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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난해 팬데믹 때문에 세일링은 거의 못했지만... 데루수에게 남는 건 19세기 말 소년 사무라이로서 가고시마 포격전으로 시작하여 20세기 초 한 나라의 제독이 되어 치룬 쓰시마 해전에 이르는 그의 활약상을 한번 들여다 본 거였습니다. 시작은 아래와 같은 호기심 의구심 그리고 실망감 속에 되었습니다.
1) 외국엔 쓰시마 해전 기록이 그렇게 많은데 우린 왜 제대로 된 문서하나 없나? - 한국해군사관학교나 국방대학원 장교의 국내 논문 몇 편 외 볼만한 거 없었음. 아쉽게도 온라인에는 편향된 시각에서 허접하게 작성된 비전문가들의 '땜빵용 문서'가 꽤 있음.
2) 그의 전기가 왜 없나? - 찾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영문으로 된 전기는 꽤 있음. 미국해사 웹사이트에 요약서가 잘 되있음.
3) 이런 불평을 하니까 주위에서 대뜸 직접 책을 써 봐라함 - 그냥 한번 던져보는 소리로 치부^^. 국내는 읽을 사람 거의 없을 거임. 그냥 나 혼자라도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아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그 후 쓰시마 해전의 타임라인을 조사하고 도고란 인물을 좀 들여다 보니까... 세일러로서 짐작해 볼 수 있는 게:
첫째, 그는 대양 세일러의 전형적인 모습이 몸과 마음에 베어 있었을 거라는 점. 뭐하나 서툴게 해 놓으면 바다 나가서 깨지게 되어 있으니까 미리 힘 닿는 범위 내에서 꾸준히 보트와 크루(또는 자신)를 준비했으리라... 또한, 기상과 바다를 잘 파악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크루와 보트의 안전을 도모했으리라... (스페인 아마다를 깨뜨린 드레이크, 트라팔가 해전의 넬슨 제독 역시 훌륭한 세일러^^).
둘째, 모름지기 전투가 벌어지면 냉혈의 사무라이로 변신했을 거라는 점. 치열한 전투와 그 비참함에서 생기는 타협이나 인정은 접어두고, 다양한 지략과 전술을 동원해서 덤벼드는 적에게 쉴 새없이 계속 피해를 가해서, 가공할만한 적도 전의를 상실하고 결국 항복할 정도의 전투를 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란 인물만을 주로 부각시키지만 사실 당시 일본 해군 전체의 역량이 철저히 발휘된 걸로 봐야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어쩌면 개국 후 반세기 정도 지난 동양의 작은 나라가 유럽의 호전적인 강대국에 의해 자국의 안보가 심각히 위협을 받자 이를 무력 전쟁이란 수단으로 헤쳐 나갔던 역사적 결과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최근 자료를 보니 1910년 쯤 러시아의 GDP는 2,480억 달라로 세계 2위 (300조 정도? 중국과 비슷), 일본은 764억 달라(90조 정도?)로 세계 9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끄는 전쟁은 러시아가 유리했을 거고 요샛말로 코피내는 전쟁이 일본이 유리했을 거로 봅니다.
어쨋든 일본은 열강 속의 후발주자로서 자국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이 전쟁을 선택했고 꼭 이겨야 하는 절대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여기저기 쑤셔놓은 곳이 많아 아마도 일본은 여러 손볼 국가 중 하나였을 거로 추측됩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해군 전투인력 및 장비를 증강시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였고, 젊은 시절 도고는 이런 일본 상황 속에서 미래에 필요한 인재(러시아나 중국과 진검승부할 때 필요한 전투원)로 성장하는 게 뚜렷이 보였습니다.
데루수의 시간과 노력은 한정되어 있지만 도고의 젊은 시절을 들여다보면서 '아 이랬을 거 같다'라고 짐작 정도로 만족하기보다, 투명하게 기록된 그의 성장, 입지적인 영웅, 그리고 근대 일본역사에 끼친 영향까지 더욱 상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다보면 애증의 이웃 일본이란 나라, 요즘 다시 전제군주국가/소비에트 망상을 꽃피우는 러시아, 그 속에서 이젠 구한말의 모습과 사뭇 다르게 변모한 한국의 모습까지 마음 속에 그려보고자 합니다.
