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폐된 공간의 벽을 깨는 역할을……
증 언 자 : 박선정(남)
생년월일 : 1958. 4. 28(당시 나이 23세)
직 업 : 대학생(현재 관광회사 근무)
조사일시 : 1989. 6
개 요
1980년 전남대 인문사회과학대 학생회장으로 5월 14일부터 진행된 민족민주화대성회에 주동적으로 참여하다 계엄확대 조치로 5월 17일 자정경에 예비검속을 당했다. 수감생활중 학생들이 광주민중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 최후진술을 강하게 하여 실형 1년의 형량을 모두 채우고 석방되었다.
낭만적으로 생각한 대학이
나는 광주시 서동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네 살 때 경찰공무원인 아버지가 목포로 근무지를 옮김에 따라 우리 집은 목포로 이사를 했다. 목포에서 유달국민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다. 나이가 어린 나는 아버지가 왜 경찰직을 그만두고 운수업을 하셨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 가족은 다시 광주로 이사를 왔다. 광주 대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무등중학교에 입학했다. 중 3 때 외삼촌 친구와 가까이 지내면서 문학과 접하게 되었는데 약간 현실도피적이고 환상적인 책에만 탐닉하다 보니 자연히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광주일고를 지원했으나 떨어져 후기인 동신고를 진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여 1978년, 전대 문리대 문학부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 캠퍼스에 학원사찰이 있어 학생들을 감시하는 등 유신 말기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모든 것을 위축되게 했다. 대학을 낭만적이고 자유스럽다고 생각한 내게 그것은 매우 충격이었다. 대학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고민하던 차에 사학과 4학년이던 신일섭 선배의 제안으로 문리대 서클인 '문우회'를 창립했다. 나는 문우회를 통해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1978년 6월 29일 전남대 교육지표사건으로 서클회장인 신일섭 씨와 학술부장인 안길정이 구속되었다. 서클의 주요인자가 구속됨에 따라 서클의 활동이 약간 위축됐다. 이들이 가을에 석방되어 서클회원들과 함께 무등산 등반을 했다. 등반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유인즉 우리가 등반한 날 공교롭게도 학교에 유인물이 뿌려진 것이다. 서부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우리 서클에서 유인물을 뿌린 후 등반을 했다고 몰아붙였다. 이는 문우회를 없애기 위한 저들의 함정이었다. 1박 2일 동안 조사를 받고 다시는 이런 서클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다른 회원들도 모두 연행되어 각서를 썼다. 이리하여 문우회는 유야무야 해체되어 버렸다.
문우회 멤버들이 겨울방학에 다시 모여 민족의 얼과 대학의 양심을 되찾자는 뜻의 '얼샘회'를 창립했다. 곧바로 겨울에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사회과학의 원론보다는 주로 이영희의 '우상과 이성', '베트남전쟁' 등 기초적인 사회과학책과 문학책을 읽고 학습했다. 나는 열심히 활동하여 1979년 2학기 때 얼샘회 회장을 맡았다.
인문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이 되어
민주화의 봄이라 불리던 1980년, 전남대에서는 학내민주화와 총학생회 부활을 위해 '학원자율화추진회'(이하 학자추위)가 결성되고 정동년(1980년 당시 전남대 복적생협의회 회장), 김상윤(1980년 당시 녹두서점 운영), 윤강옥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대거 복적하여 '복적생추진협의회'를 결성했다. 복적생 80퍼센트가 문리대생이었고 우리 서클의 바로 옆방에 복적생 방이 있어 우리는 복적생들과 접촉이 많았다. 복적생들은 구시대 잔재청산의 의미에서 어용교수 문제를 터뜨리고 '어용교수 백서'를 내는 등 열심히 활동했다.
학자추위에서 개최한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두 차례의 공청회에서 박관현 씨가 뛰어난 지도력을 인정받아 총학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나는 인사대 서클인 얼샘회의 회장이었고 또 인사대 학생운동을 우리 서클에서 주도했기 때문에 인사대 학생회장으로 입후보했다. 인사대에서는 명문고인 일고, 광고, 그리고 목포 문태고 출신들이 각각 입후보했다. 그때는 출신고가 매우 중요하였고 실세로 작용했는데 복적생들이 광주제일고 출신이 많고 또 박관현이 광주고를 나왔기 때문에 모든 조건이 내게 불리했다.
4월 9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는 150표 차이로 인문사회대 학생회장으로 당선됐다. 곧바로 복적생들이 터뜨렸던 어용교수 문제를 학생회에서 맡았다. 특히 정득규, 박하일, 범대순, 손광은 등 어용교수라고 지목된 대부분이 인사대 교수였기 때문에 인사대 학생회에서 주도적으로 싸움을 시작했다.
