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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당이 발표한 건국강령의 주요 내용 |
① 보통선거를 통한 민주공화국의 수립 ② 홍익인간을 최고의 공리(公理)로 함 ③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와 중소기업의 사영화 ④ 빈농우선의 토지 분급 ⑤ 노동자․농민․지식인․상인의 단결 ⑥ 적산(敵産)의 국유화 ⑦ 정치․경제․교육의 균등 실현 ⑧ 소작농․자작농․소자산가․소지주를 기본 대오로 하고, 대지주․대생산기관․ 불타협분자․관리․경찰에서 반정(反正)소질을 가진 사람을 충실한 옹호자로 설정 |
2) 조선독립동맹(연안파, 1942)
① 중국 화북지방의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민족통일전선으로서 결성
② 조선의용군의 조직하여 중공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쟁에 참가
③ 김두봉, 김무정, 박효삼, 최창익, 한빈 등이 중심
④ 호가장전투 등에서 승리
⑤ 광복 이후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에 편입
3) 조선건국동맹(1944)
① 배경 : 국내의 항일운동이 지하운동을 통해 좌우연합전선운동으로 꾸준히 진행
② 성격 : 민족연합전선의 형태
③ 구성
㉠ 여운형이 중심
㉡ 안재홍 등 민족주의계열의 인사도 참여
㉢ 노동자, 농민도 하부에 흡수
④ 특징 : 중국 화북에서 활동하던 조선독립동맹과도 연결
⑤ 강령 : 민주공화국의 건설, 일제의 타도
⑥ 활동
㉠ 불신(不信), 불문(不文), 불명(不名)을 원칙으로 제시
㉡ 노동군, 농민동맹 등 단체의 조직
㉢ 징병회피운동, 공출회피운동 등 항일운동의 전개
⑦ 변천 : 광복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
(2) 공통강령 : 민주공화국의 수립
2. 한반도문제의 국제적 논의
(1) 카이로회담(1943)
1) 참가국 : 미국(루스벨트), 영국(처칠), 중국(장제스)
2) 주요 내용
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계속 공격
②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탈취․점령․도착한 모든 지역의 반환
③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자유 독립하게 할 것
3) 의의 :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결의
(2) 얄타회담(1945.2)
1) 참가국 : 미국(루스벨트), 영국(처칠), 소련(스탈린)
2) 주요 내용
① 독일에 대한 전후 처리 문제와 소련의 대일 참전 문제의 논의
②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의 거론(미국이 소련에게 미국, 소련, 중국이 신탁통치할
것을 제안하고 이에 소련이 동의)
③ 38도선의 잠정 결정(맥아더 사령부의 행정명령 1호에 의해 확정)
(3) 포츠담선언(1945.7)
1) 참가국 : 미국(트루먼), 영국(애틀리), 소련(스탈린)
2) 주요 내용 : 일본의 무조건 항복 등 카이로회담의 재확인
3) 의의 : 한국의 독립을 재결의
1. 8․15 광복(1945)
(1) 원인:우리 민족의 계속된 독립 투쟁
(2)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조직(1945.8.15)
1) 모체 : 광복 이전에 있던 조선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조직
조선건국동맹을 이끌던 여운형이 광복 직전에 조선 총독으로부터 행정권 이양을 받고 정치과 경제범의 석방, 3개월 간의 식량 확보, 조선인의 정치활동 및 청년․학생․노동자 등의 조직활동에 대한 불간섭을 확약받음 |
2) 의의 : 광복 이후 최초의 정치단체
3) 내용
① 여운형(사회주의자, 위원장)이 안재홍(중도우파, 부위원장) 등과 발족
② 우파와 좌파의 참여
4) 활동
① 국내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치안대의 설치
② 전국적으로 자발적인 지부의 조직
③ 식량대책위원회의 설치
④ 건국강령의 발표
㉠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의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5) 변천
① 2차 조직개편 때 좌파가 다수의 차지
② 우파와 중도우파의 탈퇴
③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선포(1945.9.6)
㉠ 목적 : 우파의 탈퇴로 약화된 대표성의 보완
㉡ 조직 : 이승만을 주석에, 여운형을 부주석에, 허헌(온건좌파)을 국무총리에 추대
④ 지방의 지부는 친일파를 제외한 각계각층을 참여시켜 인민위원회의 조직(좌익성향이 강함)
6) 한계성 : 김구, 송진우, 김성수등 대부분의 우파지도자들이 불참 → 단명으로 끝남
2. 미군정(1945.9~1948)
(1) 특징
