그막에 서간돈가 북간돈가로 떠나고, 시아버님이 북정이란 데서 그곳으로 이사를 온 뒤는, 집도 그저 그렇고 해서 돌담을 사이로 한 이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중문, 대문이 없는 그런 집이었지 만, 가야댁은 요만치도 꺼림칙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이카네 우리 분이의 고조할배나 징조할배는 참 훌륭했었지. 더구나 고조할배는 진사 급제꺼정 해서도 베실을랑 하시지 않고서……”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을 자랑인 양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고조할배는 머 한다고 간도란 데로 갔있덩강요?”
“그건 니가 좀더 크야 안다.”
해놓고서도, 이 내 덧붙였다.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뺏고서 미안새김 겸 입이라도 틀어막아보겠다고 베실아치나 이름 있는 양반네들에게 ‘합방 은사금’ 이란 걸 내주었는데 그 고조할배는 그 돈을 더럽다고 그 자리에서 되돌려주었더란다. 그러니 그놈들이 좋다 캤겠나. 그길로 밉비이다가 할 수 없이 그만 조선땅을 떠나싰다고 안하나!”
아직 철이 안 든 분이는 간도란 데가 어딘지, 또 무슨 뜻인지 자세히는 몰랐었지만, 아무튼 고조할아버지는 조금 무서운 어른이었나보다 생각했다.
시아버지 오봉선생은 그러한 아버지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만주 땅을 헤매었다지만, 찾은 뒤에도 결국 모셔오지는 못하고 돈만 작살을 내었다고 한다. 요컨대 이것이 일본의 식민지가 됨으로 해서 허진사 집이 겪은 첫번째 수난이었다.
“하지만 그란다꼬 누구 하나 감히 참견할 사람도 없었지!”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 할머니의 시아버지 ―그러니까 분이의 증조할아버지 오봉선생도 고조할아버지 못지않게 무서운 어른이라고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분이의 아득한 어릴 적 기억 속에도 증조할아버지의 파르스름한 눈빛이 유달리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한 오봉선생이 되고 보니, 왜놈들이나 그들의 앞잡이들의 비위에 맞을 리 없었다. 게다가 소위 합방 이후 낙동강 연안 일대의 그 질펀한 갈밭들이 모조리 동척 (東拓)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이내 그들의 논밭이 되어가는 꼴을 보고는, 당신은 당신대로 더욱 참을 수가 없는 듯이, 툭하면 구두덜거리며* 어디론지 핑 떠나기가 일쑤였다. 그러자니 사실 살림이라고는 깍듯이 돌아볼 경황도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집안 식구들도 자연 그렇게 된 어른에게 기댈 도리가 없어지고 도리어 세상을 등진 듯 새침하게 세월을 보내는 그의 비위나 거스를까 조마조마할 따름이었다.
“우짜다가 화를 내실 때는 꼭 벼락이라도 떨어지는 것 같디이라. 목소리나 비미이(예사로) 킁나! ‘못난 것들!’ 하고 호통을 치실 때는 그저 온 집이 쩌렁쩌렁 울리디이라.”
할머니는 이런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두려운 반면 자기에게는 이를 수 없이 고마운 시아버님이었다는 말도 잊지는 않았었다.
“야야, 춥다. 어서 방에 들어가거라. 와 부엌사람들한테 일을 맡기지 않고서…….”
저녁 일이 늦을 때는 이렇게 나무람 겸 위로를 해주시더란 것이다. 그러면서 때로는 가벼운 한숨을 쉬곤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며느리 가야댁은 일을 덜 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웬만한 가문의 부녀자들은 비록 굶는 한이 있더라도 손끝 하나 꼼짝하지 않는 것을 무슨 자랑처럼 여기었지만, 그녀는 타고난 천성이 그러질 못했다. 집안 형편을 따라서 진일 마른일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해내었다. 일을 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긴다거나 꺼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찍 배우지 못한 일이라도 이내 손에 익숙해졌다. 머슴이나 부엌식구들이 도리어 송구스럽게 여길 정도로 부지런했다. 벌써 그녀는 한다한 양반의 집 며느리가 아니라 흔해빠진 농사꾼의 마누라처럼 되어갔다.
남편인 명호양반은 그저 미안스런 눈치만 보였다. 그는 소위 양반의 집 맏아들로서 층층시하에 눌려 살아온 처지라, 대소사를 막론하고 어른들의 눈치나 살필 일이지, 이러쿵저러쿵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실 그는 부인 가야댁보다 나이도 두어 살 아래였을 뿐 아니라 이녁 할아버지나 아버지 오봉선생에 비하면 위인이 그저 순하기만 했지 아직은 무슨 일을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가 못되었다.
시아버지 오봉선생이 멀리 출타를 할 때는 마누라보다 자부인 가야부인을 꼭 불렀다.
“야야, 내 옷 좀 챙겨오너라. 여분이 한 불쯤 더 있었음 좋겠다.”
애당초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누가 따르기는커녕 배웅도 멀리 못 나오게 했다.
“아부이 잘 다녀오이소.”
대문 밖에서 그저 이럴라치면,
“오냐, 집 잘 지켜라.”
하고는 돌아도 안 보고 횡 떠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아버지가 안 계시면 가야부인이 실제 주인 구실을 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명호양반은 아직 글만 읽는 서생인데다 시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워낙 눌려서만 살아오던 분이 돼서 매사에 자기의 의견이라고는 내세우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어머니라고 의향을 물으면,
“내가 머 아나, 니가 알아서 해라.”
고작 이런 투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결국 가야부인은 집안 살림살이를 온통 도맡듯이 되어버 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데리고 온 몸종을 이녁 딸처럼 키웠다. 삼월이 구월이도 빨리 제 갈길을 가야 된다고 하였다. 그녀는 종이라 해서 그녀들을 맘대로 부리거나 하시하지는 않았다. 원래 마음이 너그러운 데다 신심의 탓도 있었으리라. 길쌈철이 되면 그녀들과 한자리에 어울려서 일을 거들었다. 무릎 위까지 살을 드러내놓고 모시나 삼을 흠빨아가며* 뱌비쳐* 이을 때는, 시어머니의 눈이 둥그레지기도 했지만, 가야부인은 샌님들이 타고 다닐 마필이 없어진 처지에 상일이면 어떠며, 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눈치를 일부러 비치기도
했다.
“나무―아미 타불!”
시어머니의 입에서 이런 탄성이 자주 새어나왔다.
그러나 허진사댁의 불행은 이것으로써 끝나지는 않았다.
가야부인이 시집온 지 만 구 년째 되는 해였다. 만주땅에 가 계신다던 시할아버지가 거기서 무슨 강습소를 꾸몄다던가 독립운동을 한다던가 하는 소문이 들리더니, 결국 일 년 전에 서간도에서 유골이 되어 돌아오고, 시아버지 오봉선생이 그 유골을 안고 온 다음해에는 삼일 만세사건이 일어났다. 이 만세사건에 오봉선생은 둘째아들― 그러니까 가야부인에게는 바로 손아래 시숙인 밀양양반을 잃었다. 왜놈들의 총질에 생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이태를 연거푸 이런 참변을 당하고 나자, 허진사댁은 문자 그대로 쑥대발같이 되었다. 온 가족이 죽은 상이 되었다기보다, 분노를 머금은 슬픔이 얼굴마다 사무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허씨 일문만의 슬픔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의 슬픔이기도 했다. 적어도 오봉선생의 예와 다른 태도에는 그런 티가 뚜렷이 엿보였다.
그래서, 만주 눈벌에서 시할아버지의 유골을 찾아왔을 때나, 읍내 장터에서 피투성이가 된 시숙의 시체를 모셔왔을 땐 일제의 날카로운 감시 속에서 내용만은 고을이 들썩하게 소위 사회장이란 게 치러지긴 했지만, 그런 정도로써 유족들의 원한이 풀릴 리는 없었다.
“왜놈들의 총질과 미쳐 날뛰는 칼날에 무참하게 터지고 찢긴 아드님의 시체를 보시자마자 시어머님은 그대로 넋을 잃었디이라. 이놈들아 나라를 뺏음 좋기 뺏지, 와 금덩어리 같은 내 자식을 이렇게 쥑있노? 하고 그만 그 자리에서 안 자물시 (까무러쳐)버리나!”
가야부인은 그때 일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목맺히는 소리로 눈물까지 글썽거리었다. 분이도 나이 들어서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할머니를 따라 눈물을 지우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부터 시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다가 결국 종신 속병을 얻게 되고, 시아버지 오봉선생은 돌부처처럼 입을 다물었다. 가야부인은 서른도 채 못되는 나이에 그러한 시부모를 모시고 연방 기울어져가는 집안을 거의 혼자서 다스려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이미 기울어진 가세에 권속만 웅성거릴 필요가 없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삼월이는 곧 짝을 지어 내보내고 구월이는―육순이 넘도록 부려온 종이라 아쉰 대로 평생 입을 옷가지까지 지어서 제 아들에게로 돌려보냈다. 많잖은 농사에 머슴도 여럿을 둘 필요가 없었다.
가야부인은 직접 안 내던 모도 내고, 길쌈도 하였다. 길쌈은 집안 식구들의 입성을 마련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것으로써 아이들의 학비에까지 보태었다. 이렇게, 손아 날 살려라 하고 애면글면 엉 세판을 허둥거리는 동안에 다시금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녀는 ‘가야댁’에서 ‘가야부인’으로 칭호가 바뀌고, 어느덧 육 남매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자부도 몇이나 거느린 버젓한 시어머니가 되었다. 손자녀도 분이를 비롯해서 여럿이 났다.
“여자 한평생은 그저 그런 기란다. 지내고 보문 잠깐이지만·…….”
결국 허씨 가문에서의 이십 년 남짓한 세월은, 그녀의 이마에 세 개의 긴 주름을 파놓고 갔다. 희번드르하던 살결은 누르퉁퉁하게 탄력을 잃게 되고, 귀밑에는 서릿발이 희끗희끗 드러났다.
허구한 풍상과 세월은 시아버지 오봉선생께도 놀랄 만한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우선 옛날처럼 집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호통을 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소위 양반의 티도 줄어지고, 다만 옛날보다 더 잦게 출타를 할 뿐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표연히 집을 나선 뒤 근 두 달이나 지나서 돌아오던 참인데, 때가 공교히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자기 집 뜰안 광경에 깜짝 놀라 발을 멈추었다.
‘어찌된 셈일까……·?’
달이 찢어지게 밝은 밤이었다. 그렇게 달이 밝은 안마당에 웬 사람들이 멍석을 펴놓고 버릇없이 줄느런히 누워 자고 있지들 않은가! 모깃불까지 희부연 연기를 모락거리고. 옛날엔 없던 상스런 풍경이었다.
“어험 !”
하는 오봉선생의 기침소리에 맨 먼저 뛰어나온 사람은 며느리 가야부인이었다. 마당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옛날 같으면 벼락이 떨어질 일이다. 양반의 집 뜰에 이게 무슨 꼴이냐고!
“웬 사람들이지?”
오봉선생의 말은 생각 밖으로 부드럽게 나왔다.
“저 윗녘에 삼 받으러 갔다가 오는 아랫데 부인네들입니더. 잘 데가 없다 캐서……”
가야부인은 가슴이 철렁한 채 이렇게 일러바치다가, 상대편에서 얼른 무슨 말이 없자 저녁진지 걱정으로 수인사를 돌렸다.
“저녁은 묵고 왔으니, 술이나 한잔 들까? 있는강?”
“농주뿐이옵니더.”
시아버님 이 좋아하시는 약주나 구기자술을 유념해두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 웠다.
“농가에 농주면 족하지. 어디 조금만 가져오게.”
그러고는 곧장 사랑으로 들어갔다.
마나님을 비롯해서 늘어섰던 가족들은 약간 싱거워졌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에 있을 때는, 이녁이 부르기 전에는 아무도 맘대로 들어가지를 못한다. 그것이 당신의 체통이고 또 가풍이기도 했다.
며느리 가야부인이 술상을 보아 갔을 때 그는 며느리를 일부러 들어오라 했다. 이러한 일은 그녀가 시집온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조마조마하던 차에 가야부인은 약간 섬뜩해졌다. 그러나 나들이갓을 관으로 바꿔쓰고 정좌한 시아버지의 말은 역시 예상 외로 부드러웠다.
“게 앉게.”
가야부인이 술을 따라올리자 첫말이,
“윗녘에 삼 받으러 갔다 오는 부인네들이라고?”
“네, 그렇습니더 .”
“응 그래,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구만. 잘했소. 황혼 축객(逐客)이 인사의 도리가 아니거든!”
시아버지 오봉선생은 잔을 한숨에 죽 비우고 나더니,
“이왕이면 저녁 대접까지 해드리지그래?”
“그렇게 했십니더. 어머님께서도 그러라 하시고 해서…….”
“착한 일들을 했구면!”
오봉선생은 모든 걸 너그럽게 촌탁해주면서,*
“그새 별일은 없었는지?”
집안 사정을랑 맨 나중에 물었다.
“네.”
웬만한 일쯤은 있어도 있다 할 며느리가 아니었다. 고등계 형사들이 몇 번인가 다녀간 일은 있었지만, 그런 건 전부터 내처 있어온 일이고 해서 새삼 아뢸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오봉선생은 더 말이 없었다. 그가 물러가라 할 때 그의 장죽에 성냥을 그어 대주던 가야부인은, 그때야 비로소 시아버지의 얼굴이 한결 초췌해져 있음을 발견하고 갑자기 송구스런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노독의 탓만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자, 무언지 모르게 처절한 것이 느껴졌다.
오봉선생은 외로웠다. 가다가 무엇이 마뜩찮거나 몹시 울적해 보이는 날은 곧잘 아버지와 아들의 무덤이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그밖에는 대개 문을 굳게 닫고 사랑방에 집치고 있었다. 그러고는 때묻은 고서들을 뒤적거리거나 혼자서 골패를 달그락거리는 것이 거의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원래 말이 적은 데다 웃어본 적이 별로 없는 그는 더욱 말이 없었고, 웃음이란 건 아주 잊어버린 듯했다. 아직 철부지인 분이는, 찬 기운이 사무친 듯한 파르스름한 눈을 하고 집안 식구들에게까지 말을 잘 안하던 그를, 증조할아버지라기보다 냉담한 사랑손님처럼 두렵고 서먹하게 여기었다. 그래서 그 사랑 앞에 모란이니 영산홍이니 하는 꽃들이 아무리 탐스럽게 피어 있어도, 그가 방에 있을 때는 좀처럼 가까이 가지지 않았다.
이렇게 스스로 세상을 멀리하고 또 가정에서까지 외돌토리가 된 듯한 오봉선생은 그저 친구와 술로써 시름을 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멀리서 친한 선비들이 찾아오는 것을 무척 반가워했다. 옛날 같은 펄펄한 기상은 찾으려 해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술이야 밥이야 하고 서슴지 않고 분부를 내렸다. 여유가 있고 없고는 알 바 아니다. 그러한 유생들일수록 또 오래 머물기가 일쑤였다. 하루 이틀에 뜨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흘도 좋고 닷새도 좋고, 때로는 달포 가까이 치대는 유생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먹는 것만이 아니라 빨래까지 해 당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새 입성도 해드려야 하고, 또 그런 분일수록 떠날 때는 노잣돈도 쥐여주어야 한다.
다행히 가야부인은 일찍이 그러한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아무런 불평 없이 이리 공대를 해갔다. 옛날처럼 나라에서 빌려주는 환자(還子)도 없어진 세월 이라 쌀이 떨어지면 여기저기서 꾸어와야 했고, 닭도 돈도 그렇게 해서 구해와야만 했다.