1편 가고시마 사무라이 출신 해군 사관이 됨
그는 가고시마의 하급 무사들이 거주하는 동네(加治屋町)서 도고(東郷) 집안의 세째 나카고로(仲五郎)로 태어납니다 (1848년 1월 27일 출생). 부친은 사쓰마 영주의 소득, 피복, 그리고 행정을 관리했다고 하니 영주 가신들 중 꽤 중요했으리라 짐작됩니다. 모친은 부친과 같은 부족 출신이었습니다. 이 동네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 도쿠가와 쇼군과 내전을 치루며 메이지 정부를 세운 인물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13세가 되자 헤이하치로(平八郎)란 이름을 택합니다 (평화 소년^^).
사쓰마 번(Satsuma domain 薩摩藩)은 오키나와(이전 류쿠왕국)까지 뻗은 '해양 영토'를 가졌었으니 중국과의 (밀)무역도 성행했다고 하며, 오랜 세월 포르투칼, 스페인, Dutch 등의 세일러들이 알아서 찾아와 과학기술이나 종교 등 문물을 전해주고, 수출입 무역을 도맡아 했던 일본 해상세력의 중심이었던 걸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꽤 규모가 있는 국내외 상업 활동으로 옛부터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사쓰마 번의 수도가 가고시마입니다(영주는 시마즈 島津 가문).
한편, 도고 성장기는 약 250년 쇄국정책이 막바지에 이르러 외국 해양세력이 들이닥쳐 간섭하기 시작했고, 쇼군 말이 잘 먹히질 않으면서 일본 내전으로 치닫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또한 현대식 무기와 병법 그리고 행정체계의 도입에 따라 사무라이 계급이 몰락하는 시기가 도래하기 직전이기도 합니다.
당시 가고시마 어린 사무라이들에겐 선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밤낮으로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전통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습니다. 각 마을마다 '고추'라는 14세 이상 젊은이들 모임을 통해 선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맹하게 싸우는 정신과 끝까지 버티는 체력을 기르도록 계속 '감시'받고 '품질 평가' 받았다고 합니다. 매일 오전엔 공자왈 맹자왈 고서 공부 오후엔 체력단련 및 쌈박질 등 실용적 훈련, 매주 군사 서적 읽기, 글 쓰기 등 특활도 있었네요. 즉, 전통에 따라 혹독하게 훈육되어 번과 영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어른 사무라이가 되어야 하는 게 그들의 정해진 운명이었습니다.
역사 속 사쓰마번 사무라이는 전국시대 동안 히데요시랑도 싸우고, 조선에 와서 충무공과도 싸웠으며, 나중에 도쿠가와 무리들과도 싸웠습니다. 이럴려면, 당연히 사무라이 등 군사세력이 커야 하니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쓰마번은 비록 부유했지만 실제 일반 사무라이들의 생활은 매우 각박했습니다. 주어진 업무는 많은데 그러니 이런 거 저런 거 하며 부수입을 올리거나 농삿일도 했습니다. 데루수 기억이 맞다면 사쓰마는 그리스로 말하면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뒤섞어 놓은 느낌에 가깝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던 소년 헤이하치로가 15살이 되던 해 한여름(1863년 8월) 가고시마항에는 (이전에 영국상인을 살해한) 사쓰마 영주를 벌하기 위해 영국해군 전투선 7척이 들어닥칩니다. 곧이어 배상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가고시마 수비군 측 해안 대포에서 경고없이 포격을 먼저 가해서 영국장교 등이 죽습니다. 그 때 당시 헤이하치로는 해안 방어 포대에서 대포를 다루던 크루로서 싸웠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가고시마 사람들에겐 선방 날리는 게 일종의 선전포고 같은 거였다는 거. 그근데 당시는 선전포고라는 전쟁 룰이 없었지만... 나중 도고의 경력을 보면 비슷한 전투 패턴이 가끔 나옴).