1)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음 → 김구주석은 개인자격으로 입국(정권을 인수받지 못함)
2)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음
3) 송진우, 김성수 등 한국민주당(한민당)인사들과 접촉
4) 한반도에 대한 예비지식이 없음 → 친일파의 등용
5) 생필품의 부족 → 물가의 폭등
6) 농민들에게 미곡을 싯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강제로 수집, 배급
┬→ 농민의 반발 ────────────┬→ 실패
└→ 도시민들은 배급이 부족하다고 반발 ─┘
7) “일본인 소유의 모든 재산은 미군정에 귀속된다.”고 선포
8) 노동조합의 파업권을 인정하지 않음
9) 소작료를 5:5에서 1:3으로 소작인에게 유리하도록 조정
(2) 정당의 난립
1) 대표적인 정당
① 한국민주당(1945.9)
㉠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은 송진우, 김성수 등 우파세력이 결성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려 함(입국의 주선)
㉢ 미군정과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부상
㉣ 지주, 자본가 등 일제와 타협하였던 사람들이 중심 →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음
㉤ 국내의 조직기반이 없었던 이승만과 합세
② 조선공산당(1945.9)
㉠ 박헌영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극좌정당
㉮ 국내에서 활동
㉯ 남조선 노동당을 결성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 추진(1946.11)
㉡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론’의 주장하여 노동자, 농민을 주축으로 도시 소시민,
지식인과의 통일전선을 추구
㉢ 대지주의 토지에 대한 무상몰수의 주장
③ 국민당(1945.9)
㉠ 신간회을 주도하였던 안재홍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중도우파의 정당
㉡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의 정치이념을 표방하면서 좌우이념의 통합 추진
안재홍의 정치사상 |
① 신민주주의(새로운 민주주의) ㉠ 한국의 전통사상인 공동체정신(불함철학)을 토대로 하여 서양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시켜 창안 ㉡ 지식인과 중소자본가를 전위계급으로 하여 자본가와 무산자(無産者)가 다함께 공생하는 이른바 ‘만민공생’의 민주주의 ㉢ ‘다사리철학’(다함께 사는 철학이라는 뜻)이라고도 불림 ② 신민족주의 : 만민공생의 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대외적으로는 국제적 민족주의, 민족적 국제주의를 제창하였기 때문에 불려짐 |
④ 독립촉성중앙협의회(1945.10)
㉠ 이승만이 우익계열의 정당들 잠정적 통합
㉡ 좌익계열의 불참 → 좌․우익 대립의 더욱 심화
⑤ 조선인민당(1945.11)
㉠ 조선인민공화국이 극좌로 선회하는 데 반대하여 탈퇴한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결성
㉡ 중도좌파의 정당
㉢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좌우합작의 추진
2) 특징 :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중도파 정당이 많음
(3) 중요 사건
1)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①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들이 회의의 개최
② ‘한국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의 결정
㉠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
㉢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할 것
㉣ 한국을 최고 5년간 공동관리할 것(신탁통치의 결정)
㉮ 미국, 영국, 중국, 소련
㉯ 전 국민이 반대하였으나 좌익세력은 찬탁으로 전환 → 좌익과 우익의 대립 격화
신탁통치에 대한 우익과 좌익의 대응 | |
우 익 |
좌 익 |
신탁통치의 반대 |
신탁통치의 지지 |
비상국민회의 : 비상정치회의(김구)와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이승만)의 합작 |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민족혁명당, 천도교 청우당의 합작 ㉡ 박헌영, 여운형, 김원봉, 백남운, 허헌이 공동의장 |
2) 송진우의 암살(1945)
3) 미․소 공동위원회의 개최(1946.3, 1947.5)
① 서울(2차 때는 서울과 평양의 왕래)
② 임시민주정부의 수립에 참여하는 정치단체문제로 결렬
㉠ 미국 : 모든 정당이나 사회단체를 협의의 대상으로 하자고 주장(우익의 참여)