“말 말아라, 그렇다고 궁한 표를 보일 수도 없고…… 한번은 할 수없이 어른들 몰래 친정 오라범에게까지 사람을 안 보냈디이나.”
할머니는 그 무렵의 고충을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로 해서 가야부인은, 나이 많은 시어머니가 있어도, 동서나 시숙들로부터 자연 가모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인물이나 키만 보아서가 아니라, 제반 범절이 방가위* 의관의 집 맏며누리 감이지!”
남의 말을 잘 안하는 오봉선생이었지만 며느리 가야부인에 대해서는 언젠가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칭찬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시어머니는 둘째아들 밀양아이를 잃은 뒤론 정신나간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이녁 말마따나 모진 목숨이 죽어지진 않고서 시나브로 말라만 들어갔다. 남자들 같으면 다른 일에 머리를 쓴다거나 술로써 한때의 시름을 잊기도 하겠지만, 가뜩이나 얌전하기만 한 시어머니라 그저 한숨과 ‘나무아미타불’로만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시어머니가 어느덧 천수를 치기 시작했다. 물론 바깥어른들이 안 듣는 데서만이었다. 어디서 얻어왔는지 가야부인도 모르는 얄팍한 불경 책의 노란 책가위*가 말려들어갈 정도로 손때가 묻었다. 아주 열심이었다. “정구업 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를 처음 따듬작거릴 때는 저 책을 언제 다 외우리 싶었지만, 시어머니는 실로 놀라울 정도로 빨리 나아갔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렇게 불도에 낙을 붙이게 된 것을 가야부인은 고맙게 생각하였다. 다만 그렇게 불경을 열심히 외우면서도 가보고 싶은 절에 남들처럼 마음놓고 가보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심정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녀들의 시가는 워낙 완고한 유교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이 몹시 불던 밤이었다. 집 뒤를 에워싼 참대숲이 워썩워썩 울어댔다. 그렇게 대숲이 워썩거리는 밤이면 가야부인은 곧잘 고향인 명호 앞 바다가 생각나고, 처녀 때 읽은 『사씨남정기』란 고대소설의 한 대목이 잇달아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하늬바람에 대숲은 일렁이는데, 창창한 바다는 만 리나 펼쳤도다”라고 하는 관세음보살의 화상을 칭송한 부분이었다. 그날 밤에는 이상하게도 죽은 딸까지 생각나서(가야부인은 시집까지 간 고명딸을 달포 전에 잃었던 것이다) 더욱 잠을 이루지 못하고 늦게까지 분이의 버선을 꺼내놓고 뜨개질을 하던 참인데, 뜻밖에 시어머니의 방에서 염불 외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 왔다.
“……·옴 아라남 아라다. 천수 천안 관자재보살…….”
또 시작이구나 싶었다.
나무대비 관세음
원아속지 일체법
나무대비 관세음
원아조득 지혜선
나무대비 관세음
원아속도 일체중
나무대비 관세음
원아조득 선방편
나무대비 관세음
원아속승 반야선
나무대비 관세음
원아조득 원고해……
빨리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의 불법을 익혀 이 사바의 고해를 건너고 싶다는 절절한 하소연이었다. 나직나직 한 목청이 언제까지나 낭랑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가야부인은 뜨개질을 하던 손을 멈춘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틀림없이 시어머니는 또 죽은 밀양양반을 생각하고 있으리라 싶었던 것이다.
가야부인은 곧 시어머니에게로 건너갔다. 그냥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무슨 말을 여쭈었는지는 기억에 확실치 않았다. 다만, 어머님 내일이라도 어느 절에 좀 다녀오이소! 통도사도 좋고, 밀양 표충사도 안 좋겠능기요. 밀양 같음 밀양 동시를 데리고·…… 밀양 동시도 저래 외롭게 지내이카네……! 아마 이러한 내용이 아니었던가 짐작되었다. 또렷이 생각나는 것은 그때 시어머니께서 눈이 오긋해가지 고서 자기를 뚫어지게 건너다보았다는 사실 이다. 그러고 하신 말씀이다.
“오냐, 늬가 내 눈엔 꼭 관세음보살 같구나!”
느껴웠던 탓인지 말소리조차 약간 떨렸었다. 그렇게 말하는 입가에는 난데없는 미소까지 떠올라 있었다.
이튿날 아침 가야부인은 서둘러서, 시어머니에게 시줏돈을 쥐여주었다.
“오냐, 곧 돌아오꾸마!”
홀로 사는 밀양며느리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집안이 알게 절구경을 나서는 시어머니의 눈에는 이슬 같은 것이 맺혀 있었다. 마치 그것이, 오래도록 그녀의 넋을 억누르고 있던 두터운 안개가 가시어지는 듯한 해방감의 표시인 듯이.
다행히 오봉선생이 출타를 하고 없을 때의 일이었다.
천연스런 얼굴로 시어머니를 배웅하던 가야부인은 이미 마음속에 어떤 각오가 되어 있었다기보다, 밤마다 혼자서 『천수경』을 소곤거리는 시어머니를 위해서는 그 길밖에 도리가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결행했을 뿐이었다. 물론 시아버지 오봉선생이 안다면 그저 벼락 정도가 아니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가서는 결국 드러나고야 말았지만, 사실은 가야부인 자신이 불교에 대한 신심이 여간한 분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또 여간 뿌리 깊게 박힌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로 인해 시아버지의 격분을 샀지만, 그것은 신라 때의 유풍으로 그저 여염집 부인네들이 절나들이를 한다든가, 수박 겉핥기 식으로 불교에 미치는 그런 것과는 달리, 자기 나름의 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가야부인의 그러한 정체가 드러나게 된 동기가 또한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때 그만 머리를 깎고 영 이 가문을 떠날라꼬꺼정 안했더나!”
시아버지 오봉선생의 삼년상을 치른 파젯날, 가야부인은 그 당시의 각오를 이렇게 말하며 이야기했다.
서간도에서 돌아간 시할아버지 허진사의 입젯날의 일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날은 강추위였던지, 낙동강 물이 꽉 잡혀서 강 건너 상동 방면 사람들은 이쪽 황산장까지 등빙을 했을 정도였다. 제삿장을 보아서 머리에 이고 그놈의 베리끝을 돌아오자니, 언덕 위에 쌓였던 눈까지 휘몰아쳐붙이는 바람결에 인제 곱다시* 얼어서 쓰러질 것만 같아서 우선 폭풍이나 잠깐 피할까 싶어, 지금 미륵당이 서 있는 바람의지로 들어간 것이 꼬투리라고 했다.
“장작개비같이 언 팔에 힘을 주어서 머리에 였던 장바굼지를 겨우 내려놓고 막 웅크리고 앉일라 카니 발끝에 수상한 기 안 비이나! 거기만은 이상스럽게도 눈이 녹아 땅이 푸석푸석 한데 반들반들한 돌부리가 하나 쑥 볼가져 있더라카이. 그래서 조금 굵적거리보았디이……”
가야부인은 그때의 신비감을 만면에 되살렸다. 그것이 바로 한쪽 귀퉁머리가 이지러진 돌부처 ―지금 미륵당에 모셔져 있는 돌부처의 정수리였다는 것이다.
마침 산에 눈이 무덕지게 덮여 있던 때라, 그녀의 머리에는 석가여래가 눈을 맞아가며 수도를 했다는 설산 생각이 문득 떠오르고, 그때까지 오장육부가 다 어는 듯싶던 추위가 금시에 가시어지는 것 같더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흙으로 덮어두고 돌아왔지만, 가야부인의 머리에는 그것이 떠날 날이 없게 되었다. 틀림 없이 불교를 배척할 당시의 가혹한 손들에 의해서 절이 불태워지고, 내동댕이쳐진 불상이리라 싶었다. 그렇게 큰 것이 물결에 밀릴 리는 만무했지만, 가야부인의 생각에는 아주 먼 데서 물결에 밀려온 것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 안 보았다면 모르되, 직접 눈으로 보고 난 이상 차마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가야부인은 여러 날 여러 밤을 그것만을 생각하다 생각하다, 결국 시어머니에게 자기의 마음먹은 바를 아뢰었다. 그곳에 조그만 절을 짓고 모셔주자는 것이었다. 불교라면 펄펄 뛰는 완고한 오봉선생 밑에서 눌려 살아온 얌전하기만 한 시어머니의 처지로서 얼른 대답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시어머니도 여러 날 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성 하나 타가지고 남의 가문에 와서 ‘삼종지례’니 ‘칠거지악’이니 하는 무쇠 같은 유교의 계율에만 억눌려 사는 멀쩡한 노예인 그녀들에게는 뚫고 나갈 구멍이라곤 까마득했다.
결국 가야부인은 그 일로 말미암아 마음에 병이 생겼다ㅡ하필 그 부처님이 자기의 눈에 뜨인 것은 정녕 무슨 심상치 않은 인연의 탓이리라, 그냥 모른 척하고 내버려둔다는 것은 그야말로 억겁의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끔 되었다. 어쩌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가도 꿈에 그 돌부처의 머리가 불쑥 나타나서 소스라쳐 일어나곤 하였다. 물론 음식도 잘 먹히질 않았다. 먹어도 삭여내질 못했다. 시름시름 자꾸만 말라들어갔다. 까닭을 아는 시어머니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밤마다 그녀를 위해 천수만 쳤다. 얼었던 강이 풀리고 기러기 떠나가는 봄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분이가 대여섯 살쯤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밭둑 같은 데 파릇파릇 새싹이 돋으면 곧잘 이웃 조무래기들과 어울려서 쑥이랑 그 밖에 이름도 모르는 풀잎들을 나물이라 해서 쬐깐 노리개 같은 바구니에 캐어오곤 했다. 어머니는 어서 갖다버리라고 야단을 했고, 그럼 할머니는 “와 그걸 베리! 그 조갑지 같은 손으로 캐온 것을……아가 이리 가져오너라” 하며 싸주었던 것이다. 그러시던 할머니가 인제는 그럴 낙조차 없으리만큼 구겨져 있는 것을 보고 분이는 슬퍼졌다.
“할매, 어데가 아푸요?”
하면,
“오냐 괜찮다, 내 새끼야! 우째 니는 요렇게도 꼭 부체새끼 겉노(같노)?”
하고 가야부인은 분이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쓰다듬어줄 따름이었다.
옛날 같음 저녁 늦게까지 곧잘 모여 앉아서 일도 하고 정담들도 하고 가던 아들이랑 며느리들이 늦게까지 모여 앉아서 걱정들만 하였다.
가야부인은 기회만 있으면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야 된다고 가르쳤고, 그래서 자기가 주장해서 지차* 아들들의 살림집들도 큰댁 곁 텃밭에 줄느런히 짓게 했던 것이다. 그러고서도 부족한 듯이 한집 같이 죽 사잇담을 틔워서 서로 마음대로 나들게 했었는데, 아이들이 안 보일 때는 이녁이 직접 이 집 저 집 돌아보는 것이 또한 낙이기도 했었다.
“어무이, 지가 제일 손해 봅니데이.”
오 동서 중 막내며느리가 이런 우스운 소릴 잘했다. 집이 맨 끝에 붙어 있으니까 “아지부이 편히 쉬이소, 성님 잘 자이소” 하는 수인사를 죄다 해야 되니 그렇다는 거였다.
“그럼 니가 시집을 먼저 올 거 앙이가!”
가야부인은 이렇게 웃음으로 받아넘겼던 것이다. 그렇게 서글서글하던 가야부인이 인제는 그러할 기력과 웃음조차 점점 잃어가게 되었다.
천수만 치던 분이의 노할머니 ―가야부인의 시어머님도 드디어 어떤 결심을 하였더라고. 워낙 얌전하기만 한 그녀는 죽을 셈 치고(?) 남편 오봉선생을 사랑방으로 찾아갔다. 그녀가 사랑방으로 찾아간 것은 칠십 평생을 통해서 그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물론 며느리 가야부인에 대한 사연을 자초지종 사뤘다. 그리고 이렇게 말끝을 맺었다.
“영감님도 아시리다. 가야메누리야말로 지가 몬한 일을 다했십니더. 형제며 일가친척간에 우애 있고, 그 몬 배운 상일꺼정 해가며 이 집을 남 불게(부럽게) 안해놨능기요. 사람 하나 살리는 심(셈) 치고…….”
소원을 들어줍시사는 것이었다. 오봉선생을 쳐다보는 노부인의 얼굴에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내렸다.
“나가요!”
오봉선생의 무서운 호통소리와 함께 벼락치듯 열리는 장지문 밖으로 마나님은 사정없이 쫓겨나왔다. 그길로 윗방으로 돌아와서 입을 봉했다. 식음을 전폐하려고 들었다. 가야부인이 중이 되려고 결심한 것은 바로 그날 밤의 일이었다.
밤중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히었다. 가뜩이나 시름시름 앓던 가야부인이 별안간 간데온데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안방에 노 데리고 자던 손녀 분이와 어미 여읜 어린 외손자만이 콜콜 잠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을 깨워본들 알 턱이 없었다. 분이는 눈만 썩썩 비비더니 ,
“아까 할매 울었데이.”
하면서 도리어 울상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불이 없던 사랑방 문이 별안간 덜커덕 열리더니,
“또 거기 간 거 앙이가?”
어둠을 찢듯한 오봉선생의 날카로운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가족들은 쥐 죽은 듯이 말이 없었다.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비로소 모두 냉거랑 건너 대밭각단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대밭각단이란 부락 아래쪽 솔밭 속에 희미한 불빛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또 저게 갔는갑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바보 같은 것들! 냉캄 가봐라!”
오봉선생은 다시 꽥 소리를 치고는 문을 덜컥 닫았다.
대밭각단 아래쪽 솔밭 속에는 가야부인의 죽은 고명딸의 체봉(假葬)이 있었다. 마마에 죽은 어린것들의 시체를 오쟁이에 넣어서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달아두듯이, 그녀의 딸도 괴질에 죽었다 해서 괜스레 악령의 소멸을 빈다는 버릇으로 그렇게 솔밭 속에 빈소를 얽어놓고 이른바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악질에 비명으로 죽은 것도 원통한데, 시체마저 흙 속에 곧 묻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욱 원통하여, 가야부인은 생각만 나면 밤중이라도 그 먼데까지 우르르 달려가서 흐느끼는 것이었다. 그즘은 몸도 불편하고 해서 한동안 뜨음했던 것인데?……
이윽고 가야부인은 가족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돌아왔다. 징검다리를 헛디디었던지 아니면 사뭇 물을 밟고 갔던지, 아랫도리가 온통 물에 젖어 있었다. 물론 오봉선생은 그녀가 돌아오는 줄을 알면서도 일부러 내다보지도 않았다.
가야부인은 내처 입을 열지 않았다. 분이는 그러한 할머니를 보고 울기만 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가야부인은 사랑방으로 불려나갔다. 바깥양반 명호사람이 먼저 부옇게 부대끼고 나온 직후였다.
“무당과 중을 멀리하는 것이 선비 집안의 체통인 줄 알 터인데…….”
오봉선생의 그 푸른빛이 감도는 날카로운 눈이, 곱게 앉은 며느리 가야부인의 정수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필연코 마나님으로부터 그녀에 대한 최근의 일들을 샅샅이 들어 안 모양이었다.
“어째서 자네는 그 요사스런 불교를 버리지 못하겠다는 건고?”
말소리는 한결 떨리고 높아졌다. 가야부인은 이미 각오한 바는 있었지만, 감당해내기 어려운 위엄에 질려 얼른 무어라고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기어코 생각을 고치지 못하겠는가?”
흰 수염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
가야부인은 내처 말이 없었다.
“기어이 불도를 버리지 못하겠다면…….”
시아버지는 담배에 성냥을 쫘르륵 그어 대며,
“그 까닭을 말해보라!”