4월 23일, 인사대 학생회 출범과 더불어 어용교수 문제 해결을 위한 임시 학생총회를 열어 해당교수들이 자진 퇴진하기 전까지 수업 전면거부, 중간고사의 전면 거부, 해당 교수의 교수실 폐쇄, 문교당국 및 각 언론기관에 탄원서 제출, 해당교수의 공개적인 모욕행사(화형식) 등을 결의했다. 나는 정득규 등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학생들의 의견을 전달했으나 정득규 교수는 신병을 이유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는 '학생들 뜻대로 세상이 될 줄 아느냐'며 오히려 야단을 쳤다. 그래서 우리는 실력행사로 들어가 다음날 어용교수로 지목된 인사대 4명의 교수실에 못을 박는 정침식을 가졌다.
4월 25일부터 총학생회 주최로 어용교수 문제가 본격화되어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부터는 단식을 시작했다. 어용교수 11명 중 5명이 자진 휴직한다는 의사표명을 함에 따라 5월 3일, 반민족, 반민주 어용교수의 화형식을 거행하고 나머지 어용교수들은 교수로 인정치 않기 때문에 수업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다음 농성을 풀었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그날부터 학내문제에서 사회민주화로 이슈를 전환했다.
5월 8일, 전남대에서 민족민주화대성회를 개최하고 전남대 총학생회와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의 명의로 제1시국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단과대학별로 민주화 일정을 잡아 단대별 특성에 맞게 행사를 벌이기로 했다. 인사대에서는 그동안 해왔던 '철쭉제'를 '등나무제' 행사로 바꿔 학술행사와 문화행사를 했다.
5월 14일은 처음으로 가두시위가 있던 날이었다. 총학생회 지도하에 종합운동장에 모여 각 단과대학별로 도청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서부서장과 담판을 지어 평화적 시위를 약속하자 길을 비켜주었다. 인사대는 전남대 정문을 넘어 도청까지 달려갔다. 처음 하는 가두시위라 가슴이 뛰고 흥분되었다. 구슬땀을 흘리고 뛰어가니 자연대학생들이 먼저 와 있었다. 교수, 학생, 시민들이 분수대 앞에서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가졌다. 끝날 때쯤 비가 억수같이 내렸으나 그 열기는 최고조로 달했다. 집회가 끝나자 학생들은 행진을 하고 귀교해 철야농성을 했다.
5월 15일, 도청 앞 민족민주화대성회에서는 광주와 목포지역 학생들의 명의로 된 제2시국선언문의 15개 강령을 채택했다. 강령에서 농지개혁의 실시, 노동3권 보장, 비상계엄 해제, 민주일정 제시 등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거론하였다. 강령 하나하나가 집결한 학생, 시민들에 의해 제창되었다.
5월 16일은 고등학생들까지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시민들의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 이때 군인, 경찰이 국민적 대열에 동참하자는 내용의 '국군장병에게 드리는 글'이 낭독되었다. 그리고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일차로 마무리 짓게 될 횃불행진을 평화적으로 진행했다. 횃불행진이 끝나자 박관현은 만일 휴교령이 내릴 경우 18일 아침 10시에 전남대에서 모이자고 했다.
예비검속되어
5월 17일은 집회가 없어 시내에 나가 친구들과 술자리를 함께 한후 그 동안 여러행사로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 서동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속옷을 입고 있는데 보안대 형사 3명이 권총을 들이대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가 밤 11시 50분 정도였다. 부모님이 보는데도 수갑을 채우고 속옷차림 그대로 끌고 가 검정 지프차에 태웠다. 그들은 나를 차에 태우더니 검은 안대로 눈을 가렸다. 내가 도착한 곳은 505 보안대 지하실이었다.
약 한 평 남짓의 지하실에 책상이 하나 있고 피 묻은 몽둥이와 벽에는 핏자국이 사방에 있었다. 이러한 살인적인 분위기는 위압감을 주기 위한 그들의 작전인 것 같았다. 그들은 다짜고짜 무식하게 말했다.
"너! 평양에 몇 번 갔다 왔어? 김일성은 몇 번 만났지? 어떻게 북으로 잠입했어?"
모든 것을 김일성과 연결시켰다. 나는 너무나 황당해 사실대로 부인했다. 그러자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워 넣고 양쪽에서 짓밟았다. 그들이 말한 부분에 대해서 부인할 때마다 그들은 여러 종류의 고문과 구타로 취조했다. 그리고 성장과정에 관한 자필진술서를 약 40여 차례 반복해서 썼다. 나의 옆방에서는 엄청난 고문으로 인한 신음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동년 선배였다.
5월 19일 밤 예비검속자들과 함께 군 트럭의 적재함에 머리를 처박은 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예비검속자들은 정동년, 김상윤, 하태수, 박영선, 김운기, 양희승, 유소영, 윤목현 씨 등 주로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생들이었다.
내가 들어간 영창 5호실에는 탈영병 등 20여 명이 있었다. 상무대 영창 안에서 동신고 5회 선배가 형무반장을 하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바깥 상황을 얘기해 줬다.
"지금 광주는 폭도들에 의해 점거당했다. 이것은 고정간첩의 준동이다."
"학생지도부는 어떻게 됐습니까?"
"도청지도부는 학생들이다. 우리는 너의 생명의 은인이다. 왜냐하면 네가 잡히지 않았으면 너는 지금 도청 안에 있을 것 아니냐?"