㉡ 소련 :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정치단체만을 협의의 대상으로 하자고 주장(우익의 배제)
4) 조선 정판사 위조지폐사건(1946.5)
① 주체 : 좌익의 통일 전선인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② 목적 : 남한 경제의 혼란
③ 내용 : 조선 정판사를 이용하여 위조지폐를 발행, 유통
④ 결과
㉠ 미군정이 공산당 간부의 체포령을 내림 ┬→ 미군정과 좌익의 대립 심화
㉡ 해방일보(공산당의 기관지)의 폐간 ──┘
㉡ 공산주의자들이 지하로 잠입하여 대규모의 폭동과 서울 철도 소요를 주동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사회혼란 |
① 서울철도소요(1946) ②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1946) ③ 10월 인민항쟁(대구사건:1946) ④ 대구폭동(1948) |
5) 단독 정부의 수립 진행
① 배경 :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의 결렬로 통일 정부의 수립 지연
② 내용
㉠ 남한 : 이승만 등 일부 우익세력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자고 주장
이승만의 정읍발언(1946.6) |
① “무기 휴회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았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도 이북에서 소련이 철회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 ② “소련은 북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면 미국은 남한에서 단독 정부를 세우는 것이 타당하다.” |
㉡ 북한 : 소련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사실상의 정부를 세워 통치체제의 확립
6) 통일정부의 수립 추진
① 좌우합작운동의 전개
㉠ 배경 :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분단의 우려
㉡ 과정
㉮ 좌우합작위원회의 구성(1946.7)
ⓐ 중도 우파인 김규식, 안재홍과 중도 좌파인 여운형이 중심
좌우합작 7원칙 |
① 3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따른 좌우합작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② 미․소 공동위원회의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③ 토지개혁(몰수,유상몰수,채감매상에 의한 무상분배)과 중요산업을 국유화할 것 ④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벌할 조례를 심의․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⑤ 정치범의 석방과 테러행위의 중단을 위해 노력할 것 ⑥ 언론, 집회, 결사 등 모든 자유를 보장하도록 노력할 것 ⑦ 합작위원회에 의한 입법기구를 구성할 것 |
- 이견이 심했던 토지문제와 친일파의 처리문제는 중도적인 입장에서 조정
-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의 반발이 가장 큼
- 당시의 여론은 지지
㉯ 미군정의 지원
ⓐ 좌우합작위원회와 한국민주당계를 주축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구성(1946.12)
남조선과도입법의원 |
① 의장 : 김규식 ② 구성 ㉠ 관선의원(45명) : 대부분 좌우합작파로 임명 ㉡ 민선의원(45명) : 간접선거에 의해 대부분 이승만계와 한국민주당계가 당선 |
ⓑ 안재홍을 민정장관, 김용무를 대법원장으로 임명(1947.2)
ⓒ 남조선 과도정부의 설치(1947.5)
ⓓ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1947.5)
㉰ 여운형의 암살(1947.7) ―――――――――――――――――――┬→ 실패
㉱ 미국이 강경정책으로 선회하면서 좌우합작의 지원방침을 철회―┘
② 남북협상의 추진
㉠ 배경 :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
㉡ 내용 : 김구, 김규식 등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김두봉과 모란봉에서 회담(1948.4)
→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 미군과 소련군이 물러난 이후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
김구의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2)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
㉢ 결과 : 공산주의자의 술책에 의해 실패
㉣ 의의
㉮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자주적인 노력
