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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산으로 출발하면서
며칠 째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왔다. 여름도 다 갔는데 무슨 비가 이렇게 많이도 오는지. 이 번 주말에는 CA전일제로 대림 산성에 가기로 했는데 그 날까지 비가 내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화창한 토요일 아침. 하늘이 우리의 걱정을 아셨는지 비는 말끔히 그쳤다. 비가 오고 난 뒤라 세상은 더 깨끗하고 선명했다.
10월 30일, 우리는 달천강 주유소에서 9시 30분까지 모이기로 했다. 달천강 주유소는 단월에서 수안보쪽으로 가는 길과 MBC 방송국을 지나서 수안보로 가는 길이 만나는 곳에 있다. 그 곳까지는 살미 방향, 수안보 방향 버스를 타면 쉽게 갈 수 있다. 그 주유소 앞에는 원래 버스 정류장이 없지만 버스 기사 아저씨의 배려 덕분에 그 앞에서 내릴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니 호암지부터 도로 확장 공사를 해서 길이 넓고 깨끗했다. 길 옆쪽으로는 자전거 전용 도로도 마련되어 있었다. 충주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자전거를 타고 가도 좋을 것 같다.
주유소에서 모두 모인 후 드디어 출발. 대림 산성에 가기 위해 미리 보았던 글, 자료를 생각해보며 수안보로 가는 구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역사스페셜이란 TV프로그램에서 '70일간의 혈투 충주 산성을 찾아라'를 보면서 처음 대림 산성을 알게 되었다.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70여 일간이나 버텨내어 승리했다는 곳, 충주 산성. 보통 충주 산성이라고 하면 모두들 남산성을 생각한다. 남산성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고항쟁을 했던 곳도 당연히 충주 산성이라 불리는 남산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대림 산성이 부각되면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여러 면에서 살펴보았을 때 충주 산성은 바로 대림 산성이라는 것이다.
충주 주변에는 산성들이 많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남산성부터 월악산의 덕주 산성, 가금면의 장미 산성, 노은면의 천룡 산성, 그리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살미면의 대림 산성까지 유난히도 산성이 많다. 또 고려시대에는 충주에 아름다운 성이 있다고 하여 예성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무엇 때문에 충주에는 이렇게 많은 산성이 있는 것일까?
●한반도의 요충지-충주
오래 전부터 충주는 우리 나라에서 중요한 요충지였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남과 북의 교통과 문화가 접하는 지역이다. 조령과 죽령을 지나야만 영남에서 한양으로 갈 수가 있었고 또 충주를 지나는 남한강은 물자 운반을 하는 중요한 수로였다. 충주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중세시대 우리 나라에서 3대 철산지로 손꼽히기도 했다. 철이 많아 농기구와 무기가 대량 생산되었다. 다인 철소가 있었던 충주시 이류면 완오리에 가보면 아직도 어렵지 않게 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충주는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이중환의「택리지」에서도 충주는 유사시 전장지가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충주는 고려 시대 몽고병의 침략이 이를 적마다 공략의 대상이 되었고 40여 년간의 기나긴 몽고항쟁 기간 중 가장 치열한 전투지역이었다. 때문에 충주민의 항쟁과 승리는 몽고의 고려 정복계획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70일간의 충주산성 전투는 고려가 극적인 승리를 거두어 몽고의 남침 야욕을 중도에서 좌절시킨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사를 비롯한 관계 사서에는 한 두행의 짧은 기사만 전하고 있고 심지어는 충주산성이 어느 성을 의미하는지조차 불명확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배우는 국사책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야 할 만한 일이 이렇게 잘 알려지지가 않았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또 우리는 충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충주의 자랑스런 역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몽고항쟁을 했던 역사의 현장인 충주 산성은 어디일까?