영국해군이 사정없이 퍼붓는 함포사격에 시가지 일부가 납작해져도 가고시마 수비군은 시민을 미리 대피시켜 놓고 시가전을 대비하면서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버팁니다(서부극에서 보는 라이플, 기관총 등으로 무장함). 포탄을 다 쓰고 상륙전 해봤자 얻을 거 없다 생각한 영국해군은 퇴각하지만, 도고와 가고시마 사람들은 근대 전함에서 쏟아지는 포탄의 무서움을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영국 해군 역시 가고시마의 항전에 적지 않게 놀랐을 것이라고 후세는 전합니다.
이걸 계기로 도고와 사쓰마 사람들은 포격술, 전함 기동 등 영국 해군이 분명 여러모로 그들과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현명하게도 사쓰마는 적국인 영국의 첨단 과학과 기술을 들여오고자 합니다. 그래서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영국과 화친을 하고 결국 사쓰마와 영국은 동맹군이 됩니다 (즉, 사쓰마번 즉 헤드쿼터였던 가고시마 사람들은 서구열강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본을 근대화하려는 토대를 마련함).
이런 일련의 사건이 자기 인생의 전환점을 갖게 했다고 도고는 말합니다. 이 시점에서 데루수는 그가 사무라이 그만 두고 아마 세일러가 되길 원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더 큰 세상을 보고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직감했을 거고 이로서 소년의 머리가 깬거죠! 때마침 사쓰마번은 영국의 전함을 중고로 사거나 수입하고, 가고시마에는 해상 포격술, 대함포전 축성술, 천문학, 수학, 조선기술, 항해술, 의학 등을 가르치는 학교가 설립됩니다 (현 야마구찌 지역 초슈번, 시코쿠의 도사번 등 다른 지역 역시 나름 해군 양성을 위한 증기선 수입, 해양 학교 설립 등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음).
사쓰마는 스스로 해양 인스티튜트(Naval Institute)를 창설(1866년)했는데 18살 헤이하치로도 두 형을 따라 입학합니다. 다른 번과 마찬가지로 가고시마 역시 그전에 이미 제련소, 주물공장, 대포제작소, 조선소 등을 지어서 전투함 건조에 필요한 인프라를 가지고 있었던 차... 이제 인재양성 기관도 설립하게 되어 실제 해군력 증강에 필요한 요소를 확실히 갖추게 됩니다.
이때쯤 사쓰마는 초슈번과 함께 쇼군 세력에 대항해 메이지 천황의 복권을 주동하게 됩니다. 도고는 초기엔 도쿄까지 가는 함선에서 사쓰마 영주의 도쿄 방문단을 보좌하다가 곧이어 사쓰마 해군 전투함 카수가(Kasuga)호 크루가 됩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닥쳐온 코베항 봉쇄 탈출 작전에서 쇼군 해군과 첫 접전을 하게 됩니다.
해상 추격전에서 카수가호는 약 1,000미터 거리에서 140여발 좀 못미치게 포를 쐈는데 도고가 쏜 포탄 포함 3발이 적함에 명중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도고가 근대 해상 함포사격전의 진상을 직접 맛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롤링 피칭 요잉하며 달리는 보트 위 대포로 적선을 맞추는 확률이 1~2% 정도라는 걸 알게 됨^^. 그러므로, 되도록 자주 많이 쏴야 하고 한번 맞추어도 큰 피해를 줘야 함).
그 후 쇼군의 잔존 세력(?)과 벌린 홋카이도 마지막 해전 후, 바로 요코하마로 가서 영어 '과외'를 했다고 합니다. 좀 생뚱 맞은 거 같지만 사실은 사쓰마 번의 지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곤 곧 도쿄번의 추키지에 있었던 '해군훈련학교'에 들어갑니다(제국일본해군 양성학교). 1870년에 요코하마에 앵커하고 있던 전투함 류지(Ryujo)호의 훈련 사관(cadet)이 됩니다. 당시 영국해군 출신 장교들이 사관 교육을 맡았기 때문에 영어 공부를 괜히 한게 아니더라고요^^.
2편 영국 유학(1871-1878)
1871년 당시 사회 모든 부분을 서구 열강 수준으로 뜯어 고치던 메이지 정부는 '강병책'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도쿄만 요코스카 조선소에 대규모 드라이 도크를 짓고 해군 전함을 건조하기 시작하는 한편 (사쓰마번은) 도고와 11명의 장교후보 사관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냅니다.