“죄송하옵니더……”
모기만한 소리와 함께 가야부인은 더욱 정수리를 숙였다. 신양*중인데도 불구하고 칼날같이 가지런하게 다듬어진 가르마는, 벌써 참을 수 없는 결심을 의미하는 듯이 보였다. 어느 앞이라고, 감히 거들떠보지는 못했지만 소신대로 실토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희 집도 유교 가문이기는 했지만 친정할무니는 지가 애릴 때부터 불법을 소중히 여겼사옵니더.”
이렇게 꺼낸 가야부인의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그러한 할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연 불법을 대견스럽게 알게 되었고, 또 할머니의 가르침으로 공자님의 인(仁)이나 석가모니의 자비심이 근본에 있어서 다를 바 없다고 믿어왔으며, 그보다 더욱 불도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된 것은, 임란 당시 왜병이 쳐들어왔을 때 소위 관군이란 것들은 지레 겁을 먹고 죄다 도망질들을 했었지만, 사명대사가 지휘한 승병들이 끝까지 싸워서 자기들의 고향땅을 지켜주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고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 란 걸 억지로라도 믿지 않고서는 어떻게 요즘 세상인들 살아가겠느냐는 현재의 심경까지 당돌하게 덧붙였다.
이러한 며느리의 말 가운데서, 공자님과 석가를 함부로 겨누는 소행이라든가, 승병이 어쩌고저쩌고 했다는 따위는 듣기에 심히 거슬리기도 했지만, 점잖은 시아버지의 입장에서 그런 걸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힐난을 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이미 중년 나이를 훨씬 넘어선 며느리의 그렇게까지 굳어진 신심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승병이 거기도 왔다던가?”
오봉선생의 입김은 예상 외로 빨리 누그러졌다.
“예, 어른들의 이야기로서는…….”
가야부인은 그제야 비로소 얼굴을 한 번 들었다가 이내 시선을 되깔았다. 오봉선생은 문득 여러 가지 생각되는 바도 있고 해서, 막무가내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행히 가야부인의 눈에는 뜨이지 않았다.
“물러가 있거라.”
한 말만 들렸다.
“머라 쿠데?”
가야부인이 사랑에서 돌아오자, 시어머니는 못내 궁금한 듯이 물었다.
“우짠 일인지 별로 다른 말씀은 안하시데요. 와 불도를 못 버리겠느냐고만 하시고.”
가야부인은 한시름 놓인 듯이 시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우거지상을 하고서 청 끝에서 담배만 태우고 있던 바깥양반이, 고부가 마주앉은 방 안을 한 번 힐끗 돌아보았다.
시어머니도 얼굴을 펴며,
“그래 말이다. 그 성질에 또 불베락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 목소리가 낮아지기 그런가 했지.”
인제 무얼 보나 피차 그럴 나이가 아닌가 하는 이녁의 생각도 곁들인 말눈치였다.
가야부인이 덤덤하고 있자,
“그래 절에 대한 말은 안하던강?”
“야.”
가야부인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시어머니는 혀를 쯧쯧 찼다. 그러는 동안에 오봉선생은 어느새 입던 의관을 정제하고 무슨 급한 일이나 생긴 듯이 바삐 대문을 나갔다. 미처 누가 배웅을 나갈 새도 없었다.
“저런!”
시어머니는, 무슨 결말도 내지 않고서 그대로 핑 나가버리는 남편을 닭 쫓던 개처럼 어이없이 내다볼 뿐이었다. 가야부인 역시 같은 심사였다.
고부는 서로 얼굴반 쳐다보았다. “물러가 있거라” 한 말은 틀림없이 무슨 하달이 있으리란 뜻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말이 없이 오봉선생은 나가버렸다. 야속했다. 가야부인은 생각해보았다. 응당 무슨 말이 있어야 할 터인데, 또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로서밖에 추측되지 않았다. 즉 하나는 이쪽 말이 타당성이 없다는 경우와, 또 하나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되더라도 일부러 붉살하겠다는 경우다. 가야부인은 이 둘째번의 이유로써 시아버지 오―봉선생 의 태도를 판단했다.
“나무―아미타불……”
시어머니는 떡심 풀 한숨만 내쉬었다.
“우짜겠는기요. 워낙 꼿꼿한 아부님이 되고 보니!”
가야부인은 막무가내란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잠깐 자기 방으로 건너가더니, 이내 외손자의 손을 이끌고 나왔다. 같이 놀던 분이가 따라나서자,
“분이 너는 여겄거라'!”
하고, 외손자만 데리고. 청을 내려선다.
“와, 어데 갈라꼬?”
시어머니가 눈이 둥그레가지고 쳐다보았다.
“즈그 집에 데리다조오야죠.”
“와 하필 오늘이싸?”
청 끝에 걸터앉아 있던 남편이 수상해하자,
“제 갈 데로 가야지요!’:
가야부인은 어느새 축대를 내려섰다.
“할매, 나도 윤이 집에 같이 갈래.”
분이가 또 따르려니까,
“너는 집에 있거라, 내 곧 오꾸마.”
말리려 해도 듣지 않을 눈치였거니와, 그럴 새도 없이 가야부인은 외손자를 이끌고 대문으로 나섰다. 속도 시끌시끌하고 할 테니, 딸 없는 딸네 집이라도 다녀오려나보다 하고 더이상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럭저럭 밤이 되었다. 행여나 싶어 예의 대밭각단 아랫녘을 바라보아도 딸의 빈소가 있는 짬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던 식구들은, 아마 오랜만에 사위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거기서 자는가보다 생각했다. 그런 일이 과거에도 더러 있었으니까.
이튿날도 가야부인은 쉬 돌아오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뜻밖에 딸의 체봉이 있던 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내 벌건 불꽃이 치솟았다.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마침 집에 있던 명호양반은 부리나케 뛰어갔다. 그저 난 불이 아니라, 바로 이녁 딸의 시체를 화장하고 있었다. 친정이 지척인데, 알리지도 않고 그러는 것이 괘씸했다. 게다가 선산을 버젓이 두고도, 화장이라니! 괘씸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어련히 있어야 할 사돈어른이 현장에 없었다. 사위만이 가까이 와서 수인사를 했다.
“와 이런 짓을 하는고?”
하고 물었으나, 사위는 고개만 폭 숙이고 대답은 마누라 가야부인이 했다.
“죄송합니더. 아직 물도 덜 빠진 것을 내가 그러라고 시컸심더.”
불가의 방식이란 말은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구태여 덧붙이지 않더라도 능히 짐작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물과 그을음이 함께 짓이기어져 있는 아내의 얼굴을 보자, 명호 양반은 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서두르는 아내의 배포가 무언지 두려웠다. 멍청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맺힌 데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한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비스듬한 바윗돌 위에 돌아앉아서 담배만 태우고 있는 명호양반의 심정은 별안간 무엇에 꽉 눌린 듯한 기분이었다.
화장이 끝나고 습골까지 마치자, 가야부인은 바깥양반을 집으로 따돌려 보내고 자기는 사위와 단둘이서 그 유골 가루를 보자기에 싸들고 강가로 나갔다. 강물에 뿌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둑 하나만 넘으면 곧 강기슭인 데까지 와서, 가야부인은 뜻밖에 왼편 언덕 쪽을 더위잡았다.
“와 그리 갑니꺼?”
뒤따르던 사위가 수상해하니까,
“그저 따라와보게 .”
할 뿐이었다. 그녀가 사위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저번날 돌부처의 머리가 보인 곳이었다.
“엊지녁에 말한 것이 바로……”
가야부인은 역시 푸석푸석 한 흙바닥을 긁적거리더니, 흙칠갑이 되어 있는 돌부처의 얼굴을 드러내고, 그 앞에 딸의 유골을 잠깐 놓았다. 그러고는 합장을 하였다.
나무 상주 시방불
나무 상주 시방법
나무 상주 시방승
이런 소리를 한참 중얼대고는 얼굴을 드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자네 처는 인자 부체님한테 영 맬맽겄데잇!”
말은 수월했지만, 한숨은 길었다.
가야부인은 딸의 유해 꾸러미를 다시 사위에게 안겨가지고 강기슭으로 데리고 갔다. 유해는 이내 어머니의 손에 의해서 세 번 강물 위에 날려 흩어졌다. 마침 그 혼령을 받기나 하려는 듯이 이상하게도 난데없는 성에* 한 장이 강심에서 둥실둥실 기슭 쪽으로 향해왔다.
미륵당의 터가 닦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이튿날의 일이었다. 가야부인은 딸의 시체를 화장하던 날 밤에도 집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내처 사위 집에 눌러 있었다. 며느리들이 모시러 왔었지만 허탕이었다. “가거라!” 한마디에 모든 것이 끝났다.
며느리들은 울었다. 울어도 소용이 없었다. 며느리들은 놀랐다. 그렇게 어질던 시어머니의 어디에 그런 굳센 곳이 있었을까! 자기들은 흉내도 못 낼 어려운 일, 어려운 고비들을 겪어는 왔다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대담하고 꿋끗이 나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태산부동이었다. 그녀는 벌써 어떤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야부인은 집을 나올 때 정말 머리를 깎으려고 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고 했다. 늘그막까지의 시집살이가 고되어서가 아니다. 그런 건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직 신심의 탓이었다. 허씨 가문을 위해서는 자기로선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지막 조그만 소원―땅에 묻혀 있는 부처 하나 꺼내는 일까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었다. 여지껏 애써 살아온 보람,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고작 그뿐인가 생각하면 어떤 의미로는 분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그 이상 더 자기의 신심을 묵살한다든가 하는 것은 정말 스스로 억겁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느끼었다.
장모로부터 비로소 이와 같은 심정의 술회를 듣고 난 사위는,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꺼정 염려하실 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는 아주 수월스럽게 말했다.
“어째서?”
“절은 어데 꼭 장모님이 지어야 하능기요. 누라도 절만 지어서 부체만 모시문 안대겠능기요. 지가 짓겠심더. 죽은 처를 위해서라도…….”
사위는 불각시 떠오른 자기의 생각에 숫제 자부라도 하듯이 벙긋거렸다.
“그래? 자네 처를·…… 불쌍한 내 딸을 위해서 말이지?”
가야부인은 별안간 깊은 감동에까지 젖으며 새삼 사위를 건너다보았다. 풍모만이 헌헌장부가 아니라 생각마저 과연 내 사위로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왜 자기는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앵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수심으로 그늘져 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거짓말같이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는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이 사람아, 자네도 인자 삼 년 거상이니 머니 하는 거 다 그만두고, 어서 새사람을 맞도록 하게.”
“그기싸 안주 바뿌잖심더. 절이나 지아놓고 천천히 생각해보겠심더.”
“와 바뿌잖아? 우선 밥 묵으러 댕기는 것만 해도 안 귀찮나.”
윤이 아버지는 상처 후 밥을랑 줄곧 큰댁에 가서 먹고 잠만 자기 집에서 자는 군색한 살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건 지한테 맬기놓오이소.”
말이 이럴 수 없이 서글서글했다.
“그래?…….”
장모도 더 권하지는 않았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홀로 있는 사위가 애처롭기도 하고, 그날 밤에는 더욱 고맙기도 해서 도리어 잠이 얼른 오지 않았다.
“꼬꾜―”
어느새 홰를 치는 첫닭 소리가 어쩌면 그렇게도 맑게 들릴꼬! 가야부인에게는 여느 때와 다른 새로운 날이 밝아오는 것 같았다. 아니 정말 그날부터 그녀에게는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다. 홀로 있는 사위를 위해서 밥을 지어주기로 했던 것이다. 사위는 물론 매일같이 절 세우는 일에 매달렸다. 손수 터를 닦고 이것저것 어려운 주선도 하고……
일은 빨리 나아갔다. 굳이 절 일에 경험이 있는 목수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우선 부처 하나 아쉽잖게 모실 만한 당집이면 족하니 가야부인의 친정에서 부리던 텁석부리로써 무방했다. 그것이 되레 만만하기도 하고. 그녀는 곧 친정으로 사람을 보냈다.
“허허이, 애씨께서(그는 옛날 주인댁 따님에 대해서 하던 말공대를 그때도 했다) 땅속에 묻힌 부체를 찾아냈다고요? 인자(인제) 절꺼정 지우문(세우면) 극락도 상극락을 가시리더!”
텁석부리는 언제나 변함이 없는 털털한 사람이었다.
“욕 좀 보겠구만! 부대 잘 좀 해주시게, 부체님 모실 곳이니깐에……”
가야부인도 그를 외간남자같이 생각지 않았다.
“그럼은요! 부체님 모실 집인데 여부가 있능기요. 다른 시주는 몬 해도 정성 시주는 힘껏 해야 나도 극락에 가겠지요……”
하면서 허허 하고 웃어댔다. 그는 가야부인의 사위 박서방네 집에서 같이 묵으면서 새벽부터 연장을 갈고, 날이 어둘 때까지 일을 서둘렀다. 절이 거의 다 서갈 무렵이었다. 오봉선생이 집을 비운 지 그럭저럭 달포가 가까웠을 땐데, 뜻밖에 형사들이 또 가택수색을 나왔었다. 허둥지둥 달려온 막내며느리의 말을 들으면, 온 가족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는 사랑방이랑 책이 있는 안방을 마구 뒤졌다고 한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그저 나쁜 짓을 했으니 이러지 않느냐고 으르기만 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가야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채 막내며느리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온 집 안이 흡사 초상당한 듯한 기색이었다.
‘밖에만 안 나갔이문 이런 일은 없었을는가?’……
가야부인은 지레 질려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어머니며 바깥양반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송구스러웠다.
“‘애비는 간도에 가 죽더니 영감도 옳은 죽음 하기는 어려울걸!’ 하고 안 가나…….”
이러면서 시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가야부인도 어느새 눈알이 벌겋게 되어 있었다. 백짓장 같은 얼굴들이었다. 속수무책인 듯 마주 앉아 있는 그녀들의 겉늙은 모습ㅡ더구나 나이 아직 오십 미만인데도 벌써 귀밑이 허연 가야부인의 울먹거리는 표정에는, 그러한 가문에서 남 안 겪는 그러한 일들을 줄곧 겪어온 빛이 완연히 드러나 보였다.
뒤미처 집을 나선 명호양반을 비롯한 아들들의 수소문에 의해서, 오봉선생의 거취가 겨우 알려졌다. 도 경찰국에 붙들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왜놈들의 눈에 난 소위 ‘후떼이 센징 (不逞鮮人)’들에게 맘대로 죄를 꾸며 뒤집어씌우는, 예의 고등계란 데였다.
거기는 오봉선생만이 아니라, 육십이 훨씬 넘은 늙은 유생들이 수두룩하게 갇혀 있었다. 역시 왜경과 그 앞잡이들이, 충성심 이 한도를 넘은 나머지 제맘대로 조작해낸 소위 ‘한산도 사건’이란 데 관련된 노인네들이었다. 사건이라고 일부러 어마어마한 이름을 뒤집어씌워 그렇지 실은 사건이 될 턱이 없는 어쭙잖은 일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오봉선생 같은 유생들은 한 해 한두 번쯤은 향교라든가 산수가 좋은 곳에 모여서 고풍 따라 시회(詩貪)를 열고 하루를 즐기던 것인데, 마침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인 한산도에서 그런 놀이가 있자, 어디 보자 하는 식으로 현장을 덮쳐서 압수한 글들을 조사한 결과 내용이 불온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이 그들의 내림을 따라 ‘산천은 예와 같으나 인물은 간 곳이 없구나’ 식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읊었을 뿐인데, 장소가 장소였던만큼 개중에는 자연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게 되고, 나라를 잃은 원한이 나오고, 왜적이니 해적 무리니 하는 구절이 없을 리 없었다. 물론 오봉선생의 글은 그런 점에 있어서 남 뒤떨어지지 않았다. 요컨대 왜경과 그 앞잡이들은 늙은 선비들의 그와 같은 어쭙잖은 일들까지 마치 무슨 비밀결사라도 만든 것처럼 서둘러서 일부러 ‘중대시’ 했던 것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시기가 또 불리했던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나기 이태 전이었다. 한창 중국 대륙을 밀고 내려갔던 왜군이 연합군의 반격에 되밀리자, 중국 국내에서 맹렬한 항일투쟁이 벌어지고, 덩달아 우리 독립군까지 거기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좍 퍼졌을 무렵 이었다. 그러니 우리들의 동태를 살피는 왜경과 앞잡이들의 눈깔이 한창 피를 물고 있을 때였다. 말하자면 잘못 걸린 셈이었다.