●가을의 끝을 잡고
우리가 걸어갔던 구도로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아 한산했다. 오른쪽 달천강 넘어 새로 생긴 도로에 차가 신나게 달리는 모습과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들은 온통 울긋불긋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고 날씨도 정말 화창했다. 며칠 전부터 오던 비도 그쳐 하늘은 더욱 드높고 깨끗했다. 가로수에서 떨어진 빠알간 단풍잎들은 바람에 데구르르 굴러다녔다.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DJ가 오늘이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절정의 날이라면서 단풍 여행 떠나기에는 오늘같이 좋은 날은 없다고 한 말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답사를 오기 전에 보았던 책에 대림산의 북쪽은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라는 소개가 있었다. 우리가 걸어갔던 구도로에서 보면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정말 산의 대부분이 절벽이었다. 아무리 산을 잘 탄다 하더라도 이쪽으로는 도저히 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이쪽은 특별히 방어벽을 쌓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산세 그 자체가 좋은 방어막의 역할을 하니까. 대림 산성이 몽고군과의 싸움터였다면 북쪽의 방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 절벽을 지나면 바로 길 왼쪽에서 버스 정류장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정류장 옆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바로 그 곳이 대림산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드디어 몇 개월 동안 이름만 들어본 대림 산성 앞에 와 있구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저 길에 한 발이라도 내딛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고려 시대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우선 심호흡을 몇 번하고 대림산 전체를 살펴보았다. 찻길 건너편에서 대림산을 올려다보니 대림산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정말 신기한 모양이다. 산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고 그 옆으로 뾰족한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다. 마치 반대쪽에서 누군가 양팔로 그 산을 감싸안고 있는 듯한 형세였다.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은 포근한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았다. 산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산의 아늑한 모습을 보고 나서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처음 받은 산의 인상처럼 들어가자마자 청량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몇 미터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어쩜 이렇게 산 안과 밖이 다를까. 효과 음향으로나 들어봤음직한 소리를 라이브로 들어본 사람은 충주여고에서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기분이 좋으니 아무래도 오늘의 답사를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을 것 같다.
●이종진 전 교장 선생님댁 방문
대림산을 올라가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집이 한 채 있다. 그 곳에는 작년에 정년 퇴임하신 이종진 교장선생님이 살고 계신다. 전부터 대림 산성에 관심이 많으시던 교장 선생님은 아예 그 곳에서 대림 산성과 같이 살고 계셨던 것이다. 이종진 교장선생님은 시간이 나는대로 대림산을 둘러보시면서 산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셨다고 한다. 대림 산성이 충주 산성일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신 분도 바로 이종진 교장선생님이시다. 대림 산성을 보러 가기 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기 위해 교장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대림 산성에 대해 알려고 하는 우리가 기특하셨는지, 쾌히 승낙을 해 주셨고, 우리는 조심스레 거실에 올라 삥 둘러앉았다.
교장선생님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많으셨는지 우리가 앉자마자 바로 말씀을 하셨다.
"몽고가 침략했을 당시 70여 일을 버틴 산성이 하나 있어……."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가 미리 알고 왔던 몽고 항쟁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셨다. 역사 시간에 지루하게 느껴졌던 것도 이렇게 직접 들으니 꼭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대림산은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곳에서는 대림산이라고 거의 부르지 않고 향산(香山)이라 불렀다. 또 충주를 보호해주는 산이라 하여 진산(鎭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교장 선생님은 이 동네에 오래 사셔서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해 잘 알고 계셨다. 대림산 안에는 창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곳은 옛날에 무기 창고로 쓰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남아있다고 한다.
또한 대림산의 대궐터라고 불리는 밭은 과거에 이 곳에 대궐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조상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충주에 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晩둔香山裡 늦으막이 향산 속에 터를 잡고
幽居遊鹿苑 한가로이 유록원에서 거하였네
蒼谷在古城 푸른 골짜기에는 옛 성이 있고
岩老風雨洗 바위는 오래되어 비바람에 씻기웠네
馳馬去不歸 달리는 말 가서는 돌아오지 않거늘
勇將何處休 용맹한 장수는 어느 곳에 쉬고 있는가
長溪葛莖蔓 시냇물은 졸졸졸, 칡넝쿨은 얼키설키
石徑倚 口 幽 散- 돌길 사이로 사슴 울음소리 들리는구나
耕碁世情遠 밭갈고 바둑두며 세속의 정을 멀리하니
民草如仙樂 민초의 삶이 신선의 즐거움에 비하는 도다
辛未年 冬至 香山 李鍾震 신미년 동지, 향산 이종진
교장 선생님 댁 거실에는 한시가 걸려 있다. 그 시는 선생님께서 이 곳에 이사오신 후, 대림산에 살면서 직접 지으셨단다. 선생님께서 그 시를 읊어 주셨다.
●항몽비가 있어야 할 곳은 제주도가 아닌 충주
그러던 중 교장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제주도 수학여행 때 항몽비를 보았냐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약간의 쓰린 미소만 지은 채 우리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선생님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항몽비의 유래와 내용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고 계시던 교장선생님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떨림이 느껴왔다. 놀라 고개를 드니 선생님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맺혀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우실까? 항몽비가 세워진 그 곳이 왜 몽고의 침략에도 꿋꿋이 버텨낸 충주가 아니라 몽고와의 싸움에 굴복하기 싫어 삼별초가 자결을 한 그 땅이어야 했는지…. 아마 그것이 그 눈물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선생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하셨다.
