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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춤
2010, 6, 27
삼하6:1-23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예루살렘 성을 새 수도로 정하고 왕궁을 짓고, 정권이 안정되자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성에 모시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모시 고자 하는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보좌에 앉으셨음을 온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는 일을 온 국민의 관심을 모으는 거국적인 종교행사로 행하며 여호와의 신앙을 부흥 시키려는 의도를 또 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각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들 3만을 초청하여 민족적인 행사로 시행했습니다.
그들은 다 함께 바알레유다로 갔습니다.
바알레유다란 기럇여아림 이라는 옛 이름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모시려하면서 그 감격을 시편 68편에 기록했습니다.
시 68편 19-21절에“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항상 죄 가운데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께치시리로다.
하나님의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찌라” 하고 이때의 감격을 노래했습니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새 수레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왔습니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 아효는 앞에서 수레를 끄는 소를 몰고 가고,
웃사는 수레 옆에서 따라갔습니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러 악기를 연주하며 수레 앞에서 가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실은 새 수레는 뒤 따라 갔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화려한 행렬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며 예루살렘 성으로 가는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갑자가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언약궤를 붙든 웃사를 그 자리에서 치시니 웃사가 거기 하나님의 궤 옆에서 죽었습니다.
웃사가 소가 날뛰므로 언약궤를 붙든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어쩌면 반사적인 행동일 수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웃사를 충돌하여 죽는 것을 보고 분하게 여겨서 이곳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 칭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웃사를 쳐서 죽였다는 뜻입니다.
웃사의 죄는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사명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궤를 만진데 있습니다.
민수기 4장 5절, 15절, 20절에 특정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접촉하지 못하도록 엄히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웃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배했습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데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두 마리의 암소가 끌도록 해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문외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행했던 방법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들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길 때에는 레위인들이 어께에 매고 옮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데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비극의 요소는 이미 잠재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법을 어기는 자는 그 값이 생명으로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웃사를 충돌하심으로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을 보고 다윗이 분하게 여겼습니다.
웃사가 지은 죄는 기껏 경솔한 죄 밖에는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한 행동이요, 반사적으로 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다윗이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법과 하나님의 신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보호를 받으실 만큼 연약하거나 불완전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뜻이나 사정에 의해 변경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거룩하시며 영원히 변경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자를 바로 죽이십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에 하나님의 궤를 옮기기를 두려워함으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이 할 수 없이 떠맡은 것 같습니다.
“치우쳐”하는 단어를 보면 그 상황에서 오벧에돔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3달을 모셨는데 정성껏 모셨던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벧에돔과 그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는 주를 믿음으로 정성껏 섬기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아비나답의 집에서는 적어도 70-80년 동안 하나님의 궤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벧에돔은 그 집에 모신지 3달 만에 복을 받았다는 소문이 다윗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비나답은 70-80년을 모시고도 복을 받지 못했는데 오벧에돔은 기껏 3개월 모시고도 복을 받았을까요?
그 차이는 아비나답은 다만 하나님의 거룩하신 언약궤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에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만지는 자를 치시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궤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궤를 살아계신 하나님처럼 모셨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차이가 그를 하나님께 복 받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자기 안에 살아계신 주가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육신대로 살고 자기 안에 살아계신 주가 계시는 것을 믿는 자는 주로 말미암아 살며 주와 동행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다윗은 오벧에돔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반드시 말씀대로 행하시는 엄위하신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다윗은 첫 번째 실수한 원인을 알았기에 여호와의 말씀대로 레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궤를 메도록 했습니다.
같은 내용이 역대상 15장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 때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사람들의 이름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비롯해서 레위 족장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나오면서 여섯 걸음을 옮기고는 아무 탈이 없자 그 곳에서 하나님께 수송아지 7마리와 숫양 7마리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섯 걸음을 옮기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궤를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 옮기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15장의 기록을 참조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궤을 옮기는 행렬에 하나님의 궤 앞에 노래하는 많은 자를 세워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고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자를 세워서 즐겁게 연주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그 때 왕 복을 벗고 행렬 앞에서 뛰 놀며 춤을 추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 뒤를 따라오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 부분을 설교하면서 다윗이 춤을 추면서 자기 신복의 계집종 앞에서 몸을 드러냈다는 20절의 내용을 다윗은 자기 바지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다고 하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 에봇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왕복을 벗고 입은 에봇은 어깨도 가슴도 깊게 파인 옷입니다.
