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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거질미왕(291년 (음))
거질미왕 ( 291년 (음) )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56년으로註 563563 ≪삼국유사≫의 왕력편에서는 재위 기간을 55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즉위한 해를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닫기 영화(永和)註 564564 동진(東晋) 목종(穆宗)의 연호로 345년~356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 병오 7월 8일(346년)에 죽었다. 왕비는 아궁(阿躬)註 565565 아도간(阿刀干)을 고친 직명이다.닫기 아간(阿干)註 566566 신라 17관등 중 6관등으로 아찬(阿湌), 아척간(阿尺干) 또는 아찬(阿粲)이라고도 한다(권덕영, 「신라관등 아찬·나마에 대한 고찰」, ≪국사관논총≫ 21, 1991).닫기의 손녀 아지(阿志)註 567567 여기서는 고유명사로 되어 있으나 일반명사인 阿只와 같은 뜻이며, 아기의 경어이다.닫기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註 568568 다음에 이시품(伊尸品)이라고도 한다.닫기을 낳았다.
註 563
≪삼국유사≫의 왕력편에서는 재위 기간을 55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즉위한 해를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註 564
동진(東晋) 목종(穆宗)의 연호로 345년~356년에 사용하였다.
註 565
아도간(阿刀干)을 고친 직명이다.
註 566
신라 17관등 중 6관등으로 아찬(阿湌), 아척간(阿尺干) 또는 아찬(阿粲)이라고도 한다(권덕영, 「신라관등 아찬·나마에 대한 고찰」, ≪국사관논총≫ 21, 1991).
註 567
여기서는 고유명사로 되어 있으나 일반명사인 阿只와 같은 뜻이며, 아기의 경어이다.
註 568
다음에 이시품(伊尸品)이라고도 한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색인어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이시품왕(346년 (음))
이시품왕 ( 346년 (음) )
김씨이고 영화(永和)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62년으로註 569569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60년간 재위한 것으로 나온다.닫기 의희(義熙)註 570570 동진(東晉) 안제(安帝)의 연호로 405년~418년에 사용하였다.닫기 3년 정미 4월 10일(407년)에 죽었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註 571571 가야국의 관직으로 농사일을 맡아본 듯하나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닫기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註 569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60년간 재위한 것으로 나온다.
註 570
동진(東晉) 안제(安帝)의 연호로 405년~418년에 사용하였다.
註 571
가야국의 관직으로 농사일을 맡아본 듯하나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좌지왕(407년 (음))
좌지왕 ( 407년 (음) )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義熙) 3년에 즉위하였다. 용녀(傭女)註 572572 품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라는 뜻이다.닫기에게 장가를 들어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삼으니 나라 안이 소란스러웠다. 계림국(鷄林國)註 573573 신라를 이르는 말이다.닫기이 꾀를 써서 치려하니, 박원도(朴元道)註 574574 박씨 성을 가진 인물이 이 시기에 실제로 가락국에 있었을지 의문이다. 아마도 후대에 윤색이 가해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닫기라는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유초(遺草)를 보고 또 보아도 역시 털이 나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늘이 망하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하겠습니까?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註 575575 ≪주역(周易)≫의 64괘 가운데 40번째에 해당하는 괘. 밖으로는 우레가 동하고 아래로는 험한 물이 있어, 험한 과정을 지나 마침내 풀리는 것을 상징한다. ‘解’자에는 쇠뿔을 뺀다는 자의가 들어있는 바, 쇠뿔을 단숨에 뽑듯이 풀 때는 과감하게 행하여야 함을 뜻한다.닫기를 얻었는데, 그 점괘의 말에 ‘소인(小人)을 없애면 군자(君子)가 와서 도울 것이다’註 576576 ≪역경(易經)≫의 해괘(解卦)에서 나온 말로 소인의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리면, 즉 여기서는 용녀와의 관계를 없애면 그 무리들은 후회하여 악을 고치고 내부한다. 즉 신변에서 바르지 못한 것을 없애면 왕위가 안정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닫기 라고 했으니 왕께선 역(易)의 괘를 살피시옵소서”라고 하니 왕은 사과하여 “옳다.”고 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註 577577 김해부근 바다에 있는 섬으로 추측되나 분명히 알 수 없다.닫기에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으로註 578578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즉위한 해를 계산에 넣지 않아 14년간 재위한 것으로 나온다.닫기 영초(永初)註 579579 남조(南朝) 송(宋) 무제(武帝)의 연호로 420년~422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 신유 5월 12일(421년)에 죽었다. 왕비는 도령(道寧) 대아간(大阿干)註 580580 신라 17관등제의 제5관등에 해당하는 ‘대아찬(大阿飡)’의 다른 이름이나, 이 시기에 관연 ‘대아간(大阿干)’이라는 관등이 가락국에 실재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닫기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註 572
품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라는 뜻이다.