"너희들은 아직 가능성이 많단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대림산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우린 값진 것을 얻었다. 충주성이 대림 산성일 것이라는 확신과 항몽비에 알지 못했던 것들, 교장선생님의 대림 산성에 대한 믿음과 사랑…. 많은 것을 얻은 채 우린 밖으로 나왔다. 교장선생님께서 직접 밖에까지 나오셔서 아주 친절하게 대림 산성 올라가는 길을 알려주셨다.
●천 년이란 시간의 벽을 넘어
교장 선생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 보면 길 왼편으로 아카시아 나무가 보인다. 나뭇가지들을 헤집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니 사람이 몇 번 왔다갔다한 것으로 보이는 길이 있었다. 무성히 자란 나무와 풀들로 인해 모르고 갔으면 그냥 지나쳤을 만큼 눈에 잘 띄지 않는 길이었다.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랐다. 또 며칠 전에 온 비로 인해 나무 그늘 밑에 있는 땅은 그 물기가 남아 질척하고 미끄러운 곳도 있어 우리의 산행을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
대림산은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림 산성은 둘레가 4km에 이르는 대규모 산성으로 충주시 주변의 산성들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이다. 또한 이 산성은 자연 지형을 활용하여 능선을 따라 쌓아졌다. 대림 산성의 축성 방법도 다른 산성들과는 차이가 있다. 대림 산성은 석축산성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물론 현재 석축을 한 곳이 10여 군데 이상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산성들이 석축인데 비해 대림 산성은 토석 혼축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대림 산성 대부분의 경우 기단부의 일부만 석축을 하고 그 윗부분은 토축을 하였다. 토성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은 능선의 정상부를 따라가며 축조하는 토성의 축조방법과 달리 성곽의 상당 부분이 능선을 따라 내탁하는 석축산성의 축조기법을 따라 축조되었다. 또 부분적이나마 석축을 한 곳이 있고, 성벽 기단부에 상당량의 석축 시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대림 산성은 토석혼축성이라고 보는 것이 좋은 것이다.
대림 산성이 축조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문헌에는 대림산에서 나온 유물들을 보고 추측하거나 약간의 기록들을 참고하여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우선 축성방법의 측면에서 볼 때 대부분의 삼국시대 산성들이 석축성인데 비해 이 산성은 토석혼축이라는 점, 그리고 산성의 규모가 대체로 2km를 넘지 않는데 비해 이 산성은 4km가 넘는 대규모라는 점을 볼 때 대림 산성을 삼국 시대의 산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산성 내에서 발굴된 유물을 살펴보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고려 시대의 유물이다. 특히 산성 정상부나 건물지 등에서 유구와 관련되어 발견되는 토기편이나 자기편들은 대체로 고려시대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때 산성의 축조 시기는 고려시대임이 분명할 것으로 판단된다.
요즘 들어 산이라고는 거의 가보지 못한 우리들이 일반 등산로도 아닌 산을 타야 된다는 것에 무리가 있었다. 모두들 숨이 차서 숨만 거칠게 내 쉴 뿐 얘기할 만큼의 여유도 없었다. 길 옆쪽으로는 경사가 심해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나뭇가지를 잡고 발을 내밀다가 썩은 나뭇가지를 잡아 넘어진 적도 있었다. 휴우~ 자칫하면 대림산에서 고려의 역사와 함께 영영 묻힐 뻔 했군!
·몽고군이 짓밟지 못했던 땅, 충주
13세기초에 대륙에서 몽고족이 지금의 몽고 고원을 중심으로 일어나 세계적인 대 제국을 건설한 후 동남으로 진출하여 고려와 접촉하게 되었다. 고려가 몽고와 최초로 접촉을 하게 된 것은 몽고에게 쫓겨온 거란인을 협공하던 때부터였다.
몽고는 자신들이 고려의 은인임을 자처하며 공물을 강요하였다. 고려에서는 지나친 그들의 요구에 불응하는 일이 잦았다. 이러한 사실로 두 나라의 사이는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공물을 징수하려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가에서 살해된 사건이 고종 12년(1225) 1월에 일어났다. 이 사건의 발생으로 몽고가 고려와 국교를 단절한 것은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출병을 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그러나 몽고는 이 무렵에 서역 지방의 경략에 몰두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에 대한 침략은 이 사건으로 인한 국교 단절 이후 7년만인 고종 18년(1231)에 비롯되었다. 이리하여 고려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처참한 혈전을 벌이게 되었다.