그러니까 물론 면회도 들어주지 않았다.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 아버지가 만주서 그렇게 되고, 또 아들이 만세사건으로 그렇게 되고 한 오봉선생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죽는 한이 있어토 잘못했다고 굽히지는 않을 성민데…….”
가족과 가까운 일가친척들은 밤이 되면 으레 한자리에 모여 앉아서 오봉선생의 안 (安危)를 걱정했다. 그러나 결국 속수무책 이었다. 가야부인은 혼자서 생각한 나머지,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을 궁리했다. 만약 시아버지 오봉선생이 알게 된다면 그야말로 벼락이 떨어지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처지로서는 막무가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눈 질끈 감고 이와모도 참봉네(원래는 이참봉이었지만 창씨를 하고부터 그렇게 불리었다) 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오히려 이런 경우인만큼 쉬 들어줄는지도 모르지!…….’
가야부인은 옷을 갈아입으면서 한 가닥이 아니라 두 가닥 세 가닥의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었다. 물론 누구하고 상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독단이었다.
너무 앞을 서두르느라고 미처 얘길 못했지만, 오봉선생에게는 먼데서 찾아오는 유생들 이외에, 인근동에는 글이나 나이로 보아서 벗될 만한 사람이 바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양접장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는 ‘냉거랑’이라고 불리는 시내 저쪽 대밭각단이란 마을의 글방 접장으로서, 그곳 주산인 오봉산 발치의 질펀한 들녘을 에워싼 열두 부락에서는 오봉선생의 유일한 글친구요, 또 바둑친구였다. 오봉선생은 속이 울적할 때는 곧잘 그를 찾아갔다.
이 양접장 이외에 글도 웬만큼 알 뿐 아니라 나이로써 벗뻘이 될 만한 사람으로 그 일대에서 가장 살림도 넉넉하고 거드름깨나 빼는 이가 바로 가야부인이 찾아가려는 이와모도 참봉이었다. 오봉선생은 멀잖은 이웃에 있으면서도 거기만은 잘 가질 않았다. 자기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까지 그 집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었다.
“거기 가문 할배, 이놈 한데잇!”
분이가 철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할머니 가야부인으로부터 이런 당부를 받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집도 덩그렇고, 그보다 분이에겐 같은 나이의 숙이란 애가 있고 해서 자꾸만 가 놀고 싶었던 것이다.
“돈 주고 산 참봉이라 카이…….”
가야부인도 그 가문을 대견스럽게 여기지는 않았었다. 그러한 할머니의 이야기로서는, 이녁 시아버지 오봉선생이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는 괜히 침을 퉤퉤 뱉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엄청난 참봉을 지내면서 그렇게 치부를 했다는 것도 심히 수상스런 일이었지만 그보다 오봉선생에게는, 그가 합방을 계기로 해서 왜왕이 내주는 소위 그 ‘합방 은사금’이란 걸 받고서도 숫제 양반인 체하는 꼴이 못내 아니꼬웠다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아주 딴판으로, 그 댁에 무슨 대사나 모꼬지* 같은 게 있으면 그 무시무시한 순사나 면서기들이 언제나 상손님이었고, 그다음에는 그저 물덤벙술덤벙* 하는 치들이나, 그의 소작인과 동네 머슴들이 판을 쳤다. 오봉선생이나 양접장 같은 분은 그저 이웃 이목이 무엇해서 잠시 다녀갈 정도였다. 분이가 이웃 조무래기들과 어울려서 떡부스러기 같은 것을 얻어오면, 가야부인은 언제나 떠름하게 웃던 것이었다.
그렇게 사이가 서먹한 집을 가야부인이 새삼 뼈물고 찾아가야겠다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이와모도 참봉의 큰아들이(지금은 국회의원이란 보다 훌륭한 감투를 쓰고 있지만) 그때 시아버지 오봉선생이 갇혀 있는 도경 고등계에 경부보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야부인은 먼저 이와모도 참봉의 며느리를 뵙고, 다음 마누라를 뵙고, 그러고는 이와모도 참봉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귀밑이 허연 가야부인이 공손스럽게 수인사를 마친 뒤 시아버님이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로부터, 어떻게 해서 아드님의 덕분으로 쉬 풀려나올 수 없겠는가, 또 우선 면회라도 할 수 없겠는가, 나이도 나이고 입고 가신 옷도 다 혈었을 텐데…… 하고, 그야말로 있는 정성을 다해서 사정을 드렸다.
이와모도 참봉은 첫말에 그래보마고 수월스럽게 승낙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면회쯤은 안 시켜주겠소.”
짜장 가야부인의 효성심에 감동이라도 한 듯이 미소를 지으며, 어서 떠날 채비를 해오라고 하였다. 고맙게도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물에 빠진 놈에게 썩은 새끼가 아니라 바로 실직한 빗줄이라도 얻은 듯한 기분으로 가야부인은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바깥양반은 집에 없고 해서, 지쳐 누워 있는 시어머니에게만 통사정을 하고서 가야부인은 부랴부랴 나들이옷을 갈아입었다. 아직 신양이 덜 풀리긴 했지만 그렇게 길 떠날 채비를 하고 나서니 훤칠한 키에 옛날의 인물이 되살아나는 듯 엄전해* 보였다.
그러한 가야부인이 뜻밖에도 외간남자인 이와모도 참봉을 따라서 동구 앞을 떠나는 걸 보고,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었다. 기찻간에 나란히 앉았을 때는, 누구라도 시아버지와 며느리로 곧이 먹겠지 싶어, 가야부인은 곁으로는 조금도 어색한 내색은 하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려 곧장 전차를 갈아탔을 때도 그랬고, 도청이란 벌건 벽돌집으로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히려 그런 길에 익숙하고 대담한 이와모도 참봉의 태도에 은근히 놀랄 뿐이었다. 고등계란 데는 역시 무시무시한 곳인가, 벽돌집의 이층 가운데서도 저 뒤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와모도 참봉은 가야부인을 골마루에 세워놓고, 자기 아들이 있다는 방으로 들어갔다. 제발 일이 뜻대로 되었으면 하고, 가야부인은 이와모도 참봉이 들어간 방 창께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일은 간단히, 아주 간단히 끝났다. 이와모도 참봉이 들어가고 채 오 분도 안 지나서다. 안에서 느닷없이 불손한(적어도 가야부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리가 복도에까지 울려왔다.
“씰데없는 짓 하고 댕기지 마소! 어서 돌아가소!”
가야부인도 잘 기억하고 있는 이와모도 참봉의 아들의 꺽꺽한 목소리였다. 쫓겨나오듯 혼자서 돌아나오는 이와모도 참봉은 그야말로 뿔 빠진 쇠꼴이 되어 있었다.
“그만 갑시더.”
이와모도 참봉은 이 말밖에 하지 않았다. 가야부인은 남의 일에까지 속이 뭉클해졌다. 소위 ‘합방 은사금’까지 받은 두툼한 목덜미가 온 저렇게 초라할 수 있을까보냐 생각하면서 그녀는 이와모도 참봉을 따라 층계를 밟고 내렸다.
“애비의 친구를 애비가 만나보고 싶다고 해도 안 들으니 온!”
돌아오는 기찻간에서도 이와모도 참봉은 이렇게 한마디만 하고서 이내 창밖으로 눈을 보냈다. 그렇다고 해서 뭐 특별히 아지랑이 낀 먼산들을 보는 것 같지도 않고, 들을 덮기 시작하는 봄을 유심히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창문 유리에 어슴푸레하게 비쳐 있는 그의 표정은, 올 때와는 달리 꽤 복잡한 데가 있어 보였다. 가야부인도 멍청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더욱 실의에 찬 얼굴이었다. 차라리 안 온 것만 같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바보같이! 행여나 하고, 그러한 아들을 가진 이와모도 참봉한테 섣불리 빌붙기까지 한 것이 도리어 후회막심이었다. 창피스러워서 누구 앞에 얼굴도 들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러한 기분을 실은 채, 낙동강을 가까이 끼고 달리는 거친 차바퀴 소리는 자꾸만 그녀를 어느 어둔 구렁 속으로만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우악스런 차 소리에 놀란 물오리들이 푸덕푸덕 떼를 지어 날아가도 이미 가야부인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흥미도 없는 일이었다.
창밖에는 봄이 한결 다가서고 있었다. 군데군데 벌써 평지꽃이 노랗게 피어 있고, 풀빛이 짙어가는 강둑 비탈에는 새까만 염소들이 여기저기 악착스럽게 붙어 있는가 하면, 어스럭송아지*들은 길 위에서 숫제 춤이라도 추는 듯 껑충껑충 뛰놀기도 했다. 역시 인간은 부지런해야 사는 것인지, 사래 긴 보리밭 들에 엎치고 있는 아낙네들은 차가 곁을 지나가도 고개도 들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새 차 안을 어슬렁거리던 이동 형사가 가야부인이 타고 있는 앞줄에서 학생풍의 청년 한 사람을 데리고 나간다. 청년은 영양실조인 탓인지 얼굴에 노랑꽃이 피어 있었다. 가야부인은 독립만세를 부르다 죽은 시숙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오봉선생은 피검된 지 한 달이 되어도 풀려나오질 못했다. 또 한 달을 썩었다. 석 달째 접어들어서 겨우 송청⁕이 되었다.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거였다. 감옥 앞뜰에 있는 벚나무들은 꽃이 진 지가 오랜지 잎만 시퍼렇게 무성해 있었다. 새벽마다 뻐꾹새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그는 무릎을 곤두세우고 버릇없는 마룻바닥에 누운 채 가끔 「자규(子規)」 란 옛 시구를 속으로 읊조렸다.
나라 잃은 한은 천 년이 지나도 남는 것인가?
철쭉은 피를 뿜는 자규의 울음인 듯……
(蜀魂千年尙怨誰 聲聲啼血染花枝)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고 한 작자의 그 기백이 좋았던 것이다.
송청이 된 뒤에도 공판까지는 상당한 시일을 끌었다. 딴은 생사람 잡는 국사(國事)들에, 그 비단 같은 말처럼 다망했으리라! 그래서 석 달이 꽉 찼을 때에 겨우 공판에 회부가 되었다.
소위 이같은 ‘한산도 사건’이란 것의 공판날에는 재판소를 찾아드는 진객들이 많았다. 이와모도 참봉의 아들이 고등계의 일을 보고 있는 바로 그 도청과 나란히 선 재판소 앞뜰에는 아침 일찍부터 피고들의 가족들이, 어떤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구데기처럼!’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절 일을랑 사위에게 맡겨두고 시아버지의 옥바라지에 매달려 있던 가야부인을 비롯해서 오봉선생의 가족들도 물론 와 있었다.
가야부인의 흰칠한 키가 그들을 쉬 눈에 뜨이게 했다. 방청석은 이내 초만원을 이루었다. 피고들이 입장할 때는 조용히들 앉아 있으란 간수들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청객들은 모두 와 일어섰다. 오래 못 보았던 자기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혹은 남편들의 얼굴이라도 빨리 보자는 것이었다.
용케도 모두 백발을 떠 인 피고인들이 청어처럼 줄느런히 포승에 묶여 들어왔다. 언제 배웠는지 젊은 죄수들처럼 제법 방청석을 흘깃거릴 줄을 안다. 모두 껍데기만 남은 듯한 핏기 없는 얼굴에 퀭한 눈들을 박고 있었다.
“아구메!”
하면서, 가야부인이 별안간 앞으로 비비대기를 치고 나갔다. 그녀는 날쌔게, 포승에 묶인 시아버지의 두 손을 꽉 쥐며 마구 울었다. 오봉선생의 이마에 시퍼런 멍이 커다랗게 들어 있었던 것이다.
“고라 고라(야 이것아)!”
앞문 쪽에 서 있던 간수가 꽥 소리를 치며 달려왔다.
가야부인은 내처 시아버지의 손을 쥔 채 설움과 분함에 사무쳐 흐느끼기만 했다.
“요놈의 요보가요(요 조선년이)!”
간수는 우격으로 가야부인을 떼내고는 뒷자리로 우악스럽게 밀어버렸다.
“간수는 부모도 없소?”
가야부인이 넘어질 듯하다 돌아보며,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몸에 닿은 듯이 악을 쓰자,
“니기미 시바라다!”
이런 욕지거리와 함께 숫제 걷어차기라도 할 듯이 다리를 움쭐하며 간수는 퉁방울 같은 눈알을 굴렸다.
일을 맡은 재판관들이 앞벽 쪽에 달린 육중한 흑단빛 널빤지문을 밀고 들어와 앉자, 소란하던 장내는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 신경이 그리로 쏠렸던 것이다.
곧 재판장의 인정신문이 시작되었다: 그는 서류를 받아들더니,
“허……?”
하다 말고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곤 이내 입술을 날카롭게 모았다. 아마 여태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안한 것이 몹시 비위에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웅, 허웅 나왓!”
오봉선생이 두목 격인지 맨 먼저 이름을 불렀다. 그는 수갑을 찬 채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성명은?”
경어를 쓰지 않았다. 상대가 ‘죠오센징 (朝鮮人)’이니까!
“인자 막 부른 대로요.”
오봉선생은 반말을 썼다. 그것이 괘씸한 듯이 재판장은 처음부터 눈에 쌍심지를 올렸다.
“이쪽에서 묻는 대로만 대답해! 나이는?”
“무진생이요.”
“무진생? 무신 소리고? 나이가 몇이냐 말이다?”
육갑법을 모르는 모양이다. 딱할 노릇이다.
“글씨 (글쎄) 무진생이라고 하지 않았소.”
상대방의 하는 태도가 얄미워서 오봉선생은 일부러 이렇게 버티었다. 가뜩이나 푸른, 재판장의 면돗자리가 더욱 푸르러졌다. 말소리도 높아졌다.
“이루미(이름) 따라 곰이 한 가지로구나! 한 사리 두 사리 하는 고곳도 몰랏? 메이지 (明治) 몇년에 났어?”
“명치가 아니요. 고종 오년이요.”
오봉선생은 내처, 침착한 표정으로 우리 연호를 쓰며, 고개를 들고 맞서듯 했다.
“고론 말이 하니, 나뿐 짓이 하지!”
재판장은 서슬이 시퍼레지며 테이블을 탁탁 쳤다.
“여쉰여덟이요.”
누군가가 뒤에서 나이를 대주었다.
“누가 니보고 말이 하라 캤나? 오노리 재판이 고마니 한다!”
약이 오를 대로 올랐던지, 재판장은 펴놓았던 서류를 확 뒤덮고서 일어섰다. 그러곤 휴정에 들어갔다.