註 573
신라를 이르는 말이다.
註 574
박씨 성을 가진 인물이 이 시기에 실제로 가락국에 있었을지 의문이다. 아마도 후대에 윤색이 가해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註 575
≪주역(周易)≫의 64괘 가운데 40번째에 해당하는 괘. 밖으로는 우레가 동하고 아래로는 험한 물이 있어, 험한 과정을 지나 마침내 풀리는 것을 상징한다. ‘解’자에는 쇠뿔을 뺀다는 자의가 들어있는 바, 쇠뿔을 단숨에 뽑듯이 풀 때는 과감하게 행하여야 함을 뜻한다.
註 576
≪역경(易經)≫의 해괘(解卦)에서 나온 말로 소인의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리면, 즉 여기서는 용녀와의 관계를 없애면 그 무리들은 후회하여 악을 고치고 내부한다. 즉 신변에서 바르지 못한 것을 없애면 왕위가 안정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註 577
김해부근 바다에 있는 섬으로 추측되나 분명히 알 수 없다.
註 578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즉위한 해를 계산에 넣지 않아 14년간 재위한 것으로 나온다.
註 579
남조(南朝) 송(宋) 무제(武帝)의 연호로 420년~422년에 사용하였다.
註 580
신라 17관등제의 제5관등에 해당하는 ‘대아찬(大阿飡)’의 다른 이름이나, 이 시기에 관연 ‘대아간(大阿干)’이라는 관등이 가락국에 실재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색인어
지명 : 하산도
국명 : 계림국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취희왕(421년 (음))
취희왕 ( 421년 (음) )
질가(叱嘉)라고도 한다. 김씨로 영초(永初)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1년으로註 581581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즉위한 해를 계산에 넣지 않아 30년으로 나온다.닫기 원가(元嘉) 28년 신묘 2월 3일(451년)에 죽었다. 왕비는 진사(進思) 각간註 582582 신라의 경위(京位) 17관등 중 최상의 관등인 이벌찬(伊伐湌)의 다른 명칭으로 이벌간(伊伐干), 우벌찬(于伐湌), 각찬(角湌), 서발한(舒發翰), 서벌감(舒伐邯)이라고도 한다. 각간이라는 관등이 생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1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조에 기록되어 있다.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으로 중대에 이르러 그 위에 대각간·태대각간 등의 상위 관등을 두어 김유신처럼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였다(서의식, 「신라 상대(上代) ‘간(干)’층의 형성·분화와 중위제(重位制)」,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4| 김철준, 「고구려 신라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닫기의 딸 인덕(仁德)으로 왕자(王子) 질지(銍知)를 낳았다.
註 581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즉위한 해를 계산에 넣지 않아 30년으로 나온다.
註 582
신라의 경위(京位) 17관등 중 최상의 관등인 이벌찬(伊伐湌)의 다른 명칭으로 이벌간(伊伐干), 우벌찬(于伐湌), 각찬(角湌), 서발한(舒發翰), 서벌감(舒伐邯)이라고도 한다. 각간이라는 관등이 생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1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조에 기록되어 있다.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으로 중대에 이르러 그 위에 대각간·태대각간 등의 상위 관등을 두어 김유신처럼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였다(서의식, 「신라 상대(上代) ‘간(干)’층의 형성·분화와 중위제(重位制)」,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4| 김철준, 「고구려 신라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색인어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질지왕(451년 (음))
질지왕 ( 451년 (음) )
금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註 583583 ‘一云銍, 金氏’로 고쳐야 한다는 설이 있다.닫기 원가(元嘉) 28년에 즉위하였고 이듬해에 시조註 584584 원문에는 世祖라고 표기되어 있다.닫기와 허황옥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혼인한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치세는 42년으로註 585585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36년간 재위한 것으로 나온다.닫기 영명(永明)註 586586 남조(南朝) 제(齊) 무제(武帝)의 연호로 483년~493년에 사용하였다.닫기 10년 임신 10월 4일(492년)에 죽었다.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沙干)註 587587 신라 17관등제에서 제8관등에 해당하는 ‘사찬(沙飡)’의 다른 이름이다.닫기의 딸 방원(邦媛)으로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註 583
‘一云銍, 金氏’로 고쳐야 한다는 설이 있다.