몽고군의 1차 침입은 고종 18년(1231) 8월에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몽고군은 고려 각지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고려에 항복을 강요하였다. 몽고군은 고려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고 이들이 지나간 곳은 점령당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후 몽고의 침입은 고종 19년(1232) 12월에 2차, 22∼26년(1235∼39)간에 3차, 고종 34∼35년(1247∼1248)간에 4차 등 계속 침입하여 전국을 유린하였다. 이 동안 충주에 대한 공격이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고종 40년(1253) 여름, 야고의 5차 침입때 충주에서의 격전은 매우 볼만한 것이었다.
이 해 9월 충주 창정 최수가 금당협(지금의 동량면)에 복병을 매복시키고 몽고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급히 쳐서 적들을 물리치고 적의 포로였던 남녀 2백 여명을 구출하였다. 이 공으로 최수는 대정을 제수 받았다. 장차 닥쳐올 충주성 방어전의 서전을 장식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마침내 10월에는 야고가 이끄는 몽고군이 충주를 포위하고 공격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야고는 나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고 돌아가게 되었다.
야고의 뒤를 이어 받은 아전간과 반역자 홍복원 등은 계속하여 충주성의 포위를 풀지 않고 공격을 하였다. 이 당시 충주성에는 몽고가 2차 침입하였을 때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였던 백현원의 승려 김윤후가 그 공으로 정부의 권에 의해 환속하고 등용되어 섭람장을 제수 받고 몽고병의 방어에 활약하다가 충주산성 방호별감이 되어 와서 지키고 있었다.
●몽고항쟁의 승리자는 다름 아닌 보통 사람들
몽고군의 충주성에 대한 공격은 70여 일이나 계속되는 피나는 싸움이었다. 더구나 이 싸움에는 반역자와 항복한 백성들도 가담하여 충주성의 항복을 권했다. 이와 같은 오랜 기간의 포위 공격으로 성내의 군량미도 거의 떨어지고 군사들마저 지쳐버렸다. 이에 김윤후는 노군잡류별초들이 몽고군을 물리친 것을 기억하고, 군졸과 민중들 앞에서, "만일 이번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포상을 내리겠다" 며 노비문서를 모두 불살라버렸다. 자유를 갈망하던 이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마침내 격퇴시키는데 성공했다.
위의 글에 의하면 당시 성안에 있던 군인가운데는 귀천으로 표현되는 여러 계급 출신의 인물들이 혼재해 있었고 그 밖에도 상당수의 관노도 있었던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민족의 침입에 맞서 자유를 지켜왔던 사람들, 그들은 다름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우리 땅 어느 곳에 민중의 한이 맺히지 않은 땅이 있겠냐만은 피난해온 산골, 고립된 산성에서 남편과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 놓고 마음 졸이던 아낙들의 한이 오늘날까지 이 곳에 남아 메아리 치고 있는 것 같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천혜의 요새-대림 산성
한 30여분정도 올라갔을까.
꽤 높이 올라온 것 같았다. 조금 뒤에 우린 산성의 남벽에 다다랐다.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대림 산성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공성술에는 세계 최고였다는 몽고군의 최정예 부대도 무너뜨릴 수 없었는지 그 실체를 직접 살펴보았다. 남벽의 끝에 디딘 우리의 발밑으로는 4∼5m의 성벽이 쌓여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가파른 산비탈이 이어지고 있어 적군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성 위에서 몽고군을 기다리고 있다가 커다란 돌 몇 개만 굴리면 해결될 것 같았다. 산성의 동쪽, 서쪽, 북쪽이 모두 이러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북쪽은 남쪽에서 바라보아도 훨씬 높고 험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 안쪽에서 올라가는 것도 이리 힘든데 절벽과 같이 가파른 성 외부에서의 침입이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니 천의 요새라고 불릴 만큼의 자연적 요건을 갖춘 이 곳 충주성에서 70일간의 항전이 승리로 끝난 것도 무리는 아닐 듯 싶었다. 산 아래로는 거침없이 흘러가는 달천강이 보였다. 대림 산성으로 들어갈 만한 곳은 서쪽밖에 없지만 그나마도 달천강이 흐르고 있어 몽고군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었다. 대림산성은 지형적 형세로 볼 때 충주지역의 방어와 국난시 외적을 방어하는데는 최상의 장소였던 것이다. 남벽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우리는 계속하여 산성을 따라 올라갔다. 너무나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는 산길은 그 곳이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던 성벽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 했다.
