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브뤼겔, 〈베들레헴의 호적 등록〉, 1566년, 캔버스에 유채, 116×164.6cm, 브뤼셀, 왕립 미술관.
세상이 온통 흰 눈으로 덮인 마 을에 사람들이 복작거린다.
그림 속 사람들은 고만고만한 크 기로 그려졌기 때문에 이들이 누구인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화면 오른쪽 얼음판 위에는 썰매 타는 아이들, 팽이 치는 아이들, 혹은 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화면 왼쪽 한 건물 앞에서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줄을 선 것 같기고 하고, 되는 대로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확대된 그림(아래)을 보면 한 남자가 동전 같은 것 을 받고 있고, 그 옆에 있는 남자는 장부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돈을 내는 사람들 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의 담 위쪽에는 마치 간판처럼 둥근 바퀴 같은 것이 매달려 있다.
화면 앞 쪽에서는 한 남자가 돼지를 잡고 있고, 대형 솥과 땔감이 보인다.
닭 세 마리가 부리를 땅에 박고 모이를 쪼는가 하면, 두 대의 수레 위에 맥주 통으로 보이는 대형 드럼통이 실려 있 다.
바로 이 수레 뒤에 한 남자가 나귀에 여인을 태우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을 향하고 있다.
여인은 푸른색 망토에 싸여 얼굴만 겨우 보일 뿐이다.
앞장 선 남자는 뒷 모습에다 모자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는데 자세히 보니 어깨에 대형 톱을 들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석양 무렵, 마른 나무 가지 사이로 붉은 해가 반쯤 넘어가고 있으니 사람들은 마음이 바빠져 서 종종걸음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다.
어느 북유럽 마을의 겨울 풍경과 그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그린 이 그림의 주제는 도대체 무엇인가?
독자께서도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그림은 루카 복음 의 한 장면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세금을 걷 기 위해 실시한 호구 조사에 응하기 위해 길을 떠난 요셉과 마리아를 그린 피터 브뤼겔의 ‘베들레헴의 호 적등록’이다.
갈릴레아 지방의 나자렛 마을을 떠난 두 사람은 목적지인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들 말고도 수많은 인파가 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이다 보니 여관이라고 해봐야 고작 몇 개 있을 터 인데 빈 방이 있을 리 없다.
하는 수 없이 이들은 호적 등록을 마치고 방을 구하지 못한 채 마구 간 한편에서 피곤한 몸을 쉰다.
바로 그날 밤, 아기예수가 태어났다.
화가는 요셉이 목수라는 사 실을 강조하려는 듯 대형 톱을 어깨에 메게 하였고, 다시 보니 푸른 망토 속 여인도 아랫 배가 볼록이
나와 있다.
이 그림은 분명 성경의 내용을 그린 성화이다.
하지만 그림 속 주인공들은 수많은 인파에 묻혀 있을 뿐 전혀 강조되지 않았다.
성화가 탄생한 이래 그림 속 주인공이 이처럼 엑스트라 속에 묻 혀버린 것은 처음이다.
브뤼겔은 북유럽의 평범한 겨울 풍경을 통해 성경의 한 장면을 그려냈다.
일상으로 들어온 성경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브뤼겔의 이 발상은 완전히 파격적이다.
이 그림이 그려진지 불과 몇십년 지나지 않아 그가 활 동한 오늘날의 네델란드와 벨기에 지역에 속하는 플란더즈 지방에서는 일상을 주제로 한 풍속 화라는 장르가 탄생하여 인기를 누리게 된다.
역사에 남는 작가들은 뭔가 남다른 것을 이룩하였 는데 브뤼겔은 성경과 일상을, 혹은 주인공과 엑스트라를 구분짓지 않는 방식으로 새로운 회화 의 세계를 개척했다.
이 화가는 평범한 일상 역시 성경 속의 장면 이상으로 소중한 가치가 있다 고 생각한 것 같다.
고종희 마리아 한양여대 교수 (가톨릭 신문 2010년 1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