㉯ 남북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주체적 평화통일론의 일환
7) 미국이 한반도의 문제를 국제연합(유엔)에 상정
①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의 실시 결정(1947.11)
②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입국(1948.1) : 북한에는 소련의 거부로 들어가지 못함
8) 유엔 소총회에서 가능한 지역(남한)만의 선거를 치르기로 결의
① 반대운동의 전개→실패
㉠ 남북협상파의 노력 : 통일정부의 수립을 추진하면서 총선거의 불참 선언
㉡ 제주도 4․3사건(1948)
㉮ 주장 : 남한단독선거의 반대, 미군의 철수, 극우테러의 반대 등
㉯ 경과 : 미군정과 극우청년단체들에 의한 가혹한 탄압
㉰ 결과 : 제주도 일부지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함
㉢ 좌익의 투쟁
㉮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전평(全評)산하 노조 30만이 총파업의 단행
㉯ 북한은 전기공급의 중단
② 지지의 표명 : 이승만, 한국민주당, 친일파 등
9) 5․10총선거의 실시(1948)
① 의의 :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보통선거
② 특징 : 21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투표권의 부여
③ 한계성
㉠ 남북협상파(김구, 김규식)와 사회주의계의 불참
㉡ 북한과 제주도(일부 지역)의 제외
④ 결과
㉠ 제헌국회의원의 선출
㉮ 독립촉성국민회(이승만계열) : 56석
㉯ 한국민주당 : 29석
㉰ 국민당 : 1명
㉱ 조선민주당 : 1명
㉲ 한국독립당(한독당) : 1명
㉳ 무소속 : 83석
㉡ 제헌국회의 구성(1948.5.30)
㉮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와 김동원의 선출
㉯ 헌법의 제정, 공포(1948.7.17)
ⓐ 대통령 중심제에 의원내각제의 혼합
ⓑ 국회는 단원제,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간선제)하는 민주공화국체제
ⓒ 지방자치제, 농지개혁을 법률로써 정함
㉰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 국회의장에 신익희의 선출 : 간접선거
광복 전후의 대표적인 인물과 활동 |
① 김구 ㉠ 치하포사건의 단행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 한인애국단의 조직 ㉣ 한국광복군의 창설 ㉤ 한국독립당의 결성 ㉥ 남북협상의 추진 ② 이승만 ㉠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 ㉢ 구미위원부의 설치 ㉣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받음 ㉤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결성 ㉥ 남한만의 단독정부의 수립 추진 ③ 안재홍 ㉠ 신간회에 참여 ㉡ 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 ㉢ 좌우합작운동에 참여 ㉣ 미군정의 민정장관 ④ 김규식 ㉠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됨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주석 (신한청년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 좌우합작운동에 참여 ㉣ 남북협상에 참여 ⑤ 여운형 ㉠ 조선건국동맹의 조직 ㉡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 ㉢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 ㉣ 좌우합작운동에 참여 |
3. 이승만 정부(제1공화국 : 1948~1960) : 자유당
(1) 이승만이 국무총리에 이범석, 대법원장에 김병로의 임명 → 정부의 구성
(2) 대한민국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 → 대한민국정부의 수립(1948.8.15)
(3)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제정(1948.9)
1) 목적 : 일제의 식민잔재를 청산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서 제정
→ 국회의원 10명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구성
2) 내용 : 친일행위자의 처벌과 공민권의 제한 등
3) 결과 : 이승만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실패 →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함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