오봉선생은 동지들이나 가족들에게 미안한 듯이 뒤를 잠깐 돌아보았다. 놈들의 하는 짓이 그저 이렇고 이렇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정말 싱겁고도 분한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질질 끈 재판이 거의 한 달이나 걸린 뒤 오봉선생은 집행유예 삼 년이란 억울한 판결을 언도받고, 동지 유생들과 함께 그 지긋지긋한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그러나 칠십이 가까운 노령으로서 겪은 억울한 고문과 옥고는 오봉선생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는 출옥하던 그날부터 누운 채 결국 일어나지를 못했었다. 가야부인은 마치 그것이 자기의 책임이나 되는 듯이 갖은 간호를 다했으나 결국 백 약이 무효였다.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오봉선생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모여 앉은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다들 듣거라, 명호 메누리가 이 집안에서는 제일 큰 어른이데잇! 그 어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러고는 점점 멀어져가는 의식을 억지로 잡아매기라도 하듯, 눈까풀에 힘을 주어 가야부인 쪽을 쏘아보면서,
“공자의 인(仁)이나 석가의 자비심이…… 근본에 있어서 같다고 했……제?”
겨우 이렇게 더듬거리고 눈을 감은 것이 결국 최후가 되고 말았다. 그만큼 그는 유교사상에 무서운 집념을 가졌던 것이다. 감옥에서 받은 앞이마의 푸렁 덩이가 이내 시커메져갔다.
가야부인은 오봉선생이 마지막 눈을 감았을 때 비로소 합장기도를 올렸다. 그녀의 곱게 감은 눈 속에는 사랑 앞 모란꽃이 소리 없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들이 흡사 시아버지 오봉선생의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소원들같이 느껴질 때, 그녀의 눈귀에 이슬 같은 눈물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것이 가야부인이 시집온 이후 허씨 가문에 있어진 세번째의 비극이었다.
오봉선생의 장례가 집행된 것은 칠월 초순경이었다. 당신의 아버지와 아들의 뒤를 이어 모두 비명이라 할 수 있는 세번째의 비극이었지만, 장례식만은 시골치고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성대한 장례식이었다.
오봉선생의 장지는 그의 호가 유래된 바로 그 오봉산의 주봉이 흘러내리는 중턱 ‘싸릿등’ 이라고 불리는 등성이였다. 벌써 거기는 비명 객사한 이녁 아버님과 독립만세를 부르다 참살된 아들이 앞서 묻힌 자리니까, 새로 마련된 선영 이라 할 수 있다.
칠월 초순이라면 첫더위가 만만찮을 무렵이다. 그렇게 만만찮은 더윈 데도 불구하고, 오봉선생의 장례에는 제법 ‘인산인해’ 란 말을 써도 무방할 만큼 조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게다가 유별나게 눈에 뜨이는 것은 비록 ‘유림장’은 아니었지만, 고인과 교분이 있는 각처의 유생들이 만만찮게 모여든 사실이었다. 더위를 무릅쓰며 철릭에 장축을 든 모습이라든가, 유복(儒服)을 정제한 풍도며, 전이 흐들갑스럽게 큰 갓에 중치막을 입고 태극선을 흔드는 광경들은 아마 그 지방으로서는 처음인 듯, 어린애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숫제 무슨 구경삼아 쳐다들 보았다. 또 그들이 마련해온 큼직큼직한 만장들!
堂堂大義生前業 烈烈精神死後明
千秋寃恨憑誰問 寂寞荒陵白日明
(살아 하시던 일은 당당한 대의였고,
열렬한 정신은 사후 더욱 빛나리.
천추의 원한을랑 뉘더러 풀어볼까,
적막한 무덤 위엔 햇빛만 밝고녀!)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발인제가 끝나자, 운아(雲亞)와 명정, 그리고 공포(功布)를 앞세우고, 이러한 내용들의 만장이 하늘을 뒤덮듯 했다.
동신(洞神)을 모신 ‘거릿대’가 있는 곳을 피해서, 견전(遣奠)이 하필 동구 오른편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는, 이와모도 참봉의 문전 가까이서 베풀어졌다. 송죽을 그대로 찍어 붙인 듯한 커다란 병풍이 둘려진 제상 위에서, 서리 같은 눈씨를 한 오봉선생의 사진이, 그의 유택의 자리인 오봉산 중턱을 건너다보듯 놓여졌다.
“오호통재(嗚呼痛哉)로다!”
하고 시작한 양접장의 추도문 낭독이 동민들의 흐느낌 속에서 끝나자, 읍에서 달려온 청년단체의 한 대표가 숫제 울면서 또 조사를 읽었다. 그러곤 모인 유생들의 정중한 분향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울지는 않았다. 그저 침통스런 표정들만 지녔었다. 오봉선생처럼 눈동자가 파르스름한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그러한 유생들이 분향을 하고 절을 올릴 때는, 구경하던 개구쟁이들까지 고개를 수그렸다. 가야부인은 그러한 유생들 가운데, 전번날 고인과 함께 재판을 받던 얼굴들이 섞여 있음을 보자, 설움에 어깨가 더욱 흔들리었다.
물론 이와모도 참봉도 분향을 하였다. 유생들처럼 제법 점잖게 자리에 나아갔으나, 동네 사람들은 대개 그로부터 얼굴을 돌렸다. 하필 거기서 노전을 차린 것이 눈꼴틀리기나 한 듯이 그는 자기 집 대문 쪽을 흘끗거리기도 했다.
구슬픈 만가와 더불어 장렬은 이내 산길을 더위잡았다. 분홍색 메꽃이 군데군데 두렁을 수놓고 있는 천수답 비탈을 지나자, 길은 드디어 거친 풀과 오금드리 잡목으로 덮이고 말았다. 그처럼 곱게 피던 진달래도 꽃지고 나니 엉성한 덤불. 인동(忍冬), 왕머루덩굴쯤은 그래도 나은 편, 가시 돋친 찔레나무나 청미래덩굴은 옷자락을 사뭇 찢거나 이치게* 하게 마련이었다. 남자들은 걸타고 넘기도 하였지만 안상주들은 그리도 못하고 피해가자니 더욱 힘이 들었다.
“그렇기 봐라, 오지 마라 카이.”
가야부인은, 계집아이로서는 그래도 장손이라고 요질(腰絰)을 두르고 따막오는 분이의 손목을 끌고 가느라고 안해도 될 수고까지 했다.
길이 그러고 보니 상두꾼과 상주 이외의 조객들은 자연 이리저리 흩어져 올라갔다. 거기서도 이색진 것은 역시 유생들이었다. 아무리 더워도 복장을 헐지 않고 줄느런히 줄을 지어 올라갔다. 상여가 도중에서 머물러 쉴 때에도 그들은 장지를 향해서 곧장 나아갔다. 장지인 ‘싸릿등’까지 가서도 허진사와 그의 손자의 무덤을 돌아본 뒤에야 비로소 옷가슴을 헤치고 땀을 가시었다. 이와모도 참봉도 양접장의 뒤를 따라서 유생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그는 수월찮은 나이에 몸이 워낙 욱중했기 때문에 내처 비지땀을 흘렸다.
유생들 가운데서 풍수깨나 아는 선비가 있었던지 자연 그런 얘기가 오갔다. 과연 명당이 그럴듯하다든가, 바로 ‘와우형(臥牛形)’이 아니냐느니, 혹은 주산에서 흘러내린 소위 ‘용래(龍來)’ 란 걸 훑어보고는 ‘혈(穴)’을 잘 맞혔다느니, 더러는 먼산만 보고는 ‘조산(祖l山)’이 되었다느니 해서, ‘좌청룡 우백호’ 하는 정도를 훨씬 넘어선 얘기들을 하였다.
태연스럽게 그러한 얘기들을 나누던 유생들도, 오봉선생의 관이 땅속으로 들어가자, 상가 가족들 못지않게 비통한 표정들을 하였다.
오봉선생의 옥중 동지였던 한 선비는 일부러 가야부인을 찾아와서 흐느끼는 부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까지 하였다. (그는 재판정에서 그녀의 얼굴을 기억 했던 것이다.)
“오, 효부였더군! 내 까막소에서 오봉으로부터 잘 들었소. 친정이 김해라 했지요? 나는 창원이요. 창원 김진사라면 다 아요.”
이러고는 다시,
“억울하지! 만약 우리 오봉과 가야부인 같은 이들만 이 땅에 살았더람……”
이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선비들이 모여 앉은 잔디밭께로 돌아갔다. 위엄이 있는 말씨라든가, 자가 넘게 자란 흰 수염을 바람에 날리며 돌아가는 모습이 과연 기백이 대단한 어른같이 보였다. 결국 이 창원 김진사란 선비가 그냥 있지를 않았다. 평토제가 끝나고 해반과 아울러 으레 있는 식사와 주찬이 나돌 무렵이었다. 술도 얼마돌지 않았을 땐데, 별안간 선비들이 모여앉은 자리에서 호통소리가 일어났다.
“이놈, 개 같은 놈!”
소리의 주인공은 아까 그 창원 김진사란 늙은 선비였다. 그는 계속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오봉은 바로 네 자식이 쥑있단 말여! 알겠나, 이 개 같은 놈아? 알았음 썩 물러가거라! 뻔뻔스럽게…….”
“이놈이 무슨 소릴 대에놓고(함부로) 하노?”
상대방은 역시 이와모도 참봉이었다. 이와모도도 같이 수염을 떨어댔다. 얼굴이 넓적해 그런지 꼭 삽살개가 으르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는 처음부터 자릴 잘못 잡았던 것이다. 애당초 그런데 온 것부터가 그렇고·…… 그러나 그도 지기는 싫었다. 지다니!
“이놈아, 안 가라 캐도 갈 끼닷! 버릇없는 니놈과 자리를 같이하다니……”
이와모도 참봉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상주들이 달려가 말리었으나, 이와모도 참봉은 들을 리 만무했다. 그는 화를 머리끝까지 올려가지고 어기적어기적 산을 내려갔다.
“저런!”
상가측에서 백관 한 사람이 급히 그를 뒤따라갔다.
‘쥑일 놈들!…….’
이와모도 참봉은 집에 돌아와서도 화를 냈다. 생각할수록 분해서 치가 떨렸다.
웃옷을 훌쩍 벗어 사랑방 앞 청기둥에 걸기가 무섭게 안뜰을 향해 소리를 쳤다.
“어서 세숫물 내오너라!”
푸드득푸드득 세수를 하고, 뒤미처 마누라가 등까지 닦아주어도 속이 시원치를 않았다. 꿀냉수를 두 그릇이나 연거푸 들이켜도 그저 그랬다. 사실 그래서 풀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속이라도 시원하게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는 일이고. 생각할수록 속이 달아올랐다.
그는 헛가래를 몇 번이나 내리 뱉었다.
“머어 한다고 산에꺼정 따라갔덩기요. 그만 노전에나 얼굴을 내고 말 일이지.”
마누라는 자세한 영문도 모르고 이런다.
“글씨…….”
영감 역시 이럴 내기다. 속으로만 ‘죽일 놈들!’을 되씹었지, 어떻단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게!” ¨
이와모도 참봉은 등 뒤에서 부채질을 해주는 마누라의 손에서 부채를 뺏듯 받아들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마누라까지 귀찮았던 것이다.
마누라는 수상타 생각하면서도 그의 비위를 거스르기 싫어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홀로 앉은 이와모도 참봉의 눈은 싫으면서도 ‘싸릿등’께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그렇다! 아직도 오봉의 장지에는 사람이 허옇게 모여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하필 장지를 저게다 정할 끼 멋꼬!’
그는 가라앉던 불뚱이*가 다시 치솟았다. 맘대로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사람을 보내서 싹 쓸어버리고 싶었다.
그는 불룩한 배에다 대고 부치던 부채마저 던져버리고 방으로 기어들어갔다. 빳빳한 등등거리*도 빼내고 땀받이* 하나 바람으로 서늘한 장판바닥에 등을 붙였다. 역시 그편이 시원했다. 머리도 조금 식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똑바로 쳐다보이는 천장지의 무늬가 또 마음에 거슬렸다. 그놈의 포도 이파리들이 꼭 그 창원 김진사란 놈의 수염 달린 상판대기 같았다.
“엑 이놈ㅡ”
괜히 그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치면서 천장을 쳐다보고 눈을 부릅떴다. 중의* 벗고 환도 차는 격이랄까. 천장에다 대고 가래라도 탁 뱉어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 여기저기 엉겨붙은 동글동글한 포도알들이 마치 그러한 자기를 비웃는 눈깔들 같기도 했다.
이와모도 참봉이 그러한 자신을 냉정히 반성하게 될 때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치가 않았다. 이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경부보로 있는 큰아들 천석이의 죄라고 생각했다.
물론 창원 김진사란 놈도 사람이 덜 돼먹었다. 하필 만인 중시리에 그렇게까지 할 게 뭐냐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따지고 보면, 놈이 어쩜 천석이한테 호되게 당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긴 자식놈이 조금 우락부락하니까. 아무리 고등계 밥을 먹고 있기로서니, 애비가 일부러 찾아갔는데도 불구하고, 왜놈들이 그래도 무엇할 텐데 되레 제가 나서서 애비 친구의 면회까지 안 시켜줄 정도니까…… 아무튼 좀 지나친 놈이라, 자기까지 그런 봉변을 당한 거라고 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시 그날 당한 것만은 분했다. 놈들이 아직 자기에게 대한 말들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느닷없이 또 불뚱이가 치솟았다.
“쥑일 놈들!”
그는 다시 천장에다 대고 구두덜거렸다. 반응 없는 발악이었다. 아무리 고쳐보아도 천장지에 그려진 포도잎 무늬가, 그 창원 김가란 놈의 광대뼈가 쑥 불거지고 구레나릇이 곧게 빠진 상판대기를 닮아 보였다. 당장 확 걷어내고 다른 것으로 갈아 발랐으면 싶었다. 그러나 도배를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다시 그러기도 우스꽝스럽고 해서 괜히 짜증만 더 났다.
그러나 일은 짜증 정도로써 끝이 나지를 않았다. 그날 저녁은 우선 분한 나머지라 그랬다 하더라도, 그 이튿날도 사흗날도 잠을 달게 잘 수가 없게 되었으니 탈이었다. 그리고 그런 증세가 내처 계속되었다. 불면증에 걸린 것이었다. 물론 모기장을 치고 잤지만 어쩌다가 한 군데쯤 물린 자리가 더욱 잠을 앗아갔다.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정말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인제 그 창원 김진사란 사람을 생각지 않더라도 신경이 곤두섰다. 천장만 쳐다보면 이내 속이 뭉클거렸다. 포도무늬만 봐도 이가 갈리었다. 캄캄한 밤중에 천장이 있다고만 생각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밤중에 일어나 장죽을 더듬어 들고 천장을 아무 데나 콱 뚫어버리기도 했다. 자다가 “이놈들!” 하는 잠꼬대가 곁방에 자는 사람들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증세가 악화되었다.
물론 입맛도 떨어졌다. 아무리 먹음직한 진미가 상에 놓여와도 저가 잘 가질 않았다. 별 먹는 것이 없는데도 변비증이 잦았다. 그것도 미칠 지경이었다. 한 번 뒷간에 가면 수식경씩 앉아 있어야 되고, 어쩌다가 나오는 거란 꼭 염소의 그것처럼 새까맣게 탄 것이었다. 그러다간 말경엔 치질까지 심해져서 피가 사뭇 쏟아지고 미주알이 빠졌다. 마누라가 그놈을 밀어넣는다고 땀을 뺐다. 약도 무던히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걷잡을 수 없이 말라만 들어갔다. 그래서 마누라는 생각한 나머지 그게 그저 병이 아니라 죽은 오봉의 혼신이 덮친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약을 써도 안 나으니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바아라, 내 말이 옳을 끼데잇!”
마누라는 아이들에게 이런 장담을 하고서, 태고나루께로 내려갔다. 명도*를 부리는 천금새란 무당을 찾아간 것이었다.