80일을 배타고 영국 싸우스햄턴 경유 런던에 도착한 도고는 석조 돔 지붕, 대형 빌딩, 실내 가구 등 시내 건축물들이 일본과 아주 다른 걸 느꼈다고 합니다. 또한 정육점 윈도우를 통해 봤더니 생고기가 너무 많더란 겁니다(당시 일본인 주로 생선과 채식). 23세 약관의 청년은 이 때부터 해군 장교 수업이나 장거리 항해 등을 하면서 약 7년이란 젊은 세월을 영국에서 보냅니다.
첫해는 영어뿐만 아니라 영국인의 전통 생활 방식이나 매너 등을 배울려고 플리머스 시내 보딩하우스에 들어갔다가, 해군사관 준비학교가 있는 포츠마우스로 옮기는 등 전전을 합니다. 다음 해 켄트 주 그린위치 근처 테임즈 항해 훈련 학교(현The Thames Marine Officer Training School)에 입학하고 워세스터(HMS Worcester)호에 승선하는 사관이 됩니다. 나중엔 빅토리호(HMS Victory)에서 포격술을 연마하는 등 2년 후 졸업하면서 학교 공부는 끝나는 거 같습니다.
1875년 2월엔 훈련선 햄프셔호를 타고 호주 멜버른까지 70여일을 항해합니다. 그동안 닦은 실력을 테스트하면서 긴 항해 생활을 견디는 대양 세일러로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멋진 기회였을겁니다. 케이프 혼을 돌아서 9월에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대양 일주를 하는 셈인데 약 3만 마일 거리였다고 합니다 (경험담 더 조사).
이쯤 일본은 이미 1년 전 류큐제도를 편입하고 타이완 상륙전, 그리고 이듬해 운요호 포격사건에 따른 '강화도조약'(일조수호조약)을 맺는 등 제국주의의 피해자에서 1세대 만에 그 발톱으로 변신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고는 이듬해까지 캠브리지에서 수학과 영어를 공부하면서 교회도 다닙니다. 그러다가 일본해군이 주문한 전투함 푸소(Fuso)호 건조를 검사하는 역할로 플리머스로 갔다가 근처 조선소 등을 방문하면서 함선 건조 기술을 학교서 배운데로 관찰했다고 합니다.
한편 일본에선 1877년에 사쓰마 반란이 일어나 형 동생들이 가담했고 3명 모두 사망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동자였고 도고는 그의 종말을 아쉬워 했다고 합니다 (미국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배경이 사이고 가문 이야기임).
1878년에 소위로 승진하면서 새로 건조된 일본 해군 소속 히에이(Hiei)호를 타고 일본으로 귀국합니다. 영국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해군 장교 경험을 쌓는 거나 귀국 전 전투선 건조 검사를 맡은 역할 모두 사쓰마번과 일본 해군의 의도였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3편 해군 장교에서 제독까지 승진 (계속 정리)
도고는 일본으로 돌아와 해군 장교로서 청불 전쟁을 참관하고, 청일 전쟁에 함장으로, 그리고 러일 전쟁에선 일국의 제독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당시 첨단기술로 건조된 빼어난 전함을 거느리게 되는데... 함장 시절 나니와호를, 제독시절 미카사호와 함께 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그의 해군 세일러 경력(과 보트)에 대해 정리하고자 합니다.
귀국 후 두달 후 중위로 승진하면서 후소(Fuso)호로 발령받고, 그 해 12월 대위가 되는 등 정말 빠르게 승진합니다. 이듬해 중령(Lieutenant Commander) , 6개월 후 진게이(Jingei) 호 부함장, 곧 이어 아마기(Amagi)호 부함장으로 전근합니다. 이로서 일본 해군성에서 지켜보는 그의 진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생략되었지만 잠깐 히에이호로 발령 받기도 함).
진게이 호는 보트 옆에 물레방아가 붙어 있는 구식 병력 수송선(일본 건조)이었는데, 데크 걸레질 포함 거의 모든 업무를 담당했던 거 같습니다. 상급장교 눈에 그는 하나같이 규칙을 철저히 지켜 일 처리를 하고 말이 좀체로 없던 장교로 비춰졌다고 합니다. 도고는 '궂은 날이나 상관없이 항상 데크에 가면 찾을 수 있다' 라는 존경어린 농담도 있었다고 합니다.
