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차관련 질문과 답글
※ SNS 상에서 질문 답글을 보면 사이트 특성상 한눈에 볼 수 없어(답글 더보기를 클릭해야하기에) 여기 다시 질문과 답글을 올립니다.
※ 영남학파 퇴계 이황과 기호학파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이 생각납니다. 당시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낸 59세의 노대가였고, 고봉은 겨우 과거에 급제한 33세의 소장인데 8년동안 서신으로 논쟁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독특한 발전을 가져오게 했던일처럼 아래글을 보시면 문화류씨 선조들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을 보실 것입니다.
Hongchae Ryu님의 글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류문과 차문의 문제는 2004년 연안차씨 대동보가 발간되고 그 내용 중에 문화 류씨 문중의 근본을 부정 내지 무시하는 내용이 기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문화류씨 성은 가짜이며 연안차씨가 진짜이고 본류라는 내용입니다.
2. 이에 류문은 수 백년간 연안 차씨를 같은 조상님을 가진 형제로 여겼던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객괸적 자료조사에 들어갑니다.
3. 조사결과 형제라 여긴 핵심 근거 자료였던 "차원부설원기"가 위서를 넘어 악서임이 밝혀지고 증명됩니다. 결론은 문화류씨의 시작은 역사적으로 증명되나 연안차씨의 시작은 증명되지 못하거나 거짓으로 밝혀집니다.
4. 때문에 류문과 차문은 시작부터 형제도 아니었고 형제일 수도 없었는데 차원부설원기라는 위서때문에 사실이 왜곡되었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다음 글을 보십시요.
글 소 : http://blog.daum.net/fit-to-love/15700912
류재택님 질문
신라말 쫒겨난 애장왕을 복위시키려다 발각되어 처가인 해주로 도망간 차승색이 처가(양씨)의 성을 따서 버들류씨, 류백으로 개명하여 살았고, 그 6세손이 왕건의 삼한통일에 천대의 수레에 양곡을 실어보낸 공으로 차운달량, 차달공이 되고,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차씨를 도로 찾고, 5대를 내려온 류씨도 계승하라고 하여, 큰아들은 연안백으로 봉하니 연안차씨가 되고, 둘째아들은 문화현에 세거하여 문화류씨가 되었다.
이게 틀리는 겁니까?
Hongchae Ryu님 답글
말씀하신 내용의 근거자료가 조선 초기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차원부설원기"입니다.
그런데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모두가 근거가 없거나 위조된 것이 밝혀졌습니다. 특히 최근에 문헌학자들에 의해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과 비교했을때 터무니없는 거짓임이 밝혀졌습니다. 신라 역사서와 고려 초 역사 기록에 차승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역사적 사건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차원부설원기에 속은것이지요.
류재택님 질문
소성왕이 승하하면서 아들 애장왕에게 재상 차건신을 아버지로 모시라고 유언하니 차건신이 죽자 왕례로 장사지내고 기장군 만화리에 릉을 만들었습니다.
왕이나 왕비가 아닌 유일한 능이지요.
그의 아들 류승색이 재상이 되어 애장왕을 보필하였으나 애장왕이 쫒겨나고, 차승색은 도망쳤구요.
차승색은 사라진 이름이니 역사기록에 없는게 당연하고, 그로부터 5대를 흘러 고려건국때 공신칭호 '차운달량'을 받은 대승공 류'차달'이 차건신의 장자 차승색의 후예라고 밝힌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애장왕의 의숙부이신 차건신의 릉이 있고, 애장왕이 쫒겨나고 차씨의 기록이 사라진 것이니 사실에 부합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류차달의 아들이 연안백(연인군 수령)에 봉해져서 연안차씨의 시조가 되었으니까요.
Hongchae Ryu님 답글
말씀하신 내용의 근거자료가 조선 초기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차원부설원기"입니다.
그런데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모두가 근거가 없거나 위조된 것이 밝혀졌습니다. 특히 최근에 문헌학자들에 의해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과 비교했을때 터무니없는 거짓임이 밝혀졌습니다. 신라 역사서와 고려 초 역사 기록에 차승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역사적 사건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차원부설원기에 속은것이지요
Hongchae Ryu답글
국가에 큰 공로가 있어 왕이 예로서 장사를 지낼만한 사람이 역사서에 기록이 없고 약 1,000년에 가까운 후대에 갑자기 나타납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의 내용입니다. 참고하십시요.