"박관현 씨는 어떻게 됐소."
"어디로 도망갔다 그러더라."
5월 24일부터 시위하다 잡힌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엄청나게 맞아 다리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을 통해 밖의 상황을 대충 들을 수 있었다. 형무반장의 얘기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하고 상황급변에서 오는 당혹감이 매우 컸다. 나는 박관현의 거처가 가장 궁금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위장을 하고 시위를 한다고 하고 또한 승복을 입은 중의 차림으로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등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 나는 박관현 형이 죽지는 않았다는 데서 안도감이 들었다.
민중항쟁에 학생들이 빠져버렸다는 자책감으로
5월 27일은 많은 사람들이 잡혀오고 김윤기, 김선출 등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들어왔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거대한 민중항쟁이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끌려온 사람들은 학생보다는 기층민중들이 많았다. 그들이 들어오자 영창 안은 피냄새로 진동했다. 특히 여름이라 살 냣는 냄새가 역겨울 지경이었다.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심한 자책감과 무기력에 빠졌다.
합동수사반은 5·18 항쟁기간에 끌려온 사람을 소위 폭도반에서 취급하고 예비검속자들은 학생반에서 담당했다. 예비검속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대해 줬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나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6월 중순에 5·18을 학생소요에서 내란사건으로 묶으면서 예비검속자들이 내란음모에 전부 가담한 것으로 했다. 총학생회 간부는 죄명이 내란죄로, 단대 학생회장들은 소요 및 포고령 위반으로 묶었다.
그들은 그때부터 집중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제1시국선언문에 나오는 '우리는 통일로 가는 길목에 진달래로 타올라……' 부분의 핏빛 진달래를 트집잡아 북한을 동조했다고 했다.
그리고 김대중씨와 연관된 자금 수수설에 대한 부분이었다. 정동년 씨가 김대중 씨에게 자금을 받아 박관현씨에게 학생회 자금으로 80만 원을 준 것으로 조작했다. 박관현씨가 정동년에게 받은 돈을 단대 학생회장에게 10만 원씩 주었다는 시나리오를 짜고는 10만 원의 사용처를 불라고 했다. 처음에는 펄펄 뛰었으나 정동년씨가 모두 불었다고 했다. 나는 하는수없이 10만 원으로 학생들에게 빵과 우유를 사줬다는 식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27일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어 4사 하층 1방에서 생활했다. 교도소에 있으면서 상무대에서 재판을 받아 구형 4년 실형 1년을 선고받았다. 수감생활중 민중항쟁에서 학생지도부가 빠져버리고 시민들에게 떠맡긴 행위에 회의가 느껴져 나는 심한 자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양심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최후진술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 피력했다.
'인간이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 산소가 희박해져 옆 동료가 고통스러워할 때 나는 과감히 벽을 깨는 역할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석방되려고 했는데 내가 최후진술을 강하게 하자 나를 괘씸하다고 생각한 검사가 '나가고 싶지 않느냐'며 윽박질렀다. 그래서 10년 이하 구형자는 모두 석방됐는데도 나는 실형 1년을 받고도 12월에 출감하지 못하고 있다가 1981년 4월 3일 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정치권에 몸담고
석방후 사회운동에 바로 투신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상당기간 휴식상태로 있었다. 나는 학생운동권을 떠난 상태여서 경제적인 부분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가구점을 운영했으나 동업한 친구가 5·18로 수배가 되어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그 후 세일즈맨과 농산물 직판장에서 일했다.
1984년, 유화국면에 접어들면서 대거 복적되어 나도 복적을 했다. 전남대의 분위기는 학내민주화를 위한 첫걸음으로 학도호국단 체제를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나는 복적생들과 함께 '복적생협의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맡았다. 기존의 학도호국단 간부와 복적생 그리고 학내 비합기구 투쟁단체인 민주회복추진협의회 인자들과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 전대생의 의견을 결집하여 대표성을 갖는 전남대 총학생회 부활추진협의회를 구성했다. 나는 회장의 역할을 맡았다.
총학생회 선거결과 오병윤이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다. 총학생회 부활추진협의회가 해체되자 복적생들은 인권복지협의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복적생협의회에서는 학교측과 총학생회의 중재역할을 했다.
1985년 8월에 졸업한 후 윤강옥씨의 추천으로 전남 민주회복 국민협의회의 홍보간사를 맡았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평민당 광주, 전남 선거본부의 홍보국장을 하고, 총선 때는 정상용 후보의 보좌관으로 선거운동을 하다가 정상용 씨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비서관으로 활동했다.
1989년, 평민당 광주시 지부에서 일할 생각으로 광주에 내려와 있으면서 프라자관광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사회로 나와 재야운동권과 정치권에 몸 담으면서 자기 스타일과 역량에 맞는 운동에 투신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국민의 이익을 위해 복무할 수 있는 정치가 되려면 학생운동권의 영입이 필요하고 학생시절에 품었던 생각의 실현을 위해서도 정치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중요하리라 본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힘찬 첫 주일 맞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