천금새는 그 무렵 절 때문에 애살*과 앙심이 가슴에 차 있었다. 몇 해나 데리고 살던 서방까지 구기박질러가면서, 매일같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부글거리는 불뚱이를 참을 도리가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기의 신주를 모신 곳에서 엎어지면 코라도 닿을 자리에 그놈의 미륵당인가 쥐뿔인가 하는 쬐깐 절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부터는 자기에게 ‘삼신풀이’라도 능히 청해올 만한 사람들이 생남불공이니 뭐니 해서 자연 그 길로 빠져나가게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으레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짐작했던 터이라, 천금새 부부는 절터를 닦을 때부터, 오고가는 사람들을 붙들고는 넌지시 반대 의사를 표시했었다.
“땅에서 부체가 나왔이문 나왔지, 그기 머 대단한 기라고!”
천금새는 이렇게 빈정거렸고,
“절을 지을라면 널찍한 데가 지을 일이지, 와 해필(하필) 남의 신주 모신 곁에다 지을라 카노?”
남편 박수는 이렇게 투덜거렸다. 말하자면 일종의 텃세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드러내놓고 크게 못 나오고 또 막지 못한 것은, 그 일을 원체 설두한 분이 바로 가야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가야부인은 보리 날 철, 나락 날 철이 되면 으레 계면을 도는* 천금새에게 꼬박꼬박 곡식 몇 말씩을 순순히 내어주던 은인일뿐더러, 또 그 일을 맡아서 하던 그분의 사위인, 홀로 있는 박서방이란 젊은이가 워낙 대가 찬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죽은 내 마누라를 위해서 내가 절을 짓는데 누가 무슨 말을 할 낀고?”
박서방은 처음부터 이런 조로 나왔다. 그렇게 죽은 처를 들고 나오는 데는 아무도 섣불리 건드릴 사람이 없었다. 사실 완고한 유교 내림의 집 안인 처가에서도 그것을 묵인하고 있는 터이었으니까.
천금새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자기 집 방 안에 차려둔 ‘신주상’ 앞에서 ‘비손’*이나 ‘푸념’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강남서 나온 무학이 걸령쇠 띄워놓고
팔도강산을 역력히 살펴보니
경상도 태백산은 낙동강이 둘러 있고
그 강 하나 건너뛰면
남북 해동 조선국의
영산 대산 오봉이라
수국 용왕 노는 곳에
터를 받은 신씨 내외분……
이렇게 서두를 꺼내놓고는, 사시나무처럼 전신을 떨어대며, 엎어놓은 징을 더욱 잦게 두들겼다.
대월은 서른 날이요, 소월은 이십구 일이요,
금년은 열두 달, 좌우 삼백 예순 날이 내내 돌아갈지라도,
안과 태평하게 치성 이올시다……
그러나 이렇게 축원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별안간 눈이 이상스럽게 빛나며, 푸념의 곡절이 갈팡질팡해졌다.
미륵이면 미륵이지
무슨 죄를 지었건대
도솔천 내원궁에
들지를 못하고서
수로만리 떠돌다가
흑간지옥 진흙 속에
생매장이 되었다가……
이러고는 미친 듯이 일어나서, 소반 위에 있던 물그릇을 덜렁 들어, 미륵당이 서고 있는 쪽을 향해 그 물을 확 뿌리며,
“엇쇠, 썩 물러가거라! 미련한 미륵신아!”
그러고는 대개 집을 핑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절은 제 설 대로 서갔다. 겉일이 거의 끝나고 안수장*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그럴 때 마침 오봉선생이 객지에서 구속이 되었다는 소문이 펴졌다.
한창 구겨져 있던 천금새에게는 그 소식이 은근히 반가웠다. 속으로 ‘잘코사니!’를 외쳤다. 그날부터 그녀는, 한동안 잘 나타나지 않던 안동네에도 곧잘 나타났다. 열두 부락을 팔랑개비처럼 돌아다녔다.
“진사영감이 갇혔다 카지요?”
가는 곳마다 능청을 떨며 이런 질문을 하였다. 물론 ‘이상하지요?’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러고는 뒤미처, 가야부인이 설두를 해서 미륵당이란 절을 세우더니 웬일인지 멀쩡하던 그녀의 시아버지가 갑작스레 그런 날벼락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상한 일이제’ 하는 표정은, 벌써 엉덩이를 촐싹거리는 천금새에게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냉거랑’ 빨래터에는 한동안 그런 얘기가 판을 쳤다. 촉새 같은 부리들은 천금새가 모시는 용신님의 동티라고까지 오두방정을 떨기도 했다.
그런 말들이 가야부인의 귀에 들어가자, 가야부인은 같잖다는 듯이 웃으면서,
“미친 것들! 만주 가 돌아가신 시할아버님도 절을 지어서 그렇고, 만세 부르다 생죽음을 당한 우리 밀양시숙도 절 때문에 그랬던강?”
애당초 상대도 하지 않았다. 천금새는 그러고 부터 지레 짙렸음인지 그처럼 만만하게 드나들던 가야부인의 집에는 발을 뚝 끊었다. 가야부인은 도리어 자기가 뭘 섭섭하게 한 일이나 없었던가 궁금했다. 그녀는 그런 경우 대개 자기가 인간에 덕이 없는 탓이라고 느끼는 성미였다.
일부러 찾아온 이와모도 마나님의 말을 듣자, 천금새는 금세 반색을 하며,
“옳고말고요! 그 말이 적실합니데잇!”
영락없이 이와모도 참봉에게 죽은 오봉의 혼신이 덮였으리란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귀신은 보통으로써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천금새는 그것을 미리부터 알기라도 하는 듯이, 용수같이 생긴 긴 상판을 일부러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어이구, 우선 살았을 때의 그 고집 보지, 어떤 고집이라고요!”
이와모도 참봉의 집에 기돗긋이 벌어진 것은 그러고 며칠 뒤의 일이었다.
이왕이면 복덕일 (福德日)이 좋았다.
이틀 전부터 마을 어귀에 있는 ‘거릿대’와 해묵은 느티나무에는 금줄이 둘리고, 그 언저리에는 붉은 황토흙이 뿌려져 있었다. 이와모도 참봉집 솟을대문 주추께도 부정을 막기 위한 황토가 놓여 있었다. 부잣집에서 하는 굿이니 볼 만할 거라고, 열두 부락 아낙네들이 아침 일찍부터, 오색 깃발이 늘어져 있는 이와모도 참봉집 안뜰로 모여들었다.
안채의 처마에 잇대어서 마당 한가운데까지 높이 쳐진 포장 밑에는, 백설기를 비롯한 몇 가지 제물로써 제격대로 차려진 신주마다의 진설상(陳設床)들이 죽 늘어놓이고, 쾌자 위에 노랑 목도리를 걸친 원무당 천금새를 중심으로 얼굴에 분칠을 한 화랑이*들과, 풍악을 맡은 기무(技巫)와 악수(樂手)와 전악(典樂) 들이 자리를 잡고 둘러 앉은 품이 아닌 게 아니라 부잣집 굿 같은 기분이 났다.
우선 부정을 물리치는 굿의 첫마당부터 천금새의 눈은 숫제 이상한 광채를 나타내었다. 소위 강신을 위한 ‘가망’으로부터 신탁(信託)과 무악(舞樂)으로 진행되는 ‘산마누라’에 접어들면서 굿은 점점 무르익어갔다. 늴리리 덩더꿍의 풍악에 맞춰 쾌잣자락을 흩날리며 무녀들의 춤은 멋들어지게 덩실거렸다.
덩더꿍 덩더꿍!
제 장구 소리에 흥이 나서 갓이 젖혀진 기무들도 어깨가 절로 우쭐우쭐했다.
백의 승복(白衣僧服)을 바꿔 입고 제석(帝釋)을 청배(請拜)하는 장면이 나오자, 구경을 하고 있던 보살할머니들까지 갑자기 덩실거리기 시작했다.
이와모도 참봉의 병세가 심상치 않은지라 바삐 한다고 해도 ‘열두거리’의 전반이 끝났을 때는 해가 이미 낙동강 저편 고암산 위에 뉘엿뉘엿, 이상스런 까마귀떼의 나래를 물들이고 있었다.
굿의 후반에 들어가기 전에, 몸져누운 이와모도 참봉이 마당 한가운데로 들려나왔다. 곧 ‘오귀’*가 시작되는 것이다. 땀을 팥죽같이 흘리는 무배들과는 정반대로, 팔월 염천인데도 한기가 들이치는 판이라, 이와모도 참봉은 앉은 채 목 위만 빠끔 내놓고는 온통 핫이불에 둘러싸였다.
“남북 조선 해동국에, 갑술생 전주 이씨…….”
사연 풀이를 시작하는 천금새의 목청은 한결 청승스럽게 떨렸다.
그리고 쾌자 소매를 나붓거리며 사뿐사뿐 춤을 추는 발짓도 가벼워졌다.
“어이, 이와모도야잇!”
되풀이되는 천금새의 아양에,
“워우 워우 워우, 구웃이야!”
오동장구를 부둥켜안은 기무는 이런 후렴을 먹이면서 덩더꿍거리는 두 어깨를 흡사 용수철처럼 떨었다.
“어이, 이와모도야잇!” 하고 이름이 불릴 때마다, 병자가 눈을 번쩍 떠본다든가, 자라처럼 움츠렸던 목을 쑥 빼고 두리번거리는 꼴이 또 가관이었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듯이 천금새는 더욱 고개를 히뜩거리며 ,
“그래 그래 그 넋인가?”
덩더꿍, 덩더꿍!
“난데없이 떠들온 몸이一”
덩더꿍, 덩더꿍!
“저언생에 무슨 일이―”
“워우 워우 워우, 구웃이야!” :
“지독히도 맺혔던가배?”
덩더꿍, 덩더꿍!
이렇게 해서 푸념의 화살이 별안간, 죽은 오봉선생에게 넌지시 돌아가자, 그것을 눈치챈 구경꾼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긴장된 표정들을 하였다.
한결 숨이 가빠진 천금새는 과연 신령님의 위력에 억눌리기라도 하는 듯이 얼굴빛이 점점 파르족족해갔다. 눈의 흰창도 요란스럽게 희번덕거리고.
“아이고 저 늙은이들 보래! 키가 크이 뒤에 서 있어도 구경하기가 얼매나 좋겠노?”
남들이 이렇게 부러워하던 가야부인이 곁에 있는 밀양동서의 옆구리를 쿡 쩔러서 나란히 자리를 뜬 것은 바로 그때였다. 워낙 두 분이 다 훤칠한 키라 그것이 또 남의 눈에 유달리 띄었다. 물론 천금새도 그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악지 센 목소리는 잡귀 잡신을 대접하는 뒤풀이로 들어갔다.
상청은 서른여덟 수비
중청은 스물여덟 수비
하청은 열여덟 수비
우중간 남수비, 좌중간 여수비
베루 잡던 수비, 책 잡던 수비
많이 묵고 가거라.
군응왕신 수비 왔거든 많이 묵고 가거라.
손실 병상 수비 왔거든 많이 묵고 네 가거라.
해산영산에 간 수비 오거든 많이 묵고 네 가거라.
수살영산 간 수비 왔거든 많이 묵고 네 가거라.
먼길 객사 간 수비 왔거든 많이 묵고 네 가거라.
언덕 아래 낙상 수비 많이 묵고 네 가거라.
염병 질병 돌아간 수비 많이 묵고 네 가거라. :
여러 각항 수비들아 많이 묵고 네 가거라.
덩더꿍 덩더꿍, 덩더꿍 덩더꿍!·…… 뒤풀이의 장단이 잦은고비를 한참 넘고는, 마침내 화랑이가 들고 있던 넋대가 덜덜덜 떨며 이와모도 참봉집 대문을 나섰다. 중추 명월이 벌써 하늘에 떠 있었다.
달이 밝아서 좋았다. 돌담을 끼고 도는 좁은 골목길로 넋대는 스륵스륵 소리를 내면서 나아갔다. 넋대를 잡은 화랑이 뒤에는 천금새, 그리고 그 뒤 엔 동네 애들이 우 따랐다.
물론 이와모도 참봉은 이불에 싸인 채 방 안으로 들려들어가고, 마당에는 굿잔치가 벌어졌다. 굿떡은 복이 많다 해서 앞을 다투듯 손들을 내밀었다.
넋대는 가야부인의 집 앞까지 가더니 담벼락을 두어 번 툭툭 치고는 이내 돌아섰다. 동네 어귀에 있는 해묵은 느티나무의 밑동을 한 바퀴 돌고선 계속 널찍 한 들길로 빠졌다.
빨랐다. 들길에 나서자 거의 달리듯 나아갔다. 흔히 그러듯, 용왕님이 계신다는 태고 앞 시퍼런 강굽이께로 가는가 했더니 도중에서 느닷없이 산길을 더위잡았다. 산길 가 산밭들에는 메밀꽃이 한창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밤에 눈처럼 얼어붙은 것 같은 메밀밭들은 그 숱한 풀벌레 소리도 멎고 그저 그림 같이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한 메밀밭들이 있는 언덕을 넘어서자, 넋대는 곧장 불이 빤한 미륵당 쪽을 향해 갔다. 이윽고 넋대는 미륵당 문전에 다다랐다. 서성거렸다.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 그날따라 절문이 굳게 닫겨 있었다.
넋대는 이와모도 참봉을 덮친 악귀의 꼬투리가 바로 그 안에 있기나 한 듯이, 미륵당(마침 죽은 오봉선생의 망령을 위한 재가 거기에 붙여져 있었다) 대문구틀 짬 땅바닥만 툭툭툭 쳐댔다. 천금새는 무슨 주문을 중얼중얼하고는 거기에다 ‘물밥’*을 철썩 엎질러버렸다.
그러고 돌아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삽 같은 데 뜨인 물밥과 흙더미가 느닷없이 천금새를 비롯한 일행의 머리 위에 마구 덮씌워졌다.
“아이구메!”
도리어 물밥과 흙더미를 뒤집어쓴 일행은 마치 범불이라도 만난 듯 사산분주*를 해버렸다. 굿으로서는 엉망이었다. 가장 긴요한 뒤풀이가 그 모양이 됐으니까!
천금새는 질겁을 해서 간이 콩낟같이 움츠러들었으나 원무당으로서 어쩔 수 없이 이와모도 참봉의 집까지 돌아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와모도네 가족들과 구경꾼들은, 말이 없는 천금새와, 넋대조차 내던지고 돌아온 화랑이의 새파랗게 질린 표정보다 우선 물밥과 흙을 뒤집어쓴 그녀들의 쾌자 꼴을 보고서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것을 짐작했다.
천금새는 새전(賽錢)을 챙길 정나미도 없어 싱겁게 이와모도 참봉의 집을 물러나왔다. 오동장구를 둘러멘 그녀의 남편이랑 다른 긋패들도 얼떨떨한, 더러는 불만스런 얼굴들을 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누가 물어도 미륵당 중은 모른다고 하였다. 결국 동네 사람들은 제멋대로의 억측들을 하였다. 그날 저녁에 가야부인의 사위 박서방이 질에 가 있는 걸 누가 보았다느니, 혹은 오봉선생의 혼신이 화를 내서 그랬으리라느니, “아니 산신령님이 그랬대!” 하는 식으로 그저 구구한 억측과 소문들만 나돌았다. 아무튼 용왕님을 모시고 있는 천금새가 말을 하지 않으니까 사실 마을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알 길이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천금새가 그처럼 많이 들춘 신들이며, 심지어 ‘물밥’에 술까지 대접한 오봉선생의 혼신조차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증거로는, 굿을 하면 나을 줄을 알고, “어이 이와모도야잇!” 할 때마다 눈을 끔벅끔먹하던 그 이와모도 참봉이 웬일인지 그날 저녁부터 더욱 병세가 악화되어 단 사흘도 채 못 넘기고, “이놈들아” 하며 뒤집었던 눈을 결국 감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짓말같이 가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안방 천장지에는 다행히 그 창원 김진사란 사람의 얼굴을 닮은 포도잎 무늬가 없었다. 또 한 가지는 여태까지 영검이 대단타고 믿어왔던 천금새에게 비손이나 푸닥거리를 청해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줄어진 사실이었다.
