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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니 바다에서
유병덕
새해 선물을 받았다. 국립심포니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초대장이다. 뜻하지 않은 호사요 감사다. 오랜만에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회다. 예전에 교향악단 지휘자를 가까이했던 때가 머리에 스친다. 그는 한 달에 한 번꼴은 초대한듯하다. 어쩌다 가보면 클래식 음악이 낯설다. 피아노 협주곡이 어떻고,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어떤 거라고 이야기하여도 귀를 닫았다. 대중가요처럼 귀에 쏙쏙 들오지 않아서다. 현직에서 물러나며 심포니 바다에서 허우적거린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어눌한 말투가 귀엽게 들린다. 지휘자는 멋진 백발의 이방인이다. 무대 위에 선물상자 리본이 지휘자 손에 마법처럼 풀리고 포장지가 벗겨진다. 그 속에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이 반짝이는 보석처럼 나타난다.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 연주자들이 지휘자와 눈인사다. 커다란 배경 화면에 영어 자막이 수놓고 아래로 한글 자막이 시냇물처럼 흐른다. 화면 속에 자막을 보며 심포니가 4악장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눈치챘다. 지휘자의 신들린 듯한 손놀림과 그들의 연주가 새해의 문을 두드린다.
슈트라우스 2세, 오페레타 <박쥐> 서곡이 선율을 타고 귓가에 앉는다. 시간이 바뀌는 새해다. 신년음악회는 이러한 변화를 알리는 음악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시간이다. 고요한 선율이 동살처럼 퍼진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작곡한 오페레타 <박쥐>는 신년음악회에 제격이다. <박쥐>는 경찰 모욕죄로 금고형에 살게 된 아이젠슈타인 남작이 그 전날 아내 몰래 파티에 참석하고, 아내 로잘린데는 변장한 채 그 파티에 참석하여 남편을 골탕 먹인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소리와 아니리를 엮어 만든 판소리처럼 해학과 풍자가 가득하다.
두 번째 장이 열린다. 웅장한 피아노가 단상의 주인이다. 거슈인, 피아노 협주곡 ‘랩소디인 불루(Rhapsody in Blue)’를 연주하기 위해서다. 흥과 신명이 나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곡으로 이 곡만 한 게 없다. 요란하게 흥청거리는 분위기다. 1920년대 재즈계에서 명성이 높았던 미국의 작곡가 폴 화이트먼은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목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이는 젊은 작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조지 거슈윈이다. 그는 거슈윈에게 재즈를 응용한 협주곡을 부탁한다. 거슈윈이 뉴욕발 보스턴행 기차에서 이 곡의 악상을 떠올린 게 유명하다. 이후 오선지에 음표를 찍어 넣는다. 그는 편곡을 거쳐 피아노 협주곡으로 재탄생시켰다.
피아노 협주곡은 낮은음에서 급작스레 상승하는 사이렌 같은 클라리넷 소리로 시작하는 도입부가 상징이다. 사실 리허설 때 클라리넷 연주자가 장난스레 연주한 것을 듣고 지휘자가 본 공연에서도 똑같이 연주하라고 부탁하여 탄생한 소리다. 재즈풍의 분위기를 따라 관악기의 장난스러운 사운드가 재밌다. 음색을 색다르게 연출하는 뮤트를 창작한 금관악기는 ‘꾸앙’거리는 장난스러운 대목을 연출한다. 2부에서 피아노의 표정은 익살스럽고 다소 어두우나 감정이 고조되고 섬세한 선율이 이어진다. 3부의 금관악기는 재즈 빅밴드처럼 울려 퍼진다. 요란한 소리의 향연 속에서 피아노는 기교를 부린다. 그러다가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끝을 맺는다. 마치 사물놀이에서 격렬하게 들려오는 징 소리 같았다.
세 번째 장이 오른다.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다. 오페라는 음악과 함께 이야기가 흐른다. <마술피리>는 동화와 사랑 이야기가 모였다. 아이는 동화 같은 분위기를 좋아하고, 어른은 사랑 이야기에 끌린다. 밤의 여왕의 시녀들에게 구출된 타미노 왕자는 여왕의 딸 파미나의 초상화를 보고 반하여 자라스트로로부터 그녀를 구출하려고 한다. 새 장수 파파게노와 함께 자라스트로에게 가는데, 실은 자라스트로가 학식이 높은 인물이며, 밤의 여왕이 악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을 이겨낸 왕자는 파미나 공주와 결혼하고, 파파게노도 파파게나를 아내로 맞는다.