註 584
원문에는 世祖라고 표기되어 있다.
註 585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36년간 재위한 것으로 나온다.
註 586
남조(南朝) 제(齊) 무제(武帝)의 연호로 483년~493년에 사용하였다.
註 587
신라 17관등제에서 제8관등에 해당하는 ‘사찬(沙飡)’의 다른 이름이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색인어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겸지왕(492년 (음))
겸지왕 ( 492년 (음) )
금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註 588588 ‘一云鉗, 金氏’로 고쳐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닫기 영명(永明) 10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0년으로,註 589589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즉위한 해를 계산에 넣지 않아 29년으로 나온다.닫기 정광(正光)註 590590 북위(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의 연호로 520년~524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 신축 4월 7일(521년)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으로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註 588
‘一云鉗, 金氏’로 고쳐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註 589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즉위한 해를 계산에 넣지 않아 29년으로 나온다.
註 590
북위(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의 연호로 520년~524년에 사용하였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색인어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구형왕(521년 (음))
구형왕 ( 521년 (음) )
김씨(金氏)이다. 정광(正光)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42년으로註 591591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12년간 재위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이 옳다. 여기서는 고령 지역의 대가야의 멸망 연도를 가락국의 멸망 연도로 혼동하여 구형황의 재위 연수를 42년으로 잘못 적어놓은 것이다.닫기 보정(保定) 2년註 592592 북주(북주(北周)) 무제(武帝)의 연호로 561년~565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임오 9월(562년)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註 593593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7세 혹은 15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진흥왕은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진흥이라는 칭호는 본서에서 시호라 하였으나, 진흥왕 순수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생존 시의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닫기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다.註 594594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23년(562)조에는 이해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켜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 등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였다고 되어있다. 이는 대가야의 멸망을 의미하며, ≪가락국기(駕洛國記)≫ 편자는 대가야의 멸망과 금관가야의 멸망을 혼동한 것이므로 금관가야의 멸망은 ≪개황록(開皇錄)≫이 전하는 532년으로 해석하는 것이 통설이다.닫기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註 595595 동기(同氣)는 형제자매를 의미한다. 탈지(脫知)는 인명. 이질금(尒叱今)은 존칭이다. 그러나 가락국 당시에 왕의 아우에 대해 ‘이질금(尒叱今)’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닫기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註 596596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에는 노종(奴宗)으로 되어 있다.닫기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註 597597 앞서 나온 ‘尒叱今’을 줄인 말이 아닐까 여겨진다.닫기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註 598598 ≪삼국사기≫에는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이라고 되어 있다.닫기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註 599599 양은 남조의 하나이다. 건강(建康)(현 南京)에 도읍하였으며, 557년에 멸망하였다. 중대통(中大通)은 무제(武帝)의 네 번째 연호(529~535)이다.닫기 4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註 591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12년간 재위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이 옳다. 여기서는 고령 지역의 대가야의 멸망 연도를 가락국의 멸망 연도로 혼동하여 구형황의 재위 연수를 42년으로 잘못 적어놓은 것이다.
註 592
북주(북주(北周)) 무제(武帝)의 연호로 561년~565년에 사용하였다.
註 593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7세 혹은 15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진흥왕은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진흥이라는 칭호는 본서에서 시호라 하였으나, 진흥왕 순수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생존 시의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註 594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23년(562)조에는 이해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켜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 등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였다고 되어있다. 이는 대가야의 멸망을 의미하며, ≪가락국기(駕洛國記)≫ 편자는 대가야의 멸망과 금관가야의 멸망을 혼동한 것이므로 금관가야의 멸망은 ≪개황록(開皇錄)≫이 전하는 532년으로 해석하는 것이 통설이다.
註 595
동기(同氣)는 형제자매를 의미한다. 탈지(脫知)는 인명. 이질금(尒叱今)은 존칭이다. 그러나 가락국 당시에 왕의 아우에 대해 ‘이질금(尒叱今)’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註 596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에는 노종(奴宗)으로 되어 있다.
