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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 금관악기 사상 최초로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이하 파리음악원) 합격생이 탄생한 것.
파리음악원은 유럽의 명문이자 파리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학교다. 18세기 말 세워져 2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원이기도 하다. 베를리오즈・생상스・드뷔시・ 라벨 등 클래식 거장들을 다수 배출했으며, 매년 전 세계 음악 수재들이 이 음악원에 입학하기 위해 파리로 모인다. 우리나라는 피아노 부문에서 합격생을 낸 적이 있지만, 금관악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8월 출국을 앞둔 트럼페터 김현호는 요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서울시향 연습실을 찾아 연습을 하고 있다.
“합격했을 때는 실감도 안 나고 믿기지 않았어요. 파리음악원 시험을 본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기 때문에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어서 행복합니다.”
김현호는 중2 때 트럼펫을 시작해 서울예술고등학교에 다니다가 2학년 재학 중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로 입학한 트럼펫 수재다. 아버지 역시 트럼페터였기에 트럼펫은 그에게 익숙한 악기였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트럼펫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제 구강구조를 한번 보시더니 트럼펫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권유하시더라고요(웃음).”
처음으로 트럼펫을 들었을 때는 답답하고 막막했다. 트럼펫은 처음 소리 내기가 굉장히 어려운 악기다. 아무리 트럼펫을 입에 대고 불어보아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더라고요. ‘내가 과연 이 친구와 친해질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결국 친해지기 어려웠던 이 친구가 저를 파리음악원까지 데려 가주네요(웃음).”
강하고 직설적인 트럼펫과 친해지기

트럼펫은 화려하고 밝은 음색을 지닌 금관악기다. 금관악기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며 자극성이 강해 듣는 사람도 쉽게 심장이 뛰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굉장히 색깔이 강한 악기예요. 뚜렷하고 선명해요. 사람으로 따지면 표정을 못 숨기고 직설적인 성격이죠. 원래 소리가 큰 악기임에도 부드러운 소리도 낼 수 있어요. 현악기에 비하면 테크닉이 어렵지만 노력하면 충분한 소리가 나거든요. 제 성격도 숨기는 걸 잘하지 못하는데 저랑 아주 잘 맞는 악기입니다.”
그는 현재 서울시향이 운영하는 ‘바티 브라스 아카데미’에서 보조강사를 맡고 있다. 그도 원래 바티 브라스 아카데미 소속 학생이었다. 바티 브라스 아카데미는 국내 오케스트라 금관 파트의 강화 및 연주자 양성을 위해 2013년 하반기부터 서울시향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다. 세계적인 트럼펫 연주자로 현재 서울시향 트럼펫 수석 겸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트럼펫 수석인 알렉상드르 바티를 수장으로 전문 연주자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현호 역시 바티 브라스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다가 작년 9월 알렉상드르 바티의 추천으로 파리음악원 시험을 보게 되었다.
“바티 선생님께 파리음악원은 어떤 곳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거든요. 정말 열심히 해야 갈 수 있고 매우 힘들다고 말씀하셨는데 시간이 지나서 선생님이 먼저 시험을 한번 보라고 추천해주셨어요. 깜짝 놀랐죠.”
파리음악원은 시험곡으로 총 6곡을 지정해준다. 세 곡은 미리 공개하고 나머지 세 곡은 시험 한 달 전에 공개한다.
시험은 올 2월 말에 치러졌고 그날 바로 결과가 나왔다. 시험을 보러 파리에 갔을 때는 연습실도 없는 상황이었다. 친구 집에서 지냈는데 이웃에 시끄러울까 봐 연습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알렉상드르 바티는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빌려주며 김현호가 심리적인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김현호가 합격 소식을 제일 먼저 알린 것도 알렉상드르 바티였다.
“평소 문자에 ‘!’ 도 잘 쓰지 않는 선생님이 ‘!!!!!!!!!!’로 도배가 된 문자를 보내셨어요(웃음). 선생님도 정말 기뻐하신다는 걸 알았죠.”
트럼펫은 ‘승리’를 표현하는 악기

트럼펫을 들고 무대에 서면 조명이 연주자에게 집중된다. 연주자의 머릿속은 백지 상태다. 그 순간만큼은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를 만큼 집중한다. 무대로 들어가기까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지만 막상 조명이 켜지면 떨지 않는다. 덤덤한 성격 역시 트럼펫을 부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루에 순수하게 트럼펫 부는 시간만 4시간이었다. 그러나 덤덤한 그에게도 슬럼프는 왔다. 트럼펫은 소리 내기가 힘든 악기이다 보니 소리가 잘 안 나올 때가 있다.
“한번은 오랫동안 소리가 잘 안 나서 겁이 났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물어봤더니 ‘원래 그렇다. 사람 몸이 항상 같지는 않지 않느냐. 조용히 계속 연습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다음부터는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꾸준히 연습했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계단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죠.”
한국의 금관악기 연주 실력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게 대내외적인 평이다. 국내 클래식 음악 역사가 짧고 피아노와 현악기가 중심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파리음악원 합격 소식은 한국 금관악기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 금관악기 파트가 조금 약하지만 ‘하면 된다’는 것을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약간 부담이 되죠. 열심히 해서 부담감조차 사라지게 만들고 싶어요.”
트럼펫은 ‘승리’를 표현하는 악기다. 과거에는 군대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현재는 오케스트라 관악기의 높은 음역대부터 재즈의 자유로운 선율까지 넘나들고 있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금관악기의 세계로 뛰어드는 김현호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우리와는 다른 문화를 겪으면서 시야를 넓히고 싶어요. 음악성도 기르고 싶고요. 유럽의 웅장한 건축물들을 보면 여러 느낌을 받을 것이고 그 느낌이 트럼펫을 연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파리음악원에는 잘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잖아요.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연습하는 것 자체도 저에게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이 기회를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럼페터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