1882년 한양서 임오군란이 터지자 일본 육군을 조선에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 해 몹시 더운 날씨와 가뭄에 벼 농사를 망칠 수 있어 고종은 할 수 없이 왕실 전통에 따라 기우제를 지냈는 데 바로 그 날 7월 27일 굶주렸던 구식군대 병사들이 닥치는 데로 쏘고 베며 반란을 일으켰네요. 한양 전체에서 전투가 발발하자 조정에선 일본군이 와서 진압하길 요청했고 그들은 상륙 후 (반란군이) 외국공관을 공격한 사실에 대해 고종을 힐책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서해와 한양 물줄기를 타고 몰려 오는 서양 흑선에 무력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미국에 문을 열었고, 그 후 유럽 세력이 너도 나도 무역 핑계로 들어옵니다. 이에 조정은 중국과 일본 군사력을 빌어 대적하고자 하나, 중국은 역부족이라 결국 일본을 선택합니다. 일본 육군은 조선군의 일부를 신식군대로 훈련시키지만 밀려난 구식군대 불만은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합니다. 일본 역시 외세로 봤기 때문입니다.
아마 임오군란 진압부대에 포함되었을 도고는 나이 삼십대 중반의 장교였습니다. 그가 조선에 와서 봤을 우리 선조들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워낙 말이 없고 일기 등 기록을 남기지 않아 이 점은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 역시 우리를 적으로 보고 탄압해야 할 상대로 보았을까요? 일단 20여년 전 그가 가고시마 소년병으로 영국 함선에 포격을 했던 기억이 되살아 나지 않았을까요? 단순히 군인으로서 임무에 충실할 생각만 했을까요?(나중에 확인)
도고는 영국에서 귀국 후 여러 전투함을 거치는 동안 서서히 해군 인재로서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단순히 군인으로만 성장했다고 보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그는 제독이 되는 과정에서 조선, 청 국민 또는 군인들과 땔래야 땔 수 없이 엮이게 됩니다.
에필로그
도고는 사무라이였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이슬처럼 사라져간 동시대 인물들과 달리 스스로 세일러가 되기로 작심합니다. 영국해군과의 가고시마 포격전이 그를 눈뜨게 했다고 하나, 시대의 부름에 따랐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곧이어 사쓰마번과 메이지 정권에 의해 발탁되어 해군 인재로 일찌감치 훈련받고 준비되어 집니다.
영국 유학 동안 HMS 빅토리에 승선해서 "제국은 여러분 모두 의무를 다하기를 바란다."란 신호기를 보면서 넬슨 제독의 보국정신을 마음에 담았을 거고, 황실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영국에 온 러시아 전함의 함포 소리를 처음 접하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 후 사관 도고에게 닥칠 미래 사건들과의 조우라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도고는 20대 중반 증기선에 올라타 대양일주를 마칩니다. 영국해군 실습선에 탔다는 말도 있고 정기 상선을 몇 대 갈아 타면서 일주를 마쳤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쨋든 소년 청년기를 지내며 국내 해전을 경험하고 영국서 해군 사관 교육을 받은 후 경험한 대양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사실 세일러로서 그를 볼려면 이 대양 경험을 잘 들여다 봐야 할 수 있기에 앞으로 좀 더 자료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훗날 일본 일부에선 그를 '전쟁의 신'으로 모시자고 했다지만,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풍운의 세일러'다운 모습을 더 찾아보고 싶습니다만..., 지금까지 읽어본 바에 따르면 그는 소년 사무라이, 내전 참전 해군 병사, 영국 유학 장교, 귀국 후 승승장구하고 결국 나라를 구한 군인으로서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두드러집니다. 그가 세일러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의 이야기는 실로 인류 역사에 둘도 없는 전설로 남지 않을까 싶네요^^.
참조 문서:
'Togo Heihachiro' 위키 페이지
'Admiral Togo, Nelson of the East' by Jonathan Clemens
'The Life of Admiral Togo,' by Arthur Lloy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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