반민특위에서 친일혐의자 478명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이 중 305명만이 체포되었으며, 나머지 173명은 영구 미제로 조사 기록만 특별 검찰부에 넘겼다. 체포한 반민자 중에도 죄질이 가볍거나 병약자 등 84명은 석방해 불구속으로 취급하였고, 특별 검찰부에 기소된 반민자는 모두 221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재판을 받은 자는 40명(재판 종결된 건수는 38건)에 지나지 않았다. 공소시효가 끝날 때(1949. 8. 31)까지 재판을 받은 40명 중에서 체형을 선고받은 자는 12명이었는데, 그 중 5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나 실제 체형을 받은 숫자는 7명에 불과했다. 체형을 받은 7명도 1950년 봄까지 재심 청구 등으로 감형되거나 형집행정지로 모두 석방되었다. |
(3) 여수․순천10․19사건(1948)
1) 원인 : 좌익과 우익의 대립 격화(제주도 4․3사건과 공통)
2) 결과 : 반공정책의 강화 → 국가보안법의 제정(1948.12)
국가보안법 |
① 목적 : 남한의 좌익세력을 제거 ② 특징 : 형법보다 5년 전에 제정 ③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조항 ㉠ 찬양고무죄 : 국가의 존위․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정· 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지역에 처한다. ㉡ 불고지죄 : 죄를 범한 자라는 점을 알면서 수사기관 또는 정부기관에 고지하지 아니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본범과 친족관계가 있는 때에는 그 형을 감형 또는 면제한다. |
(4) 대구폭동사건(1948.11) : 대구주둔군의 좌익이 주도
(5) 제3차 파리 유엔 총회(1948.12) : 대한민국을 합법정부로 승인
제3차 파리 유엔 총회의 결의 |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총선거의 감시와 협의를 할 수 있었던 남한지역에서 효과적인 통제력 및 사법권을 보유한 합법정부가 수립되었으며, …… 이 정부는 선거가 가능하였던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한다. |
(6) 남로당 국회 프락치사건의 발표(1949.5) : 김약수 등의 체포
(7) 김구의 암살(1949.6.26) : 경교장에서 안두희에 의해 시해당함
(8) 농지개혁의 추진(1950)
1) 시기 : 농지개혁법의 공포(1949) → 농지개혁법의 시행령 공포(1950)
2) 배경
① 농민운동(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 촉구)과 지주층(지주의 권리 고수)의 대립
② 미군정에서 제시한 토지개혁안이 입법의원이 해체 될 때까지 채택되지 못함
③ 북한에서 토지개혁의 추진
3) 목적
① 농민생활의 안정
②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
③ 소작제와 지주제(봉건적 토지의 소유)의 철폐
4) 대상
① 비농가의 농지
② 자경(自耕)하지 않는 농지
③ 3정보를 초과는 농지
5) 원칙 : 유상매입,유상분배
6) 상환방법 : 매년 평균 수확량의 150%를 5년 간에 걸쳐 30%씩을 곡물, 금전으로 상환
7) 특징 : 신한공사가 관리하는 적산농지와 국유지로 소유자가 분명하지 않는 토지는
국가가 흡수
8) 결과
①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추구하여 봉건적․지주적 토지소유의 해체 → 농민들의 토지소유
② 지주계급이 토지를 처분하여 상업자본, 산업자본으로 전환 → 산업자본의 형성에 기여
농지개혁 전후의 소작지 변화 | |||
연 도 |
총 농지 |
자작지 |
소작지(비율) |
1945 |
2,226 |
779 |
1,447(65.0) |
1951 |
1,958 |
1800 |
158(8.1) |
9) 의의 : 6․25전쟁 때 남한의 공산화 방지에 기여
10) 한계성
① 농지만을 대상으로 함 → 산림과 임야의 제외(전국토×)
② 농지개혁의 기간에 전쟁 발발→기간의 연장이 불가피
③ 지주적 입장의 반영 → 개량적 개혁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함
④ 농지개혁의 지연 → 지주계층들이 소작인에게 자기의 토지를 강매 처분
⑤ 지주계층의 사전 강매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유상분배에 따른 빈농의 곤란
→부농이 겸병하여 신흥지주계층과 소작제의 부활
⑥ 지주계급들은 국가적 독점의 성격을 강화하여 가는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
남한과 북한의 토지개혁(농지개혁) 비교 | ||
구 분 |
남 한 |
북 한 |
실 시 연 도 |
1950년 4월 (이승만 정부) |
1946년 3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
개 혁 안 |
농지개혁법(산림,임야의 제외) |
토지개혁법(전 국토) |
원 칙 |
유상매입, 유상분배 |
무상몰수, 무상분배 |
토지소유의 상한선 |
3정보 |
5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