“물밥을 되덮어썼다문서!”
태고나루를 지나가는 소금배의 조군들까지 이렇게들 빈정거렸다.
그래도 천금새는 악지 세게, 허물어져가는 자기 집 방구석에 모셔둔 신주상 앞에서 새벽마다 징을 뚜들겨댔다. 푸념은 사시장춘 하는 것이지만, 용왕님과 조왕님을 달래는 이외에 ‘흑간지옥에 묻혔던 미륵…….’ 운운하는 것은 틀림없이 미륵당을 저주하는 것이라는 이웃 사람들의 얘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미친 듯이 징을 두드리고 빌고 해도 ‘물밥’을 뒤덮어쓴 창피는 씻을 길이 없고, 미륵당을 찾아가는 할머니 어머니들이랑 젊은 아낙네들의 수효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결국 천금새의 그따위 처방으로써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들이 줄곧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죽은 이와모도 참봉의 아들 이와모도 경부보 같은 위인들이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그들의 ‘제국’이 단박 이길 듯 떠들어대던 소위 대동아전쟁이 얼른 끝장이 나긴커녕, 해가 갈수록 무슨 공출이다, 보국대다, 징용이다 해서 온갖 영장들만 내려, 식민지 백성들을 도리어 들볶기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제국’의 빛나는 승리를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라고들 했다.
몰강스런 식량 공출을 위시하여 유기 제기의 강제 공출, 송탄유와 조선(造船) 목재 헌납을 위한 각종 부역과 근로 징용은 그래도 좋았다. 조상 때부터 길러오던 안산 바깥산 들의 소나무들까지 마구 찍혀 쓰러진 다음엔 사람 공출이 시작되었다. ‘전력 증강’이란 이유로 영장 받은 남정들은 탄광과 전장으로, 처녀들은 공장과 위안부로 사정없이 끌려나갔다. 그러한 오봉산 발치 열두 부락의 가난한 집 처녀 총각과 젊은 사내들은 이마를 히노마루(일본 국기)에 동여매인 채, 울고불고하는 가족들의 손에서 떨어져, 태고나루에서 짐덩이처럼 떼를 지어 짐배에 실렸다. (물금까지 나가면 기차편도 있었지만 차는 위데에서 오는 그러한 사람들로 항상 만원이었다.) 손자녀를, 자식을, 남편을, 딸을 그렇게 빼앗긴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아내 들은 태고나루에서 눈물을 짓다 가까운 미륵당을 찾기가 일쑤였다. “명천 하느님요!” 하고 땅을 치던 그들은 말없는 미륵불 앞에 엎드리어 떠난 아들딸들이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고 또 비는 것이었다.
“시줏돈을랑 그만두이소! 내가 대신 다 내놓았임 테이……”
돌아간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 그리고 만세통에 총 맞아 죽은 시숙과 딸의 영가*를 거기에 모셔둔 가야부인은 오면가면 그러한 분들을 위로하기에 바빴다.
“억울한 말이싸 우째 다 하겠능기요. 나도 이렇게 안 살아 있능기요.”
흐느끼는 아낙네들의 손을 잡아주며 조용히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것이었다. 먼데서 온 분은 기어이 재워 보내기도 했다. 그것은 가야부인 자신에게도 필요한 공덕이었다. 선심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가야부인은 결코 남들에게 절에 와달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절을 맡아 있는 스님에게도 그렇게 시켰다. 시주는 더욱 권하지를 않았다.
“촌사람들이 무슨 여유가 있다고! 오다가다 찾아주는 것만 해도 고맙지.”
늘 이런 투로 말했다. 염전을 하는 친정오라범이 막내동생인 그녀와 그 절을 위해서 강 건너 대동면에 사준 논 열두 마지기의 수입으로 미륵당의 유지는 가능했기 때문이다. 절을 세울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거니와, 그야말로 가야부인 자신을 위한 절이요, 불행한 아낙네들을 위한 사랑 같은 곳이었다. 무슨 기도를 드려 소원성취를 한다기보다 아들, 딸, 남편, 손자녀 들을 억울하게 빼앗긴 그녀들은 거기서 어떤 마음의 위안을 얻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불사가 없는 날에도 할머니들은 곧잘 모여들었다. 대밭각단 양접장의 할머니도
손자가 학병에 끌려가 죽은 뒤부터는 역시 미륵당에 나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유독 나오지 않은 것은, 죽은 이와모도 참봉의 가족들뿐이었다. 그러나 이와모드 참봉의 가족들이 미륵당에 얼굴을 내놓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서운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잘 안 나오지. 그럴 낯짝도 없겠지만, 나와 덕 될 끼 멋고!”
오히려 나오지 않는 것을 다행한 일인 것같이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모도 참봉의 아들이 고등계의 경부보로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녀들은 속에 있는 말을 마음대로 지껄이고 싶었던 것이다.
“왜놈들이 얼른 망해야 살지, 이래가주고싸…….”
“그 독한 놈들이 얼른 망하겠나!”
“왜놈이 망하문 끌려간 사람들은 다 죽구로?”
이건 ‘보르네오’댁이란 부인의 말이다. 그녀의 남편은 ‘보르네오’란 섬에 징용을 나가 있었다. 남편들이 징용 간 곳을 따라 ‘보르네오’ 댁이니 ‘뉴기니’ 댁이니 하는 새로운 택호들이 유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도 누가 아나?”
이미 송금(送金)이 떨어진 사람도 없지 않았다. ‘보르네오’도 소식이 끊어진 지가 꽤 오래였었다.
“그래도…….”
양접장네 손자처럼 ‘명예의 전사’ 통지가 오기 전에는 역시 희망을 가지는 그녀들이었다.
“나무아미 타불!”
가야부인은 내처 이런 한숨만 내쉬었다. 그녀는 하도 억울한 일들만 겪어온 탓인지, 남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일 뿐, 자기 이야기는 잘 하질 않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학병에 나가기가 싫어서 도망질을 떠난 막내아들의 일만 해도 그랬다.
“무슨 소식이나 있능기요?”
하고 누가 물으면,
“소식은 무슨 소식! 오는 편지 가는 편지 낱낱이 조사하는 판인데, 그런 어리석은 짓이싸 하겠나.”
그러곤,
“산 놈이싸 어델 몬 댕기겠노. 고생이 말할 수 없겠지!”
할 따름이었다. 그러한 막내아들의 일보다 가야부인에게는 우선 더 다급한 걱정거리가 있었다.
“이번에는 할 수 없임데잇! 그래 아이소.”
애국반장이란 사람이 하고 간 말.
“너무 그래 버투지 마소. 그란이라도 의심을 받고 있는 집에서……”
이건 이와모도 참봉의 조카뻘인 구장이 와서 하고 간, 반 협박조의 소리다. 그 옴두꺼비 같은 구장이 언제 옥이의 징용 영장을 들고 올는지 모를 일이었다. 속칭 ‘처녀 공출’이란 것으로서 마치 물건처럼 지방별로 할당이 되어 왔다. 저희들 말로는 전력 증강을 위한 ‘여자정신대원(女子挺身隊員)’ 이란 것인데, 일본 ‘시즈오까’ 라든가 어딘가에 있는, 비행기 낙하산 만드는 공장과 또 무슨 군수공장에 취직을 시킨다고 했었지만, 막상 간 사람들로부터 새어나온 소식에 의하면, 모조리 일본 병정들의 위안부로 중국 남쪽지방으로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기만과 강제에 의한 그들의 전쟁 희생물이었다. 어리석고 가난하고 힘없는 식민지 농민들의 딸들은 그렇게 끌려가게 마련이었다.
옥이도 바로 그러한 운명의 직전에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미천한 종의 딸이었다. 가야부인이 애초 시집올 때 데리고 왔던 몸종은 이미 커서 짝을 지어 내보내고 역시 친정에서 부리던 종의 딸을 대신 데리고 왔던 것인데 가야부인은 그 옥이를 식모라기보다 차라리 양딸처럼 귀하게 길러왔었다.
그러한 옥이가 벌써 나이 열아홉 살이다. 게다가 인품도 얼굴도 반반했지만 워낙 근본이 그런지라 얼른 적당한 자리가 나지 않아서 미처 작배를 시켜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벌써 애국반장으로부터 몇 번인가 해당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거니와, 그럴 때마다 혼처가 이미 작정되어 행례날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니 제발 덕분 빼달라고 애원을 하듯 해서 미뤄온 참이었다. 그러니 사실 인제 더 버티기도 어려운 꼴이 됐다.
물론 옥이 자신도 그걸 눈치채었다. 그녀는 반장이나 구장이 무슨 일로 찾아오면 으레 부엌 문틈으로 바깥 동정을 살피었고, 밤에는 곧잘 가야부인의 발치에서 소리 없는 울음을 울었다.
“옥아 바로 눕거라. 와 요새는 늘 발치에 그래 있노?”
가야부인이 이렇게 타일러도 옥이는 발치가 좋았다. 종의 딸이라기보다 울기에 편리 했다.
가야부인도 벌써 며칠째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딸과 같은 옥이를 놈들에게 빼앗길 수도 없었거니와, 그보다 또 한 가지 다른 걱정이 있었다. 그것은 홀로 있는 사위 박서방의 일이었다.
“빙모님, 옥인 지가 데리고 가겠심더, 누구보담도 우리 윤이를 잘 키아줄 끼고…….”
박서방은 옥이의 다급한 사정 얘기를 듣자, 대뜸 이런 소리를 했던 것이다.
“머? 그기 무슨 소리고?”
가야부인은 벌어진 입이 닫혀지질 않았었다. 아무리 무엇하기로서니 종의 딸과…… 싶었다.
“신분이 그럼 어때요? 마음씨나 일솜씨나 얼굴 생김이 어데 한 군데 나무랠 데가 있던기요. 그보다 또 당돌한 소릴는지는 몰라도 빙모님이 꼭 이녁 딸같이 키운 아이가 앙잉 기요! 그러이카네……”
누구보다도 믿고 처를 삼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옳지!’
가야부인은 선뜻 짚이는 데가 있었다. 인제 보니, 누가 무슨 혼삿말이라도 하면 “그까짓 요새 양반인 체하는 것들의 딸?” 하던 그의 말이 실은 알속이 있었던 게로구나 싶었다.
가야부인은 생각했다. 아마 미륵당을 세울 무렵에 정이 들었으리라고. 그녀의 친정 곳에서 온 텁석부리란 목수가 사위 박서방네 집에서 같이 묵고 있을 때, 그들의 조석 동자*를 시키기 위해서 한동안 옥일 데리고 갔던 것인데 그게 바르 꼬투리가 됐구나 싶었다.
“아이구, 옥이가 벌써 시집갈 나가 댔구나!”
옥이를 잘 아는 텁석부리가 일부러 이렇게 반가워하자, 유달리 얼굴을 붉히던 그때의 옥이를 가야부인은 새삼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사위의 말마따나, 인물이며 마음씨며 어디 하나 버릴 데가 있어! 그런 게 내처 조석 수롱*을 들어주고 또 그 먼 미륵당 자리까지 참이며 점심을 해 날랐으니, 젊은 나이에 혼자 있는 사위로서는 응당 정이 들 만도 했으리라 촌탁되었다. 사실 어느 쪽도 나무랄 수 없을 것 같았다. 요컨대 서로의 신분만 떼놓는다면 그야말로 좋은 배필이 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신분이었다. 박서방이 그래도 시골 양반의 후옌 데 비해서 옥이는 기껏 종의 딸이 아닌가! 그러나 사위 박서방이 정말 그렇게까지 절실히 원한다면?…… 가야부인으로서는 얼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워졌다. 시어머니에게 물어봐도 내내 그랬다.
“씨가 그래서·…… 그러나 알아서 하게.”
모든 걸 자기에게만 맡기는 성미였다. 바깥양반 역시 마뜩찮게 여기었다.
“인품이싸 그만함 댔지. 그렇지만 내림이 온천(워낙)……”
정상은 가련하나 어떻게 그렇제까지야 할 수 있겠느냐는 말눈치였다.
“그렇기요. 그래서 사돈어른들도 그 소릴 듣고는 펄쩍 띠(뛰)드라캅디더만 ……”
가야부인은 인정에만 끌려 사실 어째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고만 어름거릴 때, 결국 옥이에게 붉은 딱지가 나오고야 말았다. 역시 그놈이었다. 여자정신대원! 일본 병정의 위안부!
“내일 아침 아홉시꺼정 꼭 동사에 내보내주소!”
그 옴두꺼비 같은 구장은 그저 이 말만 하고 돌아갔다. 옥이가 마침 냉거랑에 빨래를 가고 없는 새라 대신 쪽지를 받은 가야부인은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왜놈들에 대한, 눌러오던 증오감이 다시금 불붙기 시작했다.
옥이가 담뱃진을 먹고 죽기를 작정한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추위에 얼굴을 빨갛게 해가지고 돌아온 그녀는 빨래통을 내려놓기가 바쁘게 가야부인에게 불려들어가서 ‘정신대(挺身隊)’의 영장이 나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가야부인은 그녀의 눈치를 유심히 살피었다. 옥이는 그 자리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엌으로 물러나왔다. 별안간 얼굴에 핏기가 한 낱도 없었다. 공포와 저주에 굳어지기나 한 듯이.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저녁 준비를 하였다. 파를 가늘게 저미어 장도 제대로 끓이고 상도 제대로 날랐다. 다만 얼굴에 핏기가 없고 말이 없을 따름이었다.
“와 니 밥은 안 가주왔노?”
안식구들도 언제나 방에서 같이 먹는 버릇이었는데 그날은 그녀의 밥그릇이 나와 있지 않았었다.
“정지 (부엌)에서 묵을람더.”
그저 이러고만 돌아갔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옥이는 부엌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부엌에서도 밥을 먹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기색이 통 없었다.
가야부인은 밥이 잘 넘어가질 않았다. 물도 목에 메는 것 같았다.
“내 저 건너 좀 갔다 오꾸마!”
가야부인은 밥술을 놓기가 바쁘게, 옥이에게도 들릴 정도로 이런 말을 해놓고서, 집을 나갔다. 저 건너란 건 언제나 사위의 집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간 가야부인이 웬일인지 이슥토록 돌아오지를 않았다.
옥이는 저녁 설거지를 마친 뒤에도 한참동안 우두커니 아궁이 앞에 앉아 있었다. 부엌 안은 바깥보다 어둠이 한결 빨랐다. 어둠침침한 부엌에서 불도 켜지 않고 옥이는 또 생각했다. 그리고 울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피할 길은 없고, 울어봐도 한이 없었다.
그녀는 가슴 밑 허리춤에 쑤셔넣었던 ‘정신대’의 징용 영장을 꺼내어 아궁이 속에 던져버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영장 쪽지는 발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사라졌다.
뒷문으로 빠져나온 옥이는 냉거랑 건너 박서방의 집이 있는 곳을 넋없이 바라보았다. 다닥다닥 붙은 초가지붕들이 어스름에 싸여 분명치가 않다. 옥이는 별안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녀는 쓰러지듯 차디찬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꼭뒤를 기둥에 들어댔다. 어수선한 생각과 기억들이 가뜩이나 멍청한 그녀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정말 윤이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가졌을까?…….’