●대림산성의 막강한 라이벌은 덕주산성?!
충주산성 전투는 야고의 침략으로 야기된 여몽전에서 고려가 거둔 최대의 승전이었다. 이 전투는 고종 41년(1254) 고려 왕조가 산천신지에 함께 제사 지내며 빌 때 제문에 다음과 같이 쓰여지기도 했다.
"전년에 여러 성이 얼마만에 모두 도잔되었나이다. 몽고군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정예로운 군사를 풀어 중원으로 옮겨 와 빗발같은 시석(옛날에 전쟁에 쓰던 화살과 돌)과 우레같은 북치는 소리로 여러 달을 공격하여 성이 위태하였나이다. 이 때 만약 성이 함락되었더라면 기타의 다른 성도, 모두 빼앗길 뻔 했으나 월악대왕께서 큰 위력을 보여 주시어 성을 지킬 수 있었나이다."
위의 글로써 우리는 충주성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일부에서는 '월악대왕'의 위력으로 충주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이 기록 때문에 충주 산성이 월악산에 있는 덕주 산성이라고 주장한다. 덕주 산성은 월악산의 송계계곡을 감싸듯 둘러싸여 있다. 송계계곡은 덕주 산성에 물을 충분히 공급해주고 게다가 규모도 크고 큰 골짜기가 많아 은거 공간도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항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전쟁중에 자신이 살던 터전을 버리고 50리 길을 걸어 덕주 산성에까지 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보통 산성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의 거리를 고려하여 위치를 잡는다. 전쟁이 나면 재빨리 산성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마을로부터 2∼30리내에 산성을 축조한다. 그러나 덕주 산성은 충주에서 너무 멀다. 전쟁 상황에서 덕주 산성까지 가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만 위의 기록으로 월악산은 충주 지방의 대표적 명산의 하나였고 고려시대에까지 산제가 계속되어 이어져 왔기 때문에 위급 상황에 대하여 부로들이 명산 신령에 구원을 갈망하는 산악숭배사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월악 대왕의 도움이라는 사실 하나를 가지고는 월악산성을 충주산성이라고 할만한 명확한 단서가 될 수 없다.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종주바위에서
한참을 성벽 위로 걷다 보니 종주 바위가 나왔다. 몽고 1차 침입 때의 충주 부사 우종주와 이름이 같은 이 바위 앞에는 지금은 밭으로 쓰이고 있는 작은 평지가 있어 충주에 몽고군이 쳐들어온 5차 침입 당시 장군이 이 바위 위에 올라 군사들을 훈련시켰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바위에 직접 올라 보니 김윤후 장군의 씩씩한 호령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 그 바위 위에서 바라보는 정경 또한 기막힌 것이어서 막힘없이 멀리까지 보이는 산들은 구름 위에 선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먹을 때만큼은 모든 것 다 잊고 자연과 함께
우종주 바위를 보고 나서 간식을 먹자는 선생님의 말씀에 모두들 싱글 벙글이었다. 올라올 때 미끄러지고 나뭇가지를 붙잡으며 짜증을 내던 그 얼굴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좋은 자리를 잡자는 선생님의 말에 모두들 주위를 둘러보며 웃었다.
"저기 소나무 밑은 어때?"
"좋다, 좋아."
모두들 빨리 어디엔가 앉아서 쉬고싶은 눈치이다.
"그래. 거기가 좋겠다."
선생님의 동의가 있은 후 우리는 조금 위쪽에 왜소하게 서있는 소나무 밑으로 갔다.
둥글게 둘러앉아서 각자 싸 가지고 온 간식을 꺼내놓고 보니 떡, 과자, 빵, 고구마, 음료수 등 먹을 것들이 푸짐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즐겁다. 간식을 먹으며 이쪽, 저쪽 둘러보았다. 앞쪽으로는 비스듬히 있는 밭과 집이 한 채 보인다. 그 집 뒤로는 마치 그 집을 싸고 있는 듯 붉게 물든 산이 보인다. 우리의 옆과 뒤쪽으로 노랑, 빨강, 연두, 갈색 등으로 물들은 가을 산이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함께 가을의 아름다움을 한 것 뽐내고 있는 듯 하다. 경치 구경도 하고 맛난 음식도 먹고.
"글만 안 쓴다면 정말 좋을텐데, 그치?"