차릉(車陵)은 『연안 차씨 세보(延安車氏 世譜)』에서 신라 소성왕(昭聖王)의 고명신(顧命臣)이던 차건갑, 혹은 차건신(車建申)의 무덤으로 설명하고 있다. .......
....... 차릉의 피장자인 차건갑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 지리지의 인물조에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차건갑과 차릉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와 『기장읍지(機張邑誌)』[을묘식, 1846]에도 능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필사본 『기장읍지』[경오식, 1870] 고적조에 의하면 “차릉은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신라 애장왕 때 승상 차건갑이 죽자 국가에 큰 공로가 있어 왕이 예로써 이곳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교남지(嶠南誌)』 기장군 총묘조에 “일광면 만화리에 있다. 신라의 태사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업고 있는 그림을 받은 소성왕의 고명신이 되었다. 죽자 왕이 예로써 장사 지냈다. 세칭 차성현의 명칭은 차릉에서 유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동래군지(東萊郡誌)』와 『동경속지(東京續誌)』 등의 여러 문헌 자료에도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차릉은 1870년대 이전에 전혀 기록되지 않다가 이후에 알려졌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연유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류재균 답글
부산 기장 만화동 차릉은 차성이씨가 자기선조 묘라고 주장하였고 류주환교수의 의의 제기로 문화제에서 해지하였는데 차씨측에서는 기장군이 부산에 편입되면서 착오로 빠진 것이지 문화제에서 해지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류재택님 질문
어느 한두사람의 주장과 이의 제기로 역사가 바뀌는 건 아니지요.
차릉이란 수천년 내려온 이름이 지금 한두사람의 주장으로 바뀔 수 있나요?
역사기록보다 구전이 더 역사적인 경우도 많지요.
Hongchae Ryu님 답글
신념 앞에서는 객관적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념이 무서운 것 지요. 하물며 조상에 대한 생각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다리는 수 밖에요.
마지막에 쓰신 글은 증명가능성이라는 새로운 논쟁을 파생시킬만합니다만, 이 곳에서 우리끼리 그 논쟁은 할 수는 없죠. 류문끼리 싸우자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저도 처음 이 문제를 접하고 설마설마 하면서 자료조사를 해봤습니다.
류차문제의 쟁점인 "차원부설원기" 위서여부에 대한 문제는 학계에서 문헌연구를 통해 객관적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이에 문화류씨 대종중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고 공표하였으며 관련자료를 홈페이지에 해설형태로 게시하고 있습니다.(문화류씨 대종회 홈페이지 참조)
류재균 답글
차성이씨(http://blog.daum.net/seonsang/6036552)들이 시제를 지내오고 있었는데 (http://www.andongkwon.pe.kr/coding/sub8/sub1.asp?bseq=24&cat=-1&sk=&sv=&page=14&mode=view&aseq=5764#.V5grpGbr2Uk )1963년 어느날 갑자기 차씨들이 자기 선조묘라고 봉분을 크게하고 집입로를 만들고 문화류씨가 합세하여 전국적으로 약360여명 정도의 작은 성씨라 빼았겠다는 것인데 기장군이 매년 차성축제를 하는데 그 차성군이 차성이씨이고(차문은 차성이 차릉이라하여 기장군에서 차성군 해명자료를냄) 문화제 해지할때 사학자 향토사학자들의 자문회의를 여러번 한 결과 차건신(갑)묘라는 근거가 없다고 해지했습니다.