그러므로 왕복을 벗고 에봇만 입으면 속살이 보이는 옷입니다.
역대상 15장을 보면 다윗은 그 에봇은 입고 춤을 추며 뛰놀았다고 했습니다.
한 나라 왕이 몸을 드러내면 춤을 춘다는 것은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이었습니다.
나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춤을 춘 부분에 대해서 아주 특별하게 보았습니다.
나는 다윗이 이 행렬에서 춤을 추는 것은 하나님의 궤를 새 장막으로 옮기는 때에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리는 제사로 보았습니다.
이는 다윗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특별한 헌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목동에서 택하여 왕으로 세우셨고, 그의 모든 전쟁에서 항상 이기게 하시고, 그의 모든 원수들에게서 건지시며, 그의 모든 기도를 항상 들어 주시는 하나님께 기쁨으로 자신을 제사 드린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아시며 왕으로 세우시고, 항상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린 것입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 앞에서 뛰 놀며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자기를 드리는 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을 다윗은 알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주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씻는 헌신을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이 향유는 어른 1년의 품삯에 해당되는 값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가난한 여자였습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의 재산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모든 것을 주의 발에 붓고 그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주를 향한 그녀의 큰 사랑과, 주를 깊이 경외하는 마음, 자신의 낮고 비천함을 깊이 깨달으며 자기의 모든 것, 몸과, 마음과, 그의 영혼까지 드리며, 그가 가진 세상에 가진 유일한 값진 향유를 주의 다리에다가 다 쏟아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주께 자기가 헌신할 수 있음에 한 없이 기뻐했을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 그녀만이 드릴 수 있는 주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요, 특별한 헌신이었습니다.
나는 마리아의 이러한 헌신을 보면서 나는 놀라고 놀라워했습니다.
마리아는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대한 사랑과 주를 경외함의 크기에 깊이가 나하고는 아주 다른 사람입니다.
나도 나의 모든 것을 드리고 주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향유옥합을 깨트려 주께 붓고, 머리를 풀어서 그 발을 씻을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마리아에 비해서 주의 대한 사랑의 크기와 깊이가 다르고, 주에 대한 경외함이 크기와 깊이가 너무도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그녀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헌신을 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받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한 일도 전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 말씀 때문에 마리아의 허신은 성경에 기록되어 이제까지 뭇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리아를 통해 크게 영광 받으셨고, 마리아에게도 영광을 되돌려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큰 영광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주를 안 다음, 자신만이 드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쓴 이용규 선교사님이 바로 그런 주의 종입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로 대학교수 자리를 마다 몽골의 선교사로 갔습니다.
선교사로서도 가장 어려운 몽골이라는 곳으로 박사학위도 대학교수 자리도 버리고 갔습니다.
그가 몽골로 간 이유가 자기의 가진 모든 것이 소용이 없는 곳, 지식도, 지혜도 학위도, 인맥도 아무 소용이 없는 곳을 택한 곳이 몽골이었다고 합니다.
그 는 자기가 가진 것 다 내려놓고 오직 주 만 바라보며 주의 뜻에 따라 주를 섬기겠다는 그 순전한 믿음으로 몽골로 갔습니다.
그는 그 순전한 믿음대로 몽골에서 주를 만나며 주를 섬길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가 있는지요?
예수를 믿어도 돈이 있는 사람, 권세가 있는 사람, 명예가 있는 사람,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긍지가 대단합니다.
잘 나가는 목사님들도 그래요,
이들은 예수를 믿는 다 지만 자기의 긍지로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여요.
얼핏 보아서는 잘 모르지만 조금만 상대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용규 선교사님은 이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지식이나 지혜나 긍지를 다 내려놓고 오직 주와 교통하며 주를 섬길 수 있는 곳을 찾아 갔을 것입니다.
이는 이 용규 선교사만이 주께 자기를 드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주를 기쁘시게 해 헌신이 아니겠습니까?
주의 뜻을 따라 주께 순종하여 사는 것을 가장 크게 생각하는 자요 하나님이 주신 자기 생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헌신 할 수 있는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는 사는 날 동안 자기 뜻이나 지혜나 지식이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로 말미암아 살기를 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과 주를 경외함으로 주 앞에 행하는 사람을 주는 저를 아시고 저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모잠비크에 가서 고아들 5000명을 돌보는 하이드 목사님도 있습니다.