註 597
앞서 나온 ‘尒叱今’을 줄인 말이 아닐까 여겨진다.
註 598
≪삼국사기≫에는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이라고 되어 있다.
註 599
양은 남조의 하나이다. 건강(建康)(현 南京)에 도읍하였으며, 557년에 멸망하였다. 중대통(中大通)은 무제(武帝)의 네 번째 연호(529~535)이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군사>전쟁>전투이유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색인어
이름 : 진흥왕,탈지이질금,졸지공,분질수이질,계화,세종,무도,무득
서명 : 개황록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일연이 논평하다
일연이 논평하다
논평하여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살펴보면, 구형왕(仇衡王)은 양(梁)의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註 600600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 참조닫기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의 건무(建武) 18년 임인(42년)으로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532년)까지를註 601601 가야의 건국 연대를 서기전 2세기로 올려보고 가야는 위만조선시대에 성립되었으며 수로왕은 가야의 시조가 아니라 여섯 가야의 연맹체가 형성될 때 그 맹주였던 인물이라고 본 연구도 있다(이병도, 「수로왕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981, 314~322쪽). 반면 가야의 건국연대를 서기42년이 아닌 서기 2세기경이나 그 이후로 낮추어 보려는 견해의 경우, 수로왕의 재위 기간이 158년간이나 된다는 점을 비롯해 고려 문종 말기 金官知州事가 찬술한 것을 요약해서 실은 ≪가락국기(駕洛國記)≫의 내용에 대한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참고했다는 ≪개황력(開皇曆)≫에 실린 가야국의 왕력은 신라의 왕력과의 관계 아래서 정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 또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 결과 김해시 일대가 문화중심으로 대두하는 시기는 3세기 후반이라는 점 등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40~41쪽: 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1998, 7쪽). 이와 달리 서기 42년을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도 동일한 연대가 실려 있다는 점, 가야왕실의 世系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왕명이 누락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서기전 1세기경의 국경변화와 사회 혼란 속에서 가야가 건국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주장되고도 있다(윤내현, 「가야의 건국과 성장에 대한 재고찰」, ≪사학지≫ 30, 1, 1997, 32~36쪽).닫기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으로 상고한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註 602602 북위(北魏)를 말한다. 그러나 562년 당시 이는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대신 북주(北周)가 들어서 있었다.닫기 보정(保定) 2년 임오(562년)이다. 그러면 30년을 더하여 도합 520년이다. 지금 두 가지 설(說)을 모두 기록해 둔다.
註 600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 참조
註 601
가야의 건국 연대를 서기전 2세기로 올려보고 가야는 위만조선시대에 성립되었으며 수로왕은 가야의 시조가 아니라 여섯 가야의 연맹체가 형성될 때 그 맹주였던 인물이라고 본 연구도 있다(이병도, 「수로왕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981, 314~322쪽). 반면 가야의 건국연대를 서기42년이 아닌 서기 2세기경이나 그 이후로 낮추어 보려는 견해의 경우, 수로왕의 재위 기간이 158년간이나 된다는 점을 비롯해 고려 문종 말기 金官知州事가 찬술한 것을 요약해서 실은 ≪가락국기(駕洛國記)≫의 내용에 대한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참고했다는 ≪개황력(開皇曆)≫에 실린 가야국의 왕력은 신라의 왕력과의 관계 아래서 정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 또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 결과 김해시 일대가 문화중심으로 대두하는 시기는 3세기 후반이라는 점 등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40~41쪽: 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1998, 7쪽). 이와 달리 서기 42년을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도 동일한 연대가 실려 있다는 점, 가야왕실의 世系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왕명이 누락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서기전 1세기경의 국경변화와 사회 혼란 속에서 가야가 건국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주장되고도 있다(윤내현, 「가야의 건국과 성장에 대한 재고찰」, ≪사학지≫ 30, 1, 1997, 32~36쪽).