2부에서는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중‘지옥의 복수심으로 내 마음 불타오르네’다. <마술피리>는 희극 오페라지만, 밤의 여왕만 등장하면 냉기가 흐른다. 그녀는 딸에게 단검을 주며 살인을 시킨다. 이 노래를 부르는데 매우 높은 음정이다. 이처럼 현란한 고음을 구사하는 가창법을 ‘콜로라투라’라고 하는데, 콜로라투라 전문 소프라노에게 사랑받는 노래다. 1980년대 영화 <아마데우스>에는 이 노래가 재치 있게 쓰인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 모차르트는 맨날 술에 취해 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아내 콘스탄체는 집을 나가고 장모인 체칠리아 베버가 모차르트를 격렬하게 비난한다. 깩깩거리는 장모의 잔소리는 이 아리아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장모와 어둠의 상징인 밤의 여왕을 연결한 상상력이 기발하다.
3부는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중 ‘파, 파, 파, 파파게노’다. 파파게노 역의 바리톤과 파파게나 역의 소프라노가 함께 부르는 아리아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다 어느덧 노래가 되어 버린다. 주인공 타미노 왕자를 수행하는 파파게노는 어느 노파에게 자기와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감옥에 갇힌다는 말을 듣고, 마지못해 결혼하겠다고 약속하자 노파는 소녀 파파게나로 변신한다. 그러던 중 파파게나를 잊어버리는데, 이에 절망한 파파게노가 마법의 종을 울리자 파파게나가 다시 나타나고, 두 사람은 기쁨에 서로 이름 부른다. 오페라 한 소절 한 소절에 유머와 풍자가 넘쳐난다. 아리아에서 기악 반주 대신 고수의 북소리가 난다면 판소리처럼 들릴 것 같았다.
마지막 장이다. 차이콥스키, 발레 ‘백조의 호수’ 중 파드되 2인무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행복한 사랑의 표정이라면, ‘백조의 호수’의 사랑은 비극의 표정이다. ‘백조의 호수’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당대 최고의 안무가이던 마리우스 프티카가 무용을 만든 작품이다. 깊은 숲에 사는 독일의 어느 왕자 지크푸리트는 사냥하다가 백조로 변신한 왕녀 오데트를 만난다. 그녀를 초대한 무도회에는 마법사 로트바르트의 딸 오딜이 함께한다. 왕자는 그녀를 오데트로 잘못 알고 그녀와 약혼한다. 나중에야 자기의 실수를 깨달은 왕자가 숲으로 달려가 오데트와 함께 호수에 몸을 던지자, 오데트의 마법이 풀리고 발레는 대단원을 이룬다.
무대에 불이 꺼진다. 주섬주섬 목도리와 외투를 챙기는데 <춘향가> 판소리가 흘러나온다. 환청인가 했다. 다시 불이 켜지더니 무대에 훤칠한 소리꾼이 나타난다. 문득 박동진 명창이 부활한 줄 알았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그의 생전에 만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심청가, 수궁가, 흥부가, 적벽가 판소리 대목이 귓가에 맴돈다. 이어 아리랑 선율이 흐른다.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싼다. 우리의 대표적인 민요이자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에 등재된 아리랑은 고을마다 각자의 아리랑이 있다. 이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하나가 되는 기분이다. 우리의 애환이 담긴 소리가 오케스트라를 타고 웅장한 울려 퍼진다.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국악이 오케스트라와 어울려서 새해의 문을 활짝 연다. 오케스트라는 무대공연과 함께하는 셈이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독립적으로 연주하나 국립오페라와 국립발레의 반주 오케스트라로도 활약하고, 그리고 국악과도 협연한다. 그 정체성을 살려 오페라 <마술피리>, 발레<백조의 호수>, 국악 <판소리>와 <아리랑>이 어우러져서 귀는 물론이요. 눈도 즐겁게 한 콘서트였다.
심포니 바다에서 바라본다. 클래식이 낯설었던 건 진지하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탓이 크다. 눈을 뜨고 귀를 열고 가슴에 새겨보니 서양의 고전음악이나 우리의 국악이 관통하고 있다. 음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삶을 노래한다.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면서 화내거나 인상 쓰는 이 없다. 모두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다. 굳이 고전음악과 국악이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고전음악은 창작에 의한 짜릿한 맛이요. 국악은 오랜 경험을 우려낸 깊은맛이다. 짓궂게 다시 물어온다면 고전음악은 펜글씨요. 국악은 붓글씨라고 답하고 싶다. 심포니는 펜글씨처럼 간결하고 섬세하나 국악은 붓글씨처럼 부드럽고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인간은 아름다운 선율에 영과 육을 실어서 즐거움과 평안을 얻는다. 오늘따라 판소리와 아리랑이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어울려서 천상의 소리처럼 다가왔다. 다음엔 국립심포니가 아닌 ‘국립 아리랑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에서 우리의 소리가 클래식이나 재즈 연주로 새로운 사운드를 빗어내는 무대를 보고 싶다.
첫댓글 유변덕수필가님,
올려주신 수필 <심포니 바다에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랍니다,