선생님의 말에 모두들 웃으며 정말 그렇다고들 눈빛으로 주고받았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쪽에서 스님 한 분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계시는 것이 보인다. 모두들 "어. 스님?" 하며 스님만을 계속 쳐다보았다. 스님께서는 우리 절이 이 쪽 밑이라며 절에 간다고 하셨다. 우리 일행과 몇 마디 주고받으시고 다시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셨다. 매일 저 길로 다니시면 정말 힘드시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경치 구경하고 또 조잘조잘 떠들다 보니 어느새 과자 봉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다른 음식들도 다 먹었다. 정말 아쉽다. 순식간이었다. 뒷정리를 하다가 선생님께서 깨진 기왓장을 바로 옆에서 발견하셨다. 전 교장 선생님께 말씀하신대로 정말 쉽게 기왓장을 볼 수 있었다. 1000여 년이 지났을텐데도 기왓장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념 촬영을 하자는 선생님의 말씀에 모두 폼잡고 멋지게 섰다. "찰칵, 찰칵"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풍성함이 느껴지는 대림산의 마을
뒷정리를 말끔히 하고 하산을 하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은 산 가운데로 나 있는 마을길이었다. 길은 차 한 대 정도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만한 너비에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지금쯤이면 다른 CA반은 벌써 끝났을 시간이지만 오히려 늦게 끝나는 것이 불만스러운 게 아니라 산을 다 못 보고 내려가는 게 아쉬웠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니 드문드문 집들이 보였다. 집 마당에는 저마다 형광 주황색을 띄며 나의 시선을 끄는 감나무들이 있었다. 나뭇잎은 다 떨어지고 탐스럽게 익은 감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에 이 마을 전체가 더욱 더 풍요롭게 보였다. 누군가 저 감을 따서 나에게 준다면 더 없이 행복하랴만은…. 그림의 떡처럼 그렇게 감나무만 보고 입맛만 다시면서 내려와야 했다.
내려오는 길에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지나가는 마을 아저씨를 만났다. 그 강아지는 우리를 보고는 낯선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는지 마구 짖어댔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강아지. 그렇지만 우리는 물릴까 무서워서 다 길 가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저런 강아지를 키우는 주인은 이 산 속에서 살아도 밤이 무섭지는 않겠다.
●우리 나라의 최고의 물 향산 달천수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를 물이 드디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 물은 교장 선생님과 사모님께서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던 물, 가재가 살고 도롱뇽이 뛰논다는 그 1급수 물이구나. 대림산 안에는 물이 매우 풍부하다. 맑고 풍부한 물, 우리가 대림 산성이 몽고항쟁의 장소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사람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물이다. 1000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몇 개월 동안 항쟁하려면 마실 물이 필요하다. 이 같은 대림산과는 달리 남산성은 산의 정상에 위치해있어 규모도 작고 특히 물이 부족하다.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버티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대림산의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물은 산성 안에서 장기적인 항쟁을 함에 있어 전력을 높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쉬움속에서 대림산을 떠나며
내려오는 길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은 것을 얻은 뿌듯함으로 발걸음이 훨씬 더 가벼웠나보다. 교장 선생님께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리고 대림산 밖으로 나왔다. 오늘 하루는 3차원이 아닌 4차원의 세계로 넘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온 것만 같다.
대림산에 가기 전에 가졌던 의문이 이제 모두 해결되었다. 과연 충주 산성이 대림 산성일까 하는 의문에 우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충주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고 산 속에는 연중무휴로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으며 산 옆에는 경작지가 있어 식량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거기다가 싸움을 하기에 완벽한 지형까지. 이보다 더 좋은 지역적 환경을 갖춘 곳은 충주 주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일반 민중들에 의한 몽고전의 승리라니 충주시민으로서 뿌듯해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대림 산성을 다녀온 얼마 후 우리 학교 본관 건물에서 바로 보이는 산이 대림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산 외국어 고등학교가 있는 그 산이 바로 대림산이라는 것이다. 매일 보아왔던 산이었는데도 그 산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충주 시내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만한 산이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한다는 사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생겨난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젠 그 산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날의 추억을 기억하며…. 기록이나 흔적마저도 지워버린 긴 시간. 그 긴 시간 속에 살아 숨쉬는 우리들.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땅이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은 오랜 세월정도로 덮어둘 것이 아니다.
첫댓글 고려촌을 생각하였지요. 한 바퀴 휭하니 돌아보아도 제 자리로 옵디다. 충주가 한 식솔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