註 602
북위(北魏)를 말한다. 그러나 562년 당시 이는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대신 북주(北周)가 들어서 있었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색인어
서명 : 삼국사
국명 : 신라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순도조려(順道肇麗)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다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다
순도조려(順道肇麗)
순도[道公]註 001001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승려 순도(順道)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소수림왕 2년(372) 6월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순도를 보내 고구려에 불상과 불경을 전하게 하자, 소수림왕은 순도를 머물게 하고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였다.닫기 다음에 또 법심(法深)註 002002 이곳 외에 다른 데는 기록이 없다.닫기, 의연(義淵)註 003003 고구려 평원왕 때의 승려로 평원왕 18년(576) 진(陳)에 파견되어 불법을 배워 왔다.닫기, 담엄(曇嚴)註 004004 이곳 외에 다른 데는 기록이 없다.닫기의 무리가 서로 계속 불교를 일으켰다. 그러나 고전(古傳)에는 기록이 없으므로 지금 여기서는 함부로 순서에 넣어 편찬하지 않는다. 승전(僧傳)註 005005 고려의 승려인 각훈(覺訓)이 편찬한 ≪해동고승전≫을 말한다. ≪삼국유사≫에는 ≪해동승전(海東僧傳)≫≪고승전(高僧傳)≫으로도 표기하고 있다.닫기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註 001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승려 순도(順道)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소수림왕 2년(372) 6월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순도를 보내 고구려에 불상과 불경을 전하게 하자, 소수림왕은 순도를 머물게 하고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였다.
註 002
이곳 외에 다른 데는 기록이 없다.
註 003
고구려 평원왕 때의 승려로 평원왕 18년(576) 진(陳)에 파견되어 불법을 배워 왔다.
註 004
이곳 외에 다른 데는 기록이 없다.
註 005
고려의 승려인 각훈(覺訓)이 편찬한 ≪해동고승전≫을 말한다. ≪삼국유사≫에는 ≪해동승전(海東僧傳)≫≪고승전(高僧傳)≫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색인어
이름 : 순도조려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순도조려(順道肇麗) >고구려 불교가 시작되다(372년 (음))
고구려 불교가 시작되다 ( 372년 (음) )
고려본기(高麗本記)[고구려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소수림왕(小獸林王) 즉위 2년 임신(壬申), 즉 동진(東晉)의 함안(咸安)註 006006 중국 동진(東晋) 간문제(簡文帝)의 연호로 371년~372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이고, 효무제(孝武帝) 즉위년에 전진(前秦)註 007007 351년 저족의 추장 부건(苻健)이 장안(長安)을 공략하여 취한 뒤 그곳을 도읍으로 정한 5호16국 중의 하나이다. 제3대 부견(苻堅) 때는 현신(賢臣) 왕맹(王猛)을 얻고 국력을 착실히 쌓아 5호시대 왕조 중 가장 융성했다. 370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키고 376년에는 전량(前凉)을 병합하였으며 또 장강 이북의 땅을 평정하였다. 부견은 화북(華北)이 안정되기 전에 다시 강남의 동진(東晉)에 쳐들어갔으나 383년 비수(淝水)전투에서 대패하여 멸망하였다.닫기의 부견(符堅)註 008008 부견의 ‘符’자는 ≪진서(晋書)≫ 113, 부견전에 의거하여 보통 ‘苻’자로 수정한다.닫기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당시에 부견은 관중(關中), 즉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다.
또 [동왕 즉위] 4년 갑술(甲戌)(374년)에 아도(阿道)가 진(晉)에서 왔다. 이듬해 을해(乙亥) 2월(375년)에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물게 하고,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있게 하였다. 이것이 고려(高麗)[고구려] 불교의 시작이다.註 009009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해동으로 되어 있어 약간 차이가 있다. ‘秦王符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2년 하6월),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5년 춘2월).닫기
≪승전≫에 순도와 아도가 위(魏)나라에서 왔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註 010010 ≪해동고승전≫에는 순도는 진(秦)에서 왔으며, 아도(阿道)만이 위(魏)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닫기 확실히 그들은 전진(前秦)에서 왔다. 또 초문사는 지금의 흥국사(興國),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興福)라고 한 것도 역시 잘못이다.註 011011 ‘記云 以省門爲寺 今興國寺是也 後訛寫爲肖門 又 伊弗蘭寺 以置阿道 古記云 興福寺是也’(≪해동고승전≫ 1, 유통1-1, 순도).닫기
살펴보면, 고구려 때의 도읍은 안시성(安市城)註 012012 이 당시의 도읍은 국내성(집안)이다. 다만 ≪삼국유사≫ 1, 왕력편의 국원왕조에는 ‘第十六國原王...壬寅八月移道安市城...’이라는 기록이 있다.닫기, 일명 안정홀(安丁忽)로서 요수(遼水)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요수는 일명 압록(鴨淥)으로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고 한다. 송경(松京)註 013013 고려시대의 개경으로 지금의 개성을 가리킨다.닫기의 흥국사의 이름이 어찌 [이곳에] 있을 수 있겠는가?