박서방을 두고서다. 그녀는 달포 남짓 그의 집에서 그와 텁석부리의 조석 시중을 들었다. 빨래도 해주었다. 그러나 자기에게 이상한 내색 한 번 해본 적도 없는 박서방이었다. 그러한 그가 이쪽이 ‘여자정신대’에 나가게 된다는 말을 듣고는 별안간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그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자매처럼 사귀어 오던 분이가 일부러 그런 귀띔을 해주었기에 비로소 알았고, 또 요 며칠 사이 집안 어른들끼리 오고가는 말눈치라든가 그 밖의 태도들이 어림짐작의 탓인지 역시 그렇게 보였다.
‘정말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졌었다면?’
옥이는 윤이 아버지가 갑작스레 그리워졌다. 당장 달려가서 그의 커다란 손에 매달려보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아니!’
옥이는 하던 생각을 뚝 끊었다. 이제 막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실은 벌써부터, 미륵당의 터를 닦을 무렵 ― 그녀가 가야부인을 따라 그의 집에 가 수종을 들 그때 벌써 그에게 대해서, 어떤 존경심과 더불어 야릇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장모인 가야마님이 항상 자랑삼아 말하던 그 헌헌장부의 풍모와 대찬 성미! 그러나 내려오는 풍속과 예절은 그녀에게 존경심만 남게 하고 그 밖의 모든 감정은 모조리 거세시켜버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속으로 사랑했다는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저쪽에서 먼저 그런 말을 꺼냈다지 않는가!
……옥이는 버티어보았다. 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결국 종의 딸이었다.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도리어 정신이 말끔하게 돌아오는 것 같았다.
옥이는 불현듯이 일어나, 낮에 주워다둔 헌 담배 설대를 그 툇마루 밑에서 꺼냈다.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호롱불을 켜놓고 설대를 칼로 짜갰다. 독한 담뱃진 내가 코를 쿡 찔렀다. 됐다! 그녀는 바삐 담뱃진을 긁어내어 환약처럼 만들었다. 넘기기 좋을 만한 게 열 개도 더 되었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방법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대견스럽게 종이에 싸서 옷가슴에 쑥 밀어넣었다.
가야부인이 늦게야 돌아왔다.
“우짠 일인지 박석방이 오늘도 늦게 안 돌아오네. 갑자기 머가 그리 급한지 온…….”
가야부인은 이러면서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꽤 추워 보였다.
한밤중이었다. “웩 웩!” 하는 이상스런 소리에 온 가족이 놀라 깨었다. 소리는 뒤안에서 났다. 가야부인은 불을 켤 새 없이 뒷문을 브르륵 열었다. 등불이 켜졌다. 툇마루 앞 땅바닥에 누군가가 쓰러져있다.
“아이고 옥이 앙이가?”
가야부인은 번개같이 뛰어내렸다. 그리고 덜렁 안았다. 상반신을.
“아이고 우리 옥이다!”
가야부인은 불빛에 옥이의 얼굴을 돌려댔다. 입가에 누런 침이 엉겨있다.
“야들아, 어서 소금물 해오너라. 이기 멀 묵웄구나!”
옥이는 눈알을 희멀거니 해가지고 잇달아 딸꾹질을 해댔다.
“어서 이 입 좀 벌기라!”
가야부인은 옥이의 입에다 소금물을 주룩주룩 부었다. 다행으로 물이 꼴깍끌깍 넘어갔다.
“아이고 진내야! 많이도 넘깄구나.”
가야부인은 손가락을 옥이의 입에다 쑥쑥 집어넣었다. 어서 토하란 것이다. 옥이가 다시 “웩 웩” 하기 시작한 것은 오 분도 채 안 지나서였다.
옥이의 몸뚱이가 방으로 옮겨지고, 주인을 쳐다보는 그녀의 입에서 “어머니……!” 란 말이 송구스런 목청으로 떨려나왔을 때, 가야부인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옥이는 그러고서도 이튿날은 일찍이 일어났다. 분이가 그만두라고 해도 그녀는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다.
지난밤 그런 일이 있은 때문인지 옥이의 얼굴에는 더욱 핏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하룻밤 사이에 십 년은 더 늙은 듯 눈이 아주 퀭해져 있었다. 아랫도리가 휘둘리는 모양인지 부엌에서 재 소쿠리를 들고 잿간으로 가는 걸음걸이가 몹시 어설퍼 보였다.
‘저런……!’
가야부인은 그러는 옥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을 에듯한 슬픔과 더불어 한편 이상한 감동 같은 것을 느꼈다. 하필이면 ‘정신대’에 끌려가는 날 아침에 아궁이의 재를 치다니! 이 집에 대한 마지막 봉사를 하겠다는 걸까?……· 가야부인의 입에서는 ‘나무아미타불!’ 보다 한숨이 먼저 나왔다.
건넌방에서는 새벽녘부터 나직나직 천수를 치는 시어머니의 경 외는 소리가 그저 멎지 않고 있었다.
아침식사가 여느 때보다 빨리 끝나자마자 별안간 검둥이가 컹컹 사납게 짖어댔다. 구장 이와모도가 건들건들 찾아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보고는 잘 짖지도 않는 검둥이가 웬일인지 이 이와모도만 보면 죽자하고 짖어댄다. 개 눈에도 뭐가 좀 달라 보이는지?
“이놈의 개가 와 내만 보문 이 지랄이고?”
말은 안해도 시무룩한다. 아마 동정을 살피러 온 모양이었다. 그는 전투모를 숙게 쓴 채, 군대식으로 각반까지 다부지게 치고, 팔에는 검정 바탕에 ‘국민총력연맹’ 이란 여섯 글자가 하얗게 새겨진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가야부인은 청 끝에 나와 앉으면서 개만 불러들였다. 검둥이는 약간 물러서긴 했지만, 짖는 것만은 그치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하는 그의 입에 발린 수인사에, “수고합니더”란 말 한마디조차 시원스럽게 해주지 않는 가야부인이 딴은 언짢았음인지, 이와모도는 부엌과 안청 쪽만 한 번 흘끗하고는 이내 돌아섰다. 물론 “꼭 부탁합니데잇!”이란 말은 잊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의 ‘제국’에 대한 ‘봉공정신’이 아주 투철했던 것이다.
옥이는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았었다. 두어 술 뜨다 말고 물만 후룩후룩 들이마셨다. 그것조차 잘 안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머리만은 새벽 동자를 하기 전에 벌써 말끔하게 빗고 있었다. 죽어도 머리만은 마물러야 한다는 여자의 마음가짐이랄까.
이와모도가 돌아간 뒤 십 분도 채 안 지나서였다. 마을 어귀에 있는 동사의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왔다. 집합 신호다.
그렇게 징용이 있는 날, 더구나 처녀 징용이 있는 날은, 자식을 빼앗기는 집안은 흡사 초상 만난 집과 같았다. 아무리 싫더라도 안 갈 수 없고 또 안 뺏길 수 없기 때문이다. 옥이는 비록 이녁 딸이 아니었지만 가야부인은 이녁 딸을 빼앗기는 것과 꼭같은 기분이었다. 가족들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조그마한 보퉁이를 들고 나서는 옥이는 가는 설움도 설움이었거니와, 그러한 가족들과의 작별이 슬퍼 더욱 흐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새침 해졌다.
“갔다오겠심더.”
갔다 오겠다는 그 말이 듣는 사람에겐 더욱 뼈아프게 느껴졌다. 대문간에서 눈물을 씻는 사람은 가야부인의 가족들만이 아니었다. 이웃 사람들도 다 옥이를 보내며 슬퍼했다. 가야부인은 일단 방으로 들어 갔다가 이내 옥이를 뒤쫓아나섰다.
‘히노마루’가 높다랗게 강바람을 맞아 펄럭이는 동사 앞뜰에는 옥이 말고도 여섯 명의 처녀가 나와 있었다. 배를 타야 할 태고나루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 오봉산 밑 열두 부락의 해당자들이 모두 거기에 모였던 것이다. 그들 도합 일곱 명을 위한 전송꾼과 구경꾼이 줄잡아도 사오십 명은 되어 보였다. 그 열두 부락의 대표이기나 한듯이 이와모도 구장이 시종 앞장을 서서 서둘렀다. 숫제 학교 선생님처럼 고작 일곱 사람을 앞에 두고 줄을 지어 서라느니, 면서기가 나누어준 ‘히노마루’가 박힌 수건을 어서 이마에 동이라느니, 혼자서 야단을 빼듯 했다. 그것을 지극히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긴 칼을 허리에 찬 순사부장이 드디어 출발에 즈음한 인사말을 했다.
“여러분은 오늘부터 우리 제국을 위해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여러분만의 명예가 이니라, 한편 이 지방의 자랑입니다!……”
그러고는 이와모도 구장을 선두로 일곱 처녀와 그녀들의 가족, 그리고 거기에 모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가를 향해 나아갔다.
무당 천금새의 집 앞인 나루터에는, 벌써 소금배 비슷한 수송선 한 척이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서는 꾸무럭거릴 필요가 없다. 짐덩어리처럼 태우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배편이 좋은 것은 도중에서 도망칠 우려가 전연 없다! 처녀들이 연방 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별안간 철둑 위를 달려오던 사내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어어잇, 잠깐만 기다리소. 이것 가주가욧!”
모두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쏜살같이 뛰어오는 사나이는 바로 가야부인의 사위였다. 지난밤새 돌아오지 않던 박서방이었다. 가야부인은 옥이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녀가 배에 오를 차례였다.
힐레별떡 뛰어온 박서방은 옥이의 팔을 덜렁 잡았다.
“가지 마라!”
그러곤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옥이의 팔을 잡은 채 숨소리가 흡사 기관차의 피스톤 소리처럼 거칠었다.
“와 이라노 이 사람이? 각중에 미쳤나?”
이와모도가 옥이를 배에 밀어올리려 했다.
“머? 내가 미쳐?”
박서방은 연방 숨을 헐떡거리며 일어나더니,
“그 손 띠이라(떼라), 내 처다!”
“머? 이 사람이 정말 돌았는가베.”
이와모도가 어이없는 듯이 웃다 말고 눈을 흘긴다.
“미쳤다문 니가 미친 길(걸)세. 징거를 비이조야(보여줘야) 알겠나?”
박서방도 마주 눈을 흘겼다. 가야부인은 어리둥절했다. 옥이도.
“고라 고라(이 자식)! 니가 무슨 소리 하노?”
칼을 찬 순사부장이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무신 소리? 내 처라 캤소!”
박서방은 분명히 말했다:
“내 처라?”
“그렇소! 처녀가 아닌데 와 데리고 갈라 카요? 징명을 비이(보여) 줄까요?”
박서방은 가슴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 보였다. 호적등본이었다. 분명히 옥이가 그의 호적에 처로 올려 있지 않는가! 면장의 도장도 쩍혀 있다.
“오까시이네? (이상찮나?)”
순사부장도 그런 데는 할 도리가 없었다.
“오까시이가 아뇨. 똑똑히 보고 말하시오!”
박서방은 이렇게 말하고서 이와모도 쪽을 쳐다보았다.
“인자(인제) 알겠나? 괜히 똑똑히 알지도 몬하고 댐비지 마라 말이여!”
그러곤 옥이의 팔을 잡고 있던 이와모도의 손을 사정없이 퉁겨버렸다.
“보소.”
옥이는 그제야 박서방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그것은 물론 넘쳐흐르는 감격의 흐느낌이었다.
“어서 가자!”
가야부인은 뭔가 속에 짚이는 게 있었다. 그녀는 이내 옥이의 덜덜거리는 손을 끌었다.
저 만치서 면서기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관중들은 마치 도깨비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들을 하고서, 총총히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루터를 떠난 세 사람은 어느덧 미륵당이 있는 쪽 언덕을 더위잡고 있었다.
박서방과 옥이가 가야부인의 인도로 미륵불과, 거기에 모신 가야부인의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 오봉선생, 삼일운동 때 희생된 밀양시숙, 그리고 박서방의 전처인 딸의 영전에서 백년가약을 맺은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또 하나 그날의 일로서 그곳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처녀 여섯 명을 제물처럼 데려다주고 그날 밤으로 돌아오던 이와모도 구장이, 카키색 전투모에 각반을 다부지게 치고, ‘국민총력연맹’이란 완장을 두른 채, 이튿날 아침 그 아찔아찔한 ‘베리끝’ 낭떠러지 밑 강물에 시체가 되어 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그의 ‘제국’ 경찰은 웬일인지 그 어처구니없는 일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은 듯, 그저 술에 취해서 실족을 했을 것이라고만 소문을 퍼뜨렸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천금새도 못 알아맞힐 영원의 수수께
끼가 되고 말았다.
고생한 보람 없이 원통하게도 오봉선생이 마지막 숨을 거둔, 또 다른 의미로는 절통하게도 이와모도 참봉과 그의 조카 이와모도 구장이 세상을 지레 떠난 다음해에, 식민지 조국은 이와모도의 이른바 ‘제국’ 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인자 가야마님은 큰소리하기 안됐능기요. 자손들도 다 큰 베실 할 끼고!…….”
이웃 아니, 인근동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들 말했다. 부러워들 했다. 곧 서울 아니면 적어도 읍내로라도 이사를 갈 거라고들 믿었다. 그러나 해방 일 년이 지나고, 이 년 아니 삼 년이 지나 독립정부가 수립되어도 내처 그곳에 머물러 있었을 뿐 아니라, 별수가 없었다. 해방의 덕을 못 본 셈이었다. 물론 일본까지 가서 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을 피해 도망질을 하고 다닌다던 막내아들도 집에 돌아왔었다. 그러나 그는 벼슬이라도 할 궁리는 않고 농민조합인가 뭔가를 만든다고, 자식 징용 보냈던 사람의 집을 찾아다니기나 하고, 아버지 명호 양반은 나라가 통일이 되지 못한 것만 한탄하고 있었다.
이런 꼴로 가야부인의 시댁뿐 아니라 부락 자체들도 아직 신통한 해방 덕을 못 보았다. 첫째 징용에 끌려간 사람들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다가 돌아오는 사람은 거지가 되어 오거나 병신이 되어왔다. 더구나 ‘여자정신대’에 나간 처녀들은 한 사람도 돌아오질 않았다. ‘설마?’ 하고 기다리는 판이었다. 그래서 부락들은 역시. 걱정에 싸여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한편 불행하리라 믿었던 이와모도 참봉의 집은 반대로 활짝 꽃이 피어갔다. 고등계 경부보로 있었던 맏아들은 해방 직후엔 코끝도 안 보이고 어디에 숨어 있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문만 떠돌더니, 뜻밖에 다시 경찰 간부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고 몇 해 뒤엔 어마어마하게도 국회의원으로 뽑혔다.
명호양반은 아버지 오봉선생을 닮아서 다시 두문불출을 하다시피 구겨지고, 아들 가운데서 제일 똑똑하다고 하던 막내도 결국 반거충이*가 되어 어딜 돌아다니기만 했다.
“애닯기도 하제, 즈그 할배나 징조할배가 그렇기 훌륭하고 독립운동도 많이 했다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들 안타까워했다. 양접장이 살아 있었더람 뭐라고 할는지, 사람들은 이렇게 궁금하게도 여겼다. 가야부인의 머리에 흰털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 막내 때문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가야부인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땐 돌아가신 시어머님처럼 천수나 치고 미륵당에 나가면 미륵불 앞에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곧잘 자줏빛 모란꽃잎이 뚝뚝 떨어지곤 하였다.
“석이 안 왔나?”
가야부인은 겨우 눈을 또 뜨곤 막내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멀리서 또 포성이 쿵! 울려왔다. 왜 사람들은 싸우지 않음 안될까? 가야부인은 무슨 말이라도 할 듯이 입을 약간 우물하다 만다. 이마에서 잇달아 솟는 땀이 드디어 그녀의 열반을 알리는 것 같았다.
『월간문학』 8호(1969. 6); 『김정한소설선집』 (창작과비평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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