http://blog.daum.net/seonsang/6036549 (차릉 철거 글)
부산역사문화대전(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2127) (사이트내 통합검색에 차릉쓰고 검색하면 나옴)의 문화제 해지 내용글
한 두사람 주장으로 해지 한 것이 아닙니다. 또 차원부설원기목판도 순천시에서 보관장소(무슨 서원인가를) 건립지원금을 중지했는데 차문은 이것도 보물이라고하니 순천시 문화제위원들은 무식하다는 말인가요
류재균답글
당연히 틀린말입니다. 차원부설원기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근거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승상이라는 괸직명이 없고 신라에 차씨관료는 한명도 없습니다.검색해보십시오. 강남으로 피신한 차공도가 왕건선조라는 것도 차천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왕건아버지 성씨는 용씨 할아버지 성씨는 작씨입니다. 이것도 검색해보십시오. 차공도는 왕씨로 변하여 왕건까지 오는데 왕건은 도선국사가 왕씨로 성을 고치라고 왕건아버지에게 말하여 왕씨로 바꾼 것이지 왕씨로 쭉 이어 온 것이 아닙니다
신라 장보고가 죽고 당나라와 무역하던 호족끼리 서로 의지하며 형제보다 더 믿었기에 궁예의부하 왕건이 나주를 점령하도록 목숨을걸고 침투로를 확보해준 나주 오다련호족도 무역상이고 류차달도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호족이기에 같이 무역했던 작제건손자 왕건에게 수레를 도와 준것입니다.
차운달량도 차원부설원기 작가가 만든 이야기입니다. 수레를 도와줄 때 이름이 그냥 류차달이었습니다
차효전이 식읍을 받았다는데 고려 개국공신 명단에 없습니다. 검색해보십시오. 왜 없느냐? 차원부설원기 작가가 만든 이야기이니까입니다
류재균답글
조선시대는 정보 공유가 안되어 차천로에게 속았고 당시 차원부설원기 작가가 지은 차원부 설원기가 위서라는 학자들의 정보도 공유안되어 몰랐으나 지금은 검색하면 바로 아는데 우리아버지가 큰집이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검색결과를 믿지 않으려고 하니 답답합니다.
류재균답글
연안차씨 최초족보인 무자보(1706년발행) 서문을 류상운(숙종때 영의정)이 썼다고합니다. 나와같은 집안이다는 내용입니다. 이것도 차씨 누군가 쓰고 우의정 류상운이 썼다고하는데 차원부설원기 작가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유는 1695년에 우의정이고 1696년에 영의정이되고 1706년은 사직하고 고향에 있을때이고 위작의 더 큰 이유는 손녀사위 남처관의형 남극관(영의정남구만손자)이 당시 차원부설원기는 위서라고 했는데 손녀 시가집 남구만 집안이 차원부가 류차달 후손이라는 차원부설원기를 차원부설원기 작가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친정 할아버지가 차씨는 나와 같은 집안이라는 서문을 쓰겠냐?는 것입니다
첫댓글 탄탄 한 자료와 논증으로 차문을 과감히 깨 부수는 얼정에 감사합니다. 역사적 사실로 차문의 엉터리 조작을 깨 부수는 하곡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차문의 철절한 행태와 작태가 기대되고 궁금입니다. 아수건 교수가 차원부 설원기의 현란한 문장 조작의 극치를 박살내고 채하 류주환 교수는 류차문제애 거짓을 걸러내는 횃불울 밝혔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거짓의 책(僞書) 차원부 설원기는 그 슬픈 종말이 다가오는 듯 합니다. 참은 참이고 거짓은 거짔입니다.
제가 대종회홈과 카패와 블로그에서 만난 종원들은 대부분 차씨문제를 알고 있기에 약 10여년간 홍보한 효과를 보는가 했는데 밴드 페북 카카오 등 SNS에서 만난 종원들은 아직도 차문이 큰집으로 알고 있는 분이 많이 지속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종회 차원에서 대종회홈에 있는 "文化柳氏 先系歷史 收錄에 관한 건" 같은 문건을 타문 종중에 보내는 노력을 해야하는데 하는 바램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노력하시는 한뜻님처럼 개인적인 홍보는 한개점이 있습니다. 전국에 있는 족보 도서관에 알아보았더니 대종회 직인으로 보내달라고 하여 대종회에 이야기하였는데 아마 몇군데는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마다 주기적으로
그러나 해마다 주기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을 이번 SNS에서 알았습니다. 이글을 보신 대종회 임원님들께서는 반영되도록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