註 006
중국 동진(東晋) 간문제(簡文帝)의 연호로 371년~372년에 사용하였다.
註 007
351년 저족의 추장 부건(苻健)이 장안(長安)을 공략하여 취한 뒤 그곳을 도읍으로 정한 5호16국 중의 하나이다. 제3대 부견(苻堅) 때는 현신(賢臣) 왕맹(王猛)을 얻고 국력을 착실히 쌓아 5호시대 왕조 중 가장 융성했다. 370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키고 376년에는 전량(前凉)을 병합하였으며 또 장강 이북의 땅을 평정하였다. 부견은 화북(華北)이 안정되기 전에 다시 강남의 동진(東晉)에 쳐들어갔으나 383년 비수(淝水)전투에서 대패하여 멸망하였다.
註 008
부견의 ‘符’자는 ≪진서(晋書)≫ 113, 부견전에 의거하여 보통 ‘苻’자로 수정한다.
註 009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해동으로 되어 있어 약간 차이가 있다. ‘秦王符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2년 하6월),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5년 춘2월).
註 010
≪해동고승전≫에는 순도는 진(秦)에서 왔으며, 아도(阿道)만이 위(魏)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註 011
‘記云 以省門爲寺 今興國寺是也 後訛寫爲肖門 又 伊弗蘭寺 以置阿道 古記云 興福寺是也’(≪해동고승전≫ 1, 유통1-1, 순도).
註 012
이 당시의 도읍은 국내성(집안)이다. 다만 ≪삼국유사≫ 1, 왕력편의 국원왕조에는 ‘第十六國原王...壬寅八月移道安市城...’이라는 기록이 있다.
註 013
고려시대의 개경으로 지금의 개성을 가리킨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문화>사상>불교사상>경논소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색인어
이름 : 소수림왕,부견,순도,아도,순도,아도,순도,아도
서명 : 승전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순도조려(順道肇麗)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압록강에 봄 깊어 물가의 풀빛 고운데
백사장에 갈매기 한가롭게 졸다가
노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한 소리 길게 우네
어느 곳 고깃배가 손님 싣고 오는가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색인어
지명 : 압록강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난타벽제(難陁闢濟) >마라난타가 백제 불교를 열다(384년 (음))
마라난타가 백제 불교를 열다 ( 384년 (음) )
난타벽제(難陁闢濟)
백제본기(百濟本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註 014014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胡僧摩羅難陀自晉至 王迎之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침류왕 원년 9월),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침류왕 2년 춘2월).닫기
제15대 ≪승전(僧傳)≫에서는 14대라고 했으나 잘못이다.침류왕(枕流王) 즉위 갑신(甲申)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註 015015 중국 동진(東晋) 효무제의 연호로 376년~396년에 사용하였다.닫기 9년(384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晉)에서 왔는데, [그를] 맞이하여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예우하였다. 이듬해 을유(乙酉)(385년)에 절을 새 서울 한산주(漢山州)에 세우고, 승려 열 명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교의 시초이다. 또 아신왕(阿莘王)이 즉위한 태원 17년(392년) 2월에 교령을 내려서 불법을 신봉하여 복을 구하라.註 016016 아신왕(392~405)에 관한 이 기사는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에는 보이지 않는다.닫기
마라난타는 번역하면 동학(童學)이라고 한다. 그의 특이한 행적은 ≪승전≫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註 014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胡僧摩羅難陀自晉至 王迎之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침류왕 원년 9월),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침류왕 2년 춘2월).
註 015
중국 동진(東晋) 효무제의 연호로 376년~396년에 사용하였다.
註 016
아신왕(392~405)에 관한 이 기사는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문화>사상>불교사상>불교정책
색인어
지명 : 한산주
국명 : 진
제3 흥법(興法第三) >난타벽제(難陁闢濟)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천지가 개벽할 때는
대개 재주 부리기가 어려운 것인데
차근차근 스스로 알면 노래와 춤 절로 나와
옆사람 끌어들여 보도록 하였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