그 백인 여성이 모잠비크를 간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열악하고 가장 가난한 나라를 택한 나라가 모잠비크였다고 합니다.
그는 모잠비크에 들어가서 정부에서도 먹여 살리지 못하는 고아들을 모아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먹였으며 지금도 그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이드 목사님은 세계 구호기관에 도와달라고 손을 내 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주께 기도하며 날마다 주를 의뢰하고 주를 힙 입어 산다고 합니다.
이들은 다 자기만이 드릴 수 있는 특별한 헌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주의 종들입니다.
이들은 다 순전한 영혼을 가진 종들이요, 사도들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주를 믿는 자라면 우리만이 드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헌신으로 주를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과 나는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오직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사람을 세상에 둘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각 아주 특별하게 유일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헌신도 하나님의 목적대로 특별하게 나만이 드릴 수 있는 헌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말하기를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가 그들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는 아주 특별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각각 아주 특별한 관계로 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각 아주 특별한 관계로 대해 주시는데 우리도 각각 특별한 나만이 드릴 수 있는 헌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방법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왕들은 왕들대로 자기 영광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나라 백성들은 각자 자기 영광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자기 영광” 이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하나님께 드린 영광입니다.
이 세상에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그리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으로 주를 섬기면서 드린 것들을 가지고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영혼으로 반드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가 주를 위해서 행한 대로 주를 섬긴 모든 것을 그 나라에서 우리 영혼은 영광으로 되돌려 받는 것입니다.
반드시 받습니다. 이를 의심하지 마세요, 주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한 것을 받기 위함이라”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과 주께 모든 것을 드리기 위해서는 헌신된 마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를 위해 행한 모든 것과 주께 드린 모든 것은, 아무리 자고 사소한 것이라도, 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의 상과 면류관과 영광으로 받을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믿음의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깁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궤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올 때 다윗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뛰 놀면 춤을 추며 왕궁으로 들어오는 것을 사울의 딸 미갈이 왕궁의 높은 곳에서 창으로 내다보면서 심중에 저를 업신여겼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윗의 주께 대한 크고 깊은 사랑과 믿음과 경외함과 드림과 헌신을 보면 놀라워하며 잊을 수가 없는 인상으로 충격으로 와 닿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미갈의 눈으로 보면 왕이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은 왕의 위엄을 생각지 않은 어리석은 행위요, 사람들에게 멸시 받을 행위요,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행위였습니다.
미갈은 왕궁의 높은 데서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그의 마음으로 다윗을 엽신 여겼습니다.
이는 믿음 없었던 사울 왕과 같이 그의 딸의 미갈도 불신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다윗의 특별한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업신여긴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는 생각은 전혀 세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생각과 행위가 근거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준비한 장막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고 그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하고 거기 참석한 모든 백성들에게 떡과 고기와 건포도를 나눠 주어 백성들이 돌아가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자기 가족들을 축복하러 돌아오는데 자기 아내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한 말을 내가 현대인의 성경으로 좀 알기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어쩌면 이스라엘 왕이 그처럼 영광스럽게 보이십니까? 천한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함부로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왕은 오늘 신하들의 하녀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습니다.” 하고 빈정거렸습니다.
미갈의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대답하기를 “나는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춘 것이요, 여호와께서 당신의 부친과 그의 가족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셔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으니 나는 앞으로도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계속해서 춤을 출 것이요, 내가 이 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당신이 말하는 그 하녀들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을 것이요”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다윗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자기 기쁨만 생각하고 하나님이 언약궤를 옮기는 행렬 앞에서 그 많은 백성들과 신하들과 하녀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었습니까?
다윗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춤 추는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 것을 생각지 못했을 까요?
누구보다도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은 다윗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왕으로 세우시고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기에 자기를 드리는 산제요, 헌신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위엄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기가 더 낮아지고 또 천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 계집종 앞에서 계속해서 춤을 출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갖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다윗처럼 헌신한 사람들은 다윗처럼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실 것입니다.
미갈 처럼 믿음이 없는 여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고 욕을 받습니다